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터섹의 <증발>(커뮤니케이션북스)은 부제가 ‘모바일 경제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다. 디지털 경제라는 말에 이어서 이제는 ‘모바일 경제‘라는 말도 통용되는 모양이다. 저자는 자본주의 경제의 이 새로운 국면을 ‘증발의 시대‘라고도 부른다.

기업경영과 관련하여 증발이 갖는 의미는 내게 흥미롭지 않지만 노동과 교육, 그리고 인간 진화와 관련한 장들은 무관하지 않아서인지 펼쳐보게 된다. 제목과 부제에서 연상하게 되는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생각거리들은 챙길 수 있다. 당장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현대‘라는 개념을 응용하여 ‘기체 현대‘를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증발‘이라는 표현 자체가 ‘기화‘와 호환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를 전방위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구루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디지털이다>의 네그로폰테일까?).

그런 관심 때문에 몇달 전에 구입한 책이 죠수아 메이로위츠의 <장소감의 상실>(커뮤니케이션북스)이다. 물질세계의 탈물질화는 자연스레 장소감의 상실을 낳게 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좌표계는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해왔다. 더이상 그러한 좌표계에 의해 표시되지 않는 다른 세계로 넘어가게 될까?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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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이맘 2019-04-12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증발>이 <장소감의 상실>보다 잘 읽힙니다. 좀더 흥미롭죠. 대신 철학적 깊이감에서는 <장소감의 승리>가 더 깊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디지털기술이 우리 인간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함께 읽고 생각해 볼 만합니다. 로쟈의 통찰력에 경의를 표하며.

로쟈 2019-04-16 07:24   좋아요 0 | URL
네 흥미로운 주제인데 저로선 마지막 몇장을 더 자세히 다룬책이었으면 좋았을거 같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누엘 레비나스 선집의 하나로 대담집 <우리 사이>(그린비)가 출간되있다. 주저 <전체성과 무한>에 뒤이은 것인데 읽는 순서로는 먼저 읽어볼 만하다. 아무래도 대담집이 접근과 이해에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레비나스를 열심히 읽던 게 20년 전이다. 지난 세기말에 대학원생이면서 초년 강사시절에 탐독하면서 강의중에도 그의 타자 철학을 자주 들먹였던 것 같다. 국내에서도 레비나스 수용 초창기였다. 이제 20년이 지나고 예전보다 훨씬 많은 책들이 나왔기에 독서 여건은 좋아졌다. 하지만 예전만큼의 열의는 갖게 되지 않는다. <우리 사이>도 진작에 영어본을 구한 책이지만 지금은 어느 구석에 꽂혀 있을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당장 내일모레 강의할 책도 못 찾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 다시 손에 든다면 <전체성과 무한>을 들고 씨름하기보다는 <우리 사이>를 손에 들고 산보에 나서는 것이 훨씬 낫겠다 싶다. 레비나스 입문서에 해당하는 책으로는 최근에도 박남희의 <레비나스, 그는 누구인가>(세창출판사)가 나왔는데 처음 읽을 독자들을 겨냥한 책으로 보인다.

아예 콜린 데이비스의 <처음 읽는 레비나스>(동녘)처럼 대놓고 입문서를 자처하는 책도 있다. 원저는 영어권의 대표 입문서로 20년 전에 열독한 책이었다. 번역본은 두 종이 있는데 앞선 것은 오류가 많았다. 뒤에 나온 책도 갖고 있지만 이때부터는 유심히 보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와의 관련으로도 다시 읽어볼까 싶다. <우리 사이>를 보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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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3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3 1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지그문트 바우만 읽기‘ 강의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다. 담당자의 낙관 덕분에 신청이 저조함에도 폐강되지 않았다(하지만 다음 강의를 기획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겠다). 아무래도 바우만은 경계가 모호한 듯싶다. 대중적이라고 하기엔 어려운 학자이고 전문적이라고 하기엔 또 대중적인 ‘현자‘이기에.

인디고연구소가 기획한 인터뷰 <희망, 살아있는 자의 의무>(궁리)가 다음주까지 읽을 책이고 이어서 말년작인 <레트로토피아>(아르테)와 초기작 <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오월의봄)를 다음달까지 차례대로 읽는다. 워낙 다작의 사회학자라 유토피아라는 주제에 한정하여 책을 고른 것(<레트로토피아>의 출간이 계기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바우만 강의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오래전에 대학의 교양강의예서(‘현대사회의 이해‘인가 그랬다) 교재 가운데 하나로 <액체 근대>(길)를 다루었기 때문이다(수주 동안 읽은 듯하다). 거의 십년 전의 일인 듯싶다. 그간에 바우만 책은 특히 2012년 이후에(<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이후다) 쏟아지다시피 출간되었기에 읽을 책이 너무 많다. 그나마 2017년 타계한 그를 기리며 기획된 <지그문트 바우만을 읽는 시간>(북바이북)이 길라잡이가 되는 책.

거기에다 개정판으로 이번에 다시 나온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동녘)가 다시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일부 오역도 교정했다고 하므로 이미 읽은 독자라 하더라도 재독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앞서는 <희망, 살아남은 자의 의무>와 같은 해에 출간되어 인터뷰에서도 언급된다. 다음주 강의는 그 대목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새로 나온 개정판을 나도 주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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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회학 전공자‘라는 프로필의 정보밖에 없어서 저자의 포지션에 대해 가늠하기 어렵다. <타락한 저항>(교유서가)이란 얇은 책이 ‘우리 안의 반지성주의‘를 겨냥하고 있어서 눈길이 갔는데, 목차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반지성주의를 논하기 위해 저자가 고른 세 가지 열쇳말(괄호안은 정치 진영)이 ‘블랙리스트‘(보수우파), ‘나꼼수 현상‘(중도우파), ‘메갈리아‘(진보좌파)라고 해서다.

저자는 반지성주의를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라고 정의하는데(수포자는 수학의 반지성주의자다) 다른 건 몰라도 권력의 문화예술계에 대한 불법적 통제를 가리키는 ‘블랙리스트‘가 그에 해당하는가? 저자가 나꼼수와 메갈리아를 나란히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은 것은 그들이 ‘피해자‘이되 ‘지배하는 피해자들‘이라서다. 한데 블랙리스트는? 블랙리스트의 피해자들 역시 ‘지배하는 피해자들‘인가? 정리해서 ‘블랙리스트=나꼼수=메갈리아=반지성주의‘라는 게 저자의 주장인가? 그게 아니라면 블랙리스트는 뭔가 저자의 의도와는 잘 맞지 않는 열쇳말이라는 생각이다.

더불어 반지성주의는 우리말의 부정적 어감과는 달리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반지성주의가 자칫 반권위주의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지만, 바로 거기에 반지성주의의 힘이 있다. 반지성주의이면서 반엘리트주의. 반지성주의는 자연스레 평등주의를 함축한다. 가령 종교에서의 반지성주의는 사제계급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반권위주의와 만난다. 그것은 몽매주의와는 다른 자가계몽주의다. 

사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반지성주의가 한국어에서 갖는 의미는 주로 그 부정적인 절반에만 한정되기에 반지성주의를 주제로 한 책도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반지성주의는 반권위주의와는 다르고, 또 반엘리트주의와도 다르며... 더불어 좋은 입론을 세우기도 어렵다. <타락한 저항> 역시 그런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동녘)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을 기대해봐야 할 것 같다...

*어제 쓴 글인데 페어퍼 등록이 거부되어(알라딘의 금칙어DB 에러라나) 이제서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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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이번주에 강의할 책들을 챙겨서 동네 카페로 나왔다. 카페도 오후가 되어서야 문을 열었는지 아직 먼지 냄새가 가라앉지 않았고 손님도 내가 유일하다. 나오면서 확인하니 기온은 8도. 아직 봄기운보다는 찬 기운이 느껴지는 날씨. 어제는 저녁무렵 비가 흩뿌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실내에서 내다보기에는 봄이 완연하다. 이번주에는 아파트단지의 목련들도 만개할 준비를 마칠 듯하다.

길게 느껴지는 한달이었다. 열흘간의 이탈리아여행이 상순에 있었기 때문인데 이후에도 정신없는 날들이 지나가는 통에 마음의 여유를 갖기 어려웠다. 어제오늘 아침에 늦잠을 자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나이와 함께 회복탄력성이 점점 떨어지는 탓이겠다. 그래도 벌써 9월의 영국문학기행을 위한 강의와 준비를 진행하고 있으니 올해도 한달음에 지나갈 것 같다. 길게 느껴지면서도 한순간이라니.

이탈리아여행 뒤풀이격으로 주문한 책들을 내주면 다 받아보게 된다(여행 전후로 구입한 책이 수십 권이다). 여행은 준비도 필요하지만 막상 현지에서의 경험과 느낌으로 촉발된 과제를 처리하는 것도 중요해보인다. 단테와 르네상스, 그리고 프리모 레비는 물론이고, 이번 여행의 과제는 아니었지만 숙제로 떠안고 온 마키아벨리와 그람시까지. 이번에 볼 수 있었던 미술작품들 덕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에 대해 친숙한 느낌을 갖게 된 것도 보람이다.

그중 사후 500주년을맞은 다빈치에 대해서는 여행 전에 <인포크래픽, 다빈치>만 구입하고 채 읽지못한 상태였는데 이번에 월터 아이작슨의 평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나왔고 쟁여두기만 한 책으로는 발레리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법 입문>까지 두루 읽을 거리가 생겼다. 다빈치의 인생에서 중요한 도시는 피렌체나 밀라노 외에도 프랑스 파리를 꼽을 수 있을 텐데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내년가을 프랑스문학기행 때 루브르를 찾는다면 (다들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온다는) ‘모나리자‘도 직접 보게 될지 모르겠다. 다빈치에 대해서는 그때까지 쉬엄쉬엄 읽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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