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접어들면서 예술작품을 비평하는 방법이 갖가지가 쏟아졌다. 캐나다 출신의 문학평론가 노스럽 프라이(Herman Northrop Frye, 1912~1991)는 신화비평을 개척했다. 그는 세상에서 창작되는 모든 작품의 원형은 신화 속에 있다고 봤다. 신화비평가들은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작품들에서 신화의 원형을 찾으려고 한다. 《비평의 해부》(한길사)는 역사주의 비평과 미학적 비평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화비평의 골격을 제시한 프라이의 대표 저작이다. 

 

 

 

 

 

《덤불동산》(The Bush Garden: Essays on the Canadian Imagination)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프라이의 문학비평서다. 프라이가 1940, 50년대에 발표한 10편의 비평 관련 에세이들을 모은 책으로 1971년에 출간했다. 번역본 초판은 1990년에 나왔다. 이 책의 부제는 ‘캐나다 문학비평’으로 되어 있다. 책의 주제에 맞게 설명하면, ‘캐나다 시문학 비평’에 가깝다. 프라이는 1950년대에 발표된 캐나다 시인들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미국 시문학과 차별화된 캐나다 시문학의 특성을 확립한다. 여기서도 신화비평에 대한 프라이의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프라이는 신화가 ‘시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는 열쇠’로 본다.

 

 

 

 

 

 

 

 

 

 

 

 

 

 

 

 

 

 

 

‘덤불동산(The Bush Garden)’은 캐나다인의 문화적 정서를 함축하는 제목이다. 광활한 자연 속에 살아가면서 키워진 캐나다인의 상상력을 의미한다. 프라이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집 《수잔나 무디의 일기》(The Journals of Susanna Moodie, 1970)에서 이 표현을 빌려 왔다. 애트우드는 현재 캐나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원래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수잔나 무디(Susanna Moodie, 1803~1885)는 영국 식민지 시절 캐나다에 활동한 여성 시인이다. 애트우드는 여성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캐나다인의 정서를 표현했다.

 

 

 

 

 

 

 

 

《덤불동산》에 소개된 캐나다 시인들 전부 생소하다. 캐나다 시를 접해보지 않아서 프라이의 비평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책에 인명 색인이 없어서 캐나다 시인들에 대한 정보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이 책을 산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책을 대충 넘기다가 반가운 이름을 만났다. 싱어송라이터로 유명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이 시인으로 소개되었다. 코헨은 1956년에 《신화를 비교해봅시다》(Let Us Compare Mythologies)로 첫 시집을 발표했다.

 

 

 

 

 

 

 

 

 

 

 

 

 

 

 

 

그는 시와 소설을 발표하다가 1967년에 첫 음반을 발표하면서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프라이는 시인으로서의 코헨을 호의적으로 보면서도 그의 기교를 비판한다. 지나친 감정 과잉이 독자들의 시적 경험을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그래도 프라이는 젊은 시인 코헨의 가능성을 내다봤다. 유대 신화, 기독교 신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코헨의 시를 캐나다 시인 중 누구도 쓰지 못한 독창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재미있게도 프라이는 시집만 비평하지 않는다. 캐나다 고등학생들의 시와 산문을 모은 문집에 찬사를 표하기도 한다. 그는 시를 마음껏 쓰고, 공감할 수 있는 관대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이 시를 쓰게 되면 시에 대한 사랑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시는 의지로 쓰이는 것이 아니며 사회 역시 의지로 시인을 배출할 수는 없다. 캐나다는 자국 내에서 좋은 시가 배출되길 강렬하게 열망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회의 의지가 교육에 나타나 있듯이 시를 읽을 때 훌륭한 시를 인식할 수 있는 세련된 시 독자층을 형성하는 데만 주력하고 있다. 젊은이에게는 반드시 시를 쓰도록 격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시를 잘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발견하는 지점에 이르면 시 쓰는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도록 격려해야 하는 주 목적은 시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에 대한 사랑을 기르고자 함이다. (《덤불동산》 88~89쪽, 글쓴이가 임의로 편집해서 인용했음)

 

 

캐나다와 한국은 닮은꼴이 있다. 두 나라 다 식민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자국의 문학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를 원한다. 드디어 캐나다는 숙원을 이루어냈다. 2013년에 앨리스 먼로가 노벨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건강하게 오래 산다면, 노벨상을 받는 두 번째 캐나다 작가 소식을 기대해볼 만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연말만 되면 고통스럽다. 언론과 독자들은 매번 ‘희망 고문’에 시달린다. 이 사회는 ‘좋은 시인’이 아니라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오기를 강렬하게 열망한다. 시는 독자들에게 푸대접받는다. 시집은 많이 나오는데 시를 읽는 사람이 많지 않다. 우리나라 교육은 시를 정형화된 방식에 따라 ‘해석’하고 ‘암기’하는 독자층을 만들어낸다. 시를 읽는 방법을 모르는 독자들은 동시대 시인의 시가 ‘해석 불가능’한 텍스트로 규정한다. 시가 난해하다고 불평한다. 독자가 시를 외면하는 상황은 단순히 시인들의 자질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시에 대한 사랑이 많이 모자라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0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ㅗ 덤불동산이란 책이 있었군요. 금시초문이었슴돠..
프라이 신화 비평 재미있죠.. 이 사람 영향으로 저는 시빌워도 신화에서 빌려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슴돠..

cyrus 2016-05-10 19:54   좋아요 0 | URL
《비평의 해부》는 아직 안 읽어봤어요. 분량이 두껍던데요. 인간은 신화를 엄청 좋아하죠. 그래야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에 좋은 구실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특히 박근혜, 이명박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신화’ 만드는 일을 좋아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