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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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닌 참 낙천적이야.”
그게 싫다는 것인지 좋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말투로 동생이 말했었다. 응? 모처럼의 칭찬인가? 귀를 쫑긋했는 데 뒤에 따라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역시 비아냥이었다. 살면서 본성이 낙천적인 사람 딱 두명 봤는 데 OO과장님이랑 언니야, 차암~ 맑아~ 사람이. 왜, 그게 싫어? 아니, 걍, 그런 사람들 보면 부럽다는 거지, 나는 왜 이렇게 꼬였나 싶다는 거지.

어쨌든 낙천적이지는 않은 동생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자기는 부정적인 사람이라서 나랑 이야기하면 자기가 부정적인가 싶어서 자괴감이 들었다고. 그래서 자신과 뜻이 맞는 부정적인 친구를 사귀었는 데 둘이 아주 죽이 잘맞아서 세상을 비관하고 타인을 혐오하고 특히(!) 지인의 뒷담화를 하며 공감하는 게 정말 즐거웠다고. 덧붙여 둘이서 내욕도 많이했다고ㅋㅋ. 한동안 그 친구한테 홀딱 빠져있었는 데, 어느 날 친구 만나러가는 것을 매우 피로해하는 자신을 느꼈고 얘는 너무 비관적이어서 자주 만나면 안되겠다 싶어졌다나? 나는 속으로 말했다. 응^^, 그게 내가 너와의 만남을 한달에 두 번으로 제한하는 이유야. 동생에게 큰 깨달음을 주신 그분에게 감사함을 느꼈다ㅋㅋ

내가 낙천적인가? 스스로한테 물어봤다. 아닌데? 난 불만 많은데?라고 생각하다가 초등학교 저학년 방학 때 선생님이 써주는 가정통신문(?)에 ‘낙천적임’이라고 적혀있던 기억이 빼꼼났다. 그 때, 그 말이 뭔지 국어사전 찾아봤거든. 초등학교 저학년때 부터 낙천적이었고 지금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낙천적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나는 낙천적인 사람이 맞겠다는 결론이다. 슬픈 노래도 좋고 슬픈 영화도 좋고 특별히 슬픈 드라마는 내가 애정하는 장르지만 그건 취향인거고, 현실의 나는 대체로 잘 웃고 잘 떠드는 긍정가인 것이다. 가끔 세상에서 제일 시니컬한 독설가 모드를 장착하기도 하는 데 그건 가끔이고(-_-) 그러고 난 날에는 항상 이불킥을 한다(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라고 생각하며).

청춘시절 좌파사상에 심취하지 않았다면, 엄청난 자기계발형의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장점을 보고 교훈을 찾는 게 싫은 감정을 느끼는 것보다 수월하다. 그걸 낙천적이라고 하는 걸까? 싫어하거나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하는 게.

“(28)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살아있는 개인을 미워하지 말자는 개인적인 결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말하는 장강명쪽의 철학이자 신념이다.”

장강명씨는 결심을 해서 실천하고 계신다지만 살아있는 내 앞의 개인을 미워하지 못하는 건 나에게 성격에 가깝다.  그건 나에게 고나리질과 폭언을 일삼는 류의 개인에게도 마찬가지고(그걸 학대라고 인식한 것도 멀지않은 과거의 일이다) 대놓고 무시ㆍ질투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랬었다. (으음, 그랬었군.)

왜 그래? 라고 묻는다면 - 글쎄,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해하고 나면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보는게 맞다. 사회생활이건 일상생활이건 당장 손절 할 수 없는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면- 미워하는 데에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 이해하는 데에 에너지를 재빨리 쓰고 덜 미워하는 것이 ‘나’라는 한정적인 자원을 경제적으로 쓰는 거다, 라고 생각한다. 이래서 밉고 저래서 싫고 보단, 이런 저런 싫은 점도 있지만 요론조론 괜찮은 점도 있지 뭐. 나한테 다 맞을 수는 없는 거지 뭐~ 가 편하다. 물론 부작용도 많다. 나를 향한 대놓고 공격의 말들마저 튕겨내지 못하거나(그말도 맞긴 해), 아주 작은 친절을 확대해석(이런 좋은 점도 있었네) 할때도 있다는 거지. 확실히 스톡홀록 증후군에 취약한 성격인 것이다.....

일례로 얼마전에 단톡방에 회사에서 일어난 요론조론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했었는 데, 친구들이 다 내 대신 분노했다. 기분 안나쁘냐며 나더러 순둥이라고까지 했다. 아, 순둥이....... 망했다. 나는 자본주의에 길들어졌다. 그렇지만 역시 다시 생각해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뭐랄까. 이 정도로 기분이 나쁘면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죠?

“(29) ‘인류를 사랑하는 건 쉽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건 어렵다’는 명언이 있다. 내 기억에는 버트런드 러셀이 한 말 아니면 <피너츠>에서 나온 스누피의 대사다. 어쨌든 이 말에 썩 동의하지 않는다. 인류와 인간을 동시에 사랑하는 건 어렵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다. 인류를 사랑하고 인간을 미워하는 것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류를 미워하는 편이 더 낫다. 아주 더. 굉장히 더. 쓰는 장강명과 말하는 장강명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좇같은 화풀이의 대상이 될 때. 매일 얼굴을 봐야하는 너를 미워하는 것보다 이 상황이 가능하게 하는 세상이 싫다고. “화내서 미안.” “괜찮아요, 어떤 부분에서는 이해가 되니까.” 오해하지마. 너를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것이 가능해지는 권력의 작동방식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뜻이야. 착각하지마. 너라는 사람이 괜찮다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정도에는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괜찮다는 뜻이니까. 언제나 맥락을 읽는 것은 중요하단다.

“(54) 말하고 듣는 사람 사이에서는 예의가 중요하다. 읽고 쓰는 사람 사이에서는 윤리가 중요하다. 
예의와 윤리는 다르다. 예의는 맥락에 좌우된다. 윤리는 보편성과 일관성을 지향한다. ... 예의는 감성의 영역이며, 우리는 무례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윤리는 이성의 영역이며, 우리는 비윤리적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비판 의식을 키워야 한다. 전자도 쉽지 않지만 후자는 매우 어렵다. 직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윤리에 대해서는 보편 규칙을 기대해 볼 수 있으며, 온갖 암초 같은 딜레마를 넘어 우리가 어떤 법칙을 발견하거나 발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의는 끝까지 그런 법칙과는 관련이 없는, 문화와 주관의 영역에 속해있을 것이다.”


그가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감수성을 키웠겠지만, 굳이 그 감각을 동원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는 피곤하게 눈치 볼 필요가 없으며, 눈치 볼 상황이 적어질 수록 눈치에 속하는 감수성은 도태되었을 테니- 아마 영원히 내 언어의 맥락은 읽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길 바란다.

그러니까.... 이런 나는
정말로 낙천적인 걸까.
순둥이인가.
내 앞의 개인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일까.
.....
세가지 다 생존의 기술로 터득한 방법인 것 같은 데....
음.. 이게 진짜 착한거야?

*

지구멸망, 재기, 자살, 인류애 폭망, 그 인간 쓰레기라는 말을 달고 사는 동네 친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자리 대화 상대 중 한명이다. 그가 얼마나 개인에게 예의바르게 대하며, 착실히 노동하고, 일을 야무지게 처리할지는 안봐도 비디오처럼 알 것 같다. 그냥 봐서는 멀쩡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 입을 열면 달라지지. 아직까지 나는 그 이상으로 인류를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우리의 대화는 엄청난 블랙코메디 같아서 평소에 착한(?) 내가 구구절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살아야하는 이유를 막 설파하면, 친구는 온갖 근거들을 들어 우리모두가 자살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그럼 넌 왜 자살안하는 건데요? 그건, 언제라도 할 수 있으니깐요. 와하하하. 나는 그 친구를 만나면서 나를 덜 미워하는 방법을 배웠다. 어쩌면 그 친구는 나를 만나면서 사람을 조금은 덜 미워하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인생은 단짠단짠. 세상은 소리없는 아우성. 내가 아는 최악의 인류멸망찬성론자가 비건을 지지하는 페스코 생활을 하는 것은 일관적이면서 신기하다. 나는 말하곤 한다. “저기요, 당신 누구보다 인류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살고 계신데요?”

이건 글을 쓰며 내려보는 어떤 결론인데.
난 내 앞의 개인을 미워하지 못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성격은 종종 방향을 잘못틀어 나를 미워하는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더는 나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 나를 더 미워하다간 내 앞의 개인마저 미워하게 될 판이다.
어쨌든, 미움이라는 건 어디론가는 가야한다.
그렇다면?
인류를 미워하기로 한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류를 미워하는 편이 낫다.
역시
그편이 낫다.


*

장강명 에세이에 장강명 이야기를 아니할 수 없으니 또 장강명을 안좋아하는 이몸이 나서서 에세이 대해서도 몇마디 더 적자면

“(131) 이제 나는 내 이상형에 대해 안다. 맥주와 책을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내 인생의 두 가지 낙인데, 그중 어느 하나라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 즐길 수 없다면 참 아쉬울 것 같다. 그런데 맥주와 책을 다 좋아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나 정도로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도 대한민국 인구의 10퍼센트 미만일 것이다. 나 정도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확실히 전 인구의 10퍼센트 미만이다. 그러니까 나 정도로 맥주를 좋아하고 동시에 책도 좋아하는 사람은 백에 한 명도 안된다.”

엄마, 나 장강명 이상형됐어... 하아.... 심지어 대한민국 일프로야.

그리고 놀랍게도

“(306) 나의 친구여, 플라톤이 뭐라고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네. 중요한 것은 ‘파이드로스’라는 책에 무어라 적혀있느냐가 아니라, 문자의 영향에 대한 우리의 진정한 앎이지. 그렇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그 앎으로부터 제각기 다른 거리로 떨어져 있기에 가르침은 맞춤식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다네. 바로 대화이지. 사실 그것이 책의 함정이기도 하다네. 책과는 대화를 할 수 없으니 말일세. ....”

장강명 에세이에도 테스형이 등장해.. 읔큭큭큭..

말하고 듣는 인간, 읽고 쓰는 인간 사이에서의 진지한 고찰 -읽고쓰는 인간을 은근 위에 올려놓지만-이 돋보이는 이 에세이를 구입해 읽은 것은 이제는 들을 수 없는 동 제목의 팟캐스트 때문이다. 사실 싫어했던 작가였던 장강명에 대한 시선이 바뀐 것은 팟캐스트 속 ‘예의’를 갖추는 ‘말’하는 장강명의 인간적 매력 때문이었다. 글과 사람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글보다 사람이 나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222) 분노의 포도 같은 작품을 쓸 수 있다면 팔을 한 짝 잃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 지금은 말하는 일과 쓰는 일에서 오는 수입이 달리는 자전거의 양쪽 페달 같다. 두 페달을 번갈아가며 열심히 밟아야 프리랜서 글쟁이라는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고 달린다.”
“(228) 50년 뒤의 독자들에게 존중받으려면 우리 시대의 사람들 다수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할 테다. ... 가끔은 내가 당대를 굉장히 못마땅해한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세상이 너무 좋고 아름답고 옳은 방향으로 제대로 굴러간다고 보는 사람은 중요한 글은 못 쓸 것 같기 때문이다.”

세상과 정면으로 싸우는 작가이고 싶다는 장강명을 응원한다. 작가 장강명이 세상과 불화하려면 미디어에 좀 덜 노출되어야 할텐데, 세상이 책을 안사읽으니 문제긴 문제다. 하지만 또 생계를 도외시 할 수 없는 부류의 인간(같아보였다)이라 페달밟듯 산다고 하니 미디어에 좀 덜 나오시도록 나도 열심히 벌어서 책사서 한국문학 응원할게요! 힘내요!! 장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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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11-0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밑줄도 몇 군데 겹치고 막 읽고 이 리뷰 읽으니 너무 생생해... 쟝쟝이는 쟝걍명이 이상형이다...밑줄...나도 책이랑 맥쥬 좋아한다 첨부.........ㅋㅋㅋㅋ나도 부정적 에너지의 인간이라 뱀파이어가 되지 않도록 여기 멀리서만 쟝쟝님을 사랑하기로 한다.... 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0-11-08 22:12   좋아요 1 | URL
노노 장강명의 이상형이 나야!! 내 이상형 장강명 아니야 ㅋㅋㅋ 오독했어!!!

반유행열반인 2020-11-08 22:15   좋아요 0 | URL
아 저도 같은 의미로 쓴 건데 잘못 읽히게 썼네요. 쟝쟝이는 쟝걍명이’의’ 이상형이다 로 정정합니다. 심심한 송구함을 전합니다 ㅎㅎㅎㅎ

공쟝쟝 2020-11-08 22:16   좋아요 1 | URL
그리고 반님도 자동 장강명의 이상형이 되었다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11-08 22:18   좋아요 1 | URL
아 난 이상형보다 닮아서 꼴베기싫은 배다르고 씨다른 여동생쯤 될 듯....(그게 왜 동생이냐 ㅋㅋㅋㅋ) 쟝님도 책장 설치 정리 넘넘 수고 많았어요!!!! 이제 쟈쟈!!!!!!

다락방 2020-11-09 0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먼훗날 우리 본 것도 글 좀 써주면 안돼요? (그렁그렁)

공쟝쟝 2020-11-09 23:21   좋아요 0 | URL
영화보고ㅠ내려간 바닥이 아직 회복되지ㅜ않았소...

단발머리 2020-11-09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으네요. 내 앞의 인간을 사랑하는 게 더 낫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장강명 작가님 꼭 이 글 읽으셨으면 좋겠네요. 쟝쟝님 응원받아 힘내서 또 새로운 소설 썼으면 좋겠네요. 동시대를 넘어서는 작품을 쓰고 싶다는 장작가도 응원하고 우리 순둥이 쟝쟝님도 응원해요!!!

공쟝쟝 2020-11-09 23:22   좋아요 0 | URL
세상과 불화하는 짝 장작가 짝 힘내라 짝!

수이 2020-11-09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착하고 착하고 착한 우리 순둥이 쟝쟝님아 더 낙천적이어도 괜찮아. 더 낙천적일 수 있을 거 같아, 쟝쟝님 보면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꺅 이 글 읽으니까 소주 마시고 싶어졌어

공쟝쟝 2020-11-09 23:22   좋아요 1 | URL
소주엔 역시 치아바타를 감바스에 찍어먹어야죠 ㅋㅋㅋㅋㅋㅋ 응?

syo 2020-11-09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들 읽네, 읽어야 하는가!! 에세이의 달인인 쟝님의 안목을 믿고 간다

공쟝쟝 2020-11-09 23:24   좋아요 0 | URL
소설가들 에세이는 노잼이던 데, 장강명님의 에세이는 유잼ㅋㅋ 작가 본인이 스트레스 안받고 쓰는 장르가 분명해요..

죤보통 2020-11-20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야,,

공쟝쟝 2020-12-10 21:4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지음, 승주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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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시골에서 막 올라온 휘둥그래진 눈을 한 여자.
그녀가 자신도 몰랐던 욕망을 발견하게 될지, 혹은 너무 순진한 나머지 비참한 세상의 매운 맛을 보게 될지 아직은 모른다. 다만, 영화 <브루클린>의 주인공 에일리스처럼 혼란스럽고 외로워 할 것임을, 그러다 이내 돌아갈 수 없게 된 스스로를 알아차리게 될것임을 안다. 결국 다시 돌아가기 위해 야심찬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다. 앞에 놓인 삶이 살기도 전에 지긋지긋해서 도망쳐온, 익명의 도시에서 더 지긋지긋해진 생계와 악전고투하게 되는, 그러다 본질이 변질되버리는 이야기가 바로 내 이야기다. 지긋지긋함은 같지만 살펴보면 다르다. 두번째의 것은 내가 선택했다. 그래서 더 슬프고 더 괴롭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혹여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미 많이 변해 본질이 없으니 돌아가지 않은 셈이된다. 그러니 이 소설을 어찌 좋아하지않을 수 있겠는가. 내 이야긴데.

“(15) 안젤라는 집(좀 더 정확히는 잠시 신세지는 여자의집)으로 3번 전차를 타고 갔다. 전차는 텅 비어있었다. 안젤라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모스크바 사람들을 보려다 갑자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 왜 울어요?”라고 묻는 사람은 고사하고 그녀를 애써 위로하는 사람도 없었다. ‘인생은 길고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금씩 그녀의 슬픔에 빠져들었고, 그들 역시 어느새 훌쩍이기 시작했다. 어린 아가씨의 슬픔과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흐느낌이었다. 물론 자기 연민 만으로도 눈물을 쏟을 이유는 충분했다.”

다정도 하여라, 함께 훌쩍여주는 모스크바의 사람들. 안젤라, 2020년의 서울 사람들은 이어폰을 꼽고 스마트폰을 본답니다. 눈물은 아마 마스크 속으로 감출 수 있을거예요.

지하철에서 서울사람들을 구경하려다 갑자기 통곡이 밀려왔던 날들이 생각났다. 사연있는 젊은 여자처럼 보일까봐 고개를 푹숙였는데 사람들은 내가 우는 거 다 알았겠지. 줄줄줄 흘러가지고 닦이지도 않을 정도로 터진 눈물이 멈춰지지가 않았다. 서울 살이 4년차까진가 그랬다. 정작 운 사연은 기억 안나는 데, 여튼 기분이 비참했고, 그 와중에 서울 사람들은 너무 다들 멀쩡해 보여가지고 더서러웠고 나만 이방인같았다. ‘저는 지금 어딜가나 사람이 있어 놀라운 인구밀도와 이동하기 위해 버려지는 속절없는 시간들이 3년 째 적응이 안돼서 눈물이 차오르는 데 여러분은 이게 일상이라는 거죠?’ 4년이 지나고 나자 놀랍도록 적응이 되었다. 지금은 도시의 이 무심한 다정함이 좋다. 그것도 매우.

“(319) 마리나는 앉아서 개미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개미들은 모두 자기 힘 닿는 한, 혹은 힘에 부치는 양의 흙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등에 무거운 달걀을 이고서 일렬로 가고있었다. 개미는 무거운 짐에 눌렸다가도 계속 끌고 갔다. 가는 도중에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멈췄다 가기도했다. 아마 멈춘 그 순간에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는지도 모른다.”

이번주를 버티게 한 것은 지난주에 읽은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소설이다. 아마 올해 최고의 소설이 될 것 같다. 나도 그녀들처럼 바삐 살아내자. 이악스러운 사랑스러움. 계산을 하긴 하지만 결국은 아주 쪼꼬만 계산인. 사실은 다음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이지도 이타적이지도 않은 선택과 현실인식. 그리고 그 현실인식에 도움되는 사랑, 현실, 또 사랑들. 사랑이 지날수록 그녀들은 뻔뻔해지지만 가진 것 없는 평범한 여자들에게 뻔뻔함의 의도와 선악을 묻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96) 그녀는 두 부류의 남편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부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고, 두 번째 부류는 돈 많은 남자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남편은 아내한테 붙어서 살아간다. 그러면 여자는 둘이서 함께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물론 힘든 일이다. 반면 돈 많은 남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무례하며 결국은 아내를 버린다.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가는 당나귀로 살 것인지, 자기를 마구 짓밟고 척추를 부러뜨려도 참고 살 것인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물론 지조와 성공 두 가지를 다 갖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잃는 법이다.”

여자, 아직은 세상과 자신이 궁금한 여자. 자신을 잘 몰라 불분명한 경계선 때문에 많은 것을 침범당하게 내버려두는 여자. 혹은 침범하는 여자.

바삐 몰아치는 세상 속에서 물정을 몰라 어물쩡하던 그녀들은 살아야하고 살아있으므로, 매일매일 먼지를 닦아내고 끼니를 만들어내면서도, 가진 자원들을 재료 삼아 삶에 불어닥치는 문제들을 해결해간다. 문제는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 와중에 사랑한다. 아무튼 기운이 넘치는 여자들이다.

“(197) 마리나가 창가로 다가왔다. 루스탐을 발견하고는 그녀 역시 시선을 그의 눈높이에 맞췄다. 그들의 시선이 만나는 자리에 엄청난 양의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전기장에 모기나 딱정벌레가 앉는다면 그대로 죽어서 떨어질 것이다.”

빠지는 사랑에 속수무책인 시절을 지나 완숙해진 그녀들은 때때로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사랑하려 하거나 사랑하기로 한 것을 사랑하기도 한다. 사랑은 불가항력일까? 천만에 어떤 사랑은 전혀 어렵지 않다. 젊음 혹은 매력을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가능성과 재능을 꽃피워보려는 그들 삶의 노력방식을 십분 이해했다. 내게 그런 재능과 목표가 있었다면, 하나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으로 사는 것이 가능했다면, 뭐가 대수일까. 하나를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게. 하지만 그녀들은 다른 것을 포기하는 방식을 취하지도 않는다. 가능하면 여러가지 다 갖는게 뭐가 어때서? 만약 가능하지 않다면, 깔끔하게 손터는 것도 방식이다. 애초에 가진 게 없었으니 0이 되어도 본전이라고 속편하게 생각한다.

“(122)
“내가 성공하다니요?” 안젤라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니콜라이(안젤라의 돈많은 애인) 말이야…”
“아…….” 안젤라는 영혼 없이 ‘아’를 길게 발음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성공이 아닌 자기 자신의 성공을 원했다.”


소설은 가까운 과거의 러시아 여성들의 삶을 다룬다. 몇편의 단편을 제외하고는 한 여성의 일대기를 빠르게 크로키하고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82년생 김지영보다 농밀하게 내면을 그려낸 55년생 마라쯤이라해둘까?

소설을 덮고서 심장이다 저릿저릿했다. 삶에 대한, 퍽이나, 깔끔한 인정. 아, 참, 열심히도 살았구나. 그것은 슬프거나 애석해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과몰입할 필요도 없는 그냥 사실일 뿐이다. 가끔 너무 열심히 사는 것 같을 때, 이렇게까지?하며 억울하고 서글펐는 데. 이렇게까지해야 겨우 유지할 수 있었고, 그렇게까지해서 작게나마 얻어낸 것들을 포기할 수도 없더라. 열심, 그것은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벌을 걸친 댓가일 뿐.

한동안 내가 천착해 읽었던 책들은 어떤 부분을 잡아채며 못견딜 순간들을 견뎌낼 자그마한 단서를 제공했었다. 응시하는 글들이라고 해야하나. 그런데 살만큼 살아본 작가가 속도감있고 담담하게 그린 통째의 삶들은 그 머무름을 배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부분에 과몰입하지 않는 여성작가가 그리는 전체로서의 이야기. 나에게는 적당한 순간 적당히 찾아온 소설이었다. 부분에 천착하다 보면 과몰입하게 되고, 과몰입하는 순간 내가 가장 딱해지고 불쌍하게 느껴진다. 솔직히 술도 안마신 채로 자기연민에 빠진 어른을 보는 것은 볼썽사납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자주 술을 마시고(자기연민 좋아), 그 상태를 자책없이 유지하고 싶어 결국엔 돈을 벌고 운동을 하는 것 같다. 알콜 중독자라는 소리다..

“(133) 나타샤는 여전히 술을 마셨지만 예전과 달리 매일은 아니었다. 며칠간 마시면 오랫동안 맨정신으로 생활했다. 이를테면 3일 동안 술을 마시고, 3일 동안 숙취가 지나고, 3주동안 금주를 하는 식이었다. 의학 용어로 ‘관해’라고 불렀다. 3주에 한 번 관해는 정말 엄청난 발전이었따. 하지만 의사들은 완치를 보장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최면술 치료를 권하지도 않았다.
최면술 치료는 가장 중요한 부분에 침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방법을 사용하면 사람이 변하는데, 보통 상태가 악화되곤 했다. 나타샤가 지금처럼 근면하고 명랑하고 착한 상태로 사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맨정신으로 우울하고 탐욕스럽게 사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이었다.”

중요한 진실에 굳이 가닿을 필요는 없다. 약간은 미친채로 (그러나 미친척한다고 믿는채로) 근면하고 명랑하고 착하게 살자. 어쩜 그게 진실아닐까. 버티는 티끌에게 필요한 것은 생활과 갈증해소일 뿐! 목이마르다. 더 많은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더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사랑하고 싶어졌다. 좋은 소설이라 많이 읽히면 좋겠다. 모처럼 자신있게 추천한다.



#고양이는달에도흔들리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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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1 08: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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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1 09: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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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1 1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1 15: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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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 박상영 에세이
박상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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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나니 퇴근 버스에서 내렸고, 집앞에서 불현듯 치킨을 사버렸다. 예에 없던 강한 열망..오늘 밤은 치킨을 먹고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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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10-30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오늘 치맥했썹!!!

공쟝쟝 2020-11-01 09:38   좋아요 1 | URL
잘했업!!!!

han22598 2020-10-31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도 치킨만 먹었어야 했는데 ㅠㅠ

공쟝쟝 2020-11-01 09:40   좋아요 1 | URL
아니요! 맥주는 당연한 거라 굳이 적지도 않았습니다(단호) 맥주 없이 왜 치킨을 먹나.. 소주 없이 왜 치킨을 먹나... 치킨은 술을 먹기 위한 도구 일 뿐....ㅋㅋㅋㅋ

라로 2020-10-3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치킨 먹고 싶다.. ㅠㅠ

공쟝쟝 2020-11-01 09:41   좋아요 0 | URL
라로님은 그러시겠다ㅠㅠㅠㅠㅠㅠ ㅠㅠ 같이 통곡...ㅠㅠㅠ
 
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지음, 승주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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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소설도 너무 좋았는 데, 두번째 중편을 읽으면서는 너무좋아서 심장이 저릿저릿 했다. 난 이 여자들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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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10-27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 책이 넘 많이 쌓여져간다..... ㅠㅠ
 
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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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겨울, 적지않은 시간을 보낸 일터를 정리하고 나왔다. 어떻게든 견뎌보려 궁리했었는데, 그 궁리를 그만두면 동시에 내 있을 곳 역시 사라지는 거구나. 나라는 존재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고, 어떻게든 교체될 수 있고, 고유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은 흔해 빠진 - 흥 하고 풀고 버려지는 티슈 한 장 같은 거,구나, 했었다. 두루말이 화장지처럼 아낌없이 낭비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 번 쓰면 버리는 건 똑같은. 곽에서 뽑아쓰는 티슈. 그것도 딱 한 장 짜리.

현(실)자(각)타임 - 자유로운 모양새로 나풀나풀 땅바닥으로 하강하는 기분으로 일기를 썼더란다. “나는 티슈 한장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기분이 아주 더럽다. 내 기분과 상관없이 누군가는 또 뽑혀 쓰이기를 원할 것이고 결국 그곳은 바뀌지 않겠지.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그러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바뀌어야 하는걸까.”

분명 여기에 더 있으면 안될 것 같아 박차고 나온 것은 나였는 데, 거기엔 일말의 후회나 미련이 없는데. 왜 후련하지 않은 걸까. 이 더러운 기분은 뭔가. 딱히 누군가를 탓하거나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 때, 내가 느낀 건 굴욕감이었을까.

“(160) 신자유주의 하에서 모욕은 흔히 굴욕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예고 없이 실직을 당할 때, 일한 대가가 터무니 없이 적을 때, 아무리 절약해도 반지하 셋방을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굴욕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를 해고한 사장도,월세를 올려달라는 주인집 할머니도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시장의 법칙에 따라(즉 구조의 담지자로서 구조가 명하는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들은 매우 예의바르게, 심지어 미안해하면서 자기들의 입장을 전달하지 않았던가?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그들의 주장은 이런식이다. 실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굴욕으로 느껴진다면, 당신에게 자존감이 부족한 것이다. 당신은 혹시 어린시절에 사랑을 충분히 못 받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먼저 당신의 내면에 있는 상처받은 아이를 달래주어야 한다! 자신의 가치를 믿어라! 그리고 당당해져라! 당신이 긍정적일수록 재취업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때 부터였나. ‘누구도 쉽게 대체할 수는 없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그런데 그건 어떻게 되는 거지? 척척척 모든 걸해내고, 나 없으면 안될 정도로 열나 유능해지면, 그렇게 일을 엄청 잘해버리게 되면, 나만의 고유한 능력치가 있게 되면, 그러면 이 쓰고 버려지는 드러운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걸까.

버려진 티슈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능력을 키우려면 일터로 돌아가야하는 거 잖아. 결국 더 노오오력해야한다는 거잖아. 누구 좋으라고? 나? 구겨진 티슈는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구깃한 마음으로는 노력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구김살 없이 기꺼이 쓰고 버려질 젊은 깨끗한 열정의 마음들이 지천에 널려있는 세상이 보였다. 더는 타협없이 생계의 몫을 다해야하는 조건에 놓인 타인의 몸들도 보였다. 다들 왜 저렇게 부지런한거야. 난 또 왜 이렇게 게으른거야.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게으른 티슈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매달 꼬박꼬박 나가는 월세가 무거워졌다. 안되겠다, 엉엉. 이미 쉽게 뽑아쓰고 버려질 몸, 인정하자. 나는 대체가능하다. 언제라도. 어떻게라도. 그러니까 너무 잘하려고 하지말자. 정성을 다하려고 하지말자. 아주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자. 그래! 더 싸서 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두루말이 휴지가 되겠어!!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있는 고용주 여러분, 저를 마구마구 풀어써주세요. 풀려쓰이는 동안만큼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월급은 밀려선 안돼요. 왜냐 월세는 밀리면 안되니까요. 몇가지 자기계발 공정을 통해 두루마리 휴지로 거듭난 티슈에겐 의외의 좋은 점이 있었다. 저렴하고 막쓸 수 있을 지라도 두루말이 본인에겐 티슈시절에 없던 휴지심이 생겼다는 것. 그것은 텅비었지만, 그래도 심은 ‘심’이다. 나에게 있어 심은 일을 하되 일에 나를 너무 투영하지는 말자는 마음. 일하는 자아와 일하지 않는 자아를 분리시키겠다는 내적 선언.

“(87) 고프먼의 관점에서 사람이란 곧 연기자를 말하는데, 우리는 사회라는 무대 위에 올라가서 실제로 연기를 하면서 우리의 사람자격을 확인받게 된다. ...그는 가면이 우리의 인격의 일부이며 우리는 가면을 씀으로써, 즉 어떤 역할 또는 성격을 연기함으로써 비로소 사람이 된다고 주장한다. ‘어떤의미에서 이 가면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관념 - 우리가 수행하려고 애쓰는 역할-을 대표하는 한, 이 가면은 우리의 더 진실한 자아, 우리가 되고자 하는 자아이다.’ ... 여기서 얼굴과 가면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두기로 하자. 인격과 성격을 구별하듯이 우리는 이 둘을 구별해야 한다. 가면이 우리가 연기하고자 하는 성격과 관련된다면, 얼굴은 그 가면의 배후에 있다고 여겨지는, 연기자로서의 우리의 주체성과 관련된다.”

휴지심이 생겨난 두루말이는 새로운 일터에서 모욕쪽에 더 가까운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지금의 나는 진짜 ‘나’는 아니고 일하는 척하는 나를 연기 중”이라고 되뇌일 수 있었다. 달리 어찌 방법이 없었다. 나긴 나인데 내 전부는 아니어야해! 인용된 고프먼의 글을 읽으며 탄복했는 데, 정밀한 사회학적 용어로 서술된 내용들이 피부와 찰싹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내가 연기한다고 가정해야 살아갈 수 있었다. 그것을 가면이라고 부르던, 연기라고 명명하든- 일과 자아를 일치시켜서 온전한 굴욕감을 삼키는 것 보다.. 진짜 ‘나’는 다른 곳에 있고, 나는 여기서 연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연기는 사회생활을 하는 대부분이 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 당하는 여러가지 모욕은 진짜 ‘나’를 훼손할 수 없다고. 너는 나를 쓰고 버리더라도, 진짜 ‘나’는 버려지지 않는다고.

대체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나라는 현실자각은 끝났는 데. 또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이 지독한 연기를 끝마치고 ‘진짜 나’(편의상 이걸 자아라고 해두자)로 돌아갔으면 싶어진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아가 있었으면 좋겠어. 딱 잘라 뜯어내 버릴 수도 없는 이 매일의 기꺼운 연기를 고생했다 토닥이면서도, 또 내일의 연기를 위해 아껴둘 수 있는 가꿔도 볼 수 있는 내 안의 훼손할 수 없는 - 그 무엇. 나는 자아가 있었으면 했다. 그것을 찾아보마 마음먹었다. 솔직히 집착했다. 이 글을 쓰기 바로 전에 알라딘에 올렸던 글도 그런 내용이었다.

자아를 찾자. 자아가 되자. 자아를! 얼굴을! 자아여! 가면 뒤 내 진짜 얼굴이여! 그러나 책은 곧바로 “(89)나는 지금 가면 뒤에 연기되지 않은 진짜 자기가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연기하며, 심지어 일기를쓸 때도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우리 자신이 어떠한지 결코 알 수 없다.”고 하네. 나빴다. 흥. 칫. 뿡.

사실, 이 책도 고프먼도 내가 자아라고 이름 붙인 어떤 것(고유한 개인의 내면- 혹은 본질 같은 것)을 다루지는 않는다. 내 뜻대로 신나게 오독해보고 싶었으나, 오독할 건덕지없이 완전봉쇄 당했다.

“(89) 가면의 뒤에 - 즉 얼굴의 자리에-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내면성이 아니라, 신성한 것 또는 명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얼굴을 개인이 맡은 역할이나 그 역할에 대한 그 사람 고유의 해석, 혹은 연기를 통해 그가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자기 이미지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얼굴은 그처럼 개별적이고 가시적인 것이 아니다. 얼굴은 결코 가면과 분리될 수 없으면서도 가면의 뒤에 있다고 상상되는 무엇이다. 어떤 사람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가 만들어내는 것이 가면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그 가면을 굳이 벗기려하지 않을 때, 나아가 그의 연기에 호응하면서 그가 가면을 완성하도록 도와주고, 실수로 가면이 벗겨지더라도 못 본 체 할 때, 한 마디로 그의 가면 뒤에 있는 ‘신성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할 때 그 사람은 얼굴을 갖게 된다. 고프먼은 얼굴을 유지하는 것이 상호작용의 목표라기보다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상호작용의 목표들은 보통 서로 얼굴을 잃지 않고 또 잃지 않게 하려는 노력속에서 진행된다.”

저같은 독자들이 혹여 다른 길로 샐까봐 열심히 쓰기로한 방향대로 글을 끌어가시는 김현경 저자님. 그렇다. 이책은 개인의 소외감이나 자아의 발견이 아니라 사람-장소-환대에 대한 텍스트 였떤 것이다!

“(25) 이 책은 영혼과 육체의 대립 속에서 간과되어온 그림자의 문제, 다시 말해 ‘사람’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인 것인가? 다시 말해서 ‘사람’이라는 것은 지위인가 아니면 조건인가? 조건부의 환대 역시 환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대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환대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여기서 나는 일종의 귀류법을 사용하여 -즉 절대적 환대 없이는 사회가 생겨날 수 없음을 보임으로써- 절대적 환대의 필요성을 증명하려 하였다.”

두루말이는 책을 덮고 고마워졌다. 비록 나는 쓰이고 버려지겠지만, 속은 텅 비어있지만, 어디에 발붙일지 몰라 언제나 불안하지만, 내가 누군지 잘 모른대도, 자아나 내면을 갖추지 않는 대도, 혹여 정말로 휴지조각처럼 온 세계가 나를 대한다 하여도. 그래도 태초에 절대적인 환대를 받았다는. 기억없는 그윽한 기억에 대해.

어쩌면 작고 험난한 내세상과 맞서느라 까먹은 진짜 문제에 대해 어렴풋이 환기해주는 책인지도 몰랐다. 현실에서 느끼는 무력감이나 굴욕감이 커지고, 사람들에게 실망할 수록 ‘구조-사회-역사-등등에 기대는 큰 언설’들이 허공을 헤집는 것만 같았었다. 그래서 차라리 통제가 되는 가장 작은 단위 - 자아(도통 있는지 모르겠는)에 몰두, 자아에 집착했을 지도.. 존엄은 엿바꿔 먹은 것 같은 일상 속에서 너에게 나를 모조리 다 바치지는 않았어!라는 ‘정신승리’로서의 손톱 만큼 남은 상념과 시간들의 확보 = 자아.(이렇게 쓰니 조금 가엾다.) 그 역시 나를 한 장의 티슈로 만들어버린 알고보니 신자유주의씨의 큰 그림이었나. 혹사시키고 내몰아, 모두를 알 수 없는 허망한 자아찾기 게임에 몰두시키는?

아아, 언제나 눈 똑바로 떠야한다. 눈은 똑바로 뜰텐데, 지금 그만두면 좀 아쉬워 질 것 같으니 저는 당분간 이 게임에 심취해 있겠습니다. 설령 없다한들, 그게 그닥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한들, 있다고 믿고 살아가는 것만이 지금을 사는 방식이라..... 두루말이는 변명한다. 내 휴지심 안엔 꽤 근사한 무언가가 들어차 있을 지도 몰라!!! (구겨진 휴지 자신일 가능성이 높다)

“(242)신원을 묻지 않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복수하지 않는 환대. 사회를 만드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절대적 환대이다. 누군가는 우리가 한번도 그런 사회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운동의 현재 속에 그런 사회는 언제나 이미 도래해 있다.”

이 책의 제목을 봤거나,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겠지만, ‘환대’라는 눈에 익지 않은 그 단어에는 🥺 괜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버린다. 그러고보면 이 눈물의 정체는 그리움이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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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10-25 0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야요, 너무 좋쟎아요오~~!! 암튼 저도 이 책 샀는데 (배타고 오고 있는 중;;;) 인용한 구절이 저는 왜 잘 안 읽히지? 넘 어려워. ^^;;; 글을 읽으면서 우리 쟝 님의 글은 머리 쏙 들어오는데 인용글은 게속 주변을 맴돌아서 몇 번을 읽었는데도 이해가 안;;; 나 아무래도 난독증? 아니면 더 심각하게 이해능력 부족? 자아를 생각하기도 전에 난관에 부딪침요.ㅠㅠ 하지만 책 제목에 왜 환대가 들어가는지 알게되어서 끄덕끄덕,,,우야쯘둥, 우리 쟝 님 글 정말 잘 쓰신다!!^^

공쟝쟝 2020-10-25 11:45   좋아요 0 | URL
이 책 전체적으로도 하나의 완결성(?)을 갖고 있는 책이라 주욱 따라가면서 읽어야할 것 같아요. 인용한 밑줄들은 와닿았던 구절들이었는 데, 개념에 개념들을 저자 말대로 일종의 귀류법으로 논증해서- 인용만으로는 매력을 느끼기 어려우실지도. 어서 배타고 넘어간 책을 환대하시어, 누리시기를...!!

봄밤 2020-10-25 1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버려진 휴지가 단단한 심을 가진 휴지로 성장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네요. 너무 좋으면서도 어렵게 느껴졌던 책인데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그리고 가끔 등장하는 고양이의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기분 좋은 오전이네요!

공쟝쟝 2020-10-25 11:48   좋아요 1 | URL
그날은 티슈가된 기분이었다... 로 시작한 글이었는 데 쓰다보니 휴지의 성장서사...로 결론 나서, 역시 나는 성장서사 중독인가 ㅋㅋㅋㅋ 하고 웃었더랬죠! 귀여운 냥이 종종 찍어올리겠어요! 일요일 오후 잘 보내세요^.^

난티나무 2020-10-25 15: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휴지심,에 오! 감탄하며 읽다가,
그만 얼마전에 여기 출시된 ‘심 없는 휴지’가 생각나고 말았어요.
현대 사회는 우리의 심도 부정하면서 끝까지 다 풀어써 버리려는 작정일까요.

공쟝쟝 2020-10-26 08:04   좋아요 0 | URL
심없는 돌돌이 휴지라니 ㅠㅡㅠ 그럼 그 휴지는 어디에 거는 걸까요... 휴지에 이입했던 주말이었는 데, 그 휴지 참 쓸쓸하도다...

syo 2020-10-25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가 홉스한테 똥그라미쳤나! 홉스 피부색과 책 표지색의 저 어우러짐은 무엇인가.....
자는데 주먹쥐고 있는 것 좀 봐 ㅠㅠㅠ 엉엉

공쟝쟝 2020-10-26 08:04   좋아요 0 | URL
엉엉... 혼자 냄겨두고 출근하는 에미 맘은 찢어집니다... 귀여운 자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