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 - 서양 좌파가 말하는 한국 정치
다니엘 튜더 지음, 송정화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 새벽의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중략)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유신정치의 서슬 퍼런 폭압에 맞섰던 젊은 김지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숨죽여 흐느끼며’ 노래했다. 정치적 폭압의 모진 세월을 헤치며 살아온 민중들은 시인의 노래에 응답하여 ‘민주주의여 만세’를 절절하게 부르짖었다. 시인의 시구에서처럼 돌을 던지면 최루탄을 막는 독재정권은 이젠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자신의 애송시로 ‘타는 목마름으로’를 소개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법조인들도 김지하의 시를 좋아했다. 우리는 이제 민주주의를 기념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민주주의가 그 형체도 없이 갈가리 찢겨 나가며, 다수 국민이 길게는 5년에서 짧게는 4년에 한 번씩 표 찍는 기계로 전락해 버린 오늘, 우리는 그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마음껏 쓰며 부른다. 가소롭지만, 일부 정치인들 그리고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시인마저도 80년대의 민주주의를 기억하는 척하고 있다. 그들의 머리는 민주주의를 잊은 지 오래되었다.

 

국민에게는 민주정치의 꽃이자 축제의 상징인 선거라는 말 자체가 그다지 달갑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매번 선거 때만 되면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공약만 내세우는 정치인이 썩 믿음직스럽지 않다. 가뜩이나 비좁은 땅덩어리에서 지역감정 심화에 따른 갈등이 더욱 굳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엄연한 진실이고 보면 나라가 망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는 우리 국민은 참 딱한 처지에 놓여있다.

 

정말 큰 일이다. 대통령은 아직도 국민의 불만과 걱정을 보지 못하고 있고, 그 주변 인물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당리당략만 있을 뿐 국가 경영을 위한 비전이나 책략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가 없다. 사회 각 분야의 이해와 갈등을 조정하여 국민 통합을 도출해 내기는커녕 국론을 분열시키고 정상적인 국정 운영의 발목을 잡을 뿐이다. 정작 새정치연합은 민심을 사로잡을만한 정치적 철학을 제대로 드러내 보지 못했으면서 민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새누리당을 심판하겠다고 큰소리만 칠뿐이다. 개똥 묻은 당이 소똥 묻은 당에 짖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서울 특파원 출신 영국 기자가 보는 한국 정치는 정치적 의제를 외면한 채 어느 사람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집단 이기주의’의 현장이다. 보수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정치제도와 결합해왔던 것처럼 경제의 영역에서도 자신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기업과의 유착도 마다치 않았다. 반면에 진보는 여전히 80년대를 잊지 못하고 있다. 정계에 진출한 진보 인사들은 양복을 입은 운동권 세력이다. 합리적인 진보 의제를 내세운 적이 없어서 국민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다. 이러한 모습은 스스로 존립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회가 무능하다고 해서 국민 가운데 ‘무정치’의 현실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민주주의와 동떨어진 정치부재의 상황이 지속할수록 일상생활에서 피부로 와 닫지도 않는 정치 불감증이 만연해진다. 정치적 냉소주의와 무관심은 원천적으로 정치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이는 민의를 바탕으로 국정을 이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데 심각함이 있다. 유권자를 끌어당기기 위한 선심성 공약이나 정책 제시에 급급한 수준이다. 영국 기자는 국정 비전과 철학이 없는 바람잡이식 한국 정치를 ‘다이어트 콜라 민주주의’라고 표현한다. 열량이 적은 다이어트 콜라를 마셔도 살은 빠지지 않는다. 그냥 달기만 한 콜라일 뿐이다. 다이어트 콜라 또한 일정량 이상 마시게 되면 건강이 나빠진다. 국민은 선거철만 되면 기승을 부리는 ‘다이어트 콜란 민주주의’에 매번 속는다. 영양가 없는 공약은 국민의 목마름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영국 기자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분석하면서 무조건 정치인에게만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정치적 냉소주의를 극복하지 못해서 ‘익숙한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국민의 태도에서도 잘못한 점을 지적한다. 그는 ‘토크 콘서트’ 인기를 부정적으로 본다. ‘문제’를 열심히 지적만 할 뿐, ‘해결책’을 마땅히 제시하지 못하는 토크 콘서트는 정치적 냉소주의를 사라지게 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정치 문제를 전적으로 특정 정치인이 해결하기를 바라는 갈망이 클수록 그것에 대한 실망도 커진다. 토크 콘서트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고전적인 의미의 정당정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도 못한 우리나라의 경우 국민의 정치 냉소주의를 더욱 부채질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영국 기자는 독자에게 제안한다. 정치 이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술집에서 지인들과 토론을 해보라고 권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주겠다는 선심성 공약보다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어떤 고통이 따르고, 어떻게 그 고통을 분담할 것인가를 솔직하게 호소하고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자세로 나와야 한다. 이런 ‘성의와 진심이 있는 민주주의’에 우리는 모두 목말라 있다. 한국 정치를 요목조목 지적한 영국 기자의 신랄한 글을 읽으니까 그가 운영하는 맥줏집에서 파는 수제 맥주를 마신 기분이 든다. 이렇게 속 시원한 글은 오랜만에 본다. 그렇지만 통쾌한 기분의 여운은 오래가지 않는다. 맥주를 원샷한 뒤에 입안의 혀에 떨떠름한 끝 맛이 남는 것처럼 책을 덮고 나면 ‘익숙한 절망’으로 가득한 정치 현실의 쓴맛이 느껴진다. 이 쓴맛을 지우려면 절망에 무기력한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블로그에 남겼던 말이 떠오른다.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한다. ‘권력’이라는 단어가 있는 자리에 ‘민주주의’를 넣어 보자.

 

 

 

 

※ 15쪽에 조슈아 쿨란트칙이 쓴 책 《후퇴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 책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동녘)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저자명은 ‘조슈아 컬랜칙’으로 표기되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5-07-30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우리나라가 그렇게 작은 나라가 아닌 것 같아.
요즘엔 그런 생각이 든다.
말에 의하면 세계지도에서 그 나라를 크게 잡느냐 작게 잡느냐도
그 나라의 국력이나 위상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대.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아직 위상이 그리 크지 못한데다
나라간의 알력도 있으니 크게 그릴 수가 없는 거지.
우리나라 작은 나라 아냐. 목포에서 만재도 들어가는대도 5시간이 걸린다는데 뭐.ㅋㅋ

요즘 난 어셈블리란 드리마를 보고 있는데 재밌어.
너도 시간되면 함 봐봐.
정도전을 집필한 작가가 쓴 작품인데 진상필이란 사람이
실제로 국회에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인물들이
잘 녹아들었단 생각이 든다. 모쪼록 카타르시스라도 느끼게 해 주길 기대하고 있다.^^

cyrus 2015-07-30 20:35   좋아요 0 | URL
이상하게 저는 드라마나 영화를 잘 안 봐요. 뉴스, 예능, 스포츠는 많이 보는데. ^^

페크pek0501 2015-07-30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읽어 보는 시입니다.

저자가 한국인이 아니어서 한국에 대해, 한국인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것들을 잘 관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이나 한국 정치는 우리가 보는 것과 많이 다를 것 같아요. 그래서 박노자 님이나 홍세화 님처럼 외국 생활을 많이 한 분들의 책에서 객관성을 기대하게 되나 봅니다.

cyrus 2015-07-30 20:36   좋아요 0 | URL
저는 외국인이 보는 관점을 무조건 옹호하지 않습니다. 가끔 그들도 우리나라 사회의 이해 관계를 모르고, 잘못 평가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오쌩 2015-08-01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글보면서
황현산교수가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 `가 표절이라고 주장한게 생각나네요.

cyrus 2015-08-01 20:08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시가 발표했던 시기가 민주화의 열기가 강했던 터라 확실히 제기를 못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이 중요한 논의가 신경숙 사태와 함께 조용히 묻히고 말았어요.
 
엄마의 탄생 - 대한민국에서 엄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20
안미선.김보성.김향수 지음 / 오월의봄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cene #1 아는 엄마 얘기

 

여기 내가 아는 엄마가 있다. 에바라는 이름의 여자는 한때 세계 여행을 즐기며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고단함에 못 이겨 아들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엄마와의 관계가 소원해질수록 아들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아들은 반항적인 학생으로 자라고 엄마를, 가족을,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범죄를 저지르고 만다. 이 불행한 모녀 이야기는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소설 《케빈에 대하여》의 줄거리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설은 에바가 과연 일반적인 모성애가 부족했느냐고, 그러한 책임이 온전히 에바 개인에게 있는 것이냐고 독자에게 도발적으로 질문한다. 누군가는 에바의 차가운 심장 속에 반항적인 아들로 자라는 불행의 씨앗이 생겼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에바의 모습은 소설 속에만 나올 법한 특이한 장면이 아니다. 산모에게 갑자기 찾아오는 산후우울증 상태와 비슷하다. 산후우울증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호르몬 변화가 심해지면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 아기는 출생 후 엄마의 따뜻한 보살핌과 양육을 받지 못해서 행복하지 못하며 엄마의 우울한 상태는 자녀의 인지발달에도 영향을 준다.  

 

에바의 경우는 자극적인 기사를 내놓는 기자들이 좋아하는 먹잇감이 되기 쉽다. 산후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엄마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뉴스는 산후우울증을 아이를 극단적으로 위협하는 정신병으로 전달한다. 이런 뉴스를 접한 아빠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엄마가 미쳤군, 어떻게 엄마가 아이를 죽일 수 있지?” 아빠는 엄마의 극단적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 아이를 오랫동안 키워 본 엄마들은 충분히 이해한다. 자신도 아이가 너무 싫어서 죽이고 싶은 순간적 충동이 있었음을. 계속 울고 떼쓰는 아이를 혼자 달래다 보면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아이에게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Scene #2  오늘도 엄마는 외롭게 싸운다

 

여성이 엄마가 되는 순간, 혼자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임신은 축복이지만 출산과 육아는 현실이다. 출산의 기쁨도 잠시, 자녀 양육문제는 가장 무거운 현실의 짐이 된다. 산후조리원은 출산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긴장하고 육체적으로 지친 산모에게 ‘엄마’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역할을 알려준다. 산모와 아기를 돌보는 많은 산후조리원은 상당히 과학적인 시어머니 혹은 친정어머니가 된다. 산후조리를 위한 돌봄 서비스를 하고, 아기를 돌보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모유 수유가 아기의 건강에 좋다는 산후조리원의 말에 산모는 유두가 아프더라도 꾹 참고 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당연히 ‘엄마’니까 아기를 위해서 모유 수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유 수유를 하지 않는 엄마는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시선을 받는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는 결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순간 밤잠을 편히 자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아이가 시도 때도 없이 엄마를 찾아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이 시작된다.

 

산후조리원을 나와도 엄마 주변에는 자꾸 ‘좋은 엄마’라는 꼬리표를 달도록 부추기는 것들이 많다. 침대는, 아니 모성은 과학이라는 점을 육아 관련 업체들은 홍보한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로 키우고 싶은 엄마 마음에 연령별로 분화된 고가의 유아용품들을 구입한다. 모성애가 뛰어난 엄마가 되려면 이 정도 소비를 감수해야 한다. 사랑뿐만 아니라 모성도 돈으로 사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엄마는 자본주의라는 사각의 링 위에서 한쪽에는 ‘경쟁’이라는 글러브를, 다른 쪽에는 ‘모성’이라는 글러브를 끼고 외롭게 싸운다. 만약 이 싸움에서 진다면, ‘좋은 엄마’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럴수록 육아에 대한 강박적인 마음에 글러브를 바짝 조인다. 불행하게도 ‘엄마 노릇’하는 여성이 서있는 코너 옆에는 든든한 트레이너가 없다.

 

맞벌이 여성일수록 고민거리는 더 커진다. 취업 전선에 뛰어들고 싶어도 아이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는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선택은 세 가지 중 하나. 친정이나 시댁에 맡기거나 육아 도우미의 손을 빌리는 것. 셋 중 하나만 찍으면 되지만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일단 어떤 선택이든 비용이 드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어린이집 폭행 사건이 큰 사회문제로 주목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맞벌이를 하게 되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다.

 

엄마는 늘 피곤하다. 전쟁 같은 삶을 산다. 한 남자의 아내로, 한 아이의 엄마 그리고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칭얼대며 엄마를 찾는 아이를 돌본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반복적 가사노동에 하루를 저당 잡혀버린다. 아무리 가사노동도 어엿한 경제활동이라고 울부짖어도 여전히 현실 속에서는 세 가지 엄마가 구분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 너머의 미래를 그릴 수 없게 되고 ‘나’라는 고유한 삶의 윤곽이 사라진 지 오래다.

 

 

 

 Scene #3  Mamma mia! 미아가 된 대한민국 엄마들

 

6년 전에 100만 부를 훌쩍 넘긴 신경숙《엄마를 부탁해》의 엄마는 가족에 대한 희생과 봉사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자식을 위해 평생 희생하고 영원한 내리사랑을 주는 어머니의 사랑은 어릴 적 우상이었던 슈퍼맨보다 더 강하다. 하지만 《엄마를 부탁해》 속의 엄마와 같은 인물은 거의 없다. 모성애와 무조건적 헌신의 자세로 포장된 엄마는 없다. 안타깝지만 《케빈에 대하여》 속의 엄마는 있다. 앞으로도 많아질 것이다. 사회가 소유한 모성의 강제성은 역설적이게도 아이와 엄마 간의 관계를 단절한다.

 

 

           

 

 

《엄마의 탄생》은 읽으면서 나는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Mamma mia! 세상에! 대한민국 엄마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구나. Mamma mia! now I really know(이젠 정말 알겠어). 엄마는 미아(迷兒)다. 그녀는 외롭다. 가족은 있으나 출산과 육아를 하면서 견뎌야 할 시간을 알아주는 이가 없으니까. 집에 있어도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든다. 모성애라는 대의명분만으로 참으면서 이겨내기가 힘들다. 방황하는 엄마가 가는 곳은 쇼핑몰과 키즈 카페. 그러나 이곳으로 들어오는 순간 아이와 엄마가 놀 수 있는 시간은 소비가 된다. 편하게 쉴 곳이 없다. 엄마는 아이를 안은 채 오랫동안 헤맨다.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공간을 찾지 못한 채.

 

적극적 양육자로서 아빠의 역할이 커지는 요즘, 아이들에게 친근한 슈퍼맨이 되고 싶은 아빠들이 많아져서 좋다. 엄마가 혼자 짊어진 짐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다. 그렇지만, 보육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 모성을 ‘안전빵’으로 생각하는 것은 엄마를 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그것은 엄마에게 보육을 전적으로 맡기는 꼴이다. 엄마에게 보육을 부탁해선 안 된다. 모성은 강하다? 이것은 오해의 산물이다. 모성은 엄마가 아이를 키우면서 늘 심장 속에 새겨야 할 책임이라는 단어가 될 수 없다.

 

시장논리 속에서 존재하는 모성은 여성이 처한 사회적 현실을 가리고 포장할 뿐만 아니라, 아이를 돋보이도록 만드는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사회는 육아 지침서가 말하는 현명한 엄마, 아이를 똑똑하게 키우는 세련된 엄마,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하는 엄마가 되라고 말한다. 여성 독자들이여, 진짜 엄마가 되고 싶은 각오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사회가 강요하는 ‘엄마 노릇’을 하고 싶은가.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5-02-02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얼마전에..국내 영화 현기증˝ 을 봤어요.
이거야..말로..미치고 팔짝 뛰겠네..하는
심정을..그대로..담은..영화.엄마의.영화.
라고...봐도 후회 안하실 거라고..ㅎㅎ

cyrus 2015-02-03 17:14   좋아요 1 | URL
장소님이 추천한 영화가 보고 싶군요. <엄마의 탄생>이라는 책도 읽을수록 미치고 팔짝 뜁니다. 정말 대한민국 엄마들이 안쓰러워요. 젊은 세대가 결혼을 기피하는 이유가 다 있더라고요.

[그장소] 2015-02-03 19:44   좋아요 0 | URL
음..엄마의탄생.기억해두고 읽어볼게요.
근데..뭐 저도 그에 만만치 않아서.ㅎㅎㅎ
오늘 기사를 보니 남성들 엄마에서 아내로 가정의 주된일을 그대로 갈아타기 할 뿐이라는 인식이강하다.는 설문이 눈길을 잡아 끌었어요.새삼스럽게...하는 심정으로..피식 웃음이 났고요.

감은빛 2015-02-03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 3명 중 2명이 아는 사람이네요.
친한 건 아니고, 말 그대로 아는 사람이요.
출판사도 저자도 훌륭하네요.
이 리뷰를 읽고나서야, 저 책이 집안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네요.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cyrus 2015-02-03 17:18   좋아요 1 | URL
아이를 키우는 은빛님은 이 글을 어떻게 보실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 책을 최근에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책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엄마가 나오는 픽션을 그렇게 많이 찾고 읽었던 사회가 진짜 엄마가 나오는 논픽션을 외면하는 상황이 이상합니다.

감은빛 2015-02-03 17:34   좋아요 0 | URL
그 엄마가 나오는 픽션은 워낙 유명한 분이 썼고,
매우 영향력있는 출판사에서 낸 책이죠.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 같아요.

시루스님의 이 글에 대한 느낌이 궁금하신가요?
글쎄요. 이 책을 읽지 않아서 그런지,
시루스님이 왜 놀랐는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아요.
이 사회에서 아직까지 육아의 부담이 여성에거 쏠려있기는 하지만,
최근 많이 바뀌는 추세이고,
육아를 부분적으로(혹은 같이) 분담하는 아빠들에게도
우울증이나 어려움은 늘 따라다니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다만 마을에서 함께 아이를 키운다는 개념에 조금 희망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내와 제가 마을 활동하면서 자주 데리고다닌 탓에
우리 아이들은 동네에서 아주 유명해졌거든요.
동네 삼촌들, 이모들과 함께 자라는 아이들은
학원 뺑뺑이만 돌거나, 집에서 친인척(혹은 돌보미)와만 보내는 아이들과는
여러모로 다를 거라고 느껴요.
그게 전적으로 긍정적일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다름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cyrus 2015-02-03 17:40   좋아요 1 | URL
제가 댓글을 잘못 적었어요. 제 글이 아니라 책입니다. 제가 아직 미혼이라서 실제 육아에 대해서 전무합니다. 벌써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이 있긴 한데 그 친구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겪는 고충을 제대로 듣지 못했어요. 그리고 제가 충격적으로 느낀 것이 산후우울증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만 해도 산후우울증이 산모가 겪는 심각한 병인 줄 몰랐어요.

단발머리 2015-02-06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성이 아주 많이, 턱없이 부족한 엄마로서~~ 아주 잘 읽었습니다.
결국에는 엄마의 자리를 찾는 것도 엄마 스스로의 일일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남편이나 아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얻으려하는 시도들은, 사실 사회와 주변의 시선 같은게 많이 작용하죠.
하지만, 나 스스로를 `00엄마`가 아니라, `000`으로 설정하는 건, 내가 해야하는 일이죠. 아이 역시 스스로의 삶을 찾아떠날테니까요.

전 다른 일은 안 하고 살림만 하는, 살림을 못하지만 살림만 하는 전업주부인데, 항상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나는 누구인가... ^^

cyrus 2015-02-06 14:49   좋아요 0 | URL
저는 <엄마의 탄생>을 읽으면서 여성이 엄마가 되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본능을 자식을 키우는 데 꼭 필요한 자질로 생각하면 육아를 담당하는 엄마 입장에서는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시선에 정신적으로 부담이 되어 스트레스를 받게 될 수 있고요. 알고 보면 별 것 아닌데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엄마를 탓하잖아요. 이걸 또 모성이 부족하다고 보는 건 아니라고요. 이러면 엄마는 자존감이 떨어질 겁니다. 저는 단발머리님을 실제로 뵌 적은 없지만 모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cene #1  우리 아빠가 통닭을 사가지고 오셨어요

 

아버지 이야기를 하려면 가슴이 턱 막혀온다. 아버지들은 쉴 곳이 없다. 아버지들은 집과 가족을 떠나 먼 곳에 있다. 아버지는 가족의 안위를 위해 당신의 젊음과 맞바꾸는 희생과 고통을 감내했다. 이에 비해 노래 속 아버지는 집에 있었다. 일하느라 집에 쉴 여유가 적은 아버지는 가족으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다.

 

“어젯밤엔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음음”  (배따라기  ‘아빠와 크레파스’ 중에서)

 

그런데 이 노래에 나오는 아버지는 현실감으로 와 닿지 않는다. 원래 가사는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술 취하신 모습으로’라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약주를 하고 집에 들어오신다. 흥미로운 점은 다정한 아버지의 한 손에는 ‘선물’이 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목 빼고 기다렸던 기억을 떠올려보라. 아버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겠지만, 아버지가 사오는 선물에 대한 기대감도 있다. 비록 선뜻 선물을 사주기 힘든 형편임을 알면서도 아버지는 돈 벌어 선물을 사왔다.

 

그렇다고 노래 속 아버지처럼 현실의 모든 아버지가 크레파스를 사온 건 아니다. 쌩쌩 부는 겨울바람을 뚫고 퇴근한 아버지 품에 크레파스 대신에 누런색 종이봉투가 나오기도 했다. 기름에 젖은 종이봉투를 펼치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통닭 한 마리가 있었다. 통닭 먹는 날은 정말로 행복했다. 칼바람에 식을세라 퇴근길 내내 품에 안았고, 버스 안에서 진동하는 통닭 냄새 때문에 퇴근하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야 했던 고충이 어땠을지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내 앞에 놓인 통닭이 얼른 먹고 싶었다.

 

 

 

 Scene #2  촌스러운 통닭, 화려한 치킨으로 변신하다  

 

 

          

 

 

 

1980년대 전기구이통닭은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이 유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남녀노소 좋아했던 원조 ‘치느님’이었다. 통닭은 온 가족을 한 자리에 둘러앉게 만드는 위력이 있었다. 기름기를 쏙 뺀 바삭바삭한 껍질과 부드럽게 익은 속살의 조화는 세상에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맛있었다. 요즘처럼 외식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니 뭔가를 먹기 위해 온 가족이 밖으로 돌아다니는 일이 드물었다. 지금은 흔한 배달 서비스도 정착되지 않은 시절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가족의 맛을 책임지는 배달원이 되었다. 퇴근길에 명동영양센터나 시장에 들러 먹을거리를 사들고 귀가했다. 그때는 이런 낭만이 있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 곳곳에 통닭의 흔적이 있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즐거운 자리에 통닭이 있었고, 생일잔치의 터줏대감인 케이크와 쌍벽을 이루었다. 항상 즐거운 자리에 우리는 늘 통닭과 함께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식탁 위의 닭고기도 조금씩 변했다. 한때 ‘통닭’이라고 하면 ‘치킨’의 이음동의어였다. 요즘은 통닭 대신에 치킨이라는 외국말이 더 친숙해졌다. 프라이드치킨, 새콤달콤한 양념에 버무린 양념치킨, 눈물 쏙 나게 매운맛이 나는 불닭까지. 기름옷을 입은 촌스러운 통닭이 두꺼운 튀김옷과 우리 입맛을 자극하는 양념 옷을 입으면서 팔색조 매력을 뽐낸다. 배달을 시켜서 먹을 수 있고, 월드컵 같은 국제 대회가 있는 날에 집에 혼자 중계를 보더라도 치킨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다. ‘1인 1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치킨은 특별한 외식이 아닌 특별한 주식이 되었다. 치킨은 소위 전례 없는 ‘절대 음식’의 독보적인 지위를 갖게 됐고 ‘치느님’이라는 영광스러운 애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치킨은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많이 사랑하고, 많이 먹는 야식이다. 특히 젊은 소비자들을 치킨의 매력에 푹 빠지는 데 성공했다. 젊은 소비자층의 외식소비성향이 늘어나면서 치킨 사업은 젊은 세대들을 타깃으로 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이제 치킨 전문점은 입맛으로만 승부해서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를 치킨 광고 모델로 출연시키고, 각종 사은품을 제공한다. 치느님을 믿는 젊은 소비자들은 치킨을 맛으로 먹기보다는 즐기기 위해서 먹는다. 여러 사람과 함께 모여 치맥을 즐긴다. 이를 반영하듯이 대구에 ‘치맥페스티벌’이 개최되기도 했다. 고작 몇 조각 치킨과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은 맥주를 받기 위해 행사장에 일렬로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행사에 그들은 초대받지 못했다. 치느님의 역사와 함께했던 그들은 행사장에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바로 아버지 세대였다.  
 

 


  Scene #3  아버지의 땀은 기름이 되어 닭을 튀긴다   

 

어린 시절 가족을 위해 통닭을 사들고 온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은퇴를 앞둔 중년이 된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오늘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인생 2막을 위해 창업에 뛰어든다. 불황의 골이 깊어질수록 아버지의 애환을 달래줄 휴식처로 치킨 전문점이 각광받기 시작하자 중년 예비 창업자들은 치킨 전문점을 차리고 싶어 한다. 국내 굴지의 치킨 프랜차이즈인 BBQ는 예비 창업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는 ‘BBQ 치킨대학’을 설립했다. 치킨을 직접 만들고, 치킨 가게를 차리는 방법을 배우는 수강생 대부분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버지들이다.  

 

치킨 먹는 날은 치느님의 은혜가 내리는 즐거운 시간이다.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은혜를 못 받는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아버지’다. “치킨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끓는 기름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함, 단언컨대 치킨은 가장 완벽한 물질입니다” 한때 인터넷에 떠돌던 ‘치킨 명언’이다. 우리의 입맛을 위해 펄펄 끓는 기름 속으로 몸을 던지는 닭은 희생하사 치킨이 되어 무한 사랑을 받는다. 아버지는 다 큰 자녀들이 잘 먹고 잘살 수 있도록 돈을 벌기 위해 느끼한 기름 냄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흐르는 땀은 기름이 되어 닭을 튀긴다. 집에서 푹 쉬지 못하고, 가족들과 함께 치킨 먹을 시간마저 없다. 아이들은 집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치맥을 즐긴다. 과거 가족들의 환영을 한몸에 받았던 ‘치킨-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시절은 없다. 서로 엇갈리고만 운명의 비극이 서글프다.

 

가끔 통닭을 먹었던 시절이 그립다. 통닭의 옛 맛이 아닌 가족과 함께 먹는 화목했던 시간 말이다. 음식의 냄새, 장소 그리고 함께 한 사람 등 온몸의 감각들이 저마다 나누어 갖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딱 들어맞았을 때 비로소 하나의 추억으로 완성된다. 얼마 되지 않은 통닭 조각을 둘러싸고 온 가족이 머리 맞대고 먹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 그때의 통닭은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해준 위대한 치느님이었다. 창밖 기온이 떨어질수록 통닭에 얽힌 추억의 온기는 아버지의 냉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오늘 금요일 밤에 흔한 치킨 대신에 시장에 파는 통닭을 직접 사들고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먹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떠실는지.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리미 2015-01-23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도 어릴 적 아빠가 술에 취하셔서 노란봉투에 담긴 전기구이 통닭을 사오시고는 잠들어 있는 나를 깨우던 기억이 가장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있는데.. 지금은 같이 드실 아빠가 안계시지만 아이들하고라도 따뜻한 닭튀김 함께 해야겠어요.

cyrus 2015-01-24 10:59   좋아요 0 | URL
치킨은 가족들과 함께 먹으면 맛있어요. 점점 젊은 세대가 결혼을 기피하고 혼자 산다면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생기는 가족의 정을 느끼는 시간이 없을거에요.

쉽싸리 2015-01-23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거 힘든 시절을 헤쳐온 모든 아버지들. 그시대 그들 나름의 역할이 있었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도 힘든 아버지들이 많지요. 어쩌면 예전보다더 많고 앞으로도 있겠지요. 그들의 삶을 단지 과거와 오버랩시키면서 눈물바람이나 측은함으로 소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힘든 아버지들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었으면 합니다. 슬픈 통닭이 더이상 소비되지 않는 세상을 위해.

cyrus 2015-01-24 11:06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지금은 요원해보지만 아버지들이 기를 펼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transient-guest 2015-01-28 0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페리카나 치킨을 참 맛있게 먹었어요. 지금은 거의 없어진 것으로 압니다. 미국에서는 교촌치킨이 들어온 곳이 몇 군데 있어 꽤 인기라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별로에요. 그 맛도 그렇고. 한국의 닭강정을 제대로 들여오면 대박칠 것 같다능..ㅎ

cyrus 2015-01-28 09:39   좋아요 0 | URL
맞아요. 페리카나도 예전에 비하면 인지도가 떨어졌어요. 닭강정은 뼈가 없는 닭튀김이니까 외국에서 판매한다면 대박 날 수 있는 아이템이 될 것 같습니다. ^^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브누아트 그루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 의사 표현이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흐리지 않는 한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

 

프랑스혁명의 와중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올랭프 드 구주. 여성인권선언문을 작성한 그녀는 ‘미친 사람’으로 비난받았다. 시민혁명과 공화정의 나라 프랑스에서 여성이 선거권을 얻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4년.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진 지 155년 만이다.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은 단지 ‘남성권’의 선언이었고, 박애의 이념은 자매를 제외한 형제애였던가. 혁명에 큰 영향을 미친 루소조차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하도록 창조되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정치는 오랫동안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에겐 문턱이 높았다. 민주주의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여성참정권의 역사는 겨우 100년을 헤아린다. 스위스 여성들은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1971년까지 기다렸다. 여성의 한 표는 거저 쥐어지지 않았다. ‘피의 투쟁’을 거쳤다. 어쩌면 인종과 신분의 벽보다 더 험하고 거친 차별의 강을 건너야 했다.

 

무리를 이룬 펭귄 가운데 두려워하지 않고 제일 먼저 바다에 뛰어드는 첫 번째 펭귄처럼 구주는 인권에서 제외된 여성 중에 제일 먼저 차별의 강을 건너 넘으려고 앞장섰다. 왕정과 공화정의 극단적 대립 상황에서 구주는 자신을 포함한 여성들도 마땅히 혁명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녀의 희망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우애는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구주의 눈에는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은 여자들을 쏙 뺀 반쪽짜리 내용에 불과했다. 그녀는 남자들의 세상 속에서 오랫동안 잠들고 있는 여성들의 생각을 깨우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과 여성 시민의 인권 선언’은 성적 평등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위대한 팸플릿이었다. 여기에 포함되는 ‘여성’은 국민이라 할 수 있는 어머니, 딸, 누이들이었다. 여성의 이혼권을 옹호하고, 딸도 아버지의 유산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제안했다. 또 미혼모들이 경제적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그녀의 제안과 주장은 당시 시대를 앞서가는 전위적인 내용이다. 그녀의 인권선언에 나오는 제안은 1975년에 법으로 제정되었다. 재미있게도 1970년대 프랑스는 여성 해방 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이다. 1971년에 프랑스 여성 지식인 343명은 낙태를 했음을 선언하는 일명 ‘343선언’에 참여했다. 이때만 해도 낙태만 해도 징역형을 받았다. 미혼모도, 성폭행으로 임신한 여성들도 낙태하면 죗값을 치러야 했다. 343선언에 동참했던 여성 지식인 중에 보부아르, 마르그리트 뒤라스, 프랑수아즈 사강 등의 익숙한 이름도 있다. 결국, 여성의 낙태권 주장은 법에 수용되어 1975년부터 시행된다. 여성 해방 운동의 거센 물결 덕분에 구주의 제안은 180여 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에 의한 먼지를 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 해방 운동론자들 중 그 누구도 구주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들은 잊힌 조상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보부아르마저도. 소외된 여성의 권익을 대중적인 논의의 장으로 이끌어 낸 ‘페미니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보부아르가 고스란히 받았다. 20세기의 역사는 또 한 번 구주의 이름을 외면했다.

 

구주는 보부아르보다 가장 먼저 페미니즘의 초석을 다지는 데 이바지했다. 보부아르가 쓴 『제2의 성』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에 대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보부아르의 페미니즘에서 인식하는 여성은 ‘백인 중산층 여성’에 한정된다. 이러한 서구 중심적 페미니즘은 인종이나 계급의 교차점에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 이르지 못한다. 반면 구주는 여성의 문제를 좀 더 포괄적인 접근으로 바라본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흑인 노예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노인이나 노동자의 자녀를 위한 보호시설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다른 사회 운동과 더불어 주장의 폭을 넓혀가는 구주의 페미니즘은 사회적 계급과 인종에 기반을 둔 한계를 극복하려는 오늘날의 페미니즘 조류와 유사하다.

 

프로이트의 비유를 빌리자면 구주는 다들 깊이 잠든 이른 시간에 깨어난 여성이다. 남성들이 만든 차별의 울타리 속에 갇힌 여성들은 오랫동안 깊은 수면에 빠져야만 했다. 구주는 여성들을 몽매하게 만드는 잠에서 깨어나는데 성공했지만, 울타리 밖에 남성들이 득실한 세상에 홀로 발을 내딛는 과정은 순탄치가 않았다. 사생아로 태어나 16살에 결혼을 하지만, 아들 하나 낳고 과부가 된다. 그 후로 파리 사교계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세간의 관심과 남성들의 구애를 한몸에 받게 되지만, 구주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 과부로 산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결혼하는 순간, 또다시 ‘부인’과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남성들의 사회적 울타리 안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구주는 사방이 꽉 막힌 그곳에 다시 잠들고 싶지 않았다. 이제 차별의 울타리를 부수어 잠든 여성들을 깨우는 일이 사회적 평등을 위한 소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당시 여성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문맹이 많았다. 구주도 글을 쓸 수 없었지만, 문맹은 그녀의 뜨거운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자기 생각을 비서에게 받아 적게 했다. 

 

구주는 자신의 과감한 생각이 사회에 실현하기 위해서 단두대에 오를 위험을 감수했다. 불평등한 구조와 억압을 깨트리는 방법 중 가장 확실하고 필요한 것이 여성의 삶 속으로 정치를 가져오고 정치 속으로 여성이 들어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구주는 정치를 바꾸는 게 아니라 불평등한 삶을 바꾸고 싶었다. 자유, 평등, 우애를 주장한 남성들은 그녀의 떳떳한 목소리가 거북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이어서 구주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했다. 구주의 정의감은 구시대적인 남성들에 의해 영원히 눈을 감았다. 구주의 죽음은 곧 남성들의 승리였다. 차별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여성들은 여성참정권을 가지는 데 무려 100년 동안 잠들어야만 했다.

 

남성들의 역사(History)에 의해 잠든 여성 운동가 올랭프 드 구주. 최근에 그녀의 존재가 재평가받게 되면서 드디어 구주가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전반적인 사상을 알 수 있는 책이 이제야 나왔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우리나라 페미니즘도 구주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동참하고, 그녀의 실천적 페미니즘을 본받아야 한다. 여성의 권리 회복을 주장한답시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급급해 보이는 옹졸한 페미니스트여, 그대는 정의로울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을 그대에게 던지는 건 여자, 이제 잠에서 깬 구주다. 적어도 구주의 존재를 잊지 말아 달라.

 

 

 

※ 글 마지막 세 줄의 문장은 구주의 여성 인권선언서 일부 문장을 차용했음.
원문 : 남자여, 그대는 정의로울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을 그대에게 던지는 건 여자다. 적어도 이 권리만큼은 여자에게서 빼앗지 말아 달라. (64쪽)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파엘 2014-12-22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제목이 정말 기발하네요 ㅋ

cyrus 2014-12-23 22:22   좋아요 0 | URL
쓸데없는 개드립이에요. ^^;;

바람돌이 2014-12-2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담아갑니다. 저도 모르던 인물이네요.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

cyrus 2014-12-23 22:25   좋아요 0 | URL
책은 작가가 소개하는 구주의 생애와 구주가 남긴 글이 몇 편 수록되어 있어요. 그리고 정희진씨의 해제도 실려 있어요. 정희진씨가 구주를 아주 쉽게 소개하고 있어요. 읽어본다면 책이 마음에 드실 겁니다. ^^

감은빛 2014-12-23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몰랐던 인물을 알게 되어 기쁘네요.
보관함에 담고 갑니다.

cyrus 2014-12-23 22:27   좋아요 0 | URL
독자들이 이런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
 
차브 -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오언 존스 지음, 이세영 외 옮김 / 북인더갭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Scene #1  야생의 하층 계급

 

“나는 저 기계를 타고...” 시간 여행자는 램프를 높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시간을 탐험할 작정입니다.” 시간 여행자는 타임머신을 개발하고 인류의 미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길을 떠난다. 그는 이미 802701년의 세계를 간 적이 있었다. 낙원과도 같은 원시적인 자연 속에서 사는 인류의 후손을 조우한다. 하지만 80만 년 뒤의 미래는 시간 여행자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암울했다. 알고 보니 인류의 후손은 두 개의 종으로 따로 진화했다. 인류는 퇴화한 두 종족 엘로이와 몰록으로 나누어져 있다. 엘로이는 지상에 사는 아름다운 종족이지만, 몰록은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사는 잔인한 종족이다. 그들은 엘로이를 잡아먹을 정도로 공격적이다. 몰록의 습격에 가까스로 살아남아 원래 세계로 돌아온 시간 여행자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 여행자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인류에게서 희망을 찾기 위해 시간 여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번에 그가 간 곳은 201X년의 영국. 시간 여행자는 상당히 문명화된 영국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하늘 위에 솟은 건물들과 도로 위를 지나가는 자동차 행렬 그리고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다니면서 걷는 사람들. 지적인 능력이 상실된 802701년의 세계와 전혀 다른 풍경이다. 이곳이 바로 시간 여행자가 찾고 싶었던 안락한 진보 문명의 모습이다.

 

그러나 시간 여행자의 기대는 오래가지 못한다. 201X의 세상을 좀 더 알아보고 싶어서 신문을 읽게 되었는데 충격적인 기사 내용을 발견한다. “이 나라의 가장 깜깜하고 어둑한 구석에 존재하는 인간 이하의 계층”, “야생의 하층 계급” 기자들이 비난하는 하층 계급은 누구일까. 이런 화려한 세상에 어둑한 지하 세계에서만 사는 야생의 몰록이 여전히 존재한단 말인가.

 

시간 여행자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물어본다. “이보시오, 여기 이 신문에서 말하는 하층 계급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오?” 그러자 행인은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한다. “음. 하층 계급 말이오? 그들은 사회를 좀먹는 가난한 사람들이오. 그런 놈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구제불능의 쓰레기들이오.”  자신의 답변을 이해하지 못한 시간 여행자의 표정에 행인은 말을 계속한다. “당신 혹시 웰스의 『타임머신』이라는 소설을 읽어봤소? 그 내용에 지하 세계에 살면서 엘로이를 잡아먹는 몰록이라는 흉측한 종족이 나오잖소. 지금 영국에 있는 하층계급을 몰록이라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오.”

 

 

 

 Scene #2  “차브를 그냥 걷어차버리세요.”

 

2011년, 영국의 정치 평론가 오언 존스는 웰스의 소설에 나오는 몰록을 조명한다. 21세기의 몰록은 엘로이의 살을 뜯어 먹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위협하는 악마 혹은 괴물로 취급한다. 21세기의 몰록은 바로 하층 노동계급을 가리키는 ‘차브(Chavs)’이다. 그러나 차브는 소설 속 몰록처럼 공격적인 존재가 아닌데도 영국 사회는 차브를 혐오한다.

 

차브를 싫어하는 이들은 넉넉한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직업과 집을 가진 중간계급이다. “우리는 이제 모두 중간계급”(We're all middle class now)라는 정부의 주문을 믿는다. 정부의 복지예산을 축내는 차브들을 미워한다. 그들의 손에 들어가는 복지예산에 자신들이 낸 세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피땀 같은 재산이 야금야금 그들에게 뺏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가끔 차브들은 금전을 노리는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몰록이 엘로이를 습격하는 것처럼. 차브를 싫어하는 중간계급은 21세기의 엘로이다. 엘로이의 우두머리가 속한 보수당과 우익 언론들은 중간계급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계급전사’를 자저한다. 몰록과 향해 언제든지 공격할 자세를 갖추었다. “차브들을 그냥 걷아차버리세요.”

 

차브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들도 한때 평범한 직업을 가진 인간이었다. 2005년에 ‘차브’가 처음으로 콜린스 영어사전에 등재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캐주얼 스포츠 복장을 한 젊은 노동계급’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의미 속에는 차브를 비하하는 중간계급의 시선이 숨어 있다. 캐추얼 스포츠 옷을 직접 사 입을 수 없는 가난한 노동계급의 무능함을 조롱하는 것이다.

 

차브가 비천한 하층 계급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시기는 1979년. 이때 집권한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는 과도한 복지예산 문제로 병든 영국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시장경제라는 처방 약을 내밀었다. 대처는 시장경제 중심의 경제개혁을 단행하기 위해서 영국을 병들게 한 세균으로 노동계급을 지목했다. 본격적으로 노동계급을 향한 대처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사회악이 되어버린 노동계급은 노동을 회피하면서 과도한 임금과 복지예산에 집착하는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대처리즘은 성공적이었다. 정부의 임금 삭감에 맞서서 파업을 일으킬 수 있는 막강한 위력을 가진 노조 세력은 와해하였다. 광산업과 제조업이 붕괴하여 그들의 일자리마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급작스런 시장경제 체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노동계급은 빈곤한 하층계급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노동당의 입지를 줄이는 데 성공한 보수당은 더욱 기세가 등등했다. 노동계급이 더 이상 중간계급으로 오를 수 없도록 계급상승의 사다리마저 부수었다. 노동계급은 낙후된 슬럼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사회의 골칫덩어리로 멸시받았다.

 

 


 Scene #3  누가 진짜 괴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간 여행자 아니 웰스는 계층 갈등이 심화한 암울한 미래상을 가장 먼저 목격했다. 엘로이와 몰록. 그들은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갈려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였다. 80만 년 뒤에 등장하게 될 엘로이와 몰록의 직계 조상은 오늘날 영국의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이다. 노동계급은 중간계급의 세상에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우리는 모두 중간계급”이라는 사회적 결계는 반사회적 악마가 되어버린 노동계급의 접근을 차단한다. ‘중간계급 대 차브’라는 양극 구도의 전쟁은 좀처럼 종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 번 차브로 낙인찍힌 노동계급은 영원한 차브로 살아야 한다. 차브는 곧 ‘인생 실패자’라는 의미로 귀결된다. 이것은 시장경제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미생’을 향한 ‘완생’의 조롱이다.

 

그러나 모든 노동계급이 게으르고, 폭력적이고, 무능한 것은 아니다. 빈부 격차가 갈수록 심해지고, 사회적 약자를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비난하는 사회적 인식이 더해지면 21세기의 몰록은 점점 많아질 것이다. 계층 간 이동이 희박해지고, 계층 갈등이 커질수록 사회적 연대감은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계층 전쟁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대처의 등장으로 부활한 보수당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의 불만을 억누를 수 있는 차브라는 이름의 희생양을 만들었다. 동시에 희생양을 노리는 국민은 자신들이 “우리는 모두 중간계급”이라는 부르주아의 울타리 속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웰스의 소설에서 묘사된 80만 년의 세계에서 엘로이는 몰록에게 공격을 당하지만, 2014년 지금의 엘로이는 몰록을 공격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계급을 인간 이하의 괴물로 몰아붙이는 엘로이야말로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괴물이다. 과연 누가 진짜 괴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도 영국의 현실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절대로 장담할 수 없다. 복지 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은 심화하고, 사회복지망에서 벗어난 사회적 약자들의 가난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우익의 왜곡된 시선이 점점 많아진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나온, 이제는 진부한 명대사를 곱씹어 본다. 사람 되는 것은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부르주아의 괴물이 선량한 타인마저 괴물로 둔갑시키는 세상. 정부의 허황한 주문에 세뇌당한 중간계급의 눈에는 힘없는 노동계급이 ‘차브’라는 괴물로 보일 뿐이다.  

 

 

 

※ 글이 시작되는 첫 문장은 허버트 조지 웰스의 『타임머신』(열린책들)에서 인용, 28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사랑하는현맘 2014-12-18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임머신>을 상당히 흥미롭게 봤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게 더 잘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왜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는 점점 더 많아지는걸까요. 말씀대로 괴물은 되지 말아야지 싶습니다. 사실은 정말 `사람`이 되어야죠. 그래야 그나마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곳도 좀 살만한 곳이 되겠지요?^^

cyrus 2014-12-19 23:00   좋아요 0 | URL
모순덩어리 세상에 찌들인 제가 현맘님처럼 부모가 돼서 자식들을 제대로 ‘사람’처럼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 세대가 나라를 짊어져야 하고, 자녀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줘야 하니까요.

qualia 2014-12-19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도 영국의 현실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절대로 장담할 수 없다.”

→ 제 생각엔 영국보다 한국이 더 비관적인 상황에 이미 빠져 있다고 봅니다. 다만, 한국은 영국과는 달리 계층/계급간 대립의 형태보다는 지역/부족간 대립의 형태로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죠.

제 판단엔 경상부족과 전라부족의 반목/대립/대결은 점점 회복불능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남한국과 북한국이라는 더 큰 단위의 부족 대결이 덧씌워져 있죠. 이 비굴하고 무능한 민족/부족들은 결코 통합/통일을 이룰 수 없으리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결국 자의든 타의든 멸망의 길을 갈 것입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제 판단엔 1차적으로 신라가 3국(3부족)을 통일하면서 한민족의 역사는 꼬이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그때부터 에미와 아비를 죽인 반역자를 친아버지로 섬기는 기구한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기구한 역사가 2014년 박근혜 정권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죠.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동족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동족포식종족은 동족살육의 기구한 역사를 쓰며 계속 연명해나가거나 멸종의 길로 가거나 두 가지 생존법밖에 없습니다. 바로 한민족이라는 종족의 길이죠.

경상부족과 전라부족을 모두 멸족시키고 남한국과 북한국을 멸망시키는 길밖에 없다고 봅니다. 한민족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cyrus 2014-12-19 23:04   좋아요 0 | URL
qualia님. 저의 생각에 대한 의견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qualia님처럼 우리나라는 이미 비관적인 상황에 처한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분단국가라는 지역의 특수성에 여전히 이념 대립의 불씨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과 대립이 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