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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일 ㅣ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평점 :
A의 이야기를 A가 된 것 처럼 듣는다.
모두가 답을 척척 맞추며 잘남을 인정 받는 그 공간에서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한없이 한없이 바보 멍청이가 된 것 같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 박아서라도 콩콩콩 두더지처럼 사라지고 싶었던 A가 짠해서 울었다. 같이 울었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면 얼굴 아니 온 몸이 화끈 거려서 지구를 우주를 탈출하고 싶다고 그 애는 말했다. 그걸 가장 피하고 싶어. 매주 반복되던 골든벨 시간. 그걸 피하려고 살아온 것 만 같아,라고.
누군가의 어떤 마음도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지 않아진다. 어떤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상황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어졌다. 다만. 느끼지 않으려고 할 때, 오로지 그것만이 목적이 될 때. 기를 쓰고 애를 쓰고 온 에너지를 다 써서 그것을 거부할 때. 삶이 복수를 한다는 것도 알아버렸다. 우리는 느끼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것을 느껴야 하니까. 까닭은. 그 때와 다른 내가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서글픈 반복 강박의 진실이며. 때로는 배우지 않기 위해 자라지 않는 방법을 택하고 싶다.
비비언 고닉의 <끝나지 않은 일>
당연히 당연히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끝 없이 끝 없이 수다를 떨 수 있을 것 같았고.
너무도 너무도 지혜로워서.
한 없이 한 없이 나의 읽기를 갱신하고 싶은 그런 독후감들이었다.
이웃들의 페이퍼를 읽으면서 나도 책이 준 것들에 대해 적어두마 싶었다. 내가 꼽은 문단 하나는 일단 이것.
“(93) 감정을 두려워하는 그 심리야 말로 우리가 서로의 영혼을 자근자근 살해하고 정기를 마취하고 심장을 옥죄는 원인이다. 그것이 욕망을 목 조르고 감상을 욕보이며, 전쟁을 짜릿한 것으로 만들고 평화를 침울한 것으로 만든다. 내가 깨달은 게 하나 더 있다. 작품세계 전체를 놓고 보면, 산문이라는 표면 아래로 끊임없이 신경의 저류가 흐르고 그 근원엔 *심리적 손상*이 있는 작가들이 있다.”
이젠 셀프 독서광으로 정체화하고 있지만,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여전히 어렵다. 서사에 몰입하기에 머릿속이 너무 뒤죽 박죽인 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감정을 느끼기를 싫어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피상적이고 들뜬 기분 만으로 삶을 연명하기 좋은 시절이다. 슉슉 지나가는 릴스와 쇼츠, 드라마 10분에 몰아보기. 음악 조차 일하기 위한 용도로만 듣는 나는 가끔 좀 진지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개념들로 얼룩진 책을 읽고 그것들을 더듬어 분석하는 글을 적어 본다. 그 역시 주로는 머리를 쓰는 것. 뇌를 좀 지치게 만들고 나면 역시 어떤 것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던 건 아닐까. 알코올과 다른 형태의 마취? 문학을 기피하는 나는 모르는 채로 알고 있었을지도. 절반의 타협같은 느끼기/느끼지 않기의 연마로서의 독서랄까.
분명한 건 정말로 나를 흔드는 독서 경험은, 어떤 종류의 감각을 드러내는 소설일 때가 더 많았다. 그게 나와 ‘심리적 손상’이 비슷한 작가들을 만날 때 였구나 하게 되었다. 그 농도가 부담스러운 공감은 좋은 부분도 있어서. 느끼기 싫다기보다는 빠져나오기 어렵달까. 현생을 뚜벅뚜벅 살아야 하는데 감상적이고 싶지 않다.는게 솔직한 맘이다.
문득 떠오르는 소설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바턴>이다. 그 소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이 좁아져오는 느낌이 들어서 눈을 딱 감고, 꼴깍 침을 삼킨다. 음. 어떤 마음을 먹으려고 하면 여전히 심호흡을 해야한다. 마음이 먼저 아주 멀리 가 있다. 그걸 느끼기 싫어서 머리를 먼저 아주 저 멀리 가 있게 만들어 버린다. 애달프고 슬프고 그리운 마음. 마음들을. 느낄 여유를 내가 나에게 줄 수 있기를.
어떤 소설들을 정말로 읽기 위해서는 더 살아야 하며 더 겪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읽고 싶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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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다른 문단은 좀 뻔하지만.
“(141) 페미니즘의 관점들은 여성을 복속시킨 사회적 관습의 중핵에 자리한 불안과 방어기제를 분석했고 그렇게 결국은 인간의 조건의 총체를 다루었다. 남자가 완전체 인생을 살 용기를 낼 수 있게끔 여자는 반쪽짜리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 협약은, 저 깊이 흐르는 불안이라는 관점을 통해보자 별안간 이해가 되었다. 이런 불안 때문에, 우주에서 인간은 혼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더라도 제정신으로 그 주장을 밀고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의 고독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성차별주의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인식, ”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더 똑바로 마주하고자 했던 불안과 방어 기제를 다루고 있어서, 고닉 성림한테 이해받은 것 같아 뿌에엥- 울었다. 이 주제로 친구랑 이야기하다가 살짝 서운해질 뻔했는데.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 조금 다른 질감의 고독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뻔한 말이 아니다. (인용된 스탠턴의 문장들 전혀 뻔하지 않게 읽힌다) 실존 혹은 기투 그런 게 아니다. 연결과 연대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제도로서의 이성애와 가족을 (인류가 그것으로 존속해 온 까닭과 이점이 있다) 낮춰 보는 것도 아니다. 고립이 연결보다 우수하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상황 인식. 30대 비혼율 45%는 우리 세대가 감당해야 하는 조건(신자유주의, 플랫폼 자본주의...)이라는 것이고. 만연한 실업. N포. 긱잡. 번아웃. 불안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계발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안정적이지 않은 세계에서. 결혼은 물론 이성애 로맨스라는 판타지를 즐길 수도 없을 만큼 어떤 함께의 이상이 허탈하게 찢어져 버린 것에 대해. 신포도 논리도 아니고. 그냥 허심한 인정. 이랄까.
그렇다고 연결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고요. 친밀함에 대한 욕구와 합일 혹은 사랑에 대한 욕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며, 가임기라는 조건을 여성은 매달 겪기 때문에 더 시시각각 초조하긴 하지만. 포기하면 편하고. (포기하면 편해요ㅋ) 가족은 재생산의 기능과 안전함을 제공하는 기능이 분명 있으니까. 그런데 그전에 먼저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독을. 내 몫의 불안을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것이 마주 보아야 하는 현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물러설 수 없어요. 이젠 나도 나로 완전체예요. 완전체로 사회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어려웠지만. 용기를 내서 완전체가 되기로 했고. 알아 버린 것은 아프지만. 몰랐던 대가로 혹은 모르고저 한다 해서 지금의 조건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다짐하는 것이 연결을 부정하며 친밀함의 욕구를 억지로 거세시키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두려워하지 않기로 하는 것. 자유로워지는 것. 즉 불안에 익숙해지기로 하는 것.
나약해지고 싶을 때. 이렇게 다짐한다. 난 남자다. 그래서 (의식적 정신이) 남자인 내가 혐오하는 것은 가부장이 아니다. 가장의 짐을 질 생각도 없으면서 외로움은 감당 못해 친밀함과 관계를 돈 주고 사려는 남자들이다. 그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은 돈이 가장 쉽다는 진실을 끝끝내 모른다는 것. 관계와 친밀함과 돌봄과 인정은 배려의 노동이다. 섹스 역시 배려를 주고-받는 노동이다.
이젠 어떤 욕구들이 결핍되어 있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나는 부족하지만 부족한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불안을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적는 이 문장이 대단히 오만하다는 걸 안다. 자칫 능력주의로 빠질 수 있으며. 라떼는~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돌봄의 윤리를 사유해야하며. 사실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이 인생의 진짜 조건임을 똑바로 보아야한다고 어렴풋이 느낀다. 그러나. 지금의 인식에 닿기까지도 실은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조금은 더 굳히기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 조준과 겨냥을 감당 못함에 두고. 삶을 살면서 깨지면서 알아가기랄까.
1인분의 인간(남자 시민)이 정말로 1인분(뒤에는 2등시민 여성의 자연화된 노동이 있다)이 아니었다는 것을 배워 알면서도. 이토록 무리해서 1인분이 되었으니 각자의 고독을 전제하는 관습적 이성애와는 다른 각본의 연결을 도모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러나 이 인식은 솔까 정상성에 집착해 온 아직은 젊은(다고 느낍니다) 여성의 인식일 뿐. 남성도 그러고 있는지는. 이젠 정말 모르겠고. 올해 초엔 가전제품 부자 청소왕 브라이언을 보면서 희망을 (...ㅋㅋㅋ 이게 왜 여기서 나와 😩?)
읽을 때 마다 큰 성림으로 모시겠다 다짐하게 되는 비비언 고닉의 책을 매만져본다.
어떤 각본에도 기댈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나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부탁합니다.
인간의 고독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성차별주의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인식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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