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모스크바에서 원고를 쓰게 돼 고른 게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였다.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그린비, 2005)라고 나온 책이다. 더불어 제이 파리니의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솔춘판사, 2010)도 같이 읽은 책이다(여러 인물의 회고 형식으로 이루어진 소설에서 한 장이 아샤 라치스의 독백이다). 한겨레의 표기 원칙에 따라 '벤야민'이 '베냐민'으로 표기됐고, '그녀'는 '그 여자'가 됐다('여인'이란 표기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로쟈'를 '로자'로 표기한 건 착오이다. 책에 나오는 '아샤 라시스'를 '아샤 라치스'로 고친 건 'Asja Lacis'의 발음이 그렇기 때문이다. 길출판사에서 나오는 발터 벤야민 선집부터는 그렇게 표기돼 있다. 원고는 출국을 하루 앞둔 목요일 아침에 쓴 걸로 기억된다. 다시 찾은 모스크바에 대한 나대로의 작별 인사였다.  

  

한겨레(11. 02. 19) [로자의 번역서 읽기] 혁명가를 사랑한 베냐민의 독백

모스크바에 오면 모스크바인처럼 행동해야 좋을 테지만, 대신에 모스크바와 관련한 책을 읽는다.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베냐민의 <모스크바 일기>다. 자본주의 러시아의 수도에서 읽는 사회주의 시절 러시아 이야기이기도 하다. 베냐민에 관한 회고록을 쓴 친구 게르숌 숄렘이 “가장 사적이며, 철저하고도 냉정하리만치 진솔한 기록”이라고 평한 이 일기는 ‘좌절된 구애의 이야기’로도 일컬어진다. 상대는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 혁명가’ 아샤 라치스였다. 다른 목적도 있었지만 순전히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베냐민은 1926년 겨울 모스크바를 찾았다. “지금까지 알게 된 여자들 중 가장 뛰어난 여인 중 하나”라고 할 정도로 베냐민은 라치스를 높이 평가했고, 1924년 여름 이탈리아에서의 첫 만남 이후 그 여자에 대한 열정은 그의 삶을 뒤흔들어놓았다. <일방통행로>의 헌사에서 “이 거리는 아샤 라치스 거리라 불린다. 엔지니어인 그녀가 저자 속에 그 길을 놓았다”고 적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걸출한 지성의 구애는 여인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다. 일기에서 베냐민은 ‘거의 점령할 수 없는 요새’ 앞에 봉착했다는 심경을 피력한다. “나는 내가 이 요새, 곧 모스크바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첫 번째 성과라고 자족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것, 무언가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거의 극복할 수 없을 만큼 힘들다”는 게 그의 토로이다. 무엇이 장애물이었을까. 외적으론 물론 베냐민이 아들까지 둔 유부남이었고 혼자 딸 하나를 키우던 라치스도 연극연출가 베른하르트 라이히와 동거 중이었다는 사실이 상황을 나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성싶다. 



진실, 특히 남녀 간의 진실이란 다면적이기에 베냐민의 기록만으로는 ‘입체적인’ 그림을 얻기 어렵다. 베냐민의 일기와 함께 라치스의 회고록 <직업 혁명가>(1971)을 참고한 제이 파리니의 전기소설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에서 아샤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다. 아샤는 ‘별난 남자’로서 베냐민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우정보다 크지 않았다. “그에겐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냄새가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싫었던 건 그가 말을 더듬는 것과 에둘러서 말하는 것이었고, 그의 그런 면이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는 게 아샤의 고백이다. 게다가 아샤는 베냐민의 경제적 무능을 질타하고 지속적으로 공산당 가입을 권유했지만 베냐민의 회의적인 천성은 결단을 미루게 했다. 프롤레타리아가 지배하는 국가에서 코뮤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개인의 독립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게 그의 우려였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위해서도 주변적인 위치, 좌파 아웃사이더의 위치에 계속 남아 있으려고 했다.

반면에 아샤 라치스는 한 번도 주변인이 되는 것에 흥미를 가진 적이 없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집을 마련해줄 수 있는 힘, 종국에는 계급을 타파할 수 있는 힘이 공산주의자에게는 필요하다고 라치스는 생각했다. 주변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런 힘을 얻을 수 없는 노릇이다. 모스크바로 이주한 것도 이 도시가 민중 혁명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아샤를 사랑함에도 베냐민은 당의 내부에서건 외부에서건 자신이 러시아의 삶을 견딜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가 혼자서 모스크바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아샤와 작별하면서 흘린 눈물은 순전히 그의 몫이었다. “무릎 위에 큰 가방을 올려놓은 채 울면서 어두워져가는 거리를 지나 역으로 향했다.” 그를 떠나보내면서 아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가 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남자.” 

11. 0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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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2-20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나중에 혹시 모스크바를 여행할 천운을 얻게 된다면 로쟈님과 벤야민을 우선 떠올릴 것 같은데요 ㅎㅎ
며칠은 시차 때문에 고생하시겠네요^^

로쟈 2011-02-20 10:47   좋아요 0 | URL
6시간 시차가 별거 아닐 텐데, 졸리긴 하네요.^^;
 

오늘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모스크바 시간으론 오늘 아침, 한국시간으론 어제 낮에 써서 보낸 글이다. 최근 사회적으로 충격을 던진 최고은 작가의 죽음에 대한 의견을 간단히 적었다. 예로페에프의 소설(작가는 '서사시'라고 부른다)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를 읽다가 과연 '작가의 죽음'이란 걸 어떻게 봐야 할까란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었다. 육체적 굶주림 말고도 우리는 정신적, 초정신적 굶주림을 염려하고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세 가지 굶주림은 따로따로, 혹은 순차적으로 돌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경향신문(11. 02. 15) [문화와 세상]그는 ‘굶어죽은 작가’가 아니다

지난주에 모스크바에 와서 아르바트거리에 머물고 있다. 짧은 체류일정과 일거리 때문에 ‘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책방순례로 마음의 허기를 달래고 있다. 왠지 모스크바에서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책을 몇 권 챙겨왔는데, 러시아 작가 베네딕트 예로페예프의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가 그 중 하나다. 원제 ‘모스크바-페투슈키’의 두 도시가 각각 출발역과 종착역을 가리키기에 그렇게 읽어준 것이다. 페투슈키는 모스크바 동쪽으로 115㎞ 떨어진 작은 도시다. 이 작품으로 모스크바와 ‘동급’으로 알려지기 이전에는 러시아 사람들에게도 생소했을 법한 지명이다.  

작품은 작가의 분신격인 알코올 중독자 화자 베니치카가 가방 가득 술병을 챙겨서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타고 내리 퍼마시며 페투슈키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책을 읽는 건 그 여정을 그대로 뒤따라가는 것이기도 한데, 모스크바의 출발지인 쿠르스크 역 광장을 가로질러 가는 대목에서 나는 잠시 독서를 멈추었다. 발을 질질 끌면서 광장을 가로지르던 베니치카가 구역질을 가라앉히기 위해 두세 번 멈춰섰기 때문이다. 빈속에 알코올을 퍼부어댔으니 속이 메슥거리는 건 당연하다. 자기 말대로 두 번째 잔부터는 깡술로도 마실 수 있지만 첫 잔은 안주와 함께 먹었어야 했다. 아무튼 그가 속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사람에게는 육체라는 한 가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면도 있고, 그렇지, 게다가 신비적인, 초정신적인 측면이 있다.” 그래서 뭔가 메슥거린다면 이 세 가지 측면 모두에서 메슥거리는 것이다. 한 번 구역질이 나더라도 우리는 육체적인·정신적인·초정신적인 구역질, 이 셋을 모두 가라앉혀야 한다.

지난달 말에 지병과 생활고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달라”는 쪽지를 남겼다고 처음에 보도돼 ‘사회적 타살’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영화 스태프의 평균 수입이 월급으론 52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는 고발도 이어졌다. 이제라도 창작자를 기아와 죽음으로 내모는 영화계의 부조리한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실업부조제도 같은 사회적 안전망이 더 확충되어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하지만 한 작가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그러한 사회적 의제들로만 환원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누구도 굶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는 정당하지만, 그 굶주림이 비단 육체적 굶주림만을 가리킨다면 매우 허전한 일이다. 다시 정정된 사실이지만, 최고은 작가도 ‘남는 밥’을 구걸한 것이 아니라 평소 자신을 도와준 이웃에게 “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라고 한 번 더 부탁한 것이었다.

창작의 길이 고되고 우리의 현실에서 사회적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란 걸 그가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로선 육체적인 굶주림 이상으로 정신적·초정신적 굶주림을 돌봐야 했던 것이 아닐까. 자신이 각본을 쓰거나 직접 만든 영화의 감독이 아니라 단지 ‘굶어 죽은 작가’로 기억된다면 그야말로 고인이 가장 수치스러워할 일일 것이다. 실제 사인도 기아보다는 지병과 관련된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단편 ‘격정소나타’를 유작으로 남긴 고인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은 굶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과 재능을 알릴 장편영화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11. 02. 15.  

erofeev01.JPG

P.S. 분량상 예로페예프(1938-1990)의 삶과 죽음에 대해선 더 적을 수가 없었는데, 모스크바대학에서 제적당한 뒤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고정된 거처 없이 살았다. <모스크바-페투슈키>는 1970년초에 두달간 쓴 작품이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그는 1980년 후두암 진단을 받고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돼 1990년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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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1-02-15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누트 함순'의 소설 "굶주림"과
'논쟁'과는 무관하지만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케 합니다.

로쟈 2011-02-16 00:58   좋아요 0 | URL
네, 함순의 <굶주림>과 카프카의 <단식광대>, 이들을 같이 다룬 오스터의 에세이 '굶기의 예술' 등이 세트로 떠오르네요...
 

6시간의 시차 때문에 모스크바에 와서 가장 피곤이 몰려오는 시간은 밤 9-10시 사이다. 한국시간으론 오전 2-3시로 넘어가는 시간이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잠시 눈을 붙일까 하다가 오늘(어제)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작은 인문서점에서 구한 책 얘기를 조금 부려놓는다. 아래는 아르바트거리의 모습. 지금은 눈이 조금 더 쌓였다. 

작은 서점이긴 해도 문학, 철학, 종교, 역사 쪽 책들과 오래된 문학전집류를 파는 서점이어서 나름대로 챙길 만한 책들이 있었다. 러시아 문학과 문화 관련서를 제외하면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에코의 <미네르바의 성냥갑> 등이 더 얹은 책이고, 일차로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려다 직원에게 문의해서 구한 책이 랑시에르와 아감벤의 책 한권씩이다. 그래서 무슨 시리즈는 아니지만 '모스크바의 랑시에르와 아감벤'이란 제목을 붙였다.   

랑시에르와 아감벤은 국내에 나란히 소개됐기 때문에 나로선 같이 떠올리게 되는 면이 있는데(두 사람의 저작을 묶어서 서평을 쓴 적도 있다) 러시아어본도 나란히 구하게 됐다. 그래봐야 러시아어로는 몇 권 번역돼 있지 않다. 랑시에르의 책으론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와 <감성의 분할>이 번역돼 있는 걸 알고 있어서 찾아달라고 했는데(<미학의 무의식>은 2004년에 구입했었다), <감성의 분할>만 꺼내다 주었다. 그것도 어디냐고 냉큼 들고 와서 이제서야 펴보니 <감성의 분할> 외에도 <미학 안의 불편함>과 아직 번역되지 않은 <이미지의 운명>까지 합본된 책이다(264쪽밖에 안됨에도!). 무슨 '횡재'한 기분이다. 아래 왼쪽이 러시아어판 <감성의 분할>이고 오른쪽은 <이미지의 운명>의 영어판 <이미지의 미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한번 더 찾아보고 못 구하면 인터넷서점으로 주문할 참이다. 러시아어 아감벤은 랑시에르에 비하면 아직 빈곤한 편이다. 잡지들에는 그의 글이 다수 번역돼 있지만 단행본은 <도래할 공동체>(2008) 달랑 한 권이다. <호모 사케르> 연작이 아직 소개되지 않은 게 좀 의아한 수준. 아래가 <도래할 공동체>의 러시아어본과 영어본의 표지다.  

Грядущее сообщество 

랑시에르나 아감벤의 책 모두 1000부를 찍었으니 전혀 대중적이라고 볼 수 없다. 어지간한 서점에선 구경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에 비하면, 한국에서 랑시에르나 아감벤 '붐'은 비록 한정된 독자층 사이에서 많이 입에 올려지는 정도라고 해도 상당히 예외적이란 느낌이다. 지난 2004년의 기억이지만, 인문학 전공의 이탈리아 유학생에게 아감벤을 아느냐고 물었다가, 누군지 모른다고 해서 내심 신기해 했던 일이 모두 그런 '착시'에서 비롯됐을 것이다(움베르토 에코는 잘 안다고 했다). 그러니 이런 책을 만나면 반가워하는 '외국인'이 러시아 서점 직원에게도 특이하게 보일 법하다. 나는 아주 조용히 서점에서 빠져나왔다... 

11.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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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2-14 0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잠 못 들고 가끔 페이퍼를 끼적여 올리곤 하는 시간에 로쟈님의 글이 올라오니 외려 제가 이곳에서 시차를 느끼는 것만 같네요 ㅋㅋ
어제 올려주신 '모스크바' 서점도 그렇지만 건물들이 새로 지어진 것처럼 깔끔하군요. 돌아오실 때 책만 한 보따리 되는 것 아닌가요?ㅎㅎ^^

로쟈 2011-02-14 15:33   좋아요 0 | URL
눈덮힌 거리는 훨씬 더 깔끔합니다.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쉽싸리 2011-02-14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같은 책을 영어,러시아어,한국어로 읽으면 기분이 어떨까요?
저로서는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기분이고 앞으로도 그럴까 같아 궁금하네요.^^

로쟈 2011-02-14 15:34   좋아요 0 | URL
음, 그게 같은 곡에 대한 각기 다른 연주를 듣는 느낌이에요. 한국어 번역본들간의 차이보다 조금 더 큰 차이로, 아, 같은 곡을 다른 악기로 연주한다고 하면 비슷할 거 같네요...

philocinema 2011-02-14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서 건강 잘 챙기셔요! 공부는 '몸'으로 하는 거니까요!

로쟈 2011-02-14 15:35   좋아요 0 | URL
네, 예전보다 훨씬 편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일거리만 없다면 좋을 텐데요.^^;

펠릭스 2011-02-14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가셨군요. 엉뚱하지만,,, 어젠 영화 한 편을 봤는데요.
'The Concert',,,요.

로쟈 2011-02-15 00:59   좋아요 0 | URL
오긴 했지만 벌써 갈날이 며칠 안 남았습니다...

반딧불이 2011-02-15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 계시는군요. 늘 고골의 네프스키 거리만을 상상하다가 아르바트 거리를 보니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네요.

로쟈 2011-02-16 01:02   좋아요 0 | URL
네프스키는 '대로'라서 비교가 안되죠.^^ 아르바트는 그에 비하면 아담하고 편안한 거리입니다. 1킬로쯤 되려나요. 전철역 한 구간 거리인데, 어슬렁거리기도 좋습니다(기념품가게가 많구요). 겨울엔 물론 사정이 좀 다르지만...
 

한국시간으론 자정이 다 돼 가지만 모스크바는 아직 저녁을 먹기에도 이른 시간이다. 오늘도 낮에 3시간 동안 서점 순례를 했는데, 2004년에 가장 자주 들르던 서점 '모스크바'에 다시 가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책은 모스크바예술극장 골목에 있는 교재서점(주로 교재들을 판매하는 서점이다)에서 주로 구입했다. 들고 간 돈이 모자라서 모스크바서점엔 한번 더 가볼 참이다. 아래가 모스크바서점이다.

Названы лучшие книжные магазины Москвы  

내가 주로 구하는 책은 러시아문학 작품, 러시아문학 연구서 등 전공관련서와 이론서/철학서의 러시아어 번역서들이다. 연구서와 번역서는 사실 대형서점에 가도 '재미'를 못 보는 수가 많다. 제대로 다 갖춰놓는 서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재서점에서 뜻밖에도 들뢰즈/가타의 <천개의 고원> 러시아어판을 발견했다. 작년에 출간된 책이다. 들뢰즈의 책은 대부분이 이미 출간돼 있고, 가타리와의 공저도 <천개의 고원>만 빼고는 대부분 러시아어판이 있는 걸로 안다. 왜 출간이 안 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던 차였는데, 예기치않은 장소에 꽂혀 있었다. 가격은 25000원 가량. 아래가 실물이다.   

 

참고로 <안티오이디푸스>의 러시아어판은 2008년에 나왔다. 그리고 <의미의 논리>의 새 번역판도 올해 출간됐다. 우리말로도 <안티오이디푸스>(<앙띠오이디푸스>)의 새 번역판이 올해 나온다고 하므로 '자본주의와 분열증'은 아주 오랜만에 완독을 시도해볼 수 있겠다. <의미의 논리>까지 보태서.   

 

들뢰즈 외에 후설과 하이데거의 책들이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나왔고, 롤랑 바르트와 레비-스트로스의 책도 '아카데미 프로젝트' 시리즈로 다시 나왔다(바르트의 <S/Z>은 오늘 구입했다). 라캉의 세미나도 두어 권 (재)출간됐고(<에크리>는 아직도 러시아어판이 없다). 이채로운 건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 러시아어판. 하드카버의 무거운 장정으로 출간돼 있었다('입문서'와는 어울리지 않는!).  

Козел отпущенияНасилие и священное. Издание 2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왼쪽)도 러시아어판이 눈에 띄었다. 작년에 나온 것인데, 너무 비싸서 일단은 다시 꽂아두었다. 좀더 저렴한 곳에서 구입하려고 한다.지라르의 책은 <폭력과 성스러움>(오른쪽)도 작년에 다시 나왔다. 다시 확인해보니 대개의 책은 품절되지만 않았다면 러시아 인터넷서점에서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등은 아직 러시아어로 번역되지 않은 듯 보인다(그의 도스토예프스키론은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나남)에 번역돼 있다). 음, 이런 데 관심을 가진 특이한 한국인이 모스크바의 서점들을 배회하고 있다...  

11. 02. 12.  

P.S. 러시아에 왔으니 러시아 철학서 얘기도 예의상 한마디 해야겠다. 2004년과 비교해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로스펜출판사에서 펴내고 있는 '20세기 후반 러시아 철학' 시리즈이다(리스트는 http://www.ozon.ru/context/detail/id/4184947/ 참조). 저작선이 아니라 저자론 모음집이다. 오늘은(쓰다보니 어제가 됐다) 모스크바서점에서 <바흐친>만 구입했는데, 나로선 생소한 철학자도 많이 포함돼 있다. 일단 이름이라도 아는 철학자들의 책은 구해놓으려고 하지만, 당장 <로트만>도 몇 군데 대형서점에선 눈에 띄지 않는다(내주엔 전문서점을 둘러봐야겠다). 한편, 러시아 학자들이 쓴 '20세기 사상가' 시리즈도 예전엔 못 보던 것이다(리스트는 http://www.interpres.ru/catalog/prod_list.php?kod_zhanr=5&kod_seriya=521&page=1 참조). 아래가 <질 들뢰즈>의 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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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2-1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택광 씨의 <세계를 뒤흔든 미래주의 선언> 후반부 내용에
펠릭스 가타리와 질 들뢰즈에 대한 언급이 잠깐 있어서
이들 두 사람의 사상에 대해서 급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안티 오이디푸스>의 새 번역판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이 책이 출간되면 <천 개의 고원>이랑 함께 질러야겠습니다.

로쟈 2011-02-13 14:13   좋아요 0 | URL
들뢰즈/가타리의 두툼한 평전도 올해 나올 거 같습니다. <안티오이디푸스>가 다시 나오면 '다시 읽기' 붐이 좀 생길거 같기도 합니다...

2011-02-13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3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귀족온달 2011-02-13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를 러시아어로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해봅니다....수유/너머 에서 번역했던 자료로도 몽롱했거든요...

로쟈 2011-02-14 03:22   좋아요 0 | URL
한국어 번역으로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영어본도 구하고 러시아어본도 구하는 것이죠.^^;
 

한국은 늦은 오후로 접어들고 있지만, 모스크바는 아침시간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어제 한국에서 온 대학원생들과 한담을 나누다 방으로 와서 뉴스기사를 검색해본다. 동해안 폭설 소식에 아직 구제역 파동은 끝날 줄을 모르는군. 기사들을 읽다가 칼럼 하나가 인상적이어서 스크랩해놓는다. 구제역 현장의 '농심'을 전달해주고 있다. 살처분되는 돼지들의 사진을 보면 묵시록의 시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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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11. 02. 12)[낮은 목소리로]생명의 질서가 무너져간다

구제역 파동이 빨리 끝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강진은 약 2만6000마리의 소를 키웁니다. 2000농가가 소를 키우니까 평균 13마리 정도 키우는 셈이죠. 구제역 파동이 나면서 소 사육농가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강진읍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면 단위 식당·상가는 거의 폐업 직전입니다. 밥집도 술집도 파리만 날립니다. 소 사육농가는 명절도 없이 방역을 하루에 두 번씩 합니다. 집안식구들도 내려오지 못하게 하고 축사를 지킵니다. 방역초소를 보면 거의 계엄령 수준입니다. 움푹 파인 도로를 지날 때 상처난 농민 마음을 보는 것 같아 아픕니다. 

구제역은 사람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서로 만나지 말아야 하고 그게 도리이고 예의입니다. 계모임, 동창회, 작목반 회의, 농민회 총회도 연기됐습니다. 관계의 단절은 결과이고 또 원인이기도 합니다. 자연과 격리된 공장식 축사가 결국 구제역의 원인이고, 생리와 섭리를 무시한 인위적인 양육이 병의 근원입니다. 규모화 농업은 시스템에 의존하는 농업입니다. 제초제와 살충제로 나락을 키우고 항생제와 외국산 사료로 소를 키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규모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 단계에서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조물주는 모든 생물을 자연교배 할 수 있게 창조했지만 소는 정자를 수의사가 주입합니다. 임신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임신을 시킵니다. 자연이 역사와 진화를 통해 유지했던 생명의 질서가 인간에 의해 제조됩니다. 현대 농법은 자연과 자연의 유기적 순환을, 생명과 생명 간 결합과 관계를, 사람과 생물 간 교감을, 사람과 사람 간 나눔과 소통을 단절시킵니다.

  

인간관계도 끊어내는 구제역
사람들은 흔히 ‘질서를 지킵시다’라고 말하면 줄을 잘 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자연의 질서는 관계를 잘 맺는 것입니다. 쌀 미(米)자를 보면 위 아래로 사람손이 여든여덟번 간다는 말이 되지만, 가운데 십자를 기준으로 사방에서 협력해야 한 톨의 쌀이 나온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람과 씨앗이 제대로 관계를 맺어야 생명이 탄생합니다. 관계는 소유의 개념이 아닙니다. 서로 존중하고 섭리를 이해하고 생명의 원리를 보장하는 것이 관계의 시작입니다.

구제역 사태로 약 350만마리의 생명이 살처분됐습니다. 조류인플루엔자까지 합치면 약 1000만마리의 생명이 죽었습니다. 생매장하는 장면이 생중계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을 소유하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오만과 독선이 생매장의 철학적 바탕입니다. 살처분 말고 다른 대안이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는가를 저는 모릅니다만 자연이 부여한 생명을 인위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인간의 오판이 병의 원인이고 그 결과라는 사실은 숨길 수 없습니다. 살처분 주사를 맞은 어린 송아지가 어미소 젖을 물고 죽었다는 농민의 울음 섞인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소 27마리를 매장한 농민이 결국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죽음의 잔치를 빨리 끝내야 합니다. 그리고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효율과 경쟁력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똑똑히 보고 성찰해야 합니다.

가축 묻고 강 파는 ‘포클레인 정치’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4대강 사업이 속도전의 기세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무지를 넘어 생명을 무시하는 정책 입안자들의 서류놀음이 죽음의 잔치를 부추깁니다. 용산참사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시위는 그저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람을 불태웠습니다. 동물을 살처분하는 포클레인과 4대강을 파는 포클레인과 경찰을 진입시킨 컨테이너가 한국 사회를 인정사정없는, 피도 눈물도 없는 죽음의 나라로 만들고 있습니다. 삼호주얼리호 선원들이 무사히 귀국해서 다행이고 선장이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배에 뚫린 무수한 총탄자국을 보면서, 우리 가족이 있는 배에 저렇게 많은 총을 난사한 저들의 작전이라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그 배에 국회의원이나 재벌 총수들이 인질로 있었다면 저런 작전을 벌일 수 있었겠는가 묻습니다. 대통령의 가족이 배에 있었다면….

돈을 벌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순간입니다. 여러 해 동안 쌓은 사람 간의 신의도 잃기는 순간입니다. 세상사 다 그렇습니다. 하물며 생명은 끊어지면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겸손하게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결정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생명을 다루는 일에 정치적 이해관계, 경제적 타산 이딴 거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강광석 | 전농 강진군 정책실장)  

11.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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