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만남과 헤어짐의 시간을 마주한다. 그 기간이 길든 짧든, 누구나 한 번쯤은 환희와 고통을 경험하곤 한다.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는 평범하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연애이야기 하나씩을 간직한다. 어떠한 경험이었든 간에, 시간이 지난 후에 바라보는 자신의 연애담은 액자 속 빛바랜 사진처럼 아름답게 남는다.

 

이별을 대하는 방식은 각자가 다 다르다. 어떤 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옛 연인을 자신의 삶에서 삭제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끝끝내 버리지 못하고 붙잡으려 한다. 하나의 연애가 끝나면, 실연의 상처는 깊어지고 상처와 새로운 사랑의 갈림길에서 잠들지 못하는 날이 늘어난다. 그뿐만 아니다. 이별의 고통은 헤어진 연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로까지 번지게 된다.

 

옛 연인이 준 선물을 간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직 애인을 사귀어 보지 못해서 이런 경험을 겪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수집벽 있는 나라면 옛 연인이 준 선물을 쉽게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그 선물에 잠깐 눈길만 줘도 옛 연인과의 소중한 추억이 살며시 떠오른다면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다. 

 

물건 집착은 상대방이 주는 사소한 선물마저도 버리지 못한다. 특히 책은 그렇다. 비록 내가 관심 없는 분야라거나 한 번 정도 읽었던 책이라도 반드시 책장에 꽂아둔다. 이미 사들인 책을 선물로 받으면 책을 좋아하는 지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선물로 준다. 받을 사람이 없으면 책방이나 중고서점에 판다.

 

유명 저자의 친필 사인이 있는 책은 애서가에게는 아주 특별한 선물이다. 책이 처음 나올 때 출판사에서 여러 번 찍어 낸 인공 사인본은 제외다. 저자의 강연회나 사인회에 직접 가서 저자를 만나 사인을 받은 것이야말로 진짜 친필 사인본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을 고르다가 김용택 시인의 친필 사인이 있는 시집 『그 여자네 집』(창비, 1998년)을 샀다. 이런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매입되다니. 이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특별한 친필 사인본을 중고서점에 파는 책 주인의 심정이다. 중고서점에 가보면 판매자 실명을 공개해서 그가 판 책들을 따로 진열된 것을 볼 수 있다. 대구에 사는 서 아무개 씨가 판 책들 사이에서 김용택 시인의 시집이 있었다. 그냥 지나쳤으면 못 봤을 뻔했다.

 

시인의 사인 밑에 서 아무개 씨가 쓴 듯한 조그만 글씨가 적혀 있다. ‘김용택 사랑하기’ 아마도 서 아무개 씨는 십년 전에 시집을 꽤 읽은 평범한 독자였을 것이다. 서 아무개 씨는 시인의 친필 사인을 받았을 때만 해도 무척 행복했을 것이다. 시인을 향한 서 아무개 씨의 열렬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특별한 선물을 팔았을까? 서 아무개 씨는 책을 팔면서 시인의 친필 사인과 메시지가 적힌 시집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던 걸까? 십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이라면 이런 사소한 추억도 자연스럽게 잊힐 만하다.

 

 

 

 

 

 

 

 

 

 

 

 

 

 

 

 

 

아무튼, 운 좋게도 책방보다 손님이 많이 오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친필 사인 시집을 만났다.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서 아무개 씨, 고맙습니다. 제가 이 시집을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시인을 향한 사랑은 제가 이어갈께요. ‘내가 가진 것은 영원히 남의 것이요, 남에게 주어버린 것은 영원히 내 것이다.’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 사진과 경험담의 진위를 의심하는 서재 이웃들에게 밝히자면, 내 성은 최(崔) 씨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내 이름 석 자가 궁금하다면 이번에 나온 플로렌스 윌리엄스의 『가슴 이야기』(MID, 2014년)를 구매하거나 읽으면 된다. 책 뒤편에 보면 이 책의 프리뷰어로 활동한 분들의 실명이 있다. 거기에 내 이름이 있다. 따.. 딱히 이 책을 홍보하고 싶어서 추신을 덧붙인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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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4-12-26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 사인본을 중고서점에 파는거 저도 잘 이해 안돼요.
저도 사인본 책이 몇권 있는데 그 책들은 특별하거든요.
그리고 손으로 쓴 글과 함께 선물받은 책도....
그래서 아마도 저분은 여러권의 책을 싸다가 잘못 팔아버린 책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 너무나도 안타까워하고 있진 않을까하고 저 맘대로 상상해봅니다. ㅎㅎ

cyrus 2014-12-26 13:34   좋아요 0 | URL
그랬을거예요. 시집이 얇아서 친필 사인이 있는 줄 생각 못 했을겁니다. 저도 이 책 간수 잘 해야겠어요. ^^

책을사랑하는현맘 2014-12-26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겠네요!! ^^
서두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연애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길래 cyrus님의 연애 이야기가 나올까 기대했는데요~ㅎㅎ 담엔 그런 이야기도 기대할께요^^;;

cyrus 2014-12-26 13:36   좋아요 0 | URL
저도 이런 달콤씁쓸한 연애담을 풀고 싶은데 사랑의 달콤한 맛보다 쓴 맛만 여러 번 맛보네요. ^^;;

해피북 2014-12-26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대구 알라딘에서 ㅎ 저자의 친필 사인본 은 아니지만, 누군가 생일선물로 받고 메세지 까지 담긴 책을 내놓았더라구요 저야 덕분에 좋은 책 구입해서 좋았지만 왠지 씁슬한 기분이 ㅎ 그런데 그게 중고서적을 구입하는 재미도 되는거 같아요 ㅎ

cyrus 2014-12-26 13:39   좋아요 0 | URL
해피님도 대구에 거주하시는가보군요. 알라딘 대구점을 애용하는 서재 이웃 한 분을 드디어 만났네요. 저는 많으면 한 주에 한 번 꼴로 매장에 가요.

라파엘 2014-12-26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특별한 선물을 받으셨네요 ~ ㅎㅎ
그런데 알라딘 중고서점 중에서 판매자의 실명이 공개되는 곳도 있나보군요. 저는 신촌점만 다니는데, 판매자의 실명과 함께 책이 진열되어 있는 것은 보지 못한 것 같아서요 ^^;;

cyrus 2014-12-26 14:12   좋아요 0 | URL
대구점은 `○○동에 사는 ~님이 판 책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책장이 따로 있습니다. 저는 서울에 갈 때 자주 가는 매장이 종로점이예요. 가끔 신촌점, 건대점에 들리기도 하고요. 제가 기억하기에는 서울 매장에는 판매자 실명을 공개한 책장이 없던 것 같아요. 서울은 동네 매장이 많잖아요. ^^

stella.K 2014-12-2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그래서 저 책을 사 가지고 온 건가?
김용택 시인 글씨 참 멋지다. 저 책을 어찌 팔았을꼬.

그런데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보다.
이름은 아는데 성은 모르고.
학교 졸업했던가? 얼마 전 졸업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건 왜 또 안 알렸니? 아, 정말 못 산다. 뒤죽박죽이야. ㅠㅋ

cyrus 2014-12-26 13:46   좋아요 0 | URL
제가 신상 정보는 공개를 안 하는 편이라 잘 모르실꺼예요. 샐린저처럼 살고 싶어요. ㅎㅎㅎ

stella.K 2014-12-26 13:57   좋아요 0 | URL
ㅎㅎㅎ 샐린저...!!!
뭐 내가 그러는 것도 심각한 건 아니군.^^

2014-12-26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6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4-12-26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판매자의 이름을 공개하나요?

헤어진 옛 애인의 선물을 간직하는 남자,
제 부모님 댁에 아주 오래전 애인에게 받은 초콜릿 상자가 있어요.
직접 만들어서 예쁘게 포장한 상자죠.
아까워서 안 먹고 놔뒀던 게, 어느 구석에 박혀 있었던 모양인데,
결혼하고 몇 년 지난 후에 아내가 찾아내 추궁한 적이 있었어요.
시루스님 글 덕분에 그 때 생각이 나네요. ^^

cyrus 2014-12-26 21:37   좋아요 0 | URL
모든 판매자 이름을 공개하는 건 아니고요, 책을 수십 권 이상 파는 판매자 이름만 공개해서 책장에 따로 진열해요. 그 책장에 가면 ‘oo동에 사는 ~님이 판 책입니다’라는 카드가 붙여 있어요.

은빛님, 그 초콜릿을 오래 보관해놓고 안 먹었다면 상하지 않았나요? ㅎㅎㅎ 저는 초콜릿 상자만 보관한 줄 알았어요.

해피북 2014-12-26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과 교보문고 동시에 갈수있어 좋아하는곳 이예요ㅎㅎ 소문 기대할께요 감사합니다~~^^
 
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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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답니?”

 

마법 거울은 참 신기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의 얼굴을 자신의 몸으로 보여준다. 거울로 인하여 백설공주는 계모 왕비에게 살해될 위험에 처한다. 계모 왕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기보다 어쩌면 세상에서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참지 못하는 시기심이 많은 여자인지 모른다. 그래서 왕비는 매일 같이 거울에다 대고 누가 예쁘냐고 연신 묻는다. 거울이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라고 대답하길 원한다. 알고 보면 계모 왕비는 ‘답정녀’(답을 정해놓은 여자)의 원조이다. 그러니까 왕비 본인은 자신이 예쁘다는 착각에 빠졌다. 거울로부터 듣고 싶은 말을 미리 정해 두고 그 말을 듣기 위해 질문을 한다.

 

거울은 원본을 모방한다. 누구나 거울을 보면서 앨리스처럼 거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야릇한 충동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눈으로 본 거울상은 진짜도 아니고 영원하지도 않다. 우리는 현란하게 치장한 자신을 비춘 거울상에 일종의 도취를 느낀다. 계모 왕비처럼 거울을 통해 주관적인 '아름다움'을 스스로 판결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미화시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타자를 배제할 뿐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부정적인 사실을 은폐하고 '나쁜 것'으로 몰아세운다.

 

 


 Scene #2  서경식이 들여다본 ‘미술’ 거울들

 

서경식 선생은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펴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미술을 ‘거울’로 비유한다. ‘나는 무엇인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미술이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례를 시작한다. 과연 선생은 ‘미술’ 거울에서 무엇을 봤을까? 우리나라 미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을까? 일단 선생이 본 ‘미술’ 거울은 다음과 같다. 신경호, 정연두, 윤석남, 미희(나탈리 르무안), 홍성담, 송현숙은 지금도 전시회에서 볼 수 있는 ‘미술’ 거울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다간 화가 두 명,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과 월북 화가 이쾌대는 만든 지 오래된 ‘미술’ 거울이다.

 

그런데 선생이 보는 ‘미술’ 거울 중에 신윤복을 제외하면 나머진 우리에게 낯선 이름들이다. 심지어 우리는 이 ‘미술’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미술’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벨기에에 입양되어 지금도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한국계 화가 미희, 파독 간호사 출신의 재독 화가 송현숙 그리고 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넘어가서 남한 땅에서 잊힌 이쾌대. 이들은 우리와 같은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적이지 못한 미술로 배제되었다. 거울인데도 디자인이 조금 튄다는 이유만으로 거울들만 모아놓은 진열장에 놓이지 못한 채 하자품으로 분류되어 차가운 창고로 향하는 운명과 같다. 하자품 신세가 된 ‘미술’ 거울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 즉 한국적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이 직접 보고, 만져본 이 ‘미술’ 거울들을 ‘우리 미술’로 포함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들에 대한 대중의 괴리감을 없애기 위해 애초부터 이 책 제목을 ‘나의 우리 미술 순례’라고 하지 않았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더 넓은 차원의 의미가 내포된 ‘조선미술’이라고 사용한다. 원래 선생은 ‘우리’와 ‘미술’ 사이에 빗금을 넣어 ‘우리/미술’이라고 정하고 싶었다. 배타적인 자의식이 강화되는 ‘우리 미술’이라는 언어의 권위성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Scene #3  역사의 흉터를 비추는 ‘미술’ 거울들

 

 

 

 

 

신경호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초혼 1980」, 1980년 (왼쪽)

윤석남 「어머니 I : 열아홉 살」, 1993년 (오른쪽)

 

 

 

선생은 8개의 ‘미술’ 거울을 통해 질문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것은 곧 정체성을 되묻는 성찰의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 속에 포함된 진짜 ‘나’를 찾는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8개의 ‘미술’ 거울에서 우리가 보고 싶은 진짜 ‘나’의 정체성을 보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의 흉터가 보기 싫어 일부러 거울을 피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는 슬픈 역사의 생채기로 인한 흉터가 많다. 일제 강점기, 골육상잔의 비극으로 인한 남북 분열, 5월 18일 광주의 역사. 깊게 팬 역사의 흉터를 보는 것은 차마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외면하거나 잊어선 안 된다. 몸에 남은 흉터도 ‘우리’ 몸의 일부인 것처럼 우리에게 분열과 고통, 공포를 줬던 아픈 과거도 ‘우리’ 역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의 흉터를 외면한다. 반면 아름다운 역사만 보려고 하며 자랑하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만 비춰주는 왜곡된 ‘미술’ 거울만 들여다보면서 자아도취에 빠진다. 이런 ‘미술’ 거울들은 대상의 단점을 은근슬쩍 감추고, 장점만 부각해주는 계모 왕비의 마법 거울과 같다.

 

신경호, 윤석남, 미희, 송현숙은 역사의 흉터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화가들이다. 그들은 역사의 흉터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진짜 ‘미술’ 거울이다. 신경호는 광주 사람으로서 5.18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진실을 예술적으로 증언하고자 노력한다. 지금도 극우로부터 공격받고, 왜곡되는 가슴 아픈 역사를 예술을 통해 구출함으로써 잊고 여전히 역사 하나로 인해 분열된 ‘우리’의 본모습을 과감하게 보여준다. 윤석남은 위안부 문제에 ‘어머니’와 관련된 아련한 기억을 접목해 공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미희와 송현숙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다. 6261번째 해외 입양인인 미희는 자신의 처지를 ‘한국 경제성장의 산업폐기물’이라고 과격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 말 속에 고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세계의 투명 인간들, 디아스포라의 아픔이 서려 있다.

 

 


 Scene #4  우리가 ‘우리/미술’을 ‘우리 미술’로 부를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선생은 8개의 ‘미술’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기보다는 끊임없는 타자와 대화하는 시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일단 계모 왕비처럼 ‘미술’ 거울들 앞에서 질문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가 보고 싶고 익숙한 것들은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 대신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을 향해 물어본다. ‘거울아, 거울아!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선생의 미술 순례는 타자와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의 빗금을 쳐놓은 ‘우리 미술’의 환상을 의심한다.

 

과연 우리가 ‘우리/미술’을 ‘우리 미술’로 부를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일단 현실에 눈을 감아버리는 ‘우리’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자아도취에서 벗어나야 한다. 환상의 거울만 자꾸 들여다본다면 어떤 대상의 진실을 숨기는 데 급급하고 삐딱하게 반응한다. 사람들은 살면서 끊임없이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무엇을 보게 될까. 진실한 내면이 오롯이 남아있는 정체성일까 아니면 타자의 눈에 맞춘 거짓된 아름다움만 뽐내는 가짜 정체성일까. 진짜 나를 보았을 때, 한 점 부끄럼이 느껴져서 괴롭더라도 전자의 거울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 거울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마주 볼 수 있는 진실한 물건이다. 이것은 곧 우리나라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도 하다. 진실을 외면하고 환영에 가까운 아름다움만 보여주려는 미술은 계모 왕비처럼 착각에 빠진 대중만 늘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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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4-12-25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이 책 보고 있는 중인데 리뷰 잘 읽었습니다.
어렴풋하게 잡히던 것들이 cyrus님의 리뷰덕분에 더 명확해지네요.

cyrus 2014-12-26 00:14   좋아요 0 | URL
긴 글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서중인데 제 글이 의도치 않게 바람님에게 스포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바람돌이 2014-12-26 00:42   좋아요 0 | URL
지금 3분의 2쯤 읽었으니까 스포는 아니구요. ㅎㅎ

stella.K 2014-12-26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 책 벌써 읽었네.
그렇지 않아도 서평단 신청 왜 안하지 했는데.
난 그저께 도착해서 아직 시작 안하고 있어.
서경식이야 워낙...!

cyrus 2014-12-26 14:01   좋아요 0 | URL
신청하고 싶었는데 그 책에 신청자가 너무 많았어요. ㅎㅎㅎ 운 좋게도 지난주에 도서관 신간코너에 서경식 선생의 책이 있어서 읽게 되었어요.
 
가슴 이야기 - 내 딸과 딸의 딸들을 위한
플로렌스 윌리엄스 지음, 강석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Scene #1  가슴이 예뻐야 여자다

 

남자를 가슴으로 안아줄 여자
가끔은 가슴으로 울어줄 여자
순수한 가슴으로 말하는 말하는 여자
가슴이 예뻐야 여자
이런 내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왜 그렇게 몰라 진정한 매력을
이렇게(이렇게) 아름다운 내 가슴을

 

'춘자'라는 이름의 가수를 기억하시는가. 십 년 전에 데뷔한 이 여가수의 노래 제목이 특이하다. '가슴이 예뻐야 여자다.' 다소 선정적인 제목은 음흉한 호기심을 발동한다. 남자가 이런 말을 여자 앞에서 함부로 말했다간 성희롱에 가까운 실언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노래제목만 보고 볼륨 있는 가슴을 가진 여자를 찬양하는 '루키즘 송(lookism song)'으로 오해하지 마시길. '가슴'이란 단어를 '마음'으로 바꿔보라. 이 노래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딱 나왔다. 마음이 예뻐야 여자다.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비단같이 고와야 정말 여자지'의 옛노래와 메시지가 일치한다. 알고 보면 춘자의 노래는 루키즘을 풍자한다.

 

 

 

 

 

이성, 특히 여자를 볼 때 얼굴이 먼저냐 몸매가 먼저냐를 묻는다면, 누구나 선택의 갈림길에 설 수밖에 없다. 우선 여자는 뭐니 뭐니 해도 얼굴이 예뻐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착하기만 한 여자는 매력이 없다고 말한다. 에이, 뻥 치지 마시라. 말은 그렇게 해도 당신들의 눈은 제일 먼저 어디로 향하는지 다 알고 있다. 남자마다 개인의 차이가 있겠지만, 이성을 볼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몸매이다. 남자들의 '나쁜 눈'은 주로 가슴 부위로 향한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도 그렇다.

 

여자들은 가슴의 크기나 모양에 대해 고민을 한다. 어떻게 하면 성적인 매력을 가진 예쁜 가슴으로 보이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 지나가는 여자들의 가슴을 쳐다보는 것은 물론이고 거울 앞에 있는 빈약한 가슴을 보면서 한탄한다. 이런 강박적인 상태는 누군가에게 쉽게 얘기를 할 수가 없다. 더욱 못난이가 되어 버리고 내 가슴에 타인의 시선이 머무를 것 같은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괴로운 일이다. 그런가 하면 큰 가슴이 부끄러워 어깨를 움츠리고 다니는 여자들도 있다. 가슴이 큰 여자는 지적 수준이 떨어져 보인다는 얼토당토않은 가설을 믿는다. 남자와 여자들이 알고 있는 가슴에 대한 기준에는 여자의 욕구보단 다른 것들이 훨씬 더 많이 반영돼 있다.

 

여자의 큰 가슴은 남자들의 선망 대상이다. 남자들이 여성의 가슴 크기에 집착하는 근본적 이유는 본능적 욕구 때문이다. 진화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말한다. 남성은 여자의 가슴에서 가장 먼저 모성본능을 느끼고 모성애를 발견한다. 상대 여자가 건강하며 2세를 잘 키울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본능적인 욕구와 성적 매력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부위가 바로 여자의 가슴이라는 것이다. 『털 없는 원숭이』, 『벌거벗은 여자』를 쓴 데즈먼드 모리스는 여자의 가슴은 엉덩이의 복제품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여자 가슴 기원설은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을 만하다. 남자 과학자들은 여자 가슴을 좋아할 정도로 자신들의 시선에 맞추어 여자 가슴의 진화를 설명하려고 했다. 과연 여자 가슴은 오로지 남자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성적 노리개일까.

 

 


 Scene #2  젖가슴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착각

 

프리랜서 작가 플로렌스 윌리엄스는 젖가슴이 남자들을 위한 성적 부위로만 바라보는 학계의 시선을 반박한다. 그녀는 젖가슴을 남자들의 소유물이 아닌 여자 자신이 스스로 지켜야 할 신비스러운 신체 부위라고 항변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들은 가슴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젖가슴에 대한 남자의 커다란 착각. 없다, 다만 그저 만지고 싶은 것으로만 쳐다볼 뿐이다. 그렇다면 여자의 착각은? 가슴이 예쁘고 커야 남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 아니다. 아주 심각하면서도 불편한 진실을 알지 못한 채 대다수 여자들은 착각한다. 모유 수유가 아기의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

 

모유 수유는 아이 키우는 엄마들의 희망 사항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곧 엄마가 될 여자들 그리고 미래의 딸들이 모유가 무조건 좋다고 믿어서는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저자는 자신의 모유를 분석 의뢰를 했는데 실로 충격적인 결과가 나온다. 모유 속에 공장에서 나올법한 화학물질들이 섞여 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다고? 놀라지 마시라. 모유에 있는 성분을 공개하면 다음과 같다. DDT(환경운동가 레이첼 카슨『침묵의 봄』을 통해 사용금지를 주장했던 그 악명 높은 화학물질), 수은, 납, 벤젠, 비소, 페인트 시너, 화장품 첨가물, 로켓 연료, 살균제. 이것 말고도 더 있지만, 글이 길어질 수 있으니 더 이상 공개하지 않겠다. 이 정도만 봐도 이제 모유가 천연 완전식품이 아니라 인공 화학 식품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세기 동안 인류는 오염된 모유를 먹고 자랐을 것이다. 화학물질이 몸에 침투하면 신체적 변화를 초래한다. 몸에 남아있는 화학물질이 축적될수록 쉽게 체외로 배출되기가 어렵다. 환경호르몬에 의한 불임이 늘어난다. 아기가 태어나더라도 화학물질에 노출된다. 면역력이 제일 약한 아기들의 건강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성조숙증과 늦은 폐경기도 가슴 건강의 적신호다. 환경호르몬, 전자파, 영양과잉, 스트레스 등이 성조숙증에 영향을 미친다. 이 글을 읽고 있을 독자 중에 딸을 둔 부모라면 꼭 확인해보시길. 딸이 열두 살 이전에 초경을 한다면 건강을 의심해야 한다.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열여섯 살에 초경을 한 여자아이에 비해 50% 더 높다. 왜냐하면, 여성 신체를 발달해주는 에스트로겐이 너무 많으면 독성 물질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폐경기에 접어들면 팽팽했고 탄력 있는 젖가슴은 아래로 처진다. 여자의 대표적인 상징이 세월의 변화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여자 본인으로서는 무척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스러운 신체 현상이며 몸이 건강하다는 청신호다. 폐경기가 늦어져서 가슴이 팽팽하다면 유방암 위험 확률이 높다. 폐경기의 가슴은 젖샘과 같은 섬유조직이 얇아져 탄력이 없어진다. 가슴 속 젖샘조직의 비율을 조밀도라고 한데 아주 조밀할수록 유방암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안타깝게도 여자의 90%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나이 먹어도 가슴의 상태가 젊은 시절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좋다고 착각한다.

 

 


 Scene #3  젖가슴과 지구의 공통점

 

남자와 여자가 몰랐던 가슴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되면 가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이다. 가슴이 예뻐야 여자가 아니다. 이제 가슴이 튼튼해야 예쁜 여자다. 남자들이여, 가슴을 탐하고 싶은 본능은 버리지 못하더라도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최소한 가슴의 건강 정도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지 여자를 위한 일이 아니라 더 나아가 당신의 후손 건강에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여자들은 미용 목적으로 가슴에 관심을 가져도 좋다. 다만 가슴 확대 수술을 하고 싶다면 신중하게 고민을 하고 결정해야 한다. 과도한 수술 욕심으로 인해 당신의 아름다운 가슴이 부작용으로 망가진다. 또 가슴에 들어갈 실리콘의 화학물질이 모유에 섞일 수도 있다.

 

 

 

 

 

 

자궁이 여성성의 상징이자 생명이 탄생하는 태초의 우주라고 한다면, 가슴은 생명이 성장하게 만드는 영양분이 샘솟는 지구와 같다. 반원구로 이루어진 두 개의 젖가슴 형태를 합치면 완전한 구(球)의 모습이 된다. 인류는 젖가슴의 모유를 먹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유의 원류(原流)를 알지 못한다. 지구의 물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가슴은 지구이다. 무분별한 자연 파괴와 환경오염으로 지구에 이상이 생기면 인류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 젖가슴도 마찬가지다. 그저 성적 노리개로 함부로 범하거나 건강을 소홀히 한다면 튼튼한 생명이 태어날 수도, 자라날 수 없다. 아이들의 건강은 곧 우리 부모 세대에 달려 있다. 가슴을 제대로 알아야 사랑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다. 딸이 성조숙증에 고생하고, 불임까지 한다면 이 모든 최악의 상황이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딸의 잘못일까? 지구와 가슴의 중요성을 무시한 부모 세대도 책임이 있다. 언젠가 "가슴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못난 애비와 어미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라고 외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 MID 출판사 5기 프리뷰어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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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4-12-25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유수유가 좋다는 여러 연구 결과를 뒤집는 이야기네요 놀랐습니다ㅠㅠ하기야 우리가 마시는 우유두 예전같지 않다고하고 먹고마시는 모든것들에 화학성분 없는게 없으니 생각해볼 문제네요

cyrus 2014-12-25 16:19   좋아요 0 | URL
정말 이 책은 여성분들이 많이 읽어야 합니다. 환경과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나오는 용어가 나오고 설명이 길어져서 읽는 내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런 불편한 진실을 모른 채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유가 좋지 않다고 해서 분유를 권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분유회사가 자신의 이익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모유의 중요성을 왜곡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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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4-12-2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남경태 님이 작고하셨군요! 53세밖에 안됐는데...안타깝네요..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순오기 2014-12-24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젊은데... 안타까워요! ㅠ

무해한모리군 2014-12-24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젊으신 분이신데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쉽싸리 2014-12-25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가 진행한 `타박타박세계사` 가끔 듣곤 했는데요...이젠 추억으로 남겠네요...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 카렐 차페크 희곡 10대를 위한 책뽀 시리즈 4
카렐 차페크, 조현진 / 리잼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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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형 로봇은 인간과 어느 정도로 닮아야 할까. 위에 있는 사진을 보라. 얼핏 보아서는 그저 쌍둥이 같지만 두 사람(?) 중 하나는 로봇이다. 어느 쪽이 로봇일까. 사진 속 진짜 사람은 일본의 로봇전문가 이시구로 히로구시다. 그가 만든 로봇의 이름은 제미노이드(Geminoid)이다. '쌍둥이'를 뜻하는 어원 'gemin-'과 '인조인간'이라는 뜻의 'android'를 결합한 말이다. 실제로 이 로봇은 그의 얼굴 윤곽부터 피부색, 머리카락, 턱수염과 눈썹처럼 미묘한 부분까지 똑 닮았다. 키도 자신과 똑같이 재현했다고 한다.

 

시력이 큰 문제가 없는 이상, 우리는 이 사진 속에 로봇과 인간을 구분할 수 있다. 풀린 듯한 눈동자, 어색한 표정 같은 미세한 차이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을 닮은 기계를 보면서 두렵고 섬뜩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위화감으로 인한 호감도 하락을 로봇 공학자들은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고 부른다.

 

로봇에 대한 인간의 이미지는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 로봇, 이제는 아주 익숙해진 이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921년 구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희곡에서였다.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쓴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라는 희곡에서 처음 사용된 말이다. 체코어로 노동, 혹은 노역을 의미하는 'Robota'라는 단어에서 a자를 빼 만든 신조어다.

 

로숨은 인간과 똑같은 로봇을 처음으로 만든 발명가이자 해양생태학자다. 그는 직접 로봇을 만들어서 무신론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이때 만들어진 로봇은 인조인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로숨의 아들이 노동하는 로봇을 만들게 된다. 본격적으로 로봇 산업이 시작된 것이다. 로숨 부자는 작품에 등장하지 않고, 로봇 회사의 이름으로 언급될 뿐이다. 로숨 유니버설 로봇 회사의 사장인 해리 도민의 목표는 인간을 대신하는 값싼 기계 노동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로봇은 마치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다. 서막에서 로봇을 묘사하는 내용이 언급되는데 무표정한 얼굴에 눈동자는 한 곳만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것은 인간과 구별하기 위한 영혼 없는 기계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라디우스와 헬레나가 대화를 나누는 극중 장면 (70쪽)

 

 

 

희곡의 배경은 로봇이 노동자로서 인간의 지배를 받는 사회이다. 그러다가 점점 로봇은 노동을 통해 지능이 형성되고, 반항정신을 가지게 된다. 라디우스라는 이름의 로봇이 처음으로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몇몇 인물들은 점점 인간에게 반항하는 로봇을 경계하고 무서워한다. 그렇지만 도민은 로봇 생산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1막에서 로봇 생산을 중단하기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유일한 인물은 도민의 아내 헬레나다. 그녀는 처음부터 로봇이 인간처럼 정당한 대우를 받길 원한다. 로봇 생산을 중단하는 것만이 인간과 로봇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막에서 로봇에 의해 인간이 멸망하는 불행한 조짐을 느낄 수 있다. 로봇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도민과 로봇 회사에 소속된 일행들은 로봇 사업의 성공을 기념하는 향연을 펼친다. 도민의 다음 목표는 국적과 피부색, 언어가 다른 로봇을 만드는 공장을 세우는 것이다.

 

결국, 로봇은 인간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다. 인간 전복을 꾀하는 라디우스와 그가 이끄는 로봇들의 저항에 파괴된 도민의 로봇 회사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계급 갈등을 연상시킨다. 그렇다고 차페크가 이 희곡 작품을 통해 단지 맑시즘을 표방하려는 것은 아니다. 일단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 단계대로 피지배자, 노동자였던 로봇은 지배자 인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세상은 인간의 명령을 받지 않고 평등하게 일하는 로봇만 살아남았다. 그러나 로봇은 세상의 고아(Rabota)가 되고 만다. 자신들을 만들어 줄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로봇들은 유일한 생존자 알뀌스뜨에게 로봇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로봇과 인간의 싸움에서 과연 로봇이 최종 승자라고 볼 수 있을까? 과학기술에 대해 끝없는 욕망과 오만으로 인해 인간은 로봇에게 패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로봇은 인류의 시대를 종식함으로써 자신들의 복제품을 더 이상 만들어질 수가 없게 된다. 로봇와 인간, 이 둘 중 누구도 세상의 승자라고 단번에 정하기 어렵다. 승자는 없다. 이 작품의 결말은 인류가 자초한 과학의 암울한 비극을 예언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비록 희곡은 로봇이 득세하는 어두운 미래를 묘사하고 있지만, 차페크는 일말의 희망을 암시하면서 막을 내린다. 남자 로봇 쁘리무스와 여자 로봇 헬레나는 인간의 감정을 지니고 있다. 두 개의 로봇은 아담과 하와가 되어 폐허가 된 세상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랑과 평화의 부활을 알린다.  

  

지금도 과학자들은 인간형 로봇을 끊임없이 개발한다. 로봇이 인류의 미래에 '대체 인간'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짐을 들어 나르는 일꾼이 된다거나 하는 잡무부터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준다거나 하는 기대다. 물론 군사적인 목적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형 로봇이 개발되면 개발될수록, 이는 묘한 딜레마를 불러일으킨다. 로봇이 너무 인간과 닮게 되면 사람들은 정체성에 도전받는 느낌이 들게 된다. 지금은 가벼운 조크로 여길 수도 있지만 기계가 인간처럼 느껴지고, 인간이 로봇으로 오해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도 있다. 나는 차페크의 결말이 너무 안이하게 끝났다는 느낌이 든다. 희곡 작품을 읽는 독자 혹은 무대 공연을 본 관객들에게 또 다른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열린 결말 같다. 감정을 가진 로봇은 인간에 의해 파괴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인간의 자리를 대신한 로봇의 후예들은 휴브리스(Hubris)의 비극을 피할 수 있을까.

 

 

 

 

※ 체코어 Robota는 ‘노예’, ‘노역’ 이외에도 이리저리 떠돌면서 갈 곳 없는 고아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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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4-12-25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로봇 스스로는 인간한테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또한 로봇인간으로 진화해나가리라는 것은 생명의 진화사를 살펴보면 필연적일 것 같습니다. 인간과 로봇은 공진화 혹은 융합진화해갈 것 같아요. 인간성, 인류의 도덕과 윤리 개념도 인간 의식의 확장/진화와 함께 진화하리라고 봅니다. 인간과 로봇의 미래를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네요.

qualia 2014-12-25 11:21   좋아요 0 | URL
‘로그인’ 상태에서 위 댓글을 써서 올렸는데, ‘로그아웃’ 상태로 입력이 되더군요. 제가 댓글 작성할 때, 알라딘에서 설정한 로그인 시간을 초과했나봅니다. 그래서 작성자가 익명으로 표기되더군요. 그래서 다시 로그인해 익명 처리된 댓글을 지우고, 댓글을 새로 올렸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cyrus 2014-12-25 16:26   좋아요 0 | URL
qualia님, 댓글 감사합니다. 저는 이런 의견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생각이 충분히 반박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니까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카렐 차페크 평전>도 같이 읽었어요. 그 책에 차페크의 작품을 해설한 내용이 있습니다. 실제로 차페크는 로봇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시선이야말로 작품을 제대로 읽지 못한 사람의 해석이라고 여길 정도로 작품 결말에 드러난 자신의 희망을 믿었다고 합니다. qualia님의 의견처럼 인간과 로봇의 공진화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제가 글에서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미래를 비관적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낙관적인 미래가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