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접어들면서 예술작품을 비평하는 방법이 갖가지가 쏟아졌다. 캐나다 출신의 문학평론가 노스럽 프라이(Herman Northrop Frye, 1912~1991)는 신화비평을 개척했다. 그는 세상에서 창작되는 모든 작품의 원형은 신화 속에 있다고 봤다. 신화비평가들은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작품들에서 신화의 원형을 찾으려고 한다. 《비평의 해부》(한길사)는 역사주의 비평과 미학적 비평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화비평의 골격을 제시한 프라이의 대표 저작이다. 

 

 

 

 

 

《덤불동산》(The Bush Garden: Essays on the Canadian Imagination)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프라이의 문학비평서다. 프라이가 1940, 50년대에 발표한 10편의 비평 관련 에세이들을 모은 책으로 1971년에 출간했다. 번역본 초판은 1990년에 나왔다. 이 책의 부제는 ‘캐나다 문학비평’으로 되어 있다. 책의 주제에 맞게 설명하면, ‘캐나다 시문학 비평’에 가깝다. 프라이는 1950년대에 발표된 캐나다 시인들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미국 시문학과 차별화된 캐나다 시문학의 특성을 확립한다. 여기서도 신화비평에 대한 프라이의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프라이는 신화가 ‘시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는 열쇠’로 본다.

 

 

 

 

 

 

 

 

 

 

 

 

 

 

 

 

 

 

 

‘덤불동산(The Bush Garden)’은 캐나다인의 문화적 정서를 함축하는 제목이다. 광활한 자연 속에 살아가면서 키워진 캐나다인의 상상력을 의미한다. 프라이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집 《수잔나 무디의 일기》(The Journals of Susanna Moodie, 1970)에서 이 표현을 빌려 왔다. 애트우드는 현재 캐나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원래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수잔나 무디(Susanna Moodie, 1803~1885)는 영국 식민지 시절 캐나다에 활동한 여성 시인이다. 애트우드는 여성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캐나다인의 정서를 표현했다.

 

 

 

 

 

 

 

 

《덤불동산》에 소개된 캐나다 시인들 전부 생소하다. 캐나다 시를 접해보지 않아서 프라이의 비평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책에 인명 색인이 없어서 캐나다 시인들에 대한 정보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이 책을 산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책을 대충 넘기다가 반가운 이름을 만났다. 싱어송라이터로 유명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이 시인으로 소개되었다. 코헨은 1956년에 《신화를 비교해봅시다》(Let Us Compare Mythologies)로 첫 시집을 발표했다.

 

 

 

 

 

 

 

 

 

 

 

 

 

 

 

 

그는 시와 소설을 발표하다가 1967년에 첫 음반을 발표하면서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프라이는 시인으로서의 코헨을 호의적으로 보면서도 그의 기교를 비판한다. 지나친 감정 과잉이 독자들의 시적 경험을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그래도 프라이는 젊은 시인 코헨의 가능성을 내다봤다. 유대 신화, 기독교 신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코헨의 시를 캐나다 시인 중 누구도 쓰지 못한 독창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재미있게도 프라이는 시집만 비평하지 않는다. 캐나다 고등학생들의 시와 산문을 모은 문집에 찬사를 표하기도 한다. 그는 시를 마음껏 쓰고, 공감할 수 있는 관대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이 시를 쓰게 되면 시에 대한 사랑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시는 의지로 쓰이는 것이 아니며 사회 역시 의지로 시인을 배출할 수는 없다. 캐나다는 자국 내에서 좋은 시가 배출되길 강렬하게 열망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회의 의지가 교육에 나타나 있듯이 시를 읽을 때 훌륭한 시를 인식할 수 있는 세련된 시 독자층을 형성하는 데만 주력하고 있다. 젊은이에게는 반드시 시를 쓰도록 격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시를 잘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발견하는 지점에 이르면 시 쓰는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도록 격려해야 하는 주 목적은 시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에 대한 사랑을 기르고자 함이다. (《덤불동산》 88~89쪽, 글쓴이가 임의로 편집해서 인용했음)

 

 

캐나다와 한국은 닮은꼴이 있다. 두 나라 다 식민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자국의 문학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를 원한다. 드디어 캐나다는 숙원을 이루어냈다. 2013년에 앨리스 먼로가 노벨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건강하게 오래 산다면, 노벨상을 받는 두 번째 캐나다 작가 소식을 기대해볼 만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연말만 되면 고통스럽다. 언론과 독자들은 매번 ‘희망 고문’에 시달린다. 이 사회는 ‘좋은 시인’이 아니라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오기를 강렬하게 열망한다. 시는 독자들에게 푸대접받는다. 시집은 많이 나오는데 시를 읽는 사람이 많지 않다. 우리나라 교육은 시를 정형화된 방식에 따라 ‘해석’하고 ‘암기’하는 독자층을 만들어낸다. 시를 읽는 방법을 모르는 독자들은 동시대 시인의 시가 ‘해석 불가능’한 텍스트로 규정한다. 시가 난해하다고 불평한다. 독자가 시를 외면하는 상황은 단순히 시인들의 자질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시에 대한 사랑이 많이 모자라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0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ㅗ 덤불동산이란 책이 있었군요. 금시초문이었슴돠..
프라이 신화 비평 재미있죠.. 이 사람 영향으로 저는 시빌워도 신화에서 빌려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슴돠..

cyrus 2016-05-10 19:54   좋아요 0 | URL
《비평의 해부》는 아직 안 읽어봤어요. 분량이 두껍던데요. 인간은 신화를 엄청 좋아하죠. 그래야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에 좋은 구실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특히 박근혜, 이명박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신화’ 만드는 일을 좋아했었죠.
 

 

 

 

 

 

 

 

 

 

 

 

 

 

 

 

 

 

 

어제 썼던 글에 요네하라 마리의 이솝 우화 재해석을 소개한 적이 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에서 태양이 바람을 이겼다는 우화가 있다. 요네하라 마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다. 나그네는 태양의 의지를 자기 자신의 의지로 착각하여 옷을 벗었다. 그녀는 정신의 자유가 유지되려면 외부의 속박을 자각하고 있는 상황이 더 낫다고 말한다. 요네하라 마리의 해석은 비판적인 독서에서 비롯된 사고능력이다. 어떤 책을 읽고 예전에는 당연하게만 받아들였던 것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분명히 그 책은 읽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독서의 목적은 단지 지식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자신의 주체적 관점을 세우는 데 있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눈을 갖는 일이다. 중국 명대의 사상가 이탁오는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따라 짖고, 왜 짖느냐고 물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며 자신을 비판한다. 고전은 서평으로 작성하기가 어려운 책이다. 왜냐하면 ‘모두’의 생각을 내 생각인 것처럼 쓰게 되기 때문이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독서회를 만들면 안 된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꼭 봐야 직성이 풀리는 동물이지만, 기존의 해석에 쉽게 지배받는다. 서평을 작성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처음 고전 작품을 읽고 서평을 썼을 때, 정답에 가까운 해석을 찾으려고 했다. '정답'에 얽매이면 남이 했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착각하면서 쓴다. 이러한 독서와 글쓰기는 정형화된 답만 외워서 옮겨 적는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때는 정답을 요구하는 우리나라 교육 환경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고전을 읽는 방법을 몰랐다.

 

 

 

 

 

 

‘인문 고전 독서 붐’이 일어나면서 독서 전문가들은 고전 도서 목록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읽으라고 권한다. 이지성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 역사를 움직여온 위대한 개인, 조직, 국가 뒤에는 항상 탄탄한 인문고전 독서 전통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문 고전 독서가 ‘천재의 두뇌에 직접 접속하는’ 행위, 즉 인류의 스승들과 지속해서 정신적 대화를 나누는 일에 비유한다. 과연 고전은 천재의 두뇌가 낳은 위대한 책일까? 책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전이 어떻게 우상화되어 가는지 확인할 수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거의 읽히지 않은 책이었다. 그 당시 파리지앵들은 루소의 책 대신에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의 《파리의 풍경》을 읽었다. 메르시에의 책은 혁명 전의 파리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논픽션에 가깝다. 이 책이 불티나게 팔렸을 때, 루소와 볼테르는 평범한 작가에 불과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은 책의 위치가 크게 달라졌다. 아무도 메르시에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의 책을 읽어 본 사람도 없다. 생전에 메소니에보다 인기를 많이 얻지 못했던 루소와 볼테르의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다.

 

《논어》는 공자가 남긴 말을 정리한 것인지, 공자가 직접 쓴 책이 아니다.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보존하기 위해서 편집한 책이다. 그러면 공자의 제자들이 자신의 입맛대로 스승의 생각을 정리했을 가능성이 있다. 편집하는 과정에서 제자의 생각이 개입될 수 있다. 문장 하나만 가지고 제자들의 해석이 서로 충돌했을 것이다. 그래도 공자는 복 받은 사람이다. 생전에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해 전국을 떠돌았던 실패한 사람이다. 제자들의 노력 덕분에 공자는 ‘성인’으로 추앙받는 동시에 《논어》는 불멸의 고전이 되었다.

 

고전을 삐딱하게 읽으려면 가장 먼저 고전을 대하는 자세부터 ‘리모델링’해야 한다. 일단 고전을 무조건 읽어야 할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 통념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인류 역사를 관통한 위대한 생각도 현실과 맞지 않은 점이 분명히 있다. 고전은 저자가 당대에 던진 발언이며, 완벽한 책이 아니다. 고전에도 약점이 있다. 독자는 그 약점을 공약하면 고전을 비판적으로 읽어나갈 수 있다. 맹목적 수용은 무지보다 위험하다. 고전 읽기에 정답은 없다. 하나의 현상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생각이 다양하듯, 고전을 바라보는 눈 역시 제각각이다. 특정한 답은 없다. 고전 해석에 정답이 없으므로 우리는 고전에 대한 무수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이다. 서툴지만 진지하게 무언가를 찾아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구축하는 것. 그게 바로 고전 읽기의 매력이다.

 

 

 

※ 서평 이벤트에 응모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4-30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30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찔레꽃 2016-04-30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맹목적 수용은 무지보다 위험하다 --- 참, 공감가는 말입니다.

cyrus 2016-05-01 15:00   좋아요 0 | URL
긍정적인 면만 계속 보면, 잘못된 상황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경우가 있어요. 지식인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나비종 2016-04-30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국 책표지의 그림처럼 책을 관통하는 것은 꽂혀있는 열쇠를 쥐고 돌리는 자신의 몫이로군요.
저 역시 고전이 무조건 훌륭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오랜 시간을 거쳐온 만큼 그것을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보구요.
독서모임에 대한 cyrus님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얼마 전에 「공부할 권리」 를 가지고 하는 독서모임에 참여했는데요, 독후감을 낭독하니 한 분이 그러시더군요. 우리 같은 책 읽은 거 맞냐고요^^; 사실 그 책의 대주제는 ˝공부˝인데, 저는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글을 썼거든요. 다양한 관점은 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줍니다. 제가 님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ㅎㅎ

cyrus 2016-05-01 15:06   좋아요 1 | URL
맞아요. 고전을 받아들이는 나비종님의 입장이 제가 생각한 것과 비슷합니다. 가끔 독서 모임을 하면 기존에 알려진 해석을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설명하는 사람이 있어요. 본인은 그렇게 말하면 남들한테 유식하게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해요. 책을 깊이 읽은 사람은 저 사람의 생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얄팍한 속임수로 책을 대하는 자세를 좋아하지 않죠. 사실은 제가 독서 모임을 처음 나갔을 때, 남의 생각을 내 생각처럼 말한 적이 있어요. 그땐 독서 모임 분위기가 낯설었고, 철없는 마음에 남들 앞에 똑똑하게 보이고 싶었어요. 계속 그런 자세로 독서 모임에 나간다면, 시간 낭비입니다. ^^

yamoo 2016-05-01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공감합니다!

근데, 비판적으로 읽기가 힘듭니다. 2-3번은 정독하여 내용을 정확히 이해해야 하기에..^^;;

그나저나 정말 꾸준하게 이벤트에 응모하시는군요!ㅎ

cyrus 2016-05-03 13:12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책 한 번 완독한다고 해서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그런 착각에 잘 빠져듭니다. ^^

transient-guest 2016-05-05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지성의 책은 결과적으로 이지성을 `가진 자`로 만들어 주었지요... 애초에 작가로 들어선 계시가 돈도 벌로 잘 되려고 한 것이니까, 성공했지요... 제가 한때 이지성의 책을 꽤 열심히 읽었더랬습니다. 초기의 리뷰엔 평가도 좋게 했구요..그런데 책을 읽고 생각할 수록 이건 그냥 인문학을 가장한 성공학이란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cyrus 2016-05-26 16:20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T-guest님. 댓글을 지금 확인했습니다.

제가 군 전역을 하고 난 후에 이지성을 처음 알았습니다. 군인이었을 때 출판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어요. 군 생활 절반 정도 하고나니까 독서에 대한 욕망이 높았습니다. 전역하자마자 책을 많이 읽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지성의 책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냥 제가 읽고 싶었던 책을 골라 읽었어요. 지금까지 책을 많이 읽어놓고선 제대로 읽고 있는지 지금도 제 자신을 의심합니다. 알라딘에 독서 감상을 올리면 허접한 내용이 있고, 그 이유로 지적을 많이 받았습니다. 방식은 서툴러도 독서를 즐겁게 하면서 좋은 내용은 많이 배우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중입니다. 이대로 유지한다면 이지성의 책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 존중받지 못한 내 마음을 위한 심리학 심리학 3부작
박진영 지음 / 시공사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은 학벌에 번듯한 직장, 돈 많고 화려한 인생. 우리가 꿈꾸는 행복한 삶이다. 사람대접받기 위해 돈이 제일 중요한 지경이니, 개개인이 그렇게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에 대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끔은 하나같이 획일적인 꿈들이 불편하게 여겨진다. 누구나 이를 꿈꾸어야 할 때 실패한 인생들이 수두룩해진다. 물론 많은 사람이 좌절을 딛고 일어선다. 좌절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장점을 상기하면서 자기 가치를 유지한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실패에 큰 좌절을 경험하면 불행하다고 단정한다.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크게 휘청댄다. 한 번도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채 최고라는 가치만을 추구해온 사람들이다.

 

항상 만족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좌절을 향해 스스로를 내몬다. 그들에게 불만족은 습관이다. 하나의 성격이다. 불평과 불만, 그것은 언제나 그들의 삶 속에 함께하고 있다. 그들은 쓸데없이 힘을 소진한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그 순간에 우울증에 빠져든다. 기꺼이 칭찬을 받아들이질 못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재능을 의심한다. 그들의 내면에는 항상 배고픈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내면의 어린아이는 자라면서 거짓 자아를 만들어낸다. 세상과 타협해 사람들이 바라는 존재가 된다. 기대감에 떠밀려 자신의 욕구와 감정에 눈을 감아버린다. 이때 자신의 본모습에서 너무 많이 떨어진 사람들은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과 실패 같은 두려움에 대한 모든 것들이 아마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된 두려움이 아닐까 한다.

 

요즘 심리학 키워드는 자기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틀어 통찰할 필요가 있다. 미래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행동을 찾는 일은, 이미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결국, 자기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되새겨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를 알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반성에는 상당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 속에서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무가치한 자기 자신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올바르지 않은 자기반성이다. 불평을 털어놓는 과정을 통해 마음은 가벼워질지 몰라도, 자기를 알고 자아를 실현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리학을 공부한 박진영은 잘못된 자기 사랑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데 거들고 있음을 깨닫는다. 심리학을 공부한다는 그녀도 마음의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한다. 자기반성을 하지 않으면 건강한 인격이 향상되지 않아 자기애를 느끼지 못한다. 그녀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마음 깊숙이 웅크리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보려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완벽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 신경을 곤두세운다.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남을 이기고 성취하는 자기 모습을 꿈꾸게 되는 삶은 강하고 화려하게 자기 모습을 부풀려 상처를 가리고자 한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고에는 거의 언제나 커다란 왜곡이 숨어 있다.

 

인생에는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다는 당연한 이치를 외면한 채 오르막길만을 보여준다. 사람들끼리 상처와 기쁨을 나누면서 진솔한 관계를 맺기보다는, 부나 명예와 같이 눈에 보이는 가치에 따라 사람을 존경하고 멸시하고 순위를 매긴다. 이렇게 잘난 자기 모습을 지키고자 늘 고군분투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순간 공허하고 쓸쓸한 그늘에 감정이 지배당한다. 너무나 외로워진다. 누구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를 원한다. 만약 누군가가 고민을 들어주고,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해준다면 스스로 엄격해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요즘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존감을 느끼고 있는가? 지금까지 제대로 된 나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저 마음이 건강한 삶을 살고 싶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렇게 말이다. 이거야말로 가치 있는 삶을 위한 방법이다.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삶을 살아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멋진 일인지 마음 깊이 느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럭저럭 살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대단한 일임을 말입니다. (들어가며, 6)

     

앞으로 누군가가 내가 잘 살고 있는지 물어보면, 그럭저럭 살아간다고 대답하겠다. 부족한 점이 많아도 남의 행복에 억지로 흉내 내면서 살지 않는 것.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이 2016-04-27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좋아_

cyrus 2016-04-27 22:18   좋아요 0 | URL
`그럭저럭`을 국어사전에 찾아봤어요. `충분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라는 뜻이에요. 저는 이 말이 대충을 의미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부족해도 나만의 행복을 찾으면서 살아야겠어요. ^^

수이 2016-04-27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그만 읽고 자!!

cyrus 2016-04-27 22:18   좋아요 0 | URL
네. 편안한 밤 되세요. :)

알레프 2016-04-27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속마음을 들킨 기분입니다.

cyrus 2016-04-27 22:20   좋아요 0 | URL
제가 자존감이 약합니다. 이 책을 읽으니까 제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알레프 2016-04-27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부분에서 책은 위로가 되는 듯 합니다! 저도 저같은 부류를 뭐라고 칭하는지 책을 통해 알게되었습니다 ㅋㅋ

cyrus 2016-04-27 22:28   좋아요 1 | URL
독서가 누구나 하는 평범한 일상의 한 부분이지만, 전 책을 사거나 읽을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책이 완벽한 해답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스스로 보지 못한 점을 책이 알려줄 때가 있어요. ^^

알레프 2016-04-27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제규정을 해주니 문제해결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게 책이라는 친구를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만 듭니다

cyrus 2016-04-27 22:34   좋아요 1 | URL
제가 좋아하는 표현입니다. 사람 친구도 좋아하지만, 항상 제 곁에 있는 책 친구가 있으면 든든해요. ^^

즐거운상상☆ 2016-04-27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읽었어요~ 다른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 신경쓰고산다라는 말이 와닿네요ᆢ 제가 그러고 있거든요ㅠ 조금 바꿔봐야겠어요 저두^^

cyrus 2016-04-28 18:52   좋아요 0 | URL
제 글보다는 책에 있는 내용이 좋습니다. 저도 남의 신경에 맞추느라 피곤하게 살았어요. 저도 고쳐야겠어요. ^^

2016-04-27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28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6-04-29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뭐라하든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내 길을 가겠노라, 하는 자세로 살겠습니당~~~

cyrus 2016-04-29 20:09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그런 마인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ㅎㅎㅎ
 

 

 

 

 

 

 

르네 마그리트 가짜 거울』 (1928년)

 

 

 

눈꺼풀 형체 안에 둥그런 안구가 있다. 그런데 다시 보면 그것은 하얀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이다. 이 눈은 하늘을 보는 것인가, 아니면 하늘이 눈에 보이는 것일까. 눈이 하늘로 인식하는 순간 실제로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하늘이다. 이 그림의 제목은 가짜 거울(Le faux miroir)이다.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보려 했던 의식을 벗어날 때 겪게 될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 면을 부각하려고 마그리트가 가짜 거울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일 수도 있겠다. 마그리트는 그림으로 일상적으로 훈련된 인식의 틀을 바꾸려고 했다. 그는 자연 질서를 무시한 채 사물들을 엉뚱하게 배치한다. 낯설게 정지된 그의 그림은 관람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과연 시각이 느끼는 실재의 정체가 무엇이며, 회화를 통해 사람들이 과연 실재를 보고 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흔히 사람들은 보는 것이 전부이고 봤기에 옳다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고, 아는 만큼 본다.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인간에게 착각을 안겨줄 위험을 내포한다. 수용자의 의식에 의해 보이는 것이 실체가 다르게 망막에 맺힐 수도 있다. 여기서 수용자의 의식은 외부에서 주어진 문화적 산물을 의미한다. 발터 벤야민은 인간의 감각지각이 사회적 영향에 받아 변화하기 쉽다고 말했다. 우리가 보고 믿는 실재는 이데올로기나 관습, 문화 등 요소가 어우러진 프리즘에 굴절되면서 가공된다. 자유로울 것 같은 우리의 의식조차도 이미 외부조건들에 길들어 있다. 우리가 당연한 실재라고 봤던 것이 사실은 아주 유동적이며 가변적이다. 결국 눈은 외부조건들을 수동적으로 반사하는 거울과 같다.

 

오늘날 세계는 이미지 폭주 시대이다. 사진과 동영상으로 대표되는 이미지 세계는 급속도로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이미지는 즉각적·직관적으로 감정과 현상을 전달하는 장점이 있다. 현대의 소통 문화는 문자 텍스트에서 이미지 텍스트로의 권력 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 텍스트로 구축된 세계를 체험하고 있다. 진중권은 이 현상을 미디어 아프리오리(a priori, 선험적 형상)’라고 규정한다. 우리 일상에 침투하는 미디어의 힘을 톺아보면 미디어에 갇힌 눈의 실체가 드러난다.

 

보드리야르는 허구의 이미지가 실재를 지배한다고 했다. 광고는 하나의 상품에 현실과 상상이라는 이중적 존재를 부여한다. 광고를 받아들인 소비자의 눈은 만족과 쾌락을 얻는 환상을 바라본다.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가 역전되면 실재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위성방송을 통해 전쟁 뉴스를 바라보는 시청자는 전쟁을 스포츠 경기처럼 관람한다. 뉴스 화면의 이미지는 전쟁을 컴퓨터 게임처럼 만든다. 사라지는 것은 전쟁터에 흥건한 피와 병사들의 아비규환이다. 전쟁을 관람하는 시청자는 병사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보고 바로 느끼는 이미지가, 읽고 깨닫는 문자 텍스트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지의 범람은 현대인에게 참을 수 없는 사유의 경박함을 안겨줬다. 미디어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이미지가 난무할수록 현실의 본질은 흐려진다. 사유가 없는 이미지는 조작, 거짓, 착각의 위험이 있다

 

 

 

 

 

※ 진중권의 《미디어 이론》 책 앞날개의 저자소개에 있는 책 제목 오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4-15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15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 내 영혼에 조용한 기쁨을 선사해준
이하준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이틀 전에 《정희진처럼 읽기》(교양인, 2014년)의 독자 서평을 읽었다. 서평만 봤을 뿐인데도 ‘정희진처럼 읽기’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희진처럼 읽기》 서평의 글쓴이는 ‘정희진처럼 읽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뻔한 독서를 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했다. 정희진의 독서는 온몸으로 한 권의 책을 체득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래서 독서는 생각하는 노동이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을 몸에 이입하고 나면, 눈앞에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광활한 길이 펼쳐진다. 정희진의 독서 행위는 이하준 교수의 고전 읽기와 비슷하다. 책을 대하는 두 사람의 방식에 공통점이 있다. 독자는 책을 통해 자기 삶의 행로를 걸어보고, 그 과정에서 치열한 사유의 노동을 체험한다. 이하준 교수는 고전 읽기를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라고 비유했다. ‘오래된 생각’은 고전을 의미한다. 고전은 한 인간의 고민에서 우러나온 굵은 땀방울의 결실이다. 그 책 속에 오랜 세월 동안 흘린 사상가들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생각의 땀방울을 삶 또는 영혼 속에 스며들기를 원한다.

 

그러나 지적 열망의 포로가 되면, 고전을 무류성(無謬性)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한다. 가짜 지식인들은 ‘고전의 무류성’을 선포하여 하나의 교리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들은 자기 계발의 가장 근본적인 동력을 고전에서 찾는다. 인문학 장사꾼들은 고전 독서가 생소한 대중에게 과장 광고를 한다. 과거 무지의 죄를 청산하고, ‘성공’이라는 달콤한 천국으로 향하고 싶다면 고전을 읽으라고 권한다. 인문학 장사꾼만 믿고 따라 하는 고전 독서는 ‘생각 따라 하기’에 불과하다. 이하준 교수는 고전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리고 우리 삶과 세계에 맞게 고전을 재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오래된 생각’과 마주하면서 자유롭게 생각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데카르트는 하나의 진리를 만나면 확실한 내용이 남을 때까지 끊임없이 의심했다. 우리도 데카르트처럼 고전에 의심하고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래된 생각과 내 생각 사이의 대화’다. 여전히 고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무서워서 벌벌 떠는 독자들이 있다. 그런 분들에게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서문 읽기를 추천한다. 이하준 교수의 서문은 고전에 겁먹은 독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킨다. 이하준 교수는 우리에게 고전의 권위 앞에서 쫄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는다. 어려운 고전을 억지로 읽는 것보다는 읽고 싶을 때 골라 읽는 것이 고전을 읽는 자신만의 길이 된다. 여담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이하준 교수 이름 뒷글자만 비슷한 김어준의 명대사 “쫄지 마, 시바!”까지 있었으면 시원한 ‘핵 사이다’급 발언이 되었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냥 유명 철학자들의 주요 사상을 쉽게 풀어쓴 흔한 교양 인문학 서적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책은 단단히 잠겨 있던 생각의 서랍을 흔들리게 했다. 그 서랍 속에는 지난 한 달 동안 날 괴롭혔던 서평의 정의와 관련된 생각 덩어리들이 어지럽게 보관되어 있었다. 서랍을 열고 어지럽게 널린 생각 덩어리들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니체와 데카르트의 귀띔에 나는 ‘뻔한 독서’에 ‘뻔한 서평’을 작성하지 않는 법을 생각해봤다.

 

니체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하나의 시도’라고 말했다. 우리 삶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수많은 도전에 부딪힌다. 그러나 우리는 거대한 사회의 힘에 순응하는 순간 아무런 비판을 하지 못한다. 독서와 서평작성 행위도 마찬가지다. 책 또는 지식의 권위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그 속에 갇힌 채 안주하면, 꼿꼿하고 안정적인 주류의 관점만 따라가는 ‘뻔한 독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앵무새처럼 읊어대기만 하는 독서가’가 된다. 우리가 정말 정희진처럼 읽고, ‘오래된 생각’과 대화를 잘하려면 책 속의 지식 앞에 순종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책 속의 지식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능력은 ‘생각하는 노동’이다. 저자의 주장을 순순히 인정하기보다는 일단 직접 부딪혀서 맞는지 아닌지 과감히 비벼보자는 것이다. 당연히 서평도 독자에게 ‘생각하는 노동’ 임무를 부여해주는 좋은 일감이 된다. 같은 책을 읽고 느끼는 감상은 사람마다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름 있는 서평가의 글도 독자 자신들의 관점으로 비판할 수 있다. 아무리 글을 잘 써도 자신을 향한 합리적인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서평가나 독자는 지적 허영심에 눈이 먼 사람이다.

 

“아니야! 젊은 친구, 그건 아닐세.”

 

가만히 있던 존 스튜어트 밀이 내 생각을 가로막는다. 밀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다. 그래서 선한 의도가 있어도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 비판과 간섭은 상대의 자유를 방해하는 행위로 생각한다. 밀의 주장대로라면 책에 대한 상대방의 의견을 비판하는 자세는 그 사람의 생각하는 자유를 강제하는 행위가 된다. 그런데 나는 밀 선생의 절대적 자유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내 생각과 다른 상대방에게 인신공격하거나 명예훼손을 하지 않는 이상, 그를 비판하는 행위는 전혀 해가 없다. 튼튼할 것만 같았던 나의 지식이 쉽게 허물어지는 상황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시간만 지나면 그 고통이 싹 잊힌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폐허 한가운데에 새로운 지식을 구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책을 쓴 유명 저자나 서평가의 생각을 비판하는 행위가 무조건 전문성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다. 이하준 교수는 비판적 독서를 긍정하는 내 생각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그는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오해를 받아도, 의심하는 자아가 되라고 말한다. 물론 상대방을 비판하는 나의 관점이 잘못될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의 결점을 인정해야 한다. 결점은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민낯’과 같다. 책상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몽테뉴가 드디어 입을 연다. 몽테뉴는 성숙한 인간이 되려면 자신의 ‘민낯’을 마주 보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희진처럼 읽기’와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는 능력 있고 지적 수준 높은 사람들만 실천할 수 있는 특별한 행위가 절대로 아니다. 책 속의 진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독서는 ‘저항과 불복종’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 있는 행위다. 이것은 정희진만 이용할 수 있는 화려한 레드카펫이 아니다. 누구나 실천 의지가 있다면 자신만의 독서의 길을 발견하면서 걸을 수 있다.

 

 

 

 

※ 딴죽걸기

 

* 저자는 수많은 사상가가 쓴 고전 속 문장들을 꽤 많이 인용했다. 이하준 교수 개인이 직접 고전 원문을 읽으면서 인용문을 번역한 건지 잘 모르겠으나, 이하준 교수가 인용한 고전 도서들을 참고문헌 목록으로 따로 소개되지 않았다. 그가 특정 출판사의 고전 번역본을 참고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책 뒤편에 인용문의 출처를 알려주는 참고문헌 목록이 있어야 했다.

 

* 이 글 역시 적립금이 걸린 서평대회에 맞춰 정성 들여 쓴 서평이다. 시간이 있을 때 평소에 작성된 서평과 이벤트용 서평의 차이점을 비교해보시라. 해당 서평 이벤트 기한은 오늘까지다.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밤 9시부터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서평이 연달아 나오고, ‘공감’을 받은 서평만은 ‘화재의 서재글’ 뉴스피드에 등장할 것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6-02-28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쁜 서평대횐가?ㅋㅋㅋ
이책 서평대회 한 줄 몰랐네.
근데 꽤 괜찮은 책인가 보다.
정희진도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많이 하던데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ㅠ

cyrus 2016-02-29 11:04   좋아요 0 | URL
제가 서평집은 잘 안 읽는 편이에요. 알라딘에 접속하면 내용이 좋은 독자서평을 공짜로 볼 수 있으니까요. ^^

예스24나 반디앤루니스에는 출판사 서평대회를 많이 여나요? 알라딘에 서평대회가 줄어드니까 심심해요. 예스24, 반디 회원 가입해서 그쪽에 진행되는 서평대회에 참가하고 싶은 생각을 해봤어요.

stella.K 2016-02-29 13:51   좋아요 0 | URL
잘 안 해.
그런데 예스 24는 동아일보와 함께
서평대회를 금년 말까지 한다고 광고가 났네.
출판 6개월안에 나온 책을 1000자 내외로 써서 당첨되면
20만원 적립금 준다네.
확실히 알라딘 보다 그짝 동네가 기회가 많긴 하지.
북켄드 제도도 있고. 파워블로그 제도도 있고.
커뮤니케이션은 이쪽이 활발하긴 한데 말야.
관심있으면 기웃거려 보라구.

콜린 맥콜로우 소설 서평대회 하는가 본데
준비하고 있나? 얼마 안 남은 걸로 알고 있는데...
난 너무 늦게 알아서 손을 놓고 있다.
그건 참가해 볼만 한데.ㅠ

cyrus 2016-03-01 21:48   좋아요 0 | URL
어제 예스24 홈페이지 기웃거리다가 그 서평대회 확인했습니다. 예스24가 단단히 마음 먹고 동아일보와 손잡고 대회를 준비한 것 같아요. 이 서평대회에글 좀 쓰는 사람들이 몰릴 겁니다. 그러면 예스24 서평 수준도 높아질 거예요. 재밌겠어요. ^^

오후즈음 2016-02-2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늦게 알아 서평대회는 포기하고 천천히 읽어봐야 겠군요!

cyrus 2016-02-29 11:18   좋아요 0 | URL
책 내용이 괜찮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철학자의 사상을 쉬운 문장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사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덧붙입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철학사상의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이 책만 가지고 철학사상 전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단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