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를 앞두고 '다량 입하'하듯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눈에 띄는 책들을 꽤 챙겨놓고는 있지만 그래도 역부족이다(읽기는커녕 그냥 입수하는 것도 만만찮다, 비용면에서).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느새 2월이 코앞이다. 2월이 오기 전에 넘겨야 할 원고들이 또 줄지어 있건만, 여하튼 그래도 '2월맞이'는 해놓는다. 연휴에 뒤이어 '휴가' 일정이 있어서 정작 책을 손에 들 시간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외양'은 갖춰놓아야겠기에...  

1. 문학  

정과리 교수가 고른 책은 최일남 선생의 <풍경의 깊이 사람의 깊이>(문학의나무, 2010)다. 소설집이 아니라 에세이집. "한국에 수많은 글쟁이가 있지만, 한국어의 풍부한 어휘 자원을 자유롭게 골라가며 생각과 마음의 결과 꼴을 섬세하게 빚고 잣고 다듬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최일남 선생은 그 드문 이들 중의 한 분이다."라는 게 추천의 큰 이유다. 찾아 보니 이 문단 원로의 작품집이 근래에는 별로 나온 것이 없다. 산문집으론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현대문학, 2006)가 마지막 책이었다. 지난주 세상을 떠난 박완서 선생이 1931년생이고, 최일남 선생이 1932년생이다. 일테면 같은 세대다. '박완서 산문 읽기'를 최근 마이리스트에 올려놓기도 했는데, 남성 산문으로 '최일남 에세이'를 잇대놓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2. 역사 

김기덕 교수가 고른 역사분야의 책은 손영호의 <다시 읽는 미국사>(교보문고, 2011)다. 미국사 개요 정도의 책으로 보이는데, 소개는 이렇다. "이 책은 ‘통합의 역사 USA, 신화의 역사 아메리칸 드림, 정복의 역사 총, 차별의 역사 아미스타드’라는 목차에서 보듯이, ‘통합’과 ‘신화’ 그리고 ‘정복’과 ‘차별’이라는 키워드로 미국사의 진실을 들여다보고 있다. 물론 이 주제가 미국사 전반을 포괄하지는 못할 것이며, 다시 나누어진 각각의 소주제들은 서술이 다소 짧아서 심도 있는 분석에는 미치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일반인을 위한 미국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해해 줄 수 있겠다." 물론 조금 '긴' 걸 원한다면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2010)이 제격이다. 17권 분량이 오롯하니까. 더 깊이 있는 독서를 원한다면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의 자료집 <'미국 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들>(이후, 2011)을 더 얹을 수 있겠다.   

  

미국사도 미국사지만 개인적으론 '읽기의 역사'도 흥미를 갖고 있는 주제여서, 스티븐 로저 피셔의 <읽기의 역사>(지영사, 2010)가 반갑다. 이 참에 로제 샤르티에 등의 엮은 <읽는다는 것의 역사>(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6)도 구해놓으려 했지만 이미 품절 상태여서 유감이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2000)까지 내 딴에는 '3종 세트'로 모아두려고 했기에.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추천한 책은 제이미 화이트의 <나쁜 생각>(오늘의책, 2010). 부제가 '논리적이며 비판적인 사고를 위한 안내서'이다. '비판적 사고'를 키워드 한 책을 더 찾아보니 <피셔의 비판적 사고>(서광사, 2010)도 눈에 띈다. 가장 널리 쓰이는 교재라고 한다(아마도 교양 논리학 수업에서). 한때 논술시험이 강조되면서 그런 교재들이 다수 출간됐었는데, 짐작에 '원조' 격으로는 김광수의 <논리와 비판적 사고>(철학과현실사, 2007)가 있었다. 논리학 입문서. 이미 예전 판은 절판됐고 현재 나와 있는 건 '쇄신판'이군...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추천한 책은 강미현의 <비스마르크 평전>(에코리브르, 2010)이다.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의 주역이고 독일제국을 일약 유럽의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피에 의존하고 민주주의에 역행한 독재자로서의 모습으로 인해 독일역사에서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인 인물이다. 초등학교 시절 세계위인전집에서 읽은 '비스마르크'의 인상이 다시금 떠오르는데, 언제 한번 일독해봐야겠다.    

비스마르크가 비록 정치가이긴 하지만 평전으로 정치/사회 분야를 대체하는 게 멋쩍다면 박상훈의 <정치의 발견>(폴리테이아, 2011)를 더 얹어도 좋겠다. 부제는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 올해는 큰 선거가 없는 해이니만큼 '공부'에 더 많은 투자를 해도 손해는 나지 않을 듯싶다. 박명림, 김상봉 교수가 공화국의 조건에 대해 질문하고 답한 <다음 국가를 말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11)도 마찬가지다. 그 '다음 국가'의 상이 내년 대선의 화두가 될 거라는 '복지국가'이기도 하다면, 신필균의 <복지국가 스웨덴>(후마니타스, 2011)도 미리 읽어볼 만한 책이다.

5. 경제/경영 

박원암 교수가 고른 책은 조지 매그너스의 <고령화시대의 경제학>(부키, 2010). 제목 그대로, 저자는 "저출산 · 고령화로 전 지구적으로 부동산 등 자산가격과 물가, 저축, 정부재정적자 등 거시지표는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선진국들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개발도상국으로부터 이민을 받아들일 것인가? 고령화 문제를 시장에 맡겨서 해결해야 할까 아니면 정부가 개입해야 할까? 저출산의 원인을 종교적 신념의 약화와 세속적 자본주의에서 찾을 수 있을까?" 등의 문제를 다룬다고 한다. 낯익은 문제들인데, 그 해법은 마련돼 있는지 궁금하다('늙어가는 대한민국'에 대한 진단도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나왔다).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문학동네, 2010)도 덩달아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6. 과학 

장경에 동아사이언스 실장이 추천한 책은 조나단 실버타운의 <씨앗의 자연사>(양문, 2010)이다. '씨앗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는 책. "씨앗의 생존방식을 비롯해 무엇이 씨앗에서 싹을 틔우는지, 어떤 씨앗에는 기름이 많고 어떤 씨앗에는 녹말이 많은 이유, 먼지처럼 가벼운 난초의 씨앗에서 20kg에 이르는 쌍둥이코코넛 씨앗, 식물들이 힘겹게 유성생식으로 씨앗을 만드는 이유 등 씨앗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변화하는 환경에 자신을 적응해가는 진화의 힘으로 설명한다." 책 또한 그런 씨앗들만큼이나 탐스럽다. 그 씨앗들의 많은 수는 자라서 나무가 될 터인데, 박상진의 <우리 나무의 세계>(김영사, 2011)은 그 또다른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 나무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개는 이렇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우리 민족의 삶이 담긴 역사서와 고전소설, 옛 선비들의 문집, 시가집 등 고전문헌의 명확한 해석을 통해 나무의 삶을 재조명하고 인문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탐구한 책이다. 나무들의 다채로운 삶과 생태를 생생히 담은 700여 장의 사진과 50여 장의 옛 그림을 통해 우리 나무의 세계를 완성하였다.

 

사실 '씨앗'이나 '나무'에 관한 책은 3월에 더 읽을 만한 책이고, 재앙 수준의 구제역 파동을 상기하자면 <바이러스 습격사건>(알마, 2011) 같은 책이 관심도서가 될 만하다. <대혼란>(알마, 2010)과 <조류독감>(돌베개, 2008)까지 한번 더 떠올려보게 된다. 한데, 대체 구제역은 언제 종결되는 것일까? 근본적인 대책은 있는 것일까?..

 

7. 예술 

이주은 교수가 추천한 책은 쉬레이의 <집, 예술이 머물다>(시그마북스, 2011). 짐작이 갈 듯 말 듯한 제목인데, 소개에 따르면, "중국의 예술가이자 인문학자인 쉬레이가 편집한 이 책에서는 집이라는 공간에 깃든 일상의 아름다움과 특별함을 발견해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책장을 넘기면서 중국 황제의 침실에서부터 문인들의 우아한 정취, 유럽 명문가의 장원, 이슬람식 샹그릴라 풍으로 지은 집 등을 구경할 수 있다. 뒤편에는 중국의 현대미술작품 속에서 어떻게 집의 개념을 제시하는지 보여준다." 그런 종류라면, 여전히 왕성하게 책을 내고 있는 임석재 교수의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인물과사상사, 2010)도 챙겨놓을 만하다. 잘 아는 듯하면서도 낯선 서울의 모습과 조우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8. 교양 

철학자 탁석산이 고른 책은 폴 존슨의 <위대하거나 사기꾼이거나>(이마고, 2010).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의 유명 인사 인물평이다.  

"저자는 기자 출신으로 100여 명의 유명 인사를 실제로 만난 이야기를 아주 짧지만 인상적으로 전해 준다. 피카소는 자신이 만난 사람 중 가장 사악한 사람이었다거나 로널드 레이건은 유머에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이었다거나 사르트르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어서 죽을 때는 무일푼이었다는 것 등이다.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유명 인사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이 있다. 하지만 모두 가벼운 이야기만은 아니다. 왜 토인비가 얼마나 형편없는 역사가인지 혹은 리처드 닉슨이 얼마나 통찰력이 대단했던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이미 <지식인의 두 얼굴>에서 그의 '독설'을 만끽한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어볼 수 있겠다.   

9. 실용 

손수호 국민일보 논설위원이 추천한 책은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 2010). 요즘 청춘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 책인데, 추천의 변은 이렇다.  

저자의 신실함은 방법론을 전하는 데서 빛난다. 이를 테면 꿈을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 하고, 정체성은 성찰을 통해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성찰에 이르는 길로서는 독서, 대화, 여행을 꼽는 식이다. 길을 먼저 걸어간 선험자의 내비게이션은 구체적인 지시어로 이어진다. 시간을 잘 관리하라, 신문을 제대로 읽어라, 글쓰기 능력은 힘이 세다…. 다 아는 이야기 같지만 읽을수록 새롭게 다가선다. 저자는 한국인의 평균연령을 80세로 잡는다면 24세는 아침 7시 12분이라고 셈했다. 대학을 졸업하거나 재학 중 군대에 다녀온 복학생이 읽기에 딱 좋은 책이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책은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2010). 그리고 20대 청춘의 압도적 현실을 가리키는 키워드로서 대학 등록금 문제를 파헤친 <미친 등록금의 나라>(개마고원, 2011)이다. '독서' '대화' '여행' 말고도 해야 할 일을 찾아볼 수 있을 듯싶다.   

10. 동아시아  

최근 개인적인 관심사 중 하나는 중국인데, 그건 워낙에 많은 책들이 출간되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면도 있다. 중국 문학 번역서도 넘치고 중국 경제를 다룬 책들도 거의 매주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 중국을 이해하는 한 가지 시각은 '동아시아'라는 문맥 속에서 바라보는 것인데, 길잡이가 될 만한 책이 출간돼 읽어볼 참이다.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창비, 2011)가 그것이다. 아울로 개정판으로 나온 <동아시아인의 '동양' 인식>(창비, 2010)도 지난 연말에 챙겨둔 책이다. 한국사가 다시금 고등학교 필수 교과목으로 채택된다는 얘기가 나오던데, 세계화시대에 보조를 맞추자면 '동아시아사'나 '세계사'가 필수 과목이 돼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11. 01. 29.  

P.S. '2월의 읽을 만한 고전'으로 이번에 다시 나온 E. H. 카의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열린책들, 2011)을 고른다. 평전이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데 좋은 가이드가 되는 책이고, 개인적으론 오래 전 학부시절에 홍성사판으로 읽은 기억도 새로워서 골라놓는다. '이달의 고전 작가'로 도스토예프스키를 고른 셈 치면 되겠다. 마르끄 슬로님의 <도스또예프스끼와 여성>(열린책들, 2011)도 같이 나왔는데,  이 책에 대해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세 여인'(http://blog.aladin.co.kr/mramor/1120144)이란 페이퍼에서 다룬 바 있다. 일본 비평가의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지 않은 것들>(열린책들, 2011)까지 다 챙겨놓으려 한다. 

 

만약 카의 평전을 손에 들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초기작들도 같이 책상에 올려놓으면 좋겠다.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과 두번째 소설 <분신>, 그리고 시베리아 유형 이후의 복귀작 <죽음의 집의 기록> 등이 추천하고픈 작품들이다. 음, 나도 다시 읽고픈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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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1-2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드워드 카의 러시아 혁명사 같은 책은 전문적이고 어려워서 오히려 그가 쓴 평전이 더 많이 읽힌다고 합니다.그가 쓴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은 러시아 문학연구가들도 높이 평가한다니 고전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로쟈 2011-01-29 22:27   좋아요 0 | URL
그런 의미에서 <바쿠닌 평전> 등도 다시 나오면 좋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01-30 14:45   좋아요 0 | URL
바쿠닌 평전도 절판되었나요? 카의 책 중 절판된 게 많군요.

misungkid 2011-02-0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덕분에 저의 보관함이 꽉찼습니다.
언제 다 사서 다 읽나 걱정이 되지만 좋은 책을 많이 만나게 되어서 기쁩니다.

로쟈 2011-02-01 17:24   좋아요 0 | URL
^^

雨香 2011-02-0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핀란드에 이어서 스웨덴이 바람을 한번 타겠군요. (핀란드, 스웨덴 독서목록으로..)
작년부터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던 동아시아에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앞으로 좀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터라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가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2-01 17:25   좋아요 0 | URL
'복지 바람'이 분다고 하니 내년 대선은 흥미로울 거 같습니다. 지난번이 최악이었죠...
 
철학자 100명이 추천하는 책 107권

이번주 프레시안 서평코너(books)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0128132630). 프레시안에 연재된 <철학자의 서재>(알렙, 2011)를 대상으로 오늘 오전에 부랴부랴 써보낸 원고이다(<철학자의 서재>에 비하면 <책을 읽을 자유>는 아주 가벼운, 날씬한 서평집이다!).  

  

프레시안(11. 01. 28) 100명의 '미친 존재감'…활짝 열린 그 방으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하여 매주 연재해온 서평코너 '철학자의 서재'가 한권의 책으로 묶였다. 무려 '100명의 철학자'가 쓴 '107편의 서평'이다. '무려'라는 말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규모의 기획이 진행된 전례가 또 있을까 궁금할 정도니까. 혹자는 "'100명의 철학자'라니? 한국의 철학자는 다 동원된 거 아니냐?"란 생각도 들지 않을까? 



한국철학계의 동향에 과문한지라 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말 그대로 '한국철학사상'을 연구하는 단체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한철연은 시대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진보적 소장 철학연구자들이 모여 1989년에 창립한 학술공동체"다. 1989년에 '소장'이었다면 21년이 지난 지금은 대개 '중견'이거나 '노장' 철학자들이 다수일 법한데 책의 표지에는 '한국의 젊은 지성 100명'이라고 돼 있다. 지난 21년간 함께 연구하며 키워온 '연대의식'이 연재를 이끌어온 밑바탕이었다고 서문에는 적혀 있는데, 어쩌면 그 연대의식이 이 지성들의 '젊음'을 유지시켜온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연대할 때 늙지 않는다?! 아니면 설마 '철학'이 비결일까? 

개인적으로 <프레시안>에 자주 드나드는 편은 아니어서 '철학자의 서재' 코너를 꼬박꼬박 챙겨 읽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억에는 <지중해 철학기행>(클라우스 헬트 지음,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펴냄)에 대한 서평인가를 통해서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됐고 막연하지만 나중에 책으로 묶이겠거니 짐작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거지만, 그 '나중'은 언제나 '지금'이 된다! '찾아보기'까지 포함해 903쪽의 책이 그래서 내 책상에도 떡 하니 놓여 있다. 푸짐하고 번듯하다. 이 책 한권만으로 어느새 나의 서재 또한 '철학자의 서재'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존재감이 충만하다. 요즘 유행어로는 '미친 존재감'이지만, 손에 들어보니 '미친 무게감'이 마음에 더 와 닿는 표현이다.

107편의 서평이 10개의 장으로 분류돼 있으니 비유컨대 아주 푸짐한 뷔페식당에 들어선 기분이라고 할까. 니체는 이미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뇌는 우리의 위장을 닮았다고. 그래서인지 독서욕은 때로 식욕과 잘 구분되지 않는다. "무엇 먼저 읽을까?"는 그래서 "무얼 먼저 먹을까?"와 같은 질문이다. 물론 이런 '식당'에 들어설 때는 미리 소화제라도 챙겨두는 게 좋지만, 그렇더라도 어차피 다 읽을/먹을 수는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두고두고 곶감 빼먹듯이 읽어치우는 게 상수의 전략이다.

그건 서평자의 처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미식가처럼 이 코너 저 코너에 들러 맛보기 식단을 음미해보지만, 한편으론 '과식'을 경계한다. 하긴 뇌를 위장에 비유한 니체의 경고도 그런 것이었다. 과식이 위에 해로운 것처럼 너무 많은 지식도 뇌에 해롭다는. 아닌가?

전체적으론 만만찮은 두께와 무게로 다가오지만, 개개의 서평들은 가볍고 경쾌하며 또 느긋하고 여유만만이다. 인터넷 공간을 염두에 둔 서평이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량에서도 비롯된 듯싶지만 그건 서평자들이 책에 대해 갖는 태도와도 연관된 것이 아닌가 싶다. 내 경우 서평을 쓰면서 주로 책의 주장과 핵심적인 메시지를 간추리기에 바쁜 편이지만 우리의 철학자들은 그런 거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다. "내 책꽂이 한 구석에는 두 권이 책이 나란히 몸을 맞대고 있다."고 시작하거나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여행을 하다가 큰 기대도 없이 들어간 허름한 밥집에서 그 지역의 깊이 곰삭은 맛을 맛보는 것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는 말로 운을 뗀다. 책을 읽어나가면 이런 능수능란한 서평가들이 '100명'이란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동시에 '인터넷 서평꾼'으로선 긴장하게 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클라우스 헬트의 <지중해 철학 기행>은 내 경우 거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인데, 기억에는 이게 '철학자의 서재'의 서평을 읽고 구입한 책이다. 물론 "650쪽이 넘는, 참 두툼한 책"이어서 아직 완독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평은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가를 충분히, 여실히 전달해주었다. 가령 서평자는 헬라스에서 왜 학문이, 그리고 철학이 생겨났는가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정관사 문제로 간추린다.

"왜 정관사는 철학이 태어나는 데 산파 역할을 했을까? 정관사는 어떤 말 앞에 붙어서 그 말을 명사로 만든다. 그리하여 정관사가 붙은 말은 실체가 된다. 쉽게 말하자면 정관사가 붙은 말은 무엇이든 간에 그 무엇으로 불릴 수 있다. 자립적인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 관사가 붙는 말은 명사이다. 학문은 바로 이 명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36쪽)

예컨대, 사물의 속성을 나타내는 '붉다(red)'라는 형용사에도 관사가 붙으면 '붉음(the red)'이란 명사가 된다. 그리고 이 추상명사가 학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고대 헬라스 사람들은 정관사를 갖고서 자유자재로 명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명사들이 개념적 사유의 도구가 됐다. 헬라스 학문과 철학의 탄생 조건이 된 것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그런 정관사가 없었다면 '철학'의 탄생도 없었을 것이고, 철학자란 직업(?)도 등장하지 않았을 테니, '철학자의 서재'도 따로 꾸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정관사인가!

흔히 형이상학의 고유한 물음 형식이 "X란 무엇인가?"(What is X?)라고 한다. 그런 물음에서 X의 자리에 놓이는 것이 명사다. 그런 물음과 궁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선 명사라는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명사를 만들어주는 것이 정관사라면, 한국어에는 무엇이 있을까? 명사형 어미 정도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일까? 서평은 <지중해 철학 기행>에 대한 관심과 함께 '한국철학'에 대한 궁금증도 불러일으킨다. 사실 그렇게 뭔가를 촉발하고 자극하는 것이 서평다운 서평의 몫일 것이다.

물론 서평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이 따로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굳이 철학자들까지?"란 의문을 혹 가지시는가? 철학자들 또한 나름대로 '내부 사정'이 있다는 걸 나는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다. 이런 자문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철학의 소재나 문제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 속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이 아닌가? 다만 우리는 그것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문제의식이 없었고, 그것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걸러낼 수 있는 안목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우리는 그러한 삶의 문제들을 등한시한 채 그저 딱딱하고 골치 아픈 이론들과 화석화된 활자들 속에서만 철학을 찾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철학은 소수 전문가들만이 이해하는 비밀스러운 코드로 인식되고 있지는 않은가?" (42쪽)

비록 <통합적으로 철학하기>(휴머니스트 펴냄)란 책의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 끌어낸 질문들이긴 하지만, 나는 이러한 반성적 질문이 <철학자의 서재>를 관통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 책의 서평 목록에는 소위 '철학서'로 분류되는 책이 의외로 많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또한 "딱딱하고 골치 아픈 이론들과 화석화된 활자들" 속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사유와 문제의 단초를 찾으려는 적극적인 시도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소수 전문가들'이 아닌 '우리'가 같이 읽고, 같이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들이 어떤 것인지 함께 짚어보고 함께 고민하자는 취지가 아닐까. 그럴 때 '철학자의 서재'는 옆집 아저씨의 서재만큼이나 가깝고 푸근하게 다가온다.

서평집에 대한 서평은 잘해야 군말이기 십상이다. 무얼 더 보태겠는가. 음식의 맛을 아무리 말로 잘 표현한다고 해도 직접 맛보는 것만 못하다. 그저 일독해 보시길. 가볍지 않은 사유와 무겁지 않은 성찰이 잘 어우러져 우리의 지성을 자극하고 인식을 확장하는 서평들이 발에 차이는 수준이다. 나도 나름으로는 서평집을 낼 만큼은 읽고 쓰고 했지만, 책에서 다루어진 책들의 목록을 보니 읽지 않은 책이 읽은 책보다 훨씬 더 많다(세어 보니 갖고 있는 책이 절반 조금 못 된다). 그러니 내게도 더없이 요긴한 책이다.

매주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책의 홍수 시대'라고도 하고 '책의 바다'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좌절할 건 아니고, 이런 '좋은 안내서'를 길잡이 삼아 자기만의 독서 여정을 꾸리는 것이 독서인의 보람이고 호사다. 우리는 어쩌면 제법 멀리 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11. 01. 28. 

 

P.S. 이번에 알게 된 것이지만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집필하거나 감수한 책이 적지 않다. <철학자의 서재>를 읽으면서 느낀 '필력'엔 나름의 '내력'이 있다는 걸 알았다. 느닷없는 책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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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01-29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이제 철학책을 좀 읽으려 하고 있는데, 904쪽은 미친 무게감이 맞네요. 목차를 보니 미친 존재감까진 아닙디다마는... ㅋㅋ 얼추 the Left 맞멎는 무겐데요. 오늘 받은 '시학'이 670밖에 안 되던데...

로쟈 2011-01-29 13:14   좋아요 0 | URL
철학자들이 필진이지만 '철학책'은 아니구요, 유용한 서평집으론 활용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끼리코 2011-02-10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은 시대의 혼이자 시대의 모순에 대한 반역이다", "성찰과 비판이 있는 한철연(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삶과 이상을 아우르는 지식공동체"...2009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주년 기념식에서 회원들에게 배포한, 거리 시위에 쓸 일 많~을 것 같아서 만들었다며 참석하셨던 선생님께서 한 장 전해주신 손수건??^^에 쓰인 문구가 생각나네요. 나왔다는 얘기만 듣고 구입하지 못했는데, 저도 장만^^ 해야겠네요.^^;;

로쟈 2011-02-12 03:39   좋아요 0 | URL
네, 서평집은 '사전'의 용도가 있지요.^^
 

지난 주말 북리뷰를 읽다가 좀 의아하게 생각한 건 <미친 등록금의 나라>(개마고원, 2011)를 다룬 지면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클라이드 바로우의 <대학과 자본주의 국가>(문화과학사, 2011)와 함께 관심도서로 분류해놓은 터라 애써 찾았지만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지방신문의 기사 정도다. 적어도 20대 대학생 독자들에겐 요즘 많이 읽히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 2010)만큼은 읽혀야 하지 않나란 생각이 든다.

‘등록금 1000만원, 교육비 2000만원 시대’. 오늘날 대한민국 교육 현실을 비판하고 그 대안책을 모색하고 특히 또 한국 교육문제에 난공불락 중 하나인 ‘등록금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우선 경제력 수준이 대학등록금 액수를 결정짓는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OECD 국가들의 경우, 대학등록금이 아예 없거나 우리의 반의 반값에도 못 미치는 등록금을 내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여기엔 체코나 뉴질랜드처럼 국민소득 기준으로 볼 때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들도 포함되어 있다. 대학교육에 많은 투자와 지원을 할 수 있는 부자 나라여야 등록금을 싸게 매길 수 있으리란 선입견은 착각일 뿐이란 게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현재 등록금 문제를 해결해 줄 비책인 양 적극 주장되고 있는 ‘취업후 학자금 상환제’와 ‘기부금 입학제’에는 매우 위험한 함정이 숨겨져 있다고도 주장한다. 취업후 학자금 상환제는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을 줄이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면서 단지 대출학자금을 취업 후에 갚도록 하는 방안에 불과한데도 대단한 지원책인 양 호도되고 있다는 것. 이 책의 인세는 등록금 인하 촉구 활동에 쓰일 예정이다.(대전일보) 

11. 01. 24. 

P.S. 덧붙여, 대학등록금과 관련하여 대학의 적립금 문제를 다룬 기사도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서울신문(11. 01. 24) 10兆 쌓아둔 대학들의 ‘재정 떼쓰기’

지난 21일 점심 무렵 부산 롯데호텔 3층 아트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세미나에 참석한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올해도 등록금을 동결할 수밖에 없는 경제상황이다. 물가가 불안하고… 등록금 인상 자제를 부탁드린다.”며 대학총장들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국민대 이성우 총장은 “수년째 동결하면 상당한 재정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장관과 이 총장의 견해 차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정부와 대학의 불만이 응축된 장면이다.

정부의 대학 등록금 동결 요구에 대학들이 재정압박이 심하다며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대학들이 쓰지 않고 쌓아둔 ‘적립금’이 2009년 말 기준으로 10조원을 넘어 논란이 될 전망이다. 특히 서울 주요 사립대의 경우 2년사이 최고 66%까지 ‘곳간’(적립금)을 불린 곳도 있다. 2009년 말 현재 적립금이 4000억원 이상인 곳은 이화여대(7389억원), 연세대(5113억원), 홍익대(4857억원) 등 3개교나 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사립대총장협의회가 지난해 10월 정부에 재정지원을 요구하는 ‘사립대학 육성을 위한 건의문’을 채택한 데 이어 계속 정부를 압박하는 모습을 보이자, 적립금 용도에 대한 성격논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대학들은 적립금을 대학의 중·장기 계획이나 대규모 투자사업 부분에 한해서만 쓰고 있다. 등록금 상승이 이뤄지지 않아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인건비나 물가상승분 보전비용으로 적립금을 쓰려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교과부 한석수 대학지원관은 23일 “사립대 적립금 용도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서 “현재도 당해연도 등록금을 받고 난 뒤 남은 재정은 기금이나 적립금으로 넘기는 게 관례인데 이를 당해연도에 모두 처리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적립금 주요 부분이 등록금 수입으로 채워지는 셈이다. 이런 점 때문에 대학들이 ‘등록금 장사’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서울신문이 이날 교과부 대학정보공시센터(대학알리미)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등록금을 동결했던 2009년에도 서울 주요 사립대의 적립금이 증가하는 추세는 바뀌지 않았다. 2011년도 5.1%의 등록금 인상을 제시한 고려대는 2007년 1526억원이던 적립금이 2009년 2305억원으로 2년 새 51% 급증했다. 등록금 3.8% 인상안을 내놓은 경희대도 2007년 817억원에서 2009년 1362억원으로 66.7% 늘었다. 올해 등록금 동결을 결정한 연세대는 2007년 3471억원에서 2009년 5113억원으로 2년 새 47.2% 증가했다. 이화여대도 2007년 5115억원에서 2009년 7389억원으로 44.4%가 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적립금이 재단의 ‘몸집 불리기’에 사용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2009년 사립대 적립금 중 건축기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3조 2001억원으로 전체의 46%를 차지했다. 반면 연구기금 적립금은 6381억원으로 9.2%에 불과했다. 전년대비 증가율도 2008년 27.4%에서 2009년 14.7%로 줄었다. 이에 대해 서울 A사립대 기획실 팀장은 “우리나라 대학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려면 투자가 필요하다. 대규모 투자를 위해서 적립금을 비축하고 있는 것”이라며 “등록금 문제로만 적립금 사안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대학의 발전과 경쟁력 등의 관점에서도 적립금 문제를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김동현·최재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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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책들을 식별하는 일이 이 서재의 주된 역할 중 하나인데, 가끔은 손이 놀 때가 있다. 관심도서에 대한 리뷰가 아직 뜨지 않거나 뜨더라도 책이 알라딘에 입고가 되지 않은 경우다. 지난주에 나온 책 가운데는 스튜어트 켈리의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민음사, 2011)가 그런 경우인데, 이상하게도 알라딘에서는 '잃어버린 책'이다. '우리가 읽고 싶어도 결코 만날 수 없는 위대한 책들의 역사'란 부제를 좀 비틀면 '우리가 읽고 싶어도 알라딘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책'이다. 적어도 오늘 월요일 아침까지는. 하여 이 책 얘기는 나중에 적기로 하고, 지난 주말 리뷰 가운데 오규 소라이의 <논어징>(소명출판, 2011)에 관한 것을 옮겨놓는다. 요즘 대기업에서 불고 있다는 <논어> 바람과 관련한 칼럼과 함께. 시부사와 에이치의 <논어와 주판>(페이퍼로드, 2009)이란 책의 존재를 알게 해준 칼럼이기도 하다.      

한겨레(11. 01. 22) 정약용도 감탄한 일본 ‘소라이학’의 진수

에도 막부 시대 일본 유학의 혁신자 오규 소라이(1666~1728·그림)의 주저 <논어징>이 한국어로 처음 완역됐다. 동양철학을 전공한 임옥균·임태홍·함현찬 박사가 함께 옮기고 이기동 성균관대 교수가 감수했다. <논어징>이 완역됨으로써 그동안 주로 2차 문헌을 통해 소개되던 ‘소라이학’의 진수를 한국어로 직접 느껴 볼 수 있게 됐다. 



오규 소라이는 흔히 앞세대 이토 진사이(1627~1705), 뒷세대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와 함께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꼽힌다. 진사이는 <논어>와 <맹자>를 연구하여 주자학을 비판하는 ‘고의학’을 창시했고 노리나가는 <고사기>라는 일본 역사책을 연구해 ‘국학’을 집대성했다. 소라이는 진사이의 주자학 비판을 더욱 철저하게 밀어붙여 송대 유학과는 아주 다른 독창적인 반주자학 사상을 세운 사람이다.

소라이의 사상을 국내에 알린 저작으로는 일본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의 노작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가 먼저 거론된다. 일본 정치사상 연구에 획을 그은 이 저작에서 마루야마는 소라이를 근대성의 사상적 개척자이자 정치의 발견자로 주목했다. 그는 동서양을 동시에 관조하는 눈으로 송나라 유학의 완성자인 주자를 동시대 서구 기독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선상에 놓고, 주자학을 비판한 소라이를 근대 정치사상의 선구자가 된 마키아벨리에 견주었다. 마키아벨리가 도덕과 정치를 분리해 근대 정치학의 토대를 닦았듯이 소라이도 주자학의 도덕관념에서 벗어나 정치 자체를 발견함으로써 근대성의 싹을 틔웠다는 것이 마루야마가 포착한 소라이학의 핵심이었다.

소라이의 삶 자체도 마키아벨리의 삶과 유사한 면이 있다. 소라이는 도쿠가와 막부 5대 쇼군의 시의였던 오규 가게아키의 둘째아들로 에도(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쇼군의 문책을 받아 유배를 당하자, 아버지를 따라간 소라이는 유배지에서 주자학을 독학했다. 27살 때 아버지가 사면을 받자 소라이도 에도로 복귀해 유학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5대 쇼군의 총신이었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발탁돼 17년 동안 그의 정치 고문 노릇을 했다. 1709년 5대 쇼군이 사망하자 야나기사와는 실각했고, 소라이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공화정에서 14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다 쫓겨난 뒤 <군주론>을 저술했듯이, 소라이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저술 작업을 본격화했으며 대표작 <논어징>은 죽는 순간까지 가필을 거듭했다.

소라이는 관직에 있던 시절 주자학적 도덕보다는 막부의 정치적 상황을 먼저 고려하는 관점을 취했는데,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1702년에 에도를 발칵 뒤집어 놓은 ‘46인 사무라이’ 사건이다. 주군을 잃은 낭인 46명이 주군의 원수인 기라 요시나카의 저택을 습격해 원수의 목을 벤 뒤 막부의 처분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 사건은 주군에 대한 가신의 충성이라는 봉건적 주종관계와 막부 통일정권의 정치적 지배가 충돌하는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정치 고문으로서 소라이는 이 사태를 충성이라는 사적인 도덕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천하의 법도를 세운다는 정치적 관점을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건은 소라이의 조언대로 사무라이들의 할복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종결됐다.

이 에피소드에서 엿보이는 정치 우위의 사상을 <논어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논어징’(論語徵)이란 공자의 말씀을 모은 <논어>에 대한 해석들을 ‘밝히고 검증한다’(徵)는 뜻이다. 소라이는 선진시대에 성립된 육경에 입각해 <논어>를 해설하면서, 주자의 논어 해설이 불교와 도교에 사로잡혀 있다며 <논어집주>를 반박하고, 이토 진사이의 <논어고의>가 주자학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이런 비판작업을 통해 고대 육경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소라이의 사상은 순자의 학설에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인다고 옮긴이들은 말한다. 고대의 육경, 곧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악기> <춘추>가 대부분 순자의 문하에서 경전으로 성립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맹자의 성선설이 아니라 순자의 성악설이 소라이 사상의 바탕을 이룬다.

더 중요한 것은 <논어>를 해석하는 데서 드러나는 정치적·현실적 태도다. 이를테면 공자가 말하는 ‘인’(仁)을 ‘사랑의 이치이며 마음의 덕’이라고 풀이하는 주자와 달리 소라이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독해한다. 또 ‘학이’ 편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人不知不溫)라는 주자의 해석을 거부하고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억울해하지 않는다’라고 풀이한다. 구체적인 정치적 해석인 셈이다. 소라이학은 뒷날 그의 제자 다자이 순다이가 쓴 <논어고훈외전>을 통해 조선의 다산 정약용에게도 전해진다. 다산은 처음에는 소라이학을 괴이쩍게 생각했으나 후에는 “찬란한 문채”를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논어고금주>에서 깊이 살펴 많은 부분을 취했다. 나아가 “이제 그들(일본 유학자들)의 글과 학문이 우리나라를 훨씬 초월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소라이학의 경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평가다.(고명섭기자)  

경향신문(11. 01. 12) [서재에서]대기업에서 ‘논어’ 열풍이 부는 진짜 이유

지난해 초반 이후 최근까지 대기업에서 <논어> 열풍이 불고 있는 건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몇 년 사이에 기업에서도 인문학 바람이 거센데다 동양 최고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논어>를 기업 임원들이 새삼 즐겨 읽는다고 이상할 건 없지만 유례 없는 현상이어서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다.
몇몇 대기업의 경우 전 사원이 <논어>를 읽고 토론했으며, 더욱 주목할 만한 일은 국내 최고 글로벌기업인 삼성 그룹의 수뇌부와 핵심간부들이 이 책으로 ‘열공’ 중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2년 6개월 만에 복원된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직원들이 <논어>를 읽는 것은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asics)는 취지라고 한다. 하긴 조르주 클레망소 전 프랑스 총리 같은 지도자도 정국이 난마처럼 헝클어져 해법을 찾기 어려울 때면 홀로 골방에 틀어박혀 ‘그리스 고전’을 읽으며 ‘기본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니, 세대교체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삼성이 그럴 법도 하다. 삼성의 경우 창업주인 이병철 초대회장이 최고의 경영 바이블로 삼았던 책이 <논어>여서 이해는 간다. 이병철 회장은 이에 관해 <호암자전>(중앙M&B)에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가장 감명 받은 책 혹은 좌우에 두는 책을 들라면 서슴지 않고 <논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논어>이다.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만족한다. <논어>에는 내적 규범이 담겨 있다. 간결한 말 속에 사상과 체험이 응축되어 있어, 인간이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마음가짐을 알려 준다.”

한국기업 간부들이 수많은 고전 중에서 왜 갑자기 <논어>를 유행처럼 많이 찾는 걸까.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하나가 있긴 하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숭앙받는 시부사와 에이치(1840~1931)의 책 <논어와 주판>(페이퍼로드)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무려 84년 전인 1927년 추세도 출판사가 시부사와의 강연내용을 편집해 첫 출간한 이후 일본에서 ‘비즈니스의 바이블’로 전해내려 온다. 

 

시부사와는 <논어>를 해석하면서 경제나 상업과 관련된 대목은 정통적인 관점과는 각도를 달리한다. 이를테면 송나라 주자학파의 영향을 받은 에도 시대 유학자들이 “부자는 인의도덕이 없기 때문에 어진 사람이 되고 싶으면 반드시 부귀의 염을 버려라”고 해석했던 부분을 시부사와는 “도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부귀를 얻는 것보다 오히려 빈천한 편이 낫지만, 만약 올바른 도리를 다하고 얻은 부귀라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받아들인다. 시부사와는 ‘부귀와 도덕은 결코 모순관계가 아니어서 함께 추구할 수 있다’며 당시 부정적인 상인에 대한 인식의 틀을 바꿔놓았던 것이다. 옮긴이 노만수의 해제가 설명했듯이 ‘논어(도덕)와 주판(경제)’의 통일 즉 ‘도덕경제합일’이야말로 ‘진정한 논어’라는 게 시부사와의 생각이다. 



2006년 화제를 몰고 온 중국 CCTV 프로그램 <대국굴기>가 “한 손에는 논어, 한 손에는 주판을 든 시부사와의 유상(儒商)이야말로 일본을 굴기시킨 비결이고 중국 굴기의 출구는 <논어와 주판>에 있다”라고 극찬하는 바람에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게다가 세계 경영학의 비조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가 “기업의 목적이 부의 창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여라는 것을 시부사와 에이치에게 배웠다’고 고백해 전 세계적으로 한층 더 유명해졌다. 



시부사와의 <논어> 해석과 실천이 더 큰 빛을 발하는 부분은 드러커가 상찬한 ‘사회적 기여’다. 시부사와는 올바르게 번, 어마어마한 돈을 교육·의료·빈민구제 등의 공익·사회복지 사업으로 환원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자가 되었다.  

이병철 회장이 <논어>를 늘 곁에 두었던 것도 시부사와의 영향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이 회장이 고인이 된 터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맨주먹으로 최고의 삼성을 일궈내면서 일본을 철저히 벤치마킹한 점을 미뤄보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시부사와는 제국호텔, 도쿄증권거래소, 기린맥주 등 500여 개의 기업 창립에 관여해 ‘일본 근대자본주의의 최고 영도자’ ‘일본 기업의 아버지’란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한국 재계에 <논어>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것은 2009년 11월 시부사와의 <논어와 주판>이 처음 번역돼 출간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시기적으로 맞물리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논어>만 수백 번 읽고 <논어경영학>(청림출판)이란 책까지 펴낸 민경조 코오롱건설 부회장 같은 마니아도 적지 않으나 그때까지 기업에서 열풍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본에서 장기 베스트셀러인 <논어와 주판>의 한국어 번역판이 1년여 전에 처음 나온 것도 의아한 면이 없지 않다. 불과 보름 차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판된 두 번역본(페이퍼로드의 <논어와 주판>과 사과나무의 <한손에는 논어를 한손에는 주판을>)이 지난해 여름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CEO가 휴가 때 읽을 책 14선’에 포함되면서 관심도가 부쩍 높아졌다.

특히 <한 손에는 논어를 한 손에는 주판을>의 경우 삼성경제연구소 추천도서에 선정된 뒤 그 전에 비해 몇 배의 판매량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경제연구소 추천도서는 ‘출판계의 마법사’로 일컬어질 만큼 위력이 지대하다. 출판사 경영자들은 삼성경제연구소가 특정 책의 판매량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문화권력 역할을 한다고 부러움 반 불만 반을 섞어 평가한다. 과거 MBC-TV 프로그램 ‘느낌표’의 위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문화관광부나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등 권위를 지닌 다른 기관의 추천도서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게 한결같은 얘기다.

이 연구소의 추천만 받으면 곧바로 책 표지의 홍보 띠지에 그 사실이 등장하는 게 이를 방증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추천한 책 중에는 좋은 책도 있지만 대기업의 논리를 반영한 책들도 적지 않아 책 읽기의 다양성 측면에서 볼 때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고 보면 기업인들의 <논어> 열풍은 이래저래 삼성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셈이다. 기업들의 이례적인 풍조이긴 해도 4대 성인의 한 분인 공자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 <논어>를 깊이 읽고 참뜻을 새겨서 나쁠 거야 없겠다. 시부사와가 강조한 ‘도덕적 기업’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에 방점을 찍으려는 자기합리화의 방편이 아니길 기대할 따름이다. 때마침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절에 너무나 당연한 ‘공자 같은 말씀’인가? (김학순 대기자) 

11. 0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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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cinema 2011-01-27 20:08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요즘 직장 동료들과 '논어' 세미나를 하고 있는 중인데,
오규 소라이의 '논어징' 완역판 출간 소식은 반갑군요!
고주, 신주, 정약용주, 소라이주등을 고루 살펴보며 느낀 점은 소라이의 '반주자적 독창적 해석'이 가장 쉬이 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개념에 매몰되거나, 너무 고답적이거나, 초월적인 해석을 지양하고 현실적이며 살아꿈틀거리는 인간 내면의 '역동'을 고려한 것으로 보이는 소라이의 해석이 아마 제 마음의 어떤 부분과 만나는 지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하튼 논어 해석에 있어 제게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 소라이의 '논어징' 완역을 반기면서, 이 곳에 소개의 기사를 실어주신 '로쟈'님께도 감사의 말씀 드려요.
 

어제 아침 박완서 선생의 부고를 듣고 나가는 길에 들른 서점에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현대문학, 2010)를 손에 들었다. 고인을 기념할 수 있는 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란 그런 정도다(어느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실제 모습을 뵌 게 나로선 사적인 인연의 전부다). 작년 여름에 나온 책의 머리에는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라고 적혀 있다. 책을 내는 기쁨으로선 그 기쁨이 마지막 기쁨이었다고 생각하니 좀 먹먹해진다. 이미 전집까지 출간된 당신의 소설을 따라 읽는 건 두고두고 할 일이고, 그래도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산문집들은 한데 모아놓고 싶어서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래는 주인을 잃은 고인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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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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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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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cinema 2011-01-23 20:02   좋아요 0 | URL
이청준 선생님! 박경리 선생님! 박완서 선생님! 나즈막히 불러 봅니다.
최근 몇 년간 고인이 되신 세 분의 작품들을 읽느라
불 밝혔던 밤들이 참 행복했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면하시길...

로쟈 2011-01-25 19:52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연이어 떠나셨네요. '어른'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듯합니다...

philocinema 2011-01-27 19:39   좋아요 0 | URL
네 연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