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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평전 (양장) - 개정판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유병언의 시신이 부패된 채로 발견되었다. 정부에선 유병언의 시신이 맞다고 우겨대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현역 치과의사는 주장한다. 담배를 피지 않는 유병언 치아에 니코친이 끼어 있을 순 없다고.
마찬가지로 장준하 선생이 산에서 추락사 했다는 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두 번에 걸친 <장준하 의문사 위원회>는 비록 결정적인 물증을 찾아내진 못했지만 적어도 추락사가 아닌 것만은 분명히 밝혀냈다. 추락사 당한 시신에 아무런 외상이 없을 순 없다. 그렇다면 장준하 선생은 왜 살해당해야만 했을까?
현대사의 선각자 중에서 장준하 선생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이도 드물 것이다.
장준하는 일제 강점기 때 부러 일본군에 지원, 마음이 맞는 일행들과 목숨을 건 탈영을 감행한다. 그는 갖은 고생 끝에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을 넘어 꿈에 그리던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에 도착한다. 목숨 걸고 임시정부를 찾아간 장준하를 맞아들인 건 임정의 파벌싸움이었다.
“일군에 가면 항공대에 들어가 중경폭격을 자원, 이 임정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다. 선생님들은 왜놈들에게 받은 설움을 다 잊으셨는가. 그 설욕의 뜻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분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러 온 것이지, 결코 여러분의 이용물이 되고자 이를 악물고 헤매여 온 것은 아니다.”
임시정부 체류 3개월 후, 그는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에 지원, 고된 훈련을 이겨내고 정식 대원으로 선발, 목숨을 각오하고 서울 침투 작전에 지원한다. 이범석 장군을 대장으로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이계현, 이해평등 5명의 한국인과 미군 측 22명이 탑승한 비행기가 8월 14일 새벽 4시에 서안비행장에서 이륙한다. 이륙 6시간 40분 후 회항명령이 떨어졌다. 결국 장준하 선생은 18일 오후 3시경에 여의도 공항에 착륙했다. 그보다 이틀 전에 일본이 항복했다. (광복군이 8월 15일 이전에 서울 침투 작전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미군정에 의해 남북이 갈라져야 했을까?)
광복 이후 장준하는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시대의 양심인 <사상계>를 간행한다. 그는 신성 중학교 때 은사였던 함석헌 선생을 필자로 모셔 와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리기도 한다. 이승만 독재 정권기에 선생은 반이승만 투쟁을 이끌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사상계>가 4.19의 도화선이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장준하는 이후 이승만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5.16 군사쿠데타를 지지한다. 박 정희가 정권을 차지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 못한 것이다. 박정희의 독재가 시작되자 장준하 선생은 살해당하기 전까지 독재자와의 끊임없는 싸움을 지속해 나간다.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다면 장준하는 광복군 장교였다.
빨갱이였다 동료들을 배신해 살아남은 박정희로서는 <사상계>를 통해 연일 자신의 과거를 폭로하는 장준하야말로 눈엣가시였을 뿐더러, 장준하 앞에만 서면 쪼그라드는 자신의 열등감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66년엔 삼성이 사카린을 밀수한 것이 폭로되면서 장준하는 “박정희란 사람은 우리나라 밀수왕초다”라는 발언으로 국가원수 모독죄로 체포되기도 했었다.
장준하는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무려 열흘 만에 30만 명이 서명에 참여했다고 한다. 오늘날처럼 인터넷으로 서명을 받는 게 아니라 일일이 손으로 서명을 받았다는 걸 고려해보자면 실로 놀라운 성과다.
이에 박정희는 긴급조치 1,2호를 선포해 곧장 장준하를 잡아들여 징역 15년을 선고한다. 그러나, 장준하의 병이 악화되어 옥중에서 죽어 장준하가 ‘민주화의 영웅’이 될까 무서운 박정희는 그를 풀어준다. 장준하는 굽히지 않았다. 풀려나자마자 1975년 1월 8일, 그는 박정희에게 장문의 공개서한을 보내, 비열하고 음흉한 탄압정책을 그만두라고, 일인 독재체제 강화를 위한 유신헌법을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
오죽했으면 박정희가 ‘장준하 때문에 대통령 못해먹겠단’ 소릴 내뱉었을까?
그해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은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의 시체로 발견된다. 이 사건에서 의문점은 너무나 많아서 여기선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단지 초등학생의 지력만 있더라도 사고사가 아니라 타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점만 밝혀두자.
한 가지 짚어둘 점은 인근 군 부대에서 장준하의 사고현장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5시 30분이었다고 하는데, 오후 1시에 장준하의 집으로 의문의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이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장준하의 아들에게 “장선생이 산에 올라갔다가 떨어졌으니 서울에서 사람들이 많이 와야 모셔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굴까? 혹자는 이 전화의 주인공이 김재규일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만일 장준하 선생이 암살당하지 않고 김재규와 손을 잡았더라면 역사는 또 어떻게 변했을까? 대부분 군인 장성들은 광복군 출신인 장준하 선생을 존경했었다고 한다.
장준하의 죽음을 누군가 “민주주의의 한 소절이 묻힌다”고 말했다.
내년 이맘이면 장준하 선생 사후 40주기가 되건만, 평생의 악연인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된 작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무덤속의 선생은 무슨 말을 할까?
아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장준하 선생의 좌우명은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였고,
그는 자신의 좌우명에 투신한 삶을 살았다.
장준하 선생의 삶을 회고하며
오늘날 우리의 삶을 살펴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14년 8월 16일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