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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 카렐 차페크 희곡 ㅣ 10대를 위한 책뽀 시리즈 4
카렐 차페크, 조현진 / 리잼 / 2010년 10월
평점 :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1223/pimg_7365531661123657.png)
인간형 로봇은 인간과 어느 정도로 닮아야 할까. 위에 있는 사진을 보라. 얼핏 보아서는 그저 쌍둥이 같지만 두 사람(?) 중 하나는 로봇이다. 어느 쪽이 로봇일까. 사진 속 진짜 사람은 일본의 로봇전문가 이시구로 히로구시다. 그가 만든 로봇의 이름은 제미노이드(Geminoid)이다. '쌍둥이'를 뜻하는 어원 'gemin-'과 '인조인간'이라는 뜻의 'android'를 결합한 말이다. 실제로 이 로봇은 그의 얼굴 윤곽부터 피부색, 머리카락, 턱수염과 눈썹처럼 미묘한 부분까지 똑 닮았다. 키도 자신과 똑같이 재현했다고 한다.
시력이 큰 문제가 없는 이상, 우리는 이 사진 속에 로봇과 인간을 구분할 수 있다. 풀린 듯한 눈동자, 어색한 표정 같은 미세한 차이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을 닮은 기계를 보면서 두렵고 섬뜩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위화감으로 인한 호감도 하락을 로봇 공학자들은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고 부른다.
로봇에 대한 인간의 이미지는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 로봇, 이제는 아주 익숙해진 이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921년 구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희곡에서였다.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쓴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라는 희곡에서 처음 사용된 말이다. 체코어로 노동, 혹은 노역을 의미하는 'Robota'라는 단어에서 a자를 빼 만든 신조어다.
로숨은 인간과 똑같은 로봇을 처음으로 만든 발명가이자 해양생태학자다. 그는 직접 로봇을 만들어서 무신론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이때 만들어진 로봇은 인조인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로숨의 아들이 노동하는 로봇을 만들게 된다. 본격적으로 로봇 산업이 시작된 것이다. 로숨 부자는 작품에 등장하지 않고, 로봇 회사의 이름으로 언급될 뿐이다. 로숨 유니버설 로봇 회사의 사장인 해리 도민의 목표는 인간을 대신하는 값싼 기계 노동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로봇은 마치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다. 서막에서 로봇을 묘사하는 내용이 언급되는데 무표정한 얼굴에 눈동자는 한 곳만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것은 인간과 구별하기 위한 영혼 없는 기계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1223/pimg_7365531661123658.jpg)
라디우스와 헬레나가 대화를 나누는 극중 장면 (70쪽)
희곡의 배경은 로봇이 노동자로서 인간의 지배를 받는 사회이다. 그러다가 점점 로봇은 노동을 통해 지능이 형성되고, 반항정신을 가지게 된다. 라디우스라는 이름의 로봇이 처음으로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몇몇 인물들은 점점 인간에게 반항하는 로봇을 경계하고 무서워한다. 그렇지만 도민은 로봇 생산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1막에서 로봇 생산을 중단하기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유일한 인물은 도민의 아내 헬레나다. 그녀는 처음부터 로봇이 인간처럼 정당한 대우를 받길 원한다. 로봇 생산을 중단하는 것만이 인간과 로봇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막에서 로봇에 의해 인간이 멸망하는 불행한 조짐을 느낄 수 있다. 로봇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도민과 로봇 회사에 소속된 일행들은 로봇 사업의 성공을 기념하는 향연을 펼친다. 도민의 다음 목표는 국적과 피부색, 언어가 다른 로봇을 만드는 공장을 세우는 것이다.
결국, 로봇은 인간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다. 인간 전복을 꾀하는 라디우스와 그가 이끄는 로봇들의 저항에 파괴된 도민의 로봇 회사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계급 갈등을 연상시킨다. 그렇다고 차페크가 이 희곡 작품을 통해 단지 맑시즘을 표방하려는 것은 아니다. 일단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 단계대로 피지배자, 노동자였던 로봇은 지배자 인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세상은 인간의 명령을 받지 않고 평등하게 일하는 로봇만 살아남았다. 그러나 로봇은 세상의 고아(Rabota)가 되고 만다. 자신들을 만들어 줄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로봇들은 유일한 생존자 알뀌스뜨에게 로봇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로봇과 인간의 싸움에서 과연 로봇이 최종 승자라고 볼 수 있을까? 과학기술에 대해 끝없는 욕망과 오만으로 인해 인간은 로봇에게 패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로봇은 인류의 시대를 종식함으로써 자신들의 복제품을 더 이상 만들어질 수가 없게 된다. 로봇와 인간, 이 둘 중 누구도 세상의 승자라고 단번에 정하기 어렵다. 승자는 없다. 이 작품의 결말은 인류가 자초한 과학의 암울한 비극을 예언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비록 희곡은 로봇이 득세하는 어두운 미래를 묘사하고 있지만, 차페크는 일말의 희망을 암시하면서 막을 내린다. 남자 로봇 쁘리무스와 여자 로봇 헬레나는 인간의 감정을 지니고 있다. 두 개의 로봇은 아담과 하와가 되어 폐허가 된 세상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랑과 평화의 부활을 알린다.
지금도 과학자들은 인간형 로봇을 끊임없이 개발한다. 로봇이 인류의 미래에 '대체 인간'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짐을 들어 나르는 일꾼이 된다거나 하는 잡무부터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준다거나 하는 기대다. 물론 군사적인 목적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형 로봇이 개발되면 개발될수록, 이는 묘한 딜레마를 불러일으킨다. 로봇이 너무 인간과 닮게 되면 사람들은 정체성에 도전받는 느낌이 들게 된다. 지금은 가벼운 조크로 여길 수도 있지만 기계가 인간처럼 느껴지고, 인간이 로봇으로 오해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도 있다. 나는 차페크의 결말이 너무 안이하게 끝났다는 느낌이 든다. 희곡 작품을 읽는 독자 혹은 무대 공연을 본 관객들에게 또 다른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열린 결말 같다. 감정을 가진 로봇은 인간에 의해 파괴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인간의 자리를 대신한 로봇의 후예들은 휴브리스(Hubris)의 비극을 피할 수 있을까.
※ 체코어 Robota는 ‘노예’, ‘노역’ 이외에도 이리저리 떠돌면서 갈 곳 없는 고아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