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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의 '한국생활사' 시리즈의 첫 권으로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개마고원, 2010)가 출간됐다. 월간 <인물과 사상>에 연재될 때 언젠가 책으로 묶일 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시리즈가 40여권이나 기획돼 있는 줄은 몰랐다. 거의 '메가 프로젝트'다. <한국 현대사 산책>과 함께 '한국인의 모든 것'을 까발려놓겠다는 야심찬 시도가 아닌가 싶다. 까발려놓는다? 정치란 ‘그 주체들이 고급 일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일 뿐’이라는 그의 '냉소적 현실주의'가 이 시리즈의 밑바탕에 깔린 듯싶기 때문이다. 이념을 걷어내고 '사실'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는 그의 방대한 자료섭렵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내친 김에 동시대 한국인의 초상을 그린 몇 권의 책을 리스트로 묶으며 제목은 '이것이 한국사회다'라고 붙여놓는다...

서울신문(10. 12. 18) 승자독식 대한민국 실업탈출 아직 멀었다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강준만 지음, 개마고원 펴냄)는 한동안 한국 사회문제 전반에 대한 비판적 글쓰기로 유명했던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의 ‘한국 생활사’ 작업이다. 강 교수의 ‘한국 생활사’는 전화, 커피, 축구, 입시, 어머니 등 일상을 주제별로 나눈 통시적 저술 작업으로 이번 주제는 제목 그대로 실업이다. ‘한국 생활사’는 전 18권인 강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이나 전 17권인 ‘미국사 산책’보다 더 많은 40여권의 책을 예정하고 있다.

‘영혼이라도’는 해방정국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실업의 역사와 슬픈 구직 수난사를 살펴 실업 문제 해결이 단순히 ‘방법’이 아니라 ‘철학’과 ‘자세’에 있음을 제시한다. 왜 구직에 철학이 등장할까. 우리나라는 ‘1등만 기억하는’, 한 번 나락으로 떨어지면 끝장이라는 식의 승자독식 문화가 강고하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이런 문화에서 정규직-비정규직 문제나 기업형 슈퍼마켓, 이마트 피자, 롯데마트 치킨 논란에서 보듯 누군가 제아무리 ‘기막힌 방법’을 마련해도 이해당사자 모두를 만족하게 하는 해결책은 내놓기 어렵다.

따라서 저자는 실업 문제를 넓고 깊게 보기를 권한다. 실업 문제는 그 어떤 이념도 뛰어넘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운영과 작동방식의 문제란 것이다. 기존의 좌우 이념의 틀을 벗어나 승자독식 문화의 의식과 관행을 바꾸고 공존공생의 자세를 찾지 않으면 영원히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1945년 8월 15일 이후 해방정국에서 우익 청년·학생 단체가 엄청나게 많이 생겨났다. 이는 당시의 대규모 실업과 심각한 경제난 때문이란 게 강 교수의 설명이다. 청년단의 폭력 행사는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폭발적으로 늘어난 대학생과 30%가 넘는 실업률은 4·19 혁명을 촉발시킨 요인이었다. 5·16 쿠데타 역시 주동자들의 실업 문제가 큰 원인이었다. 강 교수는 정치란 ‘그 주체들이 고급 일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아무리 정교한 법과 제도라도 공기업과 정부 산하단체의 보은성 ‘낙하산 인사’를 차단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결국 실업을 경제적 문제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원수와도 같이 살자’는 자세를 갖춰야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는 절규를 해소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윤창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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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 한국 실업의 역사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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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19일에 저장
절판

어디 사세요?- 부동산에 저당 잡힌 우리 시대 집 이야기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지음 / 사계절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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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문하면 "4월 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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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권하는 사회- 신용 불량자 문제를 통해서 본 신용의 상품화와 사회적 재난
김순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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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워킹푸어- 무엇이 우리를 일할수록 가난하게 만드는가
프레시안 엮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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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2-19 23:16   좋아요 0 | URL
현재 대학생들이 사회적, 실존적 의식이 없는게 취직 문제에 매달리기 때문이라는데 이상하게 왜 취직 걱정할 일 없는 의대생들도 아무런 의식이 없는거죠?

로쟈 2010-12-19 23:30   좋아요 0 | URL
원래 인간은 포만해도 사고하지 않으니까요...

자꾸때리다 2010-12-20 11:20   좋아요 0 | URL
저희 세대는 아마도 몰락으로 운명지어진 세대 같습니다. 저희 세대가 4,50대가 되면 참 끔찍할 듯 하네요.
 

오랜만에 지젝과 관련한 칼럼들이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지젝'이란 이름이 칼럼에 등장하는 빈도수가 친숙도의 척도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공역자로 참여한 지젝의 <폭력>(난장이, 2011)이 내달에 출간되는데, 그의 문제의식이 더 많이 공유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겨레(10. 09. 13) [홍세화칼럼] ‘배제된 자’들을 위한 정치

지난 9월3일 취임 인사차 민주노총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은 박재완 고용노동부 장관은 “위원장이 고용노동부를 ‘우리 부’라고 해 너무 감사하다. 우리도 민주노총을 ‘우리 민주노총’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한국 사회에서 조합원들이나 현장 활동가들 위에 군림하는 시민사회단체나 조직의 지도층이 공권력 앞에서 주눅들거나 황송해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만, 한국노총과 자리바꿈을 한 듯한 민주노총 위원장의 이번 행보는 슬라보이 지제크가 말한 “‘배제된 자’에 적대적인 ‘포함된 자’”에서 ‘포함된 자’의 그것에 가까워 보인다.

행정자치부를 행정안전부로 바꾼 것처럼 노동부를 고용노동부로 바꾼 것도 이명박 정권의 지향을 오롯이 드러낸다. 가령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은 노동허가제가 아닌 고용허가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노동의 주체는 노동자이지만 고용의 주체는 고용주라는 점에서 노동허가제와 고용허가제는 전혀 상반된 노동관에 기초하고 있다. 그동안 실질에 있어서는 ‘노동통제부’에 가까웠다고 하더라도 이름만큼은 그래도 노동부였던 것을 고용노동부라고 바꾼 것인데, 민주노총 지도부가 ‘비정규직 철폐’라는 구호에 맞게 실제로 ‘배제된 자’들과 연대하여 싸운다면 고용노동부를 ‘우리 부’라고 일컬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배제된 자들 중에는 오늘도 농성 투쟁을 벌이고 있는 기륭전자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현대기아자동차 본사 앞에서 두 달째 노숙 투쟁을 벌이는 동희오토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있다. 충남 서산에 있는 이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 900여명은 모두 기아자동차 ‘모닝’을 생산하지만 기아자동차 노동자가 아닌, 17개 외주하청업체에 소속된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이엠에프 환란 직후인 1998년, 정치권과 자본의 전방위 압력을 받은 현대자동차 노조가 가장 약한 고리인 식당 여성노동자들을 비정규직화하는 데 합의했던 과정과 그에 따른 투쟁을 형상화한 게 <밥·꽃·양>인데, 일단 물꼬가 터진 뒤 ‘전 생산노동자의 비정규직화’라는, 사용자에게 억만금의 이윤을 챙기게 해주는 ‘멋진 신세계’가 펼쳐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실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의 개념은 지제크에게서 빌려올 필요 없이 쌍용자동차 사태를 돌이켜보면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배제된 자들의 위험으로부터 체제를 지키는 게 공권력의 역할임을, 또한 ‘포함된 자’가 자칫 ‘배제된 자’들과 연대하여 싸우면 그 또한 ‘배제된 자’가 되어야 함을 쌍용자동차 사태는 가르쳐주었다. 복종하여 포함될 것이냐, 싸우다 배제될 것이냐의 선택 앞에서 노동계가 그간 보인 대응은 전자 우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고용노동부는 지난 7월22일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해 대법원이 내린 ‘불법파견, 정규직 지위 확인’ 판결의 현장파급효과를 최소화하려고 애쓰는 한편 타임오프제를 빌미로 사용자들에게 단체협약을 바꾸도록 압박하고 있다. 대법 판결 이후 현장에서 그나마 되살아나고 있는 연대 동력을 무력화하면서 지금까지처럼 노동을 순치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워낙 포함된 자들 사이의 싸움에만 눈길을 주는 게 관성이 된 탓인가, <한겨레>를 포함하여 진보매체에서조차 의미 있는 변곡점이 될 수 있는 대법 판결 이후 현장의 움직임을 기사화하는 데 인색하다.

여야 정치권 사이의 싸움이 아무리 요란해도 결국 이건희의 품 안에 포함된 자들 사이의 싸움이며, 민주당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지만 새만금을 밀어붙였던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오늘 통합을 주장하는 진보 정치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와 통합할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마땅하다. 조직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고 그래서 표로 계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 편에 서지 않는다면 진보는 거추장스런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홍세화 기획위원)    

한겨레(10. 12. 18) [세상 읽기] 지제크식 이웃사랑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님 말씀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 역시 예수님 말씀이다. 말은 쉬운데, 행동은 참 어렵다. 혹자는 원수까진 몰라도 이웃은 이미 사랑하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일손이 부족하면 가서 도와주고, 명절이면 음식을 나눠먹고, 상을 당하면 함께 울어준다고…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웃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누가 한번 선을 그어보라. 그 경계 안에 몇 명이나 있는가?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사랑하지 말잔 얘긴가? 박애주의자인 예수님이 그런 명령을 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보편적인 윤리적 명령이 되려면 이웃의 특정한 경계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 각기 다른 이웃사랑이 충돌해서 원수로 만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면 어쩌라고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윤리를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의 견해를 참조해 보자. 지제크는 윤리의 관건을 ‘이웃사랑’이라고 단언한다. 그에게 이웃은 근처에 사는 존재가 아니다. 이웃은 이해관계로 얽힌 경쟁하는 존재들이다. 주차공간을 다투는 상가 주민, 승진을 겨루는 입사동기, 임금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노사가 모두 이웃이다. 가장 직설적인 삶의 현실이 존재하는 곳에서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웃인 것이다. 그래서 이웃은 원수가 되기 쉽기 때문에 이웃사랑이 윤리의 핵심이라는 거다. 결국 ‘이웃사랑’은 가장 적나라한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생산의 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식의 ‘이웃사랑’은 쉽지 않다. 대개는 거꾸로 간다. 최철원 사건을 떠올려보자. 그는 1인 시위를 하는 노동자를 맷값을 주고 야구방망이로 구타했다. 그런 그가 모교에는 15억원을 기부했다. 이웃은 원수로, 남은 이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사례는 극단적이지만 유사한 행태는 흔하다. 임금을 대폭 삭감해 얻은 이윤으로 교회의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한 경우를 가정해 보자. 임금삭감의 이득은 다수의 이웃에게 고통을 주지만 가치중립적인 ‘경제적 행위’로 치부되면서 윤리적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반면 이렇게 남은 이득의 일부를 기부하면 선행으로 칭송받으며 단번에 윤리적 영예를 가질 수 있다. 계산에 밝은 인간이라면 어찌 이 방법이 가진 효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지제크는 이런 행태, 다수의 이웃을 괴롭혀 남에게 조금 집어주고 윤리적 행위의 영예는 자신이 갖는 것을 ‘물신주의적 부인’으로 규정한다. 진정한 이웃의 고통은 부인하고 희생과 헌신의 제스처만을 윤리의 특권적 형식으로 물신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란 명령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친절하게 각주까지 붙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이웃은 원수의 모습을 하기 쉬우니 남을 끌어들여 이웃을 외면하는 잔머리를 경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희생과 헌신의 제스처를 받아주는 무력한 존재만 이웃으로 경계 짓지 말고 상처받은 얼굴로 노려보는 진정한 이웃의 요구에 정직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연말이면 어김없이 불우이웃돕기 구호가 등장한다. 소녀가장이나 독거노인 같은 무력한 존재들이 그 대상이다. 이런 식의 ‘이웃사랑’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이벤트로 이웃을 불우하게 만드는 일상을 가린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죽어나간 노동자들에 대해 세계 일류기업이 보여주는 일관된 외면을 보라. 북한의 포사격으로 시민들이 불안에 떠는 사이 이웃의 권리를 분배하는 예산안을 당파의 권리로 날치기 통과시킨 집권세력은 또 어떠한가. 이해관계로 뭉친 패거리만 이웃으로 경계 짓고 진정한 이웃의 고통을 양식으로 삼는 것이 그들의 ‘이웃사랑’인가. 불우해지기 전에 이웃을 돕는 것, 이웃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가?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10. 12. 19.  

P.S. 두 칼럼에서 '슬라보예 지젝'이 '슬라보이 지제크'로 표기됐다. 현행 외국어표기법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슬라보이'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Slavoj'가 '슬라보예'로 소개된 것은 우연한 착오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음은 '슬라보이'니까. 최근의 어느 기사는 '슬라보즈'라고 독창적으로 읽었지만), '지젝'을 '지제크'로 읽는 건 소모적으로 보인다. '지젝'은 이미 통용 표기이기 때문이다(하긴 '벤야민'은 '베냐민'으로 고집하는 것도 여전하니 '지제크'만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지제크'가 무슨 비스킷 이름처럼 들리는 게 나뿐일까?). 나의 지론은 적어도 외국어 고유명사 표기는 일관적인 표기원칙을 따르기 곤란하며 관행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지젝의 <폭력>의 핵심 요지에 대해서는 동영상 시리즈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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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존재감’의 민주주의를 꿈꾼다

어제 '뒷북성'으로 발견한 책은 왕사오광의 <민주사강>(에버리치홀딩스, 2010)이다. 서구식 민주주의, 특히 미국식 민주주의를 비판한 책으로 경제대국 중국의 '자신감'을 표현하는 책으로 소개됐는데, 사실 저자의 민주주의 비판은 '상식'으로 수용될 필요가 있다(가라타니 고진이나 지젝의 민주주의 비판도 맥락을 같이한다). 민주주의를 사라지게 만드는 현재의 민주주의( ‘자유’ 민주주의, ‘간접’ 민주주의, ‘헌정’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 ‘다원’ 민주주의)를 갱신하고 재발명하기 위해서라도 사고를 '무장'할 필요가 있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서울신문(10. 09. 25) 서구식 민주주의가 진정 옳은 길인가 

중국, 중국인의 눈으로 중국식 민주주의의 방향성을 고민한 책이다. “서구식 민주주의가 인민을 위한 정치 체제에서 진정 옳은 길인가”라고 묻는다. 중국은 이제 서양식 민주주의의 무비판적인 수용을 거부하고, 중국식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홍콩 중원(中文)대 교수, 중국 칭화(淸華)대 공공관리학원 교수인 저자는 중국은 경제 성장에 따른 자신감을 갖고 미국 민주주의를 비판해야 한다고 말한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 예일대 정치학과 교수를 지내기도 한 그는 이 책에서 민주주의의 기원과 변화, 현대 민주주의의 발생과 운영 등을 살펴보고, 서구 민주주의가 ‘전가의 보도’는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중국은 이제 서양식 제도가 아닌 새로운 정치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식 민주주의가 반드시 높은 수준의 사회적 공정성과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예컨대 로버트 레인 예일대 명예교수의 저서 ‘시장 민주주의 제도에서의 행복의 유실’에 따르면 1972∼94년 스스로 ‘대단히 행복하다’고 느끼는 미국인의 수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민주주의가 반드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것도 아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근간 중 하나인 투표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저자는 “서양에서 수입해온 민주주의 모델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최후에 맞이하게 될 결과는 기껏해야 남원북철(南轅北轍·마음과 행위가 모순되는 상황을 비유한 말)의 꼴”이라면서 “중국은 사회주의 제도 기초 위에다 민주주의를 건설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노동인민의 이익을 출발점으로 하는 민주주의여야 하며 폭넓게 참여하는 민주주의여야 한다”고 설명한다.(정승욱 기자) 

 

서울신문(10. 09. 29) 대통령, 차라리 로또로 뽑는게 어때? 

정당에 대한 불신 증가, 투표율 저하 등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로 꼽히는 것들이다. 어떤 탈출구가 있을까. 여기 대담한 제안이 있다. 민주주의(Democracy) 대신 ‘대표표본주의’(Demarchy), ‘주사위주의’(Klerostocracy) 혹은 ‘로또주의’(Lottocracy)는 어떨까. 대표자를 뽑는 선거 따윈 집어치우고 국민들 가운데 임의로 선정한 대표표본에게 통치권을 위임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주사위나 로또로 통치자를 뽑아보자는 것이다. 평소 하는 행태로 봐서는 그다지 나를 대표해주는 것 같지도 않은 후보나 정당을 고르느라 골머리 썩일 필요도 없고, 후보자 시절을 까맣게 잊은 당선자들의 행태를 보고 열 받을 일도 없으니 말이다.

막가자는 얘기인가. 그렇지 않다. 책 ‘민주사강’(김갑수 옮김, 에버리치홀딩스 펴냄)을 통해 왕사오광 홍콩 중문대 교수가 진지하게 내놓은 제안이다. 왕 교수는 미국 코넬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예일대 정치학과에서 10년간 교수 생활을 한 정치학자다. 눈여겨볼 대목은 그가 책 전반에 걸쳐 미국식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로버트 달 예일대 교수의 주장을 수차례 인용한다는 점이다. 중국 학자의 ‘중국 옹호+미국 때리기’ 측면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민주주의 근본개념을 파고 드는 급진적 문제 제기만큼은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먼저, 왜 선거 대신 추첨인가. 왕 교수는 아테네 민주정은 계급제 때문에 불완전했고, 현대 민주주의는 보통선거권 덕분에 좀 더 완전해졌다는 상식을 뒤엎는다. 민주주의는 민중(Demos)의 직접 지배(Cracy)를 뜻한다. 여기서는 ‘지배하는 자가 지배 받는다.’는 동일성 원칙이 가장 중요하다.

누구나 선거에 나올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근사한 학위가 있거나, 줄 잘 대서 공천 잘 따내거나, 돈이 많거나, TV에 얼굴을 자주 디밀었던 사람이 아닌 이상 출마 자체도 어려울뿐더러 당선은 더 어렵다. 그러나 추첨을 하면 못난 사람, 조금 덜 배운 사람 등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가 돌아간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추첨으로 선출직 공직자를 뽑는 아테네 민주정이 더 민주적이다. 비록 노예와 여성을 제외했다고는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의 선거제도 역시 이미 돈과 명성 등의 기준으로 수많은 예비후보자들을 탈락시킨 상태에서 치러지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참가자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추첨제가 낫다는 주장이다.

한발 더 나아가 왕 교수는 ‘추첨은 민주정에, 선거는 귀족정에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계몽사상가들은 다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논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왕 교수는 그 원인을 민주정의 공포에서 찾는다. 당시 지식인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머릿수가 많은 노동자·농민층이 의회를 장악해 혁명적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정치참여 욕구를 적당히 받아들이면서 순치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바로 오늘날 현대인이 소중히 여기는 ‘자유’ 민주주의, ‘간접’ 민주주의, ‘헌정’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 ‘다원’ 민주주의라는 게 왕 교수의 진단이다.

예컨대 미국은 영국 왕이 싫어 독립전쟁을 치렀으면서도 ‘의회에 맞설 수 있되 세습하지는 않는 왕’을 대통령이란 이름으로 만들었고, 귀족도 없으면서 각 주(州) 간 균형이라는 명분으로 상원을 만들고, 헌정주의란 이름 아래 입법부가 만든 법률을 위헌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사법부에 부여했다. 한마디로 하원의 입법권을 무력화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따라서 왕 교수는 현대 민주주의를 ‘거세된’ 민주주의, ‘순한 양으로 길들여진’ 민주주의라 부른다. 왕 교수의 결론은 중국이 민주주의를 하려면 미국식 민주주의 말고 좀 더 노동자·농민의 이익에 걸맞은 방식의 민주주의를 찾아야 한다는 데 도달한다.

문제는 ‘방식’이다. 대표표본주의, 주사위주의, 로또주의가 정말 가능할까. 반사적으로 현실성이니 전문성이니 하는 반론이 튀어 나온다. 왕 교수는 반문한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기에 가장 엄밀해야 한다는 법원의 재판에서도 이미 이런 요소들이 배심제라는 이름으로 도입됐거나, 도입되고 있지 않으냐고. 시민의 상식, 그게 바로 민주주의 기반 아니더냐고.(조태성기자)  

10.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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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서 분야에서 올해의 저자라면 마이클 샌델이 되겠지만, 시야를 좀 좁히면 올해는 테리 이클턴의 해도 된다. 실제로 방한하기도 했지만 '이글턴의 귀환'이라고 할 만큼 그의 책이 여러 권 출간됐기 때문이다. 대미를 장식한 것이 <이론 이후>(길, 2010)다. 번역 소식은 진즉에 알고 있었고, 원서도 오래 전에 구해놓은 터라 출간되자 마자 손에 넣었다. 사실 그의 히트작인 <문학이론입문>을 '즐독'하던 시절이 20년쯤 전이어서 이글턴은 내게 '청춘의 독서'를 상기시켜주는 저자다. 내년 강의준비도 할 겸 다시금 '즐독'에 빠져봐야겠다(원서를 어디에 두었나 찾아봐야겠다).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0. 12. 18) 포스트모더니즘에 종언을 고함 

<이론 이후>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가 테리 이글턴(1943~·사진)의 2003년 저작이다. 2003년이면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이라크를 초토화하던 시점이다. 이글턴은 “미국 정부를 장악한 극단주의자들과 반(半)광신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날뛰고 있는데도, 이런 반인륜적 광기를 제어하지 못하고 진보운동이 주저앉은 이유 가운데 하나를 ‘이론의 무기력’에서 찾는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 시대의 통설”인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제다. 아무런 전망도 저항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불임의 이념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글턴은 바로 그 포스트모더니즘이 종언을 고했다고 선언한다. 이 책은 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경로로 서구 좌파의 대세를 장악했는지, 또 어떤 이유로 이 이념이 무기력 속에서 파산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글턴 특유의 생기 넘치는 언어로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이론’이란 ‘문화이론’을 가리킨다. 문화이론은 1960년대의 격동 속에서 태어났다.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의 흐름을 타고 격렬해진 서구 학생운동이 문화이론의 산파 구실을 했다. 당시 학생운동은 자본주의 지배체제에 복무하는 인문학을 격하게 거부했는데, 그 과정에서 인문학이 전면적인 자기성찰을 감행했고,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문화이론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론’이란 것은 바로 인문학의 비판적 자기 성찰이다.” 문화이론의 황금기는 1965년부터 1980년 사이 15년이었다고 이글턴은 말한다. 이 문화이론의 황금기를 수놓은 사람들로 이글턴은 “자크 라캉,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루이 알튀세르,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를 거명하고 또 “레이먼드 윌리엄스, 뤼스 이리가레, 피에르 부르디외, 줄리아 크리스테바, 자크 데리다, 엘렌 식수, 위르겐 하버마스, 프레드릭 제임슨, 에드워드 사이드”를 불러 세운다. 거의 전부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이끈 프랑스 출신 좌파 이론가들이다.

이 빛나는 별들을 쏘아올렸던 ‘문화이론’은 1980년대에 들어와 소비주의가 만연하고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몰락해 버렸다. 그 이론의 폐허 위에 깃발을 꽂은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이글턴은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1960년대의 대항문화가 낳은 이론들 속에서 자라났으나 결국에는 그 이론들의 건강한 비판성을 잃어버린 껍데기 이념이다.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자로 구체적인 인물을 특정하지는 않지만, 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아 리오타르, 장 보드리야르,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 그리고 몇몇 급진 페미니즘 이론가들을 넌지시 지목한다.

이글턴이 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지적 흐름은 “총체성, 보편적 가치, 거대한 역사적 담론, 인간 실존의 튼튼한 기반,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을 거부한다. 또 “진리·통일성·진보에 회의적이다.” 요컨대, 영원한 보편적 진리도, 보편적으로 타당한 가치도, 인간 실존의 굳건한 토대도 없다고 보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모든 것이 가변적이고 부분적이고 상대적이어서, 거기서 진리나 보편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런 주장들이 모두 틀렸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글턴이 예로 드는 것이 규범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규범적인 것’을 ‘억압적인 것’과 동일시한다. “규범은 억압적이다.” 정말 그런가. 어떤 규범은 억압적일 수 있지만 규범 자체가 억압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규범이 없다면 유아살해범을 처벌할 수도 없고 홀로코스트를 규탄할 수도 없다. “규범이 늘 우리를 구속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낭만적 망상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 ‘진리는 도그마다’라는 명제일 것이다. 이글턴은 이 명제야말로 우리의 행동을 옭아매는 가짜 명제라고 단언한다. 진리를 옹호하는 것은 교조주의도 아니고 광신주의도 아니다. “인종차별주의는 악이다”라는 명제는 인종차별주의의 희생자들에게만 진리인 것이 아니다. 판단과 행동의 근거로서 진리는 존재한다. 그런 진리를 옹호할 수 없다면 여성이 억압받고 있다든가 기업의 탐욕이 지구 생태계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없다.

이글턴은 말한다. “초국적 기업들이 지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펴져나가는 동안 지식인들은 보편성이란 일종의 환상이라고 목청 높여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2003년의 전 지구를 뒤덮은 네오콘 광기였다. 이런 광기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끝없이 자기 회의와 자기 부정에만 골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끝에 다다른 듯하다.” 이글턴은 “이론 없이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숙고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결코 ‘이론 이후’에 존재할 수 없다”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론적 파산’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이론이 자본주의의 저 야심만만한 전 지구적 역사와 싸워나가야 한다면 자기만의 책임있는 원천을 지니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는 다시 힘주어 말한다. “문화이론은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 저 숨 막힐 듯한 통설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제들을 탐구하라.” (고명섭 기자) 

10 12 19.  

P.S. 올해 더 나온 이글턴의 단행본 저작들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 나오면 좋겠다 싶은 책 세 권은 아래와 같다. <악에 대하여>, <삶의 의미>, <타인을 만나는 어려움> 등이다. 처음 두 권은 비교적 얇은 책이고 '윤리학 연구'란 부제가 붙은 세번째 책은 야심작이다. <문학이론입문>의 개정판으로 <문학이론입문>(3판)도 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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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제 2011-01-01 21:30   좋아요 0 | URL
로쟈님은 아래 세 권을 읽어보셨나요?

로쟈 2011-01-02 11:14   좋아요 0 | URL
<악에 대하여>는 아직 구하지도 못했습니다. 읽어보려는 책이고, 번역본이 나온면 좋겠다는 뜻이죠...
 

오늘자 한겨레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를 거리로 삼았다. 개인적으론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더 흥미롭게 읽은 책인데, 샌델의 핵심적 주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식 철학'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된 것도 덤으로 얻은 소득이다.  

한겨레(10. 12. 18)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를 따져라  

“문명세계에서 미국만큼 철학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나라는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 알렉시 드 토크빌이 1830년대에 미국을 방문하고 남긴 말이다. 특히 정치철학은 미국의 공헌이 아주 미미한 분야인데, 마이클 샌델은 <왜 도덕인가?>에서 그 이유를 미국 민주주의의 성공에서 찾는다. “종교전쟁, 쇠퇴하는 제국, 실패한 국가, 계급투쟁은 안정된 제도보다 더 풍부한 철학적 내용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열거한 사항은 모두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카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등 쟁쟁한 정치철학을 배출한 유럽대륙과 관련이 있다. 상대적으로 미국의 정치철학이 빈곤한 것은 유럽과 달리 ‘안정된 제도’를 운영해온 덕분이라는 지적이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일반화할 수는 없을 듯싶다. 똑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가장 앞선 정치철학을 가질 법한 나라는 한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샌델의 이어지는 추정은 깨달음을 준다. 미국 철학사상의 대표적인 명언들은 어쩌면 철학자가 아니라 공직자들로부터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치철학의 빈곤을 충분히 상쇄하는 다른 전통을 미국은 갖고 있다는 것이다. 샌델이 보기에 미국에 정치철학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토머스 제퍼슨이나 제임스 매디슨,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대통령, 그리고 알렉산더 해밀턴, 올리버 웬들 홈스, 루이스 브랜다이스 등의 법률가 내지 연방대법원판사 등의 입에서 나왔다. 예외라면 비정치인으로서 미국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 정도이다. 



기록적인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에서는 이름을 떨치게 됐지만, 정치철학자로서 샌델의 평판은 롤스의 자유주의 정치이론을 비판한 데뷔작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에서 비롯됐다. 덕분에 그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체주의’ 철학자로 자주 묶이곤 한다. 하지만 샌델은 공동체주의의 한계 또한 날카롭게 지적한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공동체주의가 정의의 원칙을 특정 공동체나 전통에서 찾는 걸 뜻한다면, 그는 자신이 공동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에 도덕적 가치나 선을 정의원칙의 정당화 근거로 삼는 입장을 지지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하는 목적론적 정의론자이다.

어떤 차이인가? 예컨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서 신나치주의자들이 연설을 하거나 인종차별을 옹호하는 지역에서 민권운동가들이 가두행진과 연설을 할 경우 어떻게 대응하는가? 두 가지 사례 모두 지역 공동체의 일반적인 의사와는 반대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셈인데, 자유주의자는 언론의 자유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연설 내용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자는 공동체의 지배적 가치에 따라 두 가지 시도에 모두 반대한다.

하지만 샌델은 대량학살과 혐오를 선동하는 신나치의 연설과 흑인의 민권을 얻어내려고 한 민권운동가의 연설은 그 ‘대의’에 따라 구별돼야 한다고 본다. 요컨대, 절차적 정당성만 옹호하거나 다수결주의만을 고집하는 것은 정의의 원칙으로 미흡하다. 물론 무엇이 대의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라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도덕적 논의를 회피함으로써가 아니라 대의에 대한 공공철학적 논쟁을 강화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한다. 

새해 예산안을 단독으로 강행처리한 뒤에 여당 원내대표는 그것이 ‘국가를 위한 정의’라고 말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어서 이제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를 따져보자는 제안으로도 들린다. 

10. 12. 18.  

P.S. 참고로, <왜 도덕인가?>의 말미에 '가상인터뷰'라고 들어가 있는 꼭지는 '공동체주의의 한계'란 제목의 글을 옮긴 것으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2판)의 서문이다. 샌델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주는 글이다. 한편, 번역본에서는 샌델이 비판거리로 삼는 'procedural republic'을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옮겼는데(191, 295, 296쪽), 그게 합의된 번역어인지는 모르겠다. '형식적 민주주의'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 걸고 생각되긴 하지만, 국내 학술논문에서는 '절차적 공화국', 그리고 <공동체주의와 공공성>(철학과현실사, 2008)에서는 '절차적 공화정'이라고 옮겨졌다. 그리고 8장 '관행과 제도에 내제된 정치철학은 무엇인가'는 원제가 'The Procedural Republic and the Unencumbered Self'로 샌델의 정치철학적 입장을 잘 요약해주는 글이어서 요긴하다(원문은 인터넷에서 바로 다운받을 수 있다).   

'Unencumbered Self'는 '무연고적 자아'라고 옮기는데, 롤스의 자유주의 정치론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정의론>에서 그가 내세우는 원초적 입장이 '무연고적 자아'를 상정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공동체주의와 공공성>의 첫번째 강연인 '자유주의와 무연고적 자아'를 더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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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2-18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전 니체 이후에 '목적론'을 정치철학에 다시 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렇게 되면 샌델의 이론은 '위장된 신학' 아닙니까? 전 샌델 책 읽으면서 그를 B급 철학자라고 분류하였습니다.

로쟈 2010-12-19 09:54   좋아요 0 | URL
글쎄요, <왜 도덕인가> 후반부는 꽤 설득력이 있는데요. 나름대로 반론을 올려주시면 읽어보겠습니다...

2010-12-18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9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8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9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0-12-1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참 묘한 나라입니다.
그들이 얻는 혜택의 이유 중 하나는 아메리카라는 분단된 묘한 지역적 구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불가피한 선택을 할 필요가 없는 그런 나라...

로쟈 2010-12-19 09:58   좋아요 0 | URL
'미국들'이란 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두 얼굴을 가진 나라이기도 한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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