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늦은 오후로 접어들고 있지만, 모스크바는 아침시간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어제 한국에서 온 대학원생들과 한담을 나누다 방으로 와서 뉴스기사를 검색해본다. 동해안 폭설 소식에 아직 구제역 파동은 끝날 줄을 모르는군. 기사들을 읽다가 칼럼 하나가 인상적이어서 스크랩해놓는다. 구제역 현장의 '농심'을 전달해주고 있다. 살처분되는 돼지들의 사진을 보면 묵시록의 시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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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11. 02. 12)[낮은 목소리로]생명의 질서가 무너져간다

구제역 파동이 빨리 끝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강진은 약 2만6000마리의 소를 키웁니다. 2000농가가 소를 키우니까 평균 13마리 정도 키우는 셈이죠. 구제역 파동이 나면서 소 사육농가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강진읍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면 단위 식당·상가는 거의 폐업 직전입니다. 밥집도 술집도 파리만 날립니다. 소 사육농가는 명절도 없이 방역을 하루에 두 번씩 합니다. 집안식구들도 내려오지 못하게 하고 축사를 지킵니다. 방역초소를 보면 거의 계엄령 수준입니다. 움푹 파인 도로를 지날 때 상처난 농민 마음을 보는 것 같아 아픕니다. 

구제역은 사람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서로 만나지 말아야 하고 그게 도리이고 예의입니다. 계모임, 동창회, 작목반 회의, 농민회 총회도 연기됐습니다. 관계의 단절은 결과이고 또 원인이기도 합니다. 자연과 격리된 공장식 축사가 결국 구제역의 원인이고, 생리와 섭리를 무시한 인위적인 양육이 병의 근원입니다. 규모화 농업은 시스템에 의존하는 농업입니다. 제초제와 살충제로 나락을 키우고 항생제와 외국산 사료로 소를 키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규모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 단계에서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조물주는 모든 생물을 자연교배 할 수 있게 창조했지만 소는 정자를 수의사가 주입합니다. 임신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임신을 시킵니다. 자연이 역사와 진화를 통해 유지했던 생명의 질서가 인간에 의해 제조됩니다. 현대 농법은 자연과 자연의 유기적 순환을, 생명과 생명 간 결합과 관계를, 사람과 생물 간 교감을, 사람과 사람 간 나눔과 소통을 단절시킵니다.

  

인간관계도 끊어내는 구제역
사람들은 흔히 ‘질서를 지킵시다’라고 말하면 줄을 잘 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자연의 질서는 관계를 잘 맺는 것입니다. 쌀 미(米)자를 보면 위 아래로 사람손이 여든여덟번 간다는 말이 되지만, 가운데 십자를 기준으로 사방에서 협력해야 한 톨의 쌀이 나온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람과 씨앗이 제대로 관계를 맺어야 생명이 탄생합니다. 관계는 소유의 개념이 아닙니다. 서로 존중하고 섭리를 이해하고 생명의 원리를 보장하는 것이 관계의 시작입니다.

구제역 사태로 약 350만마리의 생명이 살처분됐습니다. 조류인플루엔자까지 합치면 약 1000만마리의 생명이 죽었습니다. 생매장하는 장면이 생중계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을 소유하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오만과 독선이 생매장의 철학적 바탕입니다. 살처분 말고 다른 대안이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는가를 저는 모릅니다만 자연이 부여한 생명을 인위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인간의 오판이 병의 원인이고 그 결과라는 사실은 숨길 수 없습니다. 살처분 주사를 맞은 어린 송아지가 어미소 젖을 물고 죽었다는 농민의 울음 섞인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소 27마리를 매장한 농민이 결국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죽음의 잔치를 빨리 끝내야 합니다. 그리고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효율과 경쟁력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똑똑히 보고 성찰해야 합니다.

가축 묻고 강 파는 ‘포클레인 정치’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4대강 사업이 속도전의 기세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무지를 넘어 생명을 무시하는 정책 입안자들의 서류놀음이 죽음의 잔치를 부추깁니다. 용산참사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시위는 그저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람을 불태웠습니다. 동물을 살처분하는 포클레인과 4대강을 파는 포클레인과 경찰을 진입시킨 컨테이너가 한국 사회를 인정사정없는, 피도 눈물도 없는 죽음의 나라로 만들고 있습니다. 삼호주얼리호 선원들이 무사히 귀국해서 다행이고 선장이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배에 뚫린 무수한 총탄자국을 보면서, 우리 가족이 있는 배에 저렇게 많은 총을 난사한 저들의 작전이라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그 배에 국회의원이나 재벌 총수들이 인질로 있었다면 저런 작전을 벌일 수 있었겠는가 묻습니다. 대통령의 가족이 배에 있었다면….

돈을 벌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순간입니다. 여러 해 동안 쌓은 사람 간의 신의도 잃기는 순간입니다. 세상사 다 그렇습니다. 하물며 생명은 끊어지면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겸손하게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결정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생명을 다루는 일에 정치적 이해관계, 경제적 타산 이딴 거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강광석 | 전농 강진군 정책실장)  

11.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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