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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이 출간됐다. 올해 <호모 사케르>(새물결, 2008)로 처음 소개된 이 철학자의 책들이 여러 권 더 출간될 예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도 바울(바울로)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강의'인<남겨진 시간>이 먼저 나오는 줄은 몰랐다. 출판사나 역자도 의외이고. 아무려나 바울과 벤야민의 메시아니즘에 대한 묵직한 독해를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서는 그런 '묵직한 독해'를 따라가기 이전에 '색인' 같은 '곁다리텍스트'나 가볍게 읽어본다.

어제 책을 들고 와서는 습관처럼 '인명색인'을 들춰보았다. 책의 품새와 역자의 역량을 판단하는 데 가장 간편한 지표가 되는 것이 이 '색인' 혹은 '찾아보기'다. 어째서 그런가? 고유명사의 표기를 보면 역자가 국내에 소개된 저자들에 대해서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표기를 쓴다면, 그건 역자가 해당 저자를 모르거나, 적어도 국내에 소개된 책을 읽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컨대, <남겨진 시간>의 인명색인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건 '게르숌 쇼렘'이다. 14쪽에서 '게르숌 쇼렘 Scholem'이라고 처음 등장하는바 벤야민의 친구이자 유대교 철학자 '게르숌 게라르트 숄렘(Gershom Gerhard Scholem, 1897-1982)을 가리킨다. 벤야민에 대한 회고록 <한 우정의 역사>(한길사, 2002)로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다. 일단, 성이 '숄렘'이므로 'ㄱ'이 아닌 'ㅅ' 항목에 배치되어야 하지만 'ㄱ'쪽에 나오게 된 건 색인 작성자가 개념이 없다는 뜻이다. 'ㅎ' 항목에서 '하이데거' 다음에 '한나 아렌트'가 나오는 식인데, 이런 색인을 정색을 하고 작성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퀴즈. '미셸 푸코'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미셸'이니까 'ㅁ'에서다. '미그엘 드 세르반테스'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미그엘'이므로 'ㅁ'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자크'니까 또 'ㅈ'이고, '조르주 바타이유'도 'ㅈ'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프란츠 카프카'가 아니어서 그냥 'ㅋ'에서 찾는다. '칸트'도 'ㅋ'. 하지만 '칼 슈미트'는 'ㅅ'이 아니라 'ㅋ', 뭐 이런 식으로 대중없다. 참고로 이런 조잡한 색인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책은 토드 메이의 <질 들뢰즈>(경성대출판부, 2008)이다. 대학출판부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허접한 '찾아보기' 실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쇼렘'. 왜 '숄렘(Scholem)'이 아니라 '쇼렘'이 됐을까? 첫째는 역자가 '숄렘'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지 못해서이고, 둘째는 일역본을 참조해서다(옮긴이 후기에는 영어본을 옮겼다고 했지만 내 짐작으론 일어본을 옮긴 듯하다). 가령 '히포라테스(Hippokrates)'는 '히포라테스'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본식이다. 'l'과 'r'의 표기방식이 우리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일역본을 참조했거나 일어 표기법에 따르고 있다는 건(물론 익숙한 저자들에 대해서는 우리 표기를 따르고 있지만) 역자의 약력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와세다 대학의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했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더라도 편집자나 교정자가 바로잡아줄 수 있는 것 아닐까? 적어도 인문서를 다루는 편집자/교정자라면 말이다.  

다시 퀴즈. 'ㅂ' 항목에 가 있는 '벤야민 월프 Benjamin Whorf'는 어떻게 표기되어야 할까? '벤자민 워프'라고 표기하고 'ㅇ'에 배치해야겠다. 일단 '워프(Whorf)'가 '월프'가 된 것이 일어식 표기라는 건 지적한 대로다. 워프가 저명한 언어학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엉뚱한 표기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벤자민 워프'는 '에드워드 사피어'와 함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우리가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의 주창자이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교정되어야 할 인명들이 이 색인에는 다수 등장한다. '본헤퍼(Bonhoeffer)'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를 가리킨다. '부르멘베르그(Hans Blumenberg)'는 저명한 문학이론가 '한스 블루멘베르크'이고 '레비트(Karl Lowith)'는 <역사의 의미>(문예출판사)나 <헤겔에서 니체로>(민음사) 등의 저작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칼(카를) 뢰비트'로 표기된다. 어느 경우이건 요즘은 검색창에 이름을 한번만 처넣어봐도 알 수가 있는 인명들이다. 게다가 독일 시인 '횔덜린(Holderlin)'을 굳이 '횔더링'으로 새로 작명하는 일 따위는 피해도 좋지 않을까? 러시아의 언어학자 "트루베츠코이(Trubetzkoy)의 유무대립(privative opposition)이라는 개념"을 "트루벳코이의 결여적 대치라는 개념"(169쪽)으로 옮기는 건 어찌해볼 도리가 없더라도 말이다.

물론 본문은 이런 부실한 고유명사 표기나 인명색인과는 달리 충실하게 옮겨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곁다리텍스트'에 대한 이런 일람은 '텍스트'에 대한 기대를 얼마간 잠식하는 것도 사실이다. <남겨진 시간>의 역자나 편집자가 이미 앞서 나온 <호모 사케르>의 '찾아보기'만 참조했더라도 많은 오류/오기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지나친 기대일까?

한편 <호모 사케르>의 '찾아보기'에도 재미있는 오류가 하나 있다. 'ㅇ' 항목에 '윌슨, 에드워드 O.(Edwaard O Wilson)'이라고 나오는데,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을 가리키는 것. 아감벤의 책에 어인 카메오 출연인가 싶어서 영어본을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Paul Ravinow refers to the case of Wilson, the biochemist who decided to make his own body and life into a research and experimentation laboratory upon discovering that he suffered from leukemia"(185쪽) 이것을 번역본은 "폴 래비노우(Paul Rabinow)는 생물학자 윌슨(Edward O. Wilson)의 사례를 언급하는데, 윌슨은 자신이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자기 신체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무제한적인 연구의 실험의 장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348-349쪽)라고 옮겼다.

문제는 에드워드 윌슨(1929- )이 아직 살아있으며 백혈병 환자도 아니라는 것. 역자나 편집자는 '윌슨'이란 이름만으로 예단하여 '에드워드 윌슨'이라는 풀네임을 병기해주고 '생화학자(biochemist)'를 '생물학자'라고까지 수정해준 듯하다. '에드워드 윌슨'이 '윌슨'이란 성을 가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이긴 하지만, 백혈병에 걸려서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기증한 생화학자는 따로 있으니 짐작에 '앨런 윌슨(Allan Wilson, 1934-1991)'이 그이다('짐작에'라고 한 것은 백혈병으로 죽은 생화학자를 검색하다가 발견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책에는 그 이상의 정보가 주어져 있지 않다).

만약 앨런 윌슨이라고 하면, 뉴질랜드 출신의 이 생화학자는 '미토콘트리아 이브' 가설로 유명한 분자생물학자이기도 하다. 현대여성이 15만-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한 여성으로부터 기원했다는 가설로 ‘아프리카 기원론’ 또는 ‘이브 가설’이라고도 불린다. 아무튼 백혈병에 걸린 자신의 살아있는 신체를 기증함으로써 윌슨은 그것을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은 대상으로 만들었다. 래비노우는 이러한 윌슨의 생명을 '실험실의 생명(experimental life)'이라고 불렀다. 아감벤은 이를 '더이상 조에와 구분되지 않는 비오스'의 사례로 제시한다.   

아무려나 '찾아보기'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윌슨'은 교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왕 교정을 한다면 본문의 한 대목도 같이 교정될 필요가 있다. 근대성의 '노모스'로서 수용소를 다룬 대목으로 이렇게 번역된 부분이다. "수용소의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예외상태와 수용소 사이의 이러한 구성적 연결관계를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319쪽)

문맥상 이상해서 영어본을 찾아보니 "The importance of this constituive nexus between the state of exception and the concentration camp cannot be overestimated for a correct understanding of the nature of the camp."(168쪽)라고 돼 있다. 'cannot be overestimated'는 직역하면 '과대평가될 수 없다'이고, 뜻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이다. 아감벤의 핵심적인 주장과 관련되는 부분이라 주의해서 읽어야 할 대목이다...

08.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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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15 15:18   좋아요 0 | URL
정말 색인을 저런 식으로 만들면 정말 거시기하겠군요.그리고 디트리히 본헤퍼...헤픈 사람이라는 오해를 하게 왜 저렇게 표기를 했죠?
제가 헌책이 많기 때문에 일제시대 세대들이 번역하면서 일본식 발음을 그대로 표기해도 무슨 말인지는 알아먹습니다만 요즘에도 저런 표기를 한다니 뜻밖입니다.

로쟈 2008-11-15 16:37   좋아요 0 | URL
요즘은 엉터리 색인들이 많아서 '색인'이란 것 자체에 대해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란 생각까지 해보게 됩니다...--;

크네히트 2008-11-18 13:39   좋아요 0 | URL
궁금한게 있는데요. 왜 벤야민 워프가 아니고 벤자민 워프이 되는 건가요? 발터 벤야민은 벤야민이 맞는 것 아닌가요? 혹 워프가 미국에서 활동한 사람이라서 그런건지.. 아니면 발터 벤야민이 표기법상 틀린 건가요? 궁금해서 문의드려요^^

로쟈 2008-11-18 16:01   좋아요 0 | URL
같은 이름이라도 독어와 영어를 읽어주는 방식이 다릅니다. '벤야민 프랭클린'이 아니라 '벤자민 프랭클린'이라고 불러주는 것이죠. 발터 벤야민을 '베냐민'이라고 읽어주기도 하는데, 이미 '벤야민'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읽습니다...
 

금요일 밤이면 토요일자 신문들의 북리뷰가 온라인에 올라오기 때문에 이곳저곳 기웃거리게 되는데, 다행히(?) 이번주에는 이미 소개한 책들 외에 눈길이 가는 책이 따로 없다. 헤겔의 <자연철학>, <법철학>, 그리고 셸링의 <초월적 관념론 체계> 등은 당장에 읽을 일이 없을 듯하여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뤄볼 예정이다. 지금 당장은 구입한 책과 대출한 책 들이나 얼른 '처리'를 해야할 형편이다(요즘은 도서관에서 대출해놓은 책들만 해도 50권이 된다). 밀린 일 몇 가지만 해치우고서. 그 중 하나는 데이비드 스토브의 <다윈의 동화>(영림카디널, 2008)에 대한 리뷰를 옮겨놓는 것이다. 책이 나온 건 두 주쯤 됐고 내가 책을 눈에 띄자 마자 '비종교인의 진화론 비판'이란 특이성 때문에 구입해놓은 지도 그 정도 됐지만 그간에 마땅한 리뷰를 읽어보지 못했다. 아래 리뷰는 우연찮게도 며칠전 도서관에서 원서를 대출해온 날 읽은 것이다. 옮겨놓고 몇 마디 보탠다.

한겨레21(08. 04. 24) 진화론, 인간에 대한 명예훼손

“유기체의 모든 개체군에서는 언제나 변이가 존재했다. 이들 중 몇몇은 유전되고 그것의 소유자에게 유익하다. 그리고 먹이 공급에 대한 압력이 존재한다. 이것이 생존을 위한 동종 간의 지속적인 경쟁을 낳는다. 이 경쟁에서 경쟁자에 비해 유전적인 장점을 지니고 있는 유기체들이 자연적으로 선택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선호되는 변이가 새로운 종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아시다시피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설파한 ‘진화론’의 정수다. 신심 깊은 독자들에겐 죄송한 얘기지만, 바야흐로 21세기다. 종교인들 중에도 성서 창세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철학자 데이비드 스토브가 쓴 <다윈의 동화>(신재일 옮김·영림카디널 펴냄)에 눈길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27년생인 저자가 1994년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야 탈고했다는 이 책은 ‘과학’이란 외피를 두른 진화론, 그 ‘당연함’에 대한 비판적 에세이 11편을 묶은 사색의 기록이다. 스토브는 책 첫 문장부터 의도적인 ‘도발’을 감행한다. “이 책은 진화론을 반박하는 책이다. 내 목표는 다윈주의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뒤늦게 ‘계몽의 시대’를 살아내느라 허덕이고 있다. ‘털 없는 유인원’이란 조소와 ‘이기적 유전자’라는 비난에도 아랑곳없이 ‘다윈주의자’를 자처한다. <다윈의 동화>는 이런 ‘지적 무기력’을 겨냥한 ‘우상 파괴’ 시도다. 창조론자의 억지가 아니냐고? ‘신앙고백’이라도 하듯 그는 서둘러 이렇게 썼다.

“나는 창조론자가 아니며, 기독교도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언급해야겠다. 사실 내게는 종교가 없다. 내가 속한 종이 육지 포유동물에 속한다는 것은 진화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아주 명백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 종이 다른 동물로부터 진화해왔다는 사실 역시 진화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아주 그럴듯해 보인다.”

스토브는 자연선택이 ‘과거의 종에서 새로운 종이 생겨나게 하는 주된 원인’이라는 다윈의 주장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자연선택이 ‘현재’ 인간에게서 ‘진행 중’임을 부인한다. 그리고 자연선택이 과거의 인간에게서 일어났었다는 것도 부인한다. 그가 내세운 ‘비판의 무기’는 딱히 특별할 게 없다. 진화론이 옳다면 모든 종이 생존을 위해 무자비한 경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데, 이타적인 행동을 곧잘 하는 인간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게 “너무나도 명백하다”는 게다. 무엇보다 스토브는 인간을 “토끼나 파리, 대구나 소나무”처럼 취급하는 것에 분노한다. “유전자라고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수단”이라는 식의 주장은 그에게 ‘인간에 대한 우스꽝스런 명예훼손’일 뿐이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계몽주의의 독창적이고 전형적인 생각”이었던 초기 진화론은 자연스레 왕정 폐지와 공화주의란 ‘혁명적’인 사상과 맞물렸다. 이 때문에 다윈은 “진화론이 지니고 있는 ‘무신앙’과 ‘혁명’이라는 원초적인 모체에서 진화론을 떼어놓기 위해” 고민했다고 스토브는 지적한다. 어떻게? “<종의 기원>에서 가장 흥미로운 종인 인간의 기원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주 철저하고도 묘한 방법을 통해서”였다.

그럼에도 진화론은 “본질적으로 계몽주의의 지적 무기고에 들어 있는 요소”였다. ‘진화의 실마리’를 푼 논리를 제공해준 게 반계몽주의의 화신이었던 토머스 맬서스였다는 점은 그래서 지독한 역설이다. 스토브는 “인구는 주로 식량 획득의 어려움 때문에 제한된다는 맬서스(그리고 다윈)의 생각이 옮은 것이라면 영국은 아주 오래전에 귀족들의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한 ‘최초의 아나키스트’ 윌리엄 고드윈의 말에 손뼉 친다.

‘적자생존’을 지나치게 강조한 진화론자들이 자연스레 우생학으로 흘러간 역사에 대한 ‘경계’도 빼놓을 수 없다. “피임은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생존경쟁을 억누르는 위협 중 하나”로 인식했던 다윈이 남긴 유산일 게다. 생의 황혼길에 ‘인간’이라는 ‘종’에 천착한 철학자의 치열함이 흐뭇하다. 그러니 이 책은 ‘한 인본주의자의 인간예찬론’으로 읽으면 족하겠다. ‘우리 시대의 에라스무스’라고나 할까.(정인환기자)

08. 04. 25.

P.S. 저자의 특이한 포지션은 종교인이나 지적 설계론자가 아니면서 다윈주의 진화론을 반박한다는 것인데, 어지간한 저자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데이비드 흄 전문가라는 저자의 철학자로서의 이력이 만만찮다. 게다가 마틴 가드너나 하비 맨스필드 같은 저명인사들이 추천사를 쓰고 있기에(서문은 로저 킴볼이 썼다) '이게 뭔가' 싶어서라도 책은 들춰보게 된다. 그리고 저자 서문 정도는 읽어봐야겠지.

그럴 계산으로 도서관에서 대출한 원서는 1995년판이다. 저자가 원고를 마무리하고 세상을 떠난 그 이듬해에 나온 것인데, 따져보면 저자 스토브 교수는 책의 출간을 못 본 게 아닌가 싶다. 이 95년판에는 저자 서문만이 붙어 있고 Avebury출판사의 철학 시리즈 중 한권으로 나온 것이어서 표지도 밋밋하다. 국역본은 95년판이 아닌 2006년판을 옮긴 것이고 킴볼의 서문은 이 책에만 붙어 있다. 여기서는 스토브의 서문만 읽어본다.

"이 책은 진화론을 반박하는 책이다. 다윈의 진화론과 다윈의 19세기 제자들은 물론이고 윌리엄스나 해밀턴과 같은 20세기의 영향력 있는 다윈주의자와 그 제자들 모두를 비판하는 책이다."

여기서 '윌리엄스'는 <적응과 자연선택>(1966)의 저자 '조지 윌리엄스'를 말하고, '해밀턴'은  '붉은 여왕' 이론의 대표적인 이론가 '윌리엄 해밀턴'을 가리킨다. 둘다 도킨스의 책에서 자주 거명되는 20세기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들이다. 스토브는 이 책에서 이들을 상대해주겠다는 것. 참고로 '붉은 여왕 이론'에 대한 설명을 과학평론가 이인식씨의 칼럼에서 옮겨놓는다. 

붉은 여왕 이론은 루이스 캐롤의 ‘거울 속의 세계’(1871)에 나오는 여왕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다. 붉은 여왕은 앨리스 소녀의 손을 끌어당기며 빠른 속도로 내달린다. 그러나 그들이 제아무리 빨리 달릴지라도 항상 같은 장소에 머물게 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앨리스에게 붉은 여왕은 “네가 같은 곳에 머물려면 지금처럼 전력을 다해서 달려야 한다. 그러나 만일 다른 곳으로 가기를 원한다면, 너는 적어도 지금보다 두배는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생물이 기생생물과 싸울 때 무성생식으로 태어난 개체는 모두 동일하므로 만일 한 개체를 파괴할 수 있는 기생생물이 출현한다면 순식간에 다른 개체를 모두 정복할 수 있을 테지만, 유성생식으로 태어난 개체는 모두 다르기 때문에 한개의 열쇠로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없는 것처럼 기생생물이 다양한 개체를 효율적으로 공략할 수 없다. 요컨대 성은 모든 세대에 걸쳐 개체가 질병을 일으키는 기생생물의 공격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개발한 전략무기이다. 대표적인 이론가는 영국의 윌리엄 해밀턴이다.(이인식, '성은 왜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조지 윌리엄스와 윌리엄 해밀턴, 그리고 이들의 제자인 리처드 도킨스 같은 대표적인 진화생물학자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내 목표는 다윈주의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다윈주의가 해면동물이나 뱀, 파리, 또는 다른 종의 경우엔 진리라고 할지라도, 또는 아주 진리에 가깝다고 할지라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다윈주의가 인간에게 마치 진리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관심을 갖는다'고 옮긴 동사는 'mind'이다. '내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이라고 옮길 수 있겠다. 그러니까 스토브의 주장은 진화론이 다른 종의 생물들에겐 진리일지 모르지만 인간에겐 아니라는 것. 왜? 인간은 '동물'이 아니니까?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늘 말해왔듯이 나는 '창조론자'가 아니며 기독교도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언급해야겠다. 사실 내게는 종교가 없다. 내가 속한 종이 육지 포유동물에 속한다는 것은 진화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아주 명백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 종이 다른 동물로부터 진화해 왔다는 사실 역시 진화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아주 그럴듯해 보인다. 나는 자연선택이 과거의 종에서 새로운 종이 생겨나게 하는 주된 원인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자연선택이 '현재' 인간에게서 '진행중'임을 부인한다."

사실 진화는 장구한 '진화론적 시간'에 걸쳐서 일어나는 것인지라 '현재 진행중'이라는 사실이 감지될 수 없고 따라서 스토브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의 입장은 자신이 확증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하지만 나는 어떻게 인간이 현재의 인간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 또는 어떤 조상으로부터 진화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는 못박고 있다. 그가 진화론 대신에 다른 어떤 이론을 제안하려는 게 결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단지 그는 진화론이 '현재에 우리 종에 대해 잘못 그려준 초상화에 바보처럼 속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질 따름이다(그러니까 대안을 내세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가 그의 포지션이다). 그리고 유의할 대목.

"내가 진화론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은 여기서 밝혀야겠다. 나는 생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이다. 다만 우연히 40여 년 동안 진화론 문헌들을 접하며 인간에 대한 우스꽝스런 명예훼손에 강한 반감을 지녀왔다. 물론 이것이 인간에 대한 진화론적 견해를 비판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자격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진화론은 현재 명확한 과학의 한 분야이다. 그래서 이방인이 그것을 비판하면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진화론을 비판하려는 자신의 '자격'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대목인데, 유의해야 한다고 한 건 강조한 문장들의 국역본 번역이 거꾸로 돼 있기 때문이다. 스트보가 말하고 있는 건 국역본대로라면 (1)나는 진화론 전문가가 아니다. 생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니까. (2)다만 오랜동안 진화론 문헌들을 읽으며 반감을 가져왔다. (3)진화론은 명확한 과학의 한 분야다. (4)따라서 이방인(문외한)의 비판은 자격에 대한 시비를 듣게 된다, 가 될 터인데, 이건 '자멸적인' 논리 아닌가? "나는 진화론을 비판하지만 생물학의 문외한이다. 통상 문외한은 비판의 자격이 없다."라는 얘기니까.

그럴 리는 없는 노릇이고 원문은 이렇다: "But on the other hand, Darwinism is not yet so arcane  a branch of science that criticism of it by an outsider can be automatically assumed to be incompetent." 다시 옮기면,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다윈주의는 문외한의 비판이 곧장 자격미달로 간주될 만큼 비밀스런 과학의 한 갈래가 아직 아니다." 그의 주장은 진화론(다윈주의)이 아직 전문화되고 성역화된 과학으로서의 권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문외한이더라도 시비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모두 11편의 '에세이'를 담고 있는 이 책 <다윈의 동화>의 기본 전제이자 출발점이다. 

일견 별로 가망이 없어 보이는 '시도'이긴 한데, 한편으론 그가 어디까지 가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게다가 명예훼손이란 '사실 혹은 허위사실로 당사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에 모두 적용된다고 하니까, 설사 진화론이 진리라 하더라도 명예훼손죄는 피하지 못하겠다. 해서 "진화론은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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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08-04-26 02:34   좋아요 0 | URL

매우 유익하고 알찬 핵심 논평, 정말 잘 읽었습니다. 과학적 논점이나 철학적 쟁점에 대해 “문외한(outsider)”이더라도, 얼마든지 시비를 제기할 수 있다는 얘기가 새삼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군요.

만약 이런 이방인 비판이 가능하지 않거나, 외부 비판을 금기시하는 풍토라면, 진화론에서 말하는 근친혼이나 근친교배 · 근친상간의 폐해를 가져올 위험이 매우 높으리라 생각합니다. 문외한적 비판에 관한 자격 문제를 언급하는 데이비드 스토브(David Stove) 역시 분명 이런 맥락의 함축을 고려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데이비드 스토브가 『다윈의 동화 Darwinian Fairytales』에서 깔고 있는 “문외한적인 다윈주의 비판”의 기본전제이자 출발점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진화론의 과학적 논리를 옹호하는 것으로 낙착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인간에 대한 다윈주의적 견해를 비판하고자 했던 데이비드 스토브의 비판 논리는 역으로 다윈주의의 유효성을 더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요? 진화론 비판이든 옹호든 결국은 모두 진화론의 과학적 타당성을 강화하고 입증하는 데 어떻게든 기여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말도 가능할 듯합니다.

“진화론은 인간에 대한 증언이다.”




로쟈 2008-04-26 09:02   좋아요 0 | URL
"결국, 인간에 대한 다윈주의적 견해를 비판하고자 했던 데이비드 스토브의 비판 논리는 역으로 다윈주의의 유효성을 더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그런 것인지는 마저 읽어봐야 알겠습니다.^^

kimdan 2008-04-26 01:51   좋아요 0 | URL
"Darwinism is not yet so arcane a branch of science that criticism of it by an outsider can be automatically assumed to be incompetent." 이 문장 굉장히 (생물학도로서) 불편하네요. ㅠㅠㅠ 그렇다고 로쟈님의 서재에서 진화론은 이러이러하다라고 일방적인 강의(!)를 할 수는 없으니 그냥 이 정도에서 마치겠습니다. 하하.

로쟈 2008-04-26 09:01   좋아요 0 | URL
스토브의 입장은 진화론이 아직 엄밀한 과학은 아니라는 것 같은데,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입니다(생물학자들은 코웃음칠 만한). 대신에 제가 동의할 수 있는 건 진화론이 '명예훼손'이라는 주장입니다. kimdan님도 '불편한' 책을 한번 읽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공부에는 적들이 친구들보다 유익하니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4-27 01:46   좋아요 0 | URL
보수적인 창조론 찬성자들이 적자생존론을 사회이론으로는 맞다고 여기고 기묘하게 동맹한 사실이 있는 걸 볼 때 인간의 조상론만 빼놓으면 근본주의자들도 다윈을 표절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그것도 아전인수격으로...

로쟈 2008-04-27 18:45   좋아요 0 | URL
스토브는 창조론자는 아닙니다. 그 점이 다른 보수주의자들과의 차별점이라고 헐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4-28 00:4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맘에 들어요.

로쟈 2008-04-28 09:49   좋아요 0 | URL
^^
 

커트 스펠마이어의 <인문학의 즐거움>(Human & Books, 2008)에 대한 소개기사를 챙겨둔다. 다른 몇 개의 기사도 대동소이하다. 책은 'Arts of Living'이 원제이고 '21세기 인문학의 재창조를 위하여'(Reinventing the Humanities for the Twenty-First Century)가 부제다. 저자는 생소한데, 러트거스대학의 영문학 교수라고. 아래 기사에서 지적하듯이 "저자의 주장에 새로운 것은 없다"손 치더라도 방대한 자료와 유려한 논증을 통해서 인문학이 변화해야 하며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는 주장을 입증한다.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 이후에 인문학의 변화와 갱신을 촉구하는 가장 '자극적인' 책이 아닌가 한다.

문화일보(08. 04. 04) 인문학, 세상과 어울려라

국내에서도 논란이 많은 ‘인문학의 위기’를 분석하고 그 돌파구를 찾아보는 책이다. 미국 러트거스대 영문학 교수인 저자는, 우리로 치면 대학의 인문·이공계를 아우르는 교양과정에서 작문 프로그램을 통해 인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연구와 교육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저자가 인문학 위기의 대안 중 하나로 제시하는 방안도 이같은 인문학 전공자에만 국한되지 않는 작문 과정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저자가 미국인으로 영미권 철학의 대표격인 ‘실용주의’ 철학자라는 점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영미권과 프랑스 독일 등 소위 ‘대륙권’에서의 체감이 적지 않게 차이가 난다. 대륙에선 좌파적 지성이 여전히 강하고, 영미권에서는 ‘실용주의’로 대표되는 체제 내적 학풍이 주도해오고 있는 차이로 볼 수 있다. 한국은 물론 영미권의 영향 아래 있다.

예컨대 저자는 지난 20년 동안 인문학을 지배해온 프랑스 철학자들-데리다, 푸코, 라캉, 들뢰즈 등-에 대해 ‘세상에서 고립돼 있는 순수사상가’로 부르면서, 그들의 이론을 ‘판매용으로 포장된 분석체계’라고 폄훼한다. 그는 “실용주의자인 나는 이론이 순수성찰의 입장을 내세우는 것을 액면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론은 어쨌거나 실용적인 목적에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문학자들이 시장체계를 아무리 혐오한다 하더라도 시장체계의 승리가 있기 전의 상황을 누가 잊을 수 있겠는가?” “이론의 승리가 우리에게 뭔가 말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안의 고갈과 진정 새로운 것을 꿈꾸는 능력의 상실이다.”

저자는 19세기 미국을 사례로, 지역사회가 무너지고 거대한 행정정부가 등장하면서 지식을 많이, 빠르게 습득하는 자와 적게, 늦게 습득하는 자의 편 가르기가 시작된다고 본다. 지식과 무지의 간극이 커지면서 인문학은 의학과 법학, 과학을 모델로 더욱 전문화의 길을 걷게 됐다. 사회 또는 생활과 동떨어진 이론이 부상하면서 인문학은 텍스트에 더 몰두하게 되고, 이는 인문학과 그 종사자에게 특권을 부여해준 대신 인문학의 고립이라는 대가를 치른다. 인문학이 소외된 결정적 이유는 이처럼 ‘학자들만을 위한 학문’에 갇혀 스스로 대중들과 멀어지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의 본질은 텍스트의 비평이 아니라 일상 생활과 연결된 ‘경험으로서의 예술적 활동’이 돼야 하며, 그러기 위해 인문학자들은 다른 학문들과, 세상과 벽을 허물고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 ‘의학 인문학’, ‘법 인문학’,‘경제 인문학’,‘미디어 인문학’ 등이 등장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한마디로 세상과, 사람에게 ‘실용적인’ 인문학이 돼야 인문학이 소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에 새로운 것은 없다. 이 정도는 ‘인문학의 위기’를 외쳐온 우리 대학의 인문학자들도 해온 얘기다. 그것은 저자가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의 외부, 곧 ‘체제 밖’은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나올 수 있는 결론이란 우리나 거기나 차이가 없다. 인문학의 위기는, 들뢰즈-가타리 식으로 말해 ‘배치’의 문제라는 것은 한국 학자들도 지금은 이의를 달 사람이 많지 않다.(엄주엽기자)

08. 04. 05.

P.S. 국내에서도 비슷한 주장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만한 규모의 보고서/제안서는 보지 못했다. 기사에서 언급되지 않은 건 이 책이 놓여있는 맥락인데, 그것은 90년대 이후 '지난 15년 동안' 벌어진 '문화전쟁'이다(소위 '과학전쟁'과 짝지을 만하다). 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강단 좌파와 우파의 '전쟁'을 말하는데, 이에 대한 스펠마이어의 평가는 냉정하다.

"지난 15년 동안 인문학은 보수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의 충돌을 겪어왔으며, 이는 상당히 공론화된 문화전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문화형성에 있어서 폭넓은 민주적 참여를 끌어내는 데 전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전쟁'은 오히려 경쟁적인 두 엘리트 집단의 소규모 전쟁으로 볼 수도 있다. 매슈 아널드와 엘리엇, 혹은 마르크스의 제자들이건 추종자들이건 간에 대부분의 학계 인문학자들은 아직도 문화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며, 혹은 그래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21쪽)

저자가 문제삼고 있는 건 이 '공통적인' 전제이다. 그에 비하면 '문화전쟁'을 낳은 보수/진보 인문학자들의 의견차이라는 건 오히려 사소하다는 것. 어떤 차이였던가?

"보수주의자들은 위대한 서적들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으며, 급진주의자들 역시 위대한 서적들을 - 신성한 우상으로라기보다 가혹한 '심문'의 대상으로 -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같은 문화전쟁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의 위기는 어떤 책은 가르치고 혹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어려움에 처한 것은 더 넓은 사회의 삶으로부터 점자 고립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실 20세기 전반에 걸쳐 인문학은 또다시 고립의 길을 택해왔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13쪽)

이것이 이 책의 진단이자 기본 전제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사히는 것이 문화형성에의 개입 혹은 참여이다. "문화형성에의 직접적인 개입, 이것이야말로 과거의 인문학은 이루어내지 못했던 것이며 새로운 인문학이 미래를 기대하려면 반드시 책임지고 노력해야 할 일이다."(19쪽) 저자의 진단에 공감한다면 그가 제안하는 대안들에도 눈길을 줄 만하다.

한편 책의 뒷갈피에는 추천사들이 적혀 있는데, 일리노이대학의 한 교수의 코멘트는 이 책의 계보를 지적한 것이어서 유익하다. "이 책은 로버트 스콜스의 <영문학의 부상과 몰락(The Rise and Fall of English)>, 앨런 블룸의 <미국적 정신의 종말(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 제럴드 그래프의 <문학의 공언(Professing Literature)>에 이르는 다양한 지적 전통에 속한다."

스콜스의 <영문학의 부상과 몰락>(1999)은 부제가 한 분과학문으로서 영어의 재구축(Reconstructing English As a Discipline)'이다. 스펠마이어도 지적하는 것이지만 미국의 경우에 인문학이 대학에서 전문직 형태로 갖춰진 것은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 19세기 종반까지만 해도 인문학의 핵심분야는 수사학과 고전학이었지 영문학이나 역사학이 아니었다. 스콜스의 거명한 책은 이러한 '학문사' 내지는 '학문제도사'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주겠다. 참고로 '스콜스'는 국내에 '스콜즈' 혹은 '숄즈'로 소개됐으며 <서사의 본질>, <문학과 구조주의> 등이 대표적인 저작이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로 미국 보수주의의 거물인 앨런 블룸의 <미국적 정신의 종말>(1987)은 <미국 정신의 종말>(범양사, 1989/1997)로 번역돼 있다.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집문당, 1982)도 그의 책인데, 근작을 보니 <셰익스피어의 사랑과 우정론>도 눈에 띈다. 

그리고 제럴드 그래프는 국내에 '제럴드 그라프'로 소개돼 있으며 <자신의 적이 되어가는 문학>(현대미학사, 1997), <시의 진술과 비평적 도그마>(현대미학사, 1999)가 그의 책들이다. 'Professing Literature'를 '문학을 공언하기'로 옮겼는데, 잘못 옮긴 것이고 <문학을 직업으로 가르치기> 정도의 뜻이어야 한다. 대학에서의 '문학 전공'의 역사를 더듬어보는 책이다.

저자인 스펠마이어는 한 각주에서 블룸의 <미국 정신의 종말>이 '문화전쟁'의 분수령이 된 책이었다고 언급하며 해럴드 블룸의 <서구의 정전>과 자크 바전의 <우리가 존중하는 문화(The Culture We Deserve)>(1989), 그리고 이들과 반대편에 섰던 로저 킴볼의 <정교수 급진주의자(Tenured Radicals: How Politics has Corrupted Higher Education)>(1990) 등도 주요한 책으로 거명한다. 그는 이 두 입장에 비판적이며 <문화전쟁을 넘어서(Beyond Culture Wars: How Teaching the Conflicts Can Revitalize American Education)>(1992)를 쓴 제럴드 그라프, <미국 정신의 개막(The Opening of the American Mind: Canons, Culture, and History)>(1996)을 쓴 로렌스 레바인 등의 입장에 공감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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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8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4-08 16:55   좋아요 0 | URL
네, 기대한 것보다 좋은 책입니다.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는. 더불어 '충격'씩이나요?^^;

소경 2008-04-10 10:17   좋아요 0 | URL
맨날 안이한 생각 가지고 살고 있어서 ^^;;
 

며칠을 정신없이 보낸 탓에 서재에 들어와보는 것조차 낯선 느낌은 갖게 된다. 어제 밤을 새고 오늘은 아이의 학예회 발표가 있어서 시청 강당에 가 꾸벅꾸벅 졸다가 저녁 나절에 한숨 자고 일어난 것이 이 시간이다. 정신을 좀 가다듬으려고 모처럼 여유를 부려서 '무시무시한 책들을 읽자!'(http://blog.aladin.co.kr/mramor/1641777)에서 꼽아둔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문학동네, 2007)을 펼쳐들었다. 서문 정도 읽어볼 참이었는데, 웬걸, 시작부터가 만만치가 않다. 이 책 자체가 1960년에 초판이 나온 것이어서 서문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이미 '시간여행'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르트르의 상상력론이 주된 검토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일단 그렇다. 국내에 사르트르 전공자들이 적지 않지만 아직 그의 <상상계>(1940)와 <상상력>(1950)이 번역돼 있지 않다. 뒤랑을 읽어나가는 데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건 미리 짐작해볼 수 있다. 도움이 될 만한 서평이 없나 찾으니 지난주 기사 하나 정도가 눈에 띈다. 그래도 가장 긴 분량을 할애한 서평기사라서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7. 10. 13)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자유로운 상상력도 일정한 틀과 유형에 의거해 작동하고 있음을 분석한 고전이다. 저자인 질베르 뒤랑(86)은 영미권의 노스럽 프라이와 함께 신화비평이론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1960년 출간된 이 책이 이제 번역이 된 것은 방대하고 난해한 내용 때문이기도 하지만 뒤랑이 국내 소개된 프랑스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와 전혀 다른 전통에 속한 학자라는 낯섦 때문이기도 하다. 뒤랑을 이해하려면 스승인 가스통 바슐라르부터 시작해야 한다.



‘상상력의 해방가’로 알려진 바슐라르는 서구 이성 중심의 전통에서 ‘거짓과 오류의 원천’이자 이성의 어두운 그림자로 비판받아 온 상상력을, 이성과 동등한 위치로 올린 철학자였다. 바슐라르가 이를 과학과 시학으로 양립시켰다면 뒤랑은 상상력의 토대 위에 이성이 작동한다며 “이성은 상상력의 특수한 형태”라고 설파했다. 뒤랑은 상상력이 물 불 공기 흙의 원형이미지의 변형으로 이뤄진다는 스승의 4원소론이 지닌 서구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며 모든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는 상상계의 구조와 체계를 확립했다.



이 책의 서문은 웬만한 학자도 읽어낼 수 없을 만큼 난삽하다. 20세기 상상력연구의 전기를 마련한 사르트르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이론 수립을 위해 국내 독자들에겐 낯선 온갖 ‘주의’를 종횡무진하기 때문이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선 바슐라르 외에도 정신분석학자 구스타프 융, 러시아의 신경과학자 V M 베흐테레프를 징검다리로 삼아야 한다.

뒤랑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상상력의 인류학을 위해 베흐테레프가 정립한 반사학의 지배 반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지배반사란 인간의 조건반사적 행동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몸짓을 말한다. 그것은 신체의 평형을 유지하려는 자세 지배소와 섭취 지배소, 교접 지배소다. 그는 이 3대 지배몸짓에 융의 원형이론을 적용해 상상계의 3대 구조를 수립한다. 그것이 바로 자세 지배소와 연관된 분열형태구조(영웅적 구조), 섭취지배소와 연관된 신비구조, 교접지배소와 연관된 종합구조(드라마적 구조)다.

분열형태구조는 선악, 빛과 어둠 같은 분열과 대립구도가 중시되며 신비구조는 동화와 내면화를 지항한다. 종합구조는 상이한 요소의 결합을 강조하며 무한한 반복의 힘을 표현한다. 뒤랑은 이런 구조들을 낮과 밤의 양대 체제로 재범주화한다. 분열형태구조는 이미지의 낮 체제에 속하고 신비구조와 종합구조는 이미지의 밤 체제에 속한다. 본문은 바로 이 2체제 3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흥미로운 점은 레비스트로스 인류학의 영향 아래 있던 푸코, 들뢰즈, 데리다가 ‘차이’를 강조하는 반플라톤의 지적 전통에 있다면 뒤랑의 인류학은 ‘공통성’을 지향하는 플라톤적 전통에 있다는 발견이다. 인간 내면의 원형으로서 이데아를 강조한 플라톤적 전통은 문학평론가에서 문화인류학자로 변신한 르네 지라르의 모방의 문화인류학에서도 확인된다. 프랑스 지성계의 또 다른 다원성을 보여 준다.(권재현 기자)

07. 10. 26.

P.S. 기사에서 눈길을 끄는 건 러시아의 신경과학자 베흐테레프에 대한 언급. 각주와 참고문헌에 등장하지만 찾아보기에는 빠져 있어서(국역본과 영역본의 색인 모두에서 '베흐테레프'는 등장하지 않는다) 얼마나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본문에서는 58-64쪽 정도에 걸쳐서 나온다), 여하튼 찾아보면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베흐테레프(1857-1927)이고 러시아에서는 <미래의 정신의학>이란 책이 지난 1997년까지도 출간된 바 있다. 부제는 '병리반사학 입문'이라고 돼 있다(병리반사학?).

В. М. Бехтерев Будущее психиатрии. Введение в патологическую рефлексологию

58쪽의 역주에 따르면 베흐테레프는 "소련의 신경학자로서, 신경심리학에 관심을 갖고 조건 반사의 방법을 이용하여 '반사학'이라는 용어를 창안하였으며, 자극에 대한 반응을 연구함으로써 객관적 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가 창도한 반사학은 운동신경계의 조건 반사인 운동 연합 반사를 기초로 고등한 정신활동을 설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라고 설명돼 있다. 뒤랑이 참고하고 있는 책은, 특이하게도 국역본의 참고문헌에는 빠져 있는데, 역시 58쪽의 저자주를 <새로운 반사학과 생리신경계>(전2권, 1925-1926), <인간의 반사작용의 일반원리>(영역본, 1933), <객관심리학> 등이다. 개인적으론 로만 야콥슨과 베흐테레프 사이의 관계 등이 궁금한데(자세히 찾아보진 않았지만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이 검색되는 글들이 있다) 아마도 '실어증'에 관한 연구 등에서 야콥슨이 베흐테레프를 참조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은 든다.

 

 

 

 

정좌하고 읽어야 하는 서문에서 일단 후퇴하여 역자 후기('옮기고 나서')로 넘어가보았다. '뒷계단'을 통해서 들어가보려는 심사다.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뒤랑이 그르노블대학에서 '상상력 연구센터'를 이끌고 있다면 국내에서는 그의 제자들이 '서울 상상계 연구센터' 및 '한국상상학회'를 주도하고 있는데, 그 좌장격은 보들레르 연구자인 유평근 교수였다(말을 붙이자면 '그르노블 마피아'쯤 된다). 역자인 진형준 교수는 또 그 제자여서 '뒤랑-유평근-진형준'식의 계보가 만들어지는 것. 두 사람의 공동저작이 <이미지>(살림, 2001)이고, 유평근 교수는 뒤랑의 <신화비평과 신화분석>(살림, 1998)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이런 책들이 모두 살림출판사에서 나온 건 한때 <상상>이란 잡지를 내고 상상력 총서를 발간한 전력과 관련된다(기억에 진형준 교수는 그 총서의 기획자였다). <상상력이란 무엇인가>(살림, 1997) 같은 책 말이다. 그 정도의 예비지식을 갖고서 후기를 읽어봤다.

"유평근 선생님이 권유로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을 읽기 시작한 것이 벌써 30년 가까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질베르 뒤랑의 지도하에 보들레르를 연구하고 귀국하신 유 선생님이 뒤랑의 역작을 내게 권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당신도 이 책을 여섯 번 정도 읽고서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 따라서 공부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며 당장 활용하기도 어려우리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유 선생님이 하신 이야기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저자의 기본정신, 혹은 이 책을 지배하고 있는 근본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라는 것이었다. 이 책을 통하여 지식을 습득하거나 논리적인 추론훈련을 할 것이 아니라 저자의 마음을 읽으려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697-8쪽)

역자와 마찬가지로 한국인 수제자가 여섯 번이나 읽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책인지라 위안과 낙담을 동시에 갖게 된다("단번에 이해 못하는 게 당연하군!" "난 열번을 읽어도 이해 못학 거야!"). 하지만 요는 아무리 둔재라 하더라도 '책과의 씨름'을 멈추지 않는 것. "뒤랑을 공부하면서 나는 다원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배웠고 주관성의 의미를 배웠으며 상상력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그리고 서구의 인식론의 흐름을 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어느 정도 획득했으며, 무엇보다 종합적인 정신을 배웠다. 그리고 유 선생님이 이 책 읽기를 권하면서 하신 말씀들의 참뜻을 이해했다."

이쯤 읽으니 떠오르는 책들이 있다. 지금은 뜸한 듯하지만 문학평론가로 활발히 활동하던 저자가 낸 평론집들이다. <깊이의 시학>(문학과지성사, 1986), <또 하나의 세상>(청하, 1988) 등이 그 책들로 내가 대학 1-2학년때 읽었던 것이나 어느새 20년 전 얘기이다(작년에 읽은 책들보다도 기억에는 생생하건만). 관형사 '그'가 거의 매 문장마다 나오는 특이한 문체와 함께 뒤랑의 상상력이론을 자세하게 소개하던 글들이 기억난다. 저자는 이후에 <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살림, 1997)을 더 냈지만 나는 읽어보지 않았다.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이 나온 것은 1960년이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거의 50년 전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던 뒤랑의 혜안이 놀라울 뿐이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해서 강연을 한 프랑스의 철학자 뷔넨베르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바슐라르를 갈릴레이에 비교할 수 있다면 뒤랑은 코페르니쿠스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갈릴레이도 코페르니쿠스와 마찬가지로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지동설을 하나의 큰 체계로 설립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이다. 바슐라르가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이룩한 것, 상상력의 놀라운 기능을 발견한 것은 사실이지만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여 거대한 인식의 체계를 이루는 데 성공한 사람은 바로 뒤랑이라는 것을 뷔넨베르제는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랑의 <상상력의 인류학적 구조들>은 그만큼 새로운 인류학적 틀이면서 거대한 종합적 틀이고 거대한 만큼 섬세한 틀이다."(699쪽)

그 거대한 틀이란 것은 본문의 결론 뒤에 붙은 '상상계의 동위적 분류도'를 통해서 일견할 수 있다. 어쩌면 이 두툼한 책 전체가 이 '분류도'에 대한 해설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든다. 역자의 인용대로 바슐라르-뒤랑을 갈릴레이-코페르니쿠스에 비유한 것은 명쾌해 보인다. 후기의 이어지는 내용은 이제 그 '구조들'의 내용과 의미에 대한 조감이지만, 나는 이쯤에서 걸음을 멈춘다. 장정일의 말대로 공부란 건 내가 반 정도 하고 나머지는 당신이 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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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2008-01-04 02:29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최근에 나온 책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2007)는 근래에 읽은 책들 가운데 (지젝의 책들을 제외하면) 가장 재미있다. 테러리즘에 관한 원고를 쓰기 위해 여러 책을 만지작거렸지만 결국엔 이글턴의 책이 낙착된 이유이다(소개된 책들만 고려하더라도 한국어 이글턴은 다시 '중흥기'를 맞고 있는 감이 있다. 그의 소설 <성자와 학자>, 그리고 이론서 <우리 시대의 비극론>이 모두 최근 1년 안에 출간된 책들이고, 아마도 그의 책 두어 권 이상이 앞으로 1년 안에 더 출간될 것으로 보인다).  

 

 

 

 

필요 때문에 책과 관련된 리뷰 기사들을 읽어봤는데, 재미있는 내용들도 눈에 띄었다. 이 페이퍼가 목표한바 <성스러운 테러>의 서문을 다루기 전에, 미리 읽어본다(한겨레의 리뷰가 보이지 않는 게 좀 특이하다). 먼저 동아일보의 리뷰.  

9·11테러 이후 일상으로 침투한 테러를 근대 이후의 예외적 현상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인간성의 심연에 내재된 일반적 어둠으로 이해할 때 진정한 극복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담았다. 신화와 문학, 미학과 철학, 정신분석학과 정치학을 종횡무진 오가며 테러는 본질적으로 원초적 폭력에 대한 저항적 폭력임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테러가 폭력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정의의 실현을 통해서만 종식시킬 수 있다는 주제의 변주치고는 지나치게 현학적인 내용이 많다.

이글턴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이지만 책은 테러에 대한 일종의 '형이상학'을 다루고 있다. "테러가 폭력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정의의 실현을 통해서만 종식시킬 수 있다는 주제의 변주치고는 지나치게 현학적인 내용이 많다"는 촌평은 혹 이 책에서 형이상학적 통찰보다는 시사적인 비판을 더 기대했던 탓이 아닐까? 이러한 '빗나간 기대'에 대한 낭패감을 보기 흉할 정도로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 중앙일보의 리뷰이다.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품게 된 테러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이라면 이 책 말고 다른 걸 고르는 게 낫다. 여간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이 없는 독자라면 10분을 못 버티고 책을 던져 버릴 게 분명하다. 저자가 서문에서 미리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수많은 테러리즘 연구에 한 항목을 보태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테러라는 개념을 “형이상학적이라 부를 수 있는 맥락에 위치시키려는 시도”다.

'최초의 테러리스트는 디오니소스?'란 타이틀의 이 리뷰는 논설위원의 글답게 첫문장에서부터 '고압적'이다. '테러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키려는 독자라면 물론 다른 책들을 참조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제외되어야 할 이유를 나는 책을 읽으면서 찾지 못했다. 필자가 인용한 대목에 바로 이어지는 것이지만 "이 책은 최근에 내가(=이글턴이) 작업해온 형이상학적 혹은 신학적 연구의 국면에서 나온 성과"이며, 그런 점을 얼마간 고려하면 되는 것 아닌가. "여간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이 없는 독자라면 10분을 못 버티고 책을 던져 버릴 게 분명하다"? 내 생각엔 10분만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독자라면 책을 손에서 놓기 어려울 것이다.

"형이상학적 혹은 신학적 연구의 국면"은 "metaphysical or theological turn"을 옮긴 것인데, 'turn'은 물론 어떤 '방향전환'이나 '전회'를 가리킨다. 그의 오랜 독자들이라면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이글턴이 웬 형이상학 혹은 신학 타령이냐, 라고 반문을 가질 법하고(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외도' 아니냐는 의혹을 받을 수도 있겠다), 또 이글턴 자신이 그런 반응을 예상치 못하는 게 아니다. "혹자는 나의 이러한 연구를 환영했지만, 혹자는 경계와 실망을 타내기도 했다."라는 진술이 바로 이어지는 것이다(그가 각주로 미리 선수를 쳐놓았지만, 가령 '성스러운 테리Holy Terry'라고 놀림감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한 종류의 반문에 대한 이글턴의 대답은 이렇다: "나는 좌파 진영의 친구들에게 사탄이나 디오니소스, 희생양과 악마 등 다소 이국적인 논의들이 담고 있는 정치학이 결코 오늘날의 정통 마르크스주의 담론보다 덜 급진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싶다." 나는 이글턴의 말에 공감한다. 리뷰를 마저 읽어본다.   

그런 눈으로 봐야 우선 『성스러운 테러』라는 제목에 반감을 버릴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대지의 풍요를 주재하는 신이자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최초의 테러리스트 지도자”로 언급하는 저자의 도발적 글쓰기는 서구 문명사를 구성하는 신화와 문학, 철학, 심리학, 정치학을 아우르고 고대와 현대의 시간적 경계를 무시로 넘나들며 테러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시도한다.

디오니소스의 예가 암시하듯 저자에게 테러는 이성과 광기의 양가성(兩價性) 개념이다. 디오니소스와 신도들의 광적 주신제(酒神祭)를 폭력으로 제압하려 했던 이성적인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결국 파멸하고 만다. “광기를 인정하는 것이 정신의 명료함인 반면 광기를 이성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일 뿐”인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문명과 야만이 오랜 적대자인 동시에 가까운 이웃”이었으며 “인류가 문명 진화와 함께 야만을 휘두를 세련된 기술을 발전시켜왔음”을 본다. 테러는 결국 인간 자신에 내재한 폭력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테러를 막으려면 인간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말은 쉬운데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해석의 자의성은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시사적 의미로 테러의 역사가 궁금한 독자보다는 테러라는 주제로 호사스런 문학적 유희를 만끽할 준비가 돼있는 독자에게 추천할 만하다. 화려한 언어의 향연 속에서 머리에 쥐가 났을 게 분명한 번역자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는 악취미를 가진 독자라면 더욱 그렇다. 

서평이야 취향에 따라 제각각일 테지만 "말은 쉬운데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해석의 자의성은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란 촌평에 나로선 공감하기 어렵다(고통스럽기까지 한 해석의 자의성?). 때문에 "시사적 의미로 테러의 역사가 궁금한 독자보다는 테러라는 주제로 호사스런 문학적 유희를 만끽할 준비가 돼있는 독자에게 추천할 만하다"라는 기이한 추천의 변은 '분풀이'로 읽힌다(혹은 내가 '호사스런 문학적 유희를 만끽한 준비가 돼있는" 독자일는지도). 거기에 마지막 문장은 가관이다. "화려한 언어의 향연 속에서 머리에 쥐가 났을 게 분명한 번역자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는 악취미를 가진 독자라면 더욱 그렇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읽기는 즐거웠지만 번역하기는 어려운 책이었다"니까 혹 '머리에 쥐가 났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번역에 하자가 있는 건 아니며 읽기에 특별한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요즘 나오는 번역서들에 비하면 상당히 준수한 수준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심지어 나는 순전히 같은 역자의 '작품'이어서 앨리슨 먼로의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뿔, 2007)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정도이다(<니체>와 <역사의 요동>은 이미 구매한 책들이다). 취향은 자유라고 하지만, 리뷰는 아무래도 취향을 남용한 게 아닌가 싶다.

"반어적이고 풍자적인 이글턴 문제 특유의 뉘앙스" 때문에 고생했을 역자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면서 나대로 아쉬움을 표하자면,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두 번이나 '토스토예프스키'로 오기되고 찾아보기에도 'ㅌ'항에 배치된 것은 비록 '재미'는 선사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몇 군데 약간 부정확한 번역과 부정확한 조사 등은 또한 책이 다소 급하게 나왔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꺾을 정도는 아니다(물론 이글턴의 책을 처음 손에 든 독자라면 다소 어려울 수는 있겠다).

서문에서 밝힌 이글턴의 변은 이렇다. "고대의 제전에서부터 중세 신학, 18세기의 숭고 개념과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이르기까지 내가 추적한 테러리즘의 계보학은 자의적일 뿐만 아니라 자격 미달의 비역사적 연구로 보일 수도 있을 터이다. 테러만이 그 계보를 추적할 수 있는 전(全)역사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분명 이 연구의 자의성이 지적될 순 있겠지만, 이 연구를 비역사적이라고 비판하는 후자의 견해에 대해서라면 이는 역사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반박하고 싶다."

'전(全)역사적 현상'이라고 한 건 'pre-history of the phenomenon'의 번역이므로 '전(前)역사적 현상'으로 교정되어야겠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의도한 '테러리즘의 계보학'이 자의적이고 비역사적이란 비판은 가능하지만 그때 비역사적이란 비판은 "in a somewhat impoverished understanding of the historical", 즉 "역사에 대한 빈곤한 이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심각한 오해'까지는 아니다. 왜냐면 그런 식의 역사 이해도 가능하기에. 앞에서 인용한 리뷰가 가능한 것처럼). 거꾸로 역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진 독자라면 <성스러운 테러>와의 만남은 말 그대로 '향연'이다...

07. 09.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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