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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평점 :
'프라하의 묘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해 봅니다.
사실은 테리 이글턴의 '보이지 않는 것의 날인'이란 책에서 읽은 문구입니다.
그건 거기 실린 한 챕터의 제목인데요,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건 그냥 수사학적 말장난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정말 같기도 해요. 우리가 아는 이탈리아란, 거기에 살고 있거나 직접 가본 사람은 빼고, 그저 텍스트로 만나본 이탈리아 밖에는 없으니까요. 책이든, 사진이든, 영화를 막론하고 말이죠. 네, 우리가 만나는 이탈리아는 어디까지나 그 매체가 무엇이든 누군가에 의해 재현된 것에 불과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따지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탈리아란 순전히 텍스트 위에만 존재하는 환영적 대체물이나 다름없는 것이죠. 진짜 이탈리아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직접 가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설령 진짜 이탈리아를 간다고 해도 이탈리아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죠. 정말은 다만 '확인'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가 익히 보고 들었던 그렇게 집적된 수많은 정보들의 확인. 그동안 글이나 사진으로 만났던 것의 실체를 확인하는 정도겠죠. 그것이 바로 실제 이탈리아를 만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매개로 알게 된 '이탈리아'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 뿐이니까요. 쉽게 말하면 그가 정답인지 아닌지 답안지를 확인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네요. 관광이 이내 식상해지고 별 재미없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결국 어떻게든 나만의 진짜 이탈리아는 만나볼 수 없으며 끝내 체념 속에서 확인하게 되는 건 나는 도저히 '텍스트화된' 이탈리아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뿐이니까요. 그래서 관광객들은 어디를 가든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사진 찍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무의식적으로 실재(the real)을 만나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 도달한 실재마저도 온전히 내것이 될 수 없다는 질투심(아시다시피 질투심은 내 무력함의 다른 표현입니다.)에 서둘러 또 다른 텍스트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해서 찍은 사진은 바로 내가 매개한, 나만의 텍스트가 되니까 말이죠.
'이탈리아는 없다'라는 말은 우리가 사실은 모조리 텍스트화된 상황으로 부터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또한 실재와 환영,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자아도, 가치관도, 취향도 모두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해 매개된 구성물일 뿐입니다. 내가 나를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나요? 그저 모든 것이 혼재된 뒤죽박죽의 텍스트 덩어리 말고는...
움베르토 에코의 전작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이 그랬죠. 주인공은 처음부터 자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사고로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참 두뇌는 이상하기도 해요, 자신이 읽은 것만은 오롯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의 영혼은 한 치 앞도 헤아리기 어려운 안개 속인데도 언젠가 읽었던 소설이나 시와 같은 이런 텍스트들만은 갓 잡은 활어처럼 뇌리에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잃어버린 과거를 유추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추리하며 누더기가 된 자아를 기워나갑니다. 뭐가 진실인지는 당연 몰라요. 사실 인간이 텍스트 너머의 진실을 알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저 그런 텍스트가 만든 한계 안에서 최대한 근사치에 가까운 진실을 붙드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바라 본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바로 그러한 이야기였다는 것이죠.
이는 그 전작 '바우돌리오'와는 또 어떻게 연결될까요? 사실 이 바우돌리오는 '프라하의 묘지'의 주인공 시모니니의 원조격인 인물입니다. 십자군 원정이 한창 벌어지는 시기를 무대로 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바우돌리오는 자서전을 써 나갑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깊은 산골의 무지렁이 농부의 헛것이 보이는 모자란 자식에 불과했던 바우돌리오는 그 문서에서 놀랍게도 당시 유럽에 있었던 모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마다 개입하여 사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역사를 만들어내었음을 밝힙니다. 실제 인물들과 실제 역사적 사건들이 교묘하게 엮이어 있어 읽는 이는 얼른 바우돌리오의 말이 과연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해낼 수 없습니다. 바우돌리오의 서술은 너무도 능숙해서 지금 읽고 있는 것이 소설임을 얼른 잊는다면 완전 진짜 사실처럼 들리니까요. 더구나 중세 역사하면 또 움베르토 에코 아니겠습니까? 완벽하게 재현된 거기서 '이건 가짜야'하고 우리가 찾아내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따르죠.
하지만 또 누가 알겠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누군가가 쓴, 그렇게 텍스트화된 역사 뿐이고 정말은 그것과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어쩌면 진짜 역사는 바우돌리오의 말대로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소설과 역사가 그리 잘 구분될 수 있을까요? 만일 이 지구에 다시금 진시황의 분서갱유 같은 일이 일어나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책이 다 사라지고 오로지 바우돌리오만 남게 된다면 그 후의 사람들은 바우돌리오를 유일하게 중세 역사를 설명하는 역사서로 믿는 것도 그리 상상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죠. 그와 똑같이 우리가 철썩같이 믿고 있는 중세 역사서가 사실은 그 때도 움베르토 에코 같은 이가 있어 당시 사람들을 재밌게 하려고 쓴 소설일지 모르고 말이죠. 정말 누가 알겠어요? 그 역사서가 쓰여진 그 때 그 시간으로 가서 목격하지 않는 한, 과연 누가 소설과 역사를 딱 구분해낼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더없이 확인하게 되는 겁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바우돌리오' 이후 '프라하의 묘지'에 이르기까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를....
그건 이것입니다. 실재와 환영의 경계 따위는 없습니다. 소설과 역사가 분리될 수 없듯이 진실과 허위의 경계 따위도 없습니다. 아니 문제는 그걸 구분할 수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더욱 인식해야 할 확실한 사실은 오로지 이것.
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텍스트들로 교직된 세계를 걸어가는 또 하나의 '워킹 텍스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프라하의 묘지'는 그런 노선을 취한 것입니다.
이 소설은 히틀러로 하여금 '아우슈비츠'를 만들어서라도 유태인 말살을 결심하게 만든 문건, 지금까지 많은 반유대주의에게 정당성을 가지게 해 준 문건, 분명히 하나의 텍스트로 실재하는 문건인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과 사실은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소설입니다. 소설의 주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문서 위조에 능숙한 재능을 가진 시모니니가 어떻게 해서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이란 위조 문서를 만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말하자면 그 기원을 제대로 밣혀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의 허위성을 드러내는 것이죠. 그러니까 텍스트에 텍스트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에게 있어선 이것이야 말로 가장 제대로 된 대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텍스트의, 텍스트에 의한, 텍스트를 위한, 워킹 텍스트들이니까요.
그런데 사실 이 소설은 소설이라 부르기에도 좀 애매합니다. 여기서 에코에 의해 순수하게 창조된 인물은 오직 단 하나 주인공 시모니니 밖에는 없기 때문이죠. 나머진 다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서라는 텍스트에 기재된 사항이라는 것이죠. 에코는 당시의 문헌, 신문, 역사서나 회고록 혹은 전기에 나와있는 인물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이 90%, 허위가 10%입니다. 참으로 역사 르뽀와 소설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셈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과 같은 19세기에 유행한 대중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알멩이는 실재인데(물론 어디까지나 텍스트 상으로만) 껍질은 허위인 것이죠. 더구나 번역자의 후기를 보면 각 나라의 사정에 맞게 19세기적 대중 소설의 문체로 번역해 줄 것을 특별히 부탁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에코는 독자들이 무엇보다 옛 소설의 형태로 받아들이기 원했습니다. 진실이지만 허위의 가면을 쓰고 그 가면 그대로 받아들여주기를 원한 것이죠. 왜 이렇게 했을까? 단순히 옛 소설에 대한 향수나 느끼면서 느긋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한 배려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실 제가 느끼는 움베르토 에코는 그리 친절한 작가는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쓴 이유는 제 생각입니다면 역시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건 '있는 것은 다만 오로지 텍스트 뿐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죠.
이러한 역사와 소설의 모순된 뒤틀림은 사실 앞서도 말했듯 역사와 소설, 진실과 거짓, 실재와 환영을 그리 쉽게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에 다름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텍스트들 뿐이며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겐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텍스트의 중력으로 가득한 '이벤트 호라이즌'을 홀연히 벗어날 수 있는 인식의 날개가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완전한 실재 혹은 진리가 내뿜는 압도적 열기에 바로 흐물거리며 녹아버릴 밀랍으로 된 이카루스의 날개 뿐이겠죠.
그러므로 이 소설은 우리에게 하나의 윤리적 태도를 요청합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것이 텍스트 밖에 없으며 우리 존재의 진실은 다만 '워킹 텍스트'라는 자각을 가진다면 필연적으로 도출할 수 밖에 없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건 쉽게 말해 겸손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믿는 것이, 혹은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완벽한 진실이 아님을 아는 것. 그렇게 나란 존재는, 내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취향까지도 모두 실재와 환영이 뒤섞인, 진짜와 가짜가 마구잡이로 혼재된, 본래와 이식된 것이 아메바처럼 융합되어 있는, 잡탕찌개임을 아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음모론의 계보를 거꾸로 거슬러 훑는 이 소설이 우리들에게 요청하고 있는 태도입니다. 음모론의 보편적 형식이 빛나는 이유를 말하는 소설의 이와 같은 부분에서 이 책이 왜 그와 같은 태도를 요청하는지는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의구심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왜 나에게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는가?(그렇게 엄청난 행운은 고사하고 그저 소박한 바람이라도 이룰 수 있으면 좋으련만 왜 나는 그마저도 얻지 못하는가?)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도 내리는 복이 왜 나한테는 오지 않는가? 사람이 불행한 것은 그 자신이 무능한 탓도 있으련만 아무도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을 불행하게 만든 죄인을 찾아내려고 한다. 뒤마는 욕구 불만에 빠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실패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천둥산 꼭대기에서 열린 모임에서 어떤 무리가 그대의 몰락을 계획했다는 식으로...
따지고 보면 뒤마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았다.(...) 바로 그 점에 비추어 나는 그 시절에 벌써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어떤 음모를 폭로하는 문서를 만들어서 팔아먹으려면 독창적인 내용을 구매자에게 제공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구매자가 이미 알아낸 것이나 다른 경로를 통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해야 한다. 사람들은 저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믿는다 음모론의 보편적 형식이 빛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P. 146 ~ 147)
시모네 시모니니는 프라하의 묘지에 가본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유태인을 만나본 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태인을 증오했습니다. 그가 그랬던 이유는 할아버지의 증오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죠. 우리의 증오란 그러합니다. 대부분 사실은 모두 매개된 텍스트에 불과한데도 우리는 마치 우리가 직접 느끼고 경험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짜로 감각하고 경험한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의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조차 사실은 사회적으로 정해진 일정한 형식을 매개해서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해석한, 정해진 규칙으로서의 '말'을 알 뿐입니다. 당신이 보는 색깔도 마찬가지죠. 세상에 진짜 빨강이 있을까요? 아니 아예 우리 세계에 색깔이 있을까요? 완전히 독립된 실재로서 존재하는 색깔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진실은 우리가 모두 알지 않나요? 우리가 알고 있는 색깔이란, 그렇게 눈에 보이는 색깔이란 빛에 의해 덧칠해진 시각적 정보를 우리의 두뇌가 해석한 영상일 뿐인 것을. 어디까지나 진짜 색깔이 아닌 매개에 의한 하나의 텍스트 뿐인 것을. 사실은 개야말로 진실된 세상의 색깔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은 무채색의 세상인데 우리가 멋대로 색깔이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렇게 정밀히 따지고 든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정말로 텍스트 뿐입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에게 정말로 놀라운 것은 바로 '말'이 있다는 사실 자체다'라고 말했죠. 벗어날 수도, 달아날 수도 없습니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의 주된 소재이기도 한 '안개'야 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며 세상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그 한계를 인정해야 하고 바로 그래서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재하는 프라하의 묘지입니다. 이렇게 프라하에는 실제로 유태인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프라하에 오는 관광객이 꼭 한 번은 들르게 되는 관광명소이기도 하지요. 원래부터 유태인은 유럽인들에게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이곳 프라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묘지가 있는 곳은 그렇게 유태인들이 격리되어 살던 곳이었습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유태인들은 아무 곳에나 묘지를 만드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할 수 없이 자신이 사는 곳에다 묘지를 쓸 수 밖에 없었죠. 그것이 바로 저렇게 많은 묘지들이 하나의 군집을 이루게 된 이유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프라하의 묘지 자체가 유태인들이 받았던 박해 혹은 고난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실재(the real)로서 말입니다. 그 어떤 허위의 기입이나 조작으로 지워버릴 수 없는 하나의 얼룩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당신이 실제로 저기에 가본데도 들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 '프라하의 묘지'는 당신의 틈입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언어가 매개되지 않는 경험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재란 그렇습니다. 영원히 당신이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당신의 손을 아무리 내뻗어도 만질 수 없는 절대적으로 저- 너머의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좁은 틈 앞에서 기껏해야 사진을 찍거나 강 밖에서 공무도하가를 부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