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사에서 이상(李箱)이 차지하는 위상은 자신의 시, 소설만큼이나 독특하다. 무엇보다 이상 시의 접근을 막는 것은 특유의 난해성이다. 예컨대 이상이 일본어로 쓴 조감도(鳥瞰圖)-LE URINE[1]은 악명 높은 연작시 오감도(烏瞰圖)보다 먼저 나온 시인데, 이 작품 또한 난해하다.

 

 

 불길과같은바람이불었것만불었건감얼음과같은수정체는있다. 우수는DICTIONAIRE와같이순백하다. 녹색풍경은망막에다무표정을가져오고그리하여무엇이건모두회색의명랑한색조로다.

     

  들쥐와같은험준한지구등성이를포복하는것은대체누가시작하였는가를수척하고왜소한ORGANE을애무하면서역사책비인페이지를넘기는마음은평화로운문약이다. 그러는동안에도매장되어가는고고학은과연성욕을느끼게함은없는바가가장무미하고신성한미소와더불어소규모하나마이동되어가는실과같은동화가아니면아니되는것이아니면무엇이었는가.

     

  진녹색납죽한사류는무해롭게도수영하는유리의유동체는무해롭게도반도도아닌어느무명의산악을도서와같이유동하게하는것이며그럼으로써경이와신비와또한불안까지를함께뱉어놓는바투명한공기는북국과같이차기는하나양광을보라. 까마귀는흡사공작과같이비상하여비늘을질서없이번득이는반개의천체에금강석과추호도다름없이평민적윤곽을일몰전에빗보이며교만함은없이소유하고있는것이다.

     

  숫자의COMBINATION을망각하였던약간소량의뇌장에는설탕과같이청렴한이국정조로하여가수상태를입술위에꽃피워가지고있을즈음번화로운꽃들은모두어데로사라지고이것을목조의작은양이두다리를잃고가만히무엇엔가귀기울이고있는가.

     

  수분이없는증기하여온갖고리짝은마르고말라도시원치않은오후의해수욕장근처에있는휴업일의조탕은파초선과같이비애에분열하는원형음악과휴지부, 오오춤추려므나, 일요일의뷔너스여, 목쉰소리나마노래부르려무나일요일의뷔너스여.

     

  그평화로운식당또어에는백색투명한MEMSTRUATION이라는문패가붙어서한정없는전화를피로하여LIT위에놓고다시백색여송연을그냥물고있는데. 마리아여, 마리아여, 피부는새까만마리아여, 어디로갔느냐, 욕실수도콕크에선열탕이서서히흘러나오고있는데가서얼른어젯밤을막으렴, 나는밥이먹고싶지아니하니슬립퍼어를축음기위에얹어놓아주려무나.

     

  무수한비가무수한추녀끝은두드린다두드리는것이다. 분명상박과하박과의 공동피로임에틀림없는식어빠진점심을먹어볼까-먹어본다. 만도린은제스스로포장하고지팽이잡은손에들고자그마한삽짝문을나설라치면언제어느때향선과같은황혼은벌써왔다는소식이냐, 수탉아, 되도록이면순사가오기전에고개숙으린채미미한대로울어다오, 태양은이유도없이사보타아지를자행하고있는것은전연사건이외의일이아니면아니된다.

 

 

이상 시는 주석과 보충 설명 없이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텍스트이다. 하지만 그의 시는 독자와 비평가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낡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자기 정신과 폐병으로 삭은 몸을 학대해가며 빚어낸 사유의 뼈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상의 시는 강골(强骨)이다. 이상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자기 세계를 고집했다. 이상(李箱/異常)한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문학인들이 도전했다.

 

이상 문학의 정본을 새로이 만들려면 이상이 생전에 발표한 텍스트의 원전(原典)뿐만 아니라 유고, 습작 노트까지 수집, 꼼꼼히 분석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원전을 기존에 나온 이상 문학 전집들과 대조하는 작업도 진행된다. 연구자는 원전에 오식이 있는지 검토한다. 왜냐하면, 오식을 바로 잡지 않으면 작가의 의도와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 문학을 연구하는 다음 사람을 위해서 이상 문학 정본을 만들려면 원전과 우리말로 풀이한 시, 그리고 주석 및 보충 설명 순으로 편집해야 한다. 이 세 가지 구성 요소 중 하나라도 빠지면 이상 문학에 접근하기 어렵다.

 

 

 

 

 

 

 

 

 

 

 

 

 

 

 

 

 

 

 

 

 

 

 

 

 

 

 

 

 

 

 

 

 

 

 

 

 

 

 

 

 

 

 

 

 

 

 

 

 

 

 

 

 

 

 

 

 

 

 

 

 

 

 

 

 

 

 

 

 

 

 

 

 

 

 

 

 

 

 

 

 

 

 

 

 

 

 

 

* 김종년 주해 이상 전집(가람기획, 2004)

* 김주현 주해 정본 이상 문학 전집(소명출판, 2005)

* 김주현 주해 정본 이상 문학 전집 (증보판)(소명출판, 2009)

* 권영민 주해 이상 전집(, 2009)

* 권영민 주해 이상 전집(태학사, 2013)

    

 

 

국내 최초 이상 문학 정본이 무엇인지 연구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김주현 교수는 1956년에 임종국이 엮은 세 권짜리 이상 전집을 가장 먼저 언급했고, 권영민 교수는 1949년 시인 김기림이 엮은 한 권의 이상 전집을 임종국이 선보인 이상 문학 전집보다 앞서 언급했다.

 

 

 

 

 

 

 

 

 

 

 

 

 

 

 

 

 

* 조해옥 이상 시의 근대성 연구(소명출판, 2001)

 

 

 

이상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는 1950년대이다.[2] 오식을 바로 잡고 믿을 만한 텍스트를 제공하는 것이 정본의 일차적 조건이. 물론 임종국의 <이상 전집>도 오류가 있긴 하나, 이상 문학 연구를 활성화하는 촉매 역할을 한 정본으로 볼 수 있겠다.

 

 

 

 

 

 

 

 

 

 

 

 

 

 

 

 

 

 

 

* 이승훈 주해 이상문학전집 1(문학사상사, 1989)

* 김윤식 주해 이상문학전집 2(문학사상사, 1991)

* 김윤식 주해 이상문학전집 3(문학사상사, 1993)

 

 

 

임종국의 <이상 전집> 출간 이후로 이어령(1977~1978), 이승훈과 김윤식(1989, 1991, 1993), 김종년(2004), 김주현(2005), 권영민(2009)으로 이어지는 이상 문학 정본들이 선보였다. 그러나 이어령, 이승훈, 김윤식 <이상 전집>은 절판되었다. 이상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절판된 책을 구할 필요는 없다. 김주현과 권영민 <이상 전집>은 앞서 나온 <이상 전집>들의 오류를 검토하기 위해 정확한 원전 비평과 판본 비교 작업을 거쳤기 때문이다. 사실, 김종년 <이상 전집>정본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책에 원전은 없고, 우리말로 풀이한 텍스트로 편집되어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말로 풀이한 텍스트는 원전보다 가독성이 나은 편이므로 이상 문학을 처음으로 접근하는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 적합하다. 반면, 김주현 <이상 전집>은 원전과 주석으로만 구성된 책이다. 따라서 정확한 원전을 알고 싶으면 김주현 <이상 전집>을(이상 문학 전공자를 위한 책), 깊이 있는 주석을 중심으로 이상 문학을 이해하고 싶으면 권영민 <이상 전집>을 고르면 된다.

 

 

 

 

 

 

 

 

 

 

 

 

 

 

 

 

 

 

* 신범순 주해 이상 시 전집 1 : 원전 주해(나녹, 2017)

* 신범순 주해 이상 시 전집 2 : 수정 확정(나녹, 2017)

 

 

 

필자는 김주현 <이상 문학 전집 1 : >와 권영민 <이상 전집 1 : >(뿔 출판사에서 나온 구판)를 같이 읽고 있다. 최근신범순 교수가 엮은 <이상 시 전집>이 출간되었는데, 아마도 김주현, 권영민 판본의 오류를 비교 · 검토했을 거로 짐작해 본다. (이 책을 아직 안 읽어봤다) 김주현, 권영민 판본을 더듬더듬 번갈아 읽으면서 두 판본에 수록된 원전 텍스트의 미묘한 차이점을 발견했다.

 

 

 

* 파편의 경치

 

 

나는遊戲한다

의슬립퍼어는菓子와같지아니하다

어떠하게나는울어야할것인가

 

(김주현 판본, 35)

 

 

 

나는논다

의슬립퍼어는菓子와같지아니하다

어떠하게나는울어야할것인가

 

(권영민 판본, 190)

 

 

 

김주현 판본의 원전에는 나는遊戲(유희)한다라고 되어 있지만, 권영민 판본은 우리말로 나는논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

 

나의 生涯는 원색과같하여 豐富하도다.

 

(김주현 판본, 47, 띄어쓰기 허용)

 

 

 

나의 生涯는원색과같하여豐富하도다.

 

(권영민 판본, 47, 띄어쓰기 없음.)

 

 

 

띄어쓰기를 거부하는 글쓰기는 이상 문학의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상은 띄어쓰기를 지키면서 문장을 쓰다가도 갑작스럽게 띄어쓰기를 무시한 문장을 쓴다. ‘기인다운 글쓰기다. 정확한 원전을 공개하려면 띄어쓰기가 된 문장띄어쓰기를 무시한 문장을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 거울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反對요만은

또꽤닮앗소

 

(김주현 판본, 83)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反對요마는

또꽤닮앗소

 

(권영민 판본, 34)

 

 

 

 

* 오감도-시제 3

 

싸훔하는사람은즉싸훔하지아니하든사람이고또싸훔하는사람은싸훔하지아니하는사람이엇기도하니까싸훔하는사람이싸훔하는구경을하고십거든싸훔하지아니하든사람이싸훔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훔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훔하는구경을하든지싸훔하지아니하든사람이나싸훔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훔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얏으면그만이다

 

(김주현 판본, 88)

 

 

 

싸홈하는사람은즉싸홈하지아니하든사람이고또싸홈하는사람은싸홈하지아니하는사람이엇기도하니까싸홈하는사람이싸홈하는구경을하고십거든싸홈하지아니하든사람이싸홈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홈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홈하는구경을하든지싸홈하지아니하든사람이나싸홈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홈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얏으면그만이다

 

(권영민 판본, 34)

 

 

 

김주현 판본은 싸훔’, 권영민 판본은 싸홈으로 표기되어 있다. ‘싸움의 옛말은 싸홈이다. 국어사전에 싸홈은 있지만, ‘싸훔은 없다.

 

이상의 글을 읽는 일은 장님 코끼리를 만지는 상황과 같다. 연구자와 독자 모두 이상의 작품 앞에만 서면 장님이 되고 만다. (이상 : 아니, 종이에 문자가 있는데 왜 읽지를 못하니!)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이상의 작품을 더듬더듬 읽어야 한다. 이렇다 보니 하나의 텍스트에서 다양한 해석이 등장한다. 한 사람이 정리한 <이상 전집>을 여러 번 읽어도 이상의 문학 세계를 100%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상과 관련된 새로운 텍스트 자료들이 발굴된다면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확장 범위는 넓어진다. 지금도 한 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다는이상에게 도전하는 비평적 탐험가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들의 활약으로 언어와 기호로 만들어진 이상의 텍스트 미로는 자가 번식하는 세포처럼 점점 확대되고 있다. ‘이상이라는 기존의 미로에 새로운 미로들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1] ‘LE URINE’의 바른 표기는 L’urine이다. 이 단어는 오줌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권영민, 이상 전집 1236, 2009)

 

[2] 조해옥, 이상 시의 근대성 연구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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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2-21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 연구서가 의외로 많이 나와있구나.
시는 정말 난감해. 이상이니까 봐주는 거지
나 같은 사람이 저렇게 썼다고 하면 단박에
뭐라고 하지 않았을까?ㅋ
그만큼 그의 내면이 예사롭지 않다는 얘기겠지.
그나마 소설이나 산문이 낫긴한데 말야.

cyrus 2017-12-21 17:13   좋아요 0 | URL
네, 이상 연구서가 생각보다 많았어요. 학술논문까지 포함하면 자료가 어마어마할 거예요. 그런데 인터넷 서점에서 이상 연구서를 찾기 어려워요. ‘이상’을 검색하면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이상심리학’, 이상 문학과 무관한 책들이 나와요. 그런 검색 결과 내용 속에 이상 연구서를 찾기가 힘들어요. 소설, 수필은 읽을 만해요. 물론, 주석이 달린 가정 하에서요. ^^

붕붕툐툐 2017-12-2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서 빵 터졌는데, 내용은 이상 문학에 대한 애정과 깊이가 있어 감탄했네요!

cyrus 2017-12-21 17:15   좋아요 0 | URL
눈치를 챈 분들이 있겠지만, 제목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속 김첨지의 유명한 대사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상 연구서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해서 깊이는 없어요. ^^;;

sprenown 2017-12-21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의 시가 미친 놈의 헛소리 같지만 그게 우리 문학의 근대성에 있어 단초라고 많은 연구자들이 달려드는 형국이네요..도대체 이상본인조차도 어떤의도로 썼는지 모를것 같은데..해설서나 연구서가 더 난해해지는것 같아요.^^.

cyrus 2017-12-21 17:18   좋아요 0 | URL
이상의 시가 얼마나 난해했으면 애초에 이상은 ‘의미 없는 시’를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로 이상이 아무 생각 없이 시를 썼다면 해석에 매달린 문학인들의 노력이 무의미해져요. ^^;;

2017-12-21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1 17:25   좋아요 0 | URL
자신의 글을 해설한 이상의 자필 메모가 발견된다면 국문학 전체를 뒤흔들 획기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국문학자들은 쾌재를 부를 것이고, 수험생들은 수능 언어영역 시험에 출제될 이상의 글을 부담스러워할 것입니다. 이상의 글을 해석 불가능한 텍스트라서 시 <거울>, <오감도>, 단편소설 <날개>, 수필 <조춘점묘>를 제외한 작품들은 수능 언어영역 지문으로 출제될 확률이 적어요. 나머지 작품들이 완전히 해석 가능하게 된다면 수능 언어영역 지문으로 출제될 거예요. ^^;;

겨울호랑이 2017-12-2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셜록 홈즈 번역본 비교 페이퍼 때의 예리한 분석이 이번 이상 페이퍼에서도 진가가 드러나고 있네요^^:

cyrus 2017-12-21 17:26   좋아요 1 | URL
홈즈 전집을 완독하지 않은 상태인데, 잊힐 뻔한 책을 언급하셨군요.. ㅎㅎㅎ 아직 안 읽은 작품들은 그냥 즐기면서 읽을 생각입니다. ^^;;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를 원한다. 실제의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보다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첫 만남에서는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만나는 사이에 첫인상이 형성된다. 사람들이 첫인상을 형성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정보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쓸 수 있는 정보라고는 기껏해야 상대방의 외모, 목소리, 복장이 전부다. 사람들은 첫인상으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든다. 얼굴, 신장, 체격 등의 겉모습과 제스처, 말투라는 극히 제한된 정보로 그 사람의 성격까지 판단해버린다.

 

 

 

 

 

 

 

 

 

 

 

 

 

 

 

 

 

* 말콤 글래드웰 블링크(21세기북스, 2016)

 

 

 

이렇듯 첫인상은 매우 짧은 순간에 결정된다. 첫인상이 좋으면 쉽고 편하게 생각되지만, 반대의 경우는 부정적인 사람이라는 편견을 갖게 된다.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은 첫인상을 블링크(blink)’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블링크는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나는 순간적인 판단을 가리킨다. 글래드웰은 상대의 첫인상을 판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초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눈으로 헤어스타일, 액세서리, 옷 등 잘게 쪼개진 정보를 모은 뒤 살아온 과정에서 축적된 판단력으로 사람을 단번에 평가한다는 얘기다. 첫인상을 결정하는 시간은 학자마다 다르긴 하나 길어야 7초다.

 

첫인상이 나중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초두 효과(primary effect)’라고 한다. 사람은 일단 첫인상이 형성되면 후에 들어오는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처럼 먼저 제시된 정보가 나중에 들어온 정보보다 전반적인 인상 형성 및 인물 평가에 영향을 준다.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의 뇌는 낯선 장소가 안전한지, 상대가 사기꾼은 아닌지 재빨리 판단해 움직이는 생존 기계로 진화해온 결과다.

 

 

 

 

 

 

 

 

 

 

 

 

 

 

 

 

 

* 생텍쥐페리, 황현산 역 어린 왕자(열린책들, 2015)

 

 

 

한 사람의 실속 있는 내면이나 진가를 보지 않고 겉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만의 색안경에 갇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첫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생텍쥐페리(Saint Exupery)어린 왕자에 나오는 천문학자 이야기는 첫인상만으로 사람을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어른들의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소행성을 발견한 터키의 천문학자는 국제천문학회가 참석하여 소행성의 존재를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터키 천문학자의 단출한 복장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몇 년 지난 후, 터키에 서양식 문화가 유입되었고 터키의 독재자가 국민들에게 서양식 복장을 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고 선포했다. 터키 천문학자는 멋있는 서양식 복장을 하고 국제천문학회 연단 위에 다시 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든 천문학자가 그의 말을 믿어주었다.

 

 

 

 

 

 

 

 

 

 

 

 

 

 

 

 

 

 

 

* 존 파렐 빅뱅-어제가 없는 오늘(양문, 2009)

* 데이비드 보더니스 아인슈타인 일생 최대의 실수(까치, 2017)

 

 

 

아인슈타인(Einstein)과 조르주 르메트르(Georges Lemaitre)의 첫 만남어린 왕자속 천문학자 이야기와 묘하게 겹친다. 빅뱅(big bang)’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이 조지 가모(George Gamow)로 널리 알려졌지만, ‘빅뱅 이론으로 자라게 될 생각의 씨앗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조르주 르메트르이다. 가모는 빅뱅 이론을 체계화화한 학자다. 그는 빅뱅 이론을 뒷받침해줄 증거-우주의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를 관측했다-를 발견했다. 프레드 호일(Fred Hoyle)빅뱅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빅뱅 이론을 비웃은 학자였다.

 

 

 

 

 

 

르메트르는 벨기에 출신의 과학자이자 가톨릭 신부였다. 그는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한 점에서 출발했으며 그 점이 바로 태초의 우주의 탄생을 알리는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주의 모습을 불꽃놀이에 비유했다. 르메트르는 아인슈타인이 고안한 방정식을 토대로 팽창하는 우주를 증명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우주 팽창 가설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르메트르는 직접 아인슈타인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주장을 설명했지만, 아인슈타인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마도 르메트르는 위대한 과학자를 만나러 갔을 때 평소에 입던 검은색 신부 복장(사진 속에 르메르트가 입은 옷이다)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르메트르가 교회 신부라는 이유로 의심의 눈길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벨기에 신부의 주장을 묵살한 천재의 판단은 실수였다.

 

대부분 우주론을 설명한 책에 보면 르메트르를 조연급으로 언급한다. 이렇다 보니 르메트르는 조지 가모, 심지어 빅뱅 이론을 무시한 호일보다 인지도가 밀린다. 우주 팽창을 이해하려면 먼저 르메트르의 생각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는 신부였지만, 자신의 종교관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생각의 씨앗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빅뱅-어제가 없는 오늘은 르메트르의 일생과 종교라는 이름에 갇힌 그의 과학적 성과를 재조명한 유일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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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0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1 12:47   좋아요 0 | URL
과학자, 종교인 양쪽에서 외면받은 외로운 학자였어요. 교황이 빅뱅 이론을 창조론의 근거로 사용한 것에 반발할 정도로 과학 정신이 투철한 인물이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12-2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빅뱅이론은 기독교의 창조론과도 잘 부합되는 이론이라 여겨집니다. ‘태초에 빛이 있어라‘라는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고 여겨졌기에 과학의 다른 이론보다 상대적으로 저항없이 받아들여진 것 같아요^^:

cyrus 2017-12-21 12:50   좋아요 1 | URL
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빅뱅 이론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르메트르 신부는 빅뱅이론의 종교적 관점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빅뱅 이론이 종교와 과학의 중간 다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 - 초기의 작가들에서 20세기 SF까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홍근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엄청 많은 고전 중에 도대체 어떤 재미있는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 이런 의문이 든다면 평생 책 속에 파묻혀 살아온 권위자의 조언을 따르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만약 그 권위자가 천국의 도서관장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라면 신뢰성은 더욱 높아진다. 그는 아예 도서관을 삶의 터전으로 삼을 정도로 도서관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부계의 유전병을 물려받으면서 태어난 보르헤스는 너무 많은 책을 읽은 탓에 실명하게 된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간결하고 압축적이며 짧고 재미있다.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역시 짧고 재미있다.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는 미국문학사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개론서가 아니다. 이 책은 애서가의 지적 편력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일뿐만 아니라, 후대의 많은 독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보르헤스가 엄선한 미국문학 고전들을 접할 수 있다. 지극히 저자의 개인적인 선택이지만, 하나같이 매혹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작품들이다.

 

보르헤스의 말에 따르면 문학 작품 자체가 우리(독자들)를 끌어당기는 매력[1]이 있다고 한다. 보르헤스가 말하는 문학 작품의 매력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사실 서문만 봐도 좀처럼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보르헤스 문학의 매력을 아는 독자라면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다. 보르헤스의 글은 환상과 사실을 넘나들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는 완벽하고 독특한 상상의 산물이나 현상을 마치 실재했던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든다. 독자는 보르헤스의 문학이 가진 환상성을 이해해야 한다. ‘환상성은 보르헤스가 강조한 독자를 끌어당기는 문학 작품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책에서 보르헤스가 추구한 환상성에 영향을 준 미국 작가들을 만나볼 수 있다.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환상문학의 뿌리이다. 그 뿌리 속에 흐르는 문학적 영양분을 듬뿍 받고 자라 훌륭히 성장한 나무가 바로 보르헤스다. 그는 자신을 달의 작가로 분류했다. ‘달의 작가는 홀로 사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사상을 재료로 삼아 글을 쓴다. 반면 태양의 작가는 정치적 상황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현실주의자이며 능숙하게 글을 써내려간다. 보르헤스는 미국의 초월주의자들을 주목했는데, 그들은 달의 작가에 속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사회보다는 개인, 이성보다는 직관을 앞세웠고, 자연과의 접촉을 통해서 초월적 자아를 완성하는 삶을 살았다.

 

그밖에 보르헤스는 추리소설, 서부문학, 인디언 문학 등에 주목하여 러브크래프트(Lovecraft),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 등을 소개한다. 이들 역시 포의 문학적 영양분을 먹고 성장한 훌륭한 작가들이다. 그런데 보르헤스가 인디언 문학을 소개한 점은 아이러니하다. 보르헤스는 원주민 학살을 문명화를 위한 과정이라고 옹호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의 발언에 남아메리카 작가들도 한 목소리로 비난한다. 보르헤스가 19세기 미국 서부 시대에 활동했던 앰브로즈 비어스(Ambrose Bierce)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의외다. 아울크리트 다리에서 생긴 일(An Occurrence at Owl Creek Bridge), 막힌 창(The Boarded Window), 요물(The Damned Thing) 등은 환상문학, 공포문학 단편 선집에 수록되는 비어스의 대표작들이다.

 

   

 

[1] 서문, 10 

 

 

 

 

* Trivia

 

베니토 세레노 선장이라는 인물은 조셉 콘래드의 나르시소스 호(Narcissus)’의 흑인을 떠올리게 하고,‥… (68)

 

베니토 세레노(Benito Cereno)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이 쓴 단편소설이다.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가 쓴 소설의 정확한 제목은 나르시소스 호의 흑인(The Nigger of the Narcissu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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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2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르헤스의 책 몇권을 헌책방에서 사놓은지 꽤 되었는데 얼른 손이 안가네요

cyrus 2017-12-20 16:07   좋아요 0 | URL
보르헤스 전집 1권을 읽어봤는데 재미없어서 포기했어요. 단편이라고 만만히 보다가 큰 코 다쳤습니다. ^^;;

레삭매냐 2017-12-20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르헤스 책들을 몇 권 가지고는 있는데
도통 읽게 되질 않네요 허허

cyrus 2017-12-20 16:10   좋아요 0 | URL
배경지식 없이 읽으면 보르헤스의 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보르헤스 관련 서적을 먼저 보고, 소설 읽기에 재도전해야겠어요. ^^

2017-12-20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0 16:12   좋아요 1 | URL
렌즈를 잘못 착용해서 실명할 뻔 했어요. 안경을 썼는데도 시야가 흐렸어요. 그 때 얼마나 식겁했는지.. ㅎㅎㅎ 눈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페크pek0501 2017-12-2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르헤스의 말>을 완독했는데 좋았습니다.
이 책은 어떨지 관심이 갑니다.

cyrus 2017-12-20 16:13   좋아요 1 | URL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분량이 얇아서 전공 책 느낌이 1도 나지 않습니다. ^^
 
고마워 영화 - 배혜경의 농밀한 영화읽기 51
배혜경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수필의 장점은 그 어떤 장르보다도 글 쓰는 주체의 사유와 정서의 무늬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매력이다. 엄격한 자기통제와 문학적 수련이 담보되지 않았을 경우, 수필은 어느 순간 지리멸렬한 졸문이 된다. 자신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타인과의 진지한 대화로 이루어진 탁월한 수필은 그 자체로 매혹적인 문학적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배혜경의 두 번째 수필집 고마워 영화를 읽으면서 나는 오랜만에 탁월한 글을 읽는 즐거움을 느꼈다. 고마워 영화에는 첫 번째 수필집 앵두를 찾아라(수필세계, 2015)와는 또 다른 작가의 면모와 사유의 흔적, 영화에 대한 생각 등이 흥미롭게 표출되어 있다.

 

영화는 답답한 현실에서 나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낯선 문화, 다양한 삶의 현장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작가 특유의 소박한 필치로 영화라는 해방구를 통해 내다본 삶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고마워 영화는 영화감상의 특별한 안목이 보인다든가 대단한 해석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이점은 많고 많은 영화비평에서 찾으면 된다. 이 수필집은 똑같은 산과 강을 둘러봤더라도 그 쓰인 문체와 감상에 따라 읽는 맛이 달라지는 기행문처럼 그런 재미로 읽어 볼만한 책이다. 영화에 방점이 찍히는 책이라기보다는 산문이되 다만 그 소재가 영화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작가의 글들은 읽는 이들에게도 편안함을 준다. 카페에 앉아 내가 본 그 영화는 좋았어.”라고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다.

 

작가의 영화 이야기는 우리들이 흔히 보는 그런 소모적이고, 읽고 나면 내 삶의 그 어느 한구석도 위안이 안 되는 그런 글들이 아니다. 그녀는 글을 얼마나 꼼꼼하게 쓰고 다듬었던지 읽는 내가 온몸에 힘을 주면서 읽을 정도였다. 그녀가 서문에서 인용한 영화 대사 삶은 디테일이다라는 말은 독자에게 영화 읽기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별 볼 일 없는 것 같은 영화 장면까지 살펴보는 작가의 시야는 아마, 그녀의 진지하고 정직한 자기 성찰과 세상에 대한 뿌리칠 수 없는 따뜻한 애정에서 오는 듯하다. 그녀는 <더 리더, 책을 읽어주는 남자><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연기한 케이트 윈즐릿(Kate Winslet)의 맨발을 주목한다. 작가는 배우의 맨발에서 영화에 잘 드러나지 않은 영화 속 인물의 표정을 읽어낸다.

 

사람은 다른 동물에 비교해 희로애락에 대한 감정 표현이 풍부하다고 한다. 다양한 예술 장르로 나타낼 수 있는 감정의 표현 방법 중에서 문학이 가장 근본적이며, 그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시심(詩心)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따라서 시심이 메마르면 인간사회는 그만큼 무미건조해지고 오히려 살벌해지기까지 하다. 우리네 삶에서 시심이 실종되는 순간 감동적인 글은 더 이상 쓸 수 없으리라. <일 포스티노>를 소개한 글인 시인의 의무는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독자의 시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 글은 문정희 시인의 시 가을 우체국으로 시작해서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의 시로 끝이 난다. 영화와 문학이 정교하게 이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는 글이다.

 

좋은 영화를 혼자만 숨겨두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낯선 영화를 함께 보며 친구의 우정은 더욱 무르익어가고, 같은 영화를 보았던 낯선 이는 어느덧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고마워 영화는 그런 소박한 행복과 잔잔한 감동을 주는 책이다. 작가는 마음속에 간직해온 영화라는 보물을 끄집어내 공유한다. 이 책을 읽는다면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멋진 영화 한 편 보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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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9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0 12:08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프레이야님처럼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

2017-12-20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0 12:10   좋아요 0 | URL
오히려 제가 프레이야님의 책을 읽으면서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책을 너무 좋아해서 책 속에 파묻히다시피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의 성격이 꽉 막혔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프레이야님의 글을 읽으면서 책의 지식을 습득하는 삶보다 사람 간의 정을 느끼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레삭매냐 2017-12-20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영화를 다룬 책들을 정말 찾아서 볼 정도
로 열정이 있었는데 이젠 영화도 그리고 영화를 다룬
책도 잘 보게 되질 않네요...

cyrus 2017-12-20 16:15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이달의 당선작’ 영화리뷰 부문이 있었을 때가 좋았어요. 그 시기에 깊이 있는 영화리뷰를 쓰는 분들이 많았어요. 영화리뷰 부문이 사라지고 난 뒤에 저도 영화 볼 일이 줄어들고, 영화리뷰를 쓰지 않게 되었어요. ^^;;
 

 

 

영국의 작가 몬터규 로즈 제임스(Montague Rhodes James)의 단편소설 포인터 씨의 일기장은 책 수집가에게 일어난 기이한 현상을 섬뜩한 분위기로 담아낸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제임스 덴턴은 고서를 모으는 책 수집가다. 그는 윌리엄 포인터라는 사람이 쓴 오래된 일기장을 주문한다. 덴턴과 같이 사는 고모는 조카의 고서 수집벽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고모님의 잔소리를 한 번 들어보자. 덴턴이 처한 난감한 상황이 남 일 같지가 않다.

 

 

 

 

 

 

 

 

 

 

 

 

 

 

 

일요일 오전, 교회에 다녀온 다음 그의 고모가 서재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서탁에 놓인 네 권의 묵직한 갈색 가죽 장정 서적을 보고는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다. 이게 대체 뭐니?” 그녀는 의심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새로 산 거지? ! 이것 때문에 내 꽃무늬 커튼을 잊은 거니? 그럴 줄 알았어. 끔찍하구나. 여기에 대체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궁금하구나. 10파운드가 넘는다고? 제임스, 이건 죄악이야. 그래, 이따위 물건에 낭비할 돈이 있으니 우리 생체 해부 반대 모임에도 꽤나 많은 돈을 기부해 줄 수 있겠구나. 정말이야, 제임스. 네가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기분이 나쁠…‥ 잠깐 누가 썼다고? 애크링턴의 포인터 씨? 그래, 이웃의 고문서를 모아들이는 일 자체야 흥미로울 수도 있지. 하지만 10파운드라니!” 그녀는 조카가 든 것 말고 다른 일기장 한 권을 집어 들고는 아무 쪽이나 펼쳐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책장 사이에서 집게벌레 한 마리가 기어 나오는 것을 보고는 기겁하여 책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덴턴 씨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책을 집어 들었다. 불쌍한 일기장! 고모님은 포인터 씨에게 너무 가혹하게 구시는 것 같네요.” “그랬니, 얘야? 미안하지만 나는 저런 끔찍한 벌레들은 견딜 수가 없단다. 어디 책이 망가지기라도 했는지 한번 보자꾸나.” (391~392)

 

 

덴턴처럼 고서를 수집하지는 않지만, 헌책방에 있는 오래된 책을 좋아한다. 헌책방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책들의 상태는 온전치 못하다. 종이 색깔이 누렇게 변색하였고, 퀴퀴한 곰팡내를 풍긴다. 그렇다 보니 이런 책을 사 오면 가족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 내 동생은 간혹 내 서재를 구경하다가 오래된 책을 발견하면 이런 책을 왜 샀어? 재미있어?”라고 묻는다. 나는 재미있으니까 샀지.”라고 짧게 대답만 한다. 어머니는 내 방 안에 가득한 책들을 볼 때마다 그만 사라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잘 안하셔서 그렇지 눈치 빠른 어머니는 아들이 야금야금 생활비로 책을 사는 것을 알고 있다.

 

 

 

 

 

 

 

책 주문할 때마다 가족들 눈치받기 싫어서 편의점 픽업 서비스또는 중고매장 픽업 서비스를 많이 이용한다. 퇴근할 때 편의점이나 중고매장에 도착한 택배를 받으러 간다. 그러면 가족들 모르게 책을 주문할 수 있다. 하지만 중고매장 픽업 서비스를 자주 이용하게 되니까 또 다른 문제점이 생겼다. 중고매장에 진열된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택배 물품 찾으러 매장에 가면 책을 더 사게 된다. 택배 물품만 들고 매장 밖으로 나간 적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다. 이러한 소비 습관이 안 좋을 줄 알면서도 중고매장에 택배 물품 찾으러 가는 날이면 에코백을 챙긴다…‥. 나란 놈은 스튜핏이다.

 

책을 사 모으는 일, 알라딘 서재에 글 쓰는 일 모두 가족에게 비밀로 하고 있다. 나의 독서 행위가 공개되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알라딘/북플, 책 관련 온 · 오프라인 커뮤니티(출판사 공식 카페, 독서모임 등)뿐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책 좋아하는 취향을 밝혀서 남들한테 좋은 소리 들은 적이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은 내게 놀 줄 모른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말을 듣고 난 후부터는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면 절대로 내가 먼저 책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독서는 혼자 즐길 수 있는 유희다. 여러 사람과 함께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유희에 익숙한 사람들은 혼자 즐기는 유희의 즐거움을 잘 모른다. 책을 많이 사도 스튜핏!, 책을 읽어도 스튜핏! 스튜핏 소리 계속 듣더라도 내 갈 길 가련다. 개썅마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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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9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19 17:34   좋아요 0 | URL
오래된 책들도 도서관에서 만날 수만 있다면 사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온 지 십년이 채 안 된 책들은 도서관 창고로 향합니다. 한 달마다 새 책들이 도서관에 들어오기 때문에 먼저 도서관에 온 책들은 양로원 같은 창고에 머물게 되는 거죠.

syo님이 빠르면 연말에 대구를 떠난다고 합니다. 유레카님이 괜찮으시다면 syo님도 뵙으면 합니다. ^^

2017-12-19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19 17:36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저도 책 구입을 자제하고 도서관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

stella.K 2017-12-19 1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왜 책 좋아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따 시키는지 모르겠어.
그 사람이 뭐 피해주는 것도 없는데 말야.
책 읽는 사람은 접근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나 봐.
놀자고 그러면 얼마든지 놀아줄 수도 있는데 말야.ㅋ

사실 궁금하긴 해. 넌 다달이 사는 책 어떻게 두고 있나?ㅋ

cyrus 2017-12-19 17:39   좋아요 0 | URL
저는 조용하게 노는 것을 좋아해서 남자들이 성인이 되면 꼭 가는 곳(19금 관련)에 한 번도 가지 않았어요. 그런 곳에 가서 돈 낭비하기 싫어요.

서재에 더 이상 써야 할 글이 없으면 제 방 전체 내부를 사진으로 공개하겠습니다. ㅎㅎㅎ

stella.K 2017-12-19 18:18   좋아요 0 | URL
아니 누가 뭐랬니? 묻지도 않는...ㅋㅋㅋㅋㅋㅋ

아하, 보통 남자들은 그렇게 노는구나.
당연하지. 그런데다 돈 쓰느니 책 사 보는 게 훨씬 낫지.
너를 순수 건전남으로 인정! 그뤠잇~!ㅋㅋ


cyrus 2017-12-19 18:26   좋아요 2 | URL
저는 내 친구들은 19금 장소에 가서 놀지 않을 거라고 순순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남자가 아이가 성인이 되면 변하긴 변해요. 저보다 순둥순둥한 친구들도 성인이 되기 위한 어둠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 거 보면 ‘착한 남자’는 절대로 없다는 회의적인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2017-12-19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19 17:45   좋아요 1 | URL
책과 함께 하는 시간도 좋지만, 사람과 같이 만나고 어울리는 것도 중요해요. 개인적 시간, 공적 시간 둘 다 균형 잡는 일이 어렵지만, 너무 책만 몰입하게 되면 사람과 사람 간에 만나면서 느낄 수 있는 정에 무감각해집니다. 그래서 책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잘난 척하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좁은 심성을 가진 사람도 있어요. 이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찔레꽃 2017-12-19 13: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제 마누라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여보 내 취미가 뭐냐구 물어 봐! 취미가 뭐야? 책 사는 것! 마누라가 말했어요. 여보 내 취미가 뭐냐구 물어 봐! 취미가 뭐야? 고양이 키우는 것! 제가 말했어요. 어휴 둘 다 벼랑 아닌 취미일세... Cyrus님은 사는만큼 읽으시니 괜찮지만, 저는 잘 읽지도 않으면서 왜 그리 책을 사는지... 저야말로 스튜 핏! 입니다. 하하하.

cyrus 2017-12-19 17:47   좋아요 0 | URL
저도 사 놓고 안 읽은 책이 엄청 많습니다. 언젠가는 읽을 거라고 생각해서 샀는데, 그 ‘언제‘를 기약할 수 없어서 문제입니다. ^^;;

짜라투스트라 2017-12-19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읽는 게 취미라고 해도 별문제 없이 잘 살아와서 아주 글이 흥미롭게 여겨지네요^^

cyrus 2017-12-19 17:48   좋아요 0 | URL
주변에 책 좋아하는 친구 한 두 명만 있으면 마음이 편안할 것 같습니다. 진짜 제 주변에 책 읽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7-12-19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 님은 스튜핏이 아니라 열정입니다. 사이러스 님은 독서를 정말 좋아하시는 듯...

cyrus 2017-12-19 17:51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알라딘 서재뿐만 아니라 책과 관련된 커뮤니티에 저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제가 외향적인 성격이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놀 줄 알았으면 책과 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하게 됐습니다.

레삭매냐 2017-12-19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다이어트는 그래서 꾸준하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늘어나는 장서를 보관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정말 꼭 갖고 싶은 책들만 추려 내고
나머지들은 혹독하게 정리를...
맨날 말로만 이러고 있답니다. 오늘도 세 권
샀네요.

cyrus 2017-12-19 18:21   좋아요 1 | URL
반전의 댓글이군요.. ㅎㅎㅎ 북플 알림으로만 봤을 땐 레삭매냐님이 책 다이어트를 제때 하자는 내용의 댓글인 줄 알았어요. 지름신은 언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매일 퇴근할 때마다 괴롭습니다. 퇴근하면 대형서점이 있는 번화가를 꼭 지나가야 합니다. 집에 가는 버스를 타다가 단순하게 책을 사고 싶어서 번화가에 내린 적이 많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