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키르기스스탄에는 눈이 내리고
나는 낙엽이 떨어진 거리를 걸었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을 맞고
나는 키르기스스탄의 위도를 알지 못해
키르기스스탄에 내리는 눈을 가늠할 수 없었다
비슈케크에는 낙엽이 날려도 무방한 것인가
하기야 모스크바도 이맘때면 눈이 내렸지
모스크바에 있을 때는 나도 모스크바인
모스크바의 나무들과 똑같이 눈을 맞았지
비슈케크의 지붕들이 과묵하게 눈을 맞은 것처럼
키르기스스탄에는 키르기스스탄의 눈이 내리겠지
눈은 일찍부터 지상과 내통하기에
어디에건 소리없이 내려앉지
키르기스스탄의 아침이 밝으면
이제 백년보다 긴 하루가 시작되겠지
친기스 아이트마토프의 하루는 백년보다 길었지
나는 낙엽이 떨어진 밤거리를 걸으며
다시금 눈 덮인 키르기스스탄을 떠올린다
비슈케크의 밤거리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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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세상에 구두를
던지라고 했지 구두 말고 불타는
구두를 던지라고 했지
두 짝 다?
불타는 구두는 어디를 집어야 할지
왼쪽과 오른쪽은 상관이 없는 걸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걸까
지루한
면상을 향해 던지는 거라면

구두약도 던져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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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이나 베란다에 빨래를 널 때마다
그리고 걷을 때마다
이건 아니었지 싶다
빨래건조대에 집게도 없이 널었다가
거두어들이는 빨래라니

빨래란 모름지기 옥상에다 널어야 하는 것
손빨래 대신 세탁기를 돌린다 해도
빨래는 옥상에서 말려야 하는 것
마치 식물처럼
빨래한테도 햇볕과 바람이 필요하기에

햇볕 받으며 마른 빨래는 촉감이 다르지
바람에 한껏 부풀어올랐던 빨래는
생각의 품도 다를 거야
흰 빨래는 그렇게 다시 희어지고
젖은 삶은 그렇게 생기를 되찾고

언젠가 옥상에 널었던 빨래가
소나기에 흠뻑 젖은 날도 있었지
부리나케 뛰어갔지만
소나기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어
거둬다가 세탁기에 도로 넣을 수밖에

하지만 마음은 즐거웠지
다시금 헹궈지면서 빨래도 즐거웠을까
인생은 모험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야
그래서 빨래는 옥상에 널어야 하는 거지
집게로 집어서 빨랫줄에 널어야 하는 거지

그랬던 시절이 있었지
빨래건조대에 누워 있는 것 같은 날
나는 옥상이 그리워진다네
이건 아니었지 싶으면서
햇볕과 바람과 소나기가 그리워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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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gles 2018-11-06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건조된 옷이 머금은 햇볕과 바람냄새 참 좋지요~^^ 하지만 요즘은 건조기가 다 해준다는..ㅋ

로쟈 2018-11-06 22:02   좋아요 0 | URL
편리해지면서 잃어버리는 것들도 많아지고 있네요.
 

국경을 지나니 아침이었다
가슴에 손을 대 패스포트를 확인하고
다시 눕는다
지나온 날들이 모두
되돌아갈 수 없는 나라
무단잠입한 경우는 있었지
영원한 반복은 믿을 수 없어도
어쩌다 반복은 가능하니까
두번째 스물이 가능하고 두번째
서른이 가능한 것처럼
그때도 슬픈 서른일까
반복은 감정을 무디게 한다네
괴테의 모든 사랑은 첫사랑의 반복이었지
되돌려받으려는 몸짓이었지
사랑은 얼마나 지루한 것일까
그 많은 사랑이 사랑의 무덤일 것이니
눈 뜨면 나는 전철을 타고 있네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
지하철이 첫 운행한 날도 있었지
그날은 대통령도 지하철을 탔지
모두가 가슴이 벅찬 날이었지
세월이 지나 아침 전철은 지옥철이 되었지
그 아침에 나는
어제 넘은 국경을 떠올린다
모두가 쉽게 넘어온 건 아니다
언젠가 나도 넘어질 날이 오겠지
모든 죽음이 첫 죽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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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랑해도 잃을 수가 있다
내가 잊은 것인가 잊힌 것인가
책은 자주 보이지 않기로 작정하고
나는 책에게 약점을 잡힌다
사랑에 빠진 자들은 굽신거린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당할 수는 없다
나는 수시로 책을 잃어버린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잃어버리고서야 시작되는 사랑
아, 어떤 책은 절판된 뒤에야!

사랑은 무엇이건 공백을 만든다
공백은 확고하다 비누칠이라도 하고 싶다

언제가 나 또한 누군가의 공백이 되리
아끼던 비누를 당신에게도 빌려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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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10-29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있으나 잃어버린(못찾는) 책이 어떤 책 이길래~
~을이 아닌 ~들을 사랑하시니 (너무 많은 ~들을)
그(들)의 소심한? 복수가 아닐런지요.
작정하고 보이지 않기로ㅎ

로쟈 2018-10-31 07:56   좋아요 0 | URL
심지어 작당.~

탐서가 2018-10-3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춘천 데미안책방서 발견했었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