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 종합병원의 영안실로 조의를 다녀왔다.
상무님의 장모님이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셔서 그런지 가족들은 침착해 보였다.

영안실 앞에는 자녀들의 이름이 쭉 써 있었다.
아들1명, 딸 4명, 그리고 그들의 배우자 5명.
울 상무님은 막내사위다.

그런데 참 이상한건
영정 앞에 서서 조문객들과 인사를 하고 절을 하는 사람들은
아들 1명과 사위 4명, 다섯 명의 남자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슬픔은 딸들이 가장 클 텐데
50~60세인 딸들은 음식을 나르고 손님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무님을 찾아온 문상객들이 제일 많았다.
상무님 앞으로 온 수많은 弔花들,
수많은 조문객들...
삼성그룹의 임원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엄청나게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왔다.

팀에서는 시간표를 만들어서 오전/오후/저녁/야간 반을 만들었다.
나는 오후반이었다.
오후반 3명은 차 한대로 같이 이동, 병원에 도착했다.
식사를 하고 손님들과 인사를 하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같은 오후반이었던 김 과장님이 말했다.
" 우리 교대해 주자. "

오전반이었던 강 과장과 김 대리가
영안실 안 데스크(조의금 내고 이름 쓰는 곳)에 앉아 있었는데,
그 사람들과 교대해 주자는 말이었다.

같이 있던 Bruce 대리는 흔쾌히 "예,그러죠" 대답했다.
그런데 나는....그렇게 흔쾌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왜냐구?

조문을 수도 없이 많이 가 보았지만,
그 데스크에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내가 거기에 앉으려 하면,
누군가가 나에게
"여자는 앉는 거 아니예요."
이런 말을 할까 봐,
이런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웠다.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 여자는 안 된다." "여자라서 안 된다." "여자가 어디서..." 이런 말이다.
여태까지 영안실 안의 데스크에
남자들만 앉았는지 여자들도 앉았는지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거기에 앉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막상 닥치고 보니
" 내가 앉아도 되는 것인가? "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정말 별의 별 고민을 다한다.쩝...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깐 자리를 비웠다.
다행히 강 과장과 김 대리가 그냥 자기들이 계속 하겠다고 해서
나랑 같이 간 일행들은 교대를 하지 않고 식당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밤 늦게까지 있었는데,
약속이 있었던 Bruce 대리와 나는 6시가 조금 넘어서 같이 나왔다.
우리는 서울로 나오기 위해 좌석 버스를 탔다.
일산에서 당산역까지 나란히 앉아서 얘기를 했다.
( Bruce 대리는 내가 회사에서 가장 좋아하고 친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수선 : 있쟎아요... 영안실 안에 조의금 내는 데스크 있쟎아요...
거기에 여자가 앉은 거 본 적 있어요?
Bruce : (갸우뚱 갸우뚱 하다가) 없는 거 같은데.. 본 적 없어요.
근데...왜 그래요?
수선 : 아까 김과장님이 교대하자 그럴 때요, 같이 들어갔다가
누가 "여자는 앉으면 안돼요." 그럴까 봐 걱정했어요.
Bruce : ( 좀 놀란 표정으로 ) 그랬겠다.... 정말 그랬겠다.... 그런 생각은 한번도 못해봤네.
수선 : 이런 "헛갈림"을 하루에도 몇 번씩 느껴요.
Bruce : Susan이 생각이 많겠구나. 남자들한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Susan한테는 그렇지 않구나.
Susan이 말하지 않았으면 생각도 못해봤겠네. 이런 문제는....


그렇다.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도 일상적이고,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내게는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해야 되지? 헛갈릴 때가 많다.
답은 없다. 왜? 전례가 없으니까...

이런 일도 있다.
가끔씩 국내 거래선이나 공장에서 누가 방문했을 때,
우리 팀의 모든 사람들과 악수를 하면서 내겐 악수를 청하지 않을 때가 있다.
여자랑 악수를 하기가 뭐한가 보다.
요즘에도 그런 사람이 있냐고 웃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아저씨들 진짜 있다. 한두번 겪어 본 거 아니다.
심지어 내가 전화 받으면 말을 어정쩡하게 내려서 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수선 : 감사합니다. OOOOOO 성수선입니다.
전화 한 아저씨 : 영업 담당자 좀 바꿔요.
수선 : 어떤 제품 문의하시게요?
전화 한 아저씨 : OOO (제품 이름만 툭 말한다.)
수선 : 말씀하십시오. 제가 담당자입니다.
전화 한 아저씨 : 거....대리 쯤 되는 사람 좀 바꿔요.
수선 : 말씀하십시오. 성수선 대리입니다.
전화 한 아저씨 : ( 당황하며 ) 어.......영업에.....여자 분도 계시네요.
( 태도가 확 바뀌며 ) 저는 OOOO 누구라고 하는데요.


이런 일 정말 한두번이 아니다.
아직도 여자가 전화 받으면 갓 여상 졸업한 사무보조직 여직원인지 아는 사람이
유감스럽게도 한두명이 아니다.
그리고.... 자기 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전화를 받건, 채 10살도 안 된 어린이가 받건
전화를 걸었으면 "존댓말"로 얘기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말해야 한다는 "상식"을 모르는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다.

으윽....쓰다 보니 하소연이 되었다. 쩝.
이런걸 쓰려던게 아니었는데....

나를 제외한 팀원 모두에게 너무도 당연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내겐 고민이 될 때가 있다.
그런데 내가 고민한다는 걸 주위에선 모른다.

그래서....가끔은....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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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1-07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자매뿐이라 큰 집 오빠가 대신 조문객을 맞고 있더군요. 친구는 왔다 갔다 서성이고. 아비 잃은 슬픔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적실 수 밖에요... 부당한 것들이 이제는 이상한 것들로만 취급되요.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결혼해보시면 그 부당함이 여자들로 부터 파생된 것처럼, 오히려 여자들에게 더 만연해 있다는 걸 몸소 느끼실 겁니다. 얼마나 이상했는지 몰라요... ㅎㅎㅎ

야클 2005-01-07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분이 조위금 접수받는것 본적있어요. 딸이 조문객 맞이하고 절하는것도 본적 있구요. 여자분이 주례 하시는 것도 본적 있습니다. 저도 결혼할 때 주례는 친한 여자교수님께 부탁드릴겁니다.(그게 언제가 될지... ^^*)

아직 그런일이 드물고 신기해 보일뿐이죠. 어차피 애 하나 낳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일이 앞으로 대세가 아닐까 싶네요. 수선님이 앞장서시길! ^^*

icaru 2005-01-07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감기가 심해, 약을 지으러 집근처 약국에 갔었더래요...희긋희긋 센머리가 보이는 50대쯤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약사로 있었어요.....

근데...이 아저씨가 증상을 물어보면서.. 은근히 말을 놓더라구요...정황상...이 아저씨...내가 여자라고....그러는 듯... 블쾌했지만 참았는데...점점 노골적으로 말을 놓는 것 같아, 저도 지지않고




약사 아저씨 : 기침은 언제부터?

나 : 오늘 아침부터.



했네요...ㅋㅋ 아저씨 뜨금하는 게 역력...^^

야클 2005-01-0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 언니님, 브라보! ^^V

그런데 꼭 여자라고 그런게 아니라 그런 사람은 남자한테도 자기보다 어려 보이면 반말할걸요? 전 많이 당해봤습니다.-_-;

kleinsusun 2005-01-07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제 기분을 이해하시는군요. 엄마 잃은 슬픔이 가장 큰 존재는 딸들인데, 딸들은 음식 나르느라 정신 없고 사위들이 절을 하고... 번듯한 弔花가 누구 앞으로 왔는지, 누구에게 조문객이 젤 많이 찾아왔는지 은근히 경쟁하고.... 근데 결혼하면 이상한 일들이 더 많다구요? 그것도 여자들에게 더 만연해 있다구요? 헉...

kleinsusun 2005-01-07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cool한 야클님! 팬클럽 하나 만들까 보다.ㅋㅋ

제 친한 친구도 결혼할 때 우리과 여자교수님(그것도 독일사람)이 주례 보셨어요.

야클님, 결혼할 때 꼭 초대해 주세요!

kleinsusun 2005-01-07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 언니 홧팅!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요. 우하하하하하하하.

드팀전 2005-01-08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상무 장모 장례식장도 가야됩니까? 상무 아버지도 상무 와이프도 아니구..상무 장모장례식까지 가서 상부상조의 정신을 보여줘야되는군요. 뭐 저희 회사도 높은 사람들은 그런것까지 챙기는 것 같긴 하던데...귀찮은 일이군요.결국 다들 장례식장에 가도 처삼촌묘 벌초 하는 심정으로 건성건성 눈도장만 찍고 오는 건데...하여간 님이 계신 그곳도 복잡한 곳이군요.(아....당연히 힘들겠고 주변으로부터 따도 좀 당하겠지만 '심플라이프' 하고 싶다.)
 
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
고은광순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 정말 cool하다.
근데...책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표지가 정말 엉망이다.
책 내용은 너무도 치열하고 진보적인데,
책 표지는 너무 구태의연하다.
세상에.... 저자가 빨간색 홈드레스 차림에 고무장갑을 끼고 노란색 확성기를 들고 있다. 트럭 세워놓고 생선 파는 아저씨가 "생~선, 생~선 왔어요!" 소리칠 때 쓰는 손잡이 달린 마이크.

표지를 디자인한 사람은(디자이너라는 말이 안나온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그림을 넣었을까?
혹시 이런 쾌쾌묵은 짝짓기를?

여자 - 앞치마, 고무장갑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여자 - 앞치마,고무장갑 + 확성기


이런 생각이라면.... 한숨이 나온다.

근데...표지 때문에 이 책을 평가절하하면 안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진정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 책을 12월 31일에 다 읽었으니,
04년 마지막 읽은 책이다.

12월 31일.
종무식이 시작되기 30분 쯤 전이었다.
내 책상에는 이 책이 살포시 놓여 있었다.

상무님이 지나가시다가 이 책을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상무님 : (표지에 있는 저자 이름을 가리키며) 이 여자는 이름이 세글자야?
수선 : 아니요, 부모성 함께 쓰는거예요.
이름이 세 글자가 아니라 성이 두개예요.
상무님 : (뜨악한 얼굴로) 필명이지? 설마 호적을 바꾼건 아니지?
수선 : (신나하며) 호적 바꿨는데요.
상무님 : 아니 호적상에 성을 두개로 바꾸는게 가능하단 말이야?
세상 좋아졌다.세상 좋아졌어.
수선 : 그럼요, 호주제가 폐지되면 엄마성만 쓸 수도 있어요.
부모의 성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거죠.
상무님 : 뭐야? 아니 미국에서도 다 아버지 성을 쓰는 판에 무슨
소리야?
수선 : (그만 대꾸하라는 주위의 시선을 느끼며 잠시 침묵)
상무님 : 성을 마음대로 바꾸면 사회 질서가 흔들리지.
이 여자나 그렇게 살라 그래!

아....이것이 종무식을 30분 앞둔 상무님과 성대리의 대화였다.

"호주제 폐지"에 대부분의 남자들은 "발끈"한다.
호주제 폐지를 외치는 여자들은 대부분 이혼녀라고 말한다.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멀쩡한 법을 왜 뜯어 고치냐고 말한다.
미국에서도 아버지 성을 따르고, 심지어 결혼하면 남편성을 쓰는데
왜 자기 성을 쓰는 한국에서 이 난리냐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미국에서는 아버지 성을 따르는 관습이 지금도 있으나 법적으로는 대부분의 주에서 부모의 협의에 의해 자유로이 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결혼 후 남편의 성을 쓰는 것도 관습일 뿐이어서 부부가 새로운 성을 쓰거나 결혼 후에도 자기 성을 고수하는 경우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영국도 마찬가지며 캐나다 정부는 결혼 후 성을 바꾸지 말도록 강력히 권장하고 있다.
일본도 1991년에 법을 바꾸어 부모 성 중에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p97)

외국에서도 그러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게 아니다.
아들만이 대를 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몰상식이 만연한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당할 수 밖에 없다.

여성계에서 부계 성씨를 싹 무시하고 모계 성씨를 쓰자고 선동을 하고 있는게 아니다. 부계 성씨 사용이 강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보다 행복한 세상을 위하여.

그냥, 막무가내로, 기존의 질서가 깨질까봐
조바심을 내며 짜증내지 말고,
귀를 크게 열고 들어 보아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이 아팠던 부분.
<복음과 상황> 인터뷰 전문기자 지유철님과의 인터뷰 이야기다.

인터뷰 시작 전에 늘 하듯이 오신 분들에게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에서 만든 홍보엽서 8종을 드린 뒤 강아지 엽서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냐고 물었다......(중략)......

"음음,어,뭐랄까.이걸 보면 어,만든 사람들의 뭐랄까....,만든 사람들의 어떤 절박한 마음 같은 것이 느껴지면서..."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입술이 씰룩거려져서 결국 인터뷰를 눈물 바람으로 시작하게 되었다.한번 터진 눈물 창고가 수시로 터지는 바람에 정말 고약한 인터뷰가 되었다.
(p180~182)

많안 남자들은, 또 자신은 여성운동에 관심 없다고 말하는 많은 여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이 억척스럽고 독하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억척스럽고 독해서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친게 아니다.
절박해서였다. 절박해서.
그 절박함이 다가와 마음이 아팠다.

이제 곧 행복한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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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5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5-01-05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주제 폐지는 관습법 위반이래요. 위헌인거죠.^^

법률보다 무서운 게 관습이란 거잖아요. 저 상무님도 그런 관습에 젖어 사는 거죠. 곧... 은 안 되겠지만,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같애요. 물론, 절박한 사람들의 눈물을 먹고 그 관습이 밀려나는 것이겠지만, 남자 위주의 사회란 관습 자체가 이런 것들을 바라보는 눈을 삐뚤게 만들기 때문이겠지요.

marine 2005-01-05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아빠나 남친이 자주 쓰는 말입니다 뭐뭐를 마음대로 바꾸면 사회가 흔들리지... 전 그 바꾸는 걸 진보, 즉 발전이라고 생각하는데 일명 보수라는 분들은 사회의 안정성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하더라구요 가끔은 답답해서 숨막힌다는 생각도 들어요...

kleinsusun 2005-01-05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주제 폐지가 관습법 위반이므로 위헌이라는 것은,

유림들이 "수도 이전"이 관습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위헌" 판정을 받자,

그럼 호주제 페지도 관습법 위반이 아니냐고 제소를 한 거예요.



일단...."관습법"이라는 자체가 웃긴 거죠.

성문법이 있는 나라에서 관습법 타령을 하다니...



글쿠, 설사 관습법을 인정한다 치더라도

호주제는 관습법이 아니랍니다.

호주제 자체가 일제 시대 때 생긴 거니까요.

100년도 안된, 그것도 일본에 의해서 생긴 제도를 "관습법"에 해당된다고 할 수는 없겠죠.



"남자 위주의 사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나요?

가부장이라는 역할을 버거워 하는 남자들도 또 얼마나 많나요?

남자들도, 여자들도, 어느 집단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트렌스 젠더들도

모두모두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드팀전 2005-01-05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주제 없어진다고 별일 생기는 것도 아닌데 난리지요.^^ 일단 하나씩 하나씩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희망이고 진보아니겠습니까.역사의 흐름을 어찌 구식 무기들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드팀전 2005-01-05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보니 여기는 페미니즘난이 따로 있군요.님의 관심을 보여주는 대목인듯합니다.

벨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에 대한 마태우스님과 복돌이님의의 논의가 문득 떠오르는군요.전 개인적으로 벨훅스의 주류페미니즘 비판에 동의하는 편이었는데... 뭐 한국정치의 비판적 지지에 대한 논의흐름과 비슷했던 기억이 납니다.아직 보시기 전이라면 추천합니다.마태우스님은 추천에 반대했지만...

kleinsusun 2005-01-06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페미니즘>읽었어요.

Feminism is for everyone 이란 원제에 충실한,

어렵지도 않고 군더더기도 없는 아주 "산뜻한" 책인 것 같아요.

페미니즘이 "反 남성주의"라는 선입견에 페미란 단어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분들께 추천하고픈 책이예요.

kleinsusun 2005-01-06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드팀전님, 님이 쓰신 <행복한 페미니즘> 리뷰 읽고 눈물이 핑 돌 것 같아요.

"세상의 거대한 소수자" 그 무심한 듯 하면서도 적확한 표현......가슴에 정면으로 와닿아요. 강사에게 카드 한장 보낼 수 있는 드팀전님의 마음씀도 잔잔한 감동을 주네요.

수퍼겜보이 2005-05-02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웬디수녀 리뷰 보고 놀러왔어요. :) 역시 예리한 리뷰들이 잔뜩 있네요. 뒷북이지만 스페인어를 쓰는 문화권에서는 자녀들은이부모의 양쪽 성을 다 쓰더라구요.
 

이 글의 제목을 보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오늘 아침 시무식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올해는 꼭 좋은 일 있으세요!"
보다 직설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올해는 국수 먹을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의 새해 목표는 결혼이 아니다.
"결혼이 무슨 목표야? 좋은 사람 만나면 자연스럽게 하는 거지."
이렇게 말하면 주위에서 참 말 많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결혼을 못한 거지" 라거나,
"결혼에도 전략이 필요한 거야." 등등.....

사실 작년에는 부모님 등살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했는데,
내가 너무 남들의 싸이클에 비해 뒤쳐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선도 몇 번 보고 그랬는데,
솔직히 지금은 결혼에 별 생각이 없다.
좋은 사람 있으면 결혼한다.
아주 단순하다.

하지만 "결혼을 위한 결혼",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한 결혼", "적당히 눈높이를 맞춘 결혼",
"노후 안심형 보장 결혼", "남들 다하니까 하는 결혼"등은 절대 하기 싫다.
이런 말 하면 주위에서 아직 정신 못 차린다고 말하는데
난 아직 "soul mate"를 믿는다.
만나지 못한다면...그냥 혼자 살면 그만이다.

자....이제 본론에 들어가서...
05년 나의 목표는 책을 내는 거다.
책 앞날개 저자 소개에 "성수선"이란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 있는 책.

그게 내 목표다.

소설이냐구? 아니다.
독서일기냐구? 아니다.
그럼 도대체 뭘 가지고 책을 한 권 쓰냐구?

바로 내 일상 이야기다.

전인권(들국화의 전인권 오빠 아님) 교수는 자신의 책 <남자의 탄생>에서
지극히 사적인 자신의 유년기를 살펴 보고 고백함으로써
"한국 남자" 가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한국 남자의 "정체성" 이 형성되는지를
보여 준다.
정.말, 지.극.히 사적인 개인적 삶의 고백이다.
하지만 개인적 삶은 "보편성"을 담고 있다.
교수가 쓴 책이니 어렵냐구?
천만에....
궁금하면 한번 읽어보시라.
아버지랑 어머니랑 부부싸움을 어떻게 했고, 화해는 어떻게 했고,
언제까지 젖을 먹었고,
어머니 계 모임에 따라간 이야기 등등 자신의 지나간 일상을 고백했을 뿐이다.
개인의 "일상"으로 그 개인이 속한 집단의 "정체성"과 "보편성"을 알 수 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언니는 말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그렇다.
나는 내 일상을 책으로 엮겠다.
지금의 위치, 지금의 감수성, 지금의 상황에서만 할 수 있는 얘기를...
나중에는 하지 못하는 얘기를....

이 프로젝트에 결정적 용기를 주신 분이 있다.
바로 <흡연여성 잔혹사>의 저자 서명숙 선생님이다.

12월 31일, 04년의 마지막 날,
서명숙 선생님과 차를 마셨다.

서명숙 선생님 : " 나한테 하는 이런 얘기들을 책으로 써봐."
수선 : " 할 수 있을까요? "
서명숙 선생님 : " 너의 경험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거야.
베스트셀러 되기는 힘들겠지.
그런데...모든 일에는 시점이 있는 거야.
지금 할 수 있는 얘기는 지금만 할 수 있어."

난 97년부터 영업의 최전선에서 일했다.
즉, 빡센 조직생활을 했고 그 빡센 조직에서 난 항상 유일한 여자였다.
오랜 세월동안 조직의 문화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인 것이었다.
조직에 아예 여자가 없었으니까...
난 그 동안 없었던 자리를 만들어 내려 낑낑거렸다.

조직은 내게 만만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행인들을 잡아서 침대에 눕힌 후
침대 길이 보다 키가 큰 행인은 잘라 버리고,
침대 길이 보다 키가 작은 행인은 늘여 버리고 했던
프로쿠르스테스 처럼....
트렌스젠더가 자신의 "성 정체성"과 싸움하듯이,
하리수가 남자로 살아 보려 힘겹게 노력했다고 고백한 것처럼,
나도 남들과,그러니까 남자들과 똑 같아 지려고 처절하게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똑같아지지 못했다.
그러면서 남들 하는 대로 하지 못하는 나를 탓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을 생각하며,
내가 조직에 맞추지 못하는 것은 다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직도....같이 변해야 한다.

더 이상 남자들만 있는 조직이 아니다.
여자 후배들이 하나, 둘씩 늘어 가고 있다.
언젠가는 조직의 반이 될 것이다.
조직의 문화도 이런 변화를 수용하며 옷을 갈아 입어야 한다.

난 내 일상을 소재로 한 책을 통해,
조직생활을 하는 여자의 "정체성" 문제,
가끔 벽에 머리를 부딪히는 것 같은 당혹감과 어려움,
세상 속에서 소통하며 성장하는 즐거움과 행복함을
잔잔하게 말하려 한다.


내가 세상에 내놓을 책은
<나는 이기는 게임만 한다>, <그녀에게선 바람소리가 난다>
같은 성공한 여자들의 얘기도 아니고,
멋있고 cool한 얘기도 아니다.

엎치락 뒷치락, 아둥바둥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일상,
그 일상을 고백함으로서 공감대를 만들고 싶다.

이것이 바로 05년 나의 목표.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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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5-01-0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누나 화이팅! '돈 주고 초판 사서'읽을 책이 출현하겠군요. ^_^o-

로드무비 2005-01-03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계획입니다.

수선님 책 나오면 다섯 권은 제가 소화할게요.

파이팅!!^^


icaru 2005-01-03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으로 만나는 수선님의 독자가 될 준비되어 있습니다!!

클라인 수선님 아자아자!!!

드팀전 2005-01-03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학교다니며 가장 재미있게 들었고-교수님께 사랑받았던-과목이 '여성학'이었지요.그러고 보니 아는 친구중에도 여성학 선생이 한분계시군요.

여성이 일상에서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억압받은 존재라는 것에 대해 전적동의 합니다.그런데 또한 여성의 억압에 여성이 '동의'해주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봐요.이건 '대중'이 독재에 '합의'를 해주는 것과 유사한 이중성인데...이 여성들이(물론 좀 기초적 페미니즘에서는 남성억압사회에 길들여져 남성성이 내재화된것이라 말하고 끝내지만) '남성중심주의'에 '합의'해주는 지점에 대한 현재적 고민과 해결법(대개 교육으로 결론지어지지만)도 생각해보게 되는군요.

새해에 바라시는 소망 이루시길 바랍니다.!!

저도 언젠가 책 한권 내는게 소원인데....돌아가신 전우익 할어버지처럼 삶과 앎이 이어질 때쯤 무언가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야클 2005-01-03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봐요오~~~ 내가 책 내시라고 했잖아요오~~~ ^^* 개인적으로는 수선홈피의 Essay글들이 참 맘에 듭니다. 꼭 내세요. 수선님! 화이티잉~~~~!!!

글샘 2005-01-04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사한 목표네요. 바라는 일 이루기를 빌어 줄게요. 대신, 너무 힘들면 무리하지 말고 쉴 수도 있으면 합니다. 안 그래도 빡센 직장에서, 더 빡센 책쓰기를 하려면 ^^ 병나기 십상일 거 같애서요.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게 부럽네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kleinsusun 2005-01-04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이어트 계명에 이런거 있쟎아요. "주위 사람에게 알려라!"

그래야 자기가 공언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도 하고, 주위의 격려도 받고 다이어트를 성공할 수 있다구요.

저도 그런 이유에서 부끄럽지만 이렇게 새해 목표를 외쳤습니당.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홧팅!

세벌식자판 2005-01-04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결과 있기를 빕니다. 화이링~~!! [^o^]/

사고뭉치 2005-01-05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방 왔는데 이 글이 딱 눈에 띄어서 들어왔어요. 저도 그 책 읽어봤는데 내가 자라온 환경도 돌아보게 되고 인간을 이해하는? 바라보는? 눈이 하나 더 생겼더랬죠. 전 책 낼 그릇은 못되고 사랑하는 사람 만나면 결혼식 안 하고 책 한 권 써서 주변 사람들한테 돌리고 가는 걸로 만족해야겠다는 생각을... 이름 기억해놨다가 책 나오면 사볼게요.


바람이되다 2005-01-06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수선님 새해 복많이 받으시구요, 올한해도 좋은일 + 소원성취 + 소울메이트 만나시길 기원할께요. 소울메이트... 저두 강력 동감+ 공감합니다. 동성친구, 이성친구 모두 진정한 소울메이트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이 많게도~!! 저는 둘다 만났습니다. ^^ 수선님께서도 빨리 만나시길 빌께요~ 꾸벅~

마냐 2005-01-13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근사해요. 저까지 두근두근임다...엄청 기대되는군요....(근데, 저 2003년인가 목표가 바로 저거였어요. ^^;; 다신 그런 목표 안 세우기로 했는데...엣, 이건 쓸데없는 걱정인가요? ^^)

오렌지향 2005-03-18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저도 오늘 수선님 글 발견하고 반해버렸어요. 용기 잃지 마시고 성취하시길..
 
기도 -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예수의 기도
작자미상, 오강남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알라딘 서재 "주인공"님의 리스트를 보고 이 책을 주문했다.
짧지만 강력한 주인공님의 커멘트.

헌신의 길을 안내하는 명저입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헌신의 길을 정확히 말해주고 있으며 대행스님께서 말씀하신 주인공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돌리는 수행법과 같습니다. 하루 3천번, 6천번 , 1만2천번의 기도로 삶을 송두리째 신께 바치는 수행법입니다. 제 실제 경험상 일주일만 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강추합니다.

"주인공"님의 서재는 명상 서적으로 가득하다.
명상, 영성, 수행이 서재의 테마다.
"주인공"님의 추천 리스트에서 성철스님 법어집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보고, 아빠가 좋아하실 것 같아서 선물했는데 아빠가 감동, 또 감동하시며 세번을 연달아 읽으시는 걸 보고 무지 기뻤다.
(주인공님,감사합니다.)

주인공님의 안목에 신뢰를 갖고 있는 나는
"삶이 달라집니다"는 강력한 추천에 혹해서 당장 책을 주문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을 따라 몇번 교회에 가본 적이 있지만
성경을 읽어본 적도 없다.
(이로 인한 무식함은 서양 "명화"를 이해하는데 치명적인 결함으로 작용한다.)

<기도>를 친구를 기다리며 읽고 있었다.
참고로 그 때 만난 친구는 신학 전공자다.

친구 : 무슨 책이야?
수선 : (책을 건넨다)
친구 : 어? 오강남 교수님이 번역하신 책이네?
수선 : 유명한 사람이야?
친구 : (뜨악한 표정으로) 오교수님 몰라?
<예수는 없다> 쓰신 아주아주 유명하신 분이야.
수선 : 어쩐지....본문 앞에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께"가 아주
인상적이더라.

오강남 교수는 자신과 <기도>와의 만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저는 1970년대 초 캐나다에 유학하면서 우연히 이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기독교에도 불교의 '염불'과 같은 종교적 수행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그 후 캐나다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종교학 개론 과목을 담당할 때에 언제나 학생들에게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 사람 조르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등과 함께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이 책을 읽은 많은 학생들은 하나같이 이 책에 나오는 순례자가 '예수의 기도'를 수행함으로써 이르게 되는 깊은 종교적 경지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보고하였습니다.제가 학생들에게 이런 책들을 읽도록 한 것은 이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통해 종교라는 것이 결국 '교리나 믿음의 문제라기보다 체험과 깨달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깨닫도록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유명한 종교학자가 쓴 책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의 기도체험기도 아니다.
이 순례기의 배경은1880년대 후반 러시아.
한 시골청년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화두로 순례를 하면서
"예수의 기도"를 알게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외우는 "예수의 기도"를 하루에 3천번,6천번,1만 2천번, 그 후엔 온 순간에 "예수의 기도"를 계속함으로써 행복감이 온몸을 휩싸는 체험을 하게된다.

이 책의 생명력은
읽는이로 하여금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다는데 있다.
특히, 기도가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된다.

새해에는
걱정하는 대신 기도하자.
간절함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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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1-01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님의 글은 읽으면 기분이 상쾌해져요.^^

야클 2005-01-0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내겐, 그리도 바쁜 수선님의 이리도 왕성한 독서량이 불가사의. 반만이라도 따라잡을 수 있도록 기도하자. 간절함을 담아서... ^^

kleinsusun 2005-01-02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따뜻한 로드무비님, 새해에도 즐독하시고 04년 보다 더 행복하세요!

야클님, ㅋㅋ 넘 웃겨요."기도하자.간절함을 담아서..." 야클님은 패러디의 대가!ㅋㅋ
 

"투명인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수선.
오전에 태업을 하는 바람에 오후에 허겁지겁 일을 하고
혼자서 늦게 퇴근했다.

동기들 모임이 Finance Center에서 있었는데
다들 일찍 나가고 혼자 8시에 터덜 터덜 걸어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목도리를 칭칭 두르고....

서울신문사 앞이었나?
어떤 할머니가 이 추운 날씨에 길 한복판에 쭈그리고 앉아
빨래장갑을 팔고 있었다.

머리는 더 이상 허열 수 없는 백발이었고,
허리는 완전히 휘어 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 옷은 다 낡아빠진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내 놓은 물건이라고는 달랑 빨래 장갑 두개.
난 핸펀으로 친구랑 수다를 떨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할머니를 보는 순간 걸음이 멎었다.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젊은 내가 털옷을 입고 목도리를 칭칭 감고 걸어가도 추운데
그 연로하신 할머니가 낡아빠진 스웨터를 입고
길 한복판에 앉아 있으면- 그것도 몇시간 째- 얼마나 추울까?

하필 그 때 주머니에 5천원 밖에 없었다.
(현금이 없어서 Finance Center 1층에서 돈을 찾으려고 했었다.)
난 없는대로 할머니께 5천원을 드렸다.
할머니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빨래장갑을 내밀었다.
난 빨래장갑은 받지 않고 답답한 마음에 할머니께 말했다.

" 할머니, 제발 들어가세요! 오늘 날씨 너무 추워요.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는데,
가다가 뒤돌아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빨래장갑을 내밀며
계속 앉아계셨다.

도대체 얼마나 추울까?
난 눈물이 핑돌았다.

동기들 모임이 뭄바에서 있었는데
그 할머니를 보고 나서
한병에 6만원씩 하는 와인을 마시고 앉아 있자니(그것도 부가세 별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오면서 친한 동기 두명에게 말했다.
그 할머니 얘기를....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고,
내 고민이 너무 사치스럽다고,
아침에 늦잠 자서 택시 타고 왔는데 그 할머니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그 때 K가 말했다.

"요정일지도 몰라."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 이제 성대리 소원 세개 들어 주는거 아니야?"

<미녀와 야수>에서 요정은 노파로 변신해서 왕자를 찾아간다.
왕자가 노파를 매몰차게 내쫓자
요정은 왕자에게 저주를 내리고 야수로 변하게 한다.
진정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날 때 까지 저주가 풀리지 않게 한다.
그것도 장미꽃이 시들기 전까지...

이 추운 날에 빨래장갑을 팔고있던 그 할머니가
정말로 요정이었으면 좋겠다.
그냥 잠시,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심을 시험해 보려고
변신한 요정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제발....
내일은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그 할머니가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할머니가 진짜 요정이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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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2-30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밥이 목구멍으로 안 넘어갑니다.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는 최소한의 일도 별로 위로가 안되지요.

그런데 달랑 고무장갑 두 켤레를 가지고 그 추운 거리에 앉아계셨다니

프레스센터 근처의 정경을 상상하니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네요.

옷이나 좀 뜨시게 입고 나오시지. 그 할머니......


kleinsusun 2004-12-30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죠? 프레스센터, 그 옆에 파이넨스 센터 다 삐까뻔쩍한데,

그 길 한복판에서 달랑 빨래장갑 두개를 내놓고 이 추운 겨울에 앉아계신 할머니.

진.정. 그 할머니가 요정이었으면 좋겠어요.

어항에사는고래 2004-12-30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요정이 있어 할머니의 겨울이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그 할머니 앞을 지나가다 오천원을 건네는 수선님의 마음처럼 제게도 한번은 그런 따뜻한 마음 가질 수 있는 겨울이 되었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kleinsusun 2004-12-30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그 할머니가 요정이었으면 좋겠어요.

이 추운 겨울에 제발 길에 앉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항에 사는 고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야클 2004-12-3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착한 일 하셨군요. 내년엔 必.승.진. 하실겁니다. 하하 ^^

kleinsusun 2004-12-31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년에 대상이 아니예요. ㅋㅋ

야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