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죄인이로다', 괴짜 시인 프랑수아 비용  

 

 

 

 

 

 

 

 

 

 

 

 

 

 

 

 

 

 

 

저는 가난하고 늙은 여인입니다.

아주 무식해서 읽을 수도 없어요.

그들은 저희 마을 교회에

하프가 울려퍼지는 천국과

저주받은 영혼들이 불타는 지옥을 그려서 보여주었어요.

하나는 내게 기쁨을 주지만

다른 하나는 두려움을 줍니다.

 

(p 150)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1를 읽으면서 혹시 이런 시구를 발견하셨는지?  시 속 화자인 '늙은 여인'은 교회에 그려진 천국과 지옥 그림 앞에서 신의 성스러움에 탄복하는 동시에 지난 날의 과오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신의 섭리를 강조하는 기독교적인 교훈이 깃든 한 편의 종교시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시를 쓴 자가 절도와 살인 전과가 있는 범죄자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시를 쓴 시인은 프랑스 중세 말기에 활동했던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 1431~?)이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작가일 것이다. 진중권도 책에 이 시를 인용하면서 비용을 '중세 말의 괴짜 시인'라고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시인의 일생을 살펴보면 '괴짜'라기보다는 '괴팍스러움'에 가깝다. 

 

비용의 본명은 프랑수아 드 몽코르비에르. '비용'이라는 성(姓)은 어린 시절 그를 길러주었던 기욤 드 비용이라는 신부에게 물려받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나다가 부유한 신부의 양자가 되었다. 비용의 유년시절은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대학 석사 자격을 얻을 정도로 머리는 능숙했다. 만약 이러한 재능을 그대로 유지했더라면 비용은 중세의 평범한 대학교수 또는 학자로서의 안락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 시절부터 비용은 난폭한 성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젊은 혈기를 주체할 수 없었던 비용은 위험한 장난, 패싸움, 도박, 그리고 민중 봉기 등에 가담했다. 물론 당시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직후로서 강토는 황폐되고 도처에 도적과 살인과 방화가 잇따라 민심이 흉흉하던 때이고 당시의 학생들 중에는 부랑자, 불한당이 많았으므로 비용도 그 때까지는 이런 부류에 속하였다. 이 때부터 비용은 중세 말의 아웃사이더(Outsider)로서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1980년에 故 송면 연세대 불문과 교수가 번역하고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낸『유언시: 비용 시전집』

판형은 문고판과 같은 크기다. 알라딘과 일부 공공도서관 검색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희귀본이 되었다.

 

 

 

비용의 무절제한 성격은 결국에는 피를 부르는 살인에 이르게 되었고 비용은 평생 도망과 방랑 생활을 해아만했다. 1455년에는 여자 문제로 인한 사소한 말다툼 끝에 교회 신부를 죽이고 도망쳤다. 이듬해에 사면령이 내려 파리로 돌아왔으나, 1456년 절도 사건으로 또다시 몸을 피해야만 하였다. 이 무렵 비용은 『유증시』(遺贈詩, Le Lais) 등의 많은 시(발라드, Ballade: 중세 유럽에서 형성된 자유로운 형식의 짧은 서사시)를 썼다. 한 권의 작은 책자를 남긴 채 비용은 파리를 떠나 앙제라는 이름의 소도시로 피신한다. 파리 시로부터 추방령을 받은 이후부터 그의 신세는 완전한 부랑자, 거지가 되어 여러 도시를 전전한다. 그 후로 비용의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일부 남아 있는 문헌들을 통해서 비용은 또다시 감옥에 투옥될 정도로 살인과 절도 행각을 멈추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때마침 왕위에 오른 루이 11세가 모든 죄수에게 사면령을 내리게 되여 사형수 신세로 감옥에 갇혀있던 비용은 풀려나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의 나이 겨우 31세(32세로도 추정)였지만 그 동안 겪은 가난과 고생과 방랑과 감옥살이로 심신이 모두 병들어 있었다. 이제 죽음의 예감도 깊이 들었던지 그는 그의 생활을 총람하는『유언시』(遺言詩,Le Testament)를 썼다. '유언시집'이라고 불리우는 두 번째 시집은 그의 대표작이다.

 

하지만 비용의 불행과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또다시 우연한 패싸움에 끼여들어 감옥에 투옥된다. 이미 여러 차례의 전과가 있었기 때문에 죄가 가중되어 교수형의 선고를 받는다. 비용은 당시의 최고 재판소에 탄원서를 내어 겨우 사형을 면했으나 10년 동안 파리 입성을 금하는 추방령을 받았다. 이후부터 그의 이름은 역사상의 기록이나 사람의 입에서 영영 사라진다. 영국에 가서 살았다고도 하고 지방 소도시에서 신비극을 쓰고 상연했다는 말이 있으나 현재까지도 비용의 최후에 대해 확인할 수 없다.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된 비용을 상상할 수도 있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비용의 발라드는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 노여움, 소망 그리고 비웃음이 섞인 슬픈 호소로 나타나고 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더불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여 신의 자비를 빌고 있다.

 

 

나는 죄인이로다, 그것을 잘 알고 있거늘

그러나 신은 내 죽음을 바라지 아니하고

죄에 괴로워하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실을 고치고 선하게 살기를 원하도다.

내가 죄로 인하여 죽는다 하더라도

신은 산다고 하셨기에

내 양심이 가책을 느낄 때

그 자비로움은 나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

 

그리고 저 고귀한 『장미 이야기』의

제1권 첫머리에는

청춘의 미숙한 마음도 노년이 되어

성숙한 마음으로 보일 때는 용서되는 법이라.

분명히 씌어져 있는데

아, 이 얼마나 진실한 말인가.

그러나 지금 나를 그처럼 가혹하게 비난하는 자들은

성숙한 때의 나를 보려고는 하지 아니하는구나.

 

 

 

 - 『유언시』제14, 15행, 송면 역, 문학과 지성사(p 77~78) -

 

 

 

생전의 비용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 행각들 그리고 기성 사회와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방랑자 신세에 대해서 남몰래 깊은 회한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비용의 범죄 행각은 그 당시 중세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반사회적 행위였다. 신은 온갖 죄와 고난을 짊어지고 있는 비용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어린 양'으로 인도했을지 몰라도 중세의 사회는 아웃사이더에 가까웠던 비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하기에 『유언시』와 『유증시』속에 가난과 실패와 죽음에 부딪친 인간이 거대한 세상 앞에서 외치는 절실한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유언시』와 『유증시』내용의 절반을 이루고 있는 유언이나 유품 분배에 대한 목록은 문학적 형태로 갖추기 위한 하나의 구실에 불과할 뿐이다. 시 속에 그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것, 그의 약점과 죄악, 그의 사랑과 즐거움, 그의 소망과 믿음, 인생의 무상, 죽음의 가혹함 등을 꾸밈없이 솔직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겸손은 오만을 죽인다', 괴짜 화가 카라바조

 

 

 

 

 

 

 

 

 

 

 

 

 

 

 

 

프랑스의 괴짜 시인의 이름이 완전히 잊혀진 지 수백 년이 지난 후, 유럽은 창조성이 무시된 암울한 분위기의 중세를 벗어나 학문과 예술의 창조적 맥박이 뛰게 되는 르네상스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예술의 본고장 이탈리아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르네상스에는 꼭 이들만이 자신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하게 9년 후, 또 다른 '미켈란젤로'가 태어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미켈란젤로 데 카라바조(1571~1610)다. 당대 널리 알려진 화가 미켈란젤로와 구분하기 위해서 소년 시절에 살던 도시의 이름을 그대로 따 붙이게 되었는데 지금의 '카라바조'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카라바조의 삶과 예술은 비용과 무척 닮았다. 카라바조도 비용처럼 유년 시절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양부모의 보살핌 없이 고아로 유년 시절을 보내야했다. 비용보다는 더 어두운 유년시절을 보낸 셈이다. 불안정한 유년 시절에 형성된 성격은 카라바조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음침한 친구들과의 교류, 반복된 투옥, 살인 혐의, 수년간의 도주생활, 때 이른 죽음 등 천재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항목들을 완벽하게 갖춘 가장 찬미 받는 회화의 반항아가 되었다.

 

그러나 문학적 재능마저도 세상의 빛을 받지 못했던 아웃사이더 비용과는 달리 카라바조는 생전에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마음껏 펼쳤으며 그 당시 기성 예술가들과 차별화된 천부적인 미적 감각을 지녔다. 카라바조의 작업 방식은 캔버스에 직접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바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기성 예술가들은 그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사전에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의 그림들이 너무 사실적인데다가 기독교적 교화를 중시하는 교회미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번 퇴짜 맞아 그림을 다시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그림은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는 명암법을 독창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지녔고,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적인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의와도 조화를 이루었다.  

 

 

 

 

 

미켈란젤로 데 카바라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1605~1606년

 

 

 

하지만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조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생명의 위협을 여러 번 느껴야했다. 1606년 카라바조는 결투를 벌이다가 상대방을 죽여 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 도주를 한 상황이라 이탈리아 곳곳에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현상수배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작품의 주문을 받았고 단시간내에 훌륭한 그림들을 완성했다. 신의 구원을 받지 못할 지경에 이른 음울한 삶의 종지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문득 깨달았던 것일까?  주문받은 그림들을 하나씩 완성하고 나면 로마 주위 도시를 중심으로 도주 생활을 거듭했다. 카라바조는 사면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로마로 가던 길에, 서른아홉이라는 이른 나이로 열병에 걸려 죽음을 맞았다. 사면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기 위해서 로마 근처 항구에 머무르고 있던 배 안에서 슘어 지내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는 몰랐지만, 사면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카라바조는 생전에 단 한 점의 자화상을 남지 않았는 걸로 유명하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여러 그림들에 등장하는 살인자 혹은 살해당한 자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바꿔치기 했다. 1606~1607년 사이에 제작된 대표작『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은 카라바조의 청년 시절과 중년 시절, 두 가지 모습을 한 폭의 캔버스 속에 볼 수 있는 이중적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속 소년 다윗이 잘려진 골리앗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다. 다윗의 얼굴은 청년 카라바조를, 골리앗은 중년 카라바조를 의미한다. 그 당시 르네상스에 살았던 이탈리아 인구 수명이 4, 50대를 넘기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30세에 접어든 카라바조는 르네상스 시대의 수명 기준으로 본다면 중년의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의 오른손에 쥐고 있는 칼자루는 악덕을 무찌르는 '정의'를 상징한다. 칼날에는 'HAS O S'라는 수수께끼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약자를 풀이하면 H(UMILIT)AS O(CCIDIT) S(UPEBIAM). 즉 '겸손은 오만을 죽인다'라는 뜻이다.

 

다윗의 표정에는 이스라엘 군사들을 괴롭혔던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무찔렀음에도 불구하고 자랑스러운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적군의 잘려진 머리를 연민의 표정으로 바라본다. 인물들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감정은 '후회'와 '슬픔'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잘려진 골리앗의 머리'는 삶의 말년을 상징하며 '다윗'은 헛된 삶을 반성하고 속죄하는 심정을 담고 있다. 재능만 믿고 오만하고 무절제했던 '카라바조'의 목을 벤 또 하나의 '카라바조'를 그림으로써, 구원에 대한 열망을 나타나고 있다. 순수한 청년 카라바조가 죄 많고 타락한 중년 카라바조를 살해함으로써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던 작가의 깊은 참회가 그림 속에 투영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신으로부터 참회의 구원을 받지 못한 채 도주 생활 도중에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던 두 명의 보헤미안 예술가를 위한 애도가(哀悼歌)

 

 

 

 

 

 

 

 

 

 

 

 

영국의 전설적인 록 그룹 퀸(Queen)의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는 퀸이라는 존재를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게 만든 대표곡이다. 감미로운 멜로디와는 다르게 난해하고 절망적인 가사 또한 유명하다. 노랫말은 한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을 죽인 사형수가 엄마에게 고해성사를 하며 죄의식에 몸부림치며 죄값을 치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때가 되자 죽고 싶지 않다며 발버둥친다. 그 후 사형수의 환상 속에서 재판장에서의 격앙된 분위기와 대중들의 비난 혹은 동정이 담긴 외침들(오페라 부분)이 펼쳐진다. 사형이 확정된 후 좌절과 분노로 오히려 대중들에게 '너희들이 죄가 없으면 내게 돌을 던져라'식의 발악을 부려보지만 결국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내용이다. 퀸의 메인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살인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곡이라는 주장과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소년이 결국 그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아 죽게 되는데, 그 때 남긴 유서에서 곡을 만들었을 거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 슬프고도 절망적인 랩소디 속 가사의 의미와 숨겨져 있는 사연을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 그렇다고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프레디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보헤미안 랩소디'를 MP3에 무한반복해서 들으면 들을수록 비용과 카라바조의 삶과 절묘하게 오버랩되는 건 순전히 개인적인 인상에 불과한 것일까?  남들보다 앞서는 영특한 재능을 지녔지만 살인이라는 비인륜적인 행위를 저지른 바람에 한 순간에 사형수로 낙인찍혀 기성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반항아, 스스로 자신들의 죄를 참회했으나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신의 구원마저도 받지 못해 파멸의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속세의 관습이나 규율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충동적인 기질을 억누르지 못해 평생의 절반을 방랑과 도주 생활로 보내야만했던 삶의 방식이 보헤미안과 흡사하다. 두 명의 예술가들을 위한 애도가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앖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저질렀던 수백년 전의 과오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자신들을 옥죄었던 시대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예술가적 광기와 폭력을 감당하지 못했던, 우여곡절의 사연이 있는 이 두 명의 사형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카라바조가 그림을 그렸을 때 즐겨 사용하던 '키아로스큐로'는 '빛과 어둠'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다.  비용과 카바라조. 이들의 삶에는 인간으로서의 '빛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빛과 어둠' 즉, 선과 악이 동시에 마음 속 깊이 지니고 있는 이중적인 우리가 그들을 살인자라고 해서 돌을 던질 자격이 과연 있을까?

 

 

 

 

 

* P.s  요즘 세상이 전보다 더 흉흉해졌습니다. 본의 아니게 제가 쓴 주관적인 감상글이 '살인'과 연관되어 있고 글 중간 곳곳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단어들이 여러 번 언급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글 마지막에서도 밝혔듯이 이 글은 비인륜적인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글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제가 읽고, 보고, 들은 것, 즉 텍스트, 이미지 그리고 음악에서 찾은 연관성 있는 인상을 해석한 텍스트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상대적인 입장의 감상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만약 글의 내용이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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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4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