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브 -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오언 존스 지음, 이세영 외 옮김 / 북인더갭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Scene #1  야생의 하층 계급

 

“나는 저 기계를 타고...” 시간 여행자는 램프를 높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시간을 탐험할 작정입니다.” 시간 여행자는 타임머신을 개발하고 인류의 미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길을 떠난다. 그는 이미 802701년의 세계를 간 적이 있었다. 낙원과도 같은 원시적인 자연 속에서 사는 인류의 후손을 조우한다. 하지만 80만 년 뒤의 미래는 시간 여행자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암울했다. 알고 보니 인류의 후손은 두 개의 종으로 따로 진화했다. 인류는 퇴화한 두 종족 엘로이와 몰록으로 나누어져 있다. 엘로이는 지상에 사는 아름다운 종족이지만, 몰록은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사는 잔인한 종족이다. 그들은 엘로이를 잡아먹을 정도로 공격적이다. 몰록의 습격에 가까스로 살아남아 원래 세계로 돌아온 시간 여행자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 여행자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인류에게서 희망을 찾기 위해 시간 여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번에 그가 간 곳은 201X년의 영국. 시간 여행자는 상당히 문명화된 영국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하늘 위에 솟은 건물들과 도로 위를 지나가는 자동차 행렬 그리고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다니면서 걷는 사람들. 지적인 능력이 상실된 802701년의 세계와 전혀 다른 풍경이다. 이곳이 바로 시간 여행자가 찾고 싶었던 안락한 진보 문명의 모습이다.

 

그러나 시간 여행자의 기대는 오래가지 못한다. 201X의 세상을 좀 더 알아보고 싶어서 신문을 읽게 되었는데 충격적인 기사 내용을 발견한다. “이 나라의 가장 깜깜하고 어둑한 구석에 존재하는 인간 이하의 계층”, “야생의 하층 계급” 기자들이 비난하는 하층 계급은 누구일까. 이런 화려한 세상에 어둑한 지하 세계에서만 사는 야생의 몰록이 여전히 존재한단 말인가.

 

시간 여행자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물어본다. “이보시오, 여기 이 신문에서 말하는 하층 계급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오?” 그러자 행인은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한다. “음. 하층 계급 말이오? 그들은 사회를 좀먹는 가난한 사람들이오. 그런 놈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구제불능의 쓰레기들이오.”  자신의 답변을 이해하지 못한 시간 여행자의 표정에 행인은 말을 계속한다. “당신 혹시 웰스의 『타임머신』이라는 소설을 읽어봤소? 그 내용에 지하 세계에 살면서 엘로이를 잡아먹는 몰록이라는 흉측한 종족이 나오잖소. 지금 영국에 있는 하층계급을 몰록이라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오.”

 

 

 

 Scene #2  “차브를 그냥 걷어차버리세요.”

 

2011년, 영국의 정치 평론가 오언 존스는 웰스의 소설에 나오는 몰록을 조명한다. 21세기의 몰록은 엘로이의 살을 뜯어 먹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위협하는 악마 혹은 괴물로 취급한다. 21세기의 몰록은 바로 하층 노동계급을 가리키는 ‘차브(Chavs)’이다. 그러나 차브는 소설 속 몰록처럼 공격적인 존재가 아닌데도 영국 사회는 차브를 혐오한다.

 

차브를 싫어하는 이들은 넉넉한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직업과 집을 가진 중간계급이다. “우리는 이제 모두 중간계급”(We're all middle class now)라는 정부의 주문을 믿는다. 정부의 복지예산을 축내는 차브들을 미워한다. 그들의 손에 들어가는 복지예산에 자신들이 낸 세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피땀 같은 재산이 야금야금 그들에게 뺏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가끔 차브들은 금전을 노리는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몰록이 엘로이를 습격하는 것처럼. 차브를 싫어하는 중간계급은 21세기의 엘로이다. 엘로이의 우두머리가 속한 보수당과 우익 언론들은 중간계급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계급전사’를 자저한다. 몰록과 향해 언제든지 공격할 자세를 갖추었다. “차브들을 그냥 걷아차버리세요.”

 

차브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들도 한때 평범한 직업을 가진 인간이었다. 2005년에 ‘차브’가 처음으로 콜린스 영어사전에 등재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캐주얼 스포츠 복장을 한 젊은 노동계급’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의미 속에는 차브를 비하하는 중간계급의 시선이 숨어 있다. 캐추얼 스포츠 옷을 직접 사 입을 수 없는 가난한 노동계급의 무능함을 조롱하는 것이다.

 

차브가 비천한 하층 계급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시기는 1979년. 이때 집권한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는 과도한 복지예산 문제로 병든 영국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시장경제라는 처방 약을 내밀었다. 대처는 시장경제 중심의 경제개혁을 단행하기 위해서 영국을 병들게 한 세균으로 노동계급을 지목했다. 본격적으로 노동계급을 향한 대처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사회악이 되어버린 노동계급은 노동을 회피하면서 과도한 임금과 복지예산에 집착하는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대처리즘은 성공적이었다. 정부의 임금 삭감에 맞서서 파업을 일으킬 수 있는 막강한 위력을 가진 노조 세력은 와해하였다. 광산업과 제조업이 붕괴하여 그들의 일자리마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급작스런 시장경제 체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노동계급은 빈곤한 하층계급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노동당의 입지를 줄이는 데 성공한 보수당은 더욱 기세가 등등했다. 노동계급이 더 이상 중간계급으로 오를 수 없도록 계급상승의 사다리마저 부수었다. 노동계급은 낙후된 슬럼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사회의 골칫덩어리로 멸시받았다.

 

 


 Scene #3  누가 진짜 괴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간 여행자 아니 웰스는 계층 갈등이 심화한 암울한 미래상을 가장 먼저 목격했다. 엘로이와 몰록. 그들은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갈려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였다. 80만 년 뒤에 등장하게 될 엘로이와 몰록의 직계 조상은 오늘날 영국의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이다. 노동계급은 중간계급의 세상에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우리는 모두 중간계급”이라는 사회적 결계는 반사회적 악마가 되어버린 노동계급의 접근을 차단한다. ‘중간계급 대 차브’라는 양극 구도의 전쟁은 좀처럼 종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 번 차브로 낙인찍힌 노동계급은 영원한 차브로 살아야 한다. 차브는 곧 ‘인생 실패자’라는 의미로 귀결된다. 이것은 시장경제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미생’을 향한 ‘완생’의 조롱이다.

 

그러나 모든 노동계급이 게으르고, 폭력적이고, 무능한 것은 아니다. 빈부 격차가 갈수록 심해지고, 사회적 약자를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비난하는 사회적 인식이 더해지면 21세기의 몰록은 점점 많아질 것이다. 계층 간 이동이 희박해지고, 계층 갈등이 커질수록 사회적 연대감은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계층 전쟁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대처의 등장으로 부활한 보수당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의 불만을 억누를 수 있는 차브라는 이름의 희생양을 만들었다. 동시에 희생양을 노리는 국민은 자신들이 “우리는 모두 중간계급”이라는 부르주아의 울타리 속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웰스의 소설에서 묘사된 80만 년의 세계에서 엘로이는 몰록에게 공격을 당하지만, 2014년 지금의 엘로이는 몰록을 공격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계급을 인간 이하의 괴물로 몰아붙이는 엘로이야말로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괴물이다. 과연 누가 진짜 괴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도 영국의 현실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절대로 장담할 수 없다. 복지 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은 심화하고, 사회복지망에서 벗어난 사회적 약자들의 가난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우익의 왜곡된 시선이 점점 많아진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나온, 이제는 진부한 명대사를 곱씹어 본다. 사람 되는 것은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부르주아의 괴물이 선량한 타인마저 괴물로 둔갑시키는 세상. 정부의 허황한 주문에 세뇌당한 중간계급의 눈에는 힘없는 노동계급이 ‘차브’라는 괴물로 보일 뿐이다.  

 

 

 

※ 글이 시작되는 첫 문장은 허버트 조지 웰스의 『타임머신』(열린책들)에서 인용,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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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4-12-18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임머신>을 상당히 흥미롭게 봤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게 더 잘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왜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는 점점 더 많아지는걸까요. 말씀대로 괴물은 되지 말아야지 싶습니다. 사실은 정말 `사람`이 되어야죠. 그래야 그나마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곳도 좀 살만한 곳이 되겠지요?^^

cyrus 2014-12-19 23:00   좋아요 0 | URL
모순덩어리 세상에 찌들인 제가 현맘님처럼 부모가 돼서 자식들을 제대로 ‘사람’처럼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 세대가 나라를 짊어져야 하고, 자녀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줘야 하니까요.

qualia 2014-12-19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도 영국의 현실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절대로 장담할 수 없다.”

→ 제 생각엔 영국보다 한국이 더 비관적인 상황에 이미 빠져 있다고 봅니다. 다만, 한국은 영국과는 달리 계층/계급간 대립의 형태보다는 지역/부족간 대립의 형태로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죠.

제 판단엔 경상부족과 전라부족의 반목/대립/대결은 점점 회복불능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남한국과 북한국이라는 더 큰 단위의 부족 대결이 덧씌워져 있죠. 이 비굴하고 무능한 민족/부족들은 결코 통합/통일을 이룰 수 없으리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결국 자의든 타의든 멸망의 길을 갈 것입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제 판단엔 1차적으로 신라가 3국(3부족)을 통일하면서 한민족의 역사는 꼬이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그때부터 에미와 아비를 죽인 반역자를 친아버지로 섬기는 기구한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기구한 역사가 2014년 박근혜 정권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죠.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동족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동족포식종족은 동족살육의 기구한 역사를 쓰며 계속 연명해나가거나 멸종의 길로 가거나 두 가지 생존법밖에 없습니다. 바로 한민족이라는 종족의 길이죠.

경상부족과 전라부족을 모두 멸족시키고 남한국과 북한국을 멸망시키는 길밖에 없다고 봅니다. 한민족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cyrus 2014-12-19 23:04   좋아요 0 | URL
qualia님. 저의 생각에 대한 의견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qualia님처럼 우리나라는 이미 비관적인 상황에 처한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분단국가라는 지역의 특수성에 여전히 이념 대립의 불씨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과 대립이 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