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세계문학 단편전집 프랑스 편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창비, 2010)에 발자크가 쓴 『붉은 여인숙』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미지의 걸작』, 『영생의 묘약』과 함께 <인간 희극> 제2부 ‘철학 연구’에 포함되었다. 세 작품 모두 짧은 분량으로 이루어졌음에도 어떤 계층에 속하든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탐욕과 광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발자크는 단편소설을 더 능숙하게 쓰는 것 같다. 그가 글을 잘 쓴다고 보기 어렵다. 발자크의 장편소설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독자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크는 이야기의 시간적 또는 공간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최소 두세 쪽 이상을 쓴다. 그는 생리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그 모습을 통째로 종이에 옮기고 싶어 했다. 너무나도 자세하게 쓰는 습관 탓에 문장이 길어졌다. 《나귀 가죽》(문학동네, 2009)에서 라파엘이 친구에게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들려주는 대사가 압권이다. 라파엘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도박에 빠지게 된 계기까지 정말로 쉬지 않고 설명한다. 라파엘의 대사가 이야기 중반부를 차지하고 있어서 지루해도 끝까지 참고 읽어야 한다.

 

발자크는 은근히 잘난 척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어 자신이 아는 최신 사상 이론을 설명한다. 《루이 랑베르》(문학동네, 2010)의 발자크의 자전적 소설이다. 루이 랑베르는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조숙한 인물이다. 그는 스웨덴보리의 신비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정신이 육체보다 더 우위를 두는 이론을 체계적으로 구상한다. 그리하여 열두 살의 나이에 ‘의지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집필한다. 하지만 논문은 완성하지 못한다. 그를 골탕먹이려는 동급생들이 신부에게 랑베르가 논문을 몰래 쓰는 사실을 밀고했기 때문이다. 신부는 논문 원고를 압수하고, 랑베르를 심하게 꾸짖는다. 소설에 나오는 ‘의지론’은 《나귀 가죽》에서도 나온다. 라파엘 역시 같은 제목의 논문을 집핍하는 걸로 나온다. 이 논문은 실제로 발자크가 완성하지 못한 책이기도 하다. 《루이 랑베르》 번역본의 분량은 얇은 편이다. 그러나 비교적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의 소설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루이 랑베르》는 철학 소설이다. 이 소설 역시 <인간 희극> 제2부 철학 연구에 수록되었다. 랑베르가 줄기차게 사유하는 과정 하나하나 쫓아가기가 쉽지 않다. 이 소설의 화자는 랑베르가 유일하게 믿고 지내는 수도원 학교의 동급생이다. 랑베르는 화자에게 자신의 이론을 들려주면서 무한히 뻗어 나가는 사유의 힘에 스스로 경도된다. 독자는 랑베르의 철학적 장광설을 견뎌내야 한다. 단, 철학을 어려워한다면 과감하게 넘어가거나 속독할 것을 권한다. 정독하기보다는 역자 해설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발자크는 늘 세상을 생리학자처럼 꼼꼼하게 살펴본다. 그러나 글을 쓸 땐 각종 사상과 이론에 심취한 현학적인 철학자가 된다.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쓰는 발자크의 글쓰기를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귀스타브 랑송 ‘낭만주의의 악습’라고 분석한다. 낭만주의 소설은 이성보다는 감정의 내면을 중시하여 공상과 환상을 동경한다. 발자크의 소설은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전환하는 중간 지점에 분류된다. 발자크는 무명 시절에 가명으로 고딕 소설을 썼으며, <인간 희극>에 수록된 단편소설에 고딕풍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영생의 묘약』은 E.T.A. 호프만의 환상소설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호프만은 인간 내면의 악마성에 지배당하는 오싹한 과정을 그린 환상소설 《악마의 묘약》(황금가지, 2002)을 발표했다. 『영생의 묘약』 또한 실수로 묘약을 잘못 바르는 바람에 악마로 변하는 인물이 나온다. 『사막에 싹튼 열정』에서 사막은 미지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국적 장소로 나온다. 여기서 발자크는 낭만주의의 한 경향인 이국적 취미를 드러낸다. 발자크가 상상력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문학적 배경을 이해할 때 낭만주의와의 관계까지 고려해야 한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15-08-13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몸이 발자크를 정말 싫어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또 묘하게 발자크 소설에 끌려요. 단편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cyrus 2015-08-14 20:46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니까 발자크를 존경하는 작가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발자크에게 영향을 받은 에밀 졸라는 제외하고요. 발자크의 단편소설 세 편이 수록된 <사라진느>(문학과지성사)를 추천합니다.

yamoo 2015-08-13 2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지루한 소설에 대하면 양반 아닐까요? 전 아직 발자크 소설을 읽어 보진 못했지만 조이스의 <율리시즈>만큼 지루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단연코요!ㅎ

cyrus 2015-08-14 20:47   좋아요 0 | URL
<율리시스> 번역본에 각 장의 이야기를 요약한 줄거리가 나오는데, 이거 없었으면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 못합니다. <율리시스>를 줄거리를 먼저 봐야 합니다. ^^

페크pek0501 2015-08-14 0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제가 그런 생각을 했죠. 왜 명작이라고 하는 소설은 지루할까?
그런데 서머싯 몸이나 크로닌의 소설을 읽어 보면 지루하기는커녕 재밌거든요.
이문열 작가가 엮은 세계명작산책 시리즈는 단편소설들 묶음이에요.
열 권 중 다섯 권 읽었는데, 다 재밌더라고요. 물론 이문열 작가가 재밌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뽑아 엮었겠지요.
결론은...
얼마든지 재밌는 명작 소설도 있으니 저는 잘 골라 읽겠습니다, 하는 것. ㅋㅋ

하지만 님처럼 한 작가의 작품들을 계속 읽어 나가는 건 유익한 작업 같습니다.
시루스 님, 하면 발자크가 생각날 것 같아요. ^^

cyrus 2015-08-14 20:50   좋아요 0 | URL
다른 사람이 재미없다고 느껴지는 소설은 의외로 본인은 재미있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2주 동안 발자크의 소설만 읽으니까 이제 적응이 됩니다. 전작주의 독서의 장점인 것 같아요. 단점이라면 다른 책들을 볼 여유가 줄어들거나 같은 작가의 책만 계속 읽으면 슬슬 지루해져요. ^^

오후즈음 2015-08-14 0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간 올려주시는 발자크에 관련된 책들 리뷰와 소개들을 보면서 정말로 Cyrus님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읽고 있어요. (그래서 이름도 첫스펠링은 대문자로 썼습니다!!!!)
모든 고전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지루한 얘기들이 많은것 같아요. 앞에서 덧글 다신분처럼 재미 있는 것들을 골라 읽으면 참 좋겠는데요.
그 지루함과 재미없음을 견디는 것이 뭔가 인간에게 큰 약(?)이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고전 읽으라고 하는 걸까요?

cyrus 2015-08-14 20:59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고전을 잘 안 읽는 이유가 너무 옛날이야기라서 요즘 같은 시대에 읽으면 지루해요. 그래서 저는 고전작품을 추천하기가 망설여져요. 나는 재미있게 읽었고 유익한 고전작품인데 정작 다른 사람들은 재미없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고전작품 서평을 쓸 땐 다른 독자가 볼 땐 확실히 재미없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도 알리려고요. 유명한 고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끝까지 다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특정 고전작품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장점과 단점을 서평에서 확실히 설명한다면 페크님처럼 재미있는 작품을 골라 읽고 싶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하기가 쉬워질 겁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5-08-14 05: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알라딘에는 이런 글이 좀 많이 탄생해야 합니다. 발자크, 플로베르가 대표적인데, 이 양반들 항상 길게 묘사합니다. 특히... 플로베르가 보봐리 부인 옷 설명할 때 페이지 3,4페이지를 넘길 때 저는 폭발했습니다. 크아아아아아왕 ~~~ 오죽했으면 보봐리즘`이란 말이 탄생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해는 가더라고요. 지금은 나이키 덩크 하이`의 모양새를 설명하기 위해 4페이지에 걸쳐 묘사하는 작가는 없잖습니까. 누구나 쉽게 그 신발 이미지를 취할 수 있으니 말이죠. 그래서 현대 작가는 그저 용팔이가 나이키 덩크 하이를 신었다. 이렇게 묘사하지만 사진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 시대에는 독자에게 이미지를 세세하게 묘사할 필요는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독자는 사진을 접할 기회도 거의 없고 사진을 접한다고 해도 흑백이니 말입니다...
그래도... ㅎㅎㅎㅎ 야무 님 말씀처럼 율리시즈보다 지루하지는 않을 겁니다. 율리시즈 읽다가 정말 폭발하는 줄 알았습니다. ( 언젠가 맘 먹고 다시 도전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cyrus 2015-08-14 21:11   좋아요 0 | URL
곰발님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플로베르, 에밀 졸라가 글을 쓰던 시대에 처음으로 사진기가 등장했을 겁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지만, 정밀성이 높지 않았어요. 이때까지는 사진기보다는 사람의 눈이 더 믿을만했고 정확했죠. 정말 플로베르나 모파상이 풍경을 묘사하는 문장을 보면 진짜 눈으로 본 걸 그대로 옮긴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사실적이에요. <율리시스>는 무더운 날씨에 읽으면 안 됩니다. 안 그래도 책이 엄청 무거워서 가뜩이나 짜증나는데, 계속 읽다보면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ㅎㅎㅎ

transient-guest 2015-08-15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의 소설보다 재미있는 소설이 발자크 본인의 일생입니다. 저는 `고리오 영감`을 읽으면서 처음 발자크를 접했는데요, 그 후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보면서 발자크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작품도 좋지만, 그냥 발자크란 사람의 삶이 어쩌면 그리도 희극과 비극을 적절히 섞어놨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발자크란 이름만 떠올려도 웃음이 나와요.ㅎㅎ 그리고 제 추측입니다만, 발자크의 작법은 어느 정도 시대적인 영향도 있는게 아닐까 합니다. 플로베르도 그렇고 길고 복잡한 서술을 많이 사용하잖아요. 물론 이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ㅎ

cyrus 2015-08-17 22:2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지난 달 말부터 발자크 평전을 읽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이 평전을 읽고 나서야 그의 소설도 새롭게 보였어요. 한편으로는 그가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고,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어서 외롭게 글을 써나가는 모습을 생각하니 연민이 느껴져요. 게스트님 생각에 동의해요. 스탕달도 발자크와 비슷하게 문장이 대체로 길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특징이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