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피해야 할 출판사들이 있다. 이런 출판사들은 책을 엉터리로 만든다. 그리고 출판사 직원들의 노동권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이런 행태의 출판사들이 생각보다 많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유명 출판사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을 아는 독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출판계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실질적으로 표면화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출판업계를 제대로 파고들면 그 속 깊숙하게 묻혀있던 썩은 뿌리들이 줄줄이 나온다. 작년 말부터 어떤 출판사의 실체가 궁금해서 관련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과거부터 있었던 출판사의 저질스러운 행보를 최근에서야 알게 돼서 통탄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출판사는 우리 알게 모르게 스스로 썩어가고 있었다.
1956년 고정일 씨가 세운 동서문화사는 아동문학부터 인문고전까지 전 방위적 분야로 책을 내는 출판사다. 이 출판사가 자랑하는 대표 책들을 열거하면 열 손가락이 모자라다. 일본 대하소설 《대망》 세트, 《빨강머리 앤》 전집, 동서미스터리북스, 월드북 등이 있다. 그런데 동서문화사의 책 중에 일본어 번역본을 우리말로 중역한 것이 많다. 장르문학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중역 티가 심하게 나는 동서미스터리북스와 러브크래프트 전집을 최악의 번역으로 평가한다. 《빨강머리 앤》 전집 또한 엉터리 번역으로 악명이 높다. 이걸 돈 주고 산 독자들은 뭐가 되나. 눈 썩어가는 번역체를 꾹 참고 읽으라는 셈인가.
동서문화사의 나쁜 행보는 이게 전부가 아니다. 《대망》 세트는 정본이 아닌 저작권을 무시하면서 내놓은 해적판이다. 솔출판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제목으로 정본을 판매하고 있는데도 동서문화사는 뻔뻔하게 해적판을 판매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6년에 베른 조약에 정식 가입한 이후로 외국의 책을 저작권 동의 없이 만들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외국의 책을 함부로 베껴서 해적판을 만들고,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런데 조약 가입 이전에 나온 해적판은 막을 도리가 없다. 동서문화사는 법의 맹점을 이용하여 해적판 판매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본보다 저렴한 가격을 내세워 독자들을 공략한다. 적지 않은 저작권료를 내면서까지 정본을 내놓은 출판사가 불법 출판물을 판매하는 출판사 때문에 피해를 본다. 해적판 《대망》 세트를 둘러싼 동서문화사와 솔출판사 간의 갈등을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한기호 한국출판사마케팅연구소 소장의 블로그에 있는 글을 참고하면 된다.
※ 한기호 소장의 글 (링크, 북플에서는 링크 기능 불가)
나무위키의 ‘동서출판사’ 항목에 보면 ‘여러 책을 참고해서 번역한 책’이 많다고 지적하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동서출판사의 책을 꼼꼼하게 읽으면 ‘참고’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약간의 참고가 아니라 거의 베끼는 수준이다. 놀랍게도 이 출판사의 몰상식한 번역 수준을 지적한 글을 찾기가 힘들다. 그동안 우린 오랜 시간 동안 진동하고 있던 출판사의 썩은 내를 맡지 못했다.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 224번째 책 《어머니/밑바닥/첼카쉬》는 지식을만드는지식(지만지) 출판사의 《고리키 단편집》을 대놓고 베낀 책이다. 표절로 의심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동서문화사 판본의 번역체가 지만지 판본에 전부 수록된 작품들의 번역체와 비슷하다. 동서문화사 판본에 있는 표절 번역 작품은 다음과 같다.
마카르 추드라, 이제르길 노파, 첼카쉬, 심심풀이, 코노발로프, 스물여섯 사내와 한 처녀, 인간 (총 7편)
표절 의혹 증거로 직접 찍은 사진 자료를 공개한다. 위에 있는 사진은 지만지 판본, 아래에 있는 사진은 동서문화사 판본이다. 사진 속 글자가 보이지 않으면 내가 인용한 두 출판사 번역본의 문장들을 비교하여 확인해보시라.
* <첼카쉬> Scene #1
* 지만지 35쪽
남쪽 쪽빛 하늘은 먼지로 뿌옇게 흐려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은 마치 얇은 잿빛 면사포를 통해 내다보듯이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끊임없이 해면을 내리치는 노의 타격과 기선의 추진기, 비좁은 항구 안을 사방으로 달리는 터키 배와 다른 여러 돛단배들의 날카로운 용골(龍骨)이 가르는 물이랑 때문에 태양은 제 모습을 물 위에 비추지 못했다. 화강암에 갇혀 자유를 빼앗긴 해파(海波)는 미끄러져가는 거대한 기선의 중량에 짓눌리며 뱃전과 해변에 부딪히고, 찰랑이는 물결로 인해 만들어진 더러운 쓰레기들을 불평하듯 해변으로 밀어내고 있다.
* 동서문화사 537쪽
남쪽 푸른 하늘은 먼지로 뿌옇게 흐려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은 마치 얇은 잿빛 면사포를 통해 내다보듯 푸른 바다를 내리쬐고 있었다. 끊임없이 해면을 내리치는 노의 타격과 기선의 추진기, 비좁은 항구를 이리저리 오가는 터키 배를 비롯해 여러 돛단배들의 날카로운 용골(龍骨)이 가르는 물이랑에 태양은 물 위를 제대로 비추지 못했다. 화강암에 갇혀 자유를 빼앗긴 파도는 미끄러져 가는 거대한 기선의 무게에 짓눌리며 뱃전과 해변에 부딪칠 때마다 고통스럽게 거품을 흘리면서, 쓰레기에 더럽혀진 자신을 향해서 씩씩대며 불평을 마구 토해내고 있었다.
* 지만지 35쪽
닻을 내리는 쇠사슬 소리, 화물을 실은 화차를 연결시키는 굉음, 어디선가 포장도로 위에서 떨어지는 철판의 금속음, 나무의 거친 탁음(濁音), 짐마차의 덜컹거리는 소리, 때론 찌를 듯이 날카롭게 때론 탁하게 으르렁대는 고동 소리, 짐꾼과 수부와 세관원들의 고함 소리, 이 모든 소리는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노동의 음악에 용해되어 마치 더 높이 올랐다가는 공중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항구 위 낮은 하늘에 머문 채 불안하게 떨고 있는 듯했다.
* 동서문화사 537쪽
닻을 내리는 쇠사슬 소리, 화물을 실은 화차를 연결하는 굉음, 어디선가 포장도로에 떨어지는 철판의 금속소리, 나무의 둔탁한 소리, 덜커덕거리는 짐마차 소리, 때때로 찌를 듯이 날카롭고 탁하게 으르렁거리는 고동소리, 짐꾼과 뱃사람과 세관원들 고함. 이 모든 소리는 귀청이 떨어질 듯한 노동의 음악소리에 용해되어 공중에서 더 높이 올라 사라질까봐 두려운 듯 항구 하늘에 나지막하게 머무른 채 불안하게 떨고 있었다.
* <첼카쉬> Scene #2
사진 속 위에 있는 책은 '동서문화사' 번역본, 아래의 책은 '지만지' 번역본
* 지만지, <첼카쉬> 마지막 장
바다는 포효하며 육중한 파도를 물거품과 물방울로 부숴 해변 모래사장에 내던졌다. 비는 바다와 땅을 힘차게 때렸고 바람은 울부짖었다. 온통 포효와 아우성과 굉음뿐이었다. 비 때문에 바다도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곧 비와 파도는 첼카시가 누워 있던 자리에 남아 있는 붉은 반점과 해변 모래사장에 찍힌 두 사람의 발자국을 씻어버렸다. 그래서 이 황량한 해변에는 두 사람에 의해 연출된 작은 드라마를 기억할 만한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 동서문화사 575쪽
바다는 포효하며 커다랗고 육중한 파도를 물거품과 물방울로 부스러뜨리면서 해변 모래사장에 내동이쳐졌다. 비는 바다와 땅을 힘차게 때렸고 바람은 울부짖었다. 주위의 모든 것은 포효와 아우성과 굉음으로 가득 찼다. 비 때문에 바다도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곧 비와 파도의 물방울은 첼카쉬가 누워 있던 자리의 붉은 반점과 해변 모래사장에 찍힌 그들의 발자국을 씻어 버렸다. 마침내 이 황량한 해변에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연출된 짧은 드라마를 추억할 만한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 <심심풀이>
* 지만지 71쪽
초원은 황금빛으로 찬연히 빛났고 하늘은 푸르렀다. 무엇 하나 위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것들 중간에 내던져진 역사는 흡사 환상을 결여한 예술가가 부지런히 붓을 놀리다가 우연한 실수로 그림 한복판에 물감을 튀긴 것 같은 인상을 자아냈다.
매일 정오와 오후 네 시가 되면 어김없이 기차가 초원을 가로질러 달려와 역에 도착하고 2분 동안 정차한다. 이 2분은 역에 남아 있는 중요하면서도 유일한 위로다. 이 시간은 역무원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안겨준다.
* 동서문화사 735쪽
초원은 황금빛으로 찬연히 빛났고 하늘은 푸르렀다. 무엇 하나 위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자연의 위대한 위에 내던져진 역사는 환상이 부족한 어느 예술가가 잘 그려진 그림 한복판에 실수로 물감을 엎지른 듯하다.
매일 정오와 오후 네 시가 되면 초원을 가로질러 온 기차는 역에서 2분 동안 정차한다. 이때 기차는 2분간 중요하고 필요한 휴식을 갖는다. 또한 이 시간은 역무원들에게도 무한한 감동을 안겨준다.
* <심심풀이> Scene #2
※ ‘카자프’에 대한 두 출판사 번역본의 주석을 비교해보시라. 주석 내용마저 완전히 똑같다.
* 지만지 79쪽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모이를 준다, 보살핀다 하며 새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친구들에겐 별 관심을 쏟지 않는다. 그는 루카를 율무기, 고모조프를 카차프라고 부르기도 하고, 면전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아첨꾼, 계집년들”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러고는 주먹세례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루카는 그러려니 하면서 그의 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지만 한번 화가 났다 하면 한참을 쉬지 않고 심한 욕설을 퍼부어댔다.
“교양이라곤 일 원 반 푼어치도 없는 수비대 졸병 같으니. 이 개뼈다귀보다도 못한 놈아! 넌 네놈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수아비라는 걸 알기나 해? 여태껏 대포 밑에서 개구리를 쫓는 일이나 양배추 따위를 지키는 일 말고는 해본 게 하나도 없는 놈이... 네놈 할 일이 뭐 있겠어? 어서 메추라기한테나 가시지, 새 대장 양반아!”
* 동서문화사 739쪽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새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친구들에겐 관심을 쏟지 않는다. 그는 루카를 율무기, 고모조프를 카차프라고 부르기도 하고, 코앞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아첨꾼, 계집년들”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는 말버릇 때문에 주먹 세례가 끊임없었다.
루카는 그러려니 하면서 그의 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한번 화가 났다 하면 한참 동안 쉬지 않고 심한 욕설을 퍼부어댔다.
“교양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수비대 졸병 같으니. 이 개뼈다귀보다도 못한 놈아! 넌 네놈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수아비라는 걸 알기나 해? 여태껏 대포 밑에서 개구리를 쫓는 일이나 양배추를 지키는 일 말고는 해본 것도 없으면서...... 네놈 할 일이 뭐 있겠어? 어서 메추라기한테나 가시지, 새 대장아!”
* <코노발로프>
* 지만지 111쪽
건성으로 신문을 훑어보던 나는 코노발로프라는 성(性)이 눈에 띄자 흥미를 느껴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어젯밤, 지방의 어느 감옥 3호실에서 무롬 출신의 한 소시민인 40세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코노발로프가 벽난로 통풍구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는 프스코프에서 방랑 생활을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다른 죄수들과 함께 고향으로 압송된 자다. 감옥 당국에 따르면 이자는 언제나 조용하고 과묵하며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담당 의사는 코노발로프의 자살 원인으로 우울증을 지목했다 한다.
* 동서문화사 758쪽
건성으로 신문을 훑어보던 나는 코노발로프라는 성(性)이 눈에 띄자 단숨에 그 글을 읽어 내려갔다.
어젯밤, 지방의 어느 감옥 3호실에서 무롬 출신의 한 시민인 40세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코노발로프가 벽난로 통풍구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는 프스코프에서 방랑 생활을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다른 죄수들과 함께 고향으로 압송된 자였다. 감옥 당국에 따르면 이 사람은 언제나 조용하고 과묵하며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담당 의사는 코노발로프의 자살 원인으로 우울증을 지목했다.
동서문화사 판본의 번역자는 최홍근 씨다. 동서문화사 편집위원이라고 한다. 동서문화사 출판사의 또 다른 문제가 ‘유령 번역자’를 내세우고 책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홍근 씨는 하이파이저널이라는 오디오 전문잡지를 발행한 사람이 맞다. 출판사는 최 씨의 러시아어과 졸업 이력만 믿고 고리키 작품 번역을 맡긴 걸까, 아니면 번역자명에 최 씨 이름만 빌린 걸까?
정말 최 씨가 직접 번역을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지만지 번역본은 러시아어로 된 고리키 전집을 참고해서 번역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동서문화사 번역본에서는 번역으로 참고한 러시아어 판본에 대한 정보가 단 한 줄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니 최 씨의 번역 이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가 번역한 책은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것들이다. 《어머니/밑바닥/첼카쉬》와 《어린시절/세상속으로/나의 대학》 단 두 권뿐이다. 그런데 최 씨의 약력을 한 번 보시라.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번역했다고 적혀 있다. 아직 나오지 않은 책을 번역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닥터 지바고》가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로 나온다면 처음부터 ‘근간 예정’이라고 밝혔어야 했다.
최 씨는 자신이 직접 지은 책도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알라딘이나 네이버 책 정보를 검색해보면 《음악의 숲에서》의 저자명이 ‘유혜자’로 나온다. 유혜자 씨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의 번역자다. 최 씨가 썼다는 《음악의 숲에서》는 암만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최 씨가 지은 책의 출판사명이 없는 것도 이상하다. 거짓으로 저작 이력을 부풀렸을 가능성이 있다.
더 웃긴 사실은 따로 있다. 원전 번역이라고 속인 지만지 번역본을 참고한 동서문화사 출판사다. 그런데 동서문화사 번역본은 지만지가 삭제한 내용을 충실히(?) 번역했다. 그래도 두 권 다 도긴개긴이다. 두 권의 책을 다 같이 보느라 눈 배렸다. 이 두 권의 엉터리 책을 안 본 눈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