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명(Scientific Name)은 만국공용어에 해당하는 생물 이름이다. 인간의 학명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생물 종의 학명을 붙일 경우 이명법(二名法)을 따른다. 라틴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속명(genus)과 종명(species)을 조합하는 방식이다. 학명의 ‘Homo’는 속명이고, 학명의 뒤에 오는 것이 종명이다. 속명의 첫 글자는 대문자, 종명의 첫 글자는 소문자로 표기한다.

 

 

 

 

 

 

 

 

 

 

 

 

 

 

 

 

 

 

*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김영사, 2017)

 

 

 

올해 국내에 출간된 유발 하라리(Yuval Harari)의 저서 제목은 호모 데우스. 번역본을 펴낸 출판사는 호모 데우스‘Homo Deus’로 표기했다. , 그렇다면 이 단어 표기는 맞는 것일까, 틀린 것일까?

 

학명 명명법에 따르면 ‘Homo Deus’는 틀린 표기다. (god)을 뜻하는 라틴어 ‘Deus’는 종명이다. 종명의 첫 글자를 소문자로 표기하는 방식을 따르면 ‘Homo deus’라고 써야 한다.

 

지금까지 알라딘에서 제목 표기를 날카롭게 지적한 리뷰를 두 편 봤다. 옳은 지적이다. 처음에 나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런데 ‘Homo Deus’가 틀렸다고 할 수 없다.

 

 

 

 

* ‘Homo Deus’가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이유 1 :

호모 데우스원서명은 ‘Homo Deus’.

 

 

 

 

 

 

 

라틴어 표기가 틀렸다고 해서 번역본을 만든 김영사가 잘못된 것일까? 그러한 문제 제기는 김영사 출판사 입장에선 억울하다. 원서를 펴낸 출판사에 라틴어 표기 문제를 따져야 한다. 아니면 호모 데우스를 처음으로 만든 유발 하라리에게 따지든가.

 

 

 

 

* ‘Homo Deus’가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이유 2 :

‘Homo Deus’는 정식 학명이 아니다.

 

‘Homo Deus’는 학명의 속명(Homo)‘Dues’를 결합한 합성어. ‘Homo Deus’는 유발 하라리가 만든 학명이 아니라 신조어. 학명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국제 명명규약을 따른다면 ‘Homo Deus’ 표기는 틀렸다. 그렇지만 ‘Homo Deus’는 명명규약을 따를 필요 없는 신조어이며 정식 학명으로 등록되지 않았다. 호모 데우스는 학명이 아닌데, 학명 명명법대로 표기할 필요가 있을까?

 

 

 

 

* ‘Homo Deus’가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이유 3 :

‘Homo Deus’는 하라리가 의도한 ‘Deus Homo’의 패러디일 가능성이 있다.

 

 

 

 

 

 

 

 

 

 

 

 

 

 

 

 

 

 

 

 

 

가톨릭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7)‘Deus Homo’을 설명한 항목이 있다. ‘Deus Homo’예수를 가리키는 라틴어다. 예수는 (Deus)과 인간(Homo)의 특성을 동시에 지닌 신인(神人)이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볼 때 ‘Homo Deus’신이 된 인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가 신이 된 인간인지 아니면 인간이 된 신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까지 파고들면 글이 엉뚱한 방향으로 향할 수 있으니 이 문제는 제쳐 두자. 예수를 신이 된 인간으로 본다면 ‘Deus Homo’‘Homo Deus’는 표현상 같은 의미다. 그러나 하라리가 만든 ‘Homo Deus’의 진짜 의미(정보와 데이터를 숭배하는 미래의 인류, 호모 사피엔스의 능력을 초월한 인류)를 생각한다면 가톨릭 용어와 무조건 같다고 하면 안 된다. 본질적으로 의미가 같은 두 단어는 서로 다른 갈래에서 설명해야 한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김영사, 2015)

    

 

 

나는 하라리가 ‘Deus Homo’에 착안해서 책 제목을 정했을 거로 생각한다. 하라리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의미 있는 발명이라고 했다. 인간이 인본주의를 지향하기 전에는 종교에 의지했고, 자신들이 창조한 (Deus Homo)’을 숭배했다. 호모 데우스는 신도, 인간도 아닌 데이터를 숭배한다. 이제 미래의 인류는 신 대신 기술에 의존한다. 호모 데우스의 은 노화와 죽음을 극복하는 불멸의 존재, 성서에 등장하는 신이 아니다. 미래의 'Deus'는 현실에서 가능할 법한 신이다. 이 견해는 개인적인 추정이므로 반론이 제시되면 폐기될 수 있다.

 

 

 

 

 

 

* annotate (입력: 20171123일 PM 16:27)

 

‘Homo Deus’‘D’가 대문자로 표기된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책 제목으로 사용된 단어의 첫 글자는 대문자로 쓴다. (syo님의 의견) 호모 데우스원서의 본문에 ‘Homo deus’로 표기된 것을 psyche이 확인했다. 따라서 책 제목의 ‘Homo Deus’ 표기는 문제 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필자의 두 번째 의견과 세 번째 의견은 무용하게 되었다. 아주 간단한 이유가 있는데도 미처 알지 못했고, 헛다리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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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3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23 13:03   좋아요 0 | URL
유발 하라리의 책을 철저하게 평가하려면 책 한 두번 읽어선 안 될 거예요. ^^

syo 2017-11-23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그냥 궁금해서 여쭤보는건데요,
원래 책 제호는 of 같은 것만 빼고 단어마다 다 첫글자를 대문자로 쓰지 않나요?

제가 원서를 못봐서 그러는데, 책에서 제호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 그냥 명사로 사용할 때도 D를 대문자 표기하고 있나요? 유발하라리 홈페이지에서는 구분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cyrus 2017-11-23 13:0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책 제목의 단어 첫 글자는 대문자로, 전치사의 첫 글자는 소문자로 표기해요.

유발 하라리 공식 웹사이트를 확인해봤어요. 책 제목을 ‘Homo Deus‘라고 표기했지만, 책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Homo deus‘라고 나와 있어요. 프시케님 말씀대로 원서 본문에는 ‘Homo deus‘라고 적혀 있군요. ^^

psyche 2017-11-23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의 표기법에 대해서도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할수있군요. 저는 암 생각 없었는데... syo 님의 말씀이 맞는거 같아요. 제목이기 때문에 첫글짜를 대문자로 쓴거 같은데요? 혹시 해서 아마존에서 이북 샘플 가서 확인해봤더니 본문에는 Homo deus 라고 되어있어요.

cyrus 2017-11-23 13:12   좋아요 0 | URL
저도 syo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책 제목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글을 수정할 때 syo님과 프시케님의 의견을 반영하겠습니다. ^^

표맥(漂麥) 2017-11-23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 책인데... 한번도 이런 방향으로 생각조차 못했답니다... 부럽(?)습니다...^^

cyrus 2017-11-24 11:27   좋아요 0 | URL
부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에요.. ㅎㅎㅎ 알아두면 쓸데없는 내용입니다. ^^;;
 
담론과 진실 미셸 푸코 미공개 선집 2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동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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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의 별명은 미친 소크라테스였다. 이 별명을 붙여준 사람은 소크라테스(Socrates)의 제자 플라톤(Plato)이다. 진중권의 설명을 빌리자면, 소크라테스는 입으로 논증하는 철학자였다면 디오게네스는 몸으로 논증하는 철학자였다.[1] 실제로 디오게네스는 자기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파철학자였다. 세계 정복을 나선 알렉산드로스(Alexandros)가 디오게네스를 부러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디오게네스는 평생을 거리에 버려진 커다란 통 속에서 살았다. 그는 햇볕을 쬐기 위해 통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마침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를 만나러 왔다. 알렉산드로스는 철학자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해 보라고 했다. 디오게네스는 왕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주세요.” 디오게네스는 이 말 한마디로 콧대 높은 젊은 왕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왕의 부하들이 무례한 디오게네스를 꾸짖으려고 하자, 왕은 부하들을 말리면서 만약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었을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모두가 부러워하고 숭앙하는 권력자였다. 디오게네스는 돈도 권력도 없는 거지였지만 당당했다. 한 사람은 세계 정복을 열망했고 다른 한사람은 햇빛이면 만족했다. 디오게네스는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식의 가치를 조롱하고 비판했다. 그의 냉소적인 철학을 견유주의(Cynicism)라고 부른다. 디오게네스가 권력을 냉소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디오게네스의 발언 태도는 모든 것을 말하기’, ‘솔직하게 말하기’, ‘진실을 말하기 등에 가깝다. 이 말하기 행위는 고대 그리스어로 파레시아(parrhesia)’라고 한다. 파레시아는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이 지향했던 삶의 원칙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인생 말기에 파레시아를 주목했다. 담론과 진실, 파레시아1982년 프랑스에서 진행되었던 파레시아1983년 미국에서 총 여섯 번으로 진행되었던 담론과 진실 강연 내용을 채록하여 정리한 것이다.

 

파레시아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교 텍스트에서도 등장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파레시아는 신과 교인과의 관계 속에서 신의 교리에 진실성 있게 접근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의 파레시아는 고대 철학자들과 푸코가 이해하는 파레시아와 전혀 다른 개념이다. 푸코의 파레시아는 신이 아닌 사회 전체에 적용되며 비판적 실천에 초점을 맞춘다. 푸코는 강연에서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비극(悲劇) 작품, 플라톤 등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의 문헌들을 인용 소개하여 파레시아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파레시아는 권력자 앞에서 담대하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이며 민주정 체제가 허용하는 시민(아테네 시민권에 여성과 노예는 포함되지 않았다. 아테네의 여성은 정치 참여에서 제외되었다. 파레시아의 시대적 한계이다)의 기본 권리이다. 파레시아를 행하는 파레시아스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대중의 분노와 역반응을 감수하면서 발언한다.

 

푸코는 소크라테스와 견유주의의 파레시아를 비교, 분석한다. 소크라테스는 윤리적 파레시아다.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명제 너 자신을 알라(Nosce Te Ipsum)’는 자기 자신에게 향한 질문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의심하고 반성하는 행위가 함축되어 있다. 즉 자기를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자기 돌봄이다. 자신의 무지를 정확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파레시아 개념과 중첩하게 된다. 견유주의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급진적 파레시아다. 견유주의 철학자들은 과격한 방식으로 기성 질서를 비판한다. 소크라테스는 기성 질서를 비판하면서도 현재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견유주의 철학자는 주류를 거부한다.

 

푸코는 파레시아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현실 전체를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삶의 기술로 이해한다. 따라서 파레시아스트가 되려면 먼저 자아비판이 이루어져야 하며 대중 앞에서 떳떳하게 진실을 알리는 담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파레시아스트도 상대방의 정당한 비판을 받을 수 있으며 상대방의 의견에 경청해야 한다. 파레시아스트의 말 속에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실천 의지가 반영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 사회에 자발적으로 비판하는 파레시아스트가 많이 나올 수 있을까? ‘숙의(熟議)’, 말 그대로 깊이 생각하고 충분한 의논을 통해 문제를 판단하는 사회 분위기가 정착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논의를 위해 판을 잘 깔아야 한다. 숙의민주주의 발전이 더딘 사회에 파레시아스트의 등장을 바라는 것은 근시안적인 기대감이다. 썩은 내 나는 입으로 민주주의를 들먹이면서 파레시아스트인 것처럼 행세하는 형편없는 자가 나올 수 한다. 우리는 '진실'의 가면을 쓴 사기꾼을 경계해야 한다.

 

 

 

 

[1] 진중권 앙겔루스 노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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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1-21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에서 퍼질러 앉아 있는 디오게네스가 생각납니다.^^. 사리사욕을 버려야 ‘파레시아‘가 가능하겠지요...

cyrus 2017-11-22 14:04   좋아요 1 | URL
주류에서 파레시아스트가 나오기 힘들어요. 주류를 비판하면 주류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잃어버려요. 사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주류로부터 배척당해요.

2017-11-21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22 14:10   좋아요 1 | URL
대구 경북은 보수의 텃밭이 아니라 순실그네가 활개치던 놀이터에요.
 

 

 

 

주말에 TV 채널을 돌리다가 케이블 채널에 하는 <차트를 달리는 남자>를 보게 됐다. 내가 본 방영분은 54미확인 생물체이다. 방송 중간 부분부터 봤는데 두 MC가 미확인 비행물체 로드(Rod)’를 소개하고 있었다. 로드가 7위로 소개됐고, 6위는 반인반수 박쥐 인간악어 인간이었다. 방송은 박쥐 인간과 악어 인간 미라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들의 출처는 위클리 월드 뉴스(Weekly World News)’였다.

 

위클리 월드 뉴스가짜 뉴스를 진지하게 사실인 것처럼 보도하는 미국의 신문이다. 1979년에 창간된 주간지였으나 2007년에 폐간되었고 현재는 인터넷 신문으로 제작되고 있다. 이 신문을 인용한 기사가 있으면 믿고 거르면 된다. 그리고 위클리 월드 뉴스에서 나온 사진은 조작된 것이다. 작년에 위클리 월드 뉴스를 짧게 소개한 글을 쓴 적이 있다.

 

 

 

* [인간의 변신] 20161022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8851097

 

 

 

이 신문의 정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위클리 월드 뉴스의 엉터리 기사를 진짜라고 믿는다. 국내 기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8, 90년대 해외 사정을 잘 몰랐던 국내 언론들은 이상하고 재미있는 해외 토픽을 전달하기 위해 위클리 월드 뉴스를 자주 인용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위클리 월드 뉴스를 인용한 수준 미달의 기사가 나오고 있다.

 

 

 

* [박쥐소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재포획’] (코리아헤럴드, 2015112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44&aid=0000164138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박쥐 인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웃긴 건 탈출한 박쥐 인간이 다시 포획된 해가 1997년이다. 코리아헤럴드 소속 기자는 십 년이나 지난 가짜사건을 실제로 일어난 일인 것처럼 뻔뻔하게 기사를 썼다.

 

 

 

* [오바마-레이건, ‘큰바위 얼굴조각상 합류 각축전?] (연합뉴스, 201312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6057815

 

연합뉴스가 인용한 위클리 월드 뉴스 기사 내용이 황당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러시모어산에 자신의 얼굴 조각을 새기는 작업을 착수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네티즌 한 명이 위클리 월드 뉴스를 인용한 연합뉴스 소속 기자의 글에 비판 댓글을 달았으나 기자는 피드백을 하지 않았다‥….

 

 

 

* [23세 유명 여가수, 5세 연하 아이 임신설] (문화일보, 2012121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1&aid=0002138027

 

2012년에 위클리 월드 뉴스는 두 번이나 최악의 기사를 퍼뜨렸다. 하나는 2012구탄 행성지구 종말설, 또 하나는 미국의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 임신설이다. 말도 안 되는 루머를 버젓이 인용한 국내 기사가 한 두 개가 아니다.

 

 

 

* [러 푸틴, “내가 오바마 조종할 것”] (매일경제, 201231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9&aid=0002659317

 

위클리 월드 뉴스는 러시아의 푸틴 총리가 오바마를 위해 1억 달러의 대선 자금을 기부했다고 보도했다.

 

 

 

* [신출귀몰 칠면조에 동네 발칵12명이나] (매일경제, 201231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9&aid=0002659020

 

칠면조를 무시무시한 괴물로 둔갑한 위클리 월드 뉴스 클라스‥….

 

 

 

* [독일 정부, ‘UFO·외계생명체극비 문서 공개할까] (서울신문, 2011123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81&aid=0002246947

 

서울신문 기사에 히틀러와 외계인과 만나는 장면이 찍힌 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설마 이 사진을 진짜로 믿는 사람이 있으려나?

 

 

* [코카콜라 맛의 비밀이 인간의 침이라고?] (한겨레, 201112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8&aid=0002078322

 

이 기사에 이런 댓글이 달려 있다. “이젠 펩시만 마셔야겠군.” 이래서 가짜 뉴스는 위험하다.

 

 

 

 

 

위클리 월드 뉴스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 설립된 특이한 언론사이다. 위클리 월드 뉴스 창간한 제네로소 포프(Generoso Pope Jr.)는 타블로이드 가십 매체인 <내셔널 인콰이어러(The National Enquirer)> 소속 언론인이었다. (악이 악을 낳는다?) 위클리 월드 뉴스 편집장을 맡은 에디 클론츠(Eddie Clontz)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 기사를 전달하는 것이 위클리 월드 뉴스의 일차적 목표라고 밝혔다.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로 시작된 요지경 박물관시리즈는 위클리 월드 뉴스에 보도된 내용들을 소개한 책이다. 요지경 박물관 1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악어 인간 미라에 관한 내용이 있다. 어렸을 때 그 책을 보면서 정말로 악어 인간이 있는 줄 알았다. 이 책이 잘 팔렸는지 출판사는 제목을 은근슬쩍 바꿔 가면서 후속 작을 냈다.

 

 

 

요지경 박물관 1: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요지경 박물관 2: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요지경 박물관 3: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요지경 박물관 4: 아니, 세상에 또 이럴 수가

요지경 박물관 5: 아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요지경 박물관 6: 아니,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요지경 박물관 7: 아니, 세상에 정말로 이런 일이

요지경 박물관 8, 9: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출판사가 새로운 제목을 정하는 것이 귀찮았는지 8부와 9부 제목은 1부 제목과 똑같다.

 

 

 

 

 

 

 

 

 

 

 

 

 

 

 

 

 

* 요지경 신문(하나로, 1997)

 

 

 

요지경 박물관 시리즈를 만든 출판사는 신문지 형태로 편집한 요지경 신문을 펴내기도 했다.

 

 

 

 

 

 

 

 

 

 

 

 

 

 

 

 

 

 

* 노아 스트리커 (니케북스, 2017)

 

 

 

노아 스트리커의 에 위클리 월드 뉴스를 인용한 내용이 나온다.

 

 

 

2012위클리 월드 뉴스(Weekly World News)는 자신들만의 이론을 발표했다. “적대적인 흰올빼미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미국 시민들을 공격하기 위해 외계 군단과 손을 잡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흰올빼미들은 201111월에 지구에 착륙하여, 페루 돌고래의 떼죽음을 일으키기도 한 구탄 행성인들과 내통하고 있었다. (146~147)

    

 

 

2012년 지구 종말설이 슬슬 유행하기 시작할 때 위클리 월드 뉴스도 대중을 속일 수 있는 '떡밥'을 던졌다. 이 언론사는 구탄 행성에 사는 외계인들이 2012년에 지구를 침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흰올빼미들이 미국 시민들을 공격하기 위해 구탄 행성 외계인들과 손을 잡았다는 황당한 소설도 썼다. 의 저자는 위클리 월드 뉴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냥 이런 황당한 주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 진중권 아이콘(씨네21북스, 2011)

* 진중권 이미지 인문학 1(천년의상상, 2014)

 

 

 

 

가짜만 전달하는 위클리 월드 뉴스가 못마땅해도 그들의 뚝심 있는 행보에 긍정성을 읽어낼 수 있다. 가짜를 양산해 내는 위클리 월드 뉴스 소속 기자들은 파타피직스(Pataphysics)’의 유희를 즐긴다. 파타피직스는 형이상학(Metaphysics)를 패러디한 것으로, 진짜와 가짜가 섞인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를 지향한다. 파타피직스는 인간을 뛰어난 지성을 가진 존재로 돋보여주는 이성에 반발하는 학문이다. 인간이 아무리 똑똑해도 가짜에 익숙해지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한다. 파타피직스 세계에 있는 자는 상상력을 하나의 자양분으로 삼고 자라난다. 현실의 한계를 깨뜨리는 전복적 상상력은 예술 창작의 힘이 된다. 하지만 뭐든지 지나치면 독이 된다. ‘가짜를 악용하는 자들은 현실을 왜곡하여 사회 불안을 조장한다. 우리가 사는 파타피직스 세계에 악마가 있다. 그 악마란 바로 우리를 속이고 위협하는 가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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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1-21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해요.. 이 많은 기사와 자료들을 어떻게?

cyrus 2017-11-21 18:52   좋아요 0 | URL
작년에 처음 위클리 월드 뉴스를 알게 되면서 관련 자료를 스크랩했어요. 사실 검색만 하면 한 시간 안에 기사 네다섯 개 금방 찾아낼 수 있어요. ^^

서니데이 2017-11-2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짜뉴스인 걸 알고서 보면, 일어나지 않은 가상의 일들에 대한 창의적인 기사를 매일 써야하는 기자의 어려움도 이해할 수 있을지도요.오늘은 어제보다는 조금 덜 춥습니다. cyrus님 좋은 오후 보내세요.^^

cyrus 2017-11-21 18:55   좋아요 1 | URL
창작 재능이 가짜 뉴스 만드는 일에 낭비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위클리 월드 뉴스 소속 기자들은 마음대로 기사 내용을 꾸밀 수 있어서 만족한답니다. 우리나라에선 불가능한 일이죠. 명예훼손죄로 고발당해요.. ^^;;

2017-11-21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21 18:55   좋아요 1 | URL
그 노래가 히트했을 때, 요지경 박물관 시리즈가 나왔어요. ^^

이하라 2017-11-21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전에 빌클린턴 미전대통령이 그레이 외계인과 악수하고 있는 시진을 본 기억이 있어요. 진짜라고 믿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런 식의 뉴스들을 필터링을 거치지않고 진짜로 믿어버릴만큼 정교하게 유통시키는건 정말 문제가 큰 것 같아요. 그런 재치는 좋지만 확실히 가짜뉴스인걸 알수 있도록 명시해 주어야 하지않나 싶어요.

cyrus 2017-11-21 19:02   좋아요 0 | URL
빌 클린턴과 힐러리. 위클리 월드 뉴스가 좋아하는 먹잇감(?)입니다. 힐러리가 정계 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 힐러리 외계인 아기 임신설이 보도된 적이 있어요. 위클리 월드 뉴스는 자신들의 임무가 가짜 뉴스 전달하는 것이라고 알렸어요. 문제는 국내 언론 기자들이 가짜 뉴스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보도하는 행태입니다. 그래서 외신 기사를 보면 반드시 출처를 확인해야 됩니다.

transient-guest 2017-11-22 0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그런데 일부 교회들이 전도나 종말론을 피력하면서 사용한 찌라시를 보면 이런 신문들의 기사를 모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1980년대와 90년대의 찌라시에서 제가 기억하는 건 모두 미국에 와서 타블로이드 신문들 일면에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1) 천문학자가 먼 우주에서 천국의 실제 사진을 찍었다 (그리스/로마양식의 조잡한 합성사진), (2) 땅을 파들어가다가 지옥을 발견했다, 소리가 난나, (3) 천사나 악마를 봤다, (4) 타 종교에 대한 공격, 등등. 그 전에는 아마 소년중앙이나 새소년 같은 어린이잡지에서 기획기사에 이런 것들을 많이 가져다 쓴 것 같아요 맥락상. 지금도 ‘일부‘ 언론에서는 영국과 미국에서 발행되는 황색신문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cyrus 2017-11-22 14:17   좋아요 0 | URL
우주에 예수 형상이 찍힌 조작 사진도 있어요. 어렸을 땐 순수해서 실제로 있다고 믿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별 희한한 내용들이 많았어요. ^^;;
 

 

 

손에 쥐고 있는 물체를 놓아 보자. 당연히 물체는 땅 밑으로 떨어진다. 이 현상의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지구 중심으로 향하는 중력때문에 물체가 떨어진다. 그런데 이 중력이라는 이름만으로는 힘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중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과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게 만드는 학문이다. 중력의 실체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면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보면서 우주의 구조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 오정근 중력파,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선물(동아시아, 2016)

 

 

 

중력파의 실체를 규명하는 연구는 아인슈타인이 남긴 큰 숙제였다. 중력파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맞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빛조차도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밀도가 높은 블랙홀들이 충돌할 때 중력파가 방출된다. 이때 우주의 시공간이 연못의 물결처럼 일렁이는 현상이 일어난다. 즉 중력파는 중력과 관련된 파동이다. 그런데 중력은 세상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 중에서 가장 약하다. 1916년에 아인슈타인이 중력파의 존재를 예견한 이후로 100년 동안 중력파가 검출되지 않았다. 이 긴 세월 동안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은 최첨단 실험 장비를 총동원하여 중력파 검출을 위해 노력했다. 결국, 올해 노벨물리학상은 중력파 검출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세 명의 과학자(라이너 바이스, 킵 손, 배리 배리시)들에게 돌아갔다.

 

마침내 아인슈타인의 숙제가 해결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확인한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의 생각에 경탄했다. 그러나 중력파를 예언한 아인슈타인만 치켜세울 수 없다. 중력파를 알기 전에 중력을 먼저 이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중력의 실체를 확인한 과학자들도 경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워낙 대단해서 그렇지 갈릴레오 갈릴레이(낙하운동)와 아이작 뉴턴(만유인력과 세 가지 운동 법칙)의 업적도 분명 위대한 발견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두 명의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더 넓은 시야로 광활한 과학의 세계를 볼 수 있었다.

 

 

 

 

 

 

 

 

 

 

 

 

 

 

* 뉴턴 역학과 만유인력(뉴턴코리아, 2011)

* 중력이란 무엇인가?(뉴턴코리아, 2013)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동시에 떨어뜨리면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것보다 먼저 땅에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직관에 의존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그의 주장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근거로 진공의 실체마저 부정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복잡한 실험 장치를 준비하지 않고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뒤집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반증하는 일명 피사의 사탑 실험은 갈릴레오를 유명하게 만들어줬으나 실제로 진행되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기다란 판자를 비스듬히 세워 경사면을 만들어 공을 굴리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무거운 공이든 가벼운 공이든 같은 속도로 굴러 떨어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갈릴레오는 진공 상태의 공간 속에 쇠공과 깃털을 동시에 떨어뜨리는 사고 실험을 했다. 그는 깃털이 공기 저항을 받아 천천히 떨어진다고 생각했고,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 모두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 갈릴레오 갈릴레이 새로운 두 과학(사이언스북스, 2016)

 

 

 

갈릴레오의 새로운 두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낙하 운동 이론을 반박한 책이다. 이 책에 세 명의 등장인물이 과학과 수학을 주제로 사흘 동안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필리포 살비아티조반니 프란체스코 사그레도는 갈릴레오의 친구로 갈릴레오의 이론을 소개한다. 심플리치오는 가공인물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낙하 운동 이론을 믿으며 진공의 실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새로운 두 과학은 지금 보면 지루한 책이다. 인터넷 검색만 하면 이론에 대한 설명이 다 나오는 시대에 케케묵은 고전 이론들을 보는 것은 지루한 일일 수 있다. 게다가 이 책에 유클리드의 기하학 이론까지 나온다. 사실 과학 비전공 독자가 읽기엔 버겁다. 이해하기 힘든 내용은 넘어가면 된다. 하지만 이 책의 첫째 날 토론셋째 날 토론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낙하 운동 이론을 반박하고, 진공과 중력의 존재를 주장한 내용이 있는 중요한 장이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적용하여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중력의 크기를 계산했다. 그는 갈릴레오와 케플러가 남긴 두 개의 숙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갈릴레오는 땅 위에 떨어지는 물체의 운동을, 케플러는 행성의 궤도 운동을 연구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지구와 우주에서 작용하는 중력의 영향력을 생각하지 못했다. 뉴턴은 두 사람의 생각을 하나로 묶어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제시했고, 그 이론은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알려지게 됐다. 힘의 원리를 증명한 뉴턴의 이론은 19세기 말까지 물리학을 지배한 고전 역학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뉴턴의 고전역학은 시간과 공간, 즉 시공을 절대적인 개념으로 설정했다. 다시 말하면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은 평평한 상태이며 이곳을 지나는 빛은 오직 직선을 따라 일정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중력의 영향을 받으면 시공이 휘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상대성이론을 통해 갈릴레오와 뉴턴이 미처 보지 못했던 중력의 존재, 즉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볼 수 있게 했다.

 

 

 

 

 

 

 

 

 

 

 

 

 

 

 

 

 

 

 

 

 

 

 

 

 

 

 

 

* 조지 가모브 조지 가모브 물리열차를 타다(승산, 2001)

* 리처드 파인만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승산, 2003)

* 리처드 파인만 물리법칙의 특성(해나무, 2016)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레오폴트 인펠트 물리는 어떻게 진화했는가(서커스, 2017)

 

 

 

중력파가 뭔지 알고 싶어서 중력파에 대해서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중력의 실체까지 공부하게 된다. 리처드 파인만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물리법칙의 특성은 복잡한 수식 없이 뉴턴이 중력 이론을 증명해내는 과정을 어렵지 않게 설명한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독자는 조지 가모브조지 가모브 물리열차를 타다80~81을 참고하면 된다. 여기에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 그리고 갈릴레오의 낙하 운동 법칙까지 세 가지 중요 이론을 한 번에 설명한 내용이 있다.

 

 

무엇이 공간을 이처럼 휘게 해서 이런 이상한 효과를 일으키는 건가요?”

 

질량을 가진 물질이 존재하기 때문이지. 뉴턴은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을 때, 중력이 그저 보통의 힘인 줄만 알았어. 예를 들어 두 물체가 고무줄 같은 것을 당기고 있을 때 작용하는 것과 같은 유형의 힘(만유인력의 법칙)인 줄 알았던 거야. 하지만 뉴턴이 간과한 신비한 사실이 있었지. 모든 물체는 그 무게나 크기에 상관없이 중력장 안에서 동일한 운동을 하고 동일한 가속도를 갖는다(낙하 운동에 대한 갈릴레오의 사고 실험)는 게 그거야. 물론 공기 마찰(좀 더 쉽게 말하면 공기 저항이다) 등을 배제했을 경우의 얘기지. 이걸 뉴턴은 몰랐던 거야. 질량을 가진 물질이 일차적으로 휘어진 공간을 만들어내고, 공간 자체가 휘어져 있기 때문에 중력장 안에서 움직이는 모든 물체의 궤도는 휘어질 수밖에 없어(일반상대성이론). 이런 사실을 최초로 밝혀낸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이지.”

 

괄호 속 문장은 책의 저자(가모브)가 아닌 글쓴이(cyrus)가 쓴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절친한 동료 레오폴트 인펠트가 같이 쓴 물리는 어떻게 진화했는가는 물리학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 아니다. 세상을 지배한 과학 법칙들이 과학자들의 도전을 받는 굵직한 투쟁의 과정을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은 이 책의 서문에서 물리학 교과서를 쓰려 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읽어 보면 교과서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조지 가모브와 파인먼의 책과 비교하면 아인슈타인의 책은 재미가 떨어진다.

 

우리나라 과학 교육은 과학 이론이 증명되는 과정을 생략한 채 바로 결과로 나온 과학 이론을 가르친다. 그러니까 과학 이론의 탄생 과정을 알지 못한 채 그냥 과학 이론 그 자체를 외운다. ‘결과중심의 과학 학습에 익숙한 독자는 하나의 과학 이론이 과거의 과학 이론을 넘어서는 과정을 설명한 내용을 진득하게 읽지 못한다. 아무리 잘 쓴 과학책이 재미없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과거 이론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얕은 독서는 과학책을 읽는 데 단점이 될 수 있다. 과학은 최신 이론만 알면 그만이다? 나는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론위에 또 하나의 이론이 얹어지는 과학의 역사도 알아야 한다. 과거 이론은 쓸모없으면 버리는 쓰레기가 아니라 현재의 과학을 견고하게 세워주는 주춧돌이다.

 

중력파에서 중력으로 거꾸로 이해하면서 공부하는 방식은 현재에서 과거로 향하는 과학의 길을 되돌아가는 여행과 같다. 과학의 길은 갈릴레오, 뉴턴, 아인슈타인 등 과학의 거인들이 산책했던 곳이다. 과학의 길을 거꾸로 걷다 보면 오늘날 이룩한 과학의 진보가 언젠가는 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 나와도 과학에는 절대적인 이론이라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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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11-20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릴레오의 「새로운 두 과학」이 「대화」와는 또 다른 갈릴레오의 저작인 듯 하네요..

cyrus 2017-11-21 13:29   좋아요 1 | URL
네. 《대화》는 천문학을 다룬 책이라면 《새로운 두 과학》은 물리학과 수학을 다룬 책입니다. ^^

2017-11-20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21 13:32   좋아요 1 | URL
학창 시절에 받은 과학 수업이 왜 재미없는지 알았어요. 교과서보다 쉽게 설명한 과학책들이 많았어요. 좋은 과학책 두 세 권 읽으면 교과서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거예요. ^^

나비종 2017-11-20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아이들에게 과학책에 적힌 내용을 100% 믿지 말라고 합니다. 시험볼 때에는 교과서대로 답해야 하지만, 이건 단지 ˝현재의 진실˝ 일 뿐이라고.
<어쩌다 어른>에 나온 김미경 강사가 그러더군요. 실패에도 에너지가 있다고. 그걸 딛고 더 나아가야 성공에 이를 수 있다고. 80%까지 갔다가 실패했을 때 좌절하지 말고 관점을 바꾸라고 하더군요. 그건 실패가 아니라 20% 모자란 성공이라고.
과학사에서 소개되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실패담을 읽을 때마다 자주 뭉클합니다. 과연 그들이 없었어도 이 이론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하구요.

cyrus 2017-11-21 13:34   좋아요 0 | URL
실패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제일 중요합니다. 실패의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여 포기하거나 실패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유형이 있어요. 이러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어요.

transient-guest 2017-11-22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덜덜 합니다. 제가 이공계쪽 공부가 약해서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은 하는데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요. 기회가 되면 계속 책은 구해서 모아놓고 있습니다. 이담에 이형렬씨 (예전에 알라딘 US현지법인 사장/잠깐 팟캐스트도 했었어요)처럼 한 2000권 정도를 읽으면 이공계에도 눈이 좀 떠지려나 모르겠어요.ㅎ 시공간의 왜곡은 저로서는 참 힘든 주제입니다. 공간이 휘는 건 상상이 가능한데 시간이 휘는 건 그 효과나 모습이 전혀 상상되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우주공간을 위/아래/좌/우로 놓고 큰 중력에 의해 휘어지는 그림을 보면 제가 인지하고 있는 세계의 바깥 같아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네요. 글 읽고나니 다시 과학책을 열심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자라고 힘든 걸 해야 운동이 되는 것처럼 책도 지금 편한 책이 좋지만, 좀더 어려운 책을 이해해나가는 과정에서 두뇌활동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cyrus 2017-11-22 14:22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 시공간 왜곡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막연하게 생각하니까 왜 그렇게 되는지 설명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뉴턴 하이라이트> 같은 그림이 있는 과학책을 참고했어요.
 
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인간은 기쁨보다는 슬픔을, 즐거움보다는 아픔을 기억에서 더 쉽게 떠올린다. 굴곡진 삶의 여정에서 힘들고 아팠던 기억들이 유독 더 선명한 상처로 남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세상은 불완전하고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기에 상처는 모든 인간에게 피할 수 없으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의 데뷔작 창백한 언덕 풍경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매우 많은 것들이 생략된 소설이다. 독자들은 에츠코가 영국인 남편과 재혼하기 전에 낳은 게이코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게이코가 왜 자살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게이코는 죽은 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거부한다. 그 대신 일본 나가사키에 살았을 때 만났던 사치코와 그녀의 딸 마리코를 기억한다. 작가가 인물 심리의 흐름에 충실하게 서술하는 만큼, 창백한 언덕 풍경에서는 외부와 내면,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모호하다. 작가는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들며 에츠코의 기억을 재생시키고, 지우고 싶은 상처에 대면하게 한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서평가 이현우창백한 언덕 풍경전후 소설이면서도 여성 소설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1]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시종일관 에츠코, 사치코, 마리코, 이 세 여성의 삶을 교묘히 병치시킨다. 따라서 하나의 단선적 사건이 인과관계를 따라 풀려 가는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에게 소설은 다소 지루하며 모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창백한 언덕 풍경여성 소설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소재가 여성 문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가는 전후 세대 여성의 삶과 심리상태를 조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가족 구성원에 대해 신경을 놓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여성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에츠코 :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난 지금 아주 행복해요. 남편의 일도 잘 풀리고 있고, 원할 때 아기를 갖게 되었지요…‥.”

 

사치코 : “저 애는 사업가가 될 수도 있고, 영화배우가 될 수 있어요. 미국은 그런 곳이에요, 에츠코. 많은 일들이 가능해요. 프랭크 말이 나 역시 사업가가 될 수 있대요. 그곳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요.”

 

에츠코 : “그렇겠지요. 다만 난 개인적으로 현재 삶에 무척 만족해요.” [2]

 

 

나가사키에 살았던 시절, 에츠코는 일본인 남편을 만나 결혼해 첫째 딸인 게이코의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에츠코는 가부장 사회에서 착한 여자로 인정받는 순종형 여성상이다. 그녀는 전업주부로서의 삶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츠코가 어엿한 중산층의 안정된 삶을 영위하며 행복한 여성으로 보이지만, 그녀의 내면에 커다란 상처가 남아 있다. 상처의 원인은 자살한 딸에 대한 기억이다. 에츠코는 죽은 딸의 방에 들어가지 못한다.

사치코는 엄마가 가정을 위해서 해야 할 임무라는 환상에 휩싸여 과도한 몫을 떠안으려고 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개인 사업과 딸 양육을 병행하는 슈퍼 우먼을 꿈꾼다. 장밋빛 미래가 보장될 거로 믿는 사치코는 직업적 성취와 모성의 의무가 대립하면서 느끼게 될 갈등을 예상하지 못한다. 사치코와 마리코는 엄연히 말하면 난민이다. 난민이란 본래 전쟁이나 재난을 당해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사치코와 마리코 모녀는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나가사키에 정착한다. 그러나 나가사키 주민들은 모녀를 외지인으로 인식하여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사회가 불안해지고 규범이 와해하면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지목해 분노를 키우는 모습이 드러난다. 이는 관계 단절로 이어진다. 모녀는 사회의 중심에서 배제된 약자에 속한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이다. 모녀가 사는 허름한 오두막 내부는 외부와 소통이 잘 안 되는 고립되고 자폐적인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내 관심은 사치코의 찻주전자에 가 있었다. 연한 빛깔의 도기로,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좋은 물건이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찻잔 또한 같은 재질의 섬세한 다기였다. 그렇게 사치코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서 나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오두막, 진흙이 노출된 툇마루 바닥과 다기 세트의 대조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난 좋은 그릇을 쓰는 데 익숙해요, 에츠코. 알다시피 언제나 이렇게 살았던 건 아니거든요.” [3]

 

 

사치코가 소유한 찻잔 세트는 고립된 삶을 살던 사치코의 억압된 욕망을 자극한다. 빈곤한 삶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원천봉쇄한다. 가난한 사치코가 화려한 다기 세트를 사용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잠재의식을 읽을 수 있다. 잠재의식 속에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은 동경이 숨어 있다. 사치코는 영어를 유창하게 쓸 줄 안다. 그러나 그녀의 전남편(사치코가 만나는 미국인 프랭크와 다른 인물이다)은 그녀의 외국어 공부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쪽의 언어(일본어)가 다른 쪽 언어(외국어)의 발화를 제한하는 방식은 여성의 입을 말할 수 없는 입으로 만든다. 미국의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의 말을 빌리자면 남편의 강압에 밀린 사치코가 사용하는 일본어는 압제자의 언어이다. 가부장제 안에서 압제자 역할에 있는 남성은 젠더권력뿐 아니라 언어 권력조차 오랫동안 쥐어 왔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압제자의 언어는 여성의 욕망을 억압한다.

 

마리코는 세 여성 중 가장 불행한 인물이다. 전쟁의 폭력성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흔적을 남긴 채 또 다른 폭력의 온상이 된다. 마리코는 전쟁 중에 아기를 살해하는 여자를 목격한 이후로 오랜 세월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숨결이 예민한 마리코의 마음에 배어들었다. 미래에 행복이 있다고 믿는 사치코는 과거에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딸의 심리 상태를 예사롭게 본다. 과거를 잊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자(사치코)와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 미래를 거부하는 자(마리코)에서 생기는 괴리감은 불편함을 낳는다.

 

 

 

 

에츠코가 보는 앞에서 거미를 먹는 시늉을 한 마리코의 돌발행동은 자신의 절망적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사치코의 모성애를 거부하는 저항 행위이다. 거미는 새끼를 보호하고 있는 모성을 상징한다. 설치미술가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는 초대형 거미 형태의 작품에 마망(maman: 엄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르주아는 알을 품는 거미를 통해 어머니의 모성애를 형상화했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상처받기 쉬운 여성의 내면을 표현했다. 거미를 위협하는 마리코의 돌발행동에서 에츠코가 인지하지 못한 정신적 외상(trauma)’을 포착할 수 있다. 에츠코는 마리코의 행동을 바보 같은 짓으로 생각한다.[4] 그녀의 태도는 우리가 타인의 비정상적 행동에 거부감을 느낄 때와 비슷한 반응이다. 마리코의 돌발행동은 혐오스러운 미친 행동이 아니다. 사치코에 대한 분노감을 표출하는 동시에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누군가에게 호소하고 싶은 구조 요청 신호이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독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생략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주제의식을 명확히 보여준다. 작가는 전쟁의 비극성과 더불어 개인의 정신적 외상과 기억을 집요하게 다룸으로써, 아픔과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작가는 에츠코와 사치코가 원했던 가정이 결코 상처받은 여성들의 안식처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춰낸다. 다만 창백한 언덕 풍경여성소설이라고 해서 페미니즘 소설로 단정할 수 없다. 영국의 언론인 로잘린드 카워드(Rosalind Coward)[5]는 막연하게 여성 중심의 소설을 페미니즘 소설로 보는 비평 방식을 경계한다.[6] 작가는 저마다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 사연이 있는 여성들을 위한 섣부른 치유책을 내놓지 않는다. 거짓 희망에 매달리지 않고 고통을 직시하는 것은 과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에츠코는 아픔을 느낀다는 것이 살아있음의 강력한 증거라는 숙명을 받아들인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볼 때 정치적 관심사를 부각하여 여성들의 연대를 강조하는 페미니즘 소설과 거리가 멀다. 창백한 언덕 풍경이 전달하고자 한 여성의 감정과 정서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페미니즘 소설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이시구로의 문체와 언어는 규정짓기 어려운 불안과 혼돈의 심리도, 스쳐 지날 법한 찰나의 상황조차도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숨이 막힐 정도로 섬세한 언어로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헤집는 이야기의 전개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도 치유의 방법이다. 외면하고 싶어도 담담하게 대면하는 것. 그것이 이시구로의 첫 소설을 접한 독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1] 출처: [희미한 언덕 풍경](로쟈의 저공비행, http://blog.aladin.co.kr/mramor/9682147)

 

[2] 58~59

 

[3] 25

 

[4] 108쪽

 

[5] 그녀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푸드 포르노(Food Porno)’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푸드 포르노1984년 로잘린드 카워드가 자신의 저서 <여성의 욕망>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이다.

 

[6] 로잘린드 카워드 여성 소설은 페미니스트 소설인가?, 페미니스트 비평과 여성 문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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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1-20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서평인가에서 보니 가즈오 이시구로 선생
의 데뷔작을 나비 부인에 비교하는 글도 있더
군요.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 않나 싶더군요.

아무래도 작가의 데뷔작이라 그런지 개연성이나
핍진성에서 상대적으로 대표작에 비해 부족하
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cyrus 2017-11-20 14:24   좋아요 0 | URL
제 나름대로 그럴듯한 해석을 제시했지만, 이 소설을 대단한 작품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이야기 곳곳에 독특하면서도 모호한 묘사들이 있어서 속독하기 힘든 소설입니다.

2017-11-20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20 19:43   좋아요 1 | URL
네, 정말 그렇습니다. 이시구로가 쓴 작품들의 제목이 독특해서 제목만 보고 줄거리를 추측하는 것이 불가능해요. 소설을 다 읽고난 뒤에 제목의 의미가 뭔지 생각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