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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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가 그리고 있는 ‘멋진 신세계’는 어찌 보면 정말 멋질지도 모른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관계로부터의 해방’, ‘물질(부)로부터의 해방’, ‘권력으로부터의 해방’, 무엇보다 ‘이성(理性)과 성(性)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왔으니 말이다. ‘부(富)’를 위해 ‘권력’을 위해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상실하면서까지 미치도록 달음박질하지 않아도 되고, 그 뒤에 개별적으로 찾는 성(性)의 음밀함을 한쪽 구석에서 갈구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말이다. 자신과 그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고통과 불합리, 불만과 고민 등이 존재하지 않는 과학으로 완성한 그런 세계야 말로 ‘멋진 신세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지녀야 할 이성과 감성 그리고 정서가 모두 통제된 체 본능만이 존재한 신세계에는 진정한 인간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주체성이 인정되는 존재, 주체를 객관화시킬 줄 아는 존재, 무지를 깨닫고 회복을 꿈꿀 줄 아는 존재인 인간은 그 곳에 없었다. 금기와 통제, 사회만 있고 독립체는 없는 그 곳, 꿈과 희망이 없는 그 곳은 과학으로 복제된 인간들에게만큼은 ‘멋진 신세계’였다. 

자칫 평등하게 보일지 모를 ‘멋진 신세계’의 구조는 병 속의 배아 때부터 모순된 평등의 주입만 있을 뿐, ‘기회’란 단어는 사어(死語)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각자 주입된 강요 속에 제기능 역할에 충실하고 내일이 없는 오늘의 유희적 인간에 무한 행복을 느낄 뿐이다. ‘소마’적 삶을 찬양하고, 소마를 위한 삶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유희는 곧 미덕이고 진리이며 행복이다. 똑같은 정서와 공유하는 성(性) 속에서 갖는 삶의 환희! 그리고 행복! 어쩌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갖기를 바라는 동경의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배타성을 띤 문명의 이기에 ‘멋진 신세계’의 과학은 그 배타성마저도 허용하지 않은 채 순백의 무결점 세계를 만들어냈지만, 오히려 문명이라 일컫는 모든 것을 타인화시켜 버렸다. 개인이 감정을 품을 수 없게 만들었고, 다른 어떤 완전한 것의 일부가 되게 만들었다.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게 만들었고, 눈앞에 보이는 일 외에는 일체 생각하지 않게 만들었다. 계속적인 확인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타인 따위에 반추하게 하여 늘 같은 자리에 놓여 있게 만들었다. 이것이 과학이 낳은 문명 ‘멋진 신세계’의 모습이었다. 

‘멋진 신세계’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진정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성(性) 자체도 개인의 소유의 개념이 아닌 만인의 소유 개념으로 일반화시켜 버렸다. 그들에게 소유는 반사회적이고 있어서는 안 될 하나의 이적 행위였다. 그들의 삶은 개인을 위한 삶이 아닌 만인을 위한 삶 속의 개인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최고의 권위를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님을 안다.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분명 나의 주인은 나이고 나의 삶은 나의 주체성과 자발성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행복에 대한 정의, 올바른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역설에는 쉽사리 부정하기 어렵다. 어찌 보면 행복은 불행의 보상이고, 만족하는 생활은 불행으로부터의 획득한 처절한 투쟁이 맞기 때문이다. 또한 기피해야 할 불편한 매력이나 유혹과의 투쟁으로 얻어낸 것 또한 행복이기에 일정 정도 인정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이 책 『멋진 신세계』에 대해 나는 반대 의견을 분명히 하면서도 인정하고 수긍하는 자기모순에 빠진 나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무념의 상태에서 이미 설계된 삶대로 살아가는 것과 고통과 물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 그리고 성적 자유 등은 부러움을 낳는다.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나 능력과 신분적 배경에 따른 차등이 존재하고, 벗어날 수 없는 사회윤리와 생명윤리에서의 일탈을 한번쯤은 꿈꿔보기 때문이다. 순결은 정열을 의미하며 신경쇠약을 의미하고, 정열과 신경쇠약은 불안정을 낳는다는 말이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안정이 문명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과학의 발달이 문명의 발달과 완전성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기계의 발전과 의약품의 발전이 곧 행복이라는 등식은 인간 세계가 갖는 무수히 많은 것들의 가치를 부정하며, 인간의 정의와 의미 그리고 그 자체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세계가 훌륭하게 되는 것이며,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 세계의 질서가 훌륭해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안정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가 있기 때문에 발전이 있고, 그 발전은 사회를 역동적으로 만들고 인간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든다. 따라서 문명에 있어서의 잘못은 과학이 보다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정반대인 인간의 기계화에 집중했기 때문에 문명은 위기를 몰고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동인형적 일치’적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이고 그러한 삶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했을 때 즉시 자기검열에 들어가는 오늘날의 모습에서 『멋진 신세계』의 모습은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단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현재의 모습을 과학이 기술을 통해 보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못 박아 놓았다는 것뿐이다.

과학은 인간 이성과 인간의 정체성을 동반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진정한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할 것이고, 유토피아의 도래에 희망을 걸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이성은 과학 그 위에 존재해야 할 가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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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
프란츠 M. 부케티츠 지음, 원석영 옮김 / 열음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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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자유의지를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포지션을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말한다. 내게는 자유의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도적 규제에 익숙한 현재의 우리들은 이 자유의지를 의심한다. 그리고 확신한다. 자유의지는 개인의 노력으로 거머쥘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자유의지의 정체성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유와 행동의 그 책임은 각 개체에게 있다는 것도 신뢰할 수 없다. 그럼, 우리 모두는 자유에 대한 의지를 어떻게 봐야 할까? 
 

시대를 대표하는 비판정신 부케티츠는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 모든 생물체에 비해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그는 이 책에서 자유의지를 주목성이 강한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진화생물학적 잣대로 접근해간다. 
 

부케티츠는, 자유의지가 사실은 환상이었다는 것이 진실로 판명된다 하더라도, 인류의 공생은 아무 문제없이 유지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니 어쩌면 환상은 생존에 유용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고 한다. 더욱이, 인간의 의지가 무엇인지 명백히 하는 과정은 오히려 자기이해의 중요한 초석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하며 창조적으로 행동을 취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자기이해에 따라 도덕적 결정과 결과는 수시로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인간의 삶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시작을 부정으로 했지만 끝은 긍정의 역할론을 부케티츠는 제시한다. 진화생물학과 사회학, 철학으로 설명되고 있는 ‘자유의지’의 정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다시금 생각게 한다. 자유의지를 꿈꾸는 자, 그 자유 그리고 의지는 내가 아닌 제도에 의한다는 자, 이 모든 것들이 진정 환상에서 비롯됨인가를 확인하고 싶은 자에게 이 책을 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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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과 무생물 사이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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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아줄기세포, 유전자 복제, 유전자 감식 등은 이미 전 국민에게 익숙한 단어다. 전 국민을 이렇듯 똑똑할 수 있게 된 계기가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와 성공, 그리고 조작이라는 희대의 사건을 통해서다. 막 태어난 아이도 줄기세포는 안다고 할 정도로 지지난 해 몇 달 동안은 나라 곳곳이 흥분의 도가니였다.

세계 최초로 줄기세포 연구가 상용화되었을 때 국가적 이익을 따지면 상상할 수 없는 천문학적 수치가 나온다는 언론의 발표로 국민적 열광은 더해갔고, 그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황 박사가 국민 영웅이 되고,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그의 승승장구는 ‘브릭’(젊은 과학자 모임)에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황 박사의 공로는 복제 개 성공(실제로 성공함) 말고도, 앞서 얘기했듯이 전 국민이 일순간에 배아가 무엇이며, 줄기세포가 무엇이고, 복제인간, 복제개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해준 것이다. 즈려 밟고 간 꽃잎들(난자 기증자)이 상징하는 것을 똑똑히 알게 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때도 말이 많았다. 난자 기증을 순수하게 기증으로 봐야 하느냐, 아니면 생명체의 희생으로 봐야 하느냐는 논란에 휩싸였던 것이다. 이 역시 전 국민의 눈을 한 번 더 뜨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여성에 있어 난자가 어떤 의미이며, 그 난자는 생명의 어떤 근간을 이루는지를 대략적으로 인식하게 했다. 그러고 보면 황 박사가 짧은 시간에 온 국민을 상대로 생명은 무엇이며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에 제대로 인식하도록 유식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번에 읽은 책 <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읽는 내내 황 박사의 역할 대단했음을 실감했다. 줄기세포로 접했던 수많은 기사들, 그리고 항간에 떠도는 자료들을 읽은 덕에 이 책의 내용이 좀더 쉽게 와 닿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디까지 생물로 볼 것인가의 기준점을 명확히 할 수 있었다는 데 황 박사 사건 전말이 고마울 뿐이다.

이 책은 말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주저없이 그것은 “자신을 복제하는 시스템”이라고. 그러니까 자신을 복제하지 못하는 것은 생명체가 아니란 말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난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는가? 어떤 이유로 살 수 있는가? 그 근원은 어디이고 그 시발점은 어디인가? 하는 탐구정신의 발로로 생명의 명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모든 역사가 탐구를 바탕으로 ‘발견’에 이르듯, 과학의 역사도 시작을 일궈 과정을 만들고, 결과(결론)를 내놓는 같은 전철을 밟는다. 이 책의 핵심인 ‘생명’이라는 주제어 속에서 어떻게 생물과 무생물을 나누고 그것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또한 ‘발견’의 연속에서 이뤄질 수 있는 성과물이었다.

우리가 빌딩 옥상까지 가기 위해서는 1층부터 거쳐야 하듯이, 또 1층에서 2층으로 가려면 계단이나 엘리베이터의 순차적 이동이 필요하듯이 생물을 규명하기 위해서도 이와 같은 순차적 발견을 거쳐야 했다. 물론 모든 역사가 오랜 시간이 들여야 하는 것처럼 이 생물에 대한 과학적 발견과 규명도 오랜 시간과 많은 과학자들의 탐구와 실험 정신이 있어야 했다.

집을 지을 때 땅을 파서 다지고 그 위에 뼈대를 세우듯 맨 처음 땅을 파는 역할을 한 이가 있었다. 일본인 과학자 노구치 히데요다. 그는 바이러스를 발견했지만, 바이러스는 영양을 섭취하는 법이 없고 호흡도 하지 않음 알아냈다. 그는 바이러스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도 않을뿐더러 노폐물을 배출하는 일도 하지 않는, 즉 일체 대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바이러스를 단순한 물질과 분명히 구분 짓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큰 특성은 바로 스스로 증식한다는 것 또한 찾아냈다. 바이러스는 자기 복제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인 과학자 노구치는 생명을 규명하는 첫 문을 열어주었다. 그 뒤를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이름 없는 영웅’ 오즈월드 에이버리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처음’으로 발견하거나 발명한 사람만을 인정한다. 과학이라는 분야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과학자들 사이에서 견제와 염탐, 그리고 시기는 기본 옵션으로 따라 붙는다.

에이버리는 최고의 견제를 받은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록펠러 대학 의학연구소에서 함께 있는 과학자들에게 말이다. 그렇더라도 에이버리는 세계 최초로 ‘DNA=유전자’를 발견했고, 유전자 본체를 찾아낸 인물이다. 독신으로 평생을 유전자를 규명하기 위해 바쳤던 에이버리는 사십이라는 늦은 나이에 과학도가 되었고, 결국 은퇴할 때까지 연구는 지속되었다.


에이버리의 DNA가 바로 유전자 본체라는 발견은 생명과학의 세기이기도 한 20세기의 최대의 업적이며 분자생물학의 막을 올린 발견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바로 DNA의 구조 규명, DNA 암호 해독 등 DNA 연구가 빠르게 시작될 수 있었던 것도 에이버리가 연구 현장에서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였다는 것이다.

생물이 살아있는 한 영양학적 요구와는 무관하게 생체고분자든 저분자 대사물질이든 모두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이란 대사의 계속적인 변화이며, 그 변화야말로 생명의 진정한 모습이다.(본문 143쪽)

생명을 규명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도 된다. 바로 복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DNA를 규명하기 위해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속에서 분명히 지켜져야 할 것은 생명의 존엄성인 것이다.

하나의 세포에 들어 있는 핵과 핵을 둘러싸고 있는 막과 그 안의 물질들.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와 그 원자를 이루는 미세한 것들이 생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이 책은 과학적으로만 접근하지 않는다. 바로 이 책의 저자 후쿠오카 신이치라는 과학자의 일상과 인간적 삶도 함께 이 책 <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결코 녹록치 않은 분야의 책임에도 편안한 마음으로 생명과학 분야를 염탐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DNA란 무엇인가에 ‘생명’의 이라는 살을 붙일 수 있게도 해 주었다. 깊이 있는 학문의 길과 오랜 연구에서 터득한 과학적 지식이 이뤄낸 결과물이라 보아진다. 이 책을 읽으면 단순한 생명체가 아닌 그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입자들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게 만든다. 나 또한 언젠가 분해될 조립제품에 불과한 생명체임을 깨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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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 이랜드 노동자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6
권성현 외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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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업들이 연봉제를 채택하고 있다. 1년마다 재협상을 하고 재계약을 한다. 나 또한 해마다 이를 반복해야 하는 직장인이다. 이런 나는 정규직인가 비정규직인가? 게다가 고유가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날마다 오르는 물가로 경기는 침체에 빠져 있고, 기업은 더욱 몸을 사린다. 대통령도 정부도 기업인도 하나같이 부르짖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은 분명 아닌 것이다. 그러니 신입사원을 뽑을 리 만무고, 오히려 짐이 되는 고위직 간부, 중간급 일부를 정리해야 할 판이다.

과연 기업하기 좋은 환경만 만들면 만사형통이 될까? 그 환경이 되면 기업도 직장인도 일반 시민도 모두 잘 살게 되는 것일까? 혹여 기업주만 잘 사는 것은 아닐까? 신자유주의를 부르짖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철저히 실행하려는 지금 시민사회의 불안해소와 서민경제안정을 위한 정책을 내놓기나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고 기업과 기업가를 강력하게 대변해 줄 신자유주의는 고용불안을 더욱 촉진시키고 비정규직을 더욱 양성해 낼 뿐이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고용주의 고용인 해고도 타당하고 적법하다는 게 신자유주의다. 고용주에 대한 강력한 권한과 정당성을 부여해 주고 고용인에게는 불안한 삶을 안겨 준 신자유주의는 사회구성원을 더욱 양극화시킨다. 종횡이 아닌 상하의 구조로 시대를 역행하는 악성 경제논리인 것이다.

기업이 비정규직을 양성하려는 이유는 (물론 여기에는 정치인과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비용절감 대비 이윤을 극대화를 꾀하기 위해서다. 이런 상황에서 근로기준법이 지켜질리 없고, 최소권리조차 보장받기 힘든 것이 비정규직 종사자들이고, 오늘날의 현실이다. 비정규직 종사자들은 말한다. 그저 참고 또 참고, 조금만 더 참으면 나아지겠지라고. 하지만 이들의 양보와 당장의 일자리 유지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 책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는 이들 비정규 노동자들의 소박한 꿈을 위한 아름다운 실천을 다루고 있다. 노동력 착취와 임금 착복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던 그들은 최소의 권리보장을 위해 외쳤지만, 영업장 불법점거, 무엇보다 영업방해와 그에 따른 손실배상이라는 굴레를 쓰고 범법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단지 8시간 동안 화장실도 가지 못하는 현실의 잘못을 바꾸고 싶었고, 언제 어느 때 해고당할지 모르는 불안감에서 벗어나 안정된 직장생활을 바랐을 뿐인데 기업과 기업을 옹호하는 정치권은 인정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이 말하는 보장도 비정규직에 있어서는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했고, 비정규직에게는 기댈 아무것도 없었다. 오랜 기간 동안 외쳐온 소리는 울타리를 넘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 탓인지 울타리 밖 사람들은 그들의 절규를 듣지 못했다.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외롭고 힘든 싸움을 그들은 하고 있었다. 한 가족의 아내이자 엄마이자 며느리인 그들. 그들을 투쟁의 전선에 세우고, 공권력의 위협을 받게 만든 기업이 여기 현실에 놓여 있다. 이런 기업은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비정규직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기업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그 기업을 정치권에서 돕고 있는 한 기업의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사람 위에 돈이 자리 잡고 있는 세상에서는, 돈이 자리를 만들고, 돈이 권력을 부여하고, 돈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는 한 쉽지 않다.

사회가 이렇게 흘러가는 게 안타깝다. 변하지 못하는 사회에 한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게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막연했던 비정규직에 대한 생각을 이 책의 도움으로 바로 잡을 수 있었고 그들이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비록 그 분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드리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 분들이 하는 행동이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 할 수 있어 다행이다.

고용인의 삶을 사는 지금의 모든 사람들이 언제 어느 때 그 분들과 같은 것을 겪을 지 모른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비겁한 삶이 지금의 자리를 보장해 주지만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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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세계의 신화 아비투어 교양 시리즈 2
크리스타 푀펠만 지음, 권소영 옮김 / 비씨스쿨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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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단행본 책보다 작고 페이지도 235쪽 밖에 안 되는 이 책. 본문 구성도 큰 글씨에 벙벙하게 텍스트들이 자리잡고 있다. 세계의 신화를 다루기에는 부족한 분량이 아닐까? 단순히 각 나라의 신화를 열거하는 식의 구성방식이나 내용의 깊이가 부족한 서술방식을 보면(마치 짜집기한 인상마저 준다) 많이 아쉽다. 특히 자세하고 깊이가 있을 거라는 기대를 안고 펼쳤을 때의 실망을 생각하면 많이 아쉽다. 궂이 독자층을 찾는다면 청소년이나 초등학교 고학년에 맞지 않을까.

이 책은 방대한 분량의 세계의 신화를 요약해 놓은 요약집에 불과하다. 하나의 줄기에 곁가지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없고, 심하게 말하면 머리치고 꼬리치고 몸통도 아닌 단순히 성(性)구별만 해놓은 격이다. 번역서이긴 하지만 원저자 크리스타 페펠만 자신이 세계의 신화를 논할 만큼 깊이 있는 학식을 갖추었다기보다는 백과사전식 지식만 얇게 갖고 있다는 느낌이다. 확신에 찬 글이 아닌 매 페이지에서 보여주는 불안하고 불안정해보이는 글이 이러한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런지 목차마저도 어수선한 느낌이 든다.

모든 신화를 다루고 있는 책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 또한 창조신화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물로부터 나온 모든 생명- 태고의 바다'에서 이집트인들은 생명체가 없는 무한한 물 바닥을 '눈(Nun, 누)라고 불렀고, 헬리오폴리스 신화에서는 원시 바다가 어느 날 언덕 높이로 치솟았다고 한다. 이야기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아는 척하기' 팁은 신화의 이해를 높이는 주석의 역할을 하지만, 이 역시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인상을 안겨 준다.

읽으면 읽을수록 인문서보다는 가나출판사에서 출간된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연상되는 이유도 깊이보다는 흥미 위주를 선택하고, 방대한 분량보다는 적은 분량으로 세계의 신화를 다루고자 한 저자의 욕심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앞서 말했듯이 만족보다는 실망이 컸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청소년에게는 쉽게 읽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을 통해 세계의 신화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정식으로 품게 되었다. 어쩌면 이 책이 진정한 동기를 부여해줬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책을 더 찾아보고 세계의 신화를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 있는지 조사해봐야겠다. 동서양의 신화의 차이점과 서양 중심 특히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아가 수메르 신화, 인도 신화, 이집트 신화, 메소포타미아 신화 등 다른 책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어떤 방식을 택하고 있는지 살펴볼 생각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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