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추위를 싫어한 펭귄 - 디즈니 그림 명작 디즈니 그림 명작 5
계몽사 / 계몽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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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그 펭귄의 이름은 파블로. 뽀로로도 핑구도 펭수도아닌 파블로. 나는 따뜻한 섬에서 해먹에 누워 썬글라스를 끼고 있은 파블로를 제법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은 까먹었지만 별난 그가 행복해졌다는 것 만큼은 기억에 남아서 언젠가는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거진 삼십년 흘러 우연히 만나게된 이 동화책의 마지막 문장은 “다시는 춥지 않을 거예요” 였다. 그렇구나. 파블로는 춥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단지 그것, 그것을 원했고 그것을 이루었구나.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의 어려움과 친구들과의 이별이 외롭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과 끝없이 흘러가면서의 막연함과 이제야 살것 같음과 그리고 비로소 춥지 않아지기까지. 어릴 때는 재밌기만 했었는데 삼십년이 흘러서 읽는 동화책은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담뿍 담고있는 띵작이었더란다.

이 동화의 이름은 ‘추위를 싫어하는 펭귄’이었다. 싫은 것을 견딜 필요가 없다. 조금 외롭겠지만 그러하다. 빙하를탄 파블로는 밤바다를 건넌다. 어릴때는 마지막 장면만을 기억했지만, 이번에는 이 장면을 기억하기로 했다. 막연한 무언가를 위해 고독을 견딜줄 알고 싶다. 서른해가 지나도 여전히 존경스러운 파블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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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5-11 14: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파블로 멋진 펭귄이군요. 이제 짝만 만나면 될듯 ㅎㅎㅎ

공쟝쟝 2021-05-14 18:18   좋아요 2 | URL
시대를 풍미한 많은 펭귄들 중 가장 외롭지 않을(?) 펭귄인걸요!! ㅋㅋ 그래서 멋진!

미미 2021-05-11 18: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야자수 아래 파블로 부럽네요ㅋㅋㅋㅋ

공쟝쟝 2021-05-14 18:19   좋아요 1 | URL
간지 나죠? 83년에 나온 동화더라고요. 40년 전 동화스웩~

han22598 2021-05-13 06: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파블로야! 나와 함께 따뜻한 나라에서 놀아보자.. 나는 사실 말이야..추운 날씨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데, 1년 365일 따뜻한 곳에서 살다보니. 이곳도 좋은 곳이였더라고. 친구랑 놀기에 딱이야. 사실 좋은 친구 하나면...그곳이 어디든...상관없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공쟝쟝 2021-05-14 18:20   좋아요 2 | URL
파블로 : 나도 가끔 친구들이 그립지만, 내가 불행하지 않은 따뜻한 곳에서 괴롭지 않은 마음으로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싶었어!

유부만두 2021-06-24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블로 좋네요. 담아갑니다.
그리고….
펭귄 책 하나 추천합니다 <8시에 만나!>입니다.
딱 한 권만 추천 했으니 미워하지마세요.

공쟝쟝 2021-06-24 15:16   좋아요 0 | URL
안미워할께요. 딱 한!권!이었으니까요 ㅎㅎㅎ
 


나 막 푸코 좋아했던 마음 다 회수 못하고 있었는 데 해명글 나와서... 
다.. 다행이야... (아닌가...? 부..불행인가?.. 이렇게 안 읽는게 마음 편할 수 있을 핑계를 하나 잃었!!)
무튼 언젠가 읽긴읽으려고 했으나, 덜 걸끄럽게 읽겠군... 후아....

푸코여.. 많이 실망분노했거든... 그치만 고대 그리스 철학에 너무 진심인 점과 읽지도 않은 
<언어의 7번째 기능>책의 소개글 보고 그럴 수도 있다고 단정지었어ㅋㅋㅋ

-> 쥘리아 크리스테바가 롤랑 바르트를 죽였다?!
원문보기: https://m.hani.co.kr/arti/culture/book/834297.html#csidx3d56dda3d354483b6e4c75023fc6f61

당신이 어나더레벨 천재인데 성격도 이상해보여서 오해했네...? 왜 천재는 이상하다는 편견이 있는 걸까?? 
암툰 미안해써.. 푸코여... 그래도 미워도 읽긴읽을 생각이었는데.... 나 맘편히 열심히(언젠가) 읽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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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5-11 09: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앞으로도 푸코 읽을 생각은 없지만서도, 그럴줄 알았어~~ 라고 생각한 사람이라 푸코 쏘리. 이제 쟝쟝님은 맘편히 열심히 푸코 읽으시기를!! 🤗

공쟝쟝 2021-05-11 09:44   좋아요 5 | URL
푸코 미안.... ㅋㅋㅋㅋ (공개사과중)

수이 2021-05-11 10: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푸코 나도 읽지는 않을 거 같지만 앞으로 ㅋㅋㅋ 그래도 푸코 잠깐 거짓말을 믿고 판단해서 미안해.

공쟝쟝 2021-05-11 12:39   좋아요 1 | URL
함께 사과하는 우리들 ㅋㅋㅋ
 
내가 그때 왜그랬을까
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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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서 나는 거절 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거절 당할 수도 있는 존재다. 라는 것을 이제야 본격적으로 깨닫고 있는 중이다. 난 좀 바보였다. 색맹은 테스트 하기 전 까지 자기가 색맹인지 모르는 것 처럼 나는 관계맹 비슷한 거였던 것 같다. 다른 관계가 가능할 거라는 것을 몰랐으므로 아주아주 밀착된(솔직한, 안불편한, 거리조절이 잘 안되는 가까운)관계만이 ‘진짜’관계라고 여겼다. (그런 관계들에 언제나 술이 함께였음은 최근에 뼈저리게 깨달아가고 있는 사실이다)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듣고 또 할 수도 있다 여겼으므로 인간관계 나름 자신있어! 뭐 이렇게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마저 바보였다. 맹. 맹추. 모른다는 걸 모르는 진짜 바보. 


꼭 친밀하지는 않더라도 나와 연이 닿은 어떤 사람을 내가 먼저 손절 할 수도 있다는 걸 안 것은 채 5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벌써 5년이 흘러있네?) 전문가에게 한달치 월급쯤을 쓰고 난 뒤에야 나를 감정적으로 착취하고 끊임없이 가스라이팅하는 사람들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때도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를 알고는 있었다. 나한테 너무 소중한 거라서 그게 그거 일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던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는 연락을 받지 않아 보았다. 문자도 씹어보았다. 어색했다. 혹시 길가다 마주치면 변명할 거리들을 수백가지 생각했다. 헤어짐의 초기 단계에는 그랬다.(이젠 아니다,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있다) 충분히 끊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는 데, 내 쪽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자체를 하지 못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누구에게라도 그랬다. 살면서 내 선에서 먼저 '얘랑은 절교해야지!'라는 마음을 먹어본 것은 스무살 때 정말 친했던 초등학교 동창 딱 한명이었다. (심지어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고, 오해였따) 언제나 열려있었던 나는 처음에는 좀 친해지기 어려워도 친해지고 나면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편이었다. 굳이 닫을 필요성을 못느끼는 나를 사람들은 머물렀다가 떠나가곤 했다. 항상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같은 사람이고 싶었다. 나는 떠나보낼 수는 있는 사람이지만, 떠날 수는 없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어렵다고 느꼈던 것은 제멋대로 내 경계를 넘나들면서 휘젓고 어느날 보니 멀어졌다 또 느닷없이 나타나서 헝클어 놓고 가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열에 아홉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나는 언제나 맏이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손 윗사람들에게 서툰걸까?하고 고민을 많이 했더란다. 영 아닌 것 같을 때는 사소한 반항들도 해봤지만, 그럴 때 마다 내가 예민하고 복잡한게 문제가 되었다. (지금와서 알게된 나라는 인간은 나무보다는 부레옥잠ㅋㅋ 같은 사람이고, 생각이 복잡하긴 하지만 예민하지않고 둔감한 쪽에 가깝다.)


“(95) 그들은 심오하지 않다. ‘피해자’에게 관심도 없다.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쪽이 약자가 될 뿐이다. 그들은 단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 (They do because they can.) 인간은 누구나 그들이 될 수 있다.  (…)  왜 나를 떠났을까? 왜 내가 아닌 그(그녀)지? 이건 우문도, 문장도, 질문도 아니다. 그냥 잘못된 진술, 나를 괴롭히는 지배 담론이다. 트라우마는 ‘가해자’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순간 시작된다.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같은 것은 필요없다. 전직 연인들은 그저, 이별이 한 인간의 정치학과 윤리학을 정확히 보여주는 지표일 뿐임을 인식하면 된다.”


언제나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상처받은 건 나였는 데, 상처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르겠다. 가끔 그 시절의 나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할 때의 나는 정말 깔깔깔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진지하게 생각하며 정색하는 것은 혼자 있을 때 뿐이다. 아주아주 어렵게 마음속으로 ‘이번 생에 우리 인연은 여기까진가 봐요’ 다시는 안 볼 결심을 하고난 뒤에야 그것들이 일종의 가스라이팅인 걸 안다. 


나는 후회하는가? 약간. 스스로에게 해명하고 싶은 건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취약했을까?하는 질문. 어쩜 그 질문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내가 취약했던 것은 개인의 특성(이건 읽고 쓰면서 찾아본다)도 있지만 분명 구조적인 부분(이건 분노스럽지만 이해한다)도 있었다. 내가 그랬던 것 처럼, 누구라도 내가 되면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나는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나는 나를 알 수가 없었다. 나를 몰랐기 때문에 그도, 그들도 알 수가 없었다. 근데 그게 나였고, 부정? 부정할 수는 없고, 분노? 글쎄 그냥 그건 나니까. 그때 그건 나니까. 그건 비극이지만 역시 웃긴 비극이랄까. 웃게 된다. 


웃지만 헛헛한 나는. 나는 일기를 쓴다. 나야. 왜 난 나를 몰랐니. 왜 내가 나를 몰랐을까. 그 때의 나야. 나는 나를 알았어야지. 나라도 나를 알았어야지. 또 다른 내가 말한다. 모르긴 뭘 몰라. 알았지. 딱 그 만큼을 알았겠지. 더 알려고 노력 안했던 거지. 인정받고 싶었으니까. 사랑받고 싶었을테니까. 나를 아는 것보다 그게 훨씬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 요즘엔 덜 쓰는 편인데, 한 일주일 신나게 나여 왜그랬니를 쓰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왜’를 묻는 빈도가 매우 줄었다는 거다. 가끔 트리거가 눌리면 떠올려지긴 하지만, 생각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더는 “사로잡혀”있고 싶지 않으니까다. 


“(101) 그러나 애초부터 원인은 없었을뿐더러 있다 해도 대단히 복합적이다. 혹 인과 관계가 밝혀졌다 치자. 하지만 그 뒤에는 ‘왜 하필 나지?’라는 더 치명적인 의문이 기다리고 있다. 악의 활동, 피해가 발생하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악의 이유를 묻게 되면 영원히 피해자가 된다. ‘왜’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부터 ‘피해자 됨’의 진정한 의미, 불행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당하는 것을 넘어 사로잡히는 것이다. 악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피해자의 자아 존중감을 파괴하는 악의 본질이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무관심으로 악의 기능을 중단시키지자. 그럼, 누가 악과 싸우나? 그건 악 자신이 할 일이다.”  


내 자신의 문제에서만 빼고(어쩌면 그것에서 도망치기 위해), 별로 도망쳐본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잠수탄 적 없음과 어떤 일에서도 도망친 적 없음이 나의 자랑이었다. 뒤늦게 모든 질문에 대답할 필요도, 모든 연락에 답장할 필요도, 모든 약속을 지킬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았고, 진짜진짜 도망쳐서 안되는 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그렇게 분노해마지 않던 잠수타는 것이 나를 지키기 위한 방법일 때가 있다는 것도. 


그걸 알게 되는 순간 잠정적인 약속처럼 챙기고 있던 굉장히 많은 관계들과 이별했음은 덤이다. 그런데 그렇게 애써 누군가를 밀어내지 않았어도, 그 시절의 나는 모두들을 다 만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듯. 지금의 나 역시도 끊고 끊고 끊어도 또 끊어낼 관계들이 생겨나 있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이제와 새삼스럽게 재평가하게 되는 의외의 좋은 사람들도 있다. 


“(107)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개 자기 자신, 가족, 연인……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내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연락해줄 사람은 거리에서 처음 만난 이라도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여기 없는 이’는 소용이 없다. 그런데 심지어 나는 돌아가신 엄마, 죽은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고 답한 것이다. 

인간이 옆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하는’이유는, 시간(미래나 과거)을 매개로한 권력욕 때문이다. 오지 않을 미래의 권력을 위해 현재 소중한 사람을 버리는 영화 속의 광해군이나 존재하지 않는 엄마와 과거에 살고 있는 나나, 어리석기가 한량이 없다.”


그 많은 이별에도 불구하고 끊어야한다는 생각을 재고해본 적 조차 없었던 마음속 깊이 소중하게 여겨온 관계가 있었다. 나는 변했고, 내가 변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오랫만에 만나 입을 떼는 순간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마음속으로만 이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도 바로 알아차렸다. 관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언제나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다. 태도가 변하지 않은 것은 나였고, 관계를 박제해두려 했던 것도 나다. 재빨리 사과했다. 네가 그대로 일 거라고 생각했어. 사과를 하고나니 이건 내가 손절당해도 할말 없겠구나 싶었다. 아니 어쩜 이미 진즉에 그쪽에서 먼저 나와 멀어지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조금 어렵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아, 그렇지. 인간관계에서 거리두기는 나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지. 내가 떠나온 만큼 너도 떠나왔을 것이다. 서글펐다. 조금 눈물이 났다. 헤어짐-멀어짐을 받아들일 때가 온 것이다.


 “(285) ‘미안’의 사유가 구조적 원인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구조에 대한 개인의 반응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실제 상황은 복잡하고 미묘하다. … 진짜 미안할 때는 할 말이 없거나 멀리서 오랫동안 미안해한다.”


친구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줬지만 복잡한 것은 내 습벽이다. 아니다. 언어에 기대는 것이 내 습벽이다. 도서관에서 한동안 필요없어 밀쳐둔 심리 에세이들을 또 실컷 찾아 읽었다. 머리로는 다 알아도 여전히 난 실전에서 관계맹이다. 별로인 사람들에게 단호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보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금세 또 내 시선으로 넘겨짚고 있다. 공감도 잘 못해주고, 위로는 더욱 못한다. (네, 제가 관계에 대해 열심히 학습하고 있으나, 역시 그것마저 학습으로만 저장되는.. mbti에서 T-사고형-입니다...)


잘 돌본다고 돌보았는 데, 다육이 화분 하나를 죽이고 말았다. 뭔가 말라보여서 물을 듬뿍 준게 문제였다. 말라보였던 녀석은 쏟아지는 물공격에 까맣게 타버린 것 같은 모양새로 죽어버렸다. 엄마가 숟가락으로 하나씩만 주라고 했는데, 봄이되서 마른 건가? 마른게 아니라 애시당초 물을 자주자주 줘서 썩어가고 있었던 거였다. 상태가 안좋아보여서 더 신경쓴게 잘못이었을지도. 내가 화분을 대하는 방식이 관계를 대해온 방식과도 닮았다는 통찰에 닿았다. 아파보이고 시들어보이면 더 자주자주 많이 신경을 쓰고, 진지해지고 심각해지고, 그게 종종 어떤이들에게는 피로감을 줬다는 생각. 말좀 해주지. 니문제 아니라고. 나 자신없어서 더 그랬던 건데. 어쨌든 이건 모두 과거의 이야기고, 난 다육과의 사람들과는 친할 수가 없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건 좀 알겠다. 


무튼 집에는 다섯개의 화분이 있다. 한달에 한번 물을 줘야하는 식물도 있고, 일주일에 한번씩 듬뿍 줘야하는 화분도 있는 데, 물을 아주 조금씩만 상태를 봐가면서 줘야하는 종류의 다육이도 있었다. 가장 먼저 제일 예쁜 다육이를 보냈다... 흑흑.. 이젠 네 그루의 화분이 남았다. 물을 애정이라고 놓고 보면, 나는 선인장과 인 것 같다. 대체로는 방치일 정도로 내버려 두다가 어쩌다 한번, 그러나 줄 때는 아주 철철 넘치도록 많이.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 빈번히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으면 부담스러워서 진득진득해지다가 뿌리부터 썩어 흘러내려 버릴 것이다. 나는 한번 듬뿍 받은 애정을 마음에 머금고 힘들 때는 조금씩 그걸 꺼내서 쓰며 살아간다. 그런 라이프스타일이 맞다. 솔직히 세상 사람들 모두 선인장 같았으면 좋겠지만, 세상엔 다육이도 있고. 요즘엔 이쁜 다육이가 대세인 것 같기도..?


“(76) 사람마다 인간관계 방식이 있다. 나는 깊고 짙고 부담스러운 만남을 원한다. 그러나 추구할 뿐 실현된 적은 별로 없다. 그런 관계로 살기엔 세상은 너무 바쁘고 나는 참을성이 없다. … 이해 관계든 진실한 관계든 어차피 모든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영원한 관계는 두 사람이 동시에 동작을 멈추거나 끝없는 자기 갱신의 매력이 교환될 때 가능하다. 전자는 죽는 것이고 후자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시간이 넘쳐났던 요 얼마간 과거의 관계 맺기 방식과 이제서야 알게된 나의 패턴을 추적해보면서, 내가 생각만큼 많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어떤 적극적인 노력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는 관계도 있다는 걸 체감했다. 한때 나는 이 관계를 잃으면 팔이 떨어져나가는 것 처럼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다고까지 생각했었다. 팔은 무슨. 고통의 강도로 치자면 아직 떨어질 때가 아닌 나흘된 딱지를 뜯는 정도의 조심스러움과 신경쓰임과 통증이었다. 이내 새살이 차오를 것이고, 우리는 멀어진 채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 


없었다가 있었다가 흔적을 남기고 이내 없어지는 것. 이것이 인연의 본질이었는 데, 난 미련해서 답답하게 뿌리내린 채로 오래오래 혹은 영원히 거기에 있고 싶어했던 건가 보다. 그래도 조금 서글펐다. 서글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한때 나에게는 내 몸처럼 아꼈던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근데 그건 그때의 이야기고. 나는 그 시절을 떠나왔으며,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지금을 산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 없던 시절들에 대해 잊을 순 없을 것 같다. 그 시간들을 보낸 건 분명 나였으니까. 내가 그때 왜그랬을까. 왜그렇게 어리석고 멍청했을까. 왜, 왜... 왜그렇게 한심했던거야, 대체 왜..

나는 삶의 다른면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분명 그랬다. 그 때는 그게 나였다. 내가 그런 나였던 게 좀 가슴이 아프다.

그렇다고 지금도 내내 가슴이 아픈채로 살고 있는 건 아니다. 지금은 지금을 산다.

- 다락방,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이 상태에 대한 페이퍼를 쓸지 말지 고민하고 있던 터에 다락방님의 서재에서 위 문장을 읽고서 다락방님의 글이 가리키는 것과 마지막에 쓰여진 문장이야 말로 지금의 내 상태를 가리키는 문장으로 훔쳐다 쓰기에 완벽하다는 😌 곤란하고 행복한 감동에 휩싸였다고 한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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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5-09 1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 나 인용당했어. 영광입니다!! >.<

저는 쟝님이 언어에 기대려고 하기 때문에 덕을 보는 사람에 속합니다. 쟝님이 언제나 언어, 언어를 언급해주어서 그럴 때마다 저 역시 그래 언어, 하고 되새기게 되거든요. 페미니즘 공부하면서 한순간 아 이것은 언어의 문제다, 우리는 언어를 공부해야 한다, 언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쟝님은 진작에 스스로 깨닫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대화가 어느 순간 언어의 문제로 흐를 때면 저는 그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배우게 돼요.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을 기대합니다.

공쟝쟝 2021-05-09 18:27   좋아요 1 | URL
이렇게 다락방을 정희진의 반열에 올려 드렸다!!!! ㅋㅋㅋㅋ 언어에 대한 사유는 조금씩 더 구체화해보겠나이다!!!
실은 요즘 한창 뭉뚱그려 덮어놓고 싶었던 어떤 시절과의 좋은이별을 위해 지내는 중이었거든요.
어제 만난 다락방님의 페이퍼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는 제가 다락방님이 아니라서 감히 알수는 없지만, 그냥 저자신을 거기에 대입해 놓고 읽어도 너무 좋았어요. 쓰는 다락방님은 가슴 아프셨겠지만, 읽는 전 걍 너무 좋았다고요. ㅎㅎㅎ
다부장님!! 일요일이 얼마 안남았습니다요!!어서 건필하세요!

새파랑 2021-05-09 18: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인간관계에 대한 공쟝쟝님의 글에 정말 공감이 되네요. 사람이 한결같기는 정말 어려운거 같다는......

공쟝쟝 2021-05-09 23:37   좋아요 1 | URL
한결같고 싶은 게 욕심이죠. 그 아집을 부릴 수 있는 건 어떤 권력이기도 하구여... 특별히 더 요즘 같은 세상에선 말이죠. 저는 시골아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답니다.

단발머리 2021-05-10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희진 선생님 글에 대한 감상을 수없이 읽어보았고 저 역시 선생님 글을 읽고 또 다시 읽는 사람이지만 쟝님처럼 잘 읽는 사람은 처음 본 듯 해요.
내가 정희진쌤 더(!!!) 좋아하지만 쟝님을 ‘정희진쌤 1등 해설가‘로 ‘임명‘합니다, 내가!!!!!

공쟝쟝 2021-05-11 13:48   좋아요 0 | URL
생의 어려운 고비를 희진님 만나 무사히 넘어왔더이다.... (아....!!!)
 

아무래도 읽다 제쳐둔 푸코 다시 읽어야 할까보다. 그치만 푸코 너무 정떨어져버렸는데…?(소아성애강간이라니요. 아오.) 그치만 그래도 읽고 싶거든. 읽을까? 아니야.. 그거 말고 읽을 거 많은데.. 시간이 많으니 별걸로 다 번민한다…? 


오늘은 빛나고 날 선 장도에 흐르는 꿀을 빨아먹는 느낌으로 권력을 다루라는 희진샘의 글에 부비적 부비적 해본다. 일상에서 나의 권력 시험 장은 고양이와의 관계이다. (응?) 느무 귀여워서 이를 악물게 되는… 대체적으로 주무시는, 만지고 싶지만 만져서는 안되는, 만질 수 있지만 만지길 원하지 않는, 만져달라고 요구할 때는 꼭 내가 일할 때인, 그릉거리는 순간 내 모든 힘을 다해 꼭 안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하아….. 


정희진 샘은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쓰신다는 데. 나는 치열하게 읽고 편협하게 쓰고 싶다. 


사실… 뭐라도 쓰자고 생각하며 컴터 앞에 앉았는데 드럽게 멍때리는 중… 술마시고 싶다… 달리기 대신 산책하고 왔는데 너무 너무 술 마시고 싶다… 내가 알콜 중독이 진짜 맞구나.. 고도 적응형 알코홀릭이 아니라.. 이쯤 되면 그냥 알콜중독이여… 술은 정말 아예 딱 끊어버려야 하는 건가…? 괴롭다… 괴로워… 



"내가 24시간 끼고 있는 렌즈(세계관)는 권력을 행사하든 권력에 희생당하든 ‘권력 앞에 선 인간의 선택’이다. 그 순간, 나의 선택. 그것이 내 인격이고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도취, 우월감, 비굴, 자신을 잊음, 도망, 회피, 공포, 저항, 민망함, 복수심……. 그래서 내가 쓰고 싶은 모든 글은 인간과 권력의 관계, 그리고 권력의 재개념화이다."
-🌝 페미니즘을 통해 권력을 이해하는 눈이 바뀌고부터는 내 인격이 참 많이 바뀐 것 같다. - P70

"미셸 푸코는 다르게 생각했다. 주권은 밑에서부터 ‘두려움을 지닌 사람의 의지’(강조는 필자)에 의해 형성되며, 권력 관계는 법이나 주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 구조 안에 널리 퍼진 수많은 관계 안에 있다고 보았다."
-🌝 수 많은 관계. - P73

"한마디로 소유로서 권력 개념이 인류의 역사를 자연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으로서 약육 강식의 역사로 만들었다. 이것이 수많은 혁명이 실패한 이유다. 진정한 혁명은 권력의 탈환이 아니라 권력의 개념을 바꾸는 것이다."
-🌝 그렇다면 어떻게? - P74

"이런 권력의 유혹과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권력이 선사하는 쾌락을 거부하는 정신력은 마치 갑자기 중독을 멈추는 경지, 단 한 번의 사랑에서 남녀 모두 사정(射精)하지 않을 절제, 평생 절실히 원했던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순간의 긴 시간과 같은 것이다. 이 결정을 좌우하는 주제는 나와 상대방에 대한 사유다. 이때 사유하지 않음이 폭력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은 정확하다. ... . 맞는 사람의 상태를 살피는 구타자는 없다. 외부 개입 없이 폭력이 중단되는 유일한 순간은 가해자가 지치거나 귀찮아질 때다. 대부분의 인간은 주어진 권력을 끝까지, 남김없이, 다 쓴 뒤에도 한계를 잊은 채 자기 엔진이 탈때까지 쓴다."
-🌝 아름다운 문장. 남김없이 쓰지 않음에 대한 이해. - P78

"인간은 인간이 만든 세상을 일상에서부터 다시만들 수 있다. 선한 권력자의 등장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권력의 재개념화다. 권력이 힘과 영향력과 통제력이 아니라 책임감과 보살핌 노동이라면 지금처럼 사람들이 권력을 원하겠는가. 이때 권력은 ‘귀찮은 노동’이다. 권력을 책임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리를 고사한다. 책임감으로서 권력일 때우리는 그것을 소명, 사명감이라고 부른다.
현대 사회의 권력은 ‘영향력 대 책임감’으로 이분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 대부분일 수도 있다. 이제 ‘고문자(좋은 경찰)’와 ‘고문자(나쁜 경찰)’가 바톤 터치를 하는시대가 아니라 ‘고문자’와 ‘피고문자’가 역할을 분담하는 시대이다. 우리는 모두 이 상황의 참여자가 되었다. 이것이 새로운 일상이다. "
-🌝 어떻게?의 답인 것 같다. 영향력이 아닌 책임감으로서의 권력. - P80

"권력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빛나고 날선 장도(長刀)에 흐르는 꿀을 빨아먹는 일과 같다. 조심스럽게 먹어야 혀를 보존할 수 있다. 그러려면 사회와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이제 권력은 선악, 힘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권력의 행위자들(agents)이며, 정확한 사용(책임, 저항)을 통해 권력의 개념을 변화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촛불 시위는 좋은 권력자를 뽑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권력자가 되는 과정이었다. 그래야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다양한 억압(계급, 젠더, 인종, 나이, 성 정체성, 국적, 건강 약자……)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는 <얼음의 집>의 주인공처럼 권력을 정확히 사용하는 예술가를 만날 확률이 거의 없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
-🌝 좋은 나 자신이 되고 싶다. 관계에서 나의 권력을 인식할 것.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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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29 0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에 부비적 부비적 너무 좋아욤~ 저도 갑자기 푸코 정뚝떨~ 한 권도 안 읽길 잘했어!(😳?)
술은 결국 드셨나요? 제가 아는 작가들은 다 술을 엄청 드시던데.. 공쟝쟝님 합격!!

공쟝쟝 2021-04-29 00:05   좋아요 2 | URL
아니요~~~~~~~~ 안 마셔요!! 저는 자주는 아닌데 마시면 못끊어요 ㅠㅠ... 이게 중독증상이래여...

scott 2021-04-29 00: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장쟝님 푸코 정떼버리꼬!
공장쟝님만의 편협하게 읽은 이야기 올려주삼333

공쟝쟝 2021-04-29 23:51   좋아요 0 | URL
어머낫! 하지만 오늘은 읽지 않았다요!

수이 2021-04-29 0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흘 동안 와인 두 잔씩 마신 1인 알콜중독 초기 증상입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금주합니다. 술 한번 빠지면 술독에 들어가는 거라 가능하면 우리 매일 와인 한 잔만 합시다. 하지만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한 병 되니 그냥 만날 때만 마십시다;;;;

공쟝쟝 2021-04-29 23:52   좋아요 0 | URL
두잔씩만 마신거잖아요... ㅜㅜ 저는 그러지 모탑니다.... 이놈의 취하도록 먹는 습관 (그러나 엥간치 안취하는 주량..)... 요즘 제일 고민이예여... 아예 안마셔야하는 건가...

2021-05-15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18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08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생이 차곡차곡 모은 스타벅스 쿠폰(?)으로 타다준 2020년의 몰스킨 일기장이 4/5는 채워져있지 않은 고로(작년에 거의 못씀) 2021년의 일기를 2020년 일기장 빈칸에 색깔이 다른 펜으로 적는 중이다(종이를 아껴쓰는 착한 사람입니다). 가끔 작년의 일기를 읽으며 어제처럼 생생한 느낌을 받곤하는 데... 2020년 4월 29일의 나는 맥주에 안주로 고로케를 세개 먹었다. 


“고로케 세개는 느끼하다. 과유불급. 두개에서 딱 끊어야 한다. 내일부터 연휴다. 나는 맥주 책 영화 그리고 또 맥주 책 영화… 상상만으로도 행복하잖아. 너무 좋잖아!! 행복은 정말 언어가 없나보다. 쓸말이 없다. 그냥 어. 음. 행복하다.”

휴일. 맥주. 책. 영화. 네가지 조합으로 언어마저 잃은 행복감을 느끼던 나를 떠올리니… 오, 역시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이 바뀌는 법. 요즘은 매일 매일이 휴일인데 영화는 볼 생각이 안들고, 책은 슬슬 지겨워지고, 맥주는(!) 주말 말고는 안마신다!! (고도 적응형 알코홀릭에서 벗어나려 미세한 노력 중) 매일 매일 행복하긴 하지만 은은한 행복이라서… 고작 3일 연휴로 격렬한 행복함을 압축해서 느끼는 당시의 일기를 보니… 작년의 내가 너무 짠해😭 (정말 고생 많았다 과거의 나여) 어쨌든 일년이 흘렀고, 그 사이에 동네 고로케 집은 문을 닫았다. 코로나19의 영향이 컸겠지만, 생각해보니 그 후로 난 고로케를 사먹지 않았던 것 같아, 친절했던 주인 아주머니 죄송해요. 자주자주 조금씩 사먹는 거였는 데, 무식하게 간식을 배불리 먹고 질려서 잊고 지내버렸… 😢 모처럼 생각나서 찾았다가 문닫은 게 어찌나 안타깝던지. 겨우 1년, 쉽게(그러나 분명히 매우 어려웠을)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잠깐의 애도를.

***

또 이런 메모도 있다.

“나는 대체로 슬프고 아주 가끔 행복하다. 인생뭘까.
눈물 사이로 비치는 빛.”

작년 초봄에 술을 마시며 친구에게 이렇게나(!) 시적인 말을 해줬던 것도 떠올랐다. 당시 N번째의 시험과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스트레스로 졸도를 해버린 썰을 풀며 인생뭘까 진지하게 묻던 그를 나는 쉽게 위로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 스스로도 이 악문 채 하루들을 버텨내고 있었고, 친구의 상황도 나 못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만했으면 그만두라는 말은 말이 쉬운말이라서 친구에게도 나에게도 할 수가 없었다. 때로는 견뎌야 하는 시기들도 있었고, 결국은 그만두는 결론을 내더라도 내가 나에게 지는 느낌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는 게 우리가 하는 위로의 암묵적 룰이었다.

솔직히 정말 너무너무 힘든거야. 맨날 욕먹고 야근하고 야근해도 다 못하고. 집에 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자꾸 서러워서 눈물이 터지는 겨. 알지? 나 잘우는 거. 어느 날 또 평소처럼 아 존나 힘들다 쓰바 엉엉 울고 싶다 이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차올랐는 데, 춥기도하고 차마 눈물을 떨구기가 싫어서, 눈에 힘 꽉 주고 그렁그렁 한채로 걸었다? 근데 가로등 빛이 반짝 반짝. 그래서 울락 말락 하는 와중에 그 생각이 들더라. 어, 이쁘다. 하나만 하지. 슬프려면 슬프고 이쁠려면 이쁘고. 근데 슬픈 와중에 이쁘니까. 좀 살거 같았어. 그러니까, 인생은. 인생은 원래 대체로 슬픈건데- 눈물 꽉 찬 그 와중에 뭔가 가로등 빛 같은게 눈물이 뿌연대로 보이고, 그게 보이는 나는 울다 말다 울면서 빛 번지는, 찰나, 엉? 이러면서 콧물을 막 먹으면서 그 와중에 또 이쁘다 이러고 있는 나한테 피식 웃어주는 거. 상황은 눈물나도 나한테 내가 웃어주는 건 할 수 있으니까. 그래. 오오. 근데 이거 내가 말해놓고 보니 그럴듯 한데? 나중에 써먹을테다. 앗싸. 킵킵.

일년 넘게 지난 시점에서 써먹기 위해 적어둔 두줄짜리 메모 발견하고 그날의 불행배틀 술자리를 생생하게 떠올려버렸다ㅋㅋㅋ. 그러고 보면, 기억… 뭘까? 작년에 먹은 세번째 고로케의 느끼함은 기억이 나는 데, 무엇 때문에 눈물이 날 정도로 그렇게 힘들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난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게 맞는 거겠지? 그런데 또 울면서 봤던 가로등의 반짝임은 어제 본 것처럼 잊히지가 않고.

무튼 아주 진심으로 그 이야기를 했다. 인생 밤길에 울다가 만난 가로등 빛 같다고. 엄청 슬픈데 또 슬퍼야만 보이는 것도 있는 것 같다고. 너나 나나 지독히도 의미를 찾아야하는 의미주의자인데 힘들고 슬픈 것 자체도 언젠가는 교훈이 되겠지..? (눈치) 알아, 위로 안되는 거. 나도 위로 안돼. 미안해 ㅜㅜ 위로 안돼서.. ㅜㅜ.. 그냥.. 힘든게 꼭 힘들기만 한건 아니라능.... 인생 단짠단짠... 내 인생 짠짠짠짠짠단짠... 니 인생은 짠짠짜라자라자짠짠짠단짠짠짠.. 뭐...? 술이나 마시라고? 알았어. (한숨) 취하자! 짠!! 이렇게 아마도 우리는 재빠르게 술이나 마시고 헤어졌을 것이다.

나는 그 날의 위로에 대해서 생각한다. 친구는 아마 잊었을거다. 나도 저 두줄을 써놓지 않았다면, 저걸 꺼내서 다시 읽을 기회가 없었다면, 기억하지 못했을게 틀림없다. 어떻게든 친구를 위로해보고 싶은 마음에 아무말대잔치처럼 말로 꺼내 표현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내가 보았던 가로등 빛의 웃픈 반짝임 역시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 거다. 이 글의 시작은 어디일까? 가로등? 메모? 아니, 위로. 더 정확하게는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와 진심이었던 내 마음. 덕분에 글이 보존시켜 줄 것들은, 얻어걸린, 웃펐던 겨울의 가로등.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무상한 것, 슬픈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불편한 것들을 일상에서 만나고 언어화 시키지 않은 채로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담아둔다.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느꼈던 것들을 더 생생한 언어로 말하게 될 때가 있다. 입 밖으로 꺼내고 난 후에서야 안다. 내가 그것들을 그런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하고. 


잊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기장에 휘갈기듯 적어놓거나, 스마트폰 메모 어플에 메모해둔다. 짤막짤막한 단상들로 이루어진 메모와 문장들에 기대어 요즘의 나는 제법 긴 글을 쓴다. 썼던 글들을 읽어보면 그 느낌들을 온전하게 복구시킬 수는 없지만, 얼추 비슷하게 클라우딩 되어 있구나 싶어진다. 요 몇년간 그런 식으로 글을 써왔다(기억이 맺히는 방식으로의). 기억해 둠직한 시간들을 후루룩 쓴 복사본(노트들과 메모장에)으로 잔뜩 가지고 있는 편이다. 예전 일기는 더는 당하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고발 리포트 느낌이 강했으나, 요즘의 일기는 행복해지는 방법에 관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아, 요즘의 나는 행복의 순간에 오래오래 머무르고 싶어하는 구나.

***

반대의 경우에도 쓴다. 어떤 대화의 순간이(좋고 싫고와는 별개로) 인상적이었다면, 집에 돌아오는 길부터 때때로 길게는 한달 까지도 내 안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말들이 빼곡히 쌓인다. 대화의 상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나자신에게 되짚어 물어 보아야할 질문들이라는 걸 알게된다. 나는 또 그 질문들을 메모해둔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질문 자체를 해석하는 글을 써본다. 이 경우는 쓰면서 점점 더 명료해지는 편이다. 쓰지 않았다면 기분이나 인상으로 휘발되어버릴. 글로 적어 내리다보면 열에 일곱은 엇비슷한 내용임을 알게된다. 나 자신이 결론일테니 결국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이 쪽의 글 이란 쓰는 과정 자체가 즐거워서 시간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즐겁다. 비슷한 방식으로 서재에 독후감을 쓴다. 어떤 책이나 문장을 만나고 왜 거기서 눈길이 멈추었는지 나에게 거듭 물어보면서 떠오르는 심상들을 적어보는 것이다.

기억 - 사람 - 질문 - 해석 - 글 - 기억 - 사람 - 질문 - 해석 - 글

치킨을 먹기위해 만난 독서가들은 소설 읽기에 각자의 포인트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포인트를 듣는 것은 너무 즐거웠다. 각자들의 포인트를 훔쳐서 그런 기분으로, 그런 눈🥺을 하고서 읽고 싶어졌다. 아마 나는 또 내 멋대로 오독하겠지만, 오독과 오독 사이에서 확인되는 서로의 다름이 언제나 기꺼웠던 것은 우리, 책에 대해서 만큼은 진심이니까. 진심은 통한다. 아아, 상투적인 표현이라 서글프다... 상투적 ‘진심 통함’이 아니라 각자의 진심들이 있으면, 달라도 어딘가는 통해서 그 다름이 더 사랑스럽다는 그런 이야기다. ... (아, 이역시 상투적이야.. 지울까?)

몇개 째의 닭 조각을 삼키고 배가 부를 때 쯤엔 구관이 명관, 간장맛이 나는 순살 치킨은 역시 교촌이 최고인 듯 하며 속으로 궁시렁댔다. 톨스토이도 도스트도예프스키도 읽지 않았지만 여전히 읽을 생각이 없는 게 전혀 부끄럽지 않은 나는 오로지 최은영에 대한 팬심으로 “소설가는 맘 속에 하고 싶은 어떤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 같아여!!!” 라고.. 말해.. 버렸다. 톨스토이와 쿤데라와 제임스 설터와 줌파 라히리(이름도 어렵네) 사이에 갑분 최은영 던지기!!! (작가님 미안. 그래도 나에겐 톨스토이보다 당신이야…) 저는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읽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데, 이게 문학시간에 배운 주제찾기 이런 학습효과 일지도 모르겠지만(쭈굴), 어쨌든 제가 좋아서 비명 지르는 소설은 제가 하고 싶었던 나 자신도 모르는 어떤 이야기를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소설이예요. 그래서 저는 최은영이 짱이예요. <내게 무해한 사람> 짱....😫 내가 전하는 소설 읽기 포인트에 한 이웃은 자기도 그런식으로 좋아하는 소설가가 있는 것 같다고 동조했고 다른 이웃은 신기해했(던 것 같)다. 뭐, 나는 항상 그래왔듯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그런 방식으로 소설을 읽고 있었구나, 하고 알아차려버렸고. 어쩐지 최은영까이면 내가 까인것 같더라니…. 엉엉, 그런데 내 마음 같은 최은영 작가님 다음 소설 언제나와요…? 


나의 자랑스러운 책에 미친(?) 이웃들은 자연스럽게 ‘쓰는 사람’으로서 읽게 되는 지점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는 데, 맙소사 그 이야기들도 너무 신기했다. 저렇게(방식) 읽으니까 그렇게(양) 읽을 수 있었구나. 우리 자주 만나요. 저랑 많이 놀아주세요!!! 우리집에서 비록 1시간 45분 걸리지만 저 자주 놀러올수 있어여!!😤

전두엽과 측두엽에서 이 사람들을 붙잡아!!라는 신호를 보내는 게 느껴졌다. 그래 언제까지 내 뇌를 알콜과 맛있는 것으로만 행복하게 할 수는 없지. 좋아하는 걸로 대화하는 거 너무 좋잖아!! (명랑한 은둔자 2달째.. 사람 그리웠구나 나..) 엄청 행복해하며 이야기 듣다가 나는 그다지 ‘쓰는 정체성’을 가지고 글을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되서 적잖이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쓰지? 이런 글을 쓰고 싶다!’ 는 물론 있었지만(cf. 정희진, 푸코, 양효실, 정성일, 보부아르, 엄기호, 김혜리, 신형철 - 대부분 에세이 or 사회과학, 순서는 애정도 순서)… 이것은 사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하지? 나도 이렇게 생각해보고 싶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뇌에 즐거운 자극을 주는 이웃들로 부터 파생되기 시작한 질문 하나.
쓴다.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쓰는 사람’으로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이 여기에 닿자 조금 소름이 끼쳤고, 어렴풋이 그것은 굉장한 자기학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와, 시기심과, 비교와, 약간의 안도와, 결국은 또 질투와, 자기부정과, 시샘과, 질투와, 또 질투로, 점철된!!!!!!! 똑똑. 여보세요들. 많은 작가님들? 혹은 작가지망생, 예비 창작자님들아..? 당신들의 속 안에 어떤 독한 것이 앙금처럼 맺혀있을지내 모르겠으나.. 인생이 뭐냐면요.. 아아, 그것은 눈물 사이로 비치는 빛이라오. 독기 뺄려면 많이 우세요.. 토닥토닥.. (또... 슬퍼짐.. 아, 그 인생 살지도 않았는 데, 생각만으로도 너무 슬퍼😭)

***

난 다행스럽게도 나를 알기 위해서만 쓴다. 썼던. 것. 같다.
내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 서른 살 이후 부터는 더 그랬다.
질문을 조금 더 파고 들어가보자. 내가 쓰는 중심 이유가 나를 알기 위해서였다면, 나는 왜 이토록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일까. 본격 일기쓰기 만4년, 오늘에 와서야 슬쩍 대답해봐야겠다.

오랫동안 자신을 없애 나를 먹이는 헌신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 나는 성인이 된 후 사랑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을 어렵사리 폐기처분하면서, 사랑하지 않고-존재하고-싶다 생각했다.

‘사랑=(인어공주처럼)물거품이 되는 것.’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내게 체화된 사랑의 능력이란 게 그런 거였다. (바란다, 내게 인이 박힌 일종의 고정관념을 남을 생을 다써서라도 바꿀 수 있다면.)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있고’ 싶었다. 어떻게 ‘있을’ 것인가? 이제와 끼워맞춰보는 것이지만 나는 내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 때마다 몰래 일기를 썼다. 나는 왜 이모냥일까로 점철된, 대체로 사랑하는 게 힘들고 슬퍼서 쓰는 글이었다. 어쨌든 글을 쓰고 있을 때라도 가장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또한 나는 기억하고 싶었다. 그 기억이 생생할 수록 적어도 당시의 나는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기억을 글로, 글을 기억으로 남겼다. 그렇게 해두면 물거품처럼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있고 싶었다. 내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최근에 울컥한 아이유 노래 가사처럼) ‘겨우 내가 되려고’ 써왔다는 사실을 느끼는 지금, 안도한다.

나를 ‘있는’ 존재로서 자명하게 대하는 것이, 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큰 과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요즘들어 공부하는 페미니즘과도 매우 맞닿아있는 것이라 앞으로는 의식적으로라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질끈 마음 먹어 본다. 이는 스타일을 구축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사라지고 싶지 않다, 존재하고 싶다’는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지만.


이 글은 <메두사의 웃음> 때문에 썼다. 드디어 페미니스트들의 인용글로만 접하던 엘렌 식수를 만나버렸다. 통째로 밑줄을 다 그어서 그냥 안 긋는 게 낫지 않을까? 거듭 읽고 싶었고 문득 쓰고 싶었다. 끝없는 분열을 쓰면서도 명료해지길 원해 부끄러워하던 내 과거의 글쓰기가 사랑스러워지려했다. 나는 불분명한 채로, (알수없음)의 괄호 속에 묶어놓고, ~인 것 같다로 언어의 끝을 애매하게 흐리면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로 판단을 유보시키더라도 글을 써보기로 한다.

묶어두지 않은 채로 쓰기. 존재하기 위해 쓰기. 나 자신을 쓰기. 내 몸을 쓰기.
이미 쓰고 있었지만, 쓰는 사람이 되기.

















“(19) 그대 자신을 글로 써라, 그대 육체의 목소리가 들리게 해야만 한다. 그러면 무의식의 거대한 자원이 분출할 것이다. … 글을 쓴다는 것은 행위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여성에게 자기 고유의 힘에 접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여성과 그 성, 여성과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존재와의 탈-검열화된 관계를 ‘실현’시킬 것이다. 탈-검열화된 관계는 여성에게 여성의 행복, 여성의 기쁨, 여성의 기관들, 봉해진 채로 유지되어 왔던 여성의 거대한 육체적 영역을 되돌려줄 것이다. 또한 글을 쓰는 행위는 여성은 죄인이라는(여자는 매번 모든 것에 대해 유죄이다. 욕망을 가져서 죄, 욕망을 갖지 않아도 죄, 냉담한 죄, 너무 ‘뜨거우’ 죄, 동시에 둘 다가 아닌 죄, 지나치게 어머니인 죄, 충분히 어머니이지 않은 죄, 자식을 둔 죄, 자식을 갖지 못한 죄, 먹을 것을 먹인 죄, 먹이지 않은 죄…) 늘 똑같은 자리만 마련되어 있는 초자아화된 구조에서 여성을 끄집어 내 줄 것이다. ... 반이성적인 무기를 벼루어 가지기 위해 글을 쓰기. 모든 상징 체계 속에서, 모든 정치적 절차 속에서 여성 마음대로, 여성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해 관계자, 전수자가 되기 위해 글을 쓰기.” - <메두사의 웃음/출구>, 엘렌식수 -

“(443)엘렌식수는 여성들에게 그들 자신들을, 즉 생각할 수 없는 것/생각되지 않는 것을 글로 표현할 것을 촉구했다. 엘렌식수가 여성 자신의 것이라고 확인한 그러한 종류의 글쓰기(표시하기, 낙서하기, 휘갈겨 쓰기, 메모하기)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항상 변화하는 강을 연상시키는 움직임을 내포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엘렌 식수가 남성과 연관시킨 글쓰기는 이른바 축적된 인류의 지혜를 총망라한다. 남성적 글쓰기는 사회의 공식적 승인 도장을 받았기 때문에 너무나 큰 책임을 지고 있어서 변화하거나 이동할 수 없다. -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로즈마리 퍼트넘 통 외-”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자신을 아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에서 나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어떤 대상과의 동일시인 정체성(正體性, identity), 누구나 지니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거나 부정되는 당파성(partiality, 당파성은 영어 표현 그대로 부분성이다). 끝없이 변화하는 과정적 주체로서 유목성,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위치성(positioning), 글과 글쓴이와 독자 사이의 사회정치적 맥락 상황, 흔히 성찰로 번역되는 재귀성……. 이 책을 읽으면서 위의 개념들을 떠올리면 가성비 높은 독서가 될 것이다.
내가 알고 싶은 나, 내가 추구하는 나는 협상과 성찰의 산물이지 외부의 규정이어서는 안 되므로/아니므로 우리는 늘 생각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글은 그 과정의 산물이다.” -알라딘 eBook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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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1-04-27 12: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쓰기의 시작지점에서 이 수준이라면 1년쯤 뒤에는 거장 되겠네?

공쟝쟝 2021-04-27 12:30   좋아요 2 | URL
이웃님의 읽는 스타일을 들어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 스타일이란 무엇인가. 글쓰기란 무엇인가.

새파랑 2021-04-27 12: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왠만한 에세이 보다 더 재미있고 잘 쓰신 것 같아요 ㅎㅎ
무엇보다 최은영 작가님에 관심이 가네요 ^^

공쟝쟝 2021-04-27 13:09   좋아요 3 | URL
ㅠㅠ 저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읽을 수가 없을 정도로 과몰입...하기 때문에 아주 조심히 읽고 또 가끔 그리워 빼들어 한 줄만 읽고 덮어요.... 정말 제게는 유해한 최은영님... 사랑합니다.. (댓글에다 대고 또 고백해...)

단발머리 2021-04-27 13: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무 일 없이 누워서 읽다가 벌떡 일어나 앉아서 마무리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작은 메모, 기록들, 짧은 일기, 긴 일기, 핸드폰 속까지 삭삭 뒤져서 ‘쓰는‘ 쟝쟝님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전해주세요. 진지한 독자, 집중해서 듣는 쟝쟝님의 독자가 될께요!!!

공쟝쟝 2021-04-27 13:12   좋아요 2 | URL
단발님...................... 최고다....... 제가 방사형으로 쏟아낸 이 글에서 제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뭔지 제대로 캐치해버리시다니 ㅜㅜ 나 이런 독자 가진 쓰는 사람인거야??? (행복해서 운다) ....... 맞아요. 저. 흩어져있는 그 것들 표현인지도 몰랐던 그 부스러기들이 식수가 말하는 여성의 글쓰기였다는 거 보고 심장이 짜릿해서 이거 썼어요...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덥썩... 단발님 사랑해 ㅜㅜ

단발머리 2021-04-27 14:35   좋아요 3 | URL
아이러브유! 😍😍😍😍😍😍😍😍😍😍😍😍😍😍

모나리자 2021-04-27 14: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부터(뒤늦게)ㅎ 정희진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인용하신 문장을 보니 책에서 느꼈던 그분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공쟝쟝 2021-04-28 18:49   좋아요 2 | URL
정희진슨샌님을 좋아하신다면, 모나리자님은 인생의 단짠을 즐길줄 아시는 분이라 생각되옵니다. 절절하게 함께 읽어요!!

라파엘 2021-04-27 15:1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는 제가 보고 배워야 할 분들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저도 ‘쓰는 사람으로서 읽는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으면 좋겠네요. 좋은 글을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공쟝쟝 2021-04-28 18:56   좋아요 2 | URL
라파엘님 반갑습니다. 알라딘 서재라는 곳이 주는 독특한 매력이 있지 않나요? 사실 책벌레라는 종족은 한반에 많아야 두명 정도였던 희귀종족이기도 해서... 저는 이 날까지 책읽는 친구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거든요.. 뒤늦게 알게된 이곳은 읽고 또 쓰는 것에 너무 진심이고 독려해주는 분위기가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붕붕툐툐 2021-04-27 22: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출판은 언제 하시는 거예요? 그거죠? 그거 맞죠? 책 낼려고 회사 그만 두신 거잖아요~🙆

공쟝쟝 2021-04-28 18:58   좋아요 2 | URL
이제 진심으로 써보려고 하는 새싹에게 책이라니....(하지만 어마어마한 칭찬이라 몸둘바를 모르겠다) 😝 회사는 힘들어서 그만 둔거예요. 오늘도 알차게 놀았답니당!!! 깔깔

scott 2021-04-27 2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장쟝님
고로케 3개 이상 먹는 1人

일단 요기에
공장쟝님 출간 예정작
예약 축하 꽃다발 놓고감
 〃∩ ∧_∧
 ⊂⌒( ・ω・)
  \_ っ💐c

공쟝쟝 2021-04-28 19:00   좋아요 2 | URL
얽, 고양이가 꽃을 놓고 갔네? 두리번 두리번~ 줍줍!! 🪴화분에 심어서 잘 키워봐야지 ^^

수이 2021-04-28 1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멋진 이 사람들. 치킨 먹으면서 어떻게 그런 심오한 이야기를 마구 나눌 수 있었던 거죠. 아 치킨 모임 못간 1인은 웁니다. 쟝쟝님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아침이야. 은둔 생활 당분간 지속하면서 다음번 치킨 모임에는 꼭 불러주셔요.

공쟝쟝 2021-04-28 19:01   좋아요 1 | URL
은둔생활 중인데 왜 또 이번주만 약속 세개 됐지?.... ( 저 은둔 지겨워 졌나봐요... 악.. 앙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