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다니면서 한 번도 화내본 적 없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화까지는 아니라도 짜증 한 번 내본 적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러 명이서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꼬이고 열 받는 상황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아무리 혼자서 온갖 교통법규 다 지켜 가며 운전을 해도,
뒤에서 비틀비틀 불안하게 따라오던 차가 쿵~하고 박아 버리면 그만이다.

회사 일도 그렇다.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삶은 계란을 세 개나 먹었는데 마실 물도 사이다도 없는 것 같은
황당하고 암담하고 목이 멜 것 같은 상황들이 발생한다.

운전하다 욕 안 해본 사람 없는 것처럼,
회사 다니면서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를 항상 실천한다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내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목소리 한 번 높히지 않는 사람,
궂은 일 혼자 다해도 미련하다 싶을 만큼 생색내지 않는 사람,
자기 잘못 아니라도 시비를 따지지 않고 일 처리 먼저 하는 사람,
자기한테 어이 없이 소리지르는 사람한테도 끝까지 예의 바른 사람.

회사 선배인 천사표 K과장 얘기다.
정말....이런 사람 없다.
한 겨울의 주머니 난로처럼 누구에게나 따뜻한 사람이다.

K과장은 41살 말띠.
예쁜 아내와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애들이 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둘 다 초등학생이다.

천사표 K과장이 회사에 나오지 못한지 벌써 한 달.
K과장은 지금 간암으로 투병중이다.

한 달 전,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다가
정밀검사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입원을 했다.
조직검사를 하고 며칠 결과를 기다릴 때만 해도
"급성간염" 이겠지...했다.
그런데....암이란다.
무슨....이런 일이 다 있지?

병문안을 갔다가 마음이 내려 앉는지 알았다.
부인은 눈이 튕튕 부어 있었는데,
그 힘든 와중에도 애써 웃으며 음료수를 권했다.
마음이 저릿저릿했다.

잠깐 앉아 있다 나오는데 부인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손을 잡고 "언니, 힘내세요!" 말했더니
깡마른 K과장의 부인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나도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살면서 남을 위해 기도해본 적이 많지 않다.
참....이기적으로 살았다.

나를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했다.
끝까지는 못했지만, 삼천배도 해본 적 있다.
그 때 난 백조였다.
실업자 올드미스가 되면 어쩌지...하는 조바심과 두려움에
밤을 새워 간절히 절을 했다. 다리 아파 죽는지 알았다.

삼천배하고 며칠 후, 지금 회사 포함 세 군데 회사에서 한꺼번에 연락이 왔다.
불보살님의 가피를 입은 건지,
면접했던 회사들이 한꺼번에 발표를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실업자 올드미스 될까 봐 가슴 졸이던 나는
세 회사 중 어디를 갈지 주판을 튕기며 고민했다.

요즘 K과장을 위해 기도한다.
내 어설픈 기도가,
남을 위해 기도해본 적 거의 없는 내 어설프고 서투른 기도가,
아주 조금이나마, 아주아주 조금이나마 K과장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K과장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 천사표 K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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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6-05-17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스크롤 내리는데... 눈물 나 죽겠어요.
저도 간절히 쾌유를 빕니다. 힘내세요, K과장님.

kleinsusun 2006-05-17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감사합니다. 천사표 K과장님의 쾌유를 간절히 바래요.

hnine 2006-05-17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K과장님, 저랑 동갑이신데...
꼭 쾌차하시길 저도 빌어봅니다. 기도드릴께요.

다락방 2006-05-17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서빨리 나으셔서 천사표 K과장님께서 수선님께 활짝 웃어보이셨으면 좋겠네요. 정말 가슴 아픈일이예요 ㅜㅜ

혜덕화 2006-05-17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모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저도 그 기도에 동참합니다._()()()_

비로그인 2006-05-1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식으로 감정표출하지 않고 안으로 묻어둔 것이 암됐나봐요.

잉크냄새 2006-05-1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간절한 마음이 전달될 것이라 믿어요.

마늘빵 2006-05-1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서 나으시기를... 그런 분이 암이라니.

글샘 2006-05-17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천사표들은, 맨날 먼저 데리고 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41세, 말띠... 화 안 내는... 저도 요즘 몸이 좀 피곤한데요...
건강검진이 늘 두려운 건, 저만이 아니겠지요. 수선님의 마음과 그분이 쌓으신 공덕이 암정도 충분히 이겨내고 함께 사실 수 있을 겁니다.

moonnight 2006-05-17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오랜만이에요. 하며 뛰어왔는데.. 맘이 많이 아픕니다. 수선님의 간절한 기도가 꼭 힘이 될 거라 믿어요. 최근, 제가 아는 어떤 분도 사십대 초반의 나이에 간암으로 투병중이세요. 두 분 다 쾌차하셔야지요. 저도 함께 기도할께요.

Mephistopheles 2006-05-17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매피스토입니다..
사회생활하면서 저런 분 만나는 건 정말 행운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수선님과 그 과장님의 만남이 오래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건강한 모습으로요...

nada 2006-05-1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 과장님은 병상에 누워서도 난 괜찮아, 하며 부인께 미소지으시지 않을런지.. 또 그 미소를 보는 사모님의 가슴은 얼마나 찢어질까요. 말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희망이 없을까요? 아 얼릉 황우석이든 누구든 줄기세포 만들어 주셈... 오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게 슬퍼서 줄기세포가 필요해요..

마태우스 2006-05-1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K과장님을 위해 빌어드릴께요. 본 적은 없지만 님이 좋은 분이라면 필경 그럴 거니깐요. 글구...님은 올드미스가 아니라 올드미스코리아,랍니다.

BRINY 2006-05-1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신임 선생님과 수선님 글과 비슷한 주제로 한참 얘기했는데...저도 K 과장님을 위해 빌어드릴께요.

kleinsusun 2006-05-18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감사합니다.^^

다락방님, 네...천사표 K과장님의 환한 미소가 그리워요.

혜덕화님, 감사합니다.저도 간절히 기도할래요.

나를 찾아서님, 마음이 아파요....

kleinsusun 2006-05-18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감사합니다.^^

아프락사스님, 그죠??? 왜 그런 시련을....

글샘 선생님, 요새 많이 피곤하세요? 건강 잘 챙기세요. 정말 건강이 최고예요.^^

달밤님, 넘넘 오랜만이예요. 41살에 암은 넘 잔인해요. 체육대회에서 만났던 K과장님 애들이 자꾸 생각나요. 제발.....나으시길....

kleinsusun 2006-05-18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처음 인사하네요. 물론 다른 서재에서 만난 적은 많지만요.^^
네...건강한 K과장님을 보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메피스토님.

꽃양배추님, 줄기세포에 희망을 걸었던 환자들이 생각나네요. 마음 아파요....
병문안 때, K과장님이 자기 책상 안 빠지게 잘 묶어 두라고 농담을 했는데 정말 마음이 저릿저릿했어요.

마태우스님, 감사합니다.근데....코리아건, 유니버스건, "올드" 미스인건 어쩔 수 없네요.ㅎㅎㅎ

BRINY님, 감사합니다.^^

2006-05-18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