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교실 벽이 모조리 무너지고 내가 모르는 어떤 들판에 서 있는 듯한 그런 순간이 있어. 굉장히 행복한 순간이기도 하지. 하늘을 나는 새처럼 마음껏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루이 랑베르》 중에서, 47쪽)

 

 

 

우리나라 부모, 특히 어머니의 교육열은 미국의 대통령이 칭찬할 정도로 알아준다. 사실 좁은 땅에, 지하자원도 없는 우리나라가 이 정도의 수준으로 살 수 있게 된 저변에는 바로 이 교육열이 한 몫을 단단히 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과열은 역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요즘에는 자녀교육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엄마를 '돼지엄마'라고 부른다. 엄마 돼지가 새끼 돼지들을 데리고 다니듯, 여러 학부모를 몰고 다니면서 고액 과외에 관련된 정보를 알린다. 또한, 같은 또래의 아이를 둔 학부모들을 모아 팀 수업을 편성하는 일도 책임진다. 부모의 과잉 기대는 아이들을 강요와 통제의 감옥으로 인도한다. 그들을 가두는 학교와 학원 역시 아이들을 입시 기계로 만들어버린다. 학생은 많고 대학의 문은 좁으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과연 아이들은 학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학교생활에 얼마나 만족하며 다니고 있을까. 학교라는 공간에 대해 인식하는 정도가 과거에 비해 크게 변함이 없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그저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막막한 공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곳으로 생각할 것이다. 학생들 앞에 주어진 교과목들. 흔히 사회에 나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라고 말하지만, 별로 그렇지 않다는 건 사회에 나가보면 알게 된다. 대학입시를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다. “이런 걸 왜 배워야 하는 거죠?” 학습의욕이 없는 학생들의 불평불만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모순투성이로 가득한 것이 교과서이고 교육과정이다. 아이가 말없이 학교와 학원 수업을 잘 받고 있는데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부모들은 자녀들이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저항성이 어느 정도인지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 아이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눈물과 아픔 속에 학원을 전전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과도한 학원 수강과 수능시험의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학습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심각한건지 잘 모르는 눈치 없는 부모에게 세 권의 소설을 권하고 싶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현대문학, 2013), 발자크의 《루이 랑베르》(문학동네, 2010),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민음사, 2001). 이 세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 모두 공통으로 엄격한 통제와 규율로 작동되는 교육에 민감하다. 그리고 세 작품 모두 작가의 문학적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전적 색채가 강하다. 헤세, 발자크, 조이스는 자신들이 쓴 소설을 통해서 진정성이 없는 가르침만 강요하는 교육 현실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아이들의 정서 상태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학창 시절을 다 겪어 본 어른들도 주인공의 학교생활을 묘사한 작가의 필력을 확인하는 순간, 숨이 막혀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헤세는 부모님 곁을 떠나 혈혈단신 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감성이 예민한 문학 소년은 신학교의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결국, 신경쇠약증이 심해져서 학교에 입학한 지 일 년 만에 중퇴한다. 학교의 그늘에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헤세는 안정적인 삶을 찾기까지 2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한다. 한때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행히 헤세는 시인이 되는 데 성공했지만, 《수레바퀴 밑에》의 주인공이자 헤세의 분신인 한스 기벤라트는 자신의 운명에 가중되는 억압의 수레바퀴 밑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한다.

 

발자크도 헤세와 같은 운명으로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발자크의 어머니는 매정하게도 어린 발자크를 좋아하지 않았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을 느껴보지 못한 발자크는 수도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돔 기숙학교에 입학한다. 발자크는 기숙학교 생활을 거대한 감옥에 갇힌 듯한 기분이라고 회상했다. 그런 '주옥' 같은 시절을 재구성한 소설이 바로 《루이 랑베르》이다. 한스와 마찬가지로 루이 역시 아주 영특한 아이로 촉망받지만,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엄격하고 따분한 수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독서, 명상, 사색이 루이의 유일한 낙이다. 한스와 루이는 서로 감정을 공유하면서 함께 지낼 수 있는 믿음직한 단짝(《수레바퀴 밑에》의 헤르만 하일너, 《루이 랑베르》에서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설의 화자)을 만나지만, 이 행복한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한다. 관계의 단절은 두 사람의 깊은 고립과 파멸을 초래하는 결정적 원인이 된다.

 

조이스의 유년시절은 헤세와 발자크보다 조금 밝은 편이다. 학교 모범생에다가 실제로 전교 학생회장까지 맡은 적도 있는 '엄친아' 같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작가의 유년 시절이 반영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는 나름대로 공부 잘하는 '문제아'로 등장한다. 그는 예수회 신부가 되기 위해서 학교생활에 적응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종교의 길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티븐의 마음에 이단의 새싹이 조금씩 자라게 되고, 금욕을 중시하는 기독교 교리를 어기면서까지 사창가에 가기도 한다. 스티븐은 한스와 루이처럼 자유와 억압 사이에서 고민하고, 자유로운 사고 능력마저 말살하는 기성 교육제도에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두 인물의 태도와 완전히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 스티븐은 자신의 삶을 가두려는 종교, 교육이라는 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진짜 자아를 찾으려고 치열하게 발버둥을 친다. 한스와 루이는 동료 학생들과 교사의 외면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움츠리는 저자세를 취했다면, 스티븐은 자신이 목격하고 경험한 상황의 모순을 끊임없이 지적하여 맞서려고 한다. 교사로부터 부당하게 매를 맞은 스티븐이 교장에게 직접 찾아가서 논리정연하게 호소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아주 명료하게 설명한 덕분에 스티븐은 교장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요즘 아이들이 교사의 부당한 행동 및 언행에 조금이라도 지적을 한다면, 교내에서 반항아로 낙인찍힐 것이다. 물론 모든 교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교사는 상식적인 수위를 넘는 발언과 행동으로 아이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엄격한 교사의 지시는 무조건 따른다고 믿는 아이들은 잘못된 상황을 알지 못하거나 어쩔 수 없이 묵인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학교에 갇힌 아이들은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이 누려야 할 자유가 사회규범에 어긋난 비행청소년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 청소년 시절은 가장 반항하기 쉬운 때고 고민이 많다. 아이들이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었던 고민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 정도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 모두에게 '수능시험' 뒤에 가려진 성공만 바라보도록 가르친다. 어른들의 고집과 욕심이 중노동에 가까운 공부를 해야 하는 아이들을 더욱 지치게 한다. 조금이라도 튀는 발언이나 공부와 전혀 관련 없는 취미 생활을 하는 학생을 ‘문제아’로 바라보고, 최대한 엄격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보는 어른들의 교육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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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8-1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가 되길 희망하며, 한편 나는 어떤지 반성되는 글입니다.

cyrus 2015-08-18 21:27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미혼이지만, 결혼을 앞두는 젊은 사람들도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교육 문제에 무관심 하는 저도 반성합니다.

AgalmA 2015-08-22 2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가에 갇힌 국민과, 민족에 갇힌 집단심리....사람은 참 많은 것에 갇혀 있죠. 하나하나 다 인지하지도 못하기도 하고, 인지해도 어쩌지 못하기도 하면서... 교육은 특히나 가르치는 쪽도, 배우는 쪽도 다 노력해야 하는데, 한국은 너무 일방적인 게 늘 안타까워요. 사제적이지도 않은 완전 군대식에 관료식에 나쁜 것 일색의 짬뽕... 왕따 문화나 대학에서 기수 앞세워 기 잡고 하는 거 보면 그 자세부터 참 교육의 길은 먼 거 같았습니다.

cyrus 2015-08-22 21:30   좋아요 1 | URL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대학교에 가면 자유롭게 공부한다고 선생님에게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전공 학과 선배들, 심지어 대학교수의 기분에 맞춰야 인정받을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보고 어이가 없었어요. 집단에 어울리지 못한 사람을 이상하게 봤어요.
 
루이 랑베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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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uis Lambert (1830년, <인간 희극> 제2부 철학 연구)

 

 

 

또 다른 내가 있다. 나는 그를 거부하지만, 내겐 부재한 그의 품성에 어느새 동화된다. 서로는 서로를 알아본다. 그는 감춰진 나의 욕망을 발현하는 자아의 발현이고, 어쩌면 나일 수도 있다.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아, 의식세계 아래에 억눌린 무의식적 자아의 문제는 문학의 단골 소재다. 사회가 이성, 논리와 각종 관습을 무기로 감정과 본능을 부정하면 할수록 억압된 자아는 마치 금단의 열매처럼 위험하면서도 훨씬 더 매력적인 모습으로 등장해왔다.

 

발자크의 《루이 랑베르》는 이런 모티프에서 출발한 소설로 볼 수 있다. 주인공 루이 랑베르는 발자크의 닮은꼴이다. 두 사람 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 거의 쫓겨나다시피 감옥 같은 방돔 기숙학교에 입학한다. 또한, <의지론>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철학 논문을 쓰게 된다. 똑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되면 둘 중 한 사람은 먼저 죽게 되는 비극의 운명을 가진다. 발자크는 소설 속 자신의 분신을 희생시킨다. 결혼식 전날 밤에 루이는 광기의 그림자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미쳐버린 루이에게 목숨은 붙어 있으나 예전처럼 돌아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의 눈에 생기가 잊은 지 오래다. 여기까지만 보면 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기존 작품들과 유사하다. 하지만 발자크의 《루이 랑베르》의 도플갱어는 조금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졌다.

 

《루이 랑베르》의 등장인물 설정은 매우 단순하다. 루이의 친구이자 그의 삶을 독자에게 들려주는 화자인 ‘나’와 그 이야기의 주인공 루이가 있다. 두 사람은 같은 기숙학교에서 다니면서 만나게 된다. 루이는 독서와 몽상을 좋아하는 조숙한 인물이며 친구는 시 쓰는 것을 좋아한다. 비록 외모는 서로 닮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내면은 너무나도 닮았다. 이들에게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기숙학교는 거대한 감옥이다. 이러한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정신이다. 특히 루이는 학교 수업보다는 혼자서 사유 세계를 여행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두 사람은 점점 기숙학교의 단체 생활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담임교사가 내주는 숙제를 하지 않아서 매를 맞는 일이 많아지고, 학우들은 다소 말이 없고 몽상가 기질이 있는 루이에게 ‘피타고라스’를, 늘 그와 함께 다니면서 서투른 시만 열심히 쓰는 친구에게 ‘시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시인’은 유물론자이면서도 유심론자인 ‘피타고라스’를 존경한다. 어느 날 루이가 비밀리에 쓰고 있는 철학 논문 <의지론>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학우들의 고발 때문에 교사의 귀까지 들리게 된다. 교사는 완성하지 못한 <의지론> 원고를 압수한다. 새로운 지식의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사유의 씨앗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만다. 이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친구는 기숙학교를 떠나게 되고, 루이 혼자만 남게 된다. 기숙학교를 졸업한 루이는 파리에 진출하여 직장을 가져보려고 노력해보지만, 평범한 생활마저 제대로 하지 못한다.

 

루이와 화자는 발자크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도플갱어다. ‘정신’, ‘유심론’을 대변하는 루이와 ‘물질’, ‘유물론’을 추구하는 화자, 발자크는 이 두 사람에게 정신주의와 물질주의와의 결합을 시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자신의 과거를 투영한다. 유년 시절 발자크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심취한 적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루이 역시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 정신을 우위에 두고 육체를 하위에 두고 싶어 한다. 유물론자인 화자는 루이의 사유에 동조하지만, 이 두 사람의 지속적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자신과 똑같은 분신을 뜻하는 도플갱어는 주로 죽음과 관련돼 있다. 시인이 기숙학교를 먼저 떠나는 사건은 둘 중 한 사람이 죽어야만 하는 도플갱어의 운명과 같다. 도플갱어의 저주에 희생된 사람은 루이다. <의지론> 원고 상실, 믿음직한 단짝과의 이별은 루이에게는 혼자 감당하기 힘든 시련의 과정이다. 가까스로 기숙학교를 졸업해서도 루이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 루이는 황홀한 무감각 상태를 느끼기 위해 육체에서 정신이 벗어나는 일을 감행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정신을 스스로 파멸시키는 일종의 자살 행위다. 평범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 현실에 정착하지 못한 채 미쳐버린 루이는 거의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도플갱어를 먼저 본 사람이 죽지 않는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따라서 죽지 않으려면 도플갱어를 먼저 죽여야 한다. 하지만 《루이 랑베르》의 도플갱어는 독자가 예상하는 진부한 결과를 뒤엎는다. 루이가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단짝과 함께 있어야 한다. 루이의 삶은 자기 생각과 비슷하고, 그를 믿어준 단짝 같은 도플갱어를 잃기 시작하면서 ‘파멸’이라는 종착역으로 향한다. 단짝 ‘시인’은 루이의 정신을 유일하게 교감해주는 살아 있는 영혼이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21살에 도플갱어를 봤으면서도 장수를 누리는 데 성공했다. 도플갱어의 저주에서 벗어난 《루이 랑베르》의 시인은 끝까지 살아남아 파편으로 흩어진 루이의 사상을 재구성한다. 발자크는 자신을 ‘소설가’가 아닌 ‘시인’으로 불리는 것을 원했다고 한다. 발자크는 살아남은 분신이 루이의 의지론을 정리하게 함으로써 사라진 학문의 열정을 그리워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의지론> 같은 논문을 완성하지 못한 경험에 미련이 남아 있었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자신의 조숙한 천재성을 제대로 세상에 펼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소설에서나마 루이를 이해해주는 도플갱어를 만들었을 수 있다. 발자크는 《루이 랑베르》를 쓰기 전에 발표한 《나귀 가죽》에서도 <의지론>의 실체를 언급한다. 재미있게도 발자크의 도플갱어 격인 라파엘이 <의지론>을 집필한다. 어쩌면 <의지론>이 제대로 완성되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면 도덕 교과서에 데카르트를 계승한 철학자 발자크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발자크는 철학자가 되지 못했지만, ‘철학을 연구하는’ 정체성만큼은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인간 희극> 제2부의 표제는 ‘철학 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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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세계문학 단편전집 프랑스 편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창비, 2010)에 발자크가 쓴 『붉은 여인숙』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미지의 걸작』, 『영생의 묘약』과 함께 <인간 희극> 제2부 ‘철학 연구’에 포함되었다. 세 작품 모두 짧은 분량으로 이루어졌음에도 어떤 계층에 속하든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탐욕과 광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발자크는 단편소설을 더 능숙하게 쓰는 것 같다. 그가 글을 잘 쓴다고 보기 어렵다. 발자크의 장편소설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독자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크는 이야기의 시간적 또는 공간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최소 두세 쪽 이상을 쓴다. 그는 생리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그 모습을 통째로 종이에 옮기고 싶어 했다. 너무나도 자세하게 쓰는 습관 탓에 문장이 길어졌다. 《나귀 가죽》(문학동네, 2009)에서 라파엘이 친구에게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들려주는 대사가 압권이다. 라파엘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도박에 빠지게 된 계기까지 정말로 쉬지 않고 설명한다. 라파엘의 대사가 이야기 중반부를 차지하고 있어서 지루해도 끝까지 참고 읽어야 한다.

 

발자크는 은근히 잘난 척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어 자신이 아는 최신 사상 이론을 설명한다. 《루이 랑베르》(문학동네, 2010)의 발자크의 자전적 소설이다. 루이 랑베르는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조숙한 인물이다. 그는 스웨덴보리의 신비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정신이 육체보다 더 우위를 두는 이론을 체계적으로 구상한다. 그리하여 열두 살의 나이에 ‘의지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집필한다. 하지만 논문은 완성하지 못한다. 그를 골탕먹이려는 동급생들이 신부에게 랑베르가 논문을 몰래 쓰는 사실을 밀고했기 때문이다. 신부는 논문 원고를 압수하고, 랑베르를 심하게 꾸짖는다. 소설에 나오는 ‘의지론’은 《나귀 가죽》에서도 나온다. 라파엘 역시 같은 제목의 논문을 집핍하는 걸로 나온다. 이 논문은 실제로 발자크가 완성하지 못한 책이기도 하다. 《루이 랑베르》 번역본의 분량은 얇은 편이다. 그러나 비교적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의 소설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루이 랑베르》는 철학 소설이다. 이 소설 역시 <인간 희극> 제2부 철학 연구에 수록되었다. 랑베르가 줄기차게 사유하는 과정 하나하나 쫓아가기가 쉽지 않다. 이 소설의 화자는 랑베르가 유일하게 믿고 지내는 수도원 학교의 동급생이다. 랑베르는 화자에게 자신의 이론을 들려주면서 무한히 뻗어 나가는 사유의 힘에 스스로 경도된다. 독자는 랑베르의 철학적 장광설을 견뎌내야 한다. 단, 철학을 어려워한다면 과감하게 넘어가거나 속독할 것을 권한다. 정독하기보다는 역자 해설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발자크는 늘 세상을 생리학자처럼 꼼꼼하게 살펴본다. 그러나 글을 쓸 땐 각종 사상과 이론에 심취한 현학적인 철학자가 된다.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쓰는 발자크의 글쓰기를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귀스타브 랑송 ‘낭만주의의 악습’라고 분석한다. 낭만주의 소설은 이성보다는 감정의 내면을 중시하여 공상과 환상을 동경한다. 발자크의 소설은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전환하는 중간 지점에 분류된다. 발자크는 무명 시절에 가명으로 고딕 소설을 썼으며, <인간 희극>에 수록된 단편소설에 고딕풍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영생의 묘약』은 E.T.A. 호프만의 환상소설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호프만은 인간 내면의 악마성에 지배당하는 오싹한 과정을 그린 환상소설 《악마의 묘약》(황금가지, 2002)을 발표했다. 『영생의 묘약』 또한 실수로 묘약을 잘못 바르는 바람에 악마로 변하는 인물이 나온다. 『사막에 싹튼 열정』에서 사막은 미지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국적 장소로 나온다. 여기서 발자크는 낭만주의의 한 경향인 이국적 취미를 드러낸다. 발자크가 상상력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문학적 배경을 이해할 때 낭만주의와의 관계까지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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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5-08-13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몸이 발자크를 정말 싫어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또 묘하게 발자크 소설에 끌려요. 단편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cyrus 2015-08-14 20:46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니까 발자크를 존경하는 작가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발자크에게 영향을 받은 에밀 졸라는 제외하고요. 발자크의 단편소설 세 편이 수록된 <사라진느>(문학과지성사)를 추천합니다.

yamoo 2015-08-13 2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지루한 소설에 대하면 양반 아닐까요? 전 아직 발자크 소설을 읽어 보진 못했지만 조이스의 <율리시즈>만큼 지루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단연코요!ㅎ

cyrus 2015-08-14 20:47   좋아요 0 | URL
<율리시스> 번역본에 각 장의 이야기를 요약한 줄거리가 나오는데, 이거 없었으면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 못합니다. <율리시스>를 줄거리를 먼저 봐야 합니다. ^^

페크pek0501 2015-08-14 0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제가 그런 생각을 했죠. 왜 명작이라고 하는 소설은 지루할까?
그런데 서머싯 몸이나 크로닌의 소설을 읽어 보면 지루하기는커녕 재밌거든요.
이문열 작가가 엮은 세계명작산책 시리즈는 단편소설들 묶음이에요.
열 권 중 다섯 권 읽었는데, 다 재밌더라고요. 물론 이문열 작가가 재밌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뽑아 엮었겠지요.
결론은...
얼마든지 재밌는 명작 소설도 있으니 저는 잘 골라 읽겠습니다, 하는 것. ㅋㅋ

하지만 님처럼 한 작가의 작품들을 계속 읽어 나가는 건 유익한 작업 같습니다.
시루스 님, 하면 발자크가 생각날 것 같아요. ^^

cyrus 2015-08-14 20:50   좋아요 0 | URL
다른 사람이 재미없다고 느껴지는 소설은 의외로 본인은 재미있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2주 동안 발자크의 소설만 읽으니까 이제 적응이 됩니다. 전작주의 독서의 장점인 것 같아요. 단점이라면 다른 책들을 볼 여유가 줄어들거나 같은 작가의 책만 계속 읽으면 슬슬 지루해져요. ^^

오후즈음 2015-08-14 0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간 올려주시는 발자크에 관련된 책들 리뷰와 소개들을 보면서 정말로 Cyrus님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읽고 있어요. (그래서 이름도 첫스펠링은 대문자로 썼습니다!!!!)
모든 고전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지루한 얘기들이 많은것 같아요. 앞에서 덧글 다신분처럼 재미 있는 것들을 골라 읽으면 참 좋겠는데요.
그 지루함과 재미없음을 견디는 것이 뭔가 인간에게 큰 약(?)이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고전 읽으라고 하는 걸까요?

cyrus 2015-08-14 20:59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고전을 잘 안 읽는 이유가 너무 옛날이야기라서 요즘 같은 시대에 읽으면 지루해요. 그래서 저는 고전작품을 추천하기가 망설여져요. 나는 재미있게 읽었고 유익한 고전작품인데 정작 다른 사람들은 재미없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고전작품 서평을 쓸 땐 다른 독자가 볼 땐 확실히 재미없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도 알리려고요. 유명한 고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끝까지 다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특정 고전작품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장점과 단점을 서평에서 확실히 설명한다면 페크님처럼 재미있는 작품을 골라 읽고 싶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하기가 쉬워질 겁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5-08-14 05: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알라딘에는 이런 글이 좀 많이 탄생해야 합니다. 발자크, 플로베르가 대표적인데, 이 양반들 항상 길게 묘사합니다. 특히... 플로베르가 보봐리 부인 옷 설명할 때 페이지 3,4페이지를 넘길 때 저는 폭발했습니다. 크아아아아아왕 ~~~ 오죽했으면 보봐리즘`이란 말이 탄생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해는 가더라고요. 지금은 나이키 덩크 하이`의 모양새를 설명하기 위해 4페이지에 걸쳐 묘사하는 작가는 없잖습니까. 누구나 쉽게 그 신발 이미지를 취할 수 있으니 말이죠. 그래서 현대 작가는 그저 용팔이가 나이키 덩크 하이를 신었다. 이렇게 묘사하지만 사진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 시대에는 독자에게 이미지를 세세하게 묘사할 필요는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독자는 사진을 접할 기회도 거의 없고 사진을 접한다고 해도 흑백이니 말입니다...
그래도... ㅎㅎㅎㅎ 야무 님 말씀처럼 율리시즈보다 지루하지는 않을 겁니다. 율리시즈 읽다가 정말 폭발하는 줄 알았습니다. ( 언젠가 맘 먹고 다시 도전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cyrus 2015-08-14 21:11   좋아요 0 | URL
곰발님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플로베르, 에밀 졸라가 글을 쓰던 시대에 처음으로 사진기가 등장했을 겁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지만, 정밀성이 높지 않았어요. 이때까지는 사진기보다는 사람의 눈이 더 믿을만했고 정확했죠. 정말 플로베르나 모파상이 풍경을 묘사하는 문장을 보면 진짜 눈으로 본 걸 그대로 옮긴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사실적이에요. <율리시스>는 무더운 날씨에 읽으면 안 됩니다. 안 그래도 책이 엄청 무거워서 가뜩이나 짜증나는데, 계속 읽다보면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ㅎㅎㅎ

transient-guest 2015-08-15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의 소설보다 재미있는 소설이 발자크 본인의 일생입니다. 저는 `고리오 영감`을 읽으면서 처음 발자크를 접했는데요, 그 후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보면서 발자크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작품도 좋지만, 그냥 발자크란 사람의 삶이 어쩌면 그리도 희극과 비극을 적절히 섞어놨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발자크란 이름만 떠올려도 웃음이 나와요.ㅎㅎ 그리고 제 추측입니다만, 발자크의 작법은 어느 정도 시대적인 영향도 있는게 아닐까 합니다. 플로베르도 그렇고 길고 복잡한 서술을 많이 사용하잖아요. 물론 이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ㅎ

cyrus 2015-08-17 22:2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지난 달 말부터 발자크 평전을 읽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이 평전을 읽고 나서야 그의 소설도 새롭게 보였어요. 한편으로는 그가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고,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어서 외롭게 글을 써나가는 모습을 생각하니 연민이 느껴져요. 게스트님 생각에 동의해요. 스탕달도 발자크와 비슷하게 문장이 대체로 길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특징이 있어요. ^^
 
달 - 낭만의 달, 광기의 달 Nature & Culture 1
에드거 윌리엄스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영화에서 드라큘라가 사는 고성의 밤하늘에는 항상 보름달이 걸려 있다. 약간 파란 빛을 내는 보름달은 음습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블루문은 서양에서 양력 한 달 사이에 보름달이 두 번 뜰 때 두 번째 보름달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지난달 31일에, 그것도 3년 만에 처음으로 블루문이 떴다. 그런데 보름달의 색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블루문’이라고 해서 파랗게 변한 달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blue moon’의 어원을 ‘belewe moon’이라고 보는 설이 있다. ‘belewe’는 ‘배신하다’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지금은 사어가 되었다. 달의 정체가 과학적으로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던 시절에는 ‘배신하는 달’이 뜨면 낯설게 받아들였다. 서양에서는 보름달이 사람 안에 사악함을 불러일으킨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다. 당연히 서양인들은 보름달을 좋지 않게 여겼고 한 달에 두 번째 뜨는 보름달이 자연의 섭리를 배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달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두려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점성술은 달이 사람의 정신과 행동에 직접 영향을 끼친다고 믿고 있다. 의사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도 보름달이 뜨는 날에 정신 착란 증세가 잘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영어에는 ‘lunatic’이라는 단어가 있다. 정신이상자, 미치광이, 괴짜를 의미한다. 하지만 달이 사람 심리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속설은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오늘날까지도 달의 주기와 인간행동에 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지금도 인간 활동에 영향을 끼치는 달의 주기와 관련된 다양한 속설이 전 세계를 떠돌고 있다. 터무니없는 속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으면 진실처럼 느껴져 깨기가 힘들다.

 

인간에게 달은, 그냥 평범한 존재가 아니다. 달에 대한 음모론도 많지만 일단 제쳐놓고, 달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에게 필수적인 존재였다. 지금 우리는 근대의 합리적 세계관에 의한 교육의 영향으로 고대인의 사고체계를 미신 또는 신비주의로 치부해 무시해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달이 없었다면 음양의 조화는 물론 방아 찧는 토끼와 보름달이 뜨면 변신하는 늑대인간 등 수많은 신화와 전설도 없었다. 숱한 신화와 전설이 달을 이야기하고, 시와 예술이 찬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달이야말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천체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동화와 노래와 전설 속의 주인공으로서 달은 우리 삶 깊숙한 곳에서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있다.

 

달은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지구의 단 하나뿐인 위성이다. 그렇지만 달의 상식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달은 태양과 함께 천체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달의 인력은 지구의 바다를, 달과 그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며, 이렇게 부풀어 오른 지역은 지구 자전에 따라 서쪽으로 조금씩 움직여간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밀물과 썰물의 원리다. 달이 기울고 차는 모양 자체가 달력의 역할을 하여 역법의 기준이 됐다. 만약에 달이 지구 곁에 없었다면,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달이 지구의 자전축을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은 지구에 없어서는 안 될 ‘산소’ 위성이다. 우리가 산소의 소중함을 잊으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달의 중요성을 잘 느끼지 못한다. 달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

 

옛사람들은 달을 두려움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과학은 전설과 속설 들을 한 꺼풀 벗겨냈다. 우리는 망원경으로 달의 맨살을 볼 수 있다. 달 표면에 남은 닐 암스트롱의 발자국은 달 탐사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위대한 도약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달은 우주 속의 신비로운 존재다. 이태백이 놀던 달은 우주 비행선에 의해 그 후 여러 번 밟혔지만 예나 지금이나 달의 신비로움은 여전히 퇴색되지 않고 남아있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좀 더 자주 달을 보도록 권하고 싶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합리적 세계관에 덜 물들어서 순수하다. 달 표면에 새겨진 전설을 음미하고 난 뒤에 달이 지구의 산소라는 중요한 사실을 이해해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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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8-12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 하루에 서평 두개 올리시는 건 반칙 아닌가요?ㅎㅎ 책 많이 읽으시는 비결 괜히 궁금해서 타박입니다. 부러워서요. ^^ 제 기억 맞다면 이 책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추천한 거 같은데... 서평 보고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cyrus 2015-08-13 21:16   좋아요 0 | URL
하루에 세 편 이상 글을 쓰시는 몇몇 분들에 비하면 제가 하루에 두 번 글을 쓰는 날은 정말 많지 않아요. 쉽게 읽을 수 있고, 비교적 분량이 많지 않은 책이면 하루 만에 다 읽고, 그 날 바로 글로 정리하는 편입니다. 읽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책은 최소 삼일 이상 읽습니다. 제가 책을 여러 권 동시에 읽어서 읽는 속도가 더 느려져요. 일단 다 읽은 책이 나오는 대로 바로 글을 써요. 예전에는 글을 길게 쓰는 악습관이 있어서 글 쓰는 시간을 어떻게든 줄이려고 글도 짧게 쓸려고 노력 중입니다. 반니 출판사의 `내추럴 앤 컬처` 시리즈가 정말 좋은 책입니다. 과학, 문학, 역사 지식을 책 한 권에 다 볼 수 있습니다. ^^

인디언밥 2015-08-13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라.. ㅎㅎ

cyrus 2015-08-13 21:18   좋아요 1 | URL
몇 주 전에 인디언밥님이 읽은 책이었죠. ^^

인디언밥 2015-08-13 23:43   좋아요 0 | URL
넹 헤헿
 

 

 

 

 

 

 

 

 

 

 

 

 

 

 

 

 

* 『붉은 여인숙』(L'Auberge rouge, 1832년, <인간 희극> 제2부 철학 연구)

** 이야기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빙점》은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동명 제목의 드라마가 나왔을 정도로 상당히 많은 인기를 끈 작품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도 잘 알려진 작가가 쓴 《빙점》은 발표 당시로써는 상당히 파격적인 소재를 담고 있었다. 불륜, 유괴, 살인, 자살. 이 정도면 요즘 막장 드라마를 만들기를 좋아하는 드라마 작가들이 한 번쯤 군침 흘릴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한 드라마 ‘빙점’은 총 세 차례나 제작되었다. 그래도 《빙점》이 문단의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원죄 의식이 깔렸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는 인간이 용서할 수 있는 윤리적 허용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독자를 향해 묻는다.

 

병원장 게이조의 아내와 안과 의사가 몰래 바람을 피우는 사이에 병원장의 딸이 유괴범에 납치되어 살해당한다. 게이조는 요코라는 여자아이를 양녀로 데려온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복수하기 위한 병원장의 계략이다. 요코는 친딸을 살해한 범인의 딸이었다. 게이조의 아내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요코를 친딸만큼 애지중지 보살핀다. 하지만 아내도 요코의 정체를 알게 된다. 아내는 더 이상 친딸을 죽인 살인자의 딸을 키우고 싶지 않다. 그리고 요코의 결혼까지 막으려고 한다. 결국, 자신이 살인자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요코는 불행한 악연을 끊어버리려고 자살을 결심한다. 그녀는 유서에서 살인자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의 고통을 받는 자신의 억울한 상황에 대해서 하소연한다. 핏줄의 죄는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소설에 나올법한 최악의 상황을 실제로 겪는 당사자나 그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는 난처하다.

 

발자크의 단편소설 『붉은 여인숙』에서도 살인자의 딸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는 요코처럼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아버지가 과거의 살인 사건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다. 오히려 불편한 심정을 느끼는 사람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다.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게 된 남자의 사연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살인 사건의 경위부터 소개하겠다. 프로스뻬르 마냥프레데릭 따르뻬이유라는 두 명의 초급 군의관이 독일 라인 강에 있는 여인숙에 머문다. 그곳에서 역시 여인숙에서 머무는 사업가를 만난다. 사업가의 가방에는 엄청난 양의 현금과 보석이 들어 있다. 악마는 프로스뻬르를 유혹한다. 프로스뻬르는 사업가를 죽이고 그의 가방을 훔치는 위험한 상상까지 하게 된다. 그는 순간적인 충동을 억누르지 못해 잠든 사업가를 죽이려고 했으나 양심의 천사가 그의 행동을 저지한다. 프로스뻬르는 안 좋은 상황을 애써 지우려고 여인숙 밖으로 나와 잠시 바깥 공기를 쐰다. 그러고는 다시 잠을 청하는데 놀랍게도 다음 날 아침, 여인숙 방 안에서 사업가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동료 군의관 프레데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프로스뻬르는 사업가를 살인한 혐의로 체포된다. 그는 자신이 살인범이 아니라고 결백했으나 총살형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사업가의 돈에 눈이 멀어 그를 죽이는 상상을 했기 때문에 양심을 조금이라도 배반한 죄로 총살형을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결국, 프로스뻬르는 살인자라는 낙인을 가슴에 달고, 총살형을 받는다.

 

자신의 결백함을 끝까지 주장하지 않고 포기하는 프로스뻬르의 모습 그리고 프레데릭이 사건 당일에 홀연히 사라지는 장면 때문에 이야기의 개연성이 떨어진다. 작품 속 화자가 여인숙 살인 사건을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자, 마침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프레데릭은 자신이 의심받는 상황을 애써 피하려고 한다. 프레데릭의 딸과 결혼을 앞둔 남자는 당황한 장인의 표정을 읽고, 그를 여인숙 살인 사건의 진짜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남자가 장인의 혐의를 밝히면 앞으로 펼쳐질 상황이 복잡해진다. 일단 살인자의 딸과 결혼하면 남자는 살인자의 유산을 물려받는다. 그 유산의 일부는 과거에 살인자가 훔친 현금과 보석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남자의 양심은 이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한다. 만약에 재산을 사회에 반환하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장인의 죄를 고백한다면 호화로운 귀부인의 삶을 꿈꾸는 아내의 미래가 사라진다. 남자는 결혼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하기 위해서 열일곱 명의 친구들이 참여하는 투표로 결정하기로 한다. 아홉 명이 결혼을 반대하는 결과가 나온다. 그렇지만 남자는 투표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살인자의 자식에게 살인자의 죄를 물을 수는 없다. 다만, 살인자가 부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재산으로 어떤 이익을 누리려고 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더욱이 의도적으로 그 이익을 챙겼거나 챙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공범죄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장물 취득죄를 면하기는 어렵다. 사랑하는 여자를 끝까지 지키고 싶은 남자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사건의 진실은 공개해야 한다. 억울하게 살인죄 누명을 씌운 망자를 위해서라면 말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프레데릭은 극심한 병의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둔다. 만약에 프레데릭이 여인숙 살인 사건에 관련된 숨겨진 진실을 제대로 밝혔더라면, 남자는 떳떳하게 장인의 죄를 공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통스럽게 죽어간 프레데릭은 진실을 회피하고 숨긴 죄로 인해서 천형을 받은 것일까. 그렇게 받아들이기에는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붉은 여인숙』은 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진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가득하다. 이 이야기를 접한 독자는 어디서부터가 거짓이고 진실인지 혼동하게 된다.

 

 

 

 

 

 

 

 

 

 

 

 

 

 

 

 

 

 

※ 발자크는 <인간 희극>의 세계를 묘사할 때, 작품 속 인물들을 또 다른 작품에 재등장시켰다. 프레데릭 따르뻬이유는 《나귀 가죽》에서 부유한 집주인으로 등장한다. 그가 어떻게 막대한 재산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붉은 여인숙』을 읽으면 된다. 《나귀 가죽》에 나오는 프레데릭은 나귀 가죽으로 단숨에 부자가 된 라파엘 앞에서 아부를 떤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자 앞에서 굽실거리는 비열한 자와 법의 힘을 무력하게 만들어 '갑' 행세하는 부자가 있었다.

 

 

“당신은 재산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군. 재산은 무례해도 된다는 면허증이지. 당신은 이제 우리 편이오. 여러분, 황금의 권능을 위해 건배. 6백만 프랑의 자산가인 드 발랑탱 씨는 권좌에 올랐소. 그는 왕이오,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소. 그는 다른 모든 부자들처럼 만인의 위에 군림하오. 앞으로 그에게 ‘모든 프랑스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은 인권선언 첫머리에 새겨진 거짓말일 뿐이오. 그가 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그에게 복종할 것이오. 백만장자들에게는 단두대도, 사형집행인도 없소.” (《나귀 가죽》 중에서,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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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8-12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빙점... 요즘 아직도 이 소설 읽는군요.

cyrus 2015-08-12 21:42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전에 <빙점>을 처음 읽었을 땐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다시 읽어보니까 처음에 읽었을 때 보지 못했던 이야기의 주제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북다이제스터 2015-08-12 21:44   좋아요 1 | URL
저도 다시 읽어 보고 싶어요. 중학교 때 읽고 괜히 심숭생숭하던 느낌 다시 느껴보고 싶습니다. ^^

stella.K 2015-08-13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빙점이 절판된 줄 알았더니 어디선가 계속 나오는구나.
난 이걸 두 번 읽었지. 사춘기 시절 범우사판으로 읽었는데
그건 거의 다이제스트로 된 거였고, 30대 초중반 무렵쯤 다시 읽었던 것 같아.
한 권이 거의 500페이지쯤 되는 책 두 권짜리로.
다시 읽어도 좋더군. 아마도 이 책으로 내가 일본 문학을 알기 시작했던 것도 같아.
한때는 미우라 아야꼬가 좋아서 전작주의로 읽었던 적도 있는데
지금은 별로 기억나는 게 없구만. <길은 여기에>인가 하는 수필집은 정말 좋더군.
같지 않은 기독교 간증집이 판을 치는데 그런 거 읽는 거 보다
이 책을 읽는 게 기독교 신앙 입문에 훨씬 좋을 거라고 자부한다.^^

cyrus 2015-08-13 21:22   좋아요 0 | URL
<빙점>은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나오기 전까지 최고의 일본소설 스테디셀러라고 봐도 될 것 같아요. 미우라 아야코에 대해서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사실 <빙점> 말고는 뭘 읽어야할 지 몰랐어요. 제가 무교인데다가 아야코의 책이 워낙 많이 나와서 딱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거든요. <길은 여기에>는 그냥 제목만 들어봤어요. 누님이 추천한 책이라면 꼭 읽어봐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