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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 짜게 본 역사, 간을 친 문화
유승훈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7월
평점 :
"아~ 옛날이여", 화려했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소금
이틀 전에 방영된 KBS 2TV '비타민'에서 '나트륨 중독'에 대해서 소개했다. 나트륨, 즉 소금 섭취 과잉은 근래 한국인의 나쁜 생활습관으로 가장 중요하게 지적되고 있는 것 중 하나다. WHO의 하루 소금 권장 섭취량은 2,000mg(5g) 이하다. 반면 2012년 현재 한국인의 1인당 1일 평균 소금 섭취량은 WTO 권장량의 2배를 훨씬 넘는 5000㎎(12.5g) 선인 걸로 나타났다. 짜게 먹는 한국인의 식습관이 주요 질병의 증가 원인이 되고 있다. 소금 섭취량이 늘면 고혈압, 심장병 등 주요 만성질환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소금 섭취를 줄이는 방법 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금에 대한 인식은 딱 두 가지다. 음식에 간을 맞추기 위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조미료. 그리고 반대로 설탕과 마찬가지로 너무 많이 섭취하면 건강에 해로운 조미료. 좋든 나쁘든 간에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소금의 존재는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조미료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소금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지금과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금은 놀라울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소금은 생존상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금을 얻기 위한 노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다. 본격적으로 정착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신석기 시대의 주거 지역의 특징은 강이나 바다가 근접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이 곳에 정착하게 된 배경을 어획 방법의 발달로 보고 있지만 놀랍게도 이 때부터 고대 사람들은 바다를 통해서 소금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소금이 산출되는 해안, 염호가 있는 장소는 교역의 중심이 되고, 산간에 사는 수렵민이나 내륙의 농경민은 그들이 잡은 짐승이나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기 위하여 소금 산지에 모이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이나 아시아에서도 소금을 얻기 위한 교역로가 발달되었다. 또, 고대 그리스 사람은 소금을 주고 노예를 샀으며 고대 로마의 병사들은 월급으로 소금을 받았다. 그래서 '급여, 월급'을 뜻하는 영어 Salary가 소금의 Salt에서 비롯되었다. 간략하게 이 정도의 역사적 상식만 본다면 과거의 소금은 그저 음식을 위한 조미료가 아니라 경제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또는 재화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소금이 없다면 나라가 발전 못해요, 아~ 미운 소금~~♬"
세계사에 영향을 줄 정도로 화려했던 역사라고 해서 우리가 흔하게 보는 소금을 그저 짠 맛의 조미료로만 보지 말지어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렇지 한국사에서도 소금의 존재와 그 영향력은 무시 못한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소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전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염전에서 얻게 되는 소금량에 따라 국가의 발전에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을 주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에도 소금은 그에 동등한 가치를 지닌 생산물과 거래, 교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내륙 지방의 사람들은 소금 맛 보기가 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해안 지방에 위치한 염전업자들 간에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는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렇다보니 염전업자는 최대의 이윤을 얻을 정도로 최고의 직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소금을 부엌에서 볼 수 있는 단순 조미료라기 보다는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경제적 재화 정도로 인식했다. 고려의 시조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위한 재정이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소금의 최대 생산지였던 전남 지역을 점령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고려 말의 충선왕은 '각염법'이라는 소금 전매법을 시행하였다. 국가가 직접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백성들이 소금을 얻기 위해서는 세금의 일종인 '소금세'를 지불한다거나 또는 일종의 생산량을 교환해야만 했다. 소금 생산 및 판매로 벌여들인 소금세와 교환 거래를 통해 국가 재정을 좀 더 수월하게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국가 또는 관리가 염전사업에 관여하다보니 정작 소금이 필요한 백성들이 피해를 얻는 문제점이 속출하게 되었다. '국가 재정'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급하게 찾다보니 소금을 요리에 필요한 조미료라는 아주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용도를 잊고 말았다. 국가가 시행하는 소금 전매법에 관여하는 왕족 또는 권문세족들에게 소금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본의 용도로 보고 있었다. 소금이 권세가들만을 위한 귀한 최상급의 조미료가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고려 정부도 소금을 자신들과 가까운 왕족, 고급관리들에게 분배할 정도였다. 그래서 백성들이 일정 기간 소금세와 생산량을 바쳐도 백성들이 양손 한 가득 소금 담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 원나라의 간섭에 의한 조공을 피하기 위해서 만든 각염법이 아이러니하게도 지배층들의 폐단을 더욱 낳게 만들었으며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어주었다. 고려 말의 소금 전매법의 폐단은 조선 건국 초기까지 이어질 정도로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해나가야 할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었다. 조선 건국의 공신 중의 한 사람인 삼봉 정도전이 태조에게 염법의 문제점을 지적할 정도로 국가 발전에 있어서 소금 개혁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염법 개혁에도 불구하고 '국가 및 왕권 강화를 재정 확보'와 '백성들의 민심 얻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누가 소금을 외면하게 만드는가
어떻게 보면 소금은 지금이나 과거나 중요하면서도 백성들에게 불편을 준 양면적인 존재다. 오늘날에는 건강상 해로운 조미료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과거에는 권세가들의 배만 불리게 만드는, 백성의 생활을 괴롭게 만드는 조미료였다. 그러나 역사를 볼 땐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해야 하는 법. 국가 재정 확보에 있어서 농산물과 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소금의 존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조선의 성군 세종은 오랜 기근 생활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의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한 복지정책의 재원으로 소금을 사용했으며 임진왜란 시기 속에서도 백성들의 식량과 군사들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한 해결 방법을 류성룡은 염전에서 발견했다.
자염은 질박한 토기에 바닷물을 담은 뒤에 끓여서 소금을 채취하는 방식이다. 천일염은 갯벌에 바닷물을 가둔 뒤에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말려 소금을 얻는 방식이다. 자염이 사라진 이유는 일제 강점기 시절, 산업과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국책 사업에 밀리는 바람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바람과 햇볕에 의해 말리는 천일염의 등장으로 인해 오랜동안 누려온 화려한 역사를 뒤로 한 채 사라졌다. 그러나 천일염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염전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 식생활에서 음식의 간을 조절하는 것은 소금, 간장, 된장 등 소금기가 있는 조미료였다. 우리 여성들은 짠맛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화려했던 '짠맛의 시대'는 가고 '단맛'과 '매운맛'의 시대가 왔다. 짠 음식과 소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널리 퍼지고 있다. 역설적으로 소금을 불필요하게 짜게 만들어 건강을 해치게 한 장본인은 인간이었다. 부엌에 있어야 할 소금을 그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황금'으로만 봤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방대한 역사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는 소금의 화려했던 블루스가 너무나도 짜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