그곳과 사귀다
이지혜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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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을 사랑한다.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는 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골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담쟁이 덩쿨마냥 엉켜 있었다. 그래서 술래잡기 하기엔 딱이었다. 골목에 있는 모든 집들의 대문들이 우리의 작은 몸을 숨겨 주었다. 때로는 담장 위로 송이 송이 얼굴을 내민 장미가 맞아주었고 때로는 석류나 무화과가 숨어서 고개를 조금 빼내고 술래가 오나 안오나 이리저리 살피는 날 흐뭇하게 굽어보기도 했다. 물론 다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운이 좋지 못하면 시끄럽다는 할머니의 원성이나 떠들어서 잠을 못 자겠다는 아저씨의 박대를 들어야 했다. 그렇게 어릴 때 동네 골목엔 추억이 많다. 놀면서 담장 마다 내가 찍었던 손바닥이나 디뎠던 발자국 만큼이나 알알이 여물어 있다. 그랬던 나이기에 서울에 와서 가장 많이 아쉬웠던 것도 내가 사는 주변에 골목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파트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가 있을 뿐 골목이 없다. 어릴 때 골목을 걸었던 추억을 떠올리면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를 걷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깨닫게 된다. 어릴 때의 골목을 떠올려보면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건 그 곳에 있던 집들이 하나같이 다 달랐다는 사실이다. 담장 위로 보이는 나무들도 그랬고 지붕의 모습도 그랬으며 층수도 마찬가지였다. 골목의 집들은 저마다 고유의 개성을 간직한 채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 집은 저렇게 생겼구나, 흐음 이 집은 이런 나무를 키우네 혹은 왜 저 집은 빨래를 저렇게 널까 하는 식으로 도저히 풀 수 없는 호기심을 보는 집마다 품어가며 걸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더러 피아노 소리가 담장 밖으로 들려오면 기대어 듣기도 하고 어떤 집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엔 우리 집도 오늘 저걸 먹었으면 좋겠다 하고 절로 침을 꼴깍 삼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골목을 걷는 건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길었으면 할 정도로 즐김과 누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는 다르다. 아무리 걸어도 똑같은 모습. 더구나 그 어떤 사람의 소음이나 내음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회색의 담벼락은 죽 놓여진 거리를 걷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거리는 즐김과 누림의 거리가 아니라 그대로 될 수 있는 한 빨리 줄여야 할 거리가 된다. 소거말고는 다른 의미라고는 없는 거리가 된 것이다. 전국에서 가장 빨리 걷는 게 서울 사람이라고 하는데 서울 사람들이 그렇게 빨리 걷게 된 건 어쩌면 골목이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골목이 사라졌듯 사실 우리 주변엔 많은 공간들이 사라진다. 내가 사는 동네만 보아도 자주 아침에 먹을 빵을 사러 갔던 단골 빵집이 사라졌고 만화책을 주로 빌려 보던 대여점도 사라졌다. 서점은 여기 살 때 부터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음반 가게 역시 마찬가지다. 학생 때 이후로 서점과 음반은 내 일상의 시간을 가장 많이 잡아 먹던 가게들이었는데 이제는 볼 수 조차 없게 되었다. 공간의 사라짐은 단순히 어제 있던 것이 오늘은 없다 그 정도만이 아니다. 골목이 사라지면 그 골목과 공존하던 나의 모든 추억과 경험들이 사라진다. 서점과 음반 가게가 사라지면 그 곳을 통해 만났던 책과의 인연, 음반과의 인연 역시 사라진다.  아마도 내가 이지혜의 '그 곳과 사귀다'를 선택했다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란 무엇보다 공간과 더불어 호흡하는 존재이며 하나의 공간이 삶의 자리에 차지한 의미 역시도 생각보다 결코 적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 곳과 사귀다' 는 노래방, 놀이터 혹은 영화관과 같은 우리가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50개의 공간에 지은이가 느낀 감정을 가볍게 터치하듯 써내려간 책이다. 그녀는 말하는 공간과 결부된 추억을 말하고, 가지게 된 인연을 말하며, 받게 된 위로를 말한다. 책에 담겨진 건 그렇게 개인적인 이야기들이지만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공간이 사람과 얼마나 많은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지 보게 된다. 공간이라는 것이 단순히 용도를 넘어 인격적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지혜의 이 책은 공간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도록 한다. 요즘은 힐링이 대세다. 이지혜는 그 힐링을 공간으로부터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공간과 사귐, 즉 인격적 교감을 하려는 열린 마음만 있으면 말이다. 이 책은 작고 가볍다. 그래서 가지고 다니면서 어디서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을 가지고 지은이가 말하고 있는 공간에 가서 한 번 읽어보면 어떨까? 아마도 그러면 이 책이 좀 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어쩌면 저자와 대화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덕분에 공간에 대해 마음을 열고 새롭게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 깨닫게 되었다.

 

 공간도 사람처럼 살고 죽는다. 이 책에 실린 50개의 공간을 보니 골목이나 음반점, 오락실등 내가 많은 추억을 보낸 낯익은 공간 몇몇이 빠져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공간들은 죽었다. 그리움으로 애타는 우리들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서부 영화의 주인공처럼 추억의 유물만을 남긴 채 석양 속으로 쓸쓸히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공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추억은 추억으로만 간직하고서 슬프지만 다가 온 변화에 적응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빈 자리를 메운 새로운 공간들과 또 새롭게 인연을 이어가면서 말이다. 이런 식으로 세월이 또 흐르다 보면 이 책에 실린 50개의 공간들 중 몇몇도 언젠가 분명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비워진 그 자리를 또 다른 새로운 공간들이 채워나갈 것이다.

 

 한 10년 뒤에 작가가 또 한 번 '그곳과 사귀다'를 써 주면 좋겠다. 그 때의 남은 공간과 사라진 공간들을 보면서 내게 찾아온 '변화'의 정도를 가늠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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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3-01-31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런 책들은 어떻게 발견하는거에요, 헤르메스님?+_+ 좋은 책 소개해줘서 고맙습니다(꾸벅).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

ICE-9 2013-02-05 22:34   좋아요 0 | URL
SHINING님이 이렇게 말씀해주시다니 더욱 기쁘고 감사하네요. 제가 이 책을 통해 받았던 힐링을 SHINING님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희선 2013-02-01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골목길 하면, 갑자기 개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듭니다
골목길에서 있었던 일은 아닌데, 중학생 때 학교에 가는 길에 개를 만났어요
그길 평소에는 잘 다니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날은 그냥 갔다가 그렇게 됐죠
개가 저를 노려보는 듯해서, 개를 보면서 뒤로 걷다가 넘어졌어요
아무래도 그때 기절했나봐요 그 길을 지나던 아줌마가 일으켜준 것 같아요
그러고서 학교에 가기는 했는데,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별일없이 살아있습니다

헤르메스 님은 이것저것 알고 싶었던 게 많은 어린이였군요
(지금도 그런 듯하고...)
저는 어렸을 때 제가 어땠는지 거의 생각나지 않아요


희선

ICE-9 2013-02-05 22:38   좋아요 0 | URL
와! 어떻게 딱 맞추셨네요. 정말 호기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캐물어서 자주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었죠^ ^ 어릴 때 제가 가장 열심히 보았던 책이 어린이 백과사전이었다면 말 다했겠죠. 너무나 많이 봐서 책이 거의 떨어질 정도였어요. 저는 골목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참 많습니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니 어쩜 당연하겠지요. 거기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또 어떻게 생각하는지 많이 엿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예전엔 그런 교류가 흔해서 소중한지 잘 몰랐는데 서울에 올라와보니 그런 교류들이 정말 소중한 것이더군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누려볼 수 없는 아이들이 어쩐지 좀 안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추억할 공간들은 과연 어떤 것들일까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많이 적을 것 같네요. 생각해보면 추억의 풍성함은 떠올릴 공간의 풍성함과도 비례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