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독의 위로
앤터니 스토 지음, 이순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1년 10월
평점 :
인터넷 미디어로부터 위로받는 고독한 현대인들
어느 연구결과에 의하면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의 중독성이 술, 담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팀은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소셜미디어에 대한 욕구는 술과 담배에 비해 비용이 들지 않으며 일상에 유용하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른바 '소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 현대인들은 정말이지 심각하게, 다른 방식으로 분주하다. 직장인이든 학생이든 주부든, 나이와 직업에 상관없이 모두가 인터넷 미디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스마트한' 생활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이메일을 수시로 훑어보고,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글을 새로 올리고, 트위터로 쉴 새 없이 따끈따끈한 소식을 담고 나르고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
확실히 인터넷은 정보의 검색을 용이하게 하고 트위터와 같은 SNS은 여론의 새로운 창구 역할을 거의 실시간으로 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순기능을 발휘한다. 연구팀의 분석대로 비용이 들지 않으면 시간면에서도 효율적이다. 그리고 SNS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과 팔로어를 하면서 폭넓은 인관관계를 맺을 수 있다.
최근에는 '트위터봇'이라는 것이 유행을 한단다. 해당 봇이 메시지를 팔로어들에게 보내고, 팔로어들이 보낸 메시지의 키워드를 분석해 사전에 저장한 메시지 중 연관도가 높은 내용을 자동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 트위터봇은 종류별로 다양하다. 좋은 명언을 메시지 삼아 보내는 '좋은글봇'도 있고, 여자친구가 대화를 거는 것처럼 메시지가 트위터에 전달되는 '여친봇'도 있다. 여친봇을 팔로잉한 여자친구가 없는 사람에게 '자기야, 뭐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면 팔로워는 여친봇의 메시지에 답변을 보낸다. 진짜 여자친구가 아닌 여자친구처럼 대하는 프로그램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트위터봇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에 대한 관심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욕구, 즉 현대인들이 스마트폰, SNS를 달고 살면서도 여전히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많다도 정작 현대인들은 외롭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트위터에 팔로워한 사람들의 숫자, 카카오톡에 저장되어 있는 지인들의 숫자 등에 얽매이기도 한다. '다다익선'이라는 말처럼 자신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트위터의 팔로워라든가 카카오톡에 저장된 '친구'의 수가 수백명이라고 해서 우리는 과연 살아가면서 관계를 맺고 있는 100명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스마프톤이나 컴퓨터에서만 가능하는 온라인 세계가 아니라 직접 얼굴을 맞대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신이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저장된 100명 중에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고작 절반도 채 안 될 것이다. 10%는 가족 관계 또는 비즈니스상으로 필연적으로 만나야 되는 사람이며 나머지 90%는 1년에 한 번 정도 연락할까 말까하는, 친구인데도 그렇다고 정말 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인간 관계에 있어서 어중간한 사람들이다. 연락이 뜸한 사람이 있다면 연락 안 한 채 나 몰라라하고 쿨하게 넘어가든가 아니면 다시 볼 일이 없다면 과감하게 그 사람의 폰 번호나 주소를 지워버리면 끝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의 결별을 익숙하게 여기지 않는다. 안 친해도 그 사람의 인적 정보는 그대로 남겨 둔다.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다면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질보다는 양을 고집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마당발처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람이 타인과 관계 맺기에 있어서 활동적이며 외향적인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이 같이 얽히고설킨 숱한 관계 때문에 사람은 불행해질 수 있다. '자기만의 고유한 욕망과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은 누구인지를 잊은 채 타인의 요구에 맞춰 기능적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이별이나 죽음 같은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극복하기 힘든 고통의 나락에 쉽게 빠져버린다.
'대화'도 필요하지만, '고독' 역시 필요하다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을 연구했던 앤서니 스토는 사랑과 우정 등과 같이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두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관계과 행복감을 증폭시켜주는 것과 관련해서 비례하지 않는다고 했다. 저자의 입장에 대해서 상반된 평가가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틀린 말은 한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트위터와 스마트폰을 즐겨 사용하면서도 그들은 '외롭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될까? 그리고 사람들 간의 대화를 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트위터는 어찌 하다 팔로워들에게 인간 아닌 인간처럼 대하는 존재가 되었을까? 그러한 현상이 자신의 주변에 친하다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정작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인간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 관계가 행복의 절대적 요소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 앤서니 스토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왔던 '고독'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걷어버리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고독의 장점 그리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가 '천재' 또는 '위인'이라고 생각하는 인물들 중에는 고독한 삶을 살다가거나 또는 그러한 삶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다. 글을 쓰는 작가나 화가, 음악가들은 훗날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될 위대한 '명작'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친다. '명작'을 탄생하기 위해서 고독한 삶을 감수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창작 활동 이외에는 타인과의 대화를 하는 인간 관계를 외면했으며 특별하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은 천재들은 고독할 수 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이며 창의력과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일수록 우울증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토는 대중들이 천재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을 고독의 장점으로 역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자신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말한다. 자신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때 그의 내면에서 진정한 '성숙'과 '통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감정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하며 창조적인 상상력을 증대시킨다. 칸트나 비트겐슈타인, 카프카, 기번, 고야 등 학자와 예술가의 빛나는 업적은 고독에 침잠하는 그들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고독을 느낄 수 있는 시간마저도 없는 현대인들

페르낭 크노프 <슈만을 들으며> 1883년
이 책에 소개하고 있는 재미난 사례를 인용하자면, 그리스의 시골 마을에서는 여자가 사랑하는 남편 또는 연인이 사별하면 5년 동안 애도할 수 있는 기간이 주어지는 풍습이 있다. 이 기간동안 미망인은 검은 옷을 입고 고인의 무덤에 매일 가고 고인과 대화를 시작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이러한 풍습을 통해 그리스 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슬픔의 감정을 치유할 수 있는 동시에 앞으로의 여생에 주어진 고독을 견뎌낼 수 있는 면역력이 자연스럽게 키워지게 된다.
그리고 19세기 중후반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에게는 매일 오후 시간에 혼자만의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시대 여성은 관습에 따라 자신의 욕구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살피는 데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그래서 오후의 휴식 시간은 자신의 마음을 절대 표현해서는 안 되는 의무에서 벗어나는 시간이었다.
두 풍습은 공통적으로 고독을 심리적인 상처를 나을 수 있게 만드는 치유의 수단으로 이해했다. 슬픈 일이 있으면 혼자서 충분히 느끼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근대 이후 사회의 주류는 고독을 무시하고 경계하는 쪽으로 변하고 말았다. 앞에서 소개한 그리스처럼 사별한 사람에게 얼마 동안 애도의 시간을 갖도록 해주는 문화도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고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하면서도 여유로운 시간을 주어지지 않는다. 유교문화의 우리나라에도 부모가 죽었을 때 아들이 상복을 입은 채 3년 동안 부모의 무덤 곁에 지내는 삼년상(三年喪)이 있었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삶에 얽매인 현대인들에게는 고인을 추모하고 그리워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러한 삶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독을 외부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상실, 고통, 슬픔 등의 감정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그대로 묻어들수록 과거의 좋지 않은 경험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또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슬픔과 고독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악순환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더 힘겨워지도록 만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면서도 동시에 독립적 동물이다
영국의 호스피스가 몇 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에서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5가지'를 제시해 우리나라에서도 눈길을 끈 적이 있었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5가지'를 살펴 보면 시한부 환자들이 가장 많이 후회되는 일로 꼽은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삶을 산 것'. 또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시도하지 못한 꿈들'을 후회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이 두번째로 후회하는 일로 꼽혔다. 일이 바뻐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나 배우자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이 그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내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않은 것' 인데 다른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솔직한 감정을 말하지 않아 정신적 피로가 쌓였다는 설명이다. 네번째와 다섯번째로는 '옛 친구들과 연락이 끊긴 것' , '변화를 두려워해 즐겁게 살지 못한 것'이 뒤를 이었다.
이 책에 의하면 인간은 한평생 살아가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충동을 느낀다고 한다. 하나는 다른 이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다는 충동이며, 또 다른 하나는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충동이다. 인간 마음 속에 그러한 충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고독은 우리 삶에 있어서 피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은 오래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했던 사회적 동물이라는 범주에만 포함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공동체 속에서도 본인 고유의 자아(Self)를 탐색하고, 타인들 앞에서 드러낼 줄 안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인간 관계를 중요시하고 싶어하는 충동에 집착하여 정작 자기 내면 스스로 되돌아보고 자신만의 독립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타인 중심의 인간 관계를 중요시하다보니 정작 자신에 대한 존재에 대해서 알아보지 못한 채 타인의 시선에 순응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에 대해 존중감을 뚜렷하게 지니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만 사랑 받는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 받는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혼자일 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하면 더 이상 타인과 타인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타인을 경쟁자로서가 아니라 상호적 관계를 맺고 사는 동반자로 여길 수도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