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펴내는 월간 <책&>(391호)에 실은 주제별 도서소개 코너를 옮겨놓는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골라 관련서 몇 권에 대한 소개를 간단히 적는 코너다. 이번달 주제는 '중국'이었다. 관련서가 쏟아지고 있기에 중국이란 주제를 함부로 말할 건 아니지만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부키, 2010)이나 <왜 중국은 서구를 위협할 수 없나>(에쎄, 2011) 같은 책은 필독 목록에 포함되지 않나 싶다.  

 

책&(11년 2월호) 펀펀한 독서+인터넷 서평꾼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

얼마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은 21세기의 패권이 주요 2개국(G2)에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탈냉전 이후 등장했던 미국 독주의 ‘팍스아메리카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바야흐로 ‘차이메리카 시대’가 도래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차이메리카(China+America)’는 영국의 역사학자 니알 퍼거슨이 만들어낸 합성어다. 중국과 미국이 합치면 지구전체 면적의 13%, 인구의 4분의 1, GDP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한 경제세력이 된다고 한다. 냉전시대 서로 대립했던 두 나라가 과연 상호협력과 공동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외교적 수사 너머에서 환율과 무역, 원가 등을 둘러싼 본격적인 ‘중미전쟁’이 벌어질 것인가. 과연 그들은 적인가 친구인가. 한반도의 운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라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경제대국뿐만 아니라 세계정치의 대국으로도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합의된 의견은 없는 듯하다. 조금 곤혹스럽지만 오히려 정반대의 의견들이 제시돼 있다.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부키, 2010)은 제목 그대로 미국을 포함한 서구 패권의 시대가 끝나고 ‘중국이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물론 근대 이후 세계의 패권은 여러 차례 이동해왔기에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헤게모니가 이동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중국이 서구 국가들과는 지리적으로 다른 좌표축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다른 문명과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중국으로의 주도권 이동이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패권 이동과는 다른 양상을 띨 뿐만 아니라 서구 사회에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다.  

저자는 중국의 부상으로 서구식 보편주의는 더 이상 척도로 기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중국의 급속한 성장은 중국식 모델, 중국식 근대화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며, 이것을 서구식 잣대로만 해석하고 평가하는 식으로는 지금의 중국을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과연 무엇이 다른가. 저자는 특히 중국의 정치 제도의 특수성을 지목한다. 서구 국가들이 국민국가라면 중국은 문명국가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서구에서는 인민주권 사상이 정치의 핵심인 반면에 중국에서 인민주권은 국가주권으로 대체되었다. 제국주의의 위협과 내부의 정치전통이 결합한 결과 탄생한 것이 국민주권과 국가주권을 중심으로 중국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경제 도약은 이러한 특수성을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서구식 민주주의라는 단일한 척도로 중국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서구 중심적 시각이라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이제 대세가 중국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미국은 너무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의 충고다.  



반면에 에드워드 스타인펠드의 <왜 중국은 서구를 위협할 수 없나>(에쎄, 2011)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중국을 바라본다. 저자가 보기에 사회주의 중국은 전체주의 체제의 국가였으며 1978년부터 추진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조차도 이러한 기본 성격을 바꾸지 못했다. 그에 따르면 혁명이라고도 부를 만한 진정한 변화는 텐안먼 사태 이후 1990년대에 일어났다. ‘중국의 자본주의 도입’이 그러한 변화의 출처다. 그 이후 중국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으며 1989년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결코 중국식 모델의 성공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합류하면서 중국이 내보이는 행보는 서구의 모습에 가까워지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중국은 자국 전통의 특수성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원래와는 다른 모습의 국가가 되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의 빠른 경제 성장은 중국이 서구의 규칙을 수용하고 그에 따라 게임을 하면서 가능해졌다. 중국의 이러한 변화는 미국과 서구 국가들에게 결코 불리한 것이 아니라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오히려 자본주의 중국이 점차 ‘서구화’되면서 중국의 정치적 특수성으로서 독재주의도 자연스레 쇠퇴할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기도 하다. 두 중국 전문가가 내보이는 이러한 상반된 시각 중 어느 쪽이 현실에 더 부합할는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지만, 공정하게 판단하려면 중국 내부의 시각도 참고해볼 필요가 있겠다.   

중국 지식인들과의 대담을 담은 <중국의 내일을 묻다>(삼성경제연구소, 2010)가 유익해 보이는 이유다. 인상적인 건 중국 공산당의 전략가였던 정비젠 교수가 내세우는 ‘화평굴기’론이 다. 화평굴기란 대국굴기와는 달리 주변국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더불어 화목하게 번영하는 것을 지향한다는 전략으로 21세기 중반까지 중국이 추구해나갈 방향이라 한다. 이를 구체화한 후 주석의 방미 일성이 “양국의 장기적이고 건강한 발전은 양국은 물론 세계 평화와 발전에도 유리하다”였다. 과연 중국은 미국과는 다른 규칙으로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 

11.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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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서 주문하고 돌아와서 펼쳐본 책의 하나는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플래닛, 2011)이다. 전후 유럽사를 다룬 <포스트워>(플래닛, 2008)의 저자라는 것만으로 아무런 정보 없이(물론 제목과 부제는 보고) 주문한 책이었다. 작년 8월에 세상을 떠난 저자의 마지막 책이라는 것도 인상적이다(그는 구술로 이 책을 썼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11. 02. 19) "복지의 숭고한 기원 새겨라" 죽은 역사학자의 마지막 당부 

"우리는 경제 '성장'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적 병폐를 줄이는 일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번영과 특권은 파이의 크기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확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한다."

영국 출신 역사학자 토니 주트(1948~2010)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서 이렇게 단언하면서 오늘날 세계가 당면한 가장 핵심적 과제는 불평등의 완화임을 역설한다. 이 책은 전후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는 <포스트워 1945-2005>의 저자인 주트가 루게릭병으로 온몸이 마비되어가는 고통 속에서 쓴 마지막 저서다. 



주트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역사가답게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20세기 역사를 되돌아볼 것을 권한다. 특히 복지국가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다시 불안의 시대로 들어섰는지를 되새기게 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함몰돼 있는 서구 사회에 각성을 촉구한다.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등장한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후 그 참담한 시절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에서 탄생했다. 시장은 규제되었고, 복지는 자선이 아니라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됐다. 서구의 복지국가는 2차대전 이후 수십 년간 전례 없는 번영과 평등의 확산을 누렸다.

복지국가가 퇴색되기 시작한 것은 2차대전 이후에 태어나 복지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1960년대 세대들이 정의나 기회균등보다는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면서 싹텄다는 지적이 예리하다. 신좌파의 이러한 태도는 사회 구성원들이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는 의식의 퇴조를 가져왔고 이는 우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트는 이런 태도들이 보수주의의 귀환을 불러왔다고 본다. "사회 따위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만이 있을 뿐이다"고 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말이 이 같은 사조를 대변한다.

주트는 돈벌이에 대한 강박, 민영화와 민간 부문에 대한 숭배, 점증하는 빈부 격차 등 서구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것들로 보이는 물질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특성은 인간 조건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80년대부터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또 이러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퍼트린 것은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한 영미권 경제학자들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친 것은 나치의 지배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오스트리아 출신 학자들이라고 추적해 들어간다. 그러면서 서구사회가 세계 대전의 잿더미 위에서 건설한 복지국가라는 위대한 유산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물질적 사리사욕의 추구를 미덕으로 살아 왔다. 우리는 법원의 판결이나 의회 법안이 좋은 것인지, 공정한 것인지, 정당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 묻는 법이 없다. 과거에 우리는 이러한 정치적 질문들을 던지곤 했다."

주트의 지적은 외환위기 이후 밀어닥친 신자유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한국 사회에도 경종을 울린다. 주트는 사회의 공동선을 위한 공동 행동의 가치와 가능성을 믿는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 서서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남경욱기자)  

11. 02. 21.  

P.S. 사회적 공동선에 대한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주트의 책은 '공공철학'이란 말을 떠올리게 하는데, 야마와키 나오시의 <공공철학이란 무엇인가>(이학사, 2011)를 보면, 일본에서는 이 단어가 2000년대 초반부터 급속도로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공철학 강좌도 생기고 네트워크도 만들어지는 식이다. 하지만 내가 '공공철학'이란 말을 접한 건, 적어도 기억엔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한국경제신문, 2010)가 처음이다. 이 책의 원제가 'Public Philsophy'였고, 직역하면 '공공철학'이 될 터이다. 공공철학에 대한 관심은 또한 '공화주의'나 '공화국'과 분리될 수 없는데(샌델은 물론 '절차적 공화국(procedual republic)'에 대해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번역본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옮겨진 단어다), 박명림/김상봉 교수의 <다음 국가를 말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11)가 연이어 떠오른다. 나란히 읽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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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대중과 소통하는 지식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고 나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건 위키리크스와 어산지이다. 러시아에 잠시 다녀오는 동안 '위키리크스'에 관한 두 권의 책이 화제가 된 듯싶은데, “정보공개는 투명성을 높이며 이 투명성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이들의 신념에 동의를 표하며(비슷하게 흉내내자면 나의 모토는 "지식의 공유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이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진즉에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올라가 있다는 위키리크스의 활동과 그 여파가 앞으로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까 추측된다. '비밀이 많은 정부'를 갖고 있는 우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경향신문(11. 02. 19) ‘비밀 없는 세상’ 열려는 위키리크스의 비밀

타임지는 독자들이 뽑은 2010년의 인물로 폭로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의 대표 줄리언 어산지를 선정했다. 위키리크스는 지난해 4월 미군 아파치헬기가 이라크 민간인을 폭격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으로 세계를 분노시켰다. 7월에는 아프가니스탄전 관련 문건 7만6000건, 10월에는 이라크전 관련 문건 39만건을 공개해 명분 없는 전쟁의 실체를 폭로했다. 이어 11월에는 미 국무부 외교문건 25만1000건으로 외교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위키리크스가 무너뜨린 건 미국의 도덕성만이 아니다. 권력층 비리에 성난 튀니지 민중들은 23년 만에 민주화 혁명을 일으켰고, 이 열기가 이집트로 옮겨붙어 무바라크의 30년 독재를 끝냈다.

위키리크스가 설립된 건 2006년 12월이지만 명성과 영향력은 지난해 절정에 이르렀다. 다음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한편 어산지는 스웨덴 여성 2명을 성폭행한 혐의로 스웨덴 법원의 구속영장이 집행돼 런던에서 체포된 뒤 일주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위키리크스가 한 일은 범죄인가, 정의인가. 어산지는 어떤 인물인가. 



<위키리크스>란 제목의 책 두 권이 나란히 나왔다. <위키리크스-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박규호 옮김, 1만5000원)는 2007년부터 위키리크스와 협력 관계였던 독일 ‘가디언’지의 두 기자가 이 조직과 어산지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위키리크스가 한 일은 무엇이고 어떻게 운영되는지, 폭로와 관련된 법적·윤리적 쟁점이 무엇인지, 권력과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각도로 분석했다. 또 다른 책 <위키리크스-마침내 드러나는 위험한 진실>(배명자 옮김, 1만3800원)은 위키리크스의 2인자였다 어산지와 결별한 독일 출신 IT전문가의 내부 고발이다.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에서 저자들은 어산지의 개인사와 위키리크스의 탄생을 상세히 소개한다. 1971년 호주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어산지는 히피와 해커의 혼합물이다. 그의 어머니 크리스틴은 히피문화에 경도돼 17세에 가출했으며 혼자 어산지를 키웠다. 그후 사이비 종교집단의 일원인 남자와 살다가 헤어진 뒤 계속 추적을 받았다. 어산지의 유랑 기질은 여기서 비롯한다.

어산지는 10대 초반인 1980년대 중반 코모도어64란 이름의 홈컴퓨터를 통해 모뎀으로 네트워크에 연결하는 실력을 갖췄고, 곧 해커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추정 IQ 140~180, 멘닥스란 이름으로 유명했던 그는 통신사 노텔 네트워크에 들어갔다 컴퓨터 범죄로 기소된다. 그후 멜버른대학 수학과에 들어갔으나 사막에서 잘 달리는 장갑차 기술을 개발하는 데 염증을 느껴 학교를 그만둔다.

위키리크스의 아이디어는 1996년 존 영이란 뉴요커가 운영하던 크립톰이란 사이트에서 얻었다. 당시 영은 자신이 입수한 비밀문서를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10년 뒤인 2006년 어산지는 영에게 자신의 프로젝트를 설명하면서 도메인 등록을 부탁한다. 이어 진보적 정치관을 가진 대니얼 매튜스를 비롯한 5명의 핵심 멤버가 모인다.

위키리크스는 전 세계 개인들이 연결된 네트워크로, 활동은 메일 교환과 채팅을 통해 이루어진다. 내부고발자의 신변안전을 위해 제보자가 웹사이트의 보내기 단추를 클릭하면 발송된 자료는 암호화되어 50개국의 수많은 서버를 거친다. 메인 서버는 스웨덴에 있으나 웹사이트 입구에서 매복하는 정보기관의 적을 교란하기 위해 스스로 가짜를 만들어내는 장치도 돼있다.

위키리크스 이전에도 내부고발자는 존재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주인공인 ‘딥 스로트’(마크 펠트 FBI 국장)가 그렇고, 1970년대 초반 베트남전 극비문서를 복사해 신문사에 돌렸던 대니얼 엘즈버그도 있다. 고문직을 부탁받은 엘즈버그는 이를 수락하지 않았으나 어산지의 아이디어에 갈채를 보냈다. 어산지는 2007년 1월 NGO모임인 세계사회포럼에서 자신의 계획을 알렸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해 말 케냐 전직 대통령의 비리 문건으로 대선에 영향을 미쳤다. 이어 2008년에는 스위스은행그룹 율리우스 베어의 고객데이터를 폭로했다.

위키리크스의 명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미군병사 브래들리 매닝이다. 심약한 컴퓨터광이자 동성애자로 이라크에서 정보분석 업무를 하던 그는 간단한 조작만으로 미 국방부와 국무부의 엄청난 정보를 빼돌렸다. 그는 제보자 절대보호라는 위키리크스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깨뜨림으로써 감방행이라는 비극을 초래했다. ‘딥 스로트’가 27년 만에 스스로를 공개했듯이 영원히 비밀을 지키는 건 힘든 법이다. 그는 아주 빠르게 이 사실을 채팅에서 익명의 상대에게 고백했다가 미 당국에 체포됐다.

어산지와 위키리크스의 활동은 아주 획기적인 것이다. 거대 국가권력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정치운동이지만, 본질적으로 언론운동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위키리크스는 3년 만에 워싱턴포스트가 30년간 한 것보다 더 많은 특종을 했다”고 말한다. 이는 언론 엘리트의 능력을 뛰어넘는, 인터넷시대의 다중지능이란 개념으로 설명할 만한 일이다. 위키리크스의 목표가 미국인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중국·러시아·중앙아시아의 억압적인 정권들이 목표였다. 이들의 원칙은 “정보공개는 투명성을 높이며 이 투명성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위키리크스의 활동은 복잡한 쟁점을 낳는다. 비판자들은 “비밀 유지는 현대국가의 성립 기반”이며 “국가권력이 무너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어산지 1인권력”이라고 지적한다. 최대 피해국인 미국은 어산지에게 방첩죄 적용을 검토했으나 그렇게 되면 정부기밀을 보도한 모든 언론사를 기소해야 한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정보의 생산과 유통 자체에 있다. 미국을 경악에 몰아넣은 정보의 작성자는 바로 미국 자신이다. 정부의 기밀 정보를 다루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250만명을 넘어섰고 유출 가능성은 넘쳐난다.

저자들은 위키리크스의 부작용보다 기여에 더 큰 무게를 둔다. 국가기밀의 폭로가 정부에 피해를 주고 그 손실을 만회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으나 중장기적 시각에서 그것은 정치를 새롭게 조정하고 정화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어산지는 컴퓨터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낳은 괴짜 천재다. 자유분방한 그는 10대 후반에 동거했으나 아내와 아이가 곁을 떠난다. 지난해 스웨덴에서 며칠 사이에 두 여성과 성관계를 맺었고 콘돔 사용을 거부함으로써 성폭행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됐다. 이 사건이 터지자 핵심 멤버들은 그에게 2선으로 물러날 것을 요구했지만 어산지는 자신이 “이 조직의 심장이고 영혼이며 창립자고 대변인이고 최초의 프로그래머이고 기획자이고 자금조달자”라며 거부한다.

그런 어산지를 이해했고 비판했던 사람은 위키리크스 독일대변인이자 프로그래머였던 다니엘 돔샤이트-베르크다. 그는 어산지의 독단적인 조직운영, 불투명한 자금관리에 항의해 지난해 10월 결별했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위험한 진실>에서 자신이 아는 위키리크스와 어산지를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위키리크스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오픈리크스’라는 새 네트워크를 준비하고 있다. 이 밖에 ‘리크스’ 혁명은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중국 인권운동가들은 거번먼트리크스를 구축 중이며 발칸리크스, 인도리크스, 브뤼셀리크스등 지역·내용적으로 특화된 리크스들이 출범했다.(한윤정 기자) 

11. 0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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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1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1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1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주 모스크바에서 십수 년만에 만난 후배가 '로쟈'의 활동에 대해 알고 있어서 놀란 적이 있다. 등잔 밑이 어두울 때도 있지만 그렇듯 예기치 않은 '눈'과 마주칠 때도 있다(미국 유학생 사이에서도 '로쟈'란 이름은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 블로그의 '공공성'에 대해 새삼 눈뜨게 된다. 그런 만큼 '과도한' 책임도 주어지는데, '지식인'을 다룬 지난주 주간한국의 커버스토리에도 로쟈란 이름이 호명돼 한번 더 어깨가 무거워졌다('서평꾼'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인가?) 다행히 '대중과 소통하는 지식인'이란 단서는 붙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한번 돌이켜보게 됐다. 그외 2010년대식 지식인 상도 일별할 겸 기사를 옮겨놓는다. 관련서들도 몇권씩 골라놓으면서.  

  

주간한국(11. 02. 16) 이 시대 대표적 지식인은 누구

70년대 리영희, 90년대 강준만이 있다면 2010년대 대중과 소통하는 지식인은 누구일까? 이들은 리영희, 강준만 세대와 어떤 차이를 보일까? 인문사회과학, 경제경영, 문화예술 분야의 대표적인 사람들을 소개한다. 



거시담론은 어떻게 변하는가-조국, 이택광, 이명원
전통적으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사회참여형 지식인이 많이 배출됐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지식인은 단연 조국 서울대(법학) 교수다. 조 교수는 꾸준히 텔레비전과 신문 칼럼을 연재하며 우리사회에 대한 목소리를 내왔다. 무상급식, 연평도 피폭 등 정부와 각 정당의 정책 및 중대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많은 화제를 낳는다.

사회의 크고 작은 이슈들에 대해 내놓는 그의 메시지에 대해 대중은 열광한다. 섣부른 공산이지만, 한편에서는 그를 진보진영의 차기 대선주자로 추켜세우기도 한다. 이런 가정에 대해 최근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학자의 본분인 학문연구와 지식인의 사명인 '앙가주망(engagement, 참여)'을 계속 할 것이다. 그러나 종종 언론에서 언급되는 출마를 할 계획은 없다." (출판사 '21세기북스' 인터뷰)

조국 교수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온라인 공간에서 사회적 현안과 대안을 묻는 시민들과 성실하게 소통함으로써 큰 공감을 모았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의 비민주적인 행보에 반발해 국가인권위원직을 사퇴하며 자신의 페이스북에 '국가인권위원직을 사퇴합니다'란 제목의 글을 올렸고 이를 본 누리꾼들이 지지의사를 밝히며 기사화되기도 했다. 수백 명의 시민들의 '좋아요' 버튼을 통해 공감을 표했고 직접 댓글을 남긴 이들도 100명이 넘었다.

지난달 13일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차남의 서울대 로스쿨 부정입학설에 대한 그의 트위터 발언은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안상수 대표 차남 서울대 로스쿨 부정입학 의혹 보도는 완전오보. 그 학생은 5명 뽑는 예비순위 대상자 중 2위였고, 부친 고려 없이 성적에 따라 선발. 학교에 사실확인도 하지 않은 채 보도한 것은 매우 유감. 학생 입장에서는 소송감. 정정보도 필요함.'

서울대가 공식 해명자료를 내놓았음에도 가라앉지 않던 논란은 조 교수의 입장 표명으로 오보였음이 기정사실화됐다. 지난달 17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조 교수는 당분간 외부 접촉과 온라인 활동을 접고 법학 서적 탈고에만 집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최근 트위터 등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 온ㆍ오프라인에서 모두 두문불출할 생각입니다." 



대중문화가 비평의 한 분야로 인식되면서 문화연구를 통해 사회를 분석하는 학자들이 늘어났다. 뮤직비디오와 할리우드영화를 통해 라캉, 마르크스 이론을 설명하는 'MTV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대표적이다. '대중문화 평론가'란 타이틀로 활동하는 국내 많은 비평가 중 눈에 띄는 사람은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 교수다. 영국에서 문화이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천안함 사태, 연평도 해전, 구제역 등 정치사회적 사안뿐 아니라 드라마, 시트콤, 아이돌 등 대중문화 텍스트를 통해서도 한국사회를 성찰한다. 지난해 본지와 인터뷰에서 그는 "대중문화비평을 인문학적 출구, 한국 인문학의 고립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대중문화 비평이 나에게는 학문적 활동이다"고 말했다.

그의 글을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개인 블로그에 싣는 짧은 단상이고, 둘째는 언론매체에 발표하는 칼럼, 셋째는 저서다. 그는 각종 사회현상에 대한 단상과 학술대회 정보, 해외 지식인들의 강의, 대중문화 비평 등을 개인 블로그에 실시간 올린다. 언론매체에 발표한 칼럼도 부지런히 옮겨 둔다. 블로그에 가면, 그가 이제까지 언론에 발표한 대부분의 글을 읽을 수 있다.

"대중문화 형식은 기본적인 콘셉트가 있습니다. 드라마는 첫 방송 후 3회만 보면 거의 똑같은 패턴으로 가요. 다른 패턴이 감지되면 인터넷에 다 뜹니다. 문화비평은 대중을 계몽하는 비평이 아니에요. 대중이 알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거죠. 대중 스스로 말을 다 해두는 거고, 이 점에서 인터넷은 문화비평을 위한 최적의 장치입니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문학권력 논쟁은 이후 한국 사회 지식권력 논쟁으로 확대됐다. 당시 문학권력 논쟁의 한 가운데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문학평론가 이명원 씨다. 문화권력을 비판한 비평서 <타는 혀>, <파문> 등으로 이름을 알렸고, 이후 재임 중인 대학의 학내비리에 관한 비판 칼럼을 한겨레신문에 게재했다가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이런 이력 때문일까. 그는 문화권력 논쟁이나 정치, 사회에 관한 문인의 글이 필요할 때 자주 호출되는 평론가다. 지난해 하반기 문학계 이슈였던 황석영의 <강남몽>, 권비영의 <덕혜옹주> 표절 논란에 대해서 '조립소설과 서사기술자'란 칼럼을 통해 두 작가의 작품을 비판했다.

문학비평과 칼럼에서 특유의 반골기질을 드러내는가 하면, 연구공동체 '지행네트워크'를 운영하며 대중과 소통한다. 젊은 지식인들의 담론 공간을 열어주고, 대중들과 접점을 찾자는 것이 이 모임의 취지다. 2007년과 2008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회 '콜로키움'을 진행했고, 지난해 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찾아가는 인문학 교실'을 운영했다. 젊은 문학평론가, 인문사회과학 학자들로 꾸려진 '2세대'에게 이 모임을 이어주는 것이 올해 목표다.

지행네트워크는 마포 근처에서 3년간 사무실을 운영하다 지난해 100%온라인 공동체로 모양을 바꾸었다. 홈페이지를 통해 모임을 공지하면, 댓글을 올리는 모든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방식으로 모임이 운영된다. 일례로 재작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문화예술 세미나 모임 '예사인'에는 출판 편집자, 비정규 연구 교수 등을 비롯해 대학생과 청년 백수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다. 



워너비 지식인은 누구? - 김난도, 박경철
90년대 초반까지 대학가를 휩쓴 것은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비주류 경제학이었다. 김수행과 같은 강단형 교수든, 정운영과 같은 사회참여형 교수든 언론에서 자주 호출하는 학자, 이름만으로도 영향력을 갖는 저자는 거의 모두 비주류 경제학 교수였다. 대중이 선호하는 지식인의 활동 영역을 보면 시대가 원하는 상을 알 수 있다.

최근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인기는 대표적인 사례다. 소비자학이란 그의 전공이 말해주듯, 김 교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트렌드와 소비습관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한국사회를 설명한다. '소비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현대사회에서 소비자의 행동 패턴을 연구하는 것만큼 사람과 사회를 파악하는 확실한 길을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지난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공익이라는 단어를 안 쓰고 소비자라고 쓰죠. 예를 들어서 'SSM을 어떻게 할거냐?'는 문제도 소비자의 이익에서 생각하죠. 구름처럼 떠 있는 단어는 공감을 안 해요. 지금 젊은 세대 가치관의 핵심은 개인화와 여성화에요."

그는 KBS 시청자위원으로 활동하며 조선일보에 칼럼을 연재한다. 요컨대 전공이나 활동 영역에서 그는 진보보다는 보수에 가까운 인물이다. 어느 시대나 신세대에게 보수는 매력 없는 단어로 다가오지만,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이런 편견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 같다. 김 교수는 몇 해 전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뽑은 최고의 명강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바 있다. 2009년부터 한해 한 권씩 발간하는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최근 그의 신간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최근 온오프라인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리고 있다. 최신 소비트렌드와 유행을 분석하는 그의 전공을 감안하면, 이런 결과는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최근 국내 SNS 문화에 대해 그는 이렇게 진단했다. "트위터는 20대 후반 이상의 매체입니다. 아주 어린 친구들은 트위터보다 미투데이를 쓰는 것 같아요. 제가 팔로어를 그렇게만 갖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도 통계를 보면 트위터 이용객은 10대보다 30대가 더 많아요. 트위터는 앞으로 더 강해지겠죠." 



한국사회 지식인들은 전공지식을 발판 삼아 사회 혜안을 제시한다. 촘스키처럼 언어학자가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것은 적어도 한국에서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 점에서 시골의사 박경철 씨의 등장은 달라진 지식인의 면모를 드러낸다. 안동에서 10년간 외과의사로 살았던 그는 이제 경제평론가로 더 널리 알려졌다. 그는 딱딱하고 어려운 경제지식을 쉽고 편안한 말로 설명한다. 경제분석과 예측은 웬만한 기관의 보고서보다 신뢰를 준다.

트위터 세대에게 박경철 씨는 푸근한 옆집 아저씨 같은 사람으로 비치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런 이미지는 아니었다. 2000년대 초반 이른바 '각도이론'이란 독자적인 투자이론을 내놓은 주식투자가로 개인투자가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렸다. 박 씨 자신도 한때 주식투자로 큰 돈을 벌기도 했다.

2000년대 중반 다시 안동에서 외과의로 주력하며 에세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정통 경제입문서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등을 썼다. 경제 강연과 블로그 운영을 활발하게 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요즘 그는 서울에 사무실을 두고 대기업, 대학교 등 연 400회 이상 강연을 나간다. 올해 초 스마트폰을 구입하며 블로그에서 트위터로 둥지를 옮겼다. 최근 한국 트위터 사용자 디렉터리 사이트 코리안트위터(koreantweeters.com)의 영향력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

팔로워 순위 1위는 작가 이외수로 무려 53만 6394명이나 되지만, 박 씨는 팔로워수와 댓글(reply)과 전달(retweet) 수 등을 종합적으로 집계하는 영향력 순위에서 단연 선두다. 그의 트위터 팔로워는 약 17만 명. 그는 SNS 변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기존의 뉴스에 나름대로의 코멘트를 붙여 올릴 때 대중의 반응이 아주 큽니다. 대중은 뉴스를 생산하지 못하지만 최근 들어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적극적인 의사표시가 가능해졌습니다. 이젠 SNS를 활용해 사회적 어젠다를 언론과 대중이 분점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봅니다." (2010. 12. 30. 중앙일보) 

대중화 - 이현우, 임석재
'잡글은 학계에서 논문 이외의 모든 글을 통칭하는 말이지만 주로 저널리즘적인 글을 가리킨다. 학술논문 예찬론자들도 인정하지만, 논문은 쓰는 사람과 심사하는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이런 풍토에서 잡글처럼 쉽게 읽히는 논문을 쓰자는 것이 나의 오랜 꿈이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최근 펴낸 <특별한 나라 대한민국> 서론에 쓴 말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논문 같은 잡글'을 발표하며 이름을 알린 젊은 지식인들이 있다. 임석재 이화여대 교수와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 등이다.

이들의 비평은 전적으로 전공지식에 기대고 있지만, 쉽고 대중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문화예술을 통해 사회 이면을 분석하지만, 사려 깊은 해설로 대중성을 확보했다. 구체적이고 쉬운 언어로 이른바 '비평의 대중화'를 선도한 이들이다. 



인터넷 서평꾼 '로쟈'로 더 잘 알려진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이미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믿을 만한 정보통으로 꼽힌다. 그는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과 인터넷 카페 '비평고원'에 정력적으로 글을 올리며 온라인에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온오프라인 매체에 서평을 기고하며 인터넷 서평꾼으로 소개됐다. 온라인 활동으로 입소문을 탄 후 온오프라인 매체 기고와 저서 출간을 통해 이름을 알리는 방식은 최근 지식인 사회참여의 한 전형이 된 듯하다.

그는 전공인 러시아문학을 발판으로 국내 출간된 최신 서적과 저자를 소개한다. 서평집 <로쟈의 인문학 서재>와 <책을 읽을 자유>를 통해 화려한 독서편력을 보인 바 있다. 1만여 권 이상의 책을 가진 장서가이기도 하다. 이렇게 많은 책을 읽으려면 달인의 기술이 필요한 법이다. 지난해 본지와 의 인터뷰에서 그는 정독부터 발췌독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책을 읽는다고 밝힌 바 있다.

"원래 문학을 전공했으니까 공부하고 훈련받은 독서법은 자세하게 읽기이고, 그렇게 읽는 걸 좋아해요. 하지만 현실에서 너무 많은 책이 나오니까 여러 독서법이 필요하죠. 여러 독서방법을 병행하는 건 불가피한 것 같아요. 약간의 정보를 위해서 대충 보는 책, 꼼꼼하게 읽는 책 등 책의 종류나 써야 하는 서평에 따라 읽는 법을 달리하죠."

그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글쓰기 방식에 있다. 그의 서평은 신문의 리뷰와 평론가들의 비평 사이에 있다. 저널도 학술지도 아닌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그는 전문성과 대중성을 가진 필자로 알려졌다.

'나는 서평의 존재론적 위치는 책에 대한 소개와 비평 사이가 아닌가 싶다. 서평은 그것이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인가를 식별해줌으로써 아직 책을 접하지 못한 독자들의 선택에 도움을 준다. 그것은 일종의 길잡이다. "이건 읽어봐야겠군"이라거나 "이건 안 읽어도 되겠어"가 서평이 염두에 두는 반응이다.' (서평집 <책을 읽을 자유> 중에서) 



최근 피플페서들의 특징은 대중적 글쓰기와 활발한 온라인 활동이다. 이 특징에서 임석재 이화여대 교수는 가장 멀리 있다. 적어도 그의 블로그, 트위터가 소개되거나 온라인 어록이 뉴스가 되진 않으니까. 그러나 그가 비평의 대중화를 통해 국내 예술비평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에서 기존 지식인의 테두리를 벗어난다.

건축 관련 글을 임석재 교수만큼 쉽고 대중적으로 설명하는 학자는 드물다. 한국사회에서 건축과 디자인이 담론이 될 수 있음이 그의 저서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재작년 본지 인터뷰에서 그는 "건축은 넓히기 시작하면 공학, 인문, 예술을 다 말할 수도 있는 분야다. 장점이자 약점"이라고 말했다.

"정통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예술이나 공학은 모르고, 또 예술 하는 사람들은 공학 인문학을 모르고 공학 하는 사람은 예술 인문학을 모르죠. 건축학의 분야를 넓히기 시작하면 장점일 수도 있는데, 글 쓰거나 강의할 때 힘들어요. 그래서 어딜 가나 반쪽이나 1/3쪽이죠."

그의 전공은 건축사학이다. 건축학 중에서도 '마이너' 학문이다. 예술, 인문학, 공학이 융합된 21세기 학문이지만, 그 전문성 때문에 국내 건축 관련 서적은 번역서가 대부분이었고, 건축 관련 비평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임 교수는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를 비롯해 <나는 한옥에서 풍경놀이를 즐긴다>, <교양으로 읽는 건축> 등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춘 건축 서적만 40여 권 출간했다. 출간 마다 몇 십만 권씩 파는 베스트셀러 저자는 아니지만, 출판사 편집자들 사이에서 임 교수는 확실한 글쟁이이자 전문가로 손꼽힌다.

"사실 일반에 알려진 책들은 대중성을 고려해서 쓴 거예요. 책의 구성이나 문체에서 학술서와 다르죠. 제 첫 책은 1995년에 나온 <추상과 감흥>인데, 최근 낸 책보다 훨씬 각주가 많죠. 이런 학술서나 <서양건축사>시리즈 같은 책을 쓰고 싶은데 세계화시대 이후에 더 쉽게 써야 출판이 되죠. 그게 아쉬운 점이에요."

학문적 성과를 사회에 돌려주는 학자가 늘어나고 그런 학자를 지지하는 대중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변한다. 이런 참여형 지식인이 늘어날수록 독자의 지적 갈증도 해소된다. 대중과 호흡하는 피플페서의 등장은 사회 흐름을 바꾸고 있다.(이윤주기자) 

11. 0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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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1 1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1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러시아에서 절반은 우편으로 부치고도 가방 가득 책을 채워넣어 어제 귀국해 보니 집에는 또 부재중에 배송된 책이 한가득이다. 주문한 책이 많지만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들도 있다. 그 중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 삶의 의미라는 커다란 물음>(필로소픽, 2011)은 내가 해제를 쓴 책이다. 지난 연말에 제안을 받고서 '철학과 인생의 의미'를 다룬 책이라고 하니 새해맞이 '행사'로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밀린 일들 때문에 애를 먹으며 쓴 기억이 있다(행사가 아니라 행군이었다). 알라딘에서는 이미 미리보기를 통해서 읽어볼 수 있지만 여기에도 옮겨놓는다. 제목은 '누가 택시 기사의 질문을 두려워하랴'라고 붙였다.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고명하신 버트란트 러셀 경도 택시 기사가 던진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저자 줄리언 바지니가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화다. 당대의 철학자가 대답하지 못할 질문이라면, 이유는 둘 중 하나겠다. 너무 거창하거나 아니면 너무 어렵거나.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물음이 그런 종류다. 그렇게 너무 거창하거나 너무 어려운 문제이기에 ‘빅 퀘스천’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드디어 이 질문을 답할 수 있게 될까? 책을 펼쳐든 독자의 일차적인 궁금증이겠다.  

러셀의 <서양철학사>와 <철학의 문제들> 같은 책을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있지만, 돌이켜봐도 이 ‘빅 퀘스천’에 대한 러셀의 답변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더 위대한 제자’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어떻게 대답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인생의 의미’란 문제 역시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해소’해야 할 문제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의 주장이 옳다면 일단 중요한 것은 문제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답이 없는 문제를 안고서 끙끙거린다면 노고는 인정할 수 있되 그리 현명한 처신은 아니다. 그런 견지에서 던지는 제안이지만, 책이란 모름지기 차례대로 읽어야 한다는 철학 내지는 고집을 고수하는 분이 아니라면 이 책은 ‘무의미함의 위협’을 다룬 10장부터 읽어도 좋겠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도전 내지 위협 들이 어떤 것인지 알면 ‘인생의 의미’에 대한 접근도 좀 더 평탄해지지 않을까, 적어도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싶어서다.  

사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란 질문 자체는 인생은 살 만한 어떤 의미가 있다는 판단을 전제로 한다. 즉 중립적이기보다는 얼마간 ‘편향된’ 물음이다. 정반대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하품을 하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인생은 무의미해!” 물론 그럴 경우 알베르 카뮈라면 대번에 “그럼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겠지만, 그런 반응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게 좀 무의미하면 어때?”라는 식으로 얼마든지 대범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스누피처럼. 그러니 혹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하여 그에 대한 대처가 자동반사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별도의 궁리를 필요로 한다.   

생각해보면 ‘인생무상’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게 한국인에게 그런 인생 허무주의적 태도가 낯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의미’란 말이 그렇게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의미’란 단어 조합 자체를 문제 삼을 수도 있다. 한때 영어권 철학자들이 강력하게 주장한 것인데, 그들은 가치의 언어들이 실상은 이성적 판단이기보다는 감정적 판단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였다. 그런 판단에는 합리적 근거를 댈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도덕적 선이나 미적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보편화될 수 없는 주관적인 감정을 엉뚱하게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아!’나 ‘어이쿠!’ 같은 감탄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생이란 도대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종류의 대상이 아니다. 가령 철학자들이 애용하던 질문 중에 “현재 프랑스왕은 대머리인가?” 같은 게 있다. ‘대머리이다’ ‘대머리가 아니다’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한가? 하지만 문제는 대통령제 국가인 현재의 프랑스에 ‘프랑스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러니 대머리가 맞다, 아니다란 판단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어불성설이다. 혹 ‘인생의 의미’란 말도 ‘현재의 프랑스왕’과 같은 성격의 조합일까? 이 또한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문하려고 할 때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다.  

덧붙여, 인생이 설혹 의미를 갖는다고 쳐도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은, 찾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어서 인생의 의미란 말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반론도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왜 어려운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지성들이나 성현들조차도 ‘합의’에 이르진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공자님 말씀이 다르고, 예수님 말씀이 다르며, ‘너 자신을 알라’라고 훈계한 소크라테스의 말이 또 다르다. 모두가 한 말씀으로 인생의 의미에 대해 일러주었다면(그야말로 인생의 ‘톱 시크릿’이겠다), 그들의 이름이 제각기 남아있을 이유도 없다. 하물며 평범한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그걸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깨닫기도 어렵고 나누는 건 더 어렵다.  

대략 이런 것들이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를 천착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고비들이다. 개인적으론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대목에서 일단 저자 바지니의 솜씨와 역량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먼저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그는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할 때 사람들이 어떤 근거를 내세우는가에 주목한다. 보통은 ‘목적’과 ‘방향’과 ‘계획’이 앞세워진다. 그런 게 없다면, 혹은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다. 하지만 바지니가 보기에 이 전제와 결론 사이에 비약이 있다. 즉 어떤 초월적인 계획이나 목표, 목적에 기대지 않고도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성급하게 부정해버리는 것이 문제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면 특정의 의미에서만 ‘무의미’하다는 게 바지니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일반화하는 것은 일종의 과장법이요 호들갑에 불과하다. ‘오버’하지 말라는 얘기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이유를 대며 사람이 경박해지거나 시무룩해지는 건 일종의 ‘할리우드 액션’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라는 생각 자체가 난센스라는 주장은 어떻게 반박할까. ‘인생의 의미’가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은 인생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에 기댄다. 소리가 색깔을 가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저 피아노 소리의 색깔은 무엇인가?”란 질문은 시적인 대답은 기대할 수 있을지언정 ‘정답’을 끌어내긴 어렵다. 하지만 ‘의미’란 말이 어떤 것이 지닌 ‘중요성’을 뜻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인생의 의미’가 그런 경우다. 중립적인 관점에선 의미를 갖지 않지만 ‘내 인생의 의미’나 ‘우리 인생의 의미’라고 하면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때 인생의 의미란 말은 인생은 왜 우리에게 중요하며 또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란 물음과 등가이다. 그리고 이런 물음 자체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우리가 인생에 어떤 가치를 두고자 한다면 인생은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의 의미’란 말이 난센스라고 여기는 이들도 문제를 과장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저자의 주장이 더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그가 ‘성찰하지 않는 삶’을 변호할 때이다. 물론 그가 이 책에서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성찰을 통해서만 의미를 궁구해낼 수 있다는 믿음은 편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성찰하는 삶’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한다면 우리는 올바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 모두 철학자가 되어야 할 테지만 바지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인식은 지식인의 거만함과 부족한 상상력에 기인한다고 꼬집는다. 대개 ‘인생론’ 비슷한 이름을 단 책을 내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한 가닥씩 자기주장을 펼친 이들은 철학자나 지식계층에 속하는 이들이기 십상이다. 거기에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흥미를 느끼는 일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만큼 철학적 성찰의 중요성도 그간에 너무 과장됐다고 그는 생각한다.  

‘철학과 인생의 의미’(이 책의 부제다)를 주제로 삼으면서도 인생의 의미를 엄격하게 철학적 방식으로만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니 일견 자기 모순적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런 태도가 저자의 지적 성실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세상엔 철학자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닌 막대한 다수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인생을 살고 있다. 철학적 성찰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각자는 나름대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또 의미를 찾으려고 애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한 노력이 ‘엄격하게’ 철학적이지 않다고 해서 평가절하될 이유는 전혀 없다.  

이상에서 정리한 것이 인생의 의미에 대한 몇 가지 위협과 도전이고 또 그에 대한 저자의 대응이다. 종합해보자면, 인생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인 한, 살 만한 가치가 있으며 ‘좋은 삶’이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의미하고 그 삶을 사는 이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전혀 사고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충만하고 유의미한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인생이 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불가피한 일이다. 저자는 비록 최종적인 해답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중차대한 문제, 곧 ‘빅 퀘스천’을 꼼꼼하게 생각하는 데 철학적인 성찰이 그래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을 걷어내고 좀 더 명료하고 현명한 대답에 가까이 가는 데 필요한 도움이다. 여기에 이견을 달 수 있을까? 그러한 전제에 동감한다면, 이제 비로소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란 물음을 품고서 저자와 함께 성찰의 여정을 시작해보아도 좋겠다. 장담컨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러셀 경도 답하지 못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거리가 몇 마디쯤은 생길 것이다. 혹은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누가 택시기사의 질문을 두려워하랴!”  

11. 02. 20.  

P.S. 저자 줄리언 바지니의 책은 최근에 나온 <가짜 논리>(한겨레출판, 2011)를 비롯해서 여러 권이 소개돼 있다. 그중엔 '바지니'란 이름으로 검색되지 않는 책도 있는데 <무신론이란 무엇인가>(동문선, 2007)이 그런 경우다(저자가 '줄리안 바기니'라고 돼 있다). <빅 퀘스천>과 같은 성격의 책으론 존 코팅엄의 <삶의 의미>(동문선, 2005)도 있다.   

테리 이글턴의 <인생의 의미>도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옥스포드대학의 '아주 짧은 입문서' 시리즈의 하나로 다시 나온 책이다. 사실 바지니의 <무신론이란 무엇인가>도 이 시리즈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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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0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0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0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0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1-02-20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와 삶이 의미가 있다 믿는다면 세계와 삶의 저자 Author를 믿는다는 뜻이겠지요. 비트겐슈타인도 세계의 의미를 믿는다는 것은 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자꾸때리다 2011-02-2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공책>에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나는 신(神)과 삶의 목적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나는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삶의 의미, 즉 세계의 의미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이것과 신과 아버지의 비유가 서로 연관된다. 기도한다는 것은 삶의 의미에 관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을 믿는다는 것을 세계의 사실이 문제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삶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김영건 선생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자꾸때리다 2011-02-20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이제는 텍스트 바깥의 저자를 믿는 시대가 아니지만...

faai 2011-02-20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Atheism]이 [무신론이란 무엇인가]로 번역된 적이 있었군요;; 줄리안 바기니라니 생각도 못 했다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