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문학, 환상문학, 추리문학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장르문학 도서는 바로 읽지 않더라도 일단 사고 보는 게 장땡이다. 장르문학 도서는 다른 분야의 책에 비해 수명이 짧다. 국내에서 인지도가 낮은 책은 독자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조용히 절판되는 안타까운 운명을 맞는다. 장르문학 도서를 구입하고 즐겨 읽는 독자층이 형성되어도 상업 출판사의 수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그만큼 장르문학 도서는 장르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들만 찾는다. 절판본을 재출간해달라는 독자의 요청이 많아도 막상 그들이 구입한다는 가정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저조한 수익률이 나온다. 장르문학 도서를 펴내는 출판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책 한 권을 내면 비장해진다. 책을 더 찍고 싶어도 안 팔린다는 슬픈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현상이 갈수록 심해질수록 출판업자들은 장르문학의 가치를 폭넓은 연령층 독자들에게 알릴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이렇다 보니 책을 만들어도 재고를 남지 않는 방향으로 장르문학을 소개하는 타개책을 세우기도 한다. 마음껏 만들어서 덜 팔리더라도 재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책, 그것이 바로 전자책이다. 종이책으로 단 한 번도 선보인 적이 없는 외국 장르문학 작품을 전자책으로 출간하는 출판사가 있다. 페가나북스는 1인 전자책 출판사로 주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영미권과 일본의 고전 장르문학 작품을 출간하고 있다. 페가나북스가 지금까지 펴낸 전자책의 수는 많지 않지만, 그중에서 장르문학 팬덤이라면 눈여겨봐야 할 작품이 있다. 로드 던세이니의 환상문학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로드 던세이니는 아일랜드 귀족 가문 출생으로 1878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에드워드 존 모턴 드랙스 플렁킷(Edward John Moreton Drax Plunkett), 줄여서 에드워드 플렁킷이라고 하는데 남작 작위를 받은 뒤에 만들어진 필명인 로드 던세이니(우리말로 풀이하면 ‘던세이니 경’이다)가 널리 알려졌다. 부유한 삶을 살았던 던세이니는 꿈과 환상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오늘날에는 던세이니의 명성이 거의 잊혔지만, 그의 독특한 상상력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 환상적 리얼리즘의 대가 보르헤스 그리고 크툴루 신화를 만든 러브크래프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던세이니의 초창기 작품을 읽으면 한 편의 고대 전승 신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현대의 신화를 구축한 톨킨과 러브크래프트의 판타지 문학의 젖줄은 던세이니부터 시작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던세이니가 러브크래프트에게 끼친 문학적 영향을 살펴볼 수 있는 텍스트로는 에세이 《공포 문학의 매혹》(북스피어, 2012)이 있다. 사실 러브크래프트가 던세이니의 작품을 공포문학에 포함한 점에 대해선 동의하기는 어렵다. 러브크래트프 본인도 던세이니 작품의 핵심을 공포가 아닌 아름다움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판타지 문학에서 흔히 양대 산맥을 꼽으라면 톨킨과 러브크래프트가 거론된다. 톨킨의 판타지가 빛이라고 한다면, 러브크래프트의 판타지는 암흑이다. 그런데 이 빛과 어둠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판타지를 던세이니는 이미 성공했다.

 

로드 던세이니는 수정처럼 맑고 노래하는 듯한 산문을 창조하는 마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로서, 다채로운 이국적 상상력으로 화려하고 나른한 세계를 창조하는 데 뛰어나다. (《공포 문학의 매혹》 중에서, 135쪽)


귀족 출신답게 던세이니의 문장은 이국적 정취가 느껴질 정도로 화려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러브크래프트는 던세이니의 작품에 반해 그와 비슷한 표현력으로 습작을 했다. 여기까지가 던세이니라는 문학의 나무를 본 것이다. 이제 나무가 아닌 숲을 바라보자. 던세이니가 창조한 거대한 세계는 켈트족 특유의 어둡고 음울한 세계관을 반영한다. 러브크래프는 빛과 어둠의 조화를 이루는 던세이니의 판타지에서 전통적인 코스믹 호러의 향취를 맡았다. 

 

 

 

 

 

 

 

 

 

 

 

 

 

 

 

 

러브크래트트가 맡은 코스믹 호러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던세이니의 작품으로는 처녀작이자 단편집 《페가나의 신들》(The Gods of Pegāna, 1905)이다. 이 소설은 페가나라는 태초의 세계와 그곳에 거주하는 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단편 형식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나-유드-수샤이와 북 치는 스카르

 

 

 

페가나를 지배하는 최고의 신은 마나-유드-수샤이(Mana-Yood-Sushai)다. 신들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다. 마나-유드-수샤이는 영원히 잠들어 있는데 그가 깨어나면 페가나와 나머지 신들이 모조리 파괴되는 종말에 이른다. 새로운 세상과 신들을 만들 수 있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마나-유드-수샤이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려면 스카르(Skarl)가 북치기를 멈추지 않으면 된다.

 

 

 

 

 

시간의 신 시쉬

 

 

페가나의 신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올륌포스의 신들처럼 각자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할이 있다. 죽음의 신 뭉(Mung), 시간의 신 시쉬(Sish), 바다의 신 슬리드(Slid), 환희와 음유시인의 신 림팜-통(Limpang-Tung) 등 수많은 신들이 나온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비교하면 던세이니의 신들은 대체로 정적이고 음울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다. 《페가나의 신들》 삽화를 담당한 시드니 허버트 사임은 던세이니의 서정시풍 문장을 그림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던세이니는 페가나를 신들이 마음껏 향락을 누릴 수 있는 아르카디아처럼 묘사했다.

 

 

 

 

사람들은 죽어서 페가나로 올라와 신들과 함께 고통 없는 기쁨 속에서 살리라. 그리고 페가나는 산봉우리의 눈 덮인 곳에 있고 그 봉우리마다 신이 하나씩 있도다. (《페가나의 신들》 2권 중에서, 38쪽)

페가나에 깊이 들어가면 ‘중앙해’에서 신들이 끌어올린 은빛 분수가 있어, 물은 하늘높이 솟아올라 페가나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트레하고볼 위에서 반짝이는 안개로 변한 뒤, 페가나의 정상을 뒤덮고 마나-유드-수샤이의 침실을 커튼처럼 가려주느니라. (《페가나의 신들》 2권 중에서, 40쪽)

 

그렇지만 신들이 빚어낸 이 아름다운 세계도 언젠가는 무(無)로 향하게 되는 거대한 꿈일 뿐이다. 마나-유드-수샤이가 깨어나면 페가나의 신들은 무력하게 페가나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이러한 허무주의적 세계관은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로 이어진다.

 

 

 

 

러브크래프트가 직접 그린 크툴루

 

 

러브크래프트의 판타지에 주로 언급되는 그레이트 올드원(Great Old Ones)은 초월적인 힘은 마나-유드-수샤이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레이드 올드원은 하나의 신만 지칭하는 것이 아닌 복수(複數)의 고대 신들이다. 세계를 주무르고 파괴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레이트 올드원의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크툴루다. 크툴루의 마력은 다른 그레이트 올드 원들의 보호해준다. 남태평양에 가라앉은 가공의 도시 리에(R'lyeh, 르리에라고 부르기도 한다)의 지배자로, 깨어남과 함께 세계에 재앙이 생긴다.

 

 

 

 

 

 

 

 

 

 

 

 

 

 

 

 

 

 

 

 

 

 

 

 

 

 

 

 

 

러브크래프트 마니아들에게 알려진 ‘크툴루 신화’는 러브크래프트 작품의 공저자인 어거스트 덜레스와 그 후대의 작가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므로 러브크래프트가 생각했던 기존 크툴루의 묘사와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세상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고대 신의 위엄은 《크툴루의 부름》(러브크래프트 전집 1권에 수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가공의 책 ‘네크로노미콘’의 2행으로 된 문장이 인용되는데 크툴루의 존재감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것은 영원히 누워 있을 죽음이 아니며,
기이한 영겁 속에서 죽음은 죽음마저 소멸시킨다.

 

(《크툴루의 부름》 중에서, 158쪽)

 

러브크래프트 판타지에 입문하기 전에 로드 던세이니 판타지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 두 작가의 판타지를 같이 읽거나 비교해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페가나북스에서 번역한 던세이니의 단편집은 한 권당 1000원~2000원의 가격이니 던세이니 판타지로 향하는 입장료는 비싸지 않다.

 

 

 

 

 

 

 

 

 

 

 

 

 

 

 

 

 

 

 

 

 

 

 

 

 

 

 

 

 

 

 

 

 

 

 

 

 

 

 

 

 

 

 

*《페가나의 신들》(전 2권, 1905년 작)


*《시간과 신들》(Time and the Gods, 전 2권, 1906년 작, 《페가나의 신들》 속편)

*《웰러란의 검》(The Sword of Welleran and Other Stories, 1908년 작, 원본에 수록된 총 12편의 작품들 중 6편만 소개)


*《몽상가의 이야기》(A Dreamer's Tales, 1910년 작, 원본에 수록된 총 16편의 작품들 중 6편 수록,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18권 : 얀 강가의 한가한 나날》에 실린 일부 단편은 《A Dreamer's Tales》에서 뽑은 것인데 페가나북스 전자책과 겹치는 작품은  ‘검과 우상’과 ‘거지들’이다)

 

*《판의 죽음》(Fifty-One Tales, 1915년 작, 51편의 짤막한 이야기 중 26편만 수록)

 

 

 

 

 

 

던세이니의 단편소설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故 정태원이 번역한 단편 앤솔러지 《한밤의 지하철》(동승동, 1993 / 절판)이다. 소설 제목은 ‘두 병의 소오스’이다. 《세계 호러 걸작 베스트》(북타임, 2010)에 ‘계곡의 유령’이라는 소설이 수록되었다. 던세이니의 유일한 단편 선집(희곡 1편 수록)이 《바벨의 도서관 18권 : 얀 강가의 한가한 나날》(바다출판사, 2011)이다. 최근에 나온 러브크래프트 전집 외전 6권에 던세이니의 작품으로 ‘노상강도’가 소개되었다.

 

던세이니는 장편소설도 많이 남겼는데 과연 종이책으로 국내에 선보일 수 있을지 미지수다. 비록 뒤늦은 감은 있지만 환상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만큼 재평가가 되고 있는데 말이다. 던세이니 판타지도 러브크래프트 판타지처럼 일단 음울한 분위기에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국내 독자들의 밝은 정서(?)를 생각한다면 너무 어두운 이야기는 잘 팔리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장편소설을 선보인다고 해도 소수의 팬덤만 생길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던세이니의 작품은 종이책으로 나오기에는 좀 애매한 입장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세이니 판타지를 절대로 외면해선 안 된다. 특히 러브크래프트 마니아라면. 러브크래프트 마니아들이 열광하는 크툴루 신화가 또 하나의 새로운 서브 컬처로 각광받을수록 던세이니 판타지 일부를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로 편입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되면 러브크래프트 판타지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해석이 될 수 있고 던세이니 판타지의 영향력이 잊힐 우려가 있다. 러브크래프트 판타지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던세이니 판타지를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가나북스의 외로운 출판 행보를 지지해두고 알아주는 장르문학 팬덤들이 많아져야 한다. 장르문학을 좋아한다면 이제 종이책이나 절판본만 찾아서는 안 된다. 종이책을 선호하는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수많은 전자책들 속에 알려지지 않은 장르문학 걸작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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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이 말만 들으면 벌벌 떨었다. 내가 제일 무서웠던 말은 ‘얼레리 꼴레리’였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의 코러스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얼레리 꼴레리, cyrus는 OOO을 좋아한데요!” 여자아이의 손을 살짝만, 아주 살짝만 건드렸을 뿐인데 친구들은 그걸 보면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놀려댄다. 이래서 진짜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있어도 함부로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다.

 

친구들의 놀림을 받지 않고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있다. 그녀에게 장난을 치면서 괴롭힌다. 긴 머리카락에 살결이 희고 예쁜 여자아이가 있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그녀와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직접 말 걸어보고, 집에 가는 방향이 같다면 같이 하굣길을 지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다. 비록 좋아하는 감정을 여자아이에게 전달하지 못하더라고 그녀에게 최대한 관심 받고 싶었다. 그녀에게 짓궂으면서도 유치한 장난을 쳤다. 긴 머리카락을 살짝 당기거나 치마를 들치고 재빠르게 도망갔다. 그녀는 화가 나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도 장난을 멈출 수 없었다. 뭔지 모를 희열감이 느꼈다. 그녀가 내 행동에 즉각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까.

 

도가 지나친 장난은 그 사람과의 관계를 가까이해주기는커녕 더 멀어지게 만든다. 당신이 상대방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에 나쁜 의도가 없는 장난을 치더라도 상대방은 당신의 장난을 그냥 철없는 태도로 볼 뿐이다. 특히 스토커는 사랑하면 집착에 가까운 장난질도 괜찮다고 가볍게 생각한다. 관심 있는 상대를 병적으로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괴롭힌다. 끈질기게 전화로 구애하거나 선물 공세를 펴기도 하지만 음란한 말을 하거나 폭행이나 협박, 강간이나 상해, 심지어는 살인이나 납치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가 가장 원하는 것은 관심이다. 그들은 따뜻한 사랑은 둘째치고 부모가 자기를 좀 쳐다보기라도 했으면 한다. 칭찬하건 욕을 하건 상관없으니 관심만이라도 가져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마음속으로 ‘날 좀 봐주세요’라고 외치며, 부모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는 것은 그래서이다. 다 자란 어른도 예외는 아니다. ‘그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은 관계에 대한 최소한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며 고독감을 덜어줌으로써 약간의 심리적 안정감을 얻고 싶어 한다. 그런데 상대의 시선이 자신에게만 향하길 원하는 마음이 집착으로 변하면 문제가 된다. 상대를 집요하게 괴롭히면서 자기를 알리는 데 열중한다. 그 피해의 정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에도 상대를 괴롭혀야 자신이 주목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사랑을 쟁취하려는 행동으로 자기합리화 한다. 이런 행동은 본질적으로 관심을 받고 싶고, 사랑을 원하는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최근 가카께서 『대통령의 시간』이라는 회고록을 펴냈다. 자원외교와 4대강 사업 둥 자신의 업적을 자평한 내용 때문에 가카를 미워하는 여론과 독자들이 많아졌다. 신기하게도 2만 8000원이 되는 만만치 않은 가격에 800쪽에 이르는 분량에 달하는 가카의 책을 안 읽은 사람들도 너나할 것이 회고록에 대한 악평을 남겼다. 정말 가카의 능력은 대단하다. 최악의 책은 독자들은 거들떠보지 않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하루 자고 일어날수록 판매부수는 늘어난다. 사람들은 가카의 회고록을 돈 주고 읽지 말라고 권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을 사보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

 

가카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다. 자신의 업적을 좋게 포장해서 국민들에게 알리면 전임 대통령이 돼서도 국민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카가 회고록을 펴내는 데 고집하는 태도에서 애정결핍자의 전형적인 심리 상태를 발견할 수 있다. 상대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도록 민폐를 끼쳐서라도 상대에게 최대한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가카의 임기 시절을 떠올리면 국민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가카는 대통령 자리에 물러나서도 끝까지 국민들을 괴롭힌다. 가카는 국민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뻔뻔하게도 회고록을 펴내는 아주 심한 장난을 치고 말았다.

 

회고록이 잘 팔려서 베스트셀러 상위권으로 쭉쭉 올라가더라도 가카의 인지도는 쭉쭉 떨어진다. 대통령 시절에 국민들의 사랑을 받지 못해 빅엿을 먹었는데 이번에는 회고록 한 권으로 단 며칠 만에 국민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런 기이한 현상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가카가 자초한 일이다. 국민과 여론은 가카의 회고록을 너무나도 뻔뻔하고 정도가 지나친 최악의 장난질로 생각하는데 가카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생각보다 너무 진지하다. 왜 자신의 회고록을 나쁘게 보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럴 만하다. 애정결핍자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좋은 쪽으로 합리화하고 싶어 한다. 그래야 자신의 약점과 절대로 드러내면 안 되는 치부를 가릴 수 있으니까. 국민들에게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한 가카가 불쌍하다. 회고록에 임기 시절에 이룬 업적을 과대포장하지 않고, 부족한 국정 운영의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아니, 그냥 회고록을 펴내지 않고 조용히 자택에 머물러 있으면 지금처럼 이렇게 심한 욕을 먹지 않았다.

 

가카가 회고록을 향한 비난 여론을 잠재우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자뻑에 가까운 자화자찬이 넘치는 회고록에 대해서 이 말 한 마디만 하면 된다.

 

 

 

            

 

 

 
그렇지만 임기 시절에 불통 이미지 1위에 올랐던 가카 클라스는 영원하다. 국민들을 상대로 회고록을 펴내는 거대한 장난질에 대해 반성하는 카가의 모습은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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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06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디너 선택에 그런 시스템이 있군요 항상 궁금했습니다 ^^ 저 책이 나와서 다행이라고 봐요 조용히 파 묻혀 있으면 잊어 버릴텐데 사람들의 관심과 분노를 일으켰잖아요 ㅋㅋ

cyrus 2015-02-07 11:21   좋아요 0 | URL
아무리 가카는 숨어 지내도 불편한 진실은 밟혀지기 마련입니다. 독 안에 든 `쥐`에요. 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5-02-0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러스 님의 이명박을 향한 ˝ 부들부들 ˝ 이 느껴집니다.

cyrus 2015-02-07 11:23   좋아요 0 | URL
가카의 회고록을 읽고 진솔한 악평을 남겨주신 지인이 있는데 그 분 덕분에 제 수명이 연장될 수 있었어요. 생명의 은인입니다. ㅋㅋㅋ

마태우스 2015-02-07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래도 가카가 회고록을 내주신 덕분에 님의 이 훌륭한글을 읽었네요 부끄럽지만 님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확실시 알게됐습니다그런점은 긍정적인 면이네요

cyrus 2015-02-07 11:28   좋아요 0 | URL
회고록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은 졸문인데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transient-guest 2015-02-07 0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좋아하는 아이에게 짓꿎은 장난만 친 나날들에 대한 후회가...-_-::
그건 그렇고, 가카의 저 회고록은 가짜 fact를 기록으로 남겨 나중에 써먹겠다는 의도가 하나 보이는 것 같은데요. 나중에 변명꺼리든 보수든 누군가 분명히 이를 인용할테니까요. 그런데 결과는 자신이 저지른 실정의 내역을 하나씩 리스트하는 것으로 끝난듯...ㅎㅎ 그야말로 자기발을 쏴버린 결과를 맞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cyrus 2015-02-07 11:27   좋아요 0 | URL
언젠가 가카는 회고록을 펴내는 일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ㅎㅎㅎ

stella.K 2015-02-07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아닌 것 같던데...
좋아요 5개라도 알라디너의 선택에 꼭 올라가는 건 아닌 것 같더라구.
나도 경험한 바 있고, 다른 알라디너도 보니까 그렇고.
그러니까 알라디너의 선택은 알라딘 사측이 최종적으로 좋아야 올라 간다는 말씀!
또한 그런 의미에서 알라딘도 가카를 싫어하는가 보지.
그러니 이 알라디너의 선택이란 것도 별로 공정한 것 같진 않고...
나도 좀 읽지도 않으면서 또 앞으로 읽을 것도 아니면서 악평부터 하는 일은
좀 그만 하면 좋겠다.ㅠ
그런데 몇년 전에 빌 클린턴이 회고록 냈잖아.
전화번호부 같은 책 두 권이던데 그것과는 어떻게 비교되는지 궁금하긴 하더군.

cyrus 2015-02-07 12:09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누님 말씀 듣고 보니 예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우연히 다른 알라디너님의 글을 읽다가 알게 되었는데 인지도 높은 출판사의 책만 눈에 띄는 것 같습니다.

마립간 2015-02-07 12:55   좋아요 0 | URL
`알라디너의 선택`은 `지기` 님의 어느 글에 본 것인데, 로직으로, 그러니까 기계적으로 반영된다고 했습니다. 단, 책의 링크가 있어야 하고 그 책이 신간이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요. 그리고 당연히 추천의 시간도 관련있고요. 인지도가 낮은 출판사로 인해 노출이 적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데요.

cyrus 2015-02-0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o. 마립간님 / 제가 `알라디너의 선택`에 관한 언급 때문에 북플에 처음 가입하는 분들에게 오해를 불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립간님 말씀대로 알라딘 로직, 그러니까 `알라디너의 선택`에 부합되는 글이 노출되도록 하는 알고리즘이 있는 건 맞습니다. 제가 ``알라디너의 선택`을 보게 되면 인지도 높은 책이 언급 횟수가 많다고 언급한 점은 제가 착각한 것 같습니다. `알라디너의 선택`을 유심히 보지 않아서 잘못된 추측을 하고 말았습니다. 몰랐던 점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qualia 2015-02-07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판단엔 가카는 영리(영악)하신 분이에요.
그에 비해 ‘우리’나 우리 국민들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곰탱이들이죠.
가카는 국민들이 미련 곰탱이라는 걸 완전 파악하고 그걸 기막히게 이용한 것뿐이죠.
해서 비판 대상은 가카보다는 우리 국민 자신이어야 합니다.
한국 국민들보다 ‘병신스런/병신 같은’ 국민은 세상에 없습니다.

알라딘 서재 동네 사람들한테는 커다란 착각이 있는 듯합니다.
즉 책깨나 읽는다는 사람들이 더 현실감각 없는 착각을 잘한다는 것이죠.
지적/비판적 판단감각과 정의감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발언하는
계층이 다수일 거라고, 아니 최소한 다수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계몽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세상은 결국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상/서재에서 일어나 바깥에 나가서 50~60대 이상 사람들과 대화를 하거나
실세계 여론을 들어보고 파악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들도 가카나 닭통 비판/욕은 해요.
쓴웃음 나오는 게 저들은 우리보다 욕의 강도가 더 세다는 것입니다.
허나 그러면서도 결국 결론은 박정희고 최종적으론 종북 타령입니다.
더 이상 대화가 안 통합니다. 계속하다간 멱살잡이 아니면 정신병자 소리 듣습니다.
수많은 평균적/일반적 이명박과 박근혜가 가카를 만들고 닭통을 만든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 자신이 바로 그들 자신이란 것입니다.

아무리 가카나 닭통 같은 위대한 영도자가 나타나서 연속으로 나라꼴을 완전히 절단내도
이 병신 같은 한국 국민들은 계속 결론은 박정희로 수렴됩니다.
그리고 자학/자멸의 굿판인 종북 타령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친아버지를 죽인 의붓아버지를 자신의 친아버지로 섬기는 병신 같은 한국 국민들...

아무리 가카나 닭통을 신랄하게 비판해도 소용없다고 봅니다.
그보다 더 우매하고 병신 같은 국민들이 무슨 천지개벽이라도 벌어져서 깨어나지 않고서는...

[덧]

‘병신스런/병신 같은’이란 말보다 한국 국민들의 우매함과 어리석음을 더 잘 표현하는 수식어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매우 상스럽고 반지성적으로 들리는 말이라서, 쓰는 사람이 오히려 누워서 침 뱉는 격에 해당하죠. 그러나 세계적으로/역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등신 같고, 머저리 같고, 미련 곰투가리 같은 한국 국민들의 우매함/어리석음/멍청함/비굴함 따위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저 말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는 약간 다른 뉘앙스지만, 이수열 선생께서도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말 바로 쓰기』(현암사, 1999)에서 분명히 쓰고 있는 표현입니다. 저런 적나라한 표현을 자주 입에 올릴 필요는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써야 할 때는 강력한 의미를 담아서 써야 할 듯합니다. 저 또한 한국 국민의 일원이지만, 정말 구제불능의 한국 국민들은 병신 같다고 생각합니다. 종북/빨갱이/친북 타령으로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행위는 결국 친아버지를 죽인 의붓아버지를 원수인 줄도 모르고 (아니 알면서도) 자신의 친아버지로 섬기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병신과 머저리들의 작태일 뿐입니다. 적어도 한반도 반쪽 남한땅의 52~60% 이상은 그런 점에서 광신도와 다름없습니다. 우리 한민족이 비정상이 아닌 이상, 같은 동포/형제자매와 칼과 총을 겨누며 악에 받쳐 싸울 까닭이 없습니다. 따라서 병신스러운/병신 같은 한국 국민이란 표현은 결코 틀린 표현도, 지나친 표현도 아닙니다.

cyrus 2015-02-07 17:38   좋아요 0 | URL
댓글 잘 봤습니다. 작년에 정몽준 아들이 국민이 미개하다는 발언을 하다가 네티즌들의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죠. 이 해프닝 때문에 정치인으로서의 정몽준 이미지도 타격을 입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정몽준 아들의 발언이 불쾌하게 들릴 수 있는 심한 표현을 해서 그렇지 아직 저를 포함한 우리나라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성숙하다고 볼 수 없는 건 사실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지금 정부가 담뱃값 인상과 연말정산 문제 때문에 국민의 원성이 높아졌는데 차기 대선 때 야당이 승리할 것이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뼛속 깊이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대구 경북은 새누리당 출신을 뽑으니까요.

qualia 2015-02-08 07:45   좋아요 0 | URL
제 비판 맥락은 정몽준 아들의 국민 미개 발언과는 전혀 다릅니다. 저는 또한 정몽준 아들의 발언에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제 비판 내용이나 맥락은 정몽준 아들의 비난 내용이나 맥락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정몽준 아들은 권력자의 편에서 국민을 통치의 대상으로 본 시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제 비판은 같은 ‘못난’ 국민의 일원이라는 자각/시각에서 나온 것으로서 반성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매한 국민들을 이용해먹는(중우정치를 획책하는) 정치꾼이나 권력자들을 최우선적으로 경계하고 강력 비판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제가 댓글 첫머리에서 이명박을 짧게 희화화하고 (논할 가치조차 없다고 마무리한 뒤) 곧장 우매한 국민 수준 비판에 돌입한 것은 바로 그런 전제/맥락에서였습니다. 저는 독자분들이 그런 맥락 정도는 충분히 감지하리라고 봅니다.

다른 독자분들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최근(뿐만 아니라 십수 년째) 제 일터에서 다양한 계층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나면서, 특히 우리 아버지/어머니 세대 분들과 만나 직접 세상 살아가는/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고 논쟁하면서, 파악한 여론을 근거로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저 개인적/주관적/심리적 분기탱천에서 게거품을 문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한국 (국민)이 자초하고 있는 ‘병신같이’ 한심스러운 현상황 ― 남북대치의 극렬화, 호남과 영남의 지역대결 격화, 이런 민족적 갈등과 반목을 확대재생산하면서 정치적 반사이익을 꾀하는 정치꾼/권력자들, 적대적 공존을 획책하는 남북 정권/군부세력 무리들, 이런 무리들의 노예를 자처하면서 선거 때마다 표를 몰아주는 우매한 국민들 등등...

거의 24시간 남한과 북한의 극한대결 조장에 혈안이 된 듯한 종편 채널들의 ‘병신 같은’ 짓거리 ― 종편을 보면 건전한 상식인의 시각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논리들이 판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구세력들의 이런 노골적 ‘국민의식화교육’ 프로그램들을 50~60대 이상의 우리 아버지/어머니 세대 분들이 인기 드라마보다 더 열광적으로 시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 가정은 물론이고 대중목욕탕, 노인정, 버스 터미널 등등, 텔레비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종편의 선전선동 방송이 채널을 독차지하다시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함 가셔서 직접 확인들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이 내보내는 뉴스, 대담 프로, 특집방송 등등은 거의 모두 종북 때려잡기, 남북 이질화 추진, 남북대결 조장, 수구세력 특권/이권/지배권 강화, 현정권 실정에 대한 대리변명과 옹호, 범야권 비판세력 확인사살식 음해, 신자유주의적 사상 주입, 미국 속국 자처, 친일 친미 논리 주입 따위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의 50~60대 이상 국민들이 세상 사건사고에 대한 소식/뉴스와 정치적 견해 등등을 어디에서 입수하고 어떻게 형성하겠습니까? 책깨나 읽으면서 그래도 합리적/비판적 지성인임을 은근히 자처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조차 세상 사건사고에 대한 소식/뉴스와 정치적 견해 등등은 TV 뉴스 프로그램, 대담 프로그램 따위에서 가장 많이 입수하고 그것들에 근거해 형성할 것입니다. 현대사회(특히 남한사회)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구조화돼 있고, 우린 모두 그런 구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이들수록 뇌가 굳어버려 사고방식이 점점 보수화/수구화돼가는 남한사회의 50~60대들 이상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제가 그들과 대화/논쟁하면서 거듭거듭 확인한/확인하는 사실은 그들이 종편의 논리와 주장을 놀랄 만큼 똑같이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공사판 일터, 저잣거리, 택시 안, 주택가 골목, 공원, 심지어 명절날 고향땅 등등에서 만난 50~60대 이상 아버지/어머니 세대, 심지어 40대 아래의 젊은 세대까지 모두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반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보수화/수구화의 중증이 얼마나 심각하게 진행됐는지 모릅니다. 특히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부정적 인식,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 광적인 증오, 종북/친북 개념에 대한 종편식 악의적 편파논리의 심화 등등은 이성적 대화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만약 이에 대해 ‘진보적’ 민족적 시각으로 저들과 논쟁하다가는 멱살잡이까지 가거나 사회부적응자, 간첩, 정신이상자 취급까지 받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이석기 재판 결과, 신은미/황선 토크 콘서트 종북 낙인찍기 따위 등등은 이 대한민국 사회의 이념적 매카시즘적 광기/독재정권적 사상검증과 사상탄압/정신적 병리 현상/양심 마비/민주적 정의 추락/법치 상실 따위가 빚어낸 블랙 코미디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알라딘 블로거들과 진보적 젊은 세대들은 웬만큼 동의하리라 판단합니다만, 이런 진보적 견해를 끝까지 관철하는 한국 국민들은 이제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장악 당한 방송3사와 종편의 악영향과 폐해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일신라 676년부터 조선왕조 1910년까지 사실상 1천년 이상을 중국이나 이민족의 속국으로 살아왔다는 굴욕적 역사적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또한 일제 식민지 노예살이를 사실상 50년 이상 해왔었다고 자각해야 합니다. 그 뒤로는 한 술 더 떠서 동족살육/동족포식의 비극을 자초했고 그 대가로써 남과 북이 갈라져 70여년 동안 동포/형제자매 가슴에 총칼을 들이대며 집안싸움을 극렬하게 해왔고 지금 이 순간도 그 못난 짓을 계속하고 있는 민족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남쪽 땅덩어리는 호남과 영남으로 또 찢어져 너 죽고 나 살자식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병신 같은’ 짓거리입니까? 대체 이것 말고 무엇을 병신스럽다고 욕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런 자각이 있었다면 결코 우리 아버지/어머니 세대 분들이 저렇게까지 수구화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 국민들이 이런 뼈아픈 자각에 이르지 못하고 노예적 삶을 자초해왔기 때문에 이명박 정권이나 박근혜 정권 같은 무능 정권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지금 신성한 한국 국민들은 (진보/보수 진영을 떠나 모두) 현시국의 난맥상이나 살림살이의 고초 따위에 대한 책임을 정부나 정권 측에 전가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병신 같은’ 행태입니다. 그런 병신 같은 의식 수준으로 병신 같은 정권을 뽑아놓은/만들어놓은 당사자들이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자각하지 못하는, 자기반성하지 못하는, 못난 국민들의 전형적인 행태입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노예가 노예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즉 한국 국민들이 병신 같은 의식 수준에 벗어나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한국/한민족은 멸망하고 말 것이라 봅니다. 북한 급변사태 발생 여부보다 한국 국민들의 병신스러운 의식 수준이 더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2015-02-08 03:11)

레삭매냐 2015-02-09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B는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셨네요.
어느 신문 칼럼에선가 보니 그냥 동아리 활동
이나 하시지 무슨 책까지 내냐고 하더군요.

cyrus 2015-02-09 21:15   좋아요 0 | URL
가카가 국민의 관심을 받고 싶은가 봅니다. ㅎㅎㅎ
 
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 중국 최고 석학 장치청 교수의 건강 고전 명강의 장치청의 중국 고전 강해
장치청 지음, 오수현 옮김, 정창현 감수 / 판미동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내비게이션과 캡슐을 이용해 환자의 병변을 찾아 수술하는 기법이 등장하는 등 서양 의학의 발전이 눈부신데도 아직도 한방 치료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 과학 시대가 전개되고 있는데도 한의학을 찾는 사람이 많은 첫째 이유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는 서양 의학의 효과에 한계를 느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인체의 기능 현상을 연구하는 한의학을 대안으로 찾기 때문이다. 둘째는 마취 수술로 인한 부작용, 특정 약물의 내성 축적 부작용에 의한 피해를 두려워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스트레스와 환경호르몬 식품첨가물 농약 등 각종 인공 유해물질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자연 친화적인 한의학을 찾는 것이다. 서양 의학은 해부학적 생리학 개념에 따라 인체를 연구한다. 이에 비해 한의학은 기의 흐름과 조화를 중시한다.

 

 

 

 

 

 

총체적인 한의학 이론인 ‘소문’과 침구학의 비조로 꼽히는 ‘영추’로 구성된 황제내경은 천지자연의 기와 인체의 기의 조화를 모색하는 한의학 최고의 고전이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 못지않게 병이 들지 않게 하는 양생을 최고 목표로 삼는다. 황제라는 이름이 책 이름에 보이듯, 안의 내용이 대체로 황제와 그의 스승들의 문답 형식을 띠고 있다. 내경이라는 말은 생명의 핵심 또는 의학의 핵심을 담은 경전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정(精), 기(氣), 신(神)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싱명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기와 신은 에너지적인 생명력을 말하며, 정은 인간의 생명력이 구현된 형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다. 정신기는 따로따로가 아니다. 인위적인 나눔일 뿐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성립된다.

 

한의학에서는 인간을 소우주라고 한다. 즉,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여 인간의 생체리듬도 변화해 간다는 것이다. 자연의 흐름 중 가장 주기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계절의 변화와 낮과 밤의 순환이다. 음양오행 이론도 여기에서 나온다. 한마디로 음양이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다.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 낮은 양이고, 밤은 음이다. 남자는 양이요, 여자는 음이다. 기(氣)는 양이요 혈(血)은 음이다. 이렇게 어떤 사물이든 간에 상대적으로 우주 간에 존재하며 여기에서 또 음과 양의 양면으로 나누어진다. 우주 만물이 음양과 오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 음양오행의 상대성에서 서로가 균형을 유지하지 못할 때 우주 만물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며 소우주인 우리 인체에는 질병이 생긴다. 옛날에는 계절과 주야의 변화에 인간은 직접 영향을 받았기에, 자연 변화에 순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문명화된 오늘날은 계절 변화에 대한 순응은 많이 퇴색됐다. 하지만 거대한 우주의 변화 속에 인간은 반드시 영향을 받게 돼 있어 이를 따라가지 않을 경우 현대적 계절병이 발생하게 된다.

 

황제내경에서는 ‘춘하양양, 추동양음(春夏養陽 秋冬養陰)’이라는 말이 있다. 이 구절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봄과 여름에 양기를 돕는다면 가을과 겨울에 음기를 돕는다는 뜻이라고 본다. 반대로 해석하는 입장은 봄과 여름에 양기를, 가을과 겨울에 음기를 억제한다고 말한다. 결국, 이 말은 자신의 체질에 맞는 양생법을 선택하여 계절의 변화에 순응해 살 것을 강조한다. 봄은 만물이 위로 솟아 자라나는 따뜻한 계절이고, 여름은 꽃을 피워 영화를 누리는 뜨거운 계절이다. 가을은 결실을 보고 식물의 진액이 뿌리로 내려가 모이는 계절이고, 겨울은 뿌리에 응집되어 봄날을 기약하는 추운 계절이다. 각 계절에 맞춘 것이 한의학 양생의 기본 이론이다.

 

올바른 양생을 위해서는 사계절의 기후와 주위 환경만 맞추는 것이 아니다. 정신수련, 음식과 기거의 조절도 중시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이 생체 리듬이다. 리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음악에서도 리듬이 중요하지만, 건강을 유지하려면 리듬을 타야 한다. 인체는 스위치를 누르면 언제나 똑같이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다. 여러 악기의 음이 조화를 이루듯 각 장기가 서로 협응하고, 리듬을 유지해야 건강이 확보될 수 있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급격하게 변하고, 식사 시간이 들쭉날쭉해지면 생체 리듬이 흔들린다.

 

병이 나지 않게 미리 막고 천수를 누리게 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변화에 맞춘 생활을 하는 것이다. 황제내경에 여름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며, 겨울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계절별로 잠자는 시간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해가 뜨면 양기가 충만해져 활동하는데 알맞고, 해가 떨어지면 음기가 강해져 몸의 움직임을 줄이고 휴식을 취하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계절별 수면 리듬의 변화는 눈부신 조명 불빛과 스마트폰이란 문명의 혜택을 받기 전엔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해지고 두 세 시간 정도 있으면 자고, 먼동이 틀 때 즈음에 일어나는 것이 일상적인 생활 리듬이었다. 자연과 인간 또한 우주 삼라만상과의 원활하고 조화로운 심신 생활을 통해서 건강을 지키는 것이 황제내경의 양생법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한의학은 또 장부의 작동 원리인 물질의 속성을 목, 화, 토, 금, 수 등 5가지 오행으로 구분하고 서로 돕는 상생과 서로 대립하는 상극으로 나눠 질병의 발생을 이해한다. 또 칠정(七情)을 인간의 기본 감정으로 규정하고 정신 상태에 따른 질환의 발생을 설명한다. 모든 병은 막혀서 온다고도 했다. 무형의 생명력이 유형의 조직체에 잘 출입하면 정상, 출입이 잘 안 되면 병, 영 출입을 못할 정도로 막혀서 빠져 나가버리면 죽음이다. 막히는 원인을 찾아보면 다치는 것 말고는 기후, 음식, 기거, 마음뿐이다. 그래서 같은 병이라 해도 원인을 잘 살펴서 치료를 다르게 해야 한다. 따라서 한의학은 일관된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학문적 특성을 내재하고 있음에도 서양 의학이 해부학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질환의 원인을 파악하고 진단 치료하는 데 여전히 유용한 이점을 안고 있다.

 

황제내경을 이해한다면 인간의 몸이 자연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람이 자연과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을 둘러싼 여러 가지 조건을 우리는 환경이라고 표현하지만, 자연과 사람이 하나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서로 어우러진 상태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의식주의 수준은 높아졌지만 정신이 복잡해졌다. 그래서 마음으로 인한 병이 많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생기는 병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며 알아도 평소에 원인을 제거하거나 증상을 해소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천 년 전 한의학의 원전인 황제내경 소문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염담무욕, 합동어도(恬淡無欲, 合同於道).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다면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우주와 일체되는 궁극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몸을 해롭게 하는 것을 피하고 마음을 편안하고 담담하게 해서 잡념을 비우고 없애면 생명력이 온몸에 꽉 차서 지켜줄 것이니 병이 생길 수가 없다. 이렇게 몸을 보전하는 바른 생활을 강조하면 삶이 단조롭게 되고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너무 뻔한 말이지만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건강을 잃은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건강을 잃으면 몸과 마음이 고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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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5-02-0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었는데, 밀린 책이 많아서 포기했더랬죠. 恬淡無欲, 合同於道... 이렇게 살 수 있다면야...^^

cyrus 2015-02-07 11:30   좋아요 0 | URL
표맥님이 읽어보신다면 만족하실거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황제내경을 알게 되었는데 입문용으로 좋습니다. ^^

만병통치약 2015-02-06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자연을 거슬러 살면서 과거에 비해 건강해진것도 사실이고 수명도 늘어난 것도 사실인데 왜 과거 단순했던 시절의 철학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몸은 편해도 마음이 불편해서일까요?

cyrus 2015-02-07 11:34   좋아요 0 | URL
통치약님 말씀이 맞습니다. 황제내경 같은 한의학에서 볼 수 있는 철학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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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랄한 폭력은 기억까지 깨부수지는 못한다.
광주는 요구이고
거절이고
회생이다.
하나로 합쳐진 복합적인 의미를
그 어떤 힘이 으스러뜨린다는 것인가.

 

(김시종 「입 다문 말 - 박관현에게」 중에서, 《광주 시편》 42쪽)

 


1980년 5월 18일, 하루 동안 그야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변칙적인 야만적 폭력이 급조되었다. 광주항쟁. 5월 광주에 관한 이야기가 그만큼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1980년의 기록들은 이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기에 제목만 듣고도 무슨 내용일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활자를 통해 전이되는 광주의 역사에 익숙해질수록 사람들은 떳떳하게 고개를 들지 못한다. 여전히 무자비하게 살해된 광주 시민들이 길바닥에 널브러진 흑백사진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그것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갖는 거리감과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들이 힘겹게 싸우고 상처받는 투쟁의 길을 그저 눈으로만 바라보고 분노할 수 있어도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잔인한 부조리에 대해 여린 가슴만 치는 나약한 감상주의자가 될 우려가 있다. 역사를 책이 아닌 왜곡된 정보로 가득한 인터넷으로만 배우는 청소년이라면 광주항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거나 책을 읽었더라면 이렇게 쓸 것이다. ‘80년대의 암울한 독재 정권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역사의 감상하는 태도는 최악의 역사관을 형성하기도 한다. 광주항쟁을 북한이 개입된 날조된 사건이라든가 신군부의 위대한 업적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이들은 광주의 아픈 속살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광주라는 거대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위해선 광주 희생의 슬픈 바닥 얘기에서 재출발해야 한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강제로 봉인된 억울한 호소를 역사로부터 외면된 채 잊힌 영혼의 목소리로 되살린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 희생된 어린 영혼은 극한의 폭력에 유린당한 인간이 죽어서도 어떻게 짓밟히며 은폐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들이 다가왔어. 얼룩덜룩한 군복에 철모를 쓰고, 팔엔 적십자 완장을 차고서 빠르게. 그들은 2인 1조로 우리들의 몸을 들어올려 군용 트럭에 던져넣기 시작했어.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말 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46~47쪽)

 

지금까지 알려진 광주의 이야기와 기록된 역사는 피해자의 진실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침묵의 합의에 불과하다. 그것은 반쪽짜리 명복이다. 소년 동호는 가슴 아픈 역설적인 상황을 포착한다. 추도식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유족들의 모습을 본 동호는 나라라고 부를 수 없는 잔인한 행동을 한 국가의 상징물이 개입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장면은 강압적인 권력 앞에 무너진 광주의 비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원통한 죽음이 가려져 있다면
대지는 이제 조국이 아니다.

 

(김시종 「명복을 빌지 말라」 중에서, 《광주 시편》 52쪽)

 

광주 시민들의 원통한 죽음은 나라라고 부를 수 없는 대지의 기(旗)에 가려지고 말았다. 학살에 가담한 자는 십 년 뒤에 기득권이 되어 희생자들을 태극기가 펄럭이는 망월동 묘역에 봉인했다. 이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진실로 영원히 규명하지 못했다. 죽은 자는 영원히 말이 없고, 가해자 집단은 상투를 든 기득권자가 되어 스스로 면죄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눈을 감을 수 없는 죽음은
떠돌고 있어야 위협이 된다.
움푹 팬 눈구멍에 둥지를 튼 원한
원귀가 되어 나라를 넘치라.
기억되는 기억이 있는 한
뒤집을 수 없는 반증은 깊은 기억 속의 것.
감을 수 없는 사자(死者)의 죽음이다.
땅에 묻지 마라.
사람들아,
명복을 빌지 마라.

 

(김시종 「명복을 빌지 말라」 중에서, 《광주 시편》 52쪽)

 

 

군인들에 의해 버려진 광주 희생자들의 증언은 ‘눈을 감을 수 없는 죽음’이다. 한강은 눈을 감지 못한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무덤 밖으로 꺼낸다. 왜 하필 광주의 생존자가 아닌 희생자들을 이야기에 등장시킨 것일까. 이것은 억울하게 땅속에 묻힌 잊힌 광주의 기억을 복원하는 문학적 작업이다. 만약에 작가가 《소년이 온다》를 애초에 생존자들이 겪은 질곡의 시간을 기록하고 묘사했다면 독자는 실질적인 고통의 연대감을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세월의 바람에 훅 날아가기 쉬운 공허한 문자로 된 명복의 문장만 읊조릴 뿐이다. 독자는 사진과 문자 그리고 생존자의 구술로 재구성된 광주의 역사에 너무나도 익숙하다. 생존자들이 광주의 상황을 묘사하는 서사에 이제 독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저 역사교과서에 실리는 하나의 사건으로만 바라볼 뿐이다. 그러므로 《소년이 온다》의 구성 방식은 이전에 나온 광주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을 뛰어넘는다. 이 소설은 단순히 광주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문장 덩어리가 아니다.

 

《소년이 온다》의 키워드는 ‘상처 입은 시간’이다. 열흘 동안 진행되는 이야기는 역사교과서에 볼 수 없다. 인간의 잔혹함이 어디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섬뜩하게 증언한다. 차마 이 자리에 옮길 수 없는 그 참혹한 고문들을 통해 많은 사람이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파멸했다. 조금 전까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도청을 지키던 동료가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졌다. 피비린내 감도는 폭압 속에 외부와 단절된 고립무원 광주의 시간은 그렇게 멈추고 말았다. 상흔으로 남은 기억은 원고지 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문장이 되어 한 편의 문학으로 변주한다. 한강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정신의 상처, 혹은 살의까지 가 닿는 증오를 다독이기 위해 원고지를 채우기 시작한다. 

 

기억의 창고에는 축적된 고통과 행복의 기억, 나이를 먹어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망각되지 않는 기억이 쌓여 있다. 감성이 차갑거나 슬퍼질 때 그 기억은 소리 소문 없이 일상에 파고들어 나지막이 속삭인다. 기억 저편에서 잠들기만 원했던 감정들이 선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면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그 순간들을 마주해야 한다.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잊을 수 없을 만큼 힘들고 아프다.

 

한강은 왜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감행했을까. 그녀가 광주의 상처 입은 시간을 다시 불러온 것은 단지 “권력에 대한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는 밀란 쿤데라의 잠언을 소설로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다. 나아가 5월 광주를 ‘독자가 죽은 자의 그림자 속으로 뛰어드는 봉합의 세계’로 확장한다. 독자는 폭력에 무너지는 광주의 정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년이 온다》앞에서 무자비한 폭력의 참상을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독자가 소설에서 보는 것은 죽음에 에워싸인 인간의 실존적 공포다. 총과 칼로 정당한 외침을 짓이기는 군인 앞에 내 가족과 이웃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투쟁은 역사의 의미를 따지기 이전에 절박했던 인간의 몸부림이다. 우리는 묘역에 말없이 잠들어 있는 그들 영혼의 슬프고도 생생한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 목소리를 귀기울이고 이승으로 소환한 사람은 바로 한강이다.

 

상처 입은 시간은 기억하는 사람의 몫이라고도 하지만 모두가 기억할 때 그 고통은 용서와 화해로 치유될 수 있다. 한(恨)과 외면으로는 안 된다. 그날을 기억하고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상처는 들쑤셔서도 안 되겠지만 눈 돌린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연 광주항쟁의 희생자들을 제대로 명복을 빌었는지 반성해야 한다. 세월이 지날수록 땅에 묻힌 광주의 진실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땅에 묻히지 않은 광주의 기억은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광주를 잊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망각하는 것이 된다. 기억을 온전히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공허한 명복은 거부한다. 차라리 명복을 빌지 말라. 광주를 기억하는 것이 깨달음과 행동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워도 일종의 성역처럼 된 광주의 상흔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가장 악랄하고 잔인했던 국가 폭력 집단의 후예들이 얼마 남지 않은 광주의 기억을 깨부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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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02-06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는 광주를 생각하면 윗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직접적인 이득을 챙긴 윗선의 악행도 그렇지만, 절대다수였던 군인들. 그러니까 진압군으로 들어간 그들은 왜 지금까지도 침묵하고 있는건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다수인 그들이 역사앞에서 진실을 이야기하고 참회를 하든, 변명을 하든, 무엇인가 얘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숨어버리고, 뒷방에서 자조하면서 추억삼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cyrus 2015-02-06 14:33   좋아요 0 | URL
예전에 광주 항쟁 관련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어요. 아마도 프로그램명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일 겁니다. 광주 항쟁에 나섰던 군인을 인터뷰한 장면이 있는데 힘없는 시민을 무참하게 폭력을 저지른 행위에 대한 죄책감에 그 때 그 참상의 기억을 지우지 못해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더군요. 폭력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환경 탓에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소수의 가해자들의 상황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transient-guest 2015-02-07 05:09   좋아요 0 | URL
양심적인 소수는 나서지 못하고, 다수는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살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게 화가나요..

단발머리 2015-02-06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도 광주에 대한 이야기는 두렵고 무섭습니다. 영화로 몇 장면, 책으로 몇 장, 사진 몇 장을 보았는데도 너무 무서워요. 아직 이 책을 읽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광주가 잊혀져서는 안 되기에,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용기를 낸 작가 한강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5-02-06 14:36   좋아요 0 | URL
소설 초반부에 죽은 광주 시민들의 시신을 관리하는 장면부터 압권입니다. 한강 작가가 이 장면을 가까이서 보듯이 세밀하게 묘사했더라고요. 이 장면에 할애되는 분량만 해도 열 쪽은 넘을 겁니다.

맥거핀 2015-02-0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나서 한강의 이 작품은 소설 이상의 소설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명칭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요즘에 역사 시간에 `운동`이라고 배우니 어떤 온건한 무엇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운동이라기보다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죠. 광주학살 혹은 광주항쟁이라는 말이 차라리 더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도 소설을 읽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참혹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더라구요.

말씀하신 대로 어떻게든 기억하려고 애써야 하는데, 참..기억은 잊혀져가고 더 나아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까지 있고, 살인마도 여전히 뉘우치지 않고 잘 살고 있고..29만원이니 뭐니 하면서 조롱받으면서 끝날 사람이 아닌데..마음아픈 현실입니다.

cyrus 2015-02-06 14:39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말씀을 보면서 이제부터 ‘광주항쟁’이라는 말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민주화’라는 단어도 일베들에 의해서 그 의미가 완전히 이상하게 변질되고 말았으니까요. 일베가 단어를 지들 마음대로 바꾸면서 광주 항쟁을 조롱하고, 전두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transient-guest 2015-02-07 05:10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 광주항쟁이 더 정확하게 느껴지네요. xx운동이라는 건 순화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cyrus 2015-02-07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guest님 고맙습니다. 글에 광주항쟁으로 고쳤습니다. 역사를 교과서에 있는 그대로 배우다보니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1980년 광주의 5월은 아픔의 달이다. 이제 그 날들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기록됐고 망월동 묘역에는 웅장한 추모탑이 들어섰다. 역사는 어떤 형태로든 기록된다. 글, 그림 등의 다양한 메커니즘으로 역사는 남겨져 훗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자료가 된다.

 

미술가들은 너나없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그 사회 인식을 작품에 담기도 한다. 시대가 암울하고 폭압적인데 아름답고 장식적인 그림만 줄곧 그릴 순 없는 법이다. 특히 1980년대 일군의 작가들은 미술을 통해 억눌린 시대에 저항하며 ‘민중미술’이란 아름드리 나무를 키워냈다. 뜨거운 가슴과 투혼으로 암울했던 현실을 ‘현실과 발언’이란 이름으로 권력과 맞섰다.

 

시대에 뒤처진 미술 같지만, 세상이 어지럽다 싶으면 리얼리즘은 늘 미술의 전선 앞으로 다시 나온다. 이해하기 쉬운 미술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서다. 특히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 리얼리즘 미술은 이른바 민중미술과 연결되면서 한국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리얼리즘 미술은 현실을 오롯이 담지 못하고 있다. 작년 폐막한 광주비엔날레에서 홍성담 화백의 「세월오월」은 끝내 걸리지 못했다.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풍자했다는 이유로 주최 측은 그림 전시를 허락하지 않았다. 전시 유보 결정은 현실을 미화하지 않은 민중미술의 정신에 저버리는 것이다.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참가한 신경호 화백은 리얼리즘을 현실주의로 이해한다. 단순히 보이는 것 그대로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리얼리즘으로 보지 않는다. 한국인의 심성 근원에 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을 함께 아파하고, 그걸 뛰어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신 화백이 추구하는 리얼리즘이다.

 

 

 

 

 

신경호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초혼 1980」 1980년

 

 

펄럭이고 있다.
하이얀 만장 한 줄기
스산한 구름 가득한 하늘을 휘저으며 울리고 있다.
펄럭펄럭 몸을 비틀고서는
중천을 팽팽 치달으며
쥐어짜내는 목소리 다하도록 몸부림치고 있다.
비틀렸다가 치켜 오르고
휘어졌는가 하면 넘실대며
펄럭이고 있다.
부딪히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슬픔과 분노의 욱신거림을
천공에 빛바래며 펄럭이고 있다.

 

 

(김시종, ‘흐트러져 펄럭이는’ 중에서, 《광주 시편》 18쪽)

 

 

신 화백은「넋이라도 있고 없고 : 초혼 1980」을 통해 광주 시민들의 넋을 소생함으로써 그들이 말하지 못한 슬픈 사연을 그림으로 대신 전한다. 광주항쟁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역사 속에서 나오지 않는 무명 희생자들의 넋은 고통의 기억을 잊으려고 억지로 도려낸 상흔이다. 광주의 핏빛 상흔은 그림 속 만장이 되어 펄럭이고 있다. “광주는 진달래로 타오르는 우렁찬 피의 절규이다.” (김시종, ‘바래지는 시간 속’ 중에서, 《광주 시편》 32쪽) 땅속에 매장된 희생자들의 억울한 목소리는 피의 절규가 되어 잊지 말라고 살아남은 자들 앞에서 몸부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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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2-05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준가? 서경식의 이책 <TV 책을 보다>에서 다루더군.
재밌었는데 봤니?

나도 이 그림이 참 묘하게 끌리더군. 설명이 그래서 그런지
본질보다 비본질을 다루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 혼백이 올 것도 같고.ㅋ

cyrus 2015-02-05 20:33   좋아요 0 | URL
볼려고 했는데 깜박 잊어버려서 못봤어요. KBS 다시보기 되면 봐야겠어요.

저는 신경호 화백이 그린 허공에 대고 짖는 개 그림이 인상적이었어요. ^^

stella.K 2015-02-06 11:29   좋아요 0 | URL
그거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어.
당장 www.kbs.co,kr로 들어가서 봐.ㅋㅋ
서경식 교수 인터뷰도 볼 수 있어.^^

cyrus 2015-02-06 14:40   좋아요 0 | URL
무료로 볼 수 있는 거죠?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