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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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의 성격상 결론이나 일종의 해결법이 약한 점은 아쉽지만 고통에 대한 단계적이며 체계적인 분석이 인상적이다. 모든 고통이 다 같은 고통일 수 없다는 사실과 같은 고통이 같은 해법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고통은 근본적으로 동행할 수 없다는 인정과 고통과 피해를 가르는 방식 또한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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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21-06-2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해자를 고통에 찬 사람으로만 재현하는 것은, 그가 피해자로서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로만 보이게 한다. 이것은 그에게서 말도, 삶도 모두 박탈하는 폭력이다. 피해자는 고통받는 사람이기에 오로지 고통스러운 모습만 보여야 한다. 그에게는 고통 이외의 다른 일상이 없다. 아니, 고통 때문에 돌아갈 일상이 없는 존재이기에 그는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하나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밥도 맛있게 먹어서는 안 된다. 그는 누군가와 데이트를 해서도 안 되고 여행을 가서도 안 된다. 고통 이외에 다른 것을 말해서도 안 된다. 고통을 받는 그는 화려한 옷을 입어서도 안 된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에게는 일상이라는 삶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에게 허용되는 것은 오로지 ‘죽음‘이다. 세상이 붕괴된 죽은 자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가 지켜야 하는 ‘일관성‘이다.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피해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피해자는 피해로 인해 일상이 파괴된 사람이고 그 일상의 파괴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다. 그런 데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그가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의 반증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피해자에 대한 연민은 고통을 당한 사람‘답게‘라는 가면이 벗기지는 순간 순식간에 그에 대한 조롱과 공격으로 전환된다.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팔 때는 ‘공감‘이나 ‘연민‘, ‘연대‘ 나˝인류애‘ 같은 말로 포장하기도 쉬웠다. 상업적으로 포장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어필할 수 있었다. 동의하지 않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기도 쉬웠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고통을 사회에 알리고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면 비난을 피해갈 수 있었다.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 타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자신에 대한 윤리적 면피를 할 수 있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마련할 수 있었다.

고통을 겪는 이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자신이 고통에 차서 절규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던 사람들이 이런 시장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이야기했을 때 주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고 그 자신의 고통을 위로받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선 이러한 주목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야기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끌 있는 포맷이 만들어졌고 그 공식에 따라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복제되듯 생산되었다. 고통을 겪는 자 신에 대한 관찰과 성찰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맞춰진 틀에 따라 이야기를 했을 때 훨씬 효과적이었다.

고통을 파는 이야기의 포맷은 피해자의 피해자됨과 비참함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포르노처럼 보여줬다. 이런 이야기들이 시장의 주목을 받으면서 경쟁이 격화되었고, 고통의 표현 강도도 더욱 높아져만 갔다. 고통을 파는 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고통의 맥락이나 이유. 결과가 아니라 고통의 강도가 되었다. 더 강하게 몸부림쳐야 했고, 더 처절하게 울부짖어야 했다.

무엇보다 피해자는 모든 것을 다 드러내야 했다. 그래야 피해자였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지부를 다 까발려서 보여줘야 했다. 그걸 ‘용기‘라고 부추겼다. 피해자에게 보호되어야 할 인격, 감추어져야만 보호될 수 있는 존엄은 없었다. 그것까지 드러내야지만 피해자‘로 인정되었다. 피해자는 자신의 존엄을 파괴할수록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포르노처럼 자기를 드러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인정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끌 수 없었다.


책 내용 발췌.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노승영.박산호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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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한 번역은 있을지 몰라도 완벽한 번역은 존재하지 않겠구나, (여느 직업이든 그렇지만) 상당히 복합적인 고충이 있는 직업이구나 싶다. 그럼에도 각자가 느끼는 직업적 고취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며 현실적인 충고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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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21-06-2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을 일컫는 영어 단어 ‘트랜슬레이션’의 어원은 라틴어 ‘트란슬라티오’인데, 이 단어는 ‘건너서’를 뜻하는 ‘트란스’와 ‘트란스페레’의 과거분사형이다. 그렇다면 ‘트랜슬레이션’은 ‘건너편으로 나르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과연 무엇을 무엇의 건너편으로 나른다는 것일까? 언어의 장벽이라는 강 저편과 이편에 각각 저자와 독자가 있다. 나는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가이니까 강 저편은 (저자가 있는) ‘영어의 땅’이고 강 이편은 (독자가 있는) ‘한국어의 땅’이다. 독자가 저자와 대면하는지, 텍스트와 대면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독서를 (저자와 독자가 나누는)일종의 대화로 보기로 한다. 번역가는 사공이다. 그의 임무는 저자와 독자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사공은 한국어 땅의 독자를 영어 땅에 데려가 저자를 만나게 해야 할까, 영어 땅의 저자를 한국어 땅에 데려와 독자를 만나게 해야 할까?

첫째,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가는 경우, 독자는 낯선 땅에 발을 디딘다. 풍경도 풍습도 물건도 낯설기만 하다. 독자는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저자를 우러러본다. 저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고 싶다. 저자의 말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다. 저자가 바라는 세상을 고스란히 보고 싶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내 타이다. 낯선 진실이 있고, 나는 이방이다.

둘째,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오는 경우. 저자는 혈혈단신으로 낯선 땅을 밟는다. 저자는 자신의 말이 지독한 사투리처럼 들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평소처럼 말하면 독자는 저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저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을 다듬고 독자에게 친숙한 예를 든다. 자신의 땅이기에 독자는 주눅 들지 않는다. 나를 이해시키라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은 당신 책임이라고 말한다. 입증의 책임은 저자에게 있다.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데려가는’ 번역을 직역, ‘데려오는’번역을 의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리는 손님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손님은 자신을 건너편으로 데려가 달라고 요구하고 어떤 손님은 건너편 사람을 데려와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사공은 배를 한 번만 몰 수 있기에(저작권 때문에), 손님들의 제각각 요구를 하나로 모아 결단을 내려야 한다. 마치 손님이 한 명인 것처럼. 이 가상의 손님을 ‘독자’라 한다.

그런가 하면 나루터에 배를 대고 한쪽 땅에서 둘을 대면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 한가운데 나룻배 위에서 상봉시키는 방법도 있다. 사공은 그때그때 솜씨를 발휘하여 배를 이쪽으로 몰았다가 저쪽으로 몰았다가 한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배가 어느 나루터에 닿는지에만 관심을 쏟는다. 하지만 초짜 사공이 영어 땅으로 향하면, 독자를 엉뚱한 나루터에 내려주기 십상이다. 물길도 모르고 저자가 어디서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그냥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배를 젓는다. 이를 일컬어 ‘영혼 없는 직역’이라 한다. 저자가 어떤 의도로 문장을 썼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영어 단어와 한국어 단어를 짝짓는 것이다. 이에 반해 게으른 사공이 한국어 땅으로 향하면, 배를 나루터 아닌 곳에 대충 접안하기 쉽다. 이를 일컬어 ‘얼렁뚱땅 의역’이라 한다. 문장 구조를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서 대충 감으로 끼워 맞추는 것이다. 언뜻 보면 그럴듯하지만 원문과 대조하면 터무니없는 오역도 곧잘 발견된다. 강호에서 벌어지는 번역 논쟁은 영혼 없는 직역과 얼렁뚱땅 의역의 사이버 논쟁인 경우가 많다. 부디 경험 많고 부지런한 사공을 만나시길.


책 속 한 문단을 소개한다. 다소 길지만 번역의 핵심을 관통하는 글 같다.
 



글쓰기에 대한 책들을 적지 않게 읽었다. 대개는 작가의 아성에 홀려서였고 가끔은 그래,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자 하는 치기였으며 언젠가는 정말 이 책을 읽으면 글을 더 잘 쓰게 될까 싶은 의문과 더불어 얼마간의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중 몇은 분명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글도 있었지만 대개는 체화하기 어려운 두루뭉술한 태도를 취하거나 자기 자랑이나 푸념을 하는데 그치는 식이었다. 이는 -당연한 말이지만- 유명 소설가나 평론가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배움과 가르침은 전혀 다른 행위이며 선수와 코치는 길이 다르니 머리로는 이해를 하면서도 책 자체에 실망감을 느낄 때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종국에는 더 이상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읽지 않는데에 도달했다. 아마도 이들과 나는 재능의 총량이 다른가보다 또는 프로가 아니니 이 선까지만 하자 내지는 그래봤자 '내글구려병'에 걸린 체념 섞인 결론이었던 것 같다.


물론 잘 알고 있다. 글쓰기의 왕도는 없다는 걸. 설사 그런 비법이 존재한다 해도 그건 글을 쓰는 본인만이 알아낼 수 있다는 것도. 그러면서도 좋은 장비에 먼저 몸을 맡기고 시작하고 싶은 초심자마냥 이렇다 할 조언에 매달린다는 별 수 없는 변명도. 그러니 미리 말해야겠다. 여기 세 권의 글쓰기 책을 골라오긴 했지만 이 책들을 읽는다고 해서 글쓰기 실력이 향상되진 않음을(일단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부터가 여전히 중언부언 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책들이 아주 적게나마 -의식적인 면이든 기술적인 면에서든- 인상적인 도움을 주었고 게다가 좋은 글쓰기 책을 만날 확률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을 이미 알기에 그래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탓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글쓰기 책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글쓰기의 세계는 새로운 도전자가 생긴다 해도 경쟁이 아니라 동종업계의 사람으로서 측은함과 동질감에 응원하게 되는 곳이라고. 글쓰기의 링에 오르는 자를 미워하거나 견제하기보단 응원하게 된다고. 


관찰한 것은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머릿속 하드웨어 용량은 매우 크지만 신뢰하기 어렵다. 신나고 자극적인 새로운 정보에, 키워드 위주로 넣어두었던 아이디어들은 금세 밀려나기 십상이다. 기록은 말하자면 하나의 외장하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싶다.


주관이란 객관의 반대말로 볼 수 있는데, 객관이 모두가 봐도 다 똑같은 사실이라면 주관은 나의 시점에서 보이는 사실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콜라 캔을 어느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영어 스펠링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때로 그 주관을 통해 사람들이 다 안다고 생각하고, 새롭지 않다고 무시했던 분석의 영역이 열리는 경우가 있다. (중략) 롱테이크 스테디캠 신은 영화를 보는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기술적인 면이지만 거기서 ‘이어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비평적인 시선이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이렇게 발견하면서 봄으로써 영화에 대한 글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자신의 생각과 철학, 삶에 대한 태도까지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글 자체로 독립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시간의 순서, 즉 플롯의 마술을 통해 놀라운 철학적 성찰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이야기의 흐름은 3월 다음 4월, 4월 다음의 5월로 이어지는 선조적 이야기 흐름 즉 플롯에 대한 관객의 상식과 기대감을 꺾는데, 이게 단순한 잔재주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삶, 의지에 대한 대단한 인문학적 발견을 담고 있다. 그 발견을 독특한 플롯 구성 안에 배치해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플롯의 왜곡은 단순히 사람들을 놀래는 데 멈추지 않고, 예견된 불행을 피하지 않는 의지가 바로 인간성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만약, 뒤섞인 서사적 트릭과 배치가 없었더라면 이 놀라움은 반감되었을 게 분명하다. 이렇듯 꼬여 있는 시간의 매듭을 푸는 것은 단순히 영화적 시간을 푸는 게 아니라 시간의 일직선상에 묶여 있는 모든 사람들의 존재론적 숙제를 푸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는 한편, 왜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이야기가 플롯에 집중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시간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시간에 매달린 존재이기에 영화와 이야기에서만큼은 시간을 마음대로 다루고자 한다. 슬로우 모션, 플래시백, 교차 편집과 같은 서사적 표현 방식엔 모두 이런 욕망이 담겨 있다.


때론, 그 나이에만 쓸 수 있는 글도 있다. 이 말인즉 지금, 쓰고 싶은 글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남겨놔야 한다는 것이다. 정서도 나이를 먹는다. 그래서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 나이에서만 나올 수 있는 글이 있다면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20대였을 땐, 돌이켜보면 경중의 우울증을 앓지 않았을까 싶게 매우 예민했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세상 전부에 대해서 예민하다 보니 20대임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부족했고, 늘 어딘가 아프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아플 때마다 그것들을 글로 남기고 싶었고 무조건 남겼다. 왜,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때로는 선배들의 서투른 농담에 상처받기도 하고, 때론 나약한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더러는 관계 속에서 기진맥진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것들을 기억하고 싶었고 기록을 남겼다. 지금은, 그런 글들은 써지지도 않는다. 아니, 엄밀히 말해 그렇게 예민하지도 않다. 더 이상. 그러니, 오늘의 감정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 강유정, 영화 글쓰기 강의


이 책은 먼저 '영화 글쓰기'라는 걸 명시한다. 글쓰기는 결국 일기와 카드 쓰기로 시작한다고 말하는 저자는 단계적으로 글을 쓰는 법을 알려준다. 간단한 메모와 수집, 그다음에는 밑그림, 그 위에 긴 글을 쓰기 위해 맞춤법, 비문, 문장 배열 등의 기술적 방법과 미장센, 연출, 배우 등 영화의 무엇을 쓸 건지 다루는 식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영화가 있고 자신을 울린 영화가 있으며 잊을 수 없는 작품과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을 테니. 모두가 정성일과 허문영처럼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물론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영화에 대해서 한마디쯤 안 써본 사람은 없을 것이고 의견이 없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동진, 김혜리, 강유정 등의 글을 읽고 이 말이 내가 하고 싶은 뜻이었는데. 정말 일목요연하고 쉽게 잘 썼네. 생각한 적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강유정 평론가의 문장이야 원래도 워낙 훌륭하지만 이 책에서는 특히 쉽고 단순하고 간단한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태도가 절로 느껴지는데다 책을 읽고 나면 뭐라도, 어떤 영화에 대해서라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강유정 평론가의 책이 '영화 글쓰기'에 국한한다면 장강명 작가의 글은 '책을 내자'에 더 가깝다. 다른 두 권에 비해 긴 책이지만 글이 술술 읽히는 데다 개인적인 경험을 제일 많이 다루는 책이기에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제일 넓을 것 같다. 물론 그저 글쓰기를 잘하고 싶은 사람 입장에서 대뜸 '등단한 작가가 되기보단 앞서 저자가 되길 목표하라' 는 말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반드시 책을 출간하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일단은 글쓰기에 한정하거나 아닌면 삶의 어느 영역에 비추어도 유효한 대목이 많은 책이다. 글쓰기는 취미로서도 창작의 갈래에서도 하물며 스트레스 해소에도 매우 좋은 방법이라면서 글쓰기나 저자를 꿈꾸는 데에 나이나 경력에 문제는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뻔한 말이지만 소재를 찾는 법, 메모를 관리하는 방법이나 지향하는 방향에 따라 참고해야 할 책도 달라진다는 말에도 했다. 


문예창작학과든 글쓰기 교실이든 등록할 때에는 주변 눈치를 무척이나 의식하게 된다. 뭔가를 창작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에 대해 현대사회는 나쁘게 본다기보다는 신기하게 본다. 남다른 예술혼과 번뜩이는 재능이 있어야 감히 도전할 수 있는 일로 여긴다. 그래서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몰래 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글쓰기 자체를 포기해버린다. 예비작가들이 문제가 아니라 현대사회가 문제다.

슬픈 일이다. 창작의 즐거움은 매우 독특하고 크기에 한계가 없는 듯하기에 더 그렇다. 음식은 대체로 비쌀수록 맛있지만 창작의 기쁨은 도구의 가격에 별로 좌우되지 않는다. 대인관계에서 얻는 즐거움과 달리 창작은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만족감을 준다. 스포츠와 달리 운동신경이 둔해도 괜찮고, 종교처럼 자아를 지우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온전하고 또렷하게 자신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인간적인 영웅이 되는 길이다. 대단히 평화적이기도 하다.


머릿속에 품고 있던 구상을 자기 손으로 정확히 현실에 구현하는 순간은 정말이지 짜릿하고 통쾌했다. 기존 작업이나 주변 여건의 영향을 받아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하지만 멋지게 결과물이 나온다면 그것도 재미있다. 들인 시간이 길고 이뤄낸 바의 규모가 클수록 흥분의 강도가 커진다. 몇 달, 길게는 몇 년에 걸친 작업을 마칠 때에는 엄청난 환희와 감격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낚시가 취미인 사람에게 “낚시를 뭐하러 해요? 클릭 몇 번이면 싱싱한 생선을 산지 직송으로 배송받을 수 있는데”라고 따지지 않는다. 골프가 취미인 사람에게 “골프를 뭐 하러 치세요? 프로가 되시기에는 이미 늦었잖아요”라고 묻지 않는다. “프로 골퍼라도 에계 랭킹 100위 밖이면 일반인은 알지도 못하는데요”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정작 낚시나 골프 애호가들은 그런 질문을 받더라도 당당하게 대답할 것이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라고. 그 손맛, 그 희열을 느끼게 위해 하는 거라고.


다른 취미에 대해서도 그렇다. 틈틈이 바둑을 두는 사람, 기타를 치는 지인에게 우리는 그걸 왜 하는지 묻지 않는다. 그냥 바둑을 좋아하는구나, 기타를 좋아하는구나 여길 뿐이다. 직장 동료가 댄스학원에 다닌다고 하면 멋지다고 응원해주지, 언제 아이돌로 데뷔할 건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유독 책을 쓰는 일에 대해서는 “그거 써서 뭐 하려고?”하고 스스로 묻고 “내가 그런다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을까?”라며 자기검열에 빠지는 걸까. 그냥 내가 좋아서 쓴다는 이유로는 부족한걸까. 책 쓰기의 목적이 나 자신이어서는 안 되는 걸까. (중략) 퇴근하고 틈틈이 하루 한두시간씩 바이올린을 연습해서 전문 연주자가 됐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취미로 바둑을 두다가 어느 날 한국기원에 가서 입단 대회를 치르고 프로기사가 됐다는 사람은? 주민센터에서 방송댄스를 배우다가 연예기획사의 눈에 띄어 발탁될 가능성은 있나? 아주 어릴 때부터 하루 종일 10년 가까이 피나게 노력해야 겨우 프로로 데뷔할 수 있는 분야들이 있다.


그런데 작가는 그렇지 않다. 별다른 교육훈련 없이도 밤에 한두 시간씩 혼자 쓰다가 작가가 되는 사람이 있다. 많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지금 베스트셀러인 책들의 저자들 중에도 그런 작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거다. 그런 걸 보면 오히려 작가는 아무나 할 수 있다. 바이올린, 바둑, 방송 댄스야말로 아무나 하면 안된다. 각오가 된 사람만 해야 한다.



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그랬다. 서점 신간 코너에 가면 분노에 휩싸였다. 지인이 책을 냈다고 하면 관심 없는 척하면서 내용을 몰래 살폈다. 그 책에 신통한 데가 없으면 그때서야 겨우 안심했다. 결국 나무의 소중함 운운은 그냥 핑곗거리였다. 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아 포기한 작가라는 거룩한 영예를, 다른 녀석이 제 값을 치르지 않고 길에서 주웠다고 여겨서 부린 트집잡기였다. 정의감을 닮았지만 실제로는 질투심이었다. 그 흉한 감정은 내 책이 나온 뒤에야 겨우 사라졌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서도 비슷한 시기심으로 고생하는 분이 있다면, 당장 책을 쓰는 편이 낫다. 최악의 경우에도 전과 다른 차원의 독서가로 거듭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어떤 부분이 어떻게 힘든지 알게 된다. 그러면서 작품의 방법론과 기교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피아노를 칠 줄 알면 라흐마니노프가 다르게 들린다.

그리고 형편없는 작품을 내고 괜히 썼다며 후회하는 것과 책을 아예 쓰지 않고 후회하는 것, 둘 중에서는 졸작을 내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 졸작을 써도 실력과 경험이 쌓이고, ‘다음 책’이라는 기회가 또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 기회도 없다.               -장강명, 책 한번 써봅시다


세 권 중 기술적인 면에서 기억이 남는 책은 다음이다. 적잖은 작법서가 꾸짖듯 맞춤법과 비문, 번역 투의 오류 등을 신랄하게 지적한다. 물론 비문과 맞춤법은 문장의 기본이고 고쳐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어쩔 땐 그 비문이나 그런 방식의 문장만이 말의 미묘함을 살릴 때도 있지 않은가. 예컨대 짜장면과 자장면은 어감이 다르고 '바람'이 표준어임을 알아도 '바램'이라고 표현할 때. 진부한 표현을 죄악시한다던가 긴 문장은 절대적으로 비문이나 나쁜 문장으로만 취급할 때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든다(장문이 단문에 비해 많은 경험과 기술이 필요한 건 사실이나). 이미 너무 대중화 된 말조차 무조건 순우리말로 고치라거나 줄임말을 금하는 등의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반면에 이 책은 상황에 따라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좀 더 자유롭게 쓰기도 가능하다는 말로부터 시작한다. 비문도 상관없고 장문도 괜찮다, 그냥 외래어나 신조어를 쓰라는 게 아니라 그 말이 그래야만 하는 근거가 확실하다면 기존의 통념을 깨고서 써도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그러한 문장구조나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써야만 했던' 경우가 엄준하게 지켜져야 함은 당연한 전제다. 예컨대 이런 경우다. 


‘-적’과 같은 표현은 일본이 서구 언어를 번역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그 쓰임새가 대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아주 편리한 표현 방식이다. 그걸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중복일 때는 빼면 될 것이고. 다음의 예를 보자.


그 생각은 이상적이다.


이런 경우는 ‘-적’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상이라는 말은 개념만 있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적인 것’은 존재한다. ‘-적’이라는 말을 ‘-스럽다’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다. ‘이상스럽다’로 바꾸자는 건데, 정말 이상하게 느껴진다.


차별적인 대우, 압축적인 표현, 갈등적 관계


이런 경우라면 차별 대우, 압축 표현, 갈등 관계와 같이 ‘-적인’이나 ‘적’을 빼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그렇지만 ‘차별적인 대우’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의미의 강도가 살짝 약해져서 ‘차별에 가까운 대우’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진부한 표현의 장점을 기억해 두면 좋겠다. 진부한 표현이 무조건 나쁘다는 편견도 버리면 좋겠다. 진부해야 할 것은 진부해야 적시에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글을 쓰거나 읽을 때 의식의 흐름은 무척 중요하다.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리듬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가끔 참신함을 위해 부자연스러운 표현을 쓰기도 한다. ‘참신함’을 넘어 ‘기괴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표현이 꼭 좋기만 할까. 그렇지만 이런 아포리즘을 만들어 내겠다고 너무 욕심부리지는 말자. 몰입하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튀어나오지 않으면 그냥 편안하게 풀어 나가는 게 좋다. 아포리즘이 없어도 글의 전체 내용이 좋으면 좋은 것이다. 우리는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다. ‘좋은 것’은 입소문으로도 퍼진다.          


어떤 원고를 청탁받았을 때 자신은 어떻게 브레인스토밍을 하는지 어떤 자료를 뒤적이고 어디까지 찾아보고 고려하는지 직접 자세히 예를 들어 알려주기도 하고 본인의 글을 윤문하거나 인용하는 진솔함도 보여준다. 물론 메모의 중요성과 글쓰기의 의의를 언급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다. 다시 말하지만 보통의 작법서에서 다루지 않거나 금기시 하는 것들을 개인적인 주장과 근거를 설명했던 점이 신선했으며 글쓰기의 동기보단 테크니컬한 부분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혼자서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사라지는 말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생각해야 한다. 긴 시간 생각하다 보면 앞에서 생각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잊을 때도 많다. 메모라도 해야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물론 메모로는 충분치 않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을 되살리는 실마리’만 될 뿐이니까. 그것만으로 당시 생각을 제대로 기억해 내기는 어렵다. 완전한 문장으로 써 두어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가 중요하다. 글로 써 두지 않으면 자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른다.


‘무슨 생각을 하셨던가요?’ 물어보면 대개는 잘 설명하지 못한다. 생각은 휘발성이 강해서 금방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쓴 것’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생각의 흔적이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글이 자기 생각이다.


나는 즐거운 글쓰기의 순서는 이래야 한다고 믿는다.

(1) - 가슴 속에 할 말 만들기(또는 질문하기)

(2) - 여러 가지 관점에서 정리된 자료 섭렵하기

(3) - 섭렵하는 동안 떠오르는 대로 메모해 두기

(4) - 스토리 윤곽 잡기

(5) - 쓰기 시작하기

(6) - 자료를 확인하거나 새로운 자료를 찾아가면서 쓰기

(7) - 다 쓴 글을 편집하기

(8) - 일단락되었으면 하루쯤 묵히기

(9) - 편집한 글 고치기(또는 다시 쓰기)

(10) - 교정,교열,윤문하기

개인적으로는 스토리 윤곽 잡기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다.


이런 방식이 처음에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임을 알게 된다. 어떤 글을 쓰든 ‘자료 조사’ 과정이 축적되면서 미래의 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 하다 보면 자료 조사 시간이 빨라지고 스토리 윤곽도 쉽게 잡힌다. 이러한 과정을 오래 거친 사람이라면 짧은 글의 경우 2~3일이면 써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소모적인 글쓰기가 되기 쉽다. 이건 무척 중요한 문제다.


몰입해서 쓰다 보면 다 쓴 뒤에도 그 감정의 잔재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생각이 말로 번역될 때 쓰인 말 하나하나에 감정이 붙어 있는 것처럼 느낀다. 착각이다. 글은 차가운 기호일 뿐이니까. 시간이 흐르면 말라 버리는 물기 같은 것이다. 몰입했을 때는 상당히 주곤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잘 훈련된 사람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초고는 독자에게 잘 전달되기 어려운 주관적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주관의 물기가 마를 때쯤 다시 읽어 보면 고쳐야 할 것들이 보인다. 갓 쓴 뒤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적어도 다섯 번 정도 거치기를 권한다.                       - 강창래, 위반하는 글쓰기 


사실 세 권의 책 모두 글쓰기 초보를 위한 글은 아니다. 어느 정도 글을 써 본 사람, 비평이나 평론도 이미 시도해봤으며 어쩌면 창작을 해본 사람들. 평균보다 글 좀 쓴다는 소리는 들어봤으나 스스로에 확신이 부족한 이들. 운 좋게 좋은 글을 쓸 때도 있지만 그게 매번은 아니라서, 스스로에게 실망하거나 이 이상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해 주저하는 '링에 오르는 사람들'을 위한 글에 가깝다. 게다가 -당연한 말이지만- 여태껏 그래왔듯 저자의 글에 감탄해서 이 책을 읽는다한들 그것을 내 것으로 체화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며 앞서 한 말을 반복하자면 작법서를 읽는다 하여 실제의 글쓰기 실력(실력이라 부를 수 있다면)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읽다보면 문득 가슴이 뜨거워진다.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들도 늘 힘들구나 하는 치사한 안도감이기도 하고 나는 왜 여기서 글을 쓰려고 하는건가 괜한 자괴감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래, 뭐라도 써보자. 어떻게든 써보자. 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하얀 화면을 마주하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아마 이 페이퍼를 읽는 이들은, 위의 책들을 검색하는 사람들이라면 링에 오르려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모두에게 조심스럽게 권한다. 어쩌면 이 책이 링으로 향하는 계단이 되어줄 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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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손끝에서 과학자의 손길로 - 미술품을 치료하는 보존과학의 세계
김은진 지음 / 생각의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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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보다 복원가에 대해 널리 알려진 지금도 그들이 하는 일은 정확히 모르는 보통 사람들에게 친절히 알려주는 작업 진행서. 상당히 복잡하고 미묘한 일들이 얽혀있어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난감함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다만 화학처리나 원리에 대한 설명은 내 머리론 이해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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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세로 낱말 퍼즐 : 세계사편 - 퀴즈로 세계 여행 가로세로 낱말 퍼즐
단한권의책 지음 / 단한권의책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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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서점에서 구매했다. 한국사는 그럭저럭 상식선에서 맞출 수 있었서 세계사 구매했는데... 꽤 어렵다. 특히 이탈리아에 대해 아는게 하나도 없음을 깨닫는 중이다. 별 하나 뺀 이유는 설명과 퍼즐이 각각 다른 장에 있어 책을 돌려가며 보는게 영 불편해서. 퍼즐이 클수록 더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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