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의 역사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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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나라에게 있어서 5월 18일은...?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 유행처럼 번지는 말이 하나 있다. '북한의 소행이다'라는 말이다.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는 일이 생긴다거나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흔히 등장하는 어휘가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기르던 강아지가 죽어도 ‘북한의 소행’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심지어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세울 때에도 이들에게 ‘북한에나 가라’고 비판 같지 않은 비판을 하기도 하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할 때에도 그렇고, 무상복지를 운운할 때에도 모든 의견들을 ‘좌익’의 입장으로 바라본다.

일부 보수단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세계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반대를 위해 ‘반대 청원서’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일부 보수단체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의 개입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때마침 정부는 새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삭제하려고 했다. 광주시는 새 역사 교과서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삭제키로 한 정부여 결정에 광주지역 80여개 기관 및 시민사회단체들은 정부의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 5.18 민주화운동이 삭제된 것을 규탄하고 이를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교과부의 의견이 수렴, 반영되었다면 2013년부터 중학교에서 사용될 교과서를 펴낼 때 ‘지침’ 구실을 하게 될 ‘2009 개정 교육과정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중심 5.16 군사정변’, ‘5.18 민주화운동’, ‘전두환 신군부 정권’ 등 독재와 민주화 관련 주요 내용들이 모두 삭제되는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이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에 반발하여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이다. 광주 정신은 오늘날에도 계승되어 민주주의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97년 국가 기념일로 채택되기 이전에는 ‘광주 사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광주항쟁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다. 하지만 반대하던 보수단체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식적으로 선정되었다. 민주, 인권, 평화로 상장되는 5월의 광주정신이 온 세계가 인정하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런데 교과부는 한국 민주화 발전 과정에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한국인이라면 기억해야 될 역사를 삭제하려는 역사적 퇴행을 결정하려는 것인가?  정부가 왜 역사 교과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역사와 자국 문화유산의 중요성과 찬란함을 안다면 절대로 역사 앞에 티끌만한 거짓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더욱이 정부가 역사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면 국민들이 설령 반대한다 해도 먼저 나서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올바른 역사를 삭제하자고 나서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한다면 현대사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특히 현대사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 수준이 뒤떨어짐을 느낀다. 필자가 고등학생 3학년 때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할 때에도 제5공화국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1980년대 시절의 내용을 제대로 배웠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역사 교과서라는게 연대기순으로 서술, 편집되어 있다 보니 정작 교과서에는 ‘현대사’라는 명칭을 붙여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현대사’를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학교 현장에서 현대사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설령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단조로운 교과서와 주입식 설명들로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는 것도 역사교육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1980년 광주가 지금 나와 과연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5.18이 우리나라 역사에 어떠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느냐를 깊이 생각해보는 학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우스갯소리이지만 몇 몇 학생들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8.15 광복절과 착각하고 있다는 씁쓸한 기사가 지금까지 나오지 않는 것만 천만다행이다.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5.18광주 민주화 운동은 생소한 그 무엇에 그치고 만다. 사건 자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학생들도 많다. 필자는 지금 듣고 있는 대학 강의 중에 ‘한국정부론’이라는 이름의 전공과목이 있다. 이 과목을 통해서 한국정부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할 기회가 생겼는데 때마침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동영상을 시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5.18 관련 영상을 시청하는 데 졸고 있다거나 딴 짓을 하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광주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현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의 독재정권에서 시작한다.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한 박정희는 마침내 한계에 도달해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1979년 10월 26일 사망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자 세상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로 들떴다. 비상계엄 상태였지만 정치·사회, 문화 전반은 유신체제 하에서 억눌려 왔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후 시민들은 민주화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독재정권 시절부터 군부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온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일당은 오히려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가동해 12. 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 민주화운동세력과 야당의 정적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인 전라도 광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막강한 권력을 움켜쥔 전두환은 실세로 부상했고, 집권을 위해 숨 가쁘게 움직였다. 신군부는 쿠데타로 행정부와 국회 등을 무력화하고 반대세력을 제거하면서 권력 찬탈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군부의 학살만행에 맞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시민 전체가 일심동체로 저항했던 광주는 결국 피의 진압으로 5.18 민중항쟁의 끝을 본다. 하지만 이를 촬영하고 보도한 외신 기자에 의해 국제적으로 한국의 낙후된 민주주의를 알리게 됐고 이후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돼 결국 전두환은 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직선제로 개헌하기에 이르렀다.


저는 광주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 현대사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현실을 가장 많이 규정지은 사건이 바로 5.18 광주라고 봅니다. 5.18은 수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든 사건이었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의 역사> ‘광주의 자식들, 그리고 노무현’ pp 20)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기록물들은 인권, 민주, 법치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세계인들의 가슴에 새기고 정의를 지향하는 인권교육의 중요한 지침서가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척박한 영토에 민주주의적 사회가 자리잡을 수 있었던 촉진제가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이처럼 6.25 전쟁 이후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오늘날 한국 민주화의 초석이 된 5.18의 가치와 그 유산을 세계가 인정해 준 것임에도 극우 보수단체들의 입장과 역사 교과서에서 삭제하려는 정부의 입장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다. 5.18 진상규명과 학살책임자 규명, 그 배후세력 규명 등이 여전히 미완인 상태다.   

  

 

 지금 이 순간, 역사를 기억해야 될 시점

‘역사를 인식하는 사람’은 지나온 과거와 오늘, 다가올 미래의 흐름 속에서 ‘오늘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따라서 역사에 기록될 자신의 행적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 ‘역사를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역사를 인식하지 않기에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오늘의 이익과 눈앞의 권력에 현혹되고, 진실을 조작하고, 미화시키고, 합리화하려고 든다. 진실을 호도하면서 역사가 그들의 뜻대로 기록될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무리 권력의 최면이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역사의 강'이 흘러가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 '역사의 강'은 진실을 향해서만 흘러가기 때문이고, 진실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쓰여지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거꾸로 가고 있다. 역사의 진실 앞에서 어떤 이들은 왜곡하거나 아예 외면하려고 한다. 과거와 현재의 단절의 역사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심지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전 세대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만든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은 점점 퇴색되어져만 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프다. 우리가 정녕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돌이켜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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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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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범주 오류 (category mistake)   

 

70 평생 단 한 번도 우리나라 밖을 여행해보지 못한 A 노인은 드디어 세계여행으로 프랑스 파리의 땅을 밟아보게 되었다. 노인에게는 프랑스 파리의 명물 에펠 탑을 한 번 보고 죽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 그는 관광 안내원과 함께 넓은 파리의 시내는 구경하기 시작했다. 에펠 탑을 보고 싶은 노인은 관광 안내원에게 부탁을 하였다.  

 " 어디를 가든지 꼭 에펠 탑이 보이는 장소로만 안내해 주시오. " 

그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출발하여 개선문을 돌아 다시 노트르담 사원을 거쳐 뤽상부르 공원까지 갔다. 파리에 들리면 꼭 한 번쯤 거쳐야 하는 명소를 볼 수 있었던 매우 즐거운 관광이었다. 여러 곳을 돌아보느라 피곤해진 노인은 차 안에서 깜빡 졸고 말았다. 졸다가 깨 보니 다음 관광지에 도착해 있었다.  

 " 아니, 에펠 탑이 안 보이잖아. 내가 잠깐 조는 사이에 이상한 곳으로 데려왔군.  안내원, 왜 내 말대로 하지 않는 거요?  " 

노인은 안내원에게 막 화를 냈다. 그러자 안내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 저는 손님의 말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곳이 바로 에펠 탑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거든요. "   

하지만 노인은 안내원의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다는듯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 젋은 양반이 지금 이 노인네를 놀리려고 하는거요?  도대체 에펠 탑이 어디 있다는 거요? " 
 

 

A 노인은 왜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에펠 탑이 눈 앞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일까? 노안이라서 에펠 탑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시력이 저하되더라도 희미하게나마 에펠 탑의 형체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안내원이 파리를 처음 와 본 노인을 속이는 것도 절대로 아니다. 분명히 노인은 에펠 탑이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파리의 속담에 '에펠 탑을 보기 싫으면 에펠 탑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파리는 시내 어디에서든 에펠 탑이 잘 보인다. 300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높이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인공건축물이다. 이 말은 파리 시내 어디에서든 에펠 탑이 잘 보이니 만약 보기가 싫다면 오히려 그 밑으로 가라는 뜻이다. 즉 에펠 탑 바로 아래에 가거나 그 곳에 있게 되면 우리가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에펠 탑의 전체적인 모습은 절대로 볼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노인이 에펠 탑을 볼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에펠 탑 바로 아래에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에펠 탑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노인은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것이 얼마나 거대한지 예상하지 못했다. 노인에게는 그저 파리의 유명한 탑으로만 생각했었으리라.  

 

 

(좌) 실제의 에펠 탑 모습  

(우) 로베르 들로네  <에펠 탑>(붉은 탑)  1911년 

 

  

로베르 들로네  <에펠 탑>  1922년

 

하지만 노인의 일화를 논리학적인 면에서 보자면 명백한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라고 말할 수 있다. 범주 오류란, 논리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말들을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뜻한다.  

에펠 탑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노인이나 오랫동안 에펠 탑의 전체적 모습을 사진 속으로만 봤던 사람이나 탑은 '거대하고 어마어마한 높이로 이루어진 건물'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에펠 탑'이라는 하나의 대상을 평면적이면서도 일차원적인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에펠 탑이 꼭 높은 건물에서 바라보면 볼 수 있는 거대한 형태의 모습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에펠 탑 밑에서도 볼 수 있고, 에펠 탑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도 우리가 보지 못했던 탑의 꼭대기도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입체파 화가로 활동했던 로베르 들로네(1885~1941)는 당시 물질문명과 근대화의 상징으로써 에펠 탑을 대상으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에펠 탑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거대하면서도 온전한 형태의 철탑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탑 아래로부터 거대한 조형물을 우러러 보는듯한 시점에서 그린 에펠 탑도 있고, 심지어 하늘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에펠 탑을 그린 것도 있다. 입체파에 심취한 적이 있었던 화가답게 대상을 여러가지 시점의 각도에서 보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기 위해서 들로네는 다양한 형태의 에펠 탑을 그렸던 것이다. 그가 이런 실험적 창작이 가능했던 이유는 거대한 높이의 세모꼴 형태로 이루어진 전체적인 모습의 철탑으로만 보려는 시각적 범주 오류를 극복했기 때문이었다.  

범주 오류는 A  노인과 같은 일반인부터 시작해서 완벽한 논리적인 사고를 갖춘 철학자들마저도 흔히 빠지는 사고적 오류의 형태이다. 요즘 이와 같이 범주를 구분하지 못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데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에 일어난 바로 소설가 공지영의 트위터 사건이다.  

공지영이 자신 트위터에서 종합편성채널에 출연한 가수 인순이와 김연아 선수에게 쓴소리를 잇따라 쓰자 네티즌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인순이 씨는 종편 개국 공동 축하쇼에 출연해 축하무대를 꾸몄고 김연아 선수는 'TV 조선', '채널A' 등에 출연해 개국 축하 인터뷰를 진행한 점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읜 소견을 공 작가가 트위터에 남긴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 진중권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소신을 가지고 종편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개념'에 찬 행동일 수 있으나 그런 소신이 없거나 또는 그와는 다른 소신을 갖고 있다 해서 '개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개념'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다."라고 남김으로써 조용하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종편 개국 축하를 위해 출연하는 연예인들은 단지 '방송채널 축하'를 위해서 의례적인 출연을 했을 뿐이며 자신들의 직업인 방송 활동의 영역을 좀 더 넓히기 위해서, 그리고 대중들에 대한 자신의 인지도를 더 높이기 위해서는 이번에 새로 개국한 방송 채널의 진출에 욕심을 안 가질 수가 없다.  '방송 출연'이 직업인 연예인들 모두 보수적인 입장의 소신을 가졌다고 볼 수 없듯이 그런 소신을 가지지 않는 연예인들이 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언론이 만든 종편 개국을 축하하고 출연한 사실이 '개념 없는'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연예에 종사하는 '예능인'들이 보수 언론의 기분을 맞춰주는 개념 없는 딴따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공 작가보다는 범주 착오를 심하게 범하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FTA 비준안 문제 앞에서 법의 범주와 정치의 범주를 헷갈린 지금 여당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해서 각종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종편과 관련하여 공 작가보다 더 심한 개념 없는 행동이 있다. 자신의 독재정권 유지 일환으로 시행한 언론 통폐합에 대한 유감을 자신의 최측근이 대신하여 종편 개국 축사로 전달하는 전(前) 대통령 그리고 언론 권력의 최정점에 서온 이들이 마치 자신들을 '희생양'이고 '약자'인 양 스스로를 포장하여 스스로를 과거 부조리를 청산하는 것처럼 홍보하는 종편채널을 만든 문제의 언론 같은 경우에는 자기정당화된 범주 오류로 인해 스스로 '개념'을 상실하고 말았다. 


 

 

 Scene #2  차이 속의 연대 (syncretism) 

헬레니즘 문명은 고대 세계에서 그리스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한 시대를 일컫는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은 중동 지역의 서남 아시아에서 고대 이집트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리스 문화와 언어가 그리스인 지배자들과 함께 새 제국 전역에 널리 퍼졌으며, 반대로 헬레니즘 왕국들은 각지 토착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어 필요나 편의에 따라 지역 관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파올로 베로네세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맞는 다리우스의 가족>  1565~1570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3세와의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적장의 가족들을 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지위와 명예를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의 관습과 제도를 인정해 융화정책을 펼친 덕분에 그리스 문화가 각 지역의 문화와 융합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주헌 <역사의 미술관> 중에서, pp 31)

 
   


그리하여 탄생된 헬레니즘 문명은 고대 그리스 세계와 중동, 서남 아시아의 문화가 융합된 산물이었다. 그리스와 아시아 문화의 혼성이 실제로 얼마 정도였느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대체로 사회 상류층의 실용적인 문화 수용으로 보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풍의 의례를 채용하고, 페르시아 왕녀와의 결혼, 페르시아 귀족을 친위대로 채용하는 등 이민족 통치의 수단으로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전대와는 다른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리스인이 이민족을 야만시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세계시민주의가 역설되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진 이질적인 종교나 문화, 학문이 하나로 합쳐지는 현상을 '싱크레티즘(syncretism)'이라고 부른다.

최근 새 역사교과서 개정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집필기준 초안의 쟁점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표현과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의 문제, 이승만ㆍ박정희 전 대통령들의 '독재'를 인정하느냐의 여부였다. 보수 진영은 '자유민주주의'를 그대로 쓰고 '독재'표현은 넣지 않으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를 명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 논쟁의 핵심에 선 ‘자유민주주의’를 두고 진보와 보수 진영 학계 간의 대립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그대로 써야 한다는 진보 진영의 학계와 이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는 보수 진영의 학계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지난 달에는 교육과학기술부가 논란 끝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확정해 발표했지만 일부 학자와 역사관련 단체들의 반발은 여전하다. 뿐만 아니라 이번 집필기준에서는 지난 교과서 집필기준과 달리 5.18 관련 내용이 빠지자 광주지역 범시민사회단체에서 성명을 내고 교과부 장관을 만나 항의하는 등 반발여론이 확산되기도 했다.   

 

 

이처럼 역사교과서 공방이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인 시각에서 교육과정을 손대려고 하는 정부와 역사학자들의 근본적인 문제에 원인이 있다.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학자들 간의 씨름은 교육이 정치적 쟁점화된 데 있다. 현재 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역사교과서는 ‘2007 개정 교육과정’에 맞춰 집필되었다.  

이는 지난 2008~2009년에 집필되어 지난해 검정을 거쳐 올해부터 적용됐다. 그러나 새 교과서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올 2월부터 개정작업이 시작됐다. 8월에는 개정내용이 확정, 이후 3개월 만에 중학 교과서 집필기준이 정해졌다.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르면 중학교는 2013년부터, 고등학교는 2014년부터 새 역사교과서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출판사들이 6개월 만에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제출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현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집필기간을 4년 정도 거친 것에 비하면 이번 경우는 초고속으로 집필하게 되는 셈이다. 문제는 해당 교과서로 공부해야 하는 학생과 이를 가르치는 교사, 또 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검정을 통과해야 하는데 기준이 모호하면 정권 성향에 따라 좌. 우편향 논란을 가중화되기 쉽다는 것이다.

기나긴 고심 끝에 확정 집필기준은 이런 논란을 감안해 '자유민주주의' 용어의 경우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토대로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용어로 하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을 병기했다. 또 '장기집권에 따른 독재화'라는 표현을 써서 진보 진영의 시각을 수용했다. 반면 보수 진영 학계가 주장하고 있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부분은 분명한 사실로 판단해 그대로 쓰기로 했다. 교과부가 제시한 집필기준이 가급적 양측의 주장을 수용하려고 애쓴 흔적이 있었지만 양 쪽 진영의 학계에서는 이에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집필기준 확정과는 별개로 올바른 사관 정립을 위한 학계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관이 아무리 투철해도 교과서가 오류투성이거나, 교사가 사관에 진지하지 못하면 현장의 역사교육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관이라는 게 본래 완전무결한 합의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젠 그나마 마련된 틀을 기초로 보다 훌륭한 교과서와 좋은 현장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이런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싱크레티즘' 즉, '차이 속의 연대' 라는 사고가 필요하다. 자신의 역사적 사관이 무조건 옳다고 옹호를 한다거나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사고를 지닌 상대방에게 강요를 한다는 것은 서로 간의 대립의 골만 깊어지는 상처만 남길 뿐이다. 진중권의 표현대로 싱크레티즘은 그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관의 입장을 인정하되 잊혀질 만 하면 불거지는 왜곡되거나 오류로 이루어진 역사적 내용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Epilogue : 철학이라는 확대경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기

개인적으로 철학의 개념에 대해서 많이 부족한 상태라서 책의 첫 장을 펴기 전부터 칼럼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몇 몇 개념을 소개한 내용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특정한 사회현상을 예로 들어 철학에 이제 막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큰 부담이 없을 듯하다. 단, 저자가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그가 1년 간 쓴 칼럼들은 철학적 개념을 사회현상을 바라보면서 인식하게 된 주관적 견해이고 단지 개념들이 사회현상에 적용할 수 있는 사용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저자가 선택한 범례에 불과하다. 저자가 우려한 것처럼 그가 소개한 철학적 개념과 그 범례들이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지식의 수집품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진중권은 철학의 개념을 사회현상을 정교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확대경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오랜 옛날,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유리로 만들어진 렌즈라는 도구의 기능을 알게 된 사람이 많았다. 그들에게 렌즈는 먼 곳을 가까이에 볼 수 있는 그저 신기한 발명품으로만 인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렌즈는 사물을 확대해 볼 수 있는 용도로만 사용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2개의 렌즈를 통에 끼워 망원경을 발명하였다. 오늘날 갈릴레이의 공적은 망원경을 만들었다는 사실보다는 처음으로 망원경을 천체관측에 사용하여 그때까지 눈으로는 관측되지 않던 천체와 우주의 세계를 망원경에 의하여 최초로 탐색하였다는 데 있다. 확대경의 렌즈를 무조건 깨끗이 닦는다고 해서 멀리 있는 곳을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렌즈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멀리 떨어져 있는 곳뿐만 아니라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는 달 표면까지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실용적인 면들을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인문학을 너무 소홀히 여기지 않나 싶다. 교양을 가르쳐야 할 대학에서는 학생을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정부도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취업이 잘 되는 것이라고 최고라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이라는 순수학문의 발전이 없이는 결코 지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인문학의 위기는 결국 지속 가능한 성장의 위기로 직결될 수 있다. 철학적 개념이라는 렌즈의 기능을 이해하고 직접 자신을 둘러싼 현상을 바라본다면 여태까지 몰랐던 현상의 이면, 그리고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면 머릿속에는 새로운 생각을 숙성시키는 ‘인식의 효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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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2-03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콘, 저도 빌려다놨는데 못읽고 일주일 다되서 도로 갖다 줘야된다는.. 으흐흐

cyrus 2011-12-04 21:36   좋아요 0 | URL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시길 권해요. 이 책 속에 실린 글이 씨네21의 연재
칼럼 모음집이라는 데 칼럼이라 그런지 내용이 쉽게 읽혀지는 편이에요. 몇 몇 글은 조금은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요 ^^;;

맥거핀 2011-12-04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편에 대해 하신 말씀에 대해 동감합니다. 진중권씨가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를 지적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튼 뭐 그래도 종편을 거부한 연예인들이 조금 더 이뻐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네요.^^;

cyrus 2011-12-04 21:37   좋아요 0 | URL
정말로 종편의 실체(?)를 알고 나서 종편을 거부한 연예인들이 있다면
정말 대단한거 같아요 ^^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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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앞에서 불안에 떨어야만했던 절망적 자아, 기형도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 '식목제' 중에서 -

   

고등학생 때, 국어 수업을 통해서 처음으로 기형도라는 시인을 알게 된 시가 바로 '식목제'였다. '식목제'는 전문으로 보게 된다면 비교적 긴 내용에 속하는 편이다. 이 시를 알게 된 덕분에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시인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도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럽고도 불행한 죽음이라는 이미지로 결부되는 시인의 죽음이라는 인식 탓인지 당시 고등학생인 나로써는 기형도의 시가 너무 어둡고 절망적인 내용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느꼈다. 비록 시인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 않겠지만, 내용만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엄마 걱정' 같은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유년 시절 속 어머니에 대한 강렬했던 기억'을 묘사하는 시로만 생각하겠지만 실상 이 시에서도 시인 특유의 어두운 심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식목제'라는 시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울하고 절망적인 과거의 삶을 회상함으로써 '앞으로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화자(시인)은 살아가면서 늘 마주하게 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극복하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만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미래, 즉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고 있다.  

기형도의 시에는 미래에 대한 전망, 즉 '희망'이라는 것이 배제되어 있다. '기형도'라는 이름의 육신은 썩어 사라졌지만 우울하고 절망적인 세상 앞에서 불안에 떨며 방황하는 내면적 자아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 되어버린 <잎 속의 검은 입>이라는 세련되면서도, 그의 불행했던 생애에 걸맞은 새로운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죽음' 그리고 '가난의 고통'으로 기억된 시인의 유년 시절 

기형도의 시가 어둡고, 절망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시인의 생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나 그의 시 중에서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 많은데 어린 기형도는 이른 나이에 '죽음'이라는 현상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가난의 고통을 체험해야만 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그 때부터 시인의 모친이 가장 역할을 했다.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 '위험한 家係. 1969' 1연 중에서 -

  

시인의 모친은 어린 자식들을 거두기 위해 시장통으로 돈벌이를 하러 나갔다. 장터에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던 시인은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걱정하다가 빈방에서 혼자 엎드려 훌쩍거렸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유년 시절을 쓴 시 중에 유독 추운 겨울로 배경을 한 내용이 많다. 어린 시절부터 불안한 심성을 지니기 시작했던 어린 기형도에게는 '문풍지를 더듬던' 겨울 찬 바람은 자신의 연약한 심성을 언제 해칠지 모르는  '죽음' 못지 않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마음이 약한 어린 기형도를 보호하기에는 어머니의 존재로도 부족했다.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 중에서 -

 

유년기를 지나서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게 되는 사춘기 시절마저도 불행하게도 죽음의 신은 시인의 생애 주변을 자주 두리번거렸다. 중학교 3학년이던 기형도는 누이의 죽음으로 큰 상실감을 맛보았으며,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의 내면적인 고민은 '시'로써 본격적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나리 나리 개나리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모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중략)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20대는 기형도를 읽어야한다  

시인의 시를 읽으면 누구나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시인이 되고서 4년 남짓 발표한 작품이라곤 많지 않았다. 발표하는 작품들마다 주목은 받았지만 20대 중반인 시인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기엔 살아온 세월이 너무 짧았다. 그의 유고 시집이 된 <입 속의 검은 잎>은 시인의 작품세계가 어떠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불안과 죽음이다. 주식처럼 가지고 있는 안개로 인한 그의 불안은 개인적 불안을 넘어 당시의 부조리한 사회상까지 가감없이 그려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이승에 남기고 간 문학의 결과물보다는 죽음으로서 사랑받는 시인은 이상, 윤동주 그리고 기형도 밖에 없다. 세 명의 시인 다 요절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기도 하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시인. 시를 쓰던 날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그토록 자신의 삶 주변을 배회하면서 호시탐탐 노렸던 죽음의 신과 대면했던 그 순간, 시인이 세상을 향해 '안녕'을 고하는 그 날. 그 후로 가엾은 시인의 사랑은 영원히 빈 집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기형도 시인은 참으로 아픔이 많았던 시인이었다. 스스로 지닌 아픔은 견디다 못해 단 한 권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남은 아픔들은 어찌할 것인가. 세상을 떠난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인의 지인들과 독자들은 기형도를 기억하고 있지만 강산이 변할수록 시간 앞에서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시인의 불안하고도 슬픈 생애를 공감할 수 있는 시간들이 얼마나 오래갈 것인가. 그가 이승을 떠나고 난 뒤에 태어난 나 같은 20대의 세대들은 기형도라는 이름의 석 자가 남기고 간 가슴 아픈 '검은' 시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시를 읽기에는 우리 세대들이 겪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은 너무나 어둡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은 가슴이 먹먹해지거나 혹은 어둡고 우울한 시인의 시구가 불편하더라도 20대는 기형도를 읽어줘야 한다. 삶에 있어 빛과 그림자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시인은 '거리의 상상력'이 주는 고통을 사랑함으로써 짧은 생애동안 수십 편의 시를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시라는 '가장 위대한 잠언은 자연 속에 있음'을 믿었다. ('詩作 메모' 중에서)  

그는 고통스러운 창작 고통 속에서도 희망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88만원 세대'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형도의 절망을 통해 희망을 향한 안간힘의 줄기를 찾아내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이 우리를 부른다면 언제든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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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고그램 (Ego Gram)   

이번 주 월요일에 이고그램이라는 것을 처음 해보게 되었다. '이고그램'이란 개인의 성격을 알 수 있는지 심리학적인 검사라고 보면 좋을 듯하다. 이고그램 검사를 하기 전에 먼저 이고그램의 탄생 및 배경부터 시작해서 이고그램 검사 내용을 뒷받참해주는 TA 성격이론까지 알고 있어야하는데 여기서 설명하기에는 서론이 너무 길 우려가 있다. 이고그램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이고그램'이라고 쳐 볼 것. 한국이고그램연구소라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는데 이번에 필자가 한 검사도 그 연구소에서 만든 것이다.   

검사 과정은 간단하면서도 은근히(?) 까다로울 수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처음에는 지능검사르 하는 것처럼 수십 개의 문항을 읽고 그 문항에 맞는 답을 선택한다. 예를 들어 문항은 이런 형식이다.  

   
 

1, 나는 항상 창의적인 발상을 잘 한다.        

(1) 매우 그렇다.  (2) 그렇다.  (3) 보통    (4) 그렇지 않은 편이다.    (5) 매우 그렇지 않다. 

 
   

이런 형식의 문항을 보고 체크한 다음, 체크한 문항에 매겨진 점수를 합산하여 자신의 성격 유형을 분석할 수 있다. (점수 합산 과정 역시 세부적으로 설명하기에는 길며, 계산하는 데 취약한 사람에게는 조금은 헷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문항 점수를 합산한 수치를 여러가지 유형의 분석 결과 항목대로 적용할 수 있는데 먼저 구조에 따른 기능적 성격 유형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출처: 한국이고그램연구소

  

 

 분석 결과, cyrus의 성격 유형은...? 

그래서 점수 합산 결과, 필자가 나온 성격 유형은 다음과 같다.    

 

CP: 20점, NP: 41점, A: 44점, FC: 36점, AC: 33점  

 

CP : 적당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위치에 따라 경우에 맞게 행동하고 적절한 역할을 수행할 줄 아는 사람이다. 비판적, 통제적 성격이 한국인의 평균에 속하며 한국적인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평범한 위치에 있다.   

NP : 온정적이고 관용주의자이다. 그러나 타인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며 일방적이다. 타인이 무엇인가를 시도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주려 하기 때문에 자립심을 해치기 쉽다.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해 이용당하거나, 타인 중심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A : 현실적이며 철저한 합리주의자이다. 그러나 감정이나 감수성이 둔해 인간미가 결여되어 있으므로 삶을 즐기지 못하고 정서가 결핍된 기계와 같은 사람으로 비춰 줄 있다. 타인과의 관계보다는 일에 몰두하여 마음이 차갑고 사실에 입각한 대화로 재미가 없는 사람으로 비춰진다.

FC : 감정표현이 솔직하고, 재미와 재치로서 분위기를 주도하며 행동이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창조성이 풍부하다. 자신의 생각이나 바람을 곧잘 행동으로 옮기고 명랑하며 적극성이 있다. 그러나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현실을 고려하는 신중성이 떨어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AC : 자신과 타인의 감정에 대해 민감하며,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고 따른다. 감정 조절력이 있고, 선한 이미지를 타인에게 심어준다. 순응적, 소극적, 비대결적인 성격이 한국인 평균에 속하는 위치에 있다.

 

이 검사에서는 TA 성격이론에 따라 인간의 마음 구조를 세 가지 자아 상태로 분류하고 있다. P, A, C로 구분하고 있다. 

P는 Parent의 역자로써 아버지의 자아상태, C는 Child, 어린이의 자아상태를 뜻한다. 필자는 A 구조결과가 나왔다.  

 

 A 구조편향  

 (여기서 A는 Adult, 즉 어른의 자아상태를 말함) 

 

일상생활에서 사실에 입각한 판단과 행동으로 논리적이며 이성적임.

원인과 결과를 예측하여 행동하며, 계획을 세운 후 실행에 옮김.

냉정하고 사실이나 상황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탁월하지만,고민이 있어도 감정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드뭄.

자타에 대한 엄격성이 부족하나, 감정에 지배되지 않는 목적지향적 사고를 지님.

합리적이긴 하나 지적편중으로 무미건조한 대화와 정감이 없는 대화 방식을 보임으로써 무감정적임.

기계적이어서 상대에게 차갑고 냉정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음.

어떠한 일이든 확실한 목적과 목표가 명확하지 않으면 불안하거나 안심이 되지 않는 경향이 있음.

주위에는 이성적, 합리적, 논리적인 태도를 취하는 A 구조편향인 사람이 많음

 

자아 형성 결과 분석 내용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이성적', '논리적'이라는 말이 눈에 띄기는 하는데, 특히 '기계적', '무감정적'이라는 단어만큼은 눈에 거슬렸다. 자아의 모습을 정확히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단점적인 면을 알게 되어서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검사를 하고난 뒤에 친구들과 함께 서로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대부분 친구들에게는 C 유형이 많이 나왔다. 나는 A 유형이 나왔다고 하자 C 유형, 즉 유아기 자아를 가진 자들은 나에게 부러운 눈치를 주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필자 혼자서 진지하게 검사 결과에 생각을 해봤다. '성격면에서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고쳐나갈까?'  그리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너무 합리적이며 기계적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았는지 그들의 입장도 생각해봤다.  

사실 필자는 군 입대 전만 해도 사람들 만나는 곳에 가면 대화가 별로 없었다. 특히 친구들 사이에서는 외모에 비해 행동이나 성격이 성숙하다라는 핀잔을 들을 때가 많았다. 어떤 일이나 행동을 하기 전부터 먼저 생각을 하는 편이고 상대방에게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 비판도 서슴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번 이고그램 검사 결과를 본 후, 상대방에게는 나의 그런 모습이 피곤하고 까다롭게 여기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런 모습이 오래 유지하게 되면 감정 없는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무감정적이면서도 기계적이라는 점을 이고그램 검사하기 전부터 알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지 자아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 지금도 그 성격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경상도 출신 남자에게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 만나보려고 하거나 모임에 참석하면 많이 웃어보이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상대방을 위해서 비판을 하되 좀 더 온화하게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만의 감수성 훈련  

 

 

 

  

 

 

 

 

몽테뉴의 <수상록> 중에 '슬픔에 대하여'라는 에세이가 있다. 이 글의 말미에 테뉴는 자신의 자아를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이렇게 마무리 짓고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감수성이 둔하다. 그리고 날마다 생각으로 거적을 씌워 감수성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  (pp 24)

 

몽테뉴의 표현대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그리고 독서 습관이나 글을 쓰는 특성을 되돌아본다면 나 역시 어쩌면 천성적으로 감수성이 둔한 경상도 남자일 수 있으며 1년 365일 이성의 생각으로 거적을 씌워 감수성을 무디게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하지만 몽테뉴는 본인 스스로 자아의 특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죽기 전까지 이성적인 감상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에세이를 남겼다. 덕분에 후대 사람들은 그의 멋진 글을 읽을 수 있었지만 감수성 둔한 몽테뉴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소유한 성에서 평생 독신으로 독서와 명상 그리고 글쓰는 삶으로 선택해야했다. 

경영학, 특히 인사조직에 관한 분야에는 '감수성 훈련' 이라는 기법이 있다. 인간 관계의 개선이나 지도성을 양성하는 조직구성원을 위한 교육훈련 중의 하나이다. 이 훈련을 체험함으로써 자신들의 감정과 그 감정이 상대방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집단 상호작용 과정의 역학을 보다 잘 이해하게 만들어 결국 인간관계를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필자에게는 아직 감수성이 죽었다고 볼 수 없다. 아직은 젊기에 얼마든지 감수성을 다시 되살릴 수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감수성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시집이나 에세이를 읽어보는 중이다.  그리고 평소에 좋아했던 많은 그림이 곁들인 예술 관련 책들도 읽고 있다. 

몽테뉴는 평생 독서와 명상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서 혼자서 '이성'이라는 성(城)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감수성'이라는 성은 세우지 못했다. 인간의 마음이 끝이 없는 광활한 영역의 지대라고 한다면 그 곳에는 '이성'이라는 성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이라는 성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날씨가 쌀쌀해진 지금, 우리륻 둘러싼 세상 역시 추운 날씨만큼 따뜻한 정이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각박해졌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감수성이 움츠려 들 수 밖에 없다.  이성이라는 적에 의해 감수성이 함락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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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12-0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상도 남자들은 두 갈래 길에 서 있습니다.무뚝뚝함을 남성다움으로 여겨 계속 밀고 나갈 것이냐, 아니면 소통의 시대를 맞이하여 여성이나 어린이들과도 다정다감한 대화를 할 수 있는 남자로 변모할 것이냐 하는 것이죠. 영남출신 연예인들도 경상도 남자의 무뚝뚝함과 마초 기질을 개성으로 내세우는 사람과, 이젠 경상도 남자도 바뀌어야 한다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더라고요.토크 쇼 같은 데 나와서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Cyrus 님은 어느 쪽인가요?

cyrus 2011-12-02 13:33   좋아요 0 | URL
저는 남성다움과 여성의 감수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성격으로 지니고
싶습니다. 그래서 경상도 남자도 너무 무뚝뚝한 것도 좋지 않다고 봐요.
시대 분위기의 흐름에 맞게 성격이나 행동에 대한 생각도 스스로
변화할 줄 알아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
 
반 고흐의 정원
랄프 스키 지음, 공경희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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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만들어 낸 작은 천국, 정원

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어딜까. 철따라 수많은 빛깔의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사시사철 젖과 꿀이 흐르고, 온갖 종류의 새가 노래하며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고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풍요와 사랑이 넘치는 낙원의 땅 천국은 인간들에게는 꿈의 이상향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천국은 낙원의 동의어로 이해되고 있다.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꼭 천국으로 가기를 동경한다.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혼이 되어 소원대로 천국에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먼저 이승을 떠난 이들이 천국으로 무사히 안착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어쩌면 천국이라는 낙원은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가상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에서는 참된 신자가 죽은 후 그 영혼이 가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장소가 천국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반드시 사후의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지배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곳을 말하며, 현세에도, 또 인간의 마음속에도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천국은 꼭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상상의 공간에 불과한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 삶의 주변을 둘러본다면 '천국'이라는 단어를 수식어로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가 많이 있다.

우리는 훌륭한 자연 경관을 보게 된다면 '천국에 온 기분이 든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많은 이들이 찬사를 마다하지 않는 자연 경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만들어낸 멋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일부 몇 몇 인간들 중에는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오랫동안 만끽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을 원본 그대로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서 인간이 발명한 것이 바로 '정원'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취향에 맞게 돌, 물, 꽃, 나무 등의 자연재료를 통해 미적인 구역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만들어낸 경관과 비교하기에는 부족한, 인공적인 공간에 불과하지만 정원 한 가득 차 있는 세상의 온갖 색으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만가지 꽃들의 아름다움과 각각의 존재감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안정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정원이 딸린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곳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작은 천국'인 셈이다.  

 
 

 고흐의 정원을 아십니까?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 묻어나 있는 정원은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화가들에게는 자신의 예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아틀리에(atelier)인 동시에 삶의 일부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지상의 천국’이었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는 죽기 전까지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수많은 그림들을 탄생시켰다.  

  

 

 클로드 모네  <수련>  1916~1922년경 

 

   
  모네가 그린 정원의 풍경과 우명한 <수련> 연작은 대부분 지베르니 정원에서 탄생된 작품들이다. 모네는 부인과 자녀들을 무척 사랑하게 여길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 다음으로 모네가 좋아했던 것이라면 바로 지베르니 정원일 것이다.  
   

  
그에게는 지베르니의 정원은 단순히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예술적 영감의 장소 그 이상이었다. “내 그림과 꽃 이외에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다.” 라고 말할 정도로 모네라는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자신만의 개인적인 공간인 것이었다. 자신의 가족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모네에게 정원은 아내와 자식 다음으로 가장 사랑했던 대상이었으리라. 모네가 세상을 떠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는 후세의 예술가와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위대한 명소가 되었다. 모네는 우리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상하는 법’을 이 정원에 남겨놓고 갔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화가들 중에는 모네처럼 정원을 열광적으로 사랑했으며 정원의 아름다움을 한 폭의 캔버스에 담고자 하였다. 특히 모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상파 화가들 같은 경우에는 공통적으로 정원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자 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사계절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정원의 풍경이야말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예술을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귀가 잘린 자화상>  1888년 

 

인상파 화가들 중에는 모네처럼 정원이 딸린 집을 마련해서 그 곳에서 창작 활동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반대로 정원을 소유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의 풍경을 사랑했고, 그것을 표현한 화가도 있었다. 그가 바로 ‘해바라기’ 연작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지금까지도 고흐가 남긴 작품들을 본다면 ‘해바라기’ 연작 이외에도 고달픈 일상을 끝내고 어두운 방 안에서 감자를 먹는 소시민들,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듯이 역동적으로 그려낸 별이 빛나는 밤 그리고 자살하기 직전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밀밭까지 고흐라는 이름은 잘 몰라도 그의 그림을 한 번 보는 순간, 영원히 잊혀버릴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모네처럼 정원을 무척 사랑했으며 600여 점이 넘는 작품들 중에 정원의 풍경을 그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더군다나 외로운 독학이 만들어 낸 자신만의 예술적 능력과 지향하고자 하는 미적 가치가 다르면 분을 참지 못할 정도로 외고집이 강했던 그의 인상을 생각한다면 안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원을 연관시킨다면 대조적인 느낌이 떠오른다. 특히 그는 자신의 고향인 네덜란드에만 정착했던 것이 아니라 영국에서부터 프랑스 파리, 프로방스, 아를, 뉘에넨, 오베르까지 한 곳에 머무르는 생활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 방황이 만들어 낸 방랑 생활 그리고 발작과 정신병으로 인한 병원 생활이 고흐의 인생 중 절반을 차지했다. 당연히 고흐에게는 모네처럼 정원을 딸린 집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흐가 정원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고흐는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준데르트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목사가 꿈이었던 그는 성격 부조화로 전도와 설교를 버리고 화랑점원 일을 시작하지만 사랑의 실패와 아버지와의 불화로 젊은 생을 방황하다가 동생 테오의 권유로 그의 나이 30이 되어서야 늦게 그림을 시작한다. 정식 미술교육도 받지 않고 그림도 어려서 일찍 시작한 것도 아니었지만 고흐는 렘브란트, 야곱 반 로이스달, 장 프랑수아 밀레 등 선대의 화가들의 그림을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들을 그려냈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아니 고흐라는 이름을 가진 사나이의 인생은 무척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고흐는 37세라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몇 명의 여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좋아하는 감정을 고백해보지만 연애로 결실을 맺어본 적이 없었다. 방황 속에서 혼란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 고흐를 아껴주고 이해해주실 줄만 알았던 부모님조차도 고흐의 괴팍한 성격과 예측할 수 없는 행보를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특히 자신처럼 목사의 길로 가길 원했던 아버지로서는 화가로 전향하여 한 곳에 정착된 생활을 하지도 못하고 있는 가난한 아들의 모습에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나마 가족 중에서 고흐의 심정을 너그러이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동생 테오 밖에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  <병원 안뜰> (아를 요양원 정원)  1889년 

(<반 고흐의 정원> pp 74)

 

외곬인데다가 조울증에 가까울 정도로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고흐의 성격상 그 누구도 그와 친해지려는 사람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신 발작까지 일으키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은 고흐를 더욱 멀리하기 시작했다. 고흐는 차라리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자신의 성격에 조롱하거나 멸시하지 이들이 살지 않는 정신병원과 요양원에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프랑스 아를에서 정신 발작을 일으킨 빈센트 반 고흐는 1889년, 생레미라는 지방에 위치한 정신병자들이 모인 요양원에 자진 입원한다. 오랫동안 방황으로 인해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생의 의지를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 요양원에 도착한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요양원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방식으로 미치거나 정신 나간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잊어버리고 있다”고 썼을 정도였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정신병원과 요양원 생활은 고흐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가두어 버릴 정도로 거의 지옥에 가까웠다. 더욱이 불시에 그를 습격하는 발작은 고흐에게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불청객이었다. 하지만 고흐는 간간히 정신이 온전히 들 때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특히 병원과 요양소 안에 위치한 정원을 그리는 것이 고흐에게는 유일한 낙이었다. 오랫동안 병원과 요양소에서 생활한 환자들에게는 병원의 정원마저도 그저 지루하고 따분한 공간에 불과했지만 외출마저도 할 수도 없는 고흐는 자신이 지내고 있는 감옥 같은 방의 작은 창문을 통해서라고 정원의 모습을 한 폭의 캔버스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비록 자신이 소유한 정원은 아니었지만 고흐는 꽃과 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거대한 밭과 수풀이 자라고 있는 오베르의 전원적인 풍경에서부터 고흐와 친분을 유지했던 가셰 박사의 집 안 있는 작은 정원까지, 그가 남긴 수많은 데생과 유화 작품들 중에는 꽃과 나무를 그린 것들이 많다. 

 

  

빈센트 반 고흐  <정원에 있는 마르게리트 가셰>  1890년 

 (pp 96~97)  

   
 

가셰 박사는 고흐의 정신 질환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그 누구도 알아주지 못했던 고흐의 예술을 인정해준 고흐에게는 몇 안 되는 친분적인 인맥 중의 한 사람이다. 고흐 역시 자신을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가셰 박사를 위해서 몇 점의 초상화를 남기기도 했다. 가셰 박사의 집에 있는 정원의 풍경을 그린 적도 있는데, 마르게리트는 가셰 박사의 딸이다.

 
   

 

무엇이 고흐를 정원의 풍경에 매료되도록 했던 것일까. 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일부 내용에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고흐에게 정원은 지옥 같은 삶에 숨통을 트일 수 있는 생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는 활력소인 동시에 자신만의 ‘천국’이었던 것이다. 

“ 이제 나는 자연 앞에서 예전처럼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다. ”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1881월 중순, pp 33)


정원은 사람의 손길이 거친 인위적인 자연의 공간이지만 고흐는 정원이라는 특정 공간 속에서도 사람들이 찾지 못했던 정원 특유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였다. 그에게는 정원은 자연의 모습을 탐구하기에는 적당한 장소였다. 정원은 도시처럼 소란스럽지 않으며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이다. 그 어느 누구도 고흐의 그림 작업을 방해하지 않았고 자신의 모습에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고흐는 꽃과 나무로 이루어진 정원에서만큼은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 이 정원이 나를 꿈꾸게 합니다 '

고흐는 정원을 단순히 그림을 편안하게 그릴 수 있는 평온한 공간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자연이라는 조화로운 현상은 오랫동안 잊혀진, 그리고 고흐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따사로운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주게 만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  <에텐 정원을 회상하며>  1888년  

(pp 44~45)

   
  정원을 대상으로 그린 고흐의 그림 중 유일하게 상상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그림의 왼쪽에는 고흐의 누이와 어머니이며 오른쪽에는 하녀가 정원을 가꾸고 있다. 고흐는 캔버스에 칠해진 보라색과 노란색이 어머니의 성격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이 그림을 통해서 그는 단순히 정원에서 노닐던 기억을 회상한 것이 아니라 유년 시절, 포근하고 따뜻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그림으로나마 기억하고 싶어 했다.  
   

 

어린 시절의 고흐가 지낸 준데르트 지방에 위치한 목사관에는 정원이 있었다. 고흐의 어머니는 고흐와 그 밖의 자녀들이 집 근처의 정원에서 마음껏 뛰어 놀게 하는 것이 자녀들에게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고흐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곳에서 테오를 포함한 다섯 동생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린 고흐에게는 자연은 재미있는 장난감인 동시에 예술적 상상력을 자아내는 대상이었다. 심각한 발작과 정신 질환 속에서도 고흐는 목사관의 정원의 모습 그리고 그 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까지 영원히 잊지 않았다.


“ 병을 앓으면서 다시 준데르트에 있는 집의 모든 방을 보았단다. 정원의 오솔길, 화초, 주변 풍경, 들판, 이웃, 묘지, 교회, 집 뒤쪽 텃밭, 묘지의 키 큰 아카시아나무에 튼 까치 둥지까지. ”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1889년 1월, pp 15~16)


 

  

 

빈센트 반 고흐  <도비니의 정원>  1890년 

(pp 104)

 

자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외곬 성격인데다가 때때로 찾아오는 정신적 발작으로 괴로워야했던 고흐에게는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정(情)을 그리워했으리라. 그런 허기진 애정 결핍은 정원을 통해서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까지 회상하기에 이르면서 혼자서 외롭게 고독을 달래보려고 했다. 고흐에게는 정원은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집이며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나무들이 자신의 고독한 심정을 이해해줄 수 있는 친구이자, 애인이며 그리고 가족이었다. 개인 정원은 아니었지만 그는 따뜻한 정이 오고가는 대화를 나누는 가족과 같은 삶을 꿈꾸려고 했고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정원의 모습을 망각의 틈바구니 속에서 찾으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살로 짧은 인생을 마감함으로써 고흐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정원 속에서 행복했던 시절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흐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안락한 지상낙원이었다. 

   

 


 '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가 있는 채마밭> (부분)  1887년 

   (pp 15)

 

동생 테오와 닥터 가셰, 우체부 직원 룰랭이 고흐에게는 그나마 친분이 유지할 수 있었던 인물들이었지만 고흐에게는 그들과의 관계만으로도 ‘밑 빠진 항아리’와 같은 애정 결핍을 채울 수가 없었다. 자살하기 전까지 수많은 편지를 교류함으로서 형제애를 돈독히 유지했던 동생 테오의 자화상을 단 한 점 그리지 않는 대신에 정원의 모습을 수십 점이나 그려낸 고흐의 창작 활동을 본다면 얼굴 한 번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자신과 떨어져 지내는 동생보다는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정원에서 피어나는 말 못하는 꽃들이야말로 고흐에게는 친숙한 존재였을 것이다. 고흐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장소에는 그 장소 특유의 환경적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는 인습적인 기법보다는 ‘자연의 언어’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계절에 따라 변화되는 자연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강조하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는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중에서 -



 

김춘수 시인이 쓴 시구처럼 고흐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나게 해주는 정원 속의 꽃들을 동경의 대상으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꽃처럼 누군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했으며 ‘화가’라는 의미 있는 존재로서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의미 있는 존재로 알아준 것은 오히려 고흐가 동경하면서도 행복한 기억들을 꿈꾸고자 했던 정원 속의 꽃들이었다. 해바라기 그리고 정원 속 꽃과 나무의 모습을 담아낸 그의 그림들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을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올려주었다. 또한 고독한 예술가의 인생을 기억해주는 음악까지도 나오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고흐가 사랑했던 정원의 모습은 많이 변했고 이제는 고흐의 흔적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고흐’라는 이름의 꽃은 시들지 않았다. 죽은 뒤에서나마 후대 사람들로부터 한 폭의 캔버스로 ‘자연의 언어’를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예술적 염원이 인정받게 됨으로써 예술계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 위대한 ‘꽃’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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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29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네의 수련 저 그림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첫 장면으로 나오더라고요. 진짜 아름다웠어요. 그림만큼이나. 저는 고흐의 해바라기 좋아해요. 정말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요즘은 그림이 그림이고, 나는 나이고. 암스테르담의 우중충한 거리가 생각나서 예전 사진을 들여다봤더니 렘브란트 미술관에도 갔더라고요. 그래서 렘브란트 다큐 찾아보고.. 요즘 그런 식. 뭔가 많이 공허해요.

cyrus 2011-11-30 23:43   좋아요 0 | URL
저도 고흐의 해바라기 좋아해요, 사실 고흐는 해바라기뿐만 아니라
꽤 많은 꽃과 나무들도 그렸더군요. 특히 아이리스를 그린 그림도 좋았고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아이리시스님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줄 수 있습니까? ^^;;
어제는 날씨가 좋다가 오늘은 갑자기 비가 내려서 그런지
오늘따라 옆구리가 많이 춥더군요 ^^;;

꽃도둑 2011-11-29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오늘 새삼
<병원 안뜰> 아를 요양원 정원이 새롭게 다가오네요. 너무 섬세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넘쳐나요,. 저렇게 따뜻할 수가 있다니...

지금 고흐는 뭘하고 있을까요?
자신이 그리워하던 정원에서 거닐고 있을런지도...^^

cyrus 2011-11-30 23:44   좋아요 0 | URL
요양소나 병원 내부라면 먼저 쓸쓸한 분위기가 나기 마련인데
고흐가 그린 병원은 꽃과 나무가 있는 정원을 표현해서 그런지
꽃도둑님에게는 마음이 드셨는가보군요. ^^

맥거핀 2011-11-2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과 그림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좋아지면서도, 사실 솔직히 말해서 잘 정돈된 정원을 보면, 누군가는 저거 관리한다고 고생좀 했겠네, 이 생각부터 먼저 드니, 이거 문제가 좀 있지요? (때로는 너무 잘 정돈된 정원을 보면, 이상한 공포심마저 들 때가 있어요.^^;) 아무튼 그림은 좋네요. 특히 <도비니의 정원>이라는 그림이 아주 좋네요.

cyrus 2011-11-30 23:46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정원 가꾸는 것도 쉬운게 아니죠.
저는 어렸을 때 정원 딸린 집을 가진 것이 꿈이었는데,, 식물 하나
가꾸는 것도 쉽지가 않더군요. 물 잘 줘야되죠, 햇빛 조절도
잘 해야되고,, 하여튼 관리해야될 게 많아서 수많은 식물이 자라는
정원을 관리한다는 것은 정말 부지런하고 식물을 사랑하느 사람만이
가능할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