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만남과 헤어짐의 시간을 마주한다. 그 기간이 길든 짧든, 누구나 한 번쯤은 환희와 고통을 경험하곤 한다.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는 평범하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연애이야기 하나씩을 간직한다. 어떠한 경험이었든 간에, 시간이 지난 후에 바라보는 자신의 연애담은 액자 속 빛바랜 사진처럼 아름답게 남는다.
이별을 대하는 방식은 각자가 다 다르다. 어떤 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옛 연인을 자신의 삶에서 삭제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끝끝내 버리지 못하고 붙잡으려 한다. 하나의 연애가 끝나면, 실연의 상처는 깊어지고 상처와 새로운 사랑의 갈림길에서 잠들지 못하는 날이 늘어난다. 그뿐만 아니다. 이별의 고통은 헤어진 연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로까지 번지게 된다.
옛 연인이 준 선물을 간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직 애인을 사귀어 보지 못해서 이런 경험을 겪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수집벽 있는 나라면 옛 연인이 준 선물을 쉽게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그 선물에 잠깐 눈길만 줘도 옛 연인과의 소중한 추억이 살며시 떠오른다면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다.
물건 집착은 상대방이 주는 사소한 선물마저도 버리지 못한다. 특히 책은 그렇다. 비록 내가 관심 없는 분야라거나 한 번 정도 읽었던 책이라도 반드시 책장에 꽂아둔다. 이미 사들인 책을 선물로 받으면 책을 좋아하는 지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선물로 준다. 받을 사람이 없으면 책방이나 중고서점에 판다.
유명 저자의 친필 사인이 있는 책은 애서가에게는 아주 특별한 선물이다. 책이 처음 나올 때 출판사에서 여러 번 찍어 낸 인공 사인본은 제외다. 저자의 강연회나 사인회에 직접 가서 저자를 만나 사인을 받은 것이야말로 진짜 친필 사인본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을 고르다가 김용택 시인의 친필 사인이 있는 시집 『그 여자네 집』(창비, 1998년)을 샀다. 이런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매입되다니. 이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특별한 친필 사인본을 중고서점에 파는 책 주인의 심정이다. 중고서점에 가보면 판매자 실명을 공개해서 그가 판 책들을 따로 진열된 것을 볼 수 있다. 대구에 사는 서 아무개 씨가 판 책들 사이에서 김용택 시인의 시집이 있었다. 그냥 지나쳤으면 못 봤을 뻔했다.
시인의 사인 밑에 서 아무개 씨가 쓴 듯한 조그만 글씨가 적혀 있다. ‘김용택 사랑하기’ 아마도 서 아무개 씨는 십년 전에 시집을 꽤 읽은 평범한 독자였을 것이다. 서 아무개 씨는 시인의 친필 사인을 받았을 때만 해도 무척 행복했을 것이다. 시인을 향한 서 아무개 씨의 열렬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특별한 선물을 팔았을까? 서 아무개 씨는 책을 팔면서 시인의 친필 사인과 메시지가 적힌 시집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던 걸까? 십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이라면 이런 사소한 추억도 자연스럽게 잊힐 만하다.
아무튼, 운 좋게도 책방보다 손님이 많이 오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친필 사인 시집을 만났다.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서 아무개 씨, 고맙습니다. 제가 이 시집을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시인을 향한 사랑은 제가 이어갈께요. ‘내가 가진 것은 영원히 남의 것이요, 남에게 주어버린 것은 영원히 내 것이다.’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 사진과 경험담의 진위를 의심하는 서재 이웃들에게 밝히자면, 내 성은 최(崔) 씨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내 이름 석 자가 궁금하다면 이번에 나온 플로렌스 윌리엄스의 『가슴 이야기』(MID, 2014년)를 구매하거나 읽으면 된다. 책 뒤편에 보면 이 책의 프리뷰어로 활동한 분들의 실명이 있다. 거기에 내 이름이 있다. 따.. 딱히 이 책을 홍보하고 싶어서 추신을 덧붙인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