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수선.
오전에 태업을 하는 바람에 오후에 허겁지겁 일을 하고
혼자서 늦게 퇴근했다.

동기들 모임이 Finance Center에서 있었는데
다들 일찍 나가고 혼자 8시에 터덜 터덜 걸어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목도리를 칭칭 두르고....

서울신문사 앞이었나?
어떤 할머니가 이 추운 날씨에 길 한복판에 쭈그리고 앉아
빨래장갑을 팔고 있었다.

머리는 더 이상 허열 수 없는 백발이었고,
허리는 완전히 휘어 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 옷은 다 낡아빠진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내 놓은 물건이라고는 달랑 빨래 장갑 두개.
난 핸펀으로 친구랑 수다를 떨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할머니를 보는 순간 걸음이 멎었다.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젊은 내가 털옷을 입고 목도리를 칭칭 감고 걸어가도 추운데
그 연로하신 할머니가 낡아빠진 스웨터를 입고
길 한복판에 앉아 있으면- 그것도 몇시간 째- 얼마나 추울까?

하필 그 때 주머니에 5천원 밖에 없었다.
(현금이 없어서 Finance Center 1층에서 돈을 찾으려고 했었다.)
난 없는대로 할머니께 5천원을 드렸다.
할머니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빨래장갑을 내밀었다.
난 빨래장갑은 받지 않고 답답한 마음에 할머니께 말했다.

" 할머니, 제발 들어가세요! 오늘 날씨 너무 추워요.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는데,
가다가 뒤돌아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빨래장갑을 내밀며
계속 앉아계셨다.

도대체 얼마나 추울까?
난 눈물이 핑돌았다.

동기들 모임이 뭄바에서 있었는데
그 할머니를 보고 나서
한병에 6만원씩 하는 와인을 마시고 앉아 있자니(그것도 부가세 별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오면서 친한 동기 두명에게 말했다.
그 할머니 얘기를....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고,
내 고민이 너무 사치스럽다고,
아침에 늦잠 자서 택시 타고 왔는데 그 할머니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그 때 K가 말했다.

"요정일지도 몰라."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 이제 성대리 소원 세개 들어 주는거 아니야?"

<미녀와 야수>에서 요정은 노파로 변신해서 왕자를 찾아간다.
왕자가 노파를 매몰차게 내쫓자
요정은 왕자에게 저주를 내리고 야수로 변하게 한다.
진정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날 때 까지 저주가 풀리지 않게 한다.
그것도 장미꽃이 시들기 전까지...

이 추운 날에 빨래장갑을 팔고있던 그 할머니가
정말로 요정이었으면 좋겠다.
그냥 잠시,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심을 시험해 보려고
변신한 요정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제발....
내일은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그 할머니가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할머니가 진짜 요정이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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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2-30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밥이 목구멍으로 안 넘어갑니다.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는 최소한의 일도 별로 위로가 안되지요.

그런데 달랑 고무장갑 두 켤레를 가지고 그 추운 거리에 앉아계셨다니

프레스센터 근처의 정경을 상상하니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네요.

옷이나 좀 뜨시게 입고 나오시지. 그 할머니......


kleinsusun 2004-12-30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죠? 프레스센터, 그 옆에 파이넨스 센터 다 삐까뻔쩍한데,

그 길 한복판에서 달랑 빨래장갑 두개를 내놓고 이 추운 겨울에 앉아계신 할머니.

진.정. 그 할머니가 요정이었으면 좋겠어요.

어항에사는고래 2004-12-30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요정이 있어 할머니의 겨울이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그 할머니 앞을 지나가다 오천원을 건네는 수선님의 마음처럼 제게도 한번은 그런 따뜻한 마음 가질 수 있는 겨울이 되었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kleinsusun 2004-12-30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그 할머니가 요정이었으면 좋겠어요.

이 추운 겨울에 제발 길에 앉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항에 사는 고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야클 2004-12-3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착한 일 하셨군요. 내년엔 必.승.진. 하실겁니다. 하하 ^^

kleinsusun 2004-12-31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년에 대상이 아니예요. ㅋㅋ

야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