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 짜게 본 역사, 간을 친 문화
유승훈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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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옛날이여", 화려했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소금

 

이틀 전에 방영된 KBS 2TV '비타민'에서 '나트륨 중독'에 대해서 소개했다. 나트륨, 즉 소금 섭취 과잉은 근래 한국인의 나쁜 생활습관으로 가장 중요하게 지적되고 있는 것 중 하나다. WHO의 하루 소금 권장 섭취량은 2,000mg(5g) 이하다. 반면 2012년 현재 한국인의 1인당 1일 평균 소금 섭취량은 WTO 권장량의 2배를 훨씬 넘는 5000㎎(12.5g) 선인 걸로 나타났다. 짜게 먹는 한국인의 식습관이 주요 질병의 증가 원인이 되고 있다. 소금 섭취량이 늘면 고혈압, 심장병 등 주요 만성질환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소금 섭취를 줄이는 방법 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금에 대한 인식은 딱 두 가지다. 음식에 간을 맞추기 위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조미료. 그리고 반대로 설탕과 마찬가지로 너무 많이 섭취하면 건강에 해로운 조미료. 좋든 나쁘든 간에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소금의 존재는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조미료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소금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지금과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금은 놀라울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소금은 생존상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금을 얻기 위한 노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다. 본격적으로 정착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신석기 시대의 주거 지역의 특징은 강이나 바다가 근접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이 곳에 정착하게 된 배경을 어획 방법의 발달로 보고 있지만 놀랍게도 이 때부터 고대 사람들은 바다를 통해서 소금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소금이 산출되는 해안, 염호가 있는 장소는 교역의 중심이 되고, 산간에 사는 수렵민이나 내륙의 농경민은 그들이 잡은 짐승이나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기 위하여 소금 산지에 모이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이나 아시아에서도 소금을 얻기 위한 교역로가 발달되었다. 또, 고대 그리스 사람은 소금을 주고 노예를 샀으며 고대 로마의 병사들은 월급으로 소금을 받았다. 그래서 '급여, 월급'을 뜻하는 영어 Salary가 소금의 Salt에서 비롯되었다. 간략하게 이 정도의 역사적 상식만 본다면 과거의 소금은 그저 음식을 위한 조미료가 아니라 경제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또는 재화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소금이 없다면 나라가 발전 못해요, 아~ 미운 소금~~♬"

 

세계사에 영향을 줄 정도로 화려했던 역사라고 해서 우리가 흔하게 보는 소금을 그저 짠 맛의 조미료로만 보지 말지어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렇지 한국사에서도 소금의 존재와 그 영향력은 무시 못한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소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전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염전에서 얻게 되는 소금량에 따라 국가의 발전에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을 주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에도 소금은 그에 동등한 가치를 지닌 생산물과 거래, 교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내륙 지방의 사람들은 소금 맛 보기가 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해안 지방에 위치한 염전업자들 간에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는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렇다보니 염전업자는 최대의 이윤을 얻을 정도로 최고의 직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소금을 부엌에서 볼 수 있는 단순 조미료라기 보다는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경제적 재화 정도로 인식했다. 고려의 시조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위한 재정이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소금의 최대 생산지였던 전남 지역을 점령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고려 말의 충선왕은 '각염법'이라는 소금 전매법을 시행하였다. 국가가 직접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백성들이 소금을 얻기 위해서는 세금의 일종인 '소금세'를 지불한다거나 또는 일종의 생산량을 교환해야만 했다. 소금 생산 및 판매로 벌여들인 소금세와 교환 거래를 통해 국가 재정을 좀 더 수월하게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국가 또는 관리가 염전사업에 관여하다보니 정작 소금이 필요한 백성들이 피해를 얻는 문제점이 속출하게 되었다. '국가 재정'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급하게 찾다보니 소금을 요리에 필요한 조미료라는 아주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용도를 잊고 말았다. 국가가 시행하는 소금 전매법에 관여하는 왕족 또는 권문세족들에게 소금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본의 용도로 보고 있었다. 소금이 권세가들만을 위한 귀한 최상급의 조미료가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고려 정부도 소금을 자신들과 가까운 왕족, 고급관리들에게 분배할 정도였다. 그래서 백성들이 일정 기간 소금세와 생산량을 바쳐도 백성들이 양손 한 가득 소금 담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 원나라의 간섭에 의한 조공을 피하기 위해서 만든 각염법이 아이러니하게도 지배층들의 폐단을 더욱 낳게 만들었으며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어주었다. 고려 말의 소금 전매법의 폐단은 조선 건국 초기까지 이어질 정도로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해나가야 할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었다. 조선 건국의 공신 중의 한 사람인 삼봉 정도전이 태조에게 염법의 문제점을 지적할 정도로 국가 발전에 있어서 소금 개혁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염법 개혁에도 불구하고 '국가 및 왕권 강화를 재정 확보'와 '백성들의 민심 얻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누가 소금을 외면하게 만드는가

 

어떻게 보면 소금은 지금이나 과거나 중요하면서도 백성들에게 불편을 준 양면적인 존재다. 오늘날에는 건강상 해로운 조미료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과거에는 권세가들의 배만 불리게 만드는, 백성의 생활을 괴롭게 만드는 조미료였다. 그러나 역사를 볼 땐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해야 하는 법. 국가 재정 확보에 있어서 농산물과 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소금의 존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조선의 성군 세종은 오랜 기근 생활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의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한 복지정책의 재원으로 소금을 사용했으며 임진왜란 시기 속에서도 백성들의 식량과 군사들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한 해결 방법을 류성룡은 염전에서 발견했다.

 

자염은 질박한 토기에 바닷물을 담은 뒤에 끓여서 소금을 채취하는 방식이다. 천일염은 갯벌에 바닷물을 가둔 뒤에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말려 소금을 얻는 방식이다. 자염이 사라진 이유는 일제 강점기 시절, 산업과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국책 사업에 밀리는 바람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바람과 햇볕에 의해 말리는 천일염의 등장으로 인해 오랜동안 누려온 화려한 역사를 뒤로 한 채 사라졌다. 그러나 천일염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염전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 식생활에서 음식의 간을 조절하는 것은 소금, 간장, 된장 등 소금기가 있는 조미료였다. 우리 여성들은 짠맛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화려했던 '짠맛의 시대'는 가고 '단맛'과 '매운맛'의 시대가 왔다. 짠 음식과 소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널리 퍼지고 있다. 역설적으로 소금을 불필요하게 짜게 만들어 건강을 해치게 한 장본인은 인간이었다. 부엌에 있어야 할 소금을 그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황금'으로만 봤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방대한 역사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는 소금의 화려했던 블루스가 너무나도 짜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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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9-0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곳곳에 소금에 관한 우여곡절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삼국지에도 보면 관우가 하던 일이 소금 밀매업자와 연결되어 있다, 혹은 그의 뒤를 봐주던 사람이다, 혹은 소금 밀매업에 종사하던 사람이다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cyrus 2012-09-03 11:17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알라딘 검색창에 소금이라고 검색하면 꽤 소금의 역사에 관한 책이 많았어요. ^^

아이리시스 2012-09-03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금으로 역사책이 나오는 게 신기하네요. 미시사도 좋아하지만 소금책도 읽는 시루스님이 더 좋아요.
제목 좋네요, 소금 블루스.
예전엔 오롯이 국가사업이었고, 부의 사업이었고, 권력과도 연관이 되어있었던 것 같아요.

cyrus 2012-09-03 15:07   좋아요 0 | URL
예전에 나온 책 제목 중에 슈가 블루스라고 있어요. 설탕이 건강에 유해하다는 사실을 반박하는
일종의 설탕 예찬론에 관한 책이었는데 거기서 따왔어요. 사실 지금 소금도 설탕과 마찬가지로
건강에 유해한 조미료라는 인식이 강하잖아요, 하지만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면 소금의 존재가
얼마나 유용했는지 소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책 제목에서 따온거에요 ^^
 
카라바조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6
질 랑베르 지음, 문경자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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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관심 있게 알아보고 있는 화가가 이탈리아 출신의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다. 이름은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와 비슷한데 국내에선 카라바조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에선 미켈란젤로 못지않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고흐를 능가하는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불같은 성격, 시대를 앞서갔지만 결국 외면 받아야만 했던 남다른 천재 그리고 요절. 이러한 카라바조의 삶에 비하면 고흐는 양반에 불과하다. 경쟁 화가들 그리고 자신에게 그림을 주문했던 사람들을 무시하는 발언은 예사였고 수차례에 걸쳐 폭행 및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여러 번 투옥되기도 했고 탈옥을 감행하여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카라바조의 초상화를 보라. 딱 얼굴만 봐도 그의 격정적인 성격이 인상에서도 묻어 나온다. 예술적인 삶보다는 카라바조의 무시무시한 전과 이력이 제일 먼저 떠올려서 그런지 초상화 속에서 그가 쥐고 있는 것이 붓이 아니라 생전에 품속에서 지녔다던 단검처럼 보인다.

『성 마태오의 소명』1599~1600년


카라바조는 어린 시절부터 도제 생활을 거쳐 예술적 능력을 점점 키워나갔다. 콘타랠리 예배당에 그린 <성 마태오의 순교>와 <성 마태오의 소명>이 각광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권력자였던 델 몬테 추기경이 후원자로 나서고 로마 최고의 화가라는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양식을 추구한 그는 악마적 화가,‘회화의 반(反) 그리스도'라는 비판도 받았다. 길거리에서 만난 집시나 부랑자, 창녀의 모습을 성자나 예수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성사회의 비판과 조롱을 비웃기라도 하듯, 충격적인 주제 선택과 표현 방식에 대한 고집이 묻어 나 있는 카라바조의 붓은 절대로 꺾이지 않았다.


『마리아의 죽음』1606년경






임종한 성모 마리아를 그리기 위해 물에 빠져 죽은 매춘부의 썩어가는 시신을 모델로 사용했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카라바조에게 그림을 부탁했던 가톨릭교회 관계자들은 카라바조의 그림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히려 그림 모델에 대한 출처불명의 소문보다는 교회 관계자들을 더욱 실망하게 만든 것은 카라바조의 표현 방식이었다. 붉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는 왼팔이 축 늘어진 채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임종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슬픔에 빠져 있다. 교회 관계자들은 이러한 그림 구도를 마음에 들지 못했다. 성모의 죽음은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장면이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성모 가까이에서 임종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 속 성모의 모습에 대해서도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맨 발을 드러낸 채 죽은 성모의 모습이 저속하게 느껴진다는 이유를 들면서 카라바조의 그림을 비난했다. 그나마 그림 속 죽은 여자가 성모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희미한 후광만 그려져 있을 뿐, 이것마저 그려 넣지 않았더라면 이 그림 또한 거절당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카라바조는 지극한 성스러움은 결국 지독한 세속적인 삶에 기초해 있으며, 성(聖)과 속(俗)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성 마태오와 천사』1602년 (첫 번째 그림, 현재 소실됨)






『성 마태오와 천사』1602년 (수정된 그림)


카라바조는 그림 제작 주문자들로부터 총 두 번이나 거절당할 정도로 퇴짜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성 마태오와 천사>다. 첫 번째 그림 속 성 마태오가 너무 초라하고 천사가 마태오 옆에 너무 가까이 묘사되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천사의 영감을 받아 마태복음을 기록하는 마태오의 모습은 평범한 하층민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마태오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탓에 그의 발바닥은 그림을 보는 관중들 앞으로 드러나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본 순간, 마태오가 성인으로써의 면모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레토의 성모』1604~1605년


비록 성당이 요구하는 작품을 위해 카라바조는 고귀하고 근엄한 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도록 그림을 수정했지만 평범하고도 세속적인 종교화를 추구하고자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적 가치는 포기하지 않았다. <성 마태오와 천사> 두 번째 그림이 완성된 지 2년 뒤에 그려진 <로레토의 성모>에서는 성모와 아기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은 늙은 순례자의 맨발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카라바조는 그 당시로서는 독창적인 사실주의적 화법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1593~1594년경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초창기의 카라바조 그림을 보게 되면 이미 사실주의적 표현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과 <과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을 처음 보는 독자라면 훗날 그려지게 될 종교화에 비하면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점의 그림을 박물관에서 실제로 보게 된다면 좀 더 가까이 살펴 볼 것. 과일과 이파리가 아주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과일은 먹음직스럽게 윤기가 흐를 정도로 싱싱하게 느껴진다. 특히 포도는 너무나 사실적이다. 각각의 포도 알맹이가 하얗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는데 포도 열매 위에 묻은 하얀 가루를 보는 듯하다. 이것을 사람들은 농약이라고 생각하지 쉽지만 다행히도 농약 성분은 아니다. 그리고 카라바조가 살았던 시대에는 농약이라는 게 나오지도 않았다. 포도 속 당분으로 포도 껍질이 변해 생성된 것뿐이다. 하얀 가루가 많은 포도일수록 당분이 높고 신선함이 유지되어 있다. 과연 카라바조는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그렸던 것일까?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1596~1597년


카라바조는 종교화를 그렸던 화가이면서도 동시에 폭행, 살인 전과가 적지 않은 범죄자라는 양면성이 존재하는 독특한 화가이다. 하지만 렘브란트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등장할 수 있게 명암법을 처음으로 시도했으며 극적인 순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방식은 훗날 조르주 라 투르와 쿠르베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미술은 정당한 대우를 받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카라바조의 종교화를 반복해서 볼수록 차분해지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물론 화가의 생애를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그림을 본다면 그림이 주는 감동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카라바조도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의 모습을 주제로 한 그림 한 점을 남겼는데 불같은 성격의 화가가 그렸다는 생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고요하다. 두 눈을 감고 얼굴을 숙인 막달레나의 모습을 자세하게 보면 눈물 한 방울이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막달레나의 얼굴에 흐르고 있는 이 눈물 한 방울은 이 그림을 보고 있는 관객마저도 숙연하게 느껴진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1609~1610년


카라바조의 생애와 미술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찻잔 속의 태풍’이다. 카라바조는 평범한 기교의 예술에 의한 마니에리즘(Mannerism)이 지배하던 시대에 태어나 독특하고 파격적인 주제와 표현법으로 세상을 뒤흔들 젊은 천재로 거듭날 수 있었지만 범죄 이력과 도주 생활은 활짝 펴야만했던 예술적 능력의 꽃을 시들게 만들었다. 카라바조의 예술이 세상에 가져다 준 파급 효과는 한 순간일 뿐이었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점점 소멸되어가는 태풍처럼 카라바조는 생전에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한 채 요절하고 말았다. 아마 반 고흐를 제외하면 이처럼 파격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짧은 삶을 살았던 예술가도 드물 것이다. 이제는 르네상스 거장 중의 한 사람인 미켈란젤로에 맞먹을 정도로 평가를 받고 있는 카라바조 출신의 미켈란젤로('카라바조‘라는 성은 화가가 태어난 지명으로부터 유래됨)를 고풍스러운 미적 취향을 선호하는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림 장면의 절반을 지배할 정도로 어두컴컴한 흑(黑)의 영역이 많이 차지하고 있는 명암법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줄까? 그리고 과거의 불미스러운 이력만 가지고 장점을 무시하고 심지어 끝까지 냉담한 선입견을 거두지 않는 우리 사회 속에서 과연 전과자의 그림들이 그러한 선입견 없이 예술적 평가를 알아볼 수 있을까? 자신의 목을 참수하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지막 자화상으로 그렸던 카라바조의 파격적인 예술을 아직 우리 사회는 받아들이기에는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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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8-2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라바조를 다시 보게 돼서 정리가 돼요. 예전에는 마로니에 북스에서 나오는 화가 일대기 종종 읽었는데 요즘은 통-_-;; 저도 현대미술에 관심 좀 가져야 될 듯 싶어요. 아는 사람이 앤디 워홀 뿐이라니 orz

카라바조 페이퍼에 앤디 워홀 얘기하는 쓸데없는 댓글..

cyrus 2012-08-31 22:32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제부터 마로니에북스 시리즈 완독 도전해보려고요. 분량도 많지도 않고 시리즈 중에 제가
관심 있는 화가들이 꽤 있어서 이번 기회에 화가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요.
그런데 내일 모레부터 2학기 시작이라는 게 함정이네요.. ㅋㅋㅋ ㅠㅠ
다음 마로니에북스 시리즈는 앤디 워홀을 읽어보겠습니다요 ^^
 

            

 

 

                              

 

 

EBS 지식채널e - 어느 독서광의 일기

 

 

 

 

Scene #1

 

 

 

 

 

 

 

 

 

 

 

 

 

 



벡곡(栢谷) 김득신은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나오는 ‘백이전’(伯夷傳)을 총 11만 3천 번이나 읽을 정도로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기로 유명한 조선의 문인(文人)이다. 김득신의 아버지는 아들이 노자처럼 훌륭한 학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어린 김득신은 아무리 공부를 해도 제대로 된 내용 하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썩 총명하지 못했다.

 

주위 이웃과 친지들은 김득신의 능력에 의구심을 품었지만 아버지만큼은 아들의 능력을 굳게 믿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믿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김득신은 오로지 책만 읽었다. 이때부터 책 전체의 내용을 완전하게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서 읽기 시작했다. 결국 59세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해 아버지가 그렇게 바라던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40년 간 책을 읽고 나서야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김득신의 묘비명에는 이러한 글이 쓰여 있다.

 

"재주가 남보다 못하다고 해서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라. 나보다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그러니 힘쓰는데 달려있을 따름이다."

 


 

 

Scene #2

 

 

 

 

 


 

 

 

 

 

 

김득신의 반복 독서법도 대단하지만 그가 그토록 열심히 읽었던 ‘백이전’을 쓴 고대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도 김득신 못지않게 무수한 인고(忍苦)의 노력 끝에 뒤늦게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 낸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인물이다. 사마천의 아버지는 천문과 역법을 주관하고 황실의 도서 관리를 담당하는 벼슬을 맡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방대한 중국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사마천에게 자신의 작업을 마무리해줄 것을 부탁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사마천은 아버지처럼 황실 도서를 담당하는 관리가 되어 그 곳에서 본격적으로 <사기>을 편찬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중국과 전쟁을 치루고 있었던 흉노의 포위 속에서 부득이하게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그만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사마천은 일생 일대 가장 큰 위기를 맞게 된다. 한 순간에 대역죄인으로 몰리고 말았다. 황제는 사마천에게 사형을 내렸지만 그 당시 중국에서는 사형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벌금을 내야 하는 것, 또 하나는 벌금을 낼 수 없다면 궁형(宮刑)을 받아야했다. 궁형은 남자의 생식기를 거세하는 형벌이다. 그 당시 궁형은 중국에서는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 중의 하나였다. 사마천은 어떻게든 사형을 피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유지를 계속 이어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벌금을 낼 경제적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어떻게든 벼랑 끝에 몰린 삶을 부지하기 위해서 궁형을 선택했다. 사마천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맡은 벼슬보다 한참 낮은 환관(내시)로 좌천되어야만 했고 일부 사대부들의 멸시를 받아 운신의 폭도 그리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세상의 멸시와 핍박 속에서도 <사기>의 저술을 멈추지 않았으며 마침내 필생의 역작 <사기>를 완성했다. <사기>의 규모는 본기(本紀) 12권, 연표(年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모두 130권, 52만 6천 5백자. 34세 때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5년 만에 완성했다.

 

 

 


Scene #3


김득신과 사마천, 공통적으로 이 두 사람은 아버지의 소원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일에만 충실히 노력했으며 오랜 노력의 시간을 통해 하나의 목표를 끝내 이루고 마는 강한 집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주위의 냉담한 시선 속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그들의 시선에 맞춰 한계를 두지 않았다. 김득신의 묘비명대로 결국 자신이 이루고자하는 목표의 달성 여부는 그것을 어떻게 노력하는가에 따라 달려있다.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계를 스스로 안다면 그것 또한 옳은 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자신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놓고 애초부터 할 수 없다고 체념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무슨 일을 하기도 전에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를 해선 안 된다. 그것은 결국 미련하고 게으른 자의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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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2-08-25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네요. 사마천의 일화는 예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cyrus 2012-08-27 22:07   좋아요 0 | URL
두 사람 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죠. 항상 이런 일화를 접하게 되면 저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맥거핀 2012-08-26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득신을 그냥 조선의 문인 중의 하나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배경이야기가 있는 인물이군요. 덕분에 하고자하는 일에 있어서 좀 힘이 생겨나는 듯 합니다. 59세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했다라...
(cyrus님 잘 지내시죠?)

cyrus 2012-08-27 22:10   좋아요 0 | URL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 개학이라서 좀 놀면서(?) 개강 준비하고 있습니다 ^^;;

2012-08-28 0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르케스 찾기 2016-11-04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광불급... 백곡 김득신의 이 책도 읽으셨군요... 리뷰 찾아 읽다보니 cyrus님의 리뷰들이 눈과 마음에 맴맴 도네요.

cyrus 2016-11-04 14:24   좋아요 1 | URL
《미쳐야 미친다》가 2004년에 나왔으니 저는 그때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 해에 이 책을 읽었고, 전역한 뒤에 또 읽었습니다.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책들 중 한 권입니다. ^^
 
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진원 옮김 / 김영사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과거를 이해한다는 착각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과신한다.

 

 

-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p 300) -

 

 

 

 

 

 합리적 인간의 불편한 진실

 

춘추 전국 시대 초나라 때의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한가운데쯤 왔을 때 칼을 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는 바로 주머니칼을 꺼내서 배에 자국을 내어 빠뜨린 부분을 표시해 두었다. '떨어진 자리에 표시해 놓았으니 칼을 찾을 수 있겠지.' 그는 배가 언덕에 닿자마자 뱃전에 표시해 두었던 물속으로 뛰어 들었으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여씨춘추』에서 유래된 '각주구검'(刻舟求劍)에 관한 일화다. 각주구검은 어리석고 미련하여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배를 타고 강에 나가서 칼이 빠져버린 위치를 확인하는 방법은 양쪽 강변의 지형 지물을 보는 것이다. 칼의 주인이 떨어뜨린 칼에만 몰두하지 않고 강변을 주목했더라면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융통성 없는 이 바보스러움을 우리는 반복하기도 한다. 그 바보스러움은 각주구검의 그것과 같이 시간성과 공간의 변화라는 점을 무시한 목적의 설정이라는 것이다.

 

시간성과 공간뿐만 아니라 숫자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개미들이 투자를 할 때 기점이 되는 가격은 말할 나위 없이 매입가, 즉 본전이 된다. 그들은 항상 지금이 본전 대비 이익인지 손실인지를 따지고 든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 기준가가 바뀌기도 한다. 만약 주가가 상승해서 한 번 그 주식이 고점을 쳤다면 그 고점이 새로운 기준가로 변한다. 개미들은 주가가 그 고점에 갔을 때의 기분을 이미 느껴봤고 그 가격대를 또 다른 나의 본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증시가 조금이라도 주춤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면 시장에서는 비관론이 고개를 들기 마련이다. 비관론이 만약 논리적이라고 판단되면 주식을 파는 것이 마땅한데, 개미들은 얼마 전에 경험했던 고점에 미련이 남아 지금 가격대에 팔기가 싫어 하는 경향을 보인다. 만약 지금 팔았다가 바로 주가가 반등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점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가가 상승을 하다가 다시 하락하면 전 고점은 또 하나의 숫자로 각인이 되고 투자자들은 그 고점을 본전으로 여긴다. 그 숫자에 집착의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를 경제학 용어로 '기준점 편향'(Anchoring Bios, 닻내림 편향)이라고 말한다.

 

합리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사고를 지닌 인간은 왜 이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인가?  과연 인간은 지구상에 유일한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성과 직관, 두 가지 생각 시스템의 상호작용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 생각을 크게 2가지로 구분한다. 직관을 뜻하는 시스템 1의 '빠르게 생각하기(fast thinking)'와 이성을 뜻하는 시스템 2의 '느리게 생각하기(slow thinking)'다. 달려드는 자동차를 피하는 동물적 감각의 순발력, 끔찍한 사진을 보자마자 저절로 인상이 찌그리게 되는 것처럼 완전히 자동적인 개념과 기억의 정신활동이 '빠르게 생각하기'이다. 반면 123 x 456의 문제처럼 머릿속에 즉시 떠오르지 않는 문제의 답, 복잡한 논리적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지 확인할 때는 '느리게 생각하기'가 작용된다.

 

인간은 어떠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두뇌 속에서 시스템 1과 시스템 2이 상호작용하게 된다. 예를 들면 냉장고 안에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가 보관되어 있다고 하자. 내가 냉장고 안에 있는 우유를 보는 순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시스템 1, 직관, 빠르게 생각하기가 만들어 낸 충동적인 인지 과정이다. 그러나 유통기한을 지난 우유를 마시게 되면 배탈이 날 수가 있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기한이 지난 우유를 벌컥 들이마셔서는 안 된다. 기한 날짜를 먼저 확인하고 우유가 상했는지 유리잔에 부어 확인한다. 그래야만 복통의 괴로움을 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 2, 즉 이성적으로 느리게 생각함으로써 행동을 통제한다.

 

 

 

 

 휴리스틱(Heuristic)에 의한 사고의 오류

 

 

● 언론이 집중 조명한 비행기 추락 사고는 일시적으로 비행기의 안전에 대한 느낌을 바꿔 놓는다. 길가에서 불타는 자동차를 본 후 당신 머릿속에는 그 사고 장면이 잠시 동안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당분간 훨씬 더 위험하게 느껴진다.

 

● 개인적 경험, 사진, 생생한 사례들은 타인에게 일어났던 사건이나 단순한 말 혹은 통계보다 훨씬 더 머릿속에 잘 떠오른다.

 

 

 (p 190)

 

 

하지만 시스템 2에 의해 인간의 행동이 통제된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시스템 2는 인지적 편안함이 느껴질 정도로 반복되고 낯익은 문제나 상황 앞에서는 나태해지고 회피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럴 때 인간의 행동을 통제되어야 할 시스템 2는 평소보다 기능이 약해지고 시스템 1에 의해서 의사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잘 아는 것에 바탕을 두고 쉽게 단정해버리는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을 주의해야 한다. 두뇌는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 단축을 선호한다. 애매모호한 자료나 대상은 자연스럽게 무시하거나 왜곡하게 된다.

 

위에서 소개한 두 가지 사례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가용성 휴리스틱이 만들어 낸 편향이다. 이것을 가용성 편향이라고 한다. 비행기 추락 사고에 관한 뉴스를 접하고 난 후부터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보다는 기차나 배를 타는 것을 더 선호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가용성 편향이 만들어 낸 잘못된 생각일 뿐이다. 실제로 교통수단의 사고발생 빈도 수에 대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비행기보다는 우리가 자주 타는 자동차의 사고 발생이 높다고 한다. 가용성 편향의 착각에 빠지게 되면 실증적인 통계자료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직관의 함정에 빠지는 인간

 

그렇다면 통계자료를 완벽히 분석하고 이해하면 가용성 휴리스틱의 오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완벽한 대안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것 또한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 형성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통계자료와 같은 과거의 기록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된다면 하나의 기준과 틀로 이루어진 정합적인 사고로 형성된다. 의사결정자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근거의 자료를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만 가지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수많은 상황 및 사회문제들은 우연에 가까울 때가 많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은 작은 실마리를 토대로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세상은 기승전결이 뚜렷한 하나의 이야기처럼 규칙적이면서도 정함성을 갖고 돌아가지 않는다. 지난번에 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하면 잘될 것이라는 맹점에 빠지게 되는게 이것을 '정당성의 착각'라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 오류는 분석적인 의사결정 성향이 강한 기업의 CEO들에게 많이 볼 수 있다. 분석적이고도 논리적인 사고를 지향한다는 CEO마저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스템 1의 직관에 의해 생각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일부 CEO들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정합적인 과거만을 이해함으로써 미래를 예측하고 운의 역할을 무시한다. 그리고 아는 업무에만 집중하게 되어 지나치게 자신의 믿음을 과신하는 초낙관주의 성향에 빠지게 된다.

 

시스템 1의 직관의 기능과 관련된 인간의 오류적 판단 경향은 '전망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대니얼 카너먼과 故 아모스 트버스키의 공동 연구에 의해 밝혀졌으며 2002년에 심리학자 카너먼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안겨 주었던 이론이다. 우리는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이익보다도 손실에 더욱 민감하고 손실을 회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했던 '기준점 편향'에다가 위협을 기회로 여기는 낙관적인 사고까지 어울린다면 종종 자신에게 유리한 이익을 거부하게 되는 모순적인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매몰비용으로 상당한 손실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실 규모가 더욱 확대될 정도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개발 사업을 오랫동안 매달렸던 영국와 프랑스의 경우가 전망 이론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콩코드 효과)

 

 

 

 

 합리주의자들이여, 익숙한 생각의 지배에서 벗어나라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고 그래서 기억하는 동물이며 결국 후회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큰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잘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말이야 쉽지 합리적인 인간이라도 올바른 결과를 위한, 옳은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 '잘'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구상 유일한 합리적인 동물'이라는 명예로운 훈장을 내려놓아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범하는 사고방식이나 행동습관을 제대로 이해하고 훈련만 한다면 완벽한 해답에 도달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쉽게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실행할 수 있다. '생각'에 의해 작동하는 사고방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만큼 현명한 선택을 할 가능성은 한층 높아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익숙함과의 결별'이 중요하다. 이미 주어진 정보와 지식만을 가지고 의견을 보강하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보다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정보에 의도적으로 개방하고 수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최대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정보들을 활용하여 문제 예측의 시나리오를 만든다. 이러한 시나리오에는 예측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정보도 포함되기 때문에 판단의 오류에 의한 손실을 줄일 수 있다.

 

모든 성공은 최면이요 마약이다. 언제든 반복될 수 있고 어디서든 통할 것만 같다. 모 통신사 광고 카피처럼 '생각대로' 하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불확실성, 경쟁이 있는 사회에서 우리가 바라는대로 쉽게 생기지 않는다. 변화 빠른 시절에 과거의 성공 그리고 정보와 지식들은 그야말로 과거일 뿐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를 바꾸는데 성공한 창조적 소수가 그 성공으로 인해 교만해져서 남의 말에 귀를 막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판단력을 잃게 되는 것을 '휴브리스'(hubris)라고 불렀다. '합리적인 동물' 인간은 자기 과신, 지나친 오만에서 비롯되는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그렇기에 카너먼은 이 책을 통해 세상을 합리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합리주의자들에게 경고보다는 충언에 가까운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 모순된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되돌아보고 인식할 것을 권하고 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 스스로 존재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겸손과 지혜가 필요해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하고 합리적인 동물'이라는 오랜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었던 이 익숙한 생각부터 결별하는 것이 최우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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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죄인이로다', 괴짜 시인 프랑수아 비용  

 

 

 

 

 

 

 

 

 

 

 

 

 

 

 

 

 

 

 

저는 가난하고 늙은 여인입니다.

아주 무식해서 읽을 수도 없어요.

그들은 저희 마을 교회에

하프가 울려퍼지는 천국과

저주받은 영혼들이 불타는 지옥을 그려서 보여주었어요.

하나는 내게 기쁨을 주지만

다른 하나는 두려움을 줍니다.

 

(p 150)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1를 읽으면서 혹시 이런 시구를 발견하셨는지?  시 속 화자인 '늙은 여인'은 교회에 그려진 천국과 지옥 그림 앞에서 신의 성스러움에 탄복하는 동시에 지난 날의 과오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신의 섭리를 강조하는 기독교적인 교훈이 깃든 한 편의 종교시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시를 쓴 자가 절도와 살인 전과가 있는 범죄자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시를 쓴 시인은 프랑스 중세 말기에 활동했던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 1431~?)이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작가일 것이다. 진중권도 책에 이 시를 인용하면서 비용을 '중세 말의 괴짜 시인'라고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시인의 일생을 살펴보면 '괴짜'라기보다는 '괴팍스러움'에 가깝다. 

 

비용의 본명은 프랑수아 드 몽코르비에르. '비용'이라는 성(姓)은 어린 시절 그를 길러주었던 기욤 드 비용이라는 신부에게 물려받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나다가 부유한 신부의 양자가 되었다. 비용의 유년시절은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대학 석사 자격을 얻을 정도로 머리는 능숙했다. 만약 이러한 재능을 그대로 유지했더라면 비용은 중세의 평범한 대학교수 또는 학자로서의 안락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 시절부터 비용은 난폭한 성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젊은 혈기를 주체할 수 없었던 비용은 위험한 장난, 패싸움, 도박, 그리고 민중 봉기 등에 가담했다. 물론 당시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직후로서 강토는 황폐되고 도처에 도적과 살인과 방화가 잇따라 민심이 흉흉하던 때이고 당시의 학생들 중에는 부랑자, 불한당이 많았으므로 비용도 그 때까지는 이런 부류에 속하였다. 이 때부터 비용은 중세 말의 아웃사이더(Outsider)로서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1980년에 故 송면 연세대 불문과 교수가 번역하고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낸『유언시: 비용 시전집』

판형은 문고판과 같은 크기다. 알라딘과 일부 공공도서관 검색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희귀본이 되었다.

 

 

 

비용의 무절제한 성격은 결국에는 피를 부르는 살인에 이르게 되었고 비용은 평생 도망과 방랑 생활을 해아만했다. 1455년에는 여자 문제로 인한 사소한 말다툼 끝에 교회 신부를 죽이고 도망쳤다. 이듬해에 사면령이 내려 파리로 돌아왔으나, 1456년 절도 사건으로 또다시 몸을 피해야만 하였다. 이 무렵 비용은 『유증시』(遺贈詩, Le Lais) 등의 많은 시(발라드, Ballade: 중세 유럽에서 형성된 자유로운 형식의 짧은 서사시)를 썼다. 한 권의 작은 책자를 남긴 채 비용은 파리를 떠나 앙제라는 이름의 소도시로 피신한다. 파리 시로부터 추방령을 받은 이후부터 그의 신세는 완전한 부랑자, 거지가 되어 여러 도시를 전전한다. 그 후로 비용의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일부 남아 있는 문헌들을 통해서 비용은 또다시 감옥에 투옥될 정도로 살인과 절도 행각을 멈추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때마침 왕위에 오른 루이 11세가 모든 죄수에게 사면령을 내리게 되여 사형수 신세로 감옥에 갇혀있던 비용은 풀려나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의 나이 겨우 31세(32세로도 추정)였지만 그 동안 겪은 가난과 고생과 방랑과 감옥살이로 심신이 모두 병들어 있었다. 이제 죽음의 예감도 깊이 들었던지 그는 그의 생활을 총람하는『유언시』(遺言詩,Le Testament)를 썼다. '유언시집'이라고 불리우는 두 번째 시집은 그의 대표작이다.

 

하지만 비용의 불행과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또다시 우연한 패싸움에 끼여들어 감옥에 투옥된다. 이미 여러 차례의 전과가 있었기 때문에 죄가 가중되어 교수형의 선고를 받는다. 비용은 당시의 최고 재판소에 탄원서를 내어 겨우 사형을 면했으나 10년 동안 파리 입성을 금하는 추방령을 받았다. 이후부터 그의 이름은 역사상의 기록이나 사람의 입에서 영영 사라진다. 영국에 가서 살았다고도 하고 지방 소도시에서 신비극을 쓰고 상연했다는 말이 있으나 현재까지도 비용의 최후에 대해 확인할 수 없다.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된 비용을 상상할 수도 있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비용의 발라드는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 노여움, 소망 그리고 비웃음이 섞인 슬픈 호소로 나타나고 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더불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여 신의 자비를 빌고 있다.

 

 

나는 죄인이로다, 그것을 잘 알고 있거늘

그러나 신은 내 죽음을 바라지 아니하고

죄에 괴로워하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실을 고치고 선하게 살기를 원하도다.

내가 죄로 인하여 죽는다 하더라도

신은 산다고 하셨기에

내 양심이 가책을 느낄 때

그 자비로움은 나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

 

그리고 저 고귀한 『장미 이야기』의

제1권 첫머리에는

청춘의 미숙한 마음도 노년이 되어

성숙한 마음으로 보일 때는 용서되는 법이라.

분명히 씌어져 있는데

아, 이 얼마나 진실한 말인가.

그러나 지금 나를 그처럼 가혹하게 비난하는 자들은

성숙한 때의 나를 보려고는 하지 아니하는구나.

 

 

 

 - 『유언시』제14, 15행, 송면 역, 문학과 지성사(p 77~78) -

 

 

 

생전의 비용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 행각들 그리고 기성 사회와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방랑자 신세에 대해서 남몰래 깊은 회한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비용의 범죄 행각은 그 당시 중세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반사회적 행위였다. 신은 온갖 죄와 고난을 짊어지고 있는 비용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어린 양'으로 인도했을지 몰라도 중세의 사회는 아웃사이더에 가까웠던 비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하기에 『유언시』와 『유증시』속에 가난과 실패와 죽음에 부딪친 인간이 거대한 세상 앞에서 외치는 절실한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유언시』와 『유증시』내용의 절반을 이루고 있는 유언이나 유품 분배에 대한 목록은 문학적 형태로 갖추기 위한 하나의 구실에 불과할 뿐이다. 시 속에 그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것, 그의 약점과 죄악, 그의 사랑과 즐거움, 그의 소망과 믿음, 인생의 무상, 죽음의 가혹함 등을 꾸밈없이 솔직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겸손은 오만을 죽인다', 괴짜 화가 카라바조

 

 

 

 

 

 

 

 

 

 

 

 

 

 

 

 

프랑스의 괴짜 시인의 이름이 완전히 잊혀진 지 수백 년이 지난 후, 유럽은 창조성이 무시된 암울한 분위기의 중세를 벗어나 학문과 예술의 창조적 맥박이 뛰게 되는 르네상스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예술의 본고장 이탈리아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르네상스에는 꼭 이들만이 자신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하게 9년 후, 또 다른 '미켈란젤로'가 태어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미켈란젤로 데 카라바조(1571~1610)다. 당대 널리 알려진 화가 미켈란젤로와 구분하기 위해서 소년 시절에 살던 도시의 이름을 그대로 따 붙이게 되었는데 지금의 '카라바조'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카라바조의 삶과 예술은 비용과 무척 닮았다. 카라바조도 비용처럼 유년 시절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양부모의 보살핌 없이 고아로 유년 시절을 보내야했다. 비용보다는 더 어두운 유년시절을 보낸 셈이다. 불안정한 유년 시절에 형성된 성격은 카라바조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음침한 친구들과의 교류, 반복된 투옥, 살인 혐의, 수년간의 도주생활, 때 이른 죽음 등 천재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항목들을 완벽하게 갖춘 가장 찬미 받는 회화의 반항아가 되었다.

 

그러나 문학적 재능마저도 세상의 빛을 받지 못했던 아웃사이더 비용과는 달리 카라바조는 생전에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마음껏 펼쳤으며 그 당시 기성 예술가들과 차별화된 천부적인 미적 감각을 지녔다. 카라바조의 작업 방식은 캔버스에 직접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바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기성 예술가들은 그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사전에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의 그림들이 너무 사실적인데다가 기독교적 교화를 중시하는 교회미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번 퇴짜 맞아 그림을 다시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그림은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는 명암법을 독창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지녔고,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적인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의와도 조화를 이루었다.  

 

 

 

 

 

미켈란젤로 데 카바라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1605~1606년

 

 

 

하지만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조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생명의 위협을 여러 번 느껴야했다. 1606년 카라바조는 결투를 벌이다가 상대방을 죽여 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 도주를 한 상황이라 이탈리아 곳곳에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현상수배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작품의 주문을 받았고 단시간내에 훌륭한 그림들을 완성했다. 신의 구원을 받지 못할 지경에 이른 음울한 삶의 종지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문득 깨달았던 것일까?  주문받은 그림들을 하나씩 완성하고 나면 로마 주위 도시를 중심으로 도주 생활을 거듭했다. 카라바조는 사면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로마로 가던 길에, 서른아홉이라는 이른 나이로 열병에 걸려 죽음을 맞았다. 사면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기 위해서 로마 근처 항구에 머무르고 있던 배 안에서 슘어 지내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는 몰랐지만, 사면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카라바조는 생전에 단 한 점의 자화상을 남지 않았는 걸로 유명하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여러 그림들에 등장하는 살인자 혹은 살해당한 자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바꿔치기 했다. 1606~1607년 사이에 제작된 대표작『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은 카라바조의 청년 시절과 중년 시절, 두 가지 모습을 한 폭의 캔버스 속에 볼 수 있는 이중적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속 소년 다윗이 잘려진 골리앗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다. 다윗의 얼굴은 청년 카라바조를, 골리앗은 중년 카라바조를 의미한다. 그 당시 르네상스에 살았던 이탈리아 인구 수명이 4, 50대를 넘기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30세에 접어든 카라바조는 르네상스 시대의 수명 기준으로 본다면 중년의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의 오른손에 쥐고 있는 칼자루는 악덕을 무찌르는 '정의'를 상징한다. 칼날에는 'HAS O S'라는 수수께끼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약자를 풀이하면 H(UMILIT)AS O(CCIDIT) S(UPEBIAM). 즉 '겸손은 오만을 죽인다'라는 뜻이다.

 

다윗의 표정에는 이스라엘 군사들을 괴롭혔던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무찔렀음에도 불구하고 자랑스러운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적군의 잘려진 머리를 연민의 표정으로 바라본다. 인물들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감정은 '후회'와 '슬픔'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잘려진 골리앗의 머리'는 삶의 말년을 상징하며 '다윗'은 헛된 삶을 반성하고 속죄하는 심정을 담고 있다. 재능만 믿고 오만하고 무절제했던 '카라바조'의 목을 벤 또 하나의 '카라바조'를 그림으로써, 구원에 대한 열망을 나타나고 있다. 순수한 청년 카라바조가 죄 많고 타락한 중년 카라바조를 살해함으로써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던 작가의 깊은 참회가 그림 속에 투영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신으로부터 참회의 구원을 받지 못한 채 도주 생활 도중에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던 두 명의 보헤미안 예술가를 위한 애도가(哀悼歌)

 

 

 

 

 

 

 

 

 

 

 

 

영국의 전설적인 록 그룹 퀸(Queen)의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는 퀸이라는 존재를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게 만든 대표곡이다. 감미로운 멜로디와는 다르게 난해하고 절망적인 가사 또한 유명하다. 노랫말은 한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을 죽인 사형수가 엄마에게 고해성사를 하며 죄의식에 몸부림치며 죄값을 치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때가 되자 죽고 싶지 않다며 발버둥친다. 그 후 사형수의 환상 속에서 재판장에서의 격앙된 분위기와 대중들의 비난 혹은 동정이 담긴 외침들(오페라 부분)이 펼쳐진다. 사형이 확정된 후 좌절과 분노로 오히려 대중들에게 '너희들이 죄가 없으면 내게 돌을 던져라'식의 발악을 부려보지만 결국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내용이다. 퀸의 메인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살인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곡이라는 주장과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소년이 결국 그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아 죽게 되는데, 그 때 남긴 유서에서 곡을 만들었을 거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 슬프고도 절망적인 랩소디 속 가사의 의미와 숨겨져 있는 사연을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 그렇다고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프레디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보헤미안 랩소디'를 MP3에 무한반복해서 들으면 들을수록 비용과 카라바조의 삶과 절묘하게 오버랩되는 건 순전히 개인적인 인상에 불과한 것일까?  남들보다 앞서는 영특한 재능을 지녔지만 살인이라는 비인륜적인 행위를 저지른 바람에 한 순간에 사형수로 낙인찍혀 기성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반항아, 스스로 자신들의 죄를 참회했으나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신의 구원마저도 받지 못해 파멸의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속세의 관습이나 규율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충동적인 기질을 억누르지 못해 평생의 절반을 방랑과 도주 생활로 보내야만했던 삶의 방식이 보헤미안과 흡사하다. 두 명의 예술가들을 위한 애도가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앖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저질렀던 수백년 전의 과오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자신들을 옥죄었던 시대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예술가적 광기와 폭력을 감당하지 못했던, 우여곡절의 사연이 있는 이 두 명의 사형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카라바조가 그림을 그렸을 때 즐겨 사용하던 '키아로스큐로'는 '빛과 어둠'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다.  비용과 카바라조. 이들의 삶에는 인간으로서의 '빛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빛과 어둠' 즉, 선과 악이 동시에 마음 속 깊이 지니고 있는 이중적인 우리가 그들을 살인자라고 해서 돌을 던질 자격이 과연 있을까?

 

 

 

 

 

* P.s  요즘 세상이 전보다 더 흉흉해졌습니다. 본의 아니게 제가 쓴 주관적인 감상글이 '살인'과 연관되어 있고 글 중간 곳곳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단어들이 여러 번 언급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글 마지막에서도 밝혔듯이 이 글은 비인륜적인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글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제가 읽고, 보고, 들은 것, 즉 텍스트, 이미지 그리고 음악에서 찾은 연관성 있는 인상을 해석한 텍스트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상대적인 입장의 감상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만약 글의 내용이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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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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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4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