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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탄생 - 대한민국에서 엄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ㅣ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20
안미선.김보성.김향수 지음 / 오월의봄 / 2014년 11월
평점 :
Scene #1 아는 엄마 얘기
여기 내가 아는 엄마가 있다. 에바라는 이름의 여자는 한때 세계 여행을 즐기며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고단함에 못 이겨 아들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엄마와의 관계가 소원해질수록 아들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아들은 반항적인 학생으로 자라고 엄마를, 가족을,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범죄를 저지르고 만다. 이 불행한 모녀 이야기는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소설 《케빈에 대하여》의 줄거리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설은 에바가 과연 일반적인 모성애가 부족했느냐고, 그러한 책임이 온전히 에바 개인에게 있는 것이냐고 독자에게 도발적으로 질문한다. 누군가는 에바의 차가운 심장 속에 반항적인 아들로 자라는 불행의 씨앗이 생겼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에바의 모습은 소설 속에만 나올 법한 특이한 장면이 아니다. 산모에게 갑자기 찾아오는 산후우울증 상태와 비슷하다. 산후우울증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호르몬 변화가 심해지면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 아기는 출생 후 엄마의 따뜻한 보살핌과 양육을 받지 못해서 행복하지 못하며 엄마의 우울한 상태는 자녀의 인지발달에도 영향을 준다.
에바의 경우는 자극적인 기사를 내놓는 기자들이 좋아하는 먹잇감이 되기 쉽다. 산후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엄마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뉴스는 산후우울증을 아이를 극단적으로 위협하는 정신병으로 전달한다. 이런 뉴스를 접한 아빠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엄마가 미쳤군, 어떻게 엄마가 아이를 죽일 수 있지?” 아빠는 엄마의 극단적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 아이를 오랫동안 키워 본 엄마들은 충분히 이해한다. 자신도 아이가 너무 싫어서 죽이고 싶은 순간적 충동이 있었음을. 계속 울고 떼쓰는 아이를 혼자 달래다 보면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아이에게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Scene #2 오늘도 엄마는 외롭게 싸운다
여성이 엄마가 되는 순간, 혼자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임신은 축복이지만 출산과 육아는 현실이다. 출산의 기쁨도 잠시, 자녀 양육문제는 가장 무거운 현실의 짐이 된다. 산후조리원은 출산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긴장하고 육체적으로 지친 산모에게 ‘엄마’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역할을 알려준다. 산모와 아기를 돌보는 많은 산후조리원은 상당히 과학적인 시어머니 혹은 친정어머니가 된다. 산후조리를 위한 돌봄 서비스를 하고, 아기를 돌보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모유 수유가 아기의 건강에 좋다는 산후조리원의 말에 산모는 유두가 아프더라도 꾹 참고 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당연히 ‘엄마’니까 아기를 위해서 모유 수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유 수유를 하지 않는 엄마는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시선을 받는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는 결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순간 밤잠을 편히 자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아이가 시도 때도 없이 엄마를 찾아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이 시작된다.
산후조리원을 나와도 엄마 주변에는 자꾸 ‘좋은 엄마’라는 꼬리표를 달도록 부추기는 것들이 많다. 침대는, 아니 모성은 과학이라는 점을 육아 관련 업체들은 홍보한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로 키우고 싶은 엄마 마음에 연령별로 분화된 고가의 유아용품들을 구입한다. 모성애가 뛰어난 엄마가 되려면 이 정도 소비를 감수해야 한다. 사랑뿐만 아니라 모성도 돈으로 사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엄마는 자본주의라는 사각의 링 위에서 한쪽에는 ‘경쟁’이라는 글러브를, 다른 쪽에는 ‘모성’이라는 글러브를 끼고 외롭게 싸운다. 만약 이 싸움에서 진다면, ‘좋은 엄마’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럴수록 육아에 대한 강박적인 마음에 글러브를 바짝 조인다. 불행하게도 ‘엄마 노릇’하는 여성이 서있는 코너 옆에는 든든한 트레이너가 없다.
맞벌이 여성일수록 고민거리는 더 커진다. 취업 전선에 뛰어들고 싶어도 아이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는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선택은 세 가지 중 하나. 친정이나 시댁에 맡기거나 육아 도우미의 손을 빌리는 것. 셋 중 하나만 찍으면 되지만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일단 어떤 선택이든 비용이 드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어린이집 폭행 사건이 큰 사회문제로 주목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맞벌이를 하게 되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다.
엄마는 늘 피곤하다. 전쟁 같은 삶을 산다. 한 남자의 아내로, 한 아이의 엄마 그리고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칭얼대며 엄마를 찾는 아이를 돌본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반복적 가사노동에 하루를 저당 잡혀버린다. 아무리 가사노동도 어엿한 경제활동이라고 울부짖어도 여전히 현실 속에서는 세 가지 엄마가 구분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 너머의 미래를 그릴 수 없게 되고 ‘나’라는 고유한 삶의 윤곽이 사라진 지 오래다.
Scene #3 Mamma mia! 미아가 된 대한민국 엄마들
6년 전에 100만 부를 훌쩍 넘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는 가족에 대한 희생과 봉사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자식을 위해 평생 희생하고 영원한 내리사랑을 주는 어머니의 사랑은 어릴 적 우상이었던 슈퍼맨보다 더 강하다. 하지만 《엄마를 부탁해》 속의 엄마와 같은 인물은 거의 없다. 모성애와 무조건적 헌신의 자세로 포장된 엄마는 없다. 안타깝지만 《케빈에 대하여》 속의 엄마는 있다. 앞으로도 많아질 것이다. 사회가 소유한 모성의 강제성은 역설적이게도 아이와 엄마 간의 관계를 단절한다.
《엄마의 탄생》은 읽으면서 나는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Mamma mia! 세상에! 대한민국 엄마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구나. Mamma mia! now I really know(이젠 정말 알겠어). 엄마는 미아(迷兒)다. 그녀는 외롭다. 가족은 있으나 출산과 육아를 하면서 견뎌야 할 시간을 알아주는 이가 없으니까. 집에 있어도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든다. 모성애라는 대의명분만으로 참으면서 이겨내기가 힘들다. 방황하는 엄마가 가는 곳은 쇼핑몰과 키즈 카페. 그러나 이곳으로 들어오는 순간 아이와 엄마가 놀 수 있는 시간은 소비가 된다. 편하게 쉴 곳이 없다. 엄마는 아이를 안은 채 오랫동안 헤맨다.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공간을 찾지 못한 채.
적극적 양육자로서 아빠의 역할이 커지는 요즘, 아이들에게 친근한 슈퍼맨이 되고 싶은 아빠들이 많아져서 좋다. 엄마가 혼자 짊어진 짐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다. 그렇지만, 보육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 모성을 ‘안전빵’으로 생각하는 것은 엄마를 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그것은 엄마에게 보육을 전적으로 맡기는 꼴이다. 엄마에게 보육을 부탁해선 안 된다. 모성은 강하다? 이것은 오해의 산물이다. 모성은 엄마가 아이를 키우면서 늘 심장 속에 새겨야 할 책임이라는 단어가 될 수 없다.
시장논리 속에서 존재하는 모성은 여성이 처한 사회적 현실을 가리고 포장할 뿐만 아니라, 아이를 돋보이도록 만드는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사회는 육아 지침서가 말하는 현명한 엄마, 아이를 똑똑하게 키우는 세련된 엄마,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하는 엄마가 되라고 말한다. 여성 독자들이여, 진짜 엄마가 되고 싶은 각오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사회가 강요하는 ‘엄마 노릇’을 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