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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평점 :
올더스 헉슬리가 그리고 있는 ‘멋진 신세계’는 어찌 보면 정말 멋질지도 모른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관계로부터의 해방’, ‘물질(부)로부터의 해방’, ‘권력으로부터의 해방’, 무엇보다 ‘이성(理性)과 성(性)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왔으니 말이다. ‘부(富)’를 위해 ‘권력’을 위해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상실하면서까지 미치도록 달음박질하지 않아도 되고, 그 뒤에 개별적으로 찾는 성(性)의 음밀함을 한쪽 구석에서 갈구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말이다. 자신과 그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고통과 불합리, 불만과 고민 등이 존재하지 않는 과학으로 완성한 그런 세계야 말로 ‘멋진 신세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지녀야 할 이성과 감성 그리고 정서가 모두 통제된 체 본능만이 존재한 신세계에는 진정한 인간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주체성이 인정되는 존재, 주체를 객관화시킬 줄 아는 존재, 무지를 깨닫고 회복을 꿈꿀 줄 아는 존재인 인간은 그 곳에 없었다. 금기와 통제, 사회만 있고 독립체는 없는 그 곳, 꿈과 희망이 없는 그 곳은 과학으로 복제된 인간들에게만큼은 ‘멋진 신세계’였다.
자칫 평등하게 보일지 모를 ‘멋진 신세계’의 구조는 병 속의 배아 때부터 모순된 평등의 주입만 있을 뿐, ‘기회’란 단어는 사어(死語)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각자 주입된 강요 속에 제기능 역할에 충실하고 내일이 없는 오늘의 유희적 인간에 무한 행복을 느낄 뿐이다. ‘소마’적 삶을 찬양하고, 소마를 위한 삶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유희는 곧 미덕이고 진리이며 행복이다. 똑같은 정서와 공유하는 성(性) 속에서 갖는 삶의 환희! 그리고 행복! 어쩌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갖기를 바라는 동경의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배타성을 띤 문명의 이기에 ‘멋진 신세계’의 과학은 그 배타성마저도 허용하지 않은 채 순백의 무결점 세계를 만들어냈지만, 오히려 문명이라 일컫는 모든 것을 타인화시켜 버렸다. 개인이 감정을 품을 수 없게 만들었고, 다른 어떤 완전한 것의 일부가 되게 만들었다.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게 만들었고, 눈앞에 보이는 일 외에는 일체 생각하지 않게 만들었다. 계속적인 확인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타인 따위에 반추하게 하여 늘 같은 자리에 놓여 있게 만들었다. 이것이 과학이 낳은 문명 ‘멋진 신세계’의 모습이었다.
‘멋진 신세계’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진정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성(性) 자체도 개인의 소유의 개념이 아닌 만인의 소유 개념으로 일반화시켜 버렸다. 그들에게 소유는 반사회적이고 있어서는 안 될 하나의 이적 행위였다. 그들의 삶은 개인을 위한 삶이 아닌 만인을 위한 삶 속의 개인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최고의 권위를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님을 안다.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분명 나의 주인은 나이고 나의 삶은 나의 주체성과 자발성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행복에 대한 정의, 올바른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역설에는 쉽사리 부정하기 어렵다. 어찌 보면 행복은 불행의 보상이고, 만족하는 생활은 불행으로부터의 획득한 처절한 투쟁이 맞기 때문이다. 또한 기피해야 할 불편한 매력이나 유혹과의 투쟁으로 얻어낸 것 또한 행복이기에 일정 정도 인정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이 책 『멋진 신세계』에 대해 나는 반대 의견을 분명히 하면서도 인정하고 수긍하는 자기모순에 빠진 나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무념의 상태에서 이미 설계된 삶대로 살아가는 것과 고통과 물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 그리고 성적 자유 등은 부러움을 낳는다.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나 능력과 신분적 배경에 따른 차등이 존재하고, 벗어날 수 없는 사회윤리와 생명윤리에서의 일탈을 한번쯤은 꿈꿔보기 때문이다. 순결은 정열을 의미하며 신경쇠약을 의미하고, 정열과 신경쇠약은 불안정을 낳는다는 말이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안정이 문명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과학의 발달이 문명의 발달과 완전성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기계의 발전과 의약품의 발전이 곧 행복이라는 등식은 인간 세계가 갖는 무수히 많은 것들의 가치를 부정하며, 인간의 정의와 의미 그리고 그 자체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세계가 훌륭하게 되는 것이며,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 세계의 질서가 훌륭해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안정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가 있기 때문에 발전이 있고, 그 발전은 사회를 역동적으로 만들고 인간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든다. 따라서 문명에 있어서의 잘못은 과학이 보다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정반대인 인간의 기계화에 집중했기 때문에 문명은 위기를 몰고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동인형적 일치’적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이고 그러한 삶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했을 때 즉시 자기검열에 들어가는 오늘날의 모습에서 『멋진 신세계』의 모습은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단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현재의 모습을 과학이 기술을 통해 보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못 박아 놓았다는 것뿐이다.
과학은 인간 이성과 인간의 정체성을 동반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진정한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할 것이고, 유토피아의 도래에 희망을 걸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이성은 과학 그 위에 존재해야 할 가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