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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3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3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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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의 <애도와 우울증: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무의식>은 소개하기 힘든 책이다. 보통 내가 글을 싣는 지면은 학술지도 아니고 대학원의 학보도 아니다. 그런데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라니! 두 사람이 러시아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임은 분명하지만, 김소월과 이상도 아니고 김수영과 김춘수도 아니다. 이 글의 끝에서 다시 거론하겠지만, DJ DOC의 전 멤버 한 명이 예전의 멤버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촌극과 그 추이를 접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의 주제를 불특정다수를 위한 '읽을거리'로 변용하는 데 더 오래 애를 먹었을 것이다.- 107쪽

지은이는 이 책의 1장 첫머리를 "예술에 대한 프로이트적 가정에 따르면 예술창조의 전제조건은 삶의 파탄이다. 즉 뭔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느낌 없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감정 없이 예술을 창조할 수는 없다."라는 글을 시작하면서, 특히 낭만주의 예술에서는 예술가의 상실 체험이 가장 큰 창작 동기가 된다고 말하다. 이때 그들의 예술 행위나 창작품은 상실에 대한 위안이거나 보상물이며, 예술가들은 그들의 유년 시절 체험이나 기질에 따라 각기 '애도형 유형'과 '우울증형 유형'으로 나뉜다. 지은이에 따르면 푸슈킨이 전자고, 레르몬토프는 후자다. - 107쪽

애도란 상실을 겪은 주체가 상실된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성공적으로 전이시킨 것을 일컫는다. 예컨대 애도란 옛 애인을 새 애인으로 대체시킨 경우로, 새 애인이 옛 애인을 완벽하게 대체하지는 못하지만 옛 애인의 형상을 차츰 철회한 끝에 아픈 만큼 성숙해진 경우다. 반면 우울증은 옛 애인을 끝내 잊지 못하고 헤어진 옛 애인을 나와의 동일시 속에서 보존하는 경우다. 이렇게 되면 미운 사람은 나를 버리고 떠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버림받은, 못난 '나'이다. 대상과의 분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르시시즘과 자아 분열(혹은 자아 고문)에 빠진 우울증적 주체는 다른 대상으로 전이가 불가능하다.- 108쪽

이 책은 낭만주의를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두 정념적 범주로 해석하려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푸슈킨에게 있어 근원적 상실의 대용품이었던 정치적 낭만주의의 좌절이 미학적 자율성으로 치달아가는 전환점을 포착하고 있다. - 108쪽

사족이다. 자신이 DJ DOC에서 퇴출당한 이유가 '박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 옛 멤버를 고소한 전직 가수는,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장사(葬事)지내지 못했다. 저 사안의 명예훼손 여부를 떠나, 17년이 지나도록 박치라는 말을 스스로 웃어넘기지 못할 정도였으니 애도에 실패한 것이다. 고소장을 들고 경찰서 앞에서 인터뷰를 했던 그는, DJ DOC에서 퇴출당한 이래로 17년 동안 텔레비전을 보지 못했고 노래방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실패한 애도는 우울증이 된다. -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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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해 열림원 이삭줍기 5
보리스 필냐크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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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그것이 곧바로 사회주의 러시아의 안정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20-21년 사이에 볼가강 지역을 휩쓴 가뭄으로 오백만 명 이상의 농민이 죽었다. B. 필냑/필냐크(1894-1937)의 표현을 빌면 말 그대로 ‘벌거벗은 해’였고, “죽음이 삶이나 출생보다도 더 자연스러운” 시절이었다. 필냑의 <벌거벗은 해>(1921)는 흔히 소비에트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즉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산문문학은 일단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않은 벌거숭이 상태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벌거벗은 해>는 1917년 혁명이 가져온 사회적/문화적 혼돈(카오스)과 에네르기를 문학적으로 육화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혁명 직후 러시아의 사회현실적 삶과 정신적 삶의 현실이 문학텍스트 속으로 수축되어 들어간 것이 바로 <벌거벗은 해>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작가 필냑의 고유한 현실관(혹은 세계관)이다. 무엇이 진정 현실적인 것이냐라는 문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식의 헤겔의 말을 비틀자면, 필냑에게선 “반복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반복적인 것이다.” 예컨대, “아들아, 너는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포기하지 말아라. 결혼해서 아이들을 갖도록 해라, 아들아……” “이렇게 하여 집과 가게와 성경과 매질과 마누라와 마슈라 사이에서 4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매일매일이 그런 식이었고, 40년이 한결같이 그런 식이었다.”라거나 “인생의 모든 것은 바로 부메랑과도 같아... 내가 저지른 모든 일이 나에게 되돌아올 거야.” “백만 년 전에도 밤은 있었어. 지금도 밤이 있고 백만 년 후에도 밤이 있을 거야.” “나는 지금의 당신이었고 당신은 지금의 나일 것이다.” 등등의 구절들.

필냑에게서 ‘고대적인 것’이란 테마는 이때 반복적인 것, 반복할 수 있고 반복되어야 하는 것에 해당한다.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18세기) 이전의 러시아, 반(半)아시아적이고, 야만적인 러시아가 바로 그것이다. 한 문학사가의 지적에 의하면, 필냑은 인간은 환경에 의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인간 본질의 불변의 요소>에 대해 항상 언급했다. “그는 단지 출생, 사랑, 죽음이라는 기본적인 과정에 관심을 두었고, 그의 탁월한 작품은 고독, 이성, 절망의 슬픔과 공포, 자연과의 일체감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마음에는 사회의 대변혁을 초월하는 고정된 불변의 요소가 있어서 제국의 몰락, 군중의 폭동, 사회개혁이 인간의 근본적인 고통이나 혼란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필냑은 항상 암시하였다.”(마르크 슬로님)



20년대에 비교적 평탄했던 필냑과 당국의 관계(필냑에겐 자동차가 2대 있었다)가 30년대에 접어들면서 냉각되고 급기야는 숙청당하게 되는 사정의 밑바탕에는 그의 이런 세계관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벌거벗은 해>에서 ‘볼셰비키’와 ‘코뮤니스트’의 차이. “니체, 로자노프의 사상 및 슬라브주의적 영감을 민족주의적 볼셰비즘의 특이한 향취와 혼합한 필냑은 혁명을 부자연스런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대의 종말 및 17세기 모스크바 시대의 부활로 보고 환영하였다. (그에게서) 혁명적 폭발의 거친 원시주의는 단순하게는 일종의 스키타이인과 같은 삶의 방식의 재개를 선언하는 민족적 에너지의 방출이었다. 야만적인 러시아, 스텐카 라진과 푸가초프의 러시아, 필냑은 성적인 열정이나 순수한 애정적 환락의 장면에서 이러한 러시아인의 육체적인 힘을 찬양하고 무력하고 위선적인 유럽과 대비시켰다”(마르크 슬로님) 대략 이런 것들이 필냑이 가졌던 아이디어이다. 그리고 <벌거벗은 해> 등의 나타나는 특징적인 기교들과 기법들은 모두 이런 아이디어의 형식적 등가물이 될 것이다.

<벌거벗은 해>에 등장하는 고대성의 특징적인 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인물의 상징성, 알레고리성. 이야기 서술의 주체로서의 근대적 개인이란 것은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과 맞물린 근대소설의 발명이다. 근대소설은 이 문제적인 개인의 ‘내면’과 ‘심리’에 대한 묘사를 득의의 영역으로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서양 소설의 전통과 엄격하게 단절하고자 했던 필냑은 그의 인물들에게서 심리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인물들에 ‘고대성’을 부여한다. 즉 인물들은 자신의 내적 동기화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입장이나 신념, 관점, 주의, 주장들을 대표하는 자로서 선택된다. ‘누구누구의 눈으로’라는 식의 이야기 토막들이 들어가게 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따라서 <벌거벗은 해>에는 고유명사가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상황이나 모티브가 반복되는 것처럼 인물의 형상 또한 반복된다. 오르드이닌가의 보리스와 글렙이 성자 보리스와 글렙의 이름을 가지는 것처럼.

둘째로, 이야기의 메시지나 이념적 논쟁이 주로 인물들간의 대화를 통해서 표출된다는 점. 이것은 알레고리적인 인물이 선택될 경우 당연한 귀결이다. 인물에 성격화가 부여되지 않을 경우 상황묘사를 통한 메시지의 전달은 빈약해질 수밖에 없고 이것은 보완하는 것이 바로 대화인 셈이다. <벌거벗은 해>에서 혁명에 대한 인물들의 입장이나 태도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가령, 1917년의 혁명에 대해서 그것이 마르크스(=유럽)의 유물사관에 입각한 과학적 사회주의의 공식을 보여주는 것이냐, 아니면 러시아 민중에게 잠재되어 있는 천년 동안의 믿음이 현실화된 것이냐에 대한 논의. 근대소설의 경우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이런 류의 교술성을 또한 고대문학적 특성과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겠다.

셋째로, 의인화되는 자연. 이 또한 눈에 두드러지는 것이지만, 가령 <이고르 원정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해>에서의 자연(특히 눈보라)는 이야기 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발언한다. 그래서 마치 희랍비극에서의 코러스처럼 여기저기 참견하듯이 으르렁거리고 울부짖으며 “비유비유가가 샤샤샥”거리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전범이 되는 것은 동화(=옛이야기)의 세계이다.

넷째로, 연대기적 구성. 사제 실베스트르가 연대기 편찬자로 나오지만, 이미 ‘벌거벗은 해’라는 제목 자체가 연대기적이고 구성 또한 ‘서문’ ‘서술’ ‘결론’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 바, 이 또한 연대기의 구성을 모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해>의 작가 필냑은 근대소설의 작가와는 다른 작가적 위치와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인데, 연대기 편찬자로서의 필냑은 재료(material)의 편집자(editor)로서만 이야기 속에 개입하는 것이다. 때문에 혁명에 대한 필냑 자신의 태도는 상대적으로 모호하다.

하여간에 이렇듯 나이브한 상태의 재료들이 텍스트에 편입됨으로써(텍스트는 ‘잡화상’이 된다) 야기되는 결과는 현실과 허구간의 경계가 흐리마리해지는 것이다. “빵도 없고, 철제물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기아와 죽음과 공포와 두려움”뿐인 1919년, 동시대의 상황, 즉 혁명 이후의 2-3년간의 기간은 일종의 무중력적 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배적인 체제와 가치의 붕괴가 동반하는 이러한 혼란과 아노미 상태, 카오스모스적인 상태는 일시적으로 역사가 정지된 상태이다. 즉 역사서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역사를 꿰뚫어 서술할 수 있는 단일한 시각적 입지(=퍼스펙티브)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해>에 등장하는 볼셰비키, 아나키스트, 분리파교도, 수구세력 등은 저마다의 시각과 가치관의 코드를 통해 혁명과 당대의 현실을 해석하려고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는 못하다. 따라서 모든 현실의 파편들, 재료들을 자신의 단일한 코드로 편집, 재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허구적 장르의 지배력은 거의 무력화되는데, 이러한 사정은 작가 필냑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연대기라는 형식이 어떤 의미에선 그에게 강요된 형식일 것이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벌거벗은 해>의 고대성의 모티브들이 암묵적으로 제시하는바, 혁명의 눈보라가 몰아친 후 드러나게 될 17세기 이전의 러시아, 아시아적 러시아상은 텍스트 속에서 반복되는 여러 가지 모티브들에도 불구하고 명료하게 정식화되거나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비에트 문학 중에서 혁명과 혁명에 참가한 주인공을 서사적인 형식으로 그리고 새로운 소설을 창조하려 한 최초의 시도가 B. 필냑의 소설 <벌거벗은 해>였다. 그러나 새로운 형식과 문체로 있지도 않은 현실을 재현하려고 한 바람에 작가는 인간과 사건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고, 혼란스럽고 절충주의적인 관점만 드러내고 말았다.”(V. 부즈닉, L. 에르쇼프) 이러한 관점은 한편으로 정당하기 짝이 없는데, 소비에트 문학사는 소비에트의 승리, 볼셰비키의 승리라는 역사적 결과를 전제로 하여 서술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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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괭이 2006-08-23 04:04   좋아요 0 | URL
1920년대 자체가 러시아문학에서 그야말로 '문제적인 시대'로 기록될 만하지만, 쟈마친, 올례샤, 필냑, 플라토노프 등의 유수한 작품 중 필냑의 [벌거벗은 해]가 역시나 가장 문제적인 듯. 하지만 이 소설의 온갖 난해성도 늙은 아르히포프가 임종시 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인 "“아들아, 너는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포기하지 말아라. 결혼해서 아이들을 갖도록 해라, 아들아……”(로쟈님이 인용한 부분)를 되새기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싶네요. 실상, 저 말 때문에 이른바 "가죽 재킷"(=공산주의자) 아르히포프가 결혼을 택하는 것이기도 한데... 겸사겸사, 골룹코프 교수의 책도 1920년대 문학의 틀을 잡는 데 아주 유용함.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바슬라프 니진스키 지음, 이덕희 옮김 / 푸른숲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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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 시인 츄체프의 시구인데, 고골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작품들 속에서 ‘황당한’ 인물들을 만나다 보면 자연스레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비단 문학작품이 아니더라도 러시아란 나라의 자연적/역사적 조건에 대한 약간의 상식만 갖고 있으면 이 나라의 ‘비합리성’에 대해서는 어림짐작이 가능하다. 혁명 이전 전세계 육지의 1/6에 해당하는 광활한 영토와 한랭한 기후가 이 나라의 자연적 조건이라면, 3세기에 걸친 이민족 몽고의 강압적인 지배는 그 역사적 조건이다.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잔혹한 삶(러시아적 삶!), 그래서 비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덕목은 ‘인내’였다.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들이 자인한 바 있듯이 러시아적 영혼이란 달리 ‘노예적 영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의 노예적 상태란 단지 정치적 부자유나 신체적인 구속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인간 실존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폭력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류사의 역사적 조건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 조건에 대한 인내의 '폭발'에서 광기의 계보학은 태어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1866)에는 어린 로쟈가 학대받는 늙은 말의 목을 껴안고 흐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유일한 심리학자’라고 일컬은 바 있는 철학자 니체는 1889년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학대받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끼다가 쓰러져 정신을 잃는다. 이후에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00년에 사망한다. 1889년에 태어난, 20세기초 러시아가 낳은 전설의 발레리나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디오니소스적인 영혼의 소유자는 철학을 하는 대신에 춤을 추었을 뿐.

그는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나머지 30년은 정신병원에서 보냈는데, ‘영혼의 절규’란 이름을 새로 얻은 그의 ‘일기’는 그가 정신을 놓기 직전인 1919년초 6주간에 걸쳐 씌어진 기록에 근거한다. 한 민감한 영혼이 삶의 고통과 싸운 이 쟁투의 기록에는 도스토예프스키적, 니체적 흐느낌이 가득 배여 있다.

그는 고기를 먹으면서 울고, 사랑의 시를 적으면서 울고, 아내의 울음 때문에 또 운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전설적인 발레리나’ ‘위대한 예술가’라고 했지만, 그 자신에 의하면 그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은 단순한 사람”이며, 그는 “그리스도도 내가 평생에 걸쳐 받은 고통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그가 받은 고통은 그 자신의 몫만이 아닌 전 인류의 고통이기 때문은 아닐까? 한 시인을 위해 울어주던 버드나무처럼 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운다. 그의 일기는 이 울음의 기록이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정신의학자들에 의하면, 그의 병명은 정신분열증, 더 정확하게는 ‘자기애적 인격의 분열적 정서 혼란’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자기애적’이란 진단은 절반만 옳다. 브로일러나 프로이트 같은 당대의 대가들조차도 치유할 수 없었던 그의 병증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앓았고 또 니체가 앓았던 병, 곧 자기애-인류애적 정신분열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병증의 치유는 자기만의 구원이 아닌 전인류의 구원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병증의 환자들은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맨마지막에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자기애-인류애적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경전과도 같은 이 책에서 니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지 짐승이 아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나 역시 결점들을 지녔다. 나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다. 나는 신이 되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다. 이것이 내 인생의 목표이다.”(348쪽) 당신도 그런 목표를 갖고 있는가, 라고 니진스키는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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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의적 2004-12-01 09:01   좋아요 0 | URL
정말 글을 잘 쓰시는군요.러시아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 부럽습니다. 니진스키 저도 읽어볼까요? 행복한 12월 되세요~~

FTA반대리들러 2005-07-01 00:24   좋아요 0 | URL
서평을 보니 매우 간결하게 잘 쓰셨습니다. 다만 정신분열병에 대한 제 의학적인 지식으로 볼 때 맞지 않는 부분이 보여 지적해드리고 싶습니다. 흔히 정신과의 의료 기록(Chart)에서 쓰이는 진단 용어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언어와는 맥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일종의 의료 기술적인 접근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진 용어죠. 일단 니진스키를 정신분열병 환자로 규정하면서, 의사가 그에 대한 진단을 '자기애적 인격의 분열적 정서 혼란'이라고 했다는 전제를 둔다면, 여기서 '자기애적'이라는 용어는 '자신을 사랑한다'라는 사전적인 용어가 아니라 의학적인 용어로 이해하여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자기애적 방어 기제(Narcissistic defense)의 줄임말이죠. 이것은 니진스키의 심리 상태에서 투사적 동일화와 같은 내적 긴장의 완화 기교가 인식되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자기애'적이라는 진단이 절반만 옳다는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로쟈님이 이 글을 통해서 쓰신 '자기애-인류애적 정신분열병'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말씀하려고 하신 바는 이해가 가지만, 의료 용어에 대한 정확하지 못한 이해 혹은 해석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지적드립니다. 인명도 틀리군요. 브로일러가 아니라 블로일러(Bleuler)가 맞습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 당시 블로일러나 프로이트가 정신분열병을 치유하지 못했더라도 그때(19세기~20세기 초반)는 정신의학의 태동기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죠. 지금은 항정신병 약물을 복용하면 치유 가능성이 충분히 높은 병증입니다.

로쟈 2005-07-20 19:54   좋아요 0 | URL
코멘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투사적 동일화와 같은 내적 긴장의 완화 기교가 인식되었다는 뜻"이 어떤 뜻인지 좀 모호한데('완화 기교'는 무엇이고, 누구에게 인식되는 건지요?), 조금 자세하게 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갈매기 - 엘리트문고 47
안톤 체호프 지음 / 신원문화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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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4막에서 니나가 트례플례프에게 하는 말: '난 이제 진짜 여배우예요. 난 즐겁게 기꺼이 연기를 하고 무대에 서면 도취하여 자기를 훌륭하다고 느껴요.(...) 무대에 서는 거나 글을 쓰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일에서 명성이니 영광이니 하고 내가 공상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실은 인내력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어요.(...) 자기 십자가를 지는 법을 알고 다만 믿을 지어다, 이거죠.'

이 대사는 <갈매기>라는 연극의 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깨닫는 유일한 주인공이 니나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결국 삶을 '인내'하지 못하고 권총 자살하는 주인공 트례플례프와 니나를 구별시켜 준다. 또한 이 4막의 희곡에서 유일하게 뭔가 등장인물의 의지(힘)을 담고 있는 대사이기도 하다. 니나를 제외한 대다수의 인물들이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서 체념하고 달관했던 것과는 달리, 니나는 적극적으로 삶에 뛰어들었고 뭔가 경험했으며 그래서 정말 자신을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었다.

꿈많고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젊은 처녀로 등장하고 있는 니나는 3막이 끝날 때까지는 감상적 여주인공의 형상에서 크게 이탈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형상은 트례플례프가 그녀에게 부여한 형상이면서 동시에 그녀를 읽어내는 독자들이 부여한 형상이기도 하다. 자신을 갈매기로 비유하는 니나에게 트례플례프가 자신이 쏘아죽인 갈매기를 보여주는 것은 그가 니나에게 부여하고 있는 형상(일종의 강박관념)이 어떤 것인가를 시시하고 있다. 갈매기처럼 자유롭게 비상하는 삶이라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삶에 대한 이러한 경직된 태도는 4막에서 니나와 트례플례프가 대면하는 장면에까지 계속 견지된다. 니나는 잘난 소설가를 따라나섰지만 버림을 받고 배우로서도 빛을 보지 못한 채 2년 만에 고향에 들른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자면 니나 역시 감상적 여주인공이라는 문학적 형상에 대한 모방이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인용한 대사에서 보여지듯이 그녀가 보다 넓은 세상에서의 경험을 통해 얻은 삶에 대한 통찰은 문학적 모방으로서의 감상적 여주인공의 그것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선다.

이렇듯 달라진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4막에서 다시 반복하는 트례플례프의 대사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도, 사자도, 독수리도, 뇌조도, 뿔달린 사슴도, 거위도, 거미도, 물 속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도,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도, 사람 눈으론 볼 수 없던 것들도,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생물, 모든 생명, 생명이라는 생명은 모두 슬픈 순환을 마치고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1막에서 트례플례프가 20만년 후의 이 지상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인데, 이 미래의 시점에서 보자면 현재의 삶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미소해서 거의 무가치할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이 페시미즘을 니나는 4막에서 '정답고 산뜻한 꽃과 같은 감정'으로 다시 암송한다. 이는 그러한 페시미즘과 허무의 긍정으로 읽힐 수 있다.

자신의 창조한 인물(니나는 트례플례프의 여주인공이다)의 이러한 예기치 못한 성숙과 배반은 창조자의 입김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암시한다. 이제부터 그녀는 자신의 의지에 의한 자기만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마지막 대면에서 그녀는 트례플례프의 품을 빠져나와 유리문 밖으로 나간다. 즉 연극의 공간에서 삶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결정적으로.). 트례플례프의 자살은 이렇듯 (정서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더 이상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 니나에 대한 유일한 대응으로 보인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갈매기>는 성숙한 시기의 작가 체홉의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유한한 삶 속에서 순간순간이라도 제 목소리와 빛을 뽐내는 사소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고, 작가 체홉은 이러한 즐거움에의 권리는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불행한 경험에 유폐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삶에의 의지로 승화시키는 니나와 같은 여주인공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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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혜원 월드베스트 22
A.P.체호프 지음 / 혜원출판사 / 1998년 2월
평점 :
절판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1899)은 중년의 사내와 젊은 유부녀 사이의 불륜이 '이제 막 시작인 사랑'으로 전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마흔이 조금 안된 이 중년의 사내는 드미트리 구로프이고, 스물을 갓 넘긴 이 젊은 유부녀는 안나 세르게예브나이다. 이들은 휴양지 얄타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지만, 서로를 잊지 못하는 바람에 다시 만나게 되고 결국은 진짜 사랑, 그리고 행복한 미래의 문턱에 서게 된다.

그래서 '해변에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었다.'의 이야기의 시작은 이런 결말을 가지게 돼버렸다: '조금 기다려보면 해결책이 찾아질 것도 같았다. 그렇게 되면 새롭고 아름다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종점이 아직 멀고도 멀었으며, 가장 복잡하면서도 힘든 일이 아직 남아 있음도 분명하게 느꼈다.'

해결책이란 무엇이고 이 복잡하고 힘든 일이란 무엇일까? 짐작에, 그것은 두 사람의 원만한 이혼과 재결합의 과정일 터인데, 이는 자식이 셋이나 딸린 중년의 사내 구로프는 말할 것도 없고 안나에게도 쉬운 일이 아닐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삶의 새로운 공간 앞에서 이들이 잠시 머뭇거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체홉이 독자인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바로 거기까지이다. 사랑의 힘을 막무가내로 믿기에는 현실의 관성이란 것이 너무 막강하고, 그렇다고 이대로 체념하고 주저앉기에는 다시 그 '새장 같은 삶'이 지겹고 두렵다.

이 단편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일상화된 '불륜'을 목격한다. 안나는 남편을 속이고 지방에서 모스크바로 와서는 호텔방을 잡아놓고 구로프를 부르고, 구로프는 안나에게 가는 길에 딸을 학교까지 바래다 준다(이게 생활이다!). 남들 앞에 내놓고 사는 공적인 삶과 그들만의 비밀스런 삶(사생활)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안나는 자신들의 밀애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으리란 두려움과 남들의 눈을 피해야 한다는 처량함에 울음을 터뜨리고 이젠 문제는 조금 복잡해졌다는 걸 두 사람은 직감한다.

구로프는 안나를 어루만지다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어느 것이 진짜 구로프인가?). 이미 머리가 희끗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난생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되다니. 그것도 서로가 각각의 새장에 갇힌 채. 이젠 어떡해야 하나? 그래서 우리는 다시 결말에 이른다. '조금 기다려보면 해결책이 찾아질 것도 같았다. 그렇게 되면 새롭고 아름다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종점이 아직 멀고도 멀었으며, 가장 복잡하면서도 힘든 일이 아직 남아 있음도 분명하게 느꼈다.'

체홉의 서술자 또한 이 장면에서 이야기를 중단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제 막 새로운 삶의 공간, 문턱에 이른 이들에 대한 배려이자 예의일 것이다. 비록 낙관적인 장래를 장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이들은 이전과 같은 삶은 계속 반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작가 체홉이 즐겨 다루는 '또 다른 삶'이다. 사랑은 이런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아주 요긴한 소재이다. 그 다른 삶이 유부남 유부녀의 불륜(이것도 승화되면 사랑이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해서 우리가 두 주인공을 탓해야 할까? 불륜을 미화시키고 있다고 작가를 비난해야 할까? 그럴 만한 권리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제도적이고 관습적인 굴레를 떨치지 못하는 것을 두고 도덕이라 말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부도덕, 비도덕이 편이 되어야 할 것이기에. 반대로, 삶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삶의 가능성을 향유하는 것을 우리가 도덕이라 부를 수 있다면, 안나와 구로프는 이제 비로소 도덕적인 삶의 길에 들어선 것이고, 우리는 그들의 새로운 시작(아직은 막막한 불행의 시작)을 축하해 마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도덕주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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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a 2004-10-21 01:26   좋아요 0 | URL
코멘트 남겨주셨더군요.. 제 리뷰를 러시아문학 전공자나 전문가는 읽지 않고 지나치길 바랬습니다.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가슴에 남네요 ^^;

비로그인 2010-02-07 20:08   좋아요 0 | URL
시작이건 끝이건 불륜이 어떻게 하면 '승화'되는 건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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