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교실 벽이 모조리 무너지고 내가 모르는 어떤 들판에 서 있는 듯한 그런 순간이 있어. 굉장히 행복한 순간이기도 하지. 하늘을 나는 새처럼 마음껏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루이 랑베르》 중에서, 47쪽)
우리나라 부모, 특히 어머니의 교육열은 미국의 대통령이 칭찬할 정도로 알아준다. 사실 좁은 땅에, 지하자원도 없는 우리나라가 이 정도의 수준으로 살 수 있게 된 저변에는 바로 이 교육열이 한 몫을 단단히 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과열은 역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요즘에는 자녀교육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엄마를 '돼지엄마'라고 부른다. 엄마 돼지가 새끼 돼지들을 데리고 다니듯, 여러 학부모를 몰고 다니면서 고액 과외에 관련된 정보를 알린다. 또한, 같은 또래의 아이를 둔 학부모들을 모아 팀 수업을 편성하는 일도 책임진다. 부모의 과잉 기대는 아이들을 강요와 통제의 감옥으로 인도한다. 그들을 가두는 학교와 학원 역시 아이들을 입시 기계로 만들어버린다. 학생은 많고 대학의 문은 좁으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과연 아이들은 학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학교생활에 얼마나 만족하며 다니고 있을까. 학교라는 공간에 대해 인식하는 정도가 과거에 비해 크게 변함이 없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그저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막막한 공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곳으로 생각할 것이다. 학생들 앞에 주어진 교과목들. 흔히 사회에 나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라고 말하지만, 별로 그렇지 않다는 건 사회에 나가보면 알게 된다. 대학입시를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다. “이런 걸 왜 배워야 하는 거죠?” 학습의욕이 없는 학생들의 불평불만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모순투성이로 가득한 것이 교과서이고 교육과정이다. 아이가 말없이 학교와 학원 수업을 잘 받고 있는데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부모들은 자녀들이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저항성이 어느 정도인지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 아이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눈물과 아픔 속에 학원을 전전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과도한 학원 수강과 수능시험의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학습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심각한건지 잘 모르는 눈치 없는 부모에게 세 권의 소설을 권하고 싶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현대문학, 2013), 발자크의 《루이 랑베르》(문학동네, 2010),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민음사, 2001). 이 세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 모두 공통으로 엄격한 통제와 규율로 작동되는 교육에 민감하다. 그리고 세 작품 모두 작가의 문학적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전적 색채가 강하다. 헤세, 발자크, 조이스는 자신들이 쓴 소설을 통해서 진정성이 없는 가르침만 강요하는 교육 현실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아이들의 정서 상태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학창 시절을 다 겪어 본 어른들도 주인공의 학교생활을 묘사한 작가의 필력을 확인하는 순간, 숨이 막혀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헤세는 부모님 곁을 떠나 혈혈단신 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감성이 예민한 문학 소년은 신학교의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결국, 신경쇠약증이 심해져서 학교에 입학한 지 일 년 만에 중퇴한다. 학교의 그늘에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헤세는 안정적인 삶을 찾기까지 2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한다. 한때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행히 헤세는 시인이 되는 데 성공했지만, 《수레바퀴 밑에》의 주인공이자 헤세의 분신인 한스 기벤라트는 자신의 운명에 가중되는 억압의 수레바퀴 밑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한다.
발자크도 헤세와 같은 운명으로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발자크의 어머니는 매정하게도 어린 발자크를 좋아하지 않았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을 느껴보지 못한 발자크는 수도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돔 기숙학교에 입학한다. 발자크는 기숙학교 생활을 거대한 감옥에 갇힌 듯한 기분이라고 회상했다. 그런 '주옥' 같은 시절을 재구성한 소설이 바로 《루이 랑베르》이다. 한스와 마찬가지로 루이 역시 아주 영특한 아이로 촉망받지만,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엄격하고 따분한 수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독서, 명상, 사색이 루이의 유일한 낙이다. 한스와 루이는 서로 감정을 공유하면서 함께 지낼 수 있는 믿음직한 단짝(《수레바퀴 밑에》의 헤르만 하일너, 《루이 랑베르》에서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설의 화자)을 만나지만, 이 행복한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한다. 관계의 단절은 두 사람의 깊은 고립과 파멸을 초래하는 결정적 원인이 된다.
조이스의 유년시절은 헤세와 발자크보다 조금 밝은 편이다. 학교 모범생에다가 실제로 전교 학생회장까지 맡은 적도 있는 '엄친아' 같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작가의 유년 시절이 반영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는 나름대로 공부 잘하는 '문제아'로 등장한다. 그는 예수회 신부가 되기 위해서 학교생활에 적응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종교의 길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티븐의 마음에 이단의 새싹이 조금씩 자라게 되고, 금욕을 중시하는 기독교 교리를 어기면서까지 사창가에 가기도 한다. 스티븐은 한스와 루이처럼 자유와 억압 사이에서 고민하고, 자유로운 사고 능력마저 말살하는 기성 교육제도에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두 인물의 태도와 완전히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 스티븐은 자신의 삶을 가두려는 종교, 교육이라는 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진짜 자아를 찾으려고 치열하게 발버둥을 친다. 한스와 루이는 동료 학생들과 교사의 외면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움츠리는 저자세를 취했다면, 스티븐은 자신이 목격하고 경험한 상황의 모순을 끊임없이 지적하여 맞서려고 한다. 교사로부터 부당하게 매를 맞은 스티븐이 교장에게 직접 찾아가서 논리정연하게 호소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아주 명료하게 설명한 덕분에 스티븐은 교장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요즘 아이들이 교사의 부당한 행동 및 언행에 조금이라도 지적을 한다면, 교내에서 반항아로 낙인찍힐 것이다. 물론 모든 교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교사는 상식적인 수위를 넘는 발언과 행동으로 아이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엄격한 교사의 지시는 무조건 따른다고 믿는 아이들은 잘못된 상황을 알지 못하거나 어쩔 수 없이 묵인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학교에 갇힌 아이들은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이 누려야 할 자유가 사회규범에 어긋난 비행청소년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 청소년 시절은 가장 반항하기 쉬운 때고 고민이 많다. 아이들이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었던 고민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 정도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 모두에게 '수능시험' 뒤에 가려진 성공만 바라보도록 가르친다. 어른들의 고집과 욕심이 중노동에 가까운 공부를 해야 하는 아이들을 더욱 지치게 한다. 조금이라도 튀는 발언이나 공부와 전혀 관련 없는 취미 생활을 하는 학생을 ‘문제아’로 바라보고, 최대한 엄격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보는 어른들의 교육이 불편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