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새판짜기 - 박정희 우상과 신자유주의 미신을 넘어서
곽정수 엮음 / 미들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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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판을 짠다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말을 내가 익숙히 자주 듣는 경우는 무엇보다 바둑에서다. 바둑에서 '판을 짜다'라는, 일종의 은어 혹은 전문어가 있는데, 이 말은 주로 바둑에서의 포석(布石)에 해당한다. 바둑 용어인 '포석'이란 말이 여러 상황에서 비유적으로 쓰이지만, 이 말의 기본적 의미는 돌을 벌여놓는다는 것이다. 바둑을 두자면, 361점의 빈 바둑판에 흑백을 교차해 가며 한 점 한 점 두어가게 되는데, 이 때에 허공과도 같은 빈 바둑판에 효율적으로 돌들을 배치함으로써 "집의 기초와 기둥을 세워놓는" 것이 바로 포석이다. 바둑은 '집'이 많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자기 돌을 경계로해 둘러쌓인 빈 점들이 바로 집인데, 결국 이 집들의 대략적인 경계짓기가 포석인 셈이다. 이것을 얼마나 능률적으로, 효과적으로, 균형있게 짜느냐에 따라 승부의 8할 이상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는데, 초절정 고수들의 대국에서는 돌 몇 점만 놓아보아도 그 판의 승부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바둑에서 포석이 무척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둑의 최고수들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바둑기사들은 이 포석을 무척이나 중시하고, 주어진 제한 시간을 거의다 이 포석 단계에서 허비한다. 한 칸을 높게가느냐, 한 칸을 더 벌리느냐, 상대의 돌을 공격하느냐, 내 집을 보다 튼튼히 지켜두느냐를 신중히 고민하고 길게는 100수 이상을 머릿속에 놓아보며 착점을 결정한다. 그런데, 그 착점에 따라서, 즉 한 칸을 높이느냐 낮추느냐, 한 칸을 더 가느냐, 덜 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바둑 성향이랄까, 스타일을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른바 실리형이면서 공격적인 이세돌 9단 같은 경우 내 집을 지키기보다는 상대편 집을 깨고, 이왕 벌리는 것은 최대한 많이 벌리고 하는 것인데, 그 차이는 단 한 칸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많다. 반면 이창호 9단은 최대한 침착하게 자신의 집을 신중히 지켜가며 튼튼하고 안정적으로 포석을 짜나가는데 그 차이는 한 칸을 높이느냐 낮추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이창호와 이세돌의 바둑 스타일을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단 번에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이 차이가 그리 크게 표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바둑이 공격적이냐 아니냐, 실리형이냐 세력형이냐 하는 것은 포석에서의 아주 미묘하고 미세한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그 차이가 눈에 띄게 다른 것은 아니란 얘기다. 그들 모두 포석에서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 아무리 집을 지키고 실리를 추구하는 바둑 기사라고 해도 그 조화와 균형에 맞지 않으면 실리가 아닌 세력을 지향하고 집이 아닌 공격을 먼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바둑에서는 "판을 제대로 짰다"라고 하는 것이다. 무조건 공격하고, 무조건 집지키고 해서는 어느 누구도 바둑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까 이창호나 이세돌이나 그 바둑 스타일이 많이 다르지만 판을 짜는데 있어서는 이런 모든 것들을 고려해서 포석을 짜나가는 것이다.

바둑 얘기를 길게 했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무엇이든지 바둑에서의 포석을 짜는 원리처럼 모든 상황과 조건의 조화와 균형 아래 각각이 추구하는 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에 우리는 판이 '제대로' 짜였다는 언사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자인 김상조, 유종일, 홍종학 세 사람과 한겨레 기자 곽정수 씨가 내놓은 『한국경제 새판 짜기』를 읽고 든 생각이 바로 이런 것이다. 무엇보다 한 번 잘못 짜면 돌이킬 수 없는, 설령 되돌리더라던 그 폐해가 클 수 밖에 없는 것이 한 나라의 경제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이 사람들이 고민하고 토론한 결과물인 이 책이다. '새판'을 짜 보겠다는 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새판'이 아닌 '제대로' 된 '새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경제학자들이 내어 놓은 '판'이 어떤 것인가를 읽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제대로 짜일 수 있는 판일지를 가늠해 보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이 양 극단의 대립 가운데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으면서 합리적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개혁론자들이 있다. 시장은 강조하되 시장의 실패를 보완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경쟁을 환영하되 공정한 경쟁의 규칙을 중시하고, 개방을 지향하되 준비된 개방을 하자는 입장이다. 시장도 국가도 절대적 선일 수 없으며,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경제를 위하여 실용주의적으로 시장과 국가가 적절하게 역할을 분담하자는 입장이다. 이러한 철학적 바탕 위에서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 양극화가 아닌 동반성장을 추구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룩하자는 것이다.(7~8쪽, 글자 색은 원저.)  
   

 "이런 입장을 공유하는 학자들"이 바로 저자들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시장만능주의에서 시장합리주의로", "재벌 중심에서 중소기업 중심으로", "선 성장에서 동반 성장으로", "요소투입형 경제에서 사람 중심 지식경제로" '새판'을 짜는 것이다. 시장합리주의 아래 중소기업이 중심이 되어 성장과 분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람 중심의 지식경제가 종합하자는 이들이 추구하는 한국경제의 '새판'이다. 이들에 의하면 이것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 경제를 민주화 하자는 얘긴데, 그렇다면 이들의 판단은 지금 한국 경제는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경제를 지배하는 근본은 자본이고, 그 자본은 결코 민주적이지 못한 것을 속성으로 하고 있고, 그것을 민주화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은 차치하고, 이들이 추구하는 이른바 경제민주화가 속살을 차분히 들어보는 것이 이 '새판'의 '제대로' 가능성을 가름하는 우선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는 해방 이후 1980년대 말까지 서구사회의 중상주의적 국가개입이 전면화된 상황 속에서 갑자기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주의적 과제의 완성과 진보진영의 보완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신자유주의로 건너가 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사회는 과거 중상주의적 잔재의 청산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시장의 야만성, 즉 신자유주의 문제를 통제할 수 있는 국가의 공공성도 확립하지 못한 채 오늘날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39~40쪽. 글자 색은 원저.)  
   

이들이 진단하는 현 한국 경제의 문제점은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달리 하면 "중상주의적 잔재의 청산"을 통해 '국가개입'을 줄이고, "국가의 공공성 확립" 아래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견해로 들린다. 이런 견해의 정반대에 있는 또다른 진보적 경제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장하준과 정승일이다. 이들이 이 책에서 스스로 말하는 단어들을 섞어보면 이들의 견해를 진보적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중상주의적 잔재의 청산에 어느 정도 수긍을 하더라도 신자유주의의 수용 가능성을 내비친 이들의 견해에는 다분히 우려스럽니다. 한국경제가 '국가의 공공성을 확립'하더라도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배후 세력에게는 그것이 먹혀들 것인가에 의뭉스러움을 감추지 못 하겠다는 것이다.

장하준과 정승일은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이들보다 이른 시기에 이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박정희 시절은 중상주의적 경제 정책을 어느 정도 수용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적극적 '국가개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부분적 수용에도 다분히 우려를 표명한다. 장하준이 최근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보여주는 것을 토대로 한다면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선진국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장하준 등의 주장에 대체적으로 공감하면서 이 책 『한국경제 새판 짜기』에서의 이들의 주장에는 우려가 남는다.

   
 

중기업 또는 중견기업이 그 나라의 생산과 고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영세기업이나 대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경제구조 개혁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이자 성장과 고용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적인 방향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재계나 정부가 주장하는 재벌 중심의 투자 확대를 통한 이른바 떡고물 전략, 적하효과(Trickle down effect) 전략은 U자형의 구조를 점점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73쪽.)

세계 각국에는 분명히 재벌기업, 기업집단의 지배구조에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도록 규제하는 장치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장치가 없이 유일하게 출자총액제한제도와 금산법 정도가 있습니다. 그것조차도 지금 무력화시키면서 외국에는 그런 규제가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외국에는 훨씬 강력하고 효율적인 규제가 있는데도 말입니다.(104쪽.)

당시 루스벨트는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와 똑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대재벌 기업집단은 모든 부를 차지하는 반면 중소기업, 노동자, 농민들은 못살게 되어서 대공황이 왔고, 이런 상황이 지속하지 않게 하려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비슷한 상황인데, 그걸 좌파로 몰아붙이며 비판을 하고 있으니 답답한 겁니다.(105쪽.)

재벌은 더는 우리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재벌의 좋은 일자리는 소수 노동자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욱이 외환위기 이후 좋은 일자리는 대폭 줄어들고 있어요. 이것을 우리가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재벌 중심 체제가 더는 지속하여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을 알려주는 자료지요.(125쪽.)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 재벌과 기업집단의 지배구조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는 대체적으로 옳다. 무엇보다도 재벌만이 득세하는 이 경제구조는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오늘날의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재벌 개혁이나 중소기업 육성이 극단에서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여기에도 조화와 균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재벌을 개혁하고 그것을 감시하고 견제할 국가적 통제 수단과 정책의 마련은 필요하되, 그 재벌을 해체하는 것이 아닌 보다 투명성을 갖추고 효율적인 경제력을 가진 기업으로 변모 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 재벌을 통해 먹고 살 수 있다는 적하효과에 대한 이들의 비판을 동의하면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바람직하게 유기적으로 작동되는 경제 구조가 한국사회에 적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 장하준의 견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하준의 견해와 이들의 재벌 개혁에 대한 강조점이 한 곳에서 만나서 보다 효과적인 경제 구조 개편의 대안이 나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양극화는 우리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세계화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식의 논리는 정치인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218쪽.)

우리가 양극화라는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 고민의 출발점이 바로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한국 경제의 현실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화되어 있는 나라와는 너무나 다른 상황에 부닥쳐 있기 때문에 선진국과는 반대방향으로 정책을 끌고 가야 할 필요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도외시하고, 재계나 기득권 세력이 '전 세계가 복지시스템, 세율구조, 노사관계를 이런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따라가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한국의 양극화 문제를 더욱더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양극화 해소대책 측면에서는 정부의 정책적 의지와 일관성이 가장 강조되어야 할 요소라고 생각해요.(236~7쪽.)

 
   

이런 견해에 나는 동의한다. 최근 양극화 문제가 최대의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는데, 지배계층의 논리에 따라서는 결코 양극화가 해소될 수 없을 것이다.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강조하는 이들의 견해는 탁월하다. 이 중 홍종학 교수는 5가지 정도의 대책을 제시하는데, "안정적 경제운영, 공정한 경쟁제도 확립, 경제성장 과실의 공유, 사회적 보험 강화를 통한 패자부활전의 활성화, 소득재분배 및 후생지원"이 그것이다. 나는 이것이 지금 상황에서 성장의 문제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들도 이 부분에서는 국가의 개입을 어느 정도 요구하는 것으로 읽히는 데, 이 문제는 이렇듯 강제되어야 할 성격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아울러 이들은 "하루빨리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장치를 철저하게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이것이 "세계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는데 의문은 있지만, 그걸 차지하더라도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적극적 대책 마련은 시급한 문제이다.

이들이 끝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한국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기존의 낡은 성장모델은 더는 유효하기 않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른바 "지식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로는 개혁의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는 민주적 리더십이, 밑으로는 더욱 성숙하고 능동적인 주권자들의 참여가 서로 맞물려야 한다." 또한 '제도 변화와 함께 그것이 실제 제대로 작동하는데 꼭 필요한 다양한 사회적 자본들의 축적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식경제라는 패러다임과 그에 따른 정책과 제도의 변화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기존에 대한 전면적 거부는 어쩌면 비현실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지적을 이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내놓고 있으니, 이 점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들이 장하준 등의 견해에 대해 "이분들이 주장하는 것은 스웨덴식의 사회민주주의 방식 같은데, 실제로는 재벌 편향적인 주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에 굉장히 가깝게 느"낀다는 어떻게 들으면 모욕적인 발언을 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의 일리가 있는 지적이면서도 대협할 수 없는 어떤 한계를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시장을 믿지 못하는 자들과 국가를 믿지 못하는 자들이 합치할 수 없는 그 거리가 이들을 멀게만 느껴지게 한다. 주주자본주의냐,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냐 하는 어려운 얘기들이 그 안에 많이 들어 있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많은 부분들에서 공감하지만 '합리적 시장'에 대한 이들의 희망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정 정도의 수용가능성을 내비치는 언사에서는 문제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런 차이들을 적절히 조절하고 보다 바람직한, 그래서 정말 '제대로' 판, 한국 경제의 '새판'이 짜여지길 바란다. 이것이 이들만의 논의를 벗어나 보다 확대되고 다양한 견해들을 조율하고 조화할 때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에 더 많은 이들의 제대로 된 판 짜기, 한국 경제의 신 '포석'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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