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러시아 할머니의 미제 진공청소기 NFF (New Face of Fiction)
메이어 샬레브 지음, 정영문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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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모스 오즈에 이어 우리나라에 또 한 명의 이스라엘 작가가 소개되었다. 그가 바로 메이어 샬레브다. 1948년 이스라엘 나할랄에서 태어난 그는 텔레비젼과 라디오등에서 일하다가 1988년 첫 작품 '푸른 산'으로 데뷔하였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는 소설뿐만 아니라 논픽션이나 아이들 책까지 수많은 작품들을 집필해왔는데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내 러시아 할머니의 미제 진공청소기'라는 것으로 2011년에 나온 그의 가장 최근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주목하게 된 건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 소설이 아모스 오즈 외에는 소개되지 않았던 이스라엘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의 번역자다. 혹시 얼마전에 나온 '어떤 작위의 세계'란 소설을 읽어보셨는지? 더없이 독특한 문체에 소설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그 정체불명성으로 오히려 더욱 고유의 가치를 지녔던 그 소설의 작가 정영문이 바로 이 소설의 번역가이다. 그 때문인지 전혀 다른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어쩐지 정영문적 분위기의 내음을 맡을 수 있었는데 특히나 그렇게 다가왔던 건 이 소설 역시도 별다른 서사가 없었던 '어떤 작위의 세계'처럼 별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물론 소설이지만 사실은 연대기에 가깝다. 말하자면 작가 메이어 샬레브와 그 가족의 역사인 것이다. 여기의 이야기는 지극히 자전적이다. 그는 아예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려는 듯 자기 가족의 사진들까지 함께 수록하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별 다른 사건이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보통 가족들이 그렇듯이 남의 이목을 확 끌만한 드라마틱한 사건들은 일상에서 그리 잘 일어나지는 않는 법이니까.

 

 그런데 메이어 샬레브가 굳이 이렇다할 굴곡도 없이 평범했던 삶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란 형태로 만들어야 했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할머니 때문이다. 더없는 개성으로 무장한 할머니의 존재를 소설이란 형태로 영원히 각인시켜 시간속에 풍화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의 잡설이 길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메이어 샬레브는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의 할머니가 가지는 고유한 존재 가치를 이 소설에 담으려 했는데 그래서 다른 그 어떤 소설로도 대체 불가능해 보였던 '어떤 작위의 세계'를 쓴  소설가가 이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더없이 적역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아무튼 정영문의 번역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내겐 이 소설을 주목할 가치는 충분하다.

 

 잠시 환기를 위해 여기서 밑줄을 그을 게 있다. 그건 '고유성'이다. 그러니까 샬레브의 할머니처럼, 그리고 정영문 작가의 '어떤 작위의 세계' 소설처럼, 대체 불가능한 고유의 존재 가치를 나타내는 그런 고유성이다. 왜 메이어 샬레브는 이것을 담으려 했던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 소설에 주목하게 된 세번째 이유와 관련이 있다. 그건 바로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나할랄' 이다. 나할랄은 키부츠와 같은 공동체다. 역사도 비슷하다. 그러니까 1930년대. 이스라엘 유태인들 사이에 시오니즘의 바람이 대대적으로 불어닥치고 그 영향으로 많은 유태인들이 쏙쏙 이스라엘로 돌아온다. 바야흐로 초기 이스라엘 정착 시대가 온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은 두 개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정착했다. 그것이 바로 키부츠와 나할랄이다. 하지만 1936년에 생겨난 나할랄은 키부츠와 조금 달랐다. 키부츠는 경작할 땅이 자기들 소유였으나 나할랄은 그 토지의 소유권이 국가에게 있었다. 즉 국가로 부터 토지를 불하받아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키부츠는 뭐든지 집단으로 경작하고 나누어 가졌으나 나할랄은 개인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즉 자기가 가꾼 것은 자기가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나할랄은 키부츠 보다 더욱 농업 중심적이 되었다. 키부츠는 농사에서 수공업까지 생산 방식을 다변화시켜갔으나 나할랄은 계속 농업만 고집했다. 그래서 더욱 세파에 물들지 않고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런 나할랄이다.

 

 바로 이러한 나할랄이 이 소설에서 전면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주목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먼저 소개된 작가 아모스 오즈는 키부츠 출신이었다. 그의 오래된 키부츠의 경험은 비록 오래전에 거기로 부터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작품에다 키부츠적 경험의 흔적을 남겼다. 쉽게 말해 아모스 오즈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아, 이런게 키부츠적인 것이로구나.'하는 유추가 가능했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 생겨났으며 이스라엘 정신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나할랄이 흔적이 드러나는 작품도 보고 싶었다. 작품을 통해 이런 것이 나할랄이로구나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이 작품을 만난 것이다. 샬레브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스라엘 초기 정착민이다. 나할랄이 세워질 때 부터 같이 있어 온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의 삶은 그야말로 나할랄적 정신으로 충만하다. 말하자면 고유한 나할랄을 느껴보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가족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주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메이어 샬레브는 이스라엘의 원초적 정신을 그 나할랄에서 찾고 있다. 자신이 태어났고 온 생애를 보내는 가운데 어느새 체화되어버린 나할랄을 말이다. 그는 나할랄이 바로 자신의 할머니라고 생각한다. 그 할머니만이 가진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개성. 세속적 가치에 물들지 않는 순수한 신념이 나할랄이고 그것이 자신이 사랑해야 할 이스라엘이라고 느낀다. 물론 그것이 다 좋지만은 않다. 할머니의 모든 점이 가족에게 다 환영받지 못했듯이. 거기엔 누그러뜨러야 할 고집도 덜어내야 할 막무가내도 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기대한 것만큼 소출하지 못하는 땅이라 해도 그 땅을 버릴 수 없는 농부처럼 말이다. 그것은 단단한 기억으로 결부되어 있고 바로 그 연대된 기억이 자신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기에 그렇다. 간직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선택은 없다. 그것이 나할랄이고 이스라엘이다. 그는 그렇게 할머니를 사랑하고 이스라엘을 사랑한다. 나할랄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 중의 하나인 '모샤브' 그대로다. '모샤브'는 어느 것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각자의 소임이 있고 그 나름대로의 고유의 운명이 있는 것이니 어떤 작은 것 하나라도 함부로 내치거나 방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모샤브'다. 그것은 대지가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이는 것 처럼 무한의 긍정이다. 그 모샤브 정신에 의해 할머니는 미국으로 이주한 남편의 형이 보내준 진공청소기를 버리지 않는다. 비록 잘 사용하지도 않고 거기다 결국 고장까지 나서 이제는 사용만 하면 오히려 바닥을 더럽히더라도 말이다(할머니는 무엇보다 깨끗한 것에 집착한다. 청소는 그녀의 지상명령이다. 할머니의 이러한 깨끗함에 대한 집착을 때묻지 않은 이스라엘 고유한 이념에 대한 추구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할머니에게 있어 효용성은 존재의 쓸모를 결정하는 가치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효용성을 뛰어 넘어 그 존재 자체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것을 다만 금지된 욕실에 보관할 뿐이다. 그것도 무려 40년 동안이다. 어떤 배쳑도, 버림도 없는 금지된 욕실은 그야말로 '모샤브'로 충만한 영역이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그냥 버려야 할 물건들이 한없이 보관되어 있다. 쓸모는 없을지 몰라도 그 자체로서 가족들과 추억과 결부되어 고유의 존재적 가치를 가지는 물건들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금지된 욕실'은  지금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이스라엘 과거를 상징하기도 한다. 일종의 이스라엘 흑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메이어 샬레브는 모샤브를 말하는 것이다. 즉 그 어떤 과거든 버리지 말고  과거의 잘못을 똑똑히 기억해 둔 상태로 다 안고 가자는 것이다.

 

 이러한 모샤브는 과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건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게 바로 전기청소기가 의미하는 바이기도 하다. 전기청소기는 그 금지된 욕실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태평양을 건너 온 것이다. 우리는 이 전기청소기의 타자적 특성 그리고 공간을 같이 점유하고 있다는 것에서 어쩔 수 없이 현재 이스라엘과 분단을 이루며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을 떠올리게 된다. 정말로 전기청소기는 그 팔레스타인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전기청소기를 할머니는 당신이 그토록 집착하는 깨끗함에 오로지 방해물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않는다. 40년간이나 살뜰하게 보관한다. 후에 그 전기청소기를 만든 회사의 대리점주를 아버지로 두고 있는 딸이 와서 높은 가격에 팔라고 해도 응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매매란 존재의 영혼을 버리는 것과 같다. 존재의 가치는 현실적인 이득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번 나와 함께 한 이상 대지와 농부가 그렇듯이 운명적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모샤브에 충실한 할머니의 신념은 그렇다. 메이어 샬레브는 이스라엘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보여주는 배척은 원래 이스라엘을 이루는 중요한 신념인 모샤브에 위배되는 것이라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샤브를 통한 신의 명령은 선민의식에 빠져 타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은 하나까지도 나와 공동 운명체라는 생각으로 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은 여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메이어 샬레브는 이러한 귀 기울임을 요청한다. 이스라엘이 진정 시오니즘을 주장하고 싶으면 초기 정착민들이 믿었고 삶의 일부분으로 체화시켰던 '모샤브'부터 실천하라는 것이다. 할머니는 욕실을 금지시켰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다. 벽은 다만 구획일 뿐이었고 문은 언제나 열려있었다. 이것은 샬레브가 이스라엘에 보내는 중요한 상징인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이야말로 타자의 열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내 러시아 할머니의 미제 진공청소기'는 이러한 소설이다. 감상을 말하자면 소설은 좋았다.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어도 잔잔한 가족의 일상은 언젠가의 내 가족들마저 떠올리면서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비유하자면 따스한 온천에 한가롭게 잠겨있는 곰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이건 소설의 분위기를 잘 살린 번역 덕분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읽고 싶었던 나할랄 이야기라서 방금 전 갓 잡은 연어를 먹은 곰처럼 든든하기까지 했다. 이만하면 곰으로써 최대의 행복이나 다름없다. 한 편으론 또 욕심이 생긴다. 더 많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들려주는 작가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이러한 곰의 소망은 언젠가 이루어질까? 문득 어느 날 강을 거슬러 올 또 한 마리의 연어와도 같은 이스라엘 작가를 곰은 한가롭게 누워서 꿈꾸고 있다. 아, 생각만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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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2-22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가 아주 특이함의 극치를 달리는군요. 저는 엊그제 이스라엘 산(?) 영화를 한 편 보려고 했는데 애석하게도 볼 수 있는 곳이 없어 그만두었습니다만 이스라엘 산은 영화도 책도 다 귀하군요. 이제 한국에 두 명 소개되었다니. 박한 거 같기도 하고, 그 나라 자체에 작가라는 직업이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을 거 같구요. 정영문 번역이라니... 와우!! 이스라엘에 관심이 가는 군요. 이 소설 찜할게요. 헤르메스님 굳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