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모스크바 시간으론 오늘 아침, 한국시간으론 어제 낮에 써서 보낸 글이다. 최근 사회적으로 충격을 던진 최고은 작가의 죽음에 대한 의견을 간단히 적었다. 예로페에프의 소설(작가는 '서사시'라고 부른다)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를 읽다가 과연 '작가의 죽음'이란 걸 어떻게 봐야 할까란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었다. 육체적 굶주림 말고도 우리는 정신적, 초정신적 굶주림을 염려하고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세 가지 굶주림은 따로따로, 혹은 순차적으로 돌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경향신문(11. 02. 15) [문화와 세상]그는 ‘굶어죽은 작가’가 아니다

지난주에 모스크바에 와서 아르바트거리에 머물고 있다. 짧은 체류일정과 일거리 때문에 ‘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책방순례로 마음의 허기를 달래고 있다. 왠지 모스크바에서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책을 몇 권 챙겨왔는데, 러시아 작가 베네딕트 예로페예프의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가 그 중 하나다. 원제 ‘모스크바-페투슈키’의 두 도시가 각각 출발역과 종착역을 가리키기에 그렇게 읽어준 것이다. 페투슈키는 모스크바 동쪽으로 115㎞ 떨어진 작은 도시다. 이 작품으로 모스크바와 ‘동급’으로 알려지기 이전에는 러시아 사람들에게도 생소했을 법한 지명이다.  

작품은 작가의 분신격인 알코올 중독자 화자 베니치카가 가방 가득 술병을 챙겨서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타고 내리 퍼마시며 페투슈키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책을 읽는 건 그 여정을 그대로 뒤따라가는 것이기도 한데, 모스크바의 출발지인 쿠르스크 역 광장을 가로질러 가는 대목에서 나는 잠시 독서를 멈추었다. 발을 질질 끌면서 광장을 가로지르던 베니치카가 구역질을 가라앉히기 위해 두세 번 멈춰섰기 때문이다. 빈속에 알코올을 퍼부어댔으니 속이 메슥거리는 건 당연하다. 자기 말대로 두 번째 잔부터는 깡술로도 마실 수 있지만 첫 잔은 안주와 함께 먹었어야 했다. 아무튼 그가 속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사람에게는 육체라는 한 가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면도 있고, 그렇지, 게다가 신비적인, 초정신적인 측면이 있다.” 그래서 뭔가 메슥거린다면 이 세 가지 측면 모두에서 메슥거리는 것이다. 한 번 구역질이 나더라도 우리는 육체적인·정신적인·초정신적인 구역질, 이 셋을 모두 가라앉혀야 한다.

지난달 말에 지병과 생활고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달라”는 쪽지를 남겼다고 처음에 보도돼 ‘사회적 타살’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영화 스태프의 평균 수입이 월급으론 52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는 고발도 이어졌다. 이제라도 창작자를 기아와 죽음으로 내모는 영화계의 부조리한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실업부조제도 같은 사회적 안전망이 더 확충되어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하지만 한 작가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그러한 사회적 의제들로만 환원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누구도 굶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는 정당하지만, 그 굶주림이 비단 육체적 굶주림만을 가리킨다면 매우 허전한 일이다. 다시 정정된 사실이지만, 최고은 작가도 ‘남는 밥’을 구걸한 것이 아니라 평소 자신을 도와준 이웃에게 “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라고 한 번 더 부탁한 것이었다.

창작의 길이 고되고 우리의 현실에서 사회적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란 걸 그가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로선 육체적인 굶주림 이상으로 정신적·초정신적 굶주림을 돌봐야 했던 것이 아닐까. 자신이 각본을 쓰거나 직접 만든 영화의 감독이 아니라 단지 ‘굶어 죽은 작가’로 기억된다면 그야말로 고인이 가장 수치스러워할 일일 것이다. 실제 사인도 기아보다는 지병과 관련된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단편 ‘격정소나타’를 유작으로 남긴 고인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은 굶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과 재능을 알릴 장편영화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11. 0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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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분량상 예로페예프(1938-1990)의 삶과 죽음에 대해선 더 적을 수가 없었는데, 모스크바대학에서 제적당한 뒤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고정된 거처 없이 살았다. <모스크바-페투슈키>는 1970년초에 두달간 쓴 작품이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그는 1980년 후두암 진단을 받고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돼 1990년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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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1-02-15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누트 함순'의 소설 "굶주림"과
'논쟁'과는 무관하지만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케 합니다.

로쟈 2011-02-16 00:58   좋아요 0 | URL
네, 함순의 <굶주림>과 카프카의 <단식광대>, 이들을 같이 다룬 오스터의 에세이 '굶기의 예술' 등이 세트로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