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여인숙』(L'Auberge rouge, 1832년, <인간 희극> 제2부 철학 연구)

** 이야기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빙점》은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동명 제목의 드라마가 나왔을 정도로 상당히 많은 인기를 끈 작품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도 잘 알려진 작가가 쓴 《빙점》은 발표 당시로써는 상당히 파격적인 소재를 담고 있었다. 불륜, 유괴, 살인, 자살. 이 정도면 요즘 막장 드라마를 만들기를 좋아하는 드라마 작가들이 한 번쯤 군침 흘릴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한 드라마 ‘빙점’은 총 세 차례나 제작되었다. 그래도 《빙점》이 문단의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원죄 의식이 깔렸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는 인간이 용서할 수 있는 윤리적 허용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독자를 향해 묻는다.

 

병원장 게이조의 아내와 안과 의사가 몰래 바람을 피우는 사이에 병원장의 딸이 유괴범에 납치되어 살해당한다. 게이조는 요코라는 여자아이를 양녀로 데려온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복수하기 위한 병원장의 계략이다. 요코는 친딸을 살해한 범인의 딸이었다. 게이조의 아내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요코를 친딸만큼 애지중지 보살핀다. 하지만 아내도 요코의 정체를 알게 된다. 아내는 더 이상 친딸을 죽인 살인자의 딸을 키우고 싶지 않다. 그리고 요코의 결혼까지 막으려고 한다. 결국, 자신이 살인자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요코는 불행한 악연을 끊어버리려고 자살을 결심한다. 그녀는 유서에서 살인자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의 고통을 받는 자신의 억울한 상황에 대해서 하소연한다. 핏줄의 죄는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소설에 나올법한 최악의 상황을 실제로 겪는 당사자나 그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는 난처하다.

 

발자크의 단편소설 『붉은 여인숙』에서도 살인자의 딸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는 요코처럼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아버지가 과거의 살인 사건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다. 오히려 불편한 심정을 느끼는 사람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다.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게 된 남자의 사연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살인 사건의 경위부터 소개하겠다. 프로스뻬르 마냥프레데릭 따르뻬이유라는 두 명의 초급 군의관이 독일 라인 강에 있는 여인숙에 머문다. 그곳에서 역시 여인숙에서 머무는 사업가를 만난다. 사업가의 가방에는 엄청난 양의 현금과 보석이 들어 있다. 악마는 프로스뻬르를 유혹한다. 프로스뻬르는 사업가를 죽이고 그의 가방을 훔치는 위험한 상상까지 하게 된다. 그는 순간적인 충동을 억누르지 못해 잠든 사업가를 죽이려고 했으나 양심의 천사가 그의 행동을 저지한다. 프로스뻬르는 안 좋은 상황을 애써 지우려고 여인숙 밖으로 나와 잠시 바깥 공기를 쐰다. 그러고는 다시 잠을 청하는데 놀랍게도 다음 날 아침, 여인숙 방 안에서 사업가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동료 군의관 프레데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프로스뻬르는 사업가를 살인한 혐의로 체포된다. 그는 자신이 살인범이 아니라고 결백했으나 총살형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사업가의 돈에 눈이 멀어 그를 죽이는 상상을 했기 때문에 양심을 조금이라도 배반한 죄로 총살형을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결국, 프로스뻬르는 살인자라는 낙인을 가슴에 달고, 총살형을 받는다.

 

자신의 결백함을 끝까지 주장하지 않고 포기하는 프로스뻬르의 모습 그리고 프레데릭이 사건 당일에 홀연히 사라지는 장면 때문에 이야기의 개연성이 떨어진다. 작품 속 화자가 여인숙 살인 사건을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자, 마침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프레데릭은 자신이 의심받는 상황을 애써 피하려고 한다. 프레데릭의 딸과 결혼을 앞둔 남자는 당황한 장인의 표정을 읽고, 그를 여인숙 살인 사건의 진짜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남자가 장인의 혐의를 밝히면 앞으로 펼쳐질 상황이 복잡해진다. 일단 살인자의 딸과 결혼하면 남자는 살인자의 유산을 물려받는다. 그 유산의 일부는 과거에 살인자가 훔친 현금과 보석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남자의 양심은 이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한다. 만약에 재산을 사회에 반환하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장인의 죄를 고백한다면 호화로운 귀부인의 삶을 꿈꾸는 아내의 미래가 사라진다. 남자는 결혼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하기 위해서 열일곱 명의 친구들이 참여하는 투표로 결정하기로 한다. 아홉 명이 결혼을 반대하는 결과가 나온다. 그렇지만 남자는 투표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살인자의 자식에게 살인자의 죄를 물을 수는 없다. 다만, 살인자가 부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재산으로 어떤 이익을 누리려고 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더욱이 의도적으로 그 이익을 챙겼거나 챙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공범죄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장물 취득죄를 면하기는 어렵다. 사랑하는 여자를 끝까지 지키고 싶은 남자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사건의 진실은 공개해야 한다. 억울하게 살인죄 누명을 씌운 망자를 위해서라면 말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프레데릭은 극심한 병의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둔다. 만약에 프레데릭이 여인숙 살인 사건에 관련된 숨겨진 진실을 제대로 밝혔더라면, 남자는 떳떳하게 장인의 죄를 공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통스럽게 죽어간 프레데릭은 진실을 회피하고 숨긴 죄로 인해서 천형을 받은 것일까. 그렇게 받아들이기에는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붉은 여인숙』은 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진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가득하다. 이 이야기를 접한 독자는 어디서부터가 거짓이고 진실인지 혼동하게 된다.

 

 

 

 

 

 

 

 

 

 

 

 

 

 

 

 

 

 

※ 발자크는 <인간 희극>의 세계를 묘사할 때, 작품 속 인물들을 또 다른 작품에 재등장시켰다. 프레데릭 따르뻬이유는 《나귀 가죽》에서 부유한 집주인으로 등장한다. 그가 어떻게 막대한 재산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붉은 여인숙』을 읽으면 된다. 《나귀 가죽》에 나오는 프레데릭은 나귀 가죽으로 단숨에 부자가 된 라파엘 앞에서 아부를 떤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자 앞에서 굽실거리는 비열한 자와 법의 힘을 무력하게 만들어 '갑' 행세하는 부자가 있었다.

 

 

“당신은 재산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군. 재산은 무례해도 된다는 면허증이지. 당신은 이제 우리 편이오. 여러분, 황금의 권능을 위해 건배. 6백만 프랑의 자산가인 드 발랑탱 씨는 권좌에 올랐소. 그는 왕이오,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소. 그는 다른 모든 부자들처럼 만인의 위에 군림하오. 앞으로 그에게 ‘모든 프랑스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은 인권선언 첫머리에 새겨진 거짓말일 뿐이오. 그가 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그에게 복종할 것이오. 백만장자들에게는 단두대도, 사형집행인도 없소.” (《나귀 가죽》 중에서,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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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8-12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빙점... 요즘 아직도 이 소설 읽는군요.

cyrus 2015-08-12 21:42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전에 <빙점>을 처음 읽었을 땐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다시 읽어보니까 처음에 읽었을 때 보지 못했던 이야기의 주제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북다이제스터 2015-08-12 21:44   좋아요 1 | URL
저도 다시 읽어 보고 싶어요. 중학교 때 읽고 괜히 심숭생숭하던 느낌 다시 느껴보고 싶습니다. ^^

stella.K 2015-08-13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빙점이 절판된 줄 알았더니 어디선가 계속 나오는구나.
난 이걸 두 번 읽었지. 사춘기 시절 범우사판으로 읽었는데
그건 거의 다이제스트로 된 거였고, 30대 초중반 무렵쯤 다시 읽었던 것 같아.
한 권이 거의 500페이지쯤 되는 책 두 권짜리로.
다시 읽어도 좋더군. 아마도 이 책으로 내가 일본 문학을 알기 시작했던 것도 같아.
한때는 미우라 아야꼬가 좋아서 전작주의로 읽었던 적도 있는데
지금은 별로 기억나는 게 없구만. <길은 여기에>인가 하는 수필집은 정말 좋더군.
같지 않은 기독교 간증집이 판을 치는데 그런 거 읽는 거 보다
이 책을 읽는 게 기독교 신앙 입문에 훨씬 좋을 거라고 자부한다.^^

cyrus 2015-08-13 21:22   좋아요 0 | URL
<빙점>은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나오기 전까지 최고의 일본소설 스테디셀러라고 봐도 될 것 같아요. 미우라 아야코에 대해서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사실 <빙점> 말고는 뭘 읽어야할 지 몰랐어요. 제가 무교인데다가 아야코의 책이 워낙 많이 나와서 딱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거든요. <길은 여기에>는 그냥 제목만 들어봤어요. 누님이 추천한 책이라면 꼭 읽어봐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