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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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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나온 폴 오스터의 신작 '선셋 파크'는 2010년에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전작인 '보이지 않는'이 2009년에 출간되었으니 채 1년도 안 되어 새로운 작품이 나온 셈이다. 그러고 보니 '어둠 속의 남자'가 나왔던 2008년 부터 꾸준히 1년에 한 권씩 내고 있다. 이러한 시기의 간격은 지금의 폴 오스터를 있게 한 대표작들, 그러니까 뉴욕3부작, 달의 궁전, 우연의 음악 등이 해마다 주루룩 나왔던 198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전기의 대표작이었듯 혹시 이 일련의 작품들은 후기의 대표작들인 셈일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지금 생각하기엔 분명 이 세 작품들은 그럴 값어치가 있어 보인다. 더구나 이 세 작품들엔 어떤 강한 연속성마저 감지된다. 그러고 보니 저번 '보이지 않는 리뷰'에서 한 번 언급했던 것도 같다. '어둠속의 남자'와 '보이지 않는'은 9. 11이 남긴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에 대한 작가 자신의 반향이라고. '어둠속의 남자'는 정확히 9. 11 이후에 이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자문자답하는 작품이었고(이는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보이지 않는'은 그 후, 2008년 서브프라임으로 인한 경제 공황까지 가세한 미국에서 오늘의 현실이 과연 무엇때문에 초래된 것이었나를 되돌아보는 소설이었다. 그렇게 폴 오스터는 자신에게서 미국으로 나아갔다. 그럼, '선셋파크'는 어디로 나아간 것인가?

 

  전작 '보이지 않는'의 리뷰에서 나는 그 소설의 마지막이 일종의 '그라운드 제로'라고 말했었다.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고 다시금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한 현장이라고.

  결국 소설 '보이지 않는'은 이제 만들어 갈 미국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건 한 마디로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된, 그렇게 미국이 잃어버렸던 것의 복원이었다. 현재의 미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60년대의 미국은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이념들 혹은 가치들...

 

  그런데 '선셋 파크'의 시작도 그러하다. 일종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선셋 파크'의 이야기는 마이스 헬러로 부터 시작되는데 작품의 첫 등장 장면에서 그는 서브 프라임으로 인해 밀린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야반도주해 버린 빈 집에서 그들이 남기고 간 그들의 물건을 청소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집 하나하나가 실패의 이야기이다. 파산과 체납, 빚과 가압류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이다. (p. 7)

 

  그렇게 마일스 헬러가 소위 '폐가 처리(기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물건을 깨끗이 치워 다른 사람들에게 팔기 쉽게 만드는 일)'를 하는 주인을 잃어버린 집들은 9. 11 때 생겨난 그라운드 제로의 또다른 모습이다. 마일스 헬러는 그런 그라운드 제로에서 일하도록 고용된 인부다. 이는 '보이지 않는'의 마지막에서 세실이 보았던 그라운드 제로에서 일하는 인부들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정작 하는 일은 정반대다. '보이지 않는'에서는 현존하는 그라운드 제로를 기초로 역사를 이어 올렸다. 하지만 지금 마일스 헬러가 인부로서 하는 일은 그라운드 제로를 없던 것으로 지우는 일이다. 얼른 기존의 흔적들을 제거하여 새로운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에서는 거기에 뭐가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선셋 파크'에선 분명히 존재한다. 이 차이는 어쩌면 기억과 망각의 차이를 말하는 것일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이 대지에 새겨진 상처를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라면 '선셋 파크'는 새겨진 상처는 다른 흙으로 서둘러 덮어서 망각해버리고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그렇다면 이것은 또 한 번 겪었던 폴 오스터의 절망이 드러난 표현인지도 모른다. 2010년의 미국은 그야말로 '폐가 처리'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시다시피 2009년 미국의 금융위기를 타개하고 새롭게 재건하기 위해 추진했던 오바마의 금융개혁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생각보다 기득권의 방어는 꽤나 강고했고 결집 또한 대단했다. 그 앞에서 오바마는 무력하기만 했다. 많은 여론의 지지 역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건 미국을 좀 더 바람직하게 재건할 또 하나의 기회를 날려버린 셈이었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9. 11 이 가져온 기회를 날려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타자를 공격함으로써 비극을 재빨리 망각하려 했었던 미국은 결국 다시금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 마치 카트리나에 휩쓸린 뉴올리언스 처럼 한 순간에 모든 재화들이, 그와 함께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있던 모든 가정들이 속절없이 쓸려가고 말았다. 이를테면 또 하나의 엄청난 그라운드 제로가 생겨난 셈이었다. 위기이 재발은 이제 좀 깨달아야 한다고. 더 이상 예전처럼 망각해서는 안된다고 신호를 주고 있었지만 역시나 미국은 아무런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오바마의 금융 개혁 실패는 미국이 또 한 번 망각을 선택했다는 선언에 다름아니었으니까.

 

   '보이지 않는'에서 조금은 희망적인 미국의 미래를 그렸던 폴 오스터로서는 정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광경이었을 것이다. 늘 어떤 위기에 있어서든 '폐가 처리'만 고수하는 미국은 그에게 분명 이대로 영원히 실패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나라로 보였을 것이다. 트라우마가 치유될 순간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꾸만 커져갈 뿐. 마일스 헬러의 아버지 모리스 헬러처럼 타인의 아픔에 민감한 폴 오스터로서는 망각으로 그 개인들의 고통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미국이 더욱 절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선셋 파크'는 바로 그 절망에서 잉태한 소설이다.

 

  그리고 그 절망 끝에 나온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의 아이러니함. '선셋 파크'는 그런 아이러니로 충만한 우주이다.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뀌고 구원의 가능성은 그대로 추락의 가능성으로 변질되고 만다. 모퉁이를 돌다가 예기치 않게 강도를 만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은 늘 뒷통수를 타격할 의외의 변수를 마련해두고 있다. 이를테면 모리스 헬러가 소설에서 처음 등장할 때 나오는 친구의 딸(수키) 장례식 장면처럼.

 

 그는 여러 해 전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될 무렵 화창한 날 늦은 오후 휴스턴 스트리트에서 수키와 우연히 마주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수키는 고등학교 무도회에 가는 길이어서 눈에 확 띄는 화려한 빨간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토마토처럼 붉디붉은 빨간색이었다.(...) 그 날부터 그의 마음 속에서 수키의 모습은 생기발랄한 젊음과 미래의 가능성의 정수를 구현한 모습, 불타는 젊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모범으로 자리잡았다. 이제 그는 한겨울 베네치아의 눅눅한 냉기, 거리로 무릎 높이까지 넘쳐흐른 운하, 불기 없는 방들의 몸이 떨리는 외로움, 그 속의 어둠의 힘에 부풀어 올라 터져 버리는 머리, 이 너무도 많고도 너무나 작은 세계에 의하여 파열해 버리는 삶에 대하여 생각했다. (p. 153)

 

 수키로 인해 언제까지나 세상이 화창하게 지속되리라 여겼던 믿음은 그녀의 예기치 않은 자살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폴 오스터는 시각적 그리고 촉각적 이미지들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이러한 모리스 헬러의 정신적 추락을 극명하게 부각한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추락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그야말로 느닷업이 맞게 된 루시퍼의 해머였던 셈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그의 아들 마일스 헬러에게도 나타났었다. 그가 무려 7년 동안이나 탕아의 존재로 살았던 것은 말다툼 끝에 밀쳐버린 배다른 형이 길에 넘어져 차에 치여 숨지게 된 것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사소한 밀침이었지만 그게 가져온 것은 뜻밗의 죽음이었다. 그로 인해 마일스 헬러의 인생은 송두리째 전복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시나 아무런 전조도, 예고도, 징후도 없이.

 

 마치 운명이란 게 주사위를 던져서 결정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예측불허다. 어쩌면 이 소설에 만연된 아이러니는 이 예측 불허를 경험한 자의 허망함일지도 모르겠다. 선셋 파크의 집이 거기에 모인 모두에게 겨우 구원의 공간이 되려는 순간 느닷없이 출현한 퇴거 명령 집행을 위한 경찰관에 의해 그 모든 가능성들이 산산히 부숴져 버릴 때 그것을 바라보는 마일스 헬러의 시선에 담겨져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일이 있기 전 바로 앞장에서는 선셋 파크의 거주자들 중 가장 행복과 거리가 멀었었던 앨런은 다시금 첫 연인을 만나 이런 고백을 한다.

 

   미칠 것만 같아. 아침에 눈을 뜨면 새삼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어. 이렇게 행복하다고 느껴 본 건 정말 오랜만이야.

  잘됐다. 엘

  그래, 잘된 일이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p. 316)

 

  이러한 말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퇴거 집행의 날을 맞이하고 행복에 젖었던 그녀의 두 눈은 공포로 경악하는 두 눈이 된다. 행복이 어느 순간 갑자기 다가오리라는 걸 몰랐듯, 불행 역시 그러하단 걸 그녀는 그렇게 뼈져리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 모두가 이런 걸 경험한다. 한 마디로 소설 속 이런 문장으로 대표될 수 있는 이런 경험을.

 

  지금 그는 어디에 있나? 피할 수 없는 소멸과 계속될 삶의 가능성 사이의 경계선 위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p. 186)

 

  이 경험은 정확히 폴 오스터가 2009년 미국의 모습에서 느끼던 것이었으며 2008년 서브 프라임 이후 갑작스럽게 맞이한 재정 파탄으로 인해 자신의 집을 버리고 떠나야 했던 모든 미국 가정들이 느끼던 것이었다. 그렇게 2001년의 9.11 이 만들어버린 트라우마의 심연은 미국이 내부의 진실된 반성이 아니라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외부의 타자들을 지우는 것으로만 끝없이 메우려들었기 때문에 결국 미국인 모든 가정으로 확산되고 말았다. 아마도 미국에서만 유독 일어나고 있는 좀비 영화 붐은 이것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한 순간에 몰락을 경험했던 그들은 역시나 똑같이 단 한 번의 물림, 혹은 긁힘으로 좀비로 변해버리는 것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 좀비란 그들이 겪었던 고통스런 기억이 구체화된 산물이요, 그들이 과거와 현재 짊어지고 있는 절망, 무력감 그리고 분노를 대신해서 표현하고 있는 존재인 셈이다.

 

  이 '확산'은 '선셋 파크'의 소설적 구성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소설은 '마일스 헬러'만의 내면에서 시작하여 차츰 선셋 파크에 모인 네 명의 내면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모두(All)의 내면으로 확장되어 간다. 마치 금융위기로 인해 난파선이 되어버린 이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재민으로서의 그들 하나하나의 내면을 다 보여주려는 것처럼.

 

  이렇게 '선셋 파크'는 지금 당신 곁에서 오늘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소설이다. 그들의 내면 속에 간직된 것을.

 

  지금 확산되고 있는 좀비 영화가 미국인들이 그동안 미국이 했던 것과 똑같이 오로지 타인을 파괴함으로 자기가 겪고 있는 고통을 대리 치유하고 있는 것임을 고려한다면(그러니까 나는 지금의 좀비영화들을 이렇게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앞에서 자신이 드러눕고 있는 소파 같은 것으로. 그렇게 자신들의 무의식적 욕망이 술술 드러나고 있는... 이런 면에서 같이 흥행하고 있는 '슈퍼히어로'물에 대해서도 의심의 시선을 던질 수 있다. 사실 '슈퍼 히어로물'은 '좀비물'과 동전의 양면관계다. 좀비물은 타자를 파괴하고 히어로물은 타자를 구원하지만 모두 타자에 대한 내밀한 헤아림은 없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좀비물에서 타자들이 오로지 자신의 치유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소모품이듯 슈퍼히어로물에서도 타자들은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해 그 배경으로 사라져줘야 하는 소모품들인 것이다. 금융위기가 초래한 트라우마 앞에서 좀비물이 '너도 나처럼 당해봐라'라는 무의식적 욕망의 상관물이라 한다면 슈퍼히어로물은 '압도적으로 강해져서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무의시적 욕망의 상관물이다.) 이렇게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의 내면을 아우르는 것이 어쩌면 폴 오스터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던지고 싶은 대안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너무 자신의 고통만 바라보려 하지 말고 타인은 어떻게 지금의 상황을 견디고 있는지 그 헤아림의 시선을 한 번 던져보라는...

 

  그랬을 경우, 우리가 알게 되는 것 한 가지...

  그건 바로 지금 겪고 있는 힘겨움, 고통들이 나만은 아니라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그 모든 힘겨움, 고통들에서 나만이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폴 오스터가 독자들에게 주려하는 것을 단 한 문장으로 정의하라면 아마도 나는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한다.

 

  '너만 예외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우리는 소설이 점점 모든 인물들의 내면으로 확장되어감에 따라 마일스 헬러만이 고통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모두가 다 자신만의 고통과 힘겨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선셋 파크'의 공간에서 연대가 가능했던 것도 그러한 헤아림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살던 선셋 파크 바로 옆에 그린 우드 묘지 가 있었던 것이 예사롭지 않다. 그들은 종종 거기를 거닐거나 바라본다. 그러면서 거기에 묻힌 그들의 삶을 헤아린다. 선셋 파크의 집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한 구원의 공간임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헤아림이 바로 그들에게 진정한 연대와 구원을 가져오게 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듯 하다.

 

  그린우드 묘지는 소설에 종종 나오는 야구 선수들의 생애 와 이어진다. 마일스 헬러와 그의 아버지 모리스 헬러는 한 순간 빛났다가 예기치 않게 은퇴해 버린 야구 선수들의 인생을 자주 떠올린다. 마일스 헬러와 모리스 헬러처럼 느닷없이 루시퍼의 헤머를 맞았던 자들을. 그렇게 그들의 삶이 예외가 아니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린우드 묘지의 존재와 야구 선수들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에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그 묘지는 9. 11이나 이라크 전쟁, 혹은 금융 위기에서 희생된 이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삶을 헤아려 볼 것을 말하기 위해. 그러면 더욱 우리는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역시도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삶의 모든 힘겨움 또는 비극 앞에서 우리는 전혀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단지 우리가 여기에 서 있고, 그들이 저기에 누워 있는 것은 다만 우연이고, 운이 작용한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선셋 파크'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어떠한 행복에도 혹은 불행에도 머무르지 못한다. 행복과 불행은 마치 넘실거리는 파고의 높낮이 만큼이나 변화무상하다. 그건 그들의 능력과 노력과도 무관하다. 흡사 눈을 가린채 해변의 모래 사장을 걸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밟게 될 것이 부드러운 모래일지 아니면 깨진 유리 조각일지 그도 아니면 누군가의 배일지 알 수 없다. 우리의 인생 경험에 비추어 봐도 비슷하다. 우리 역시도 그와 같은 상황이다. 고통은 전조도,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소설의 마지막 마일스 헬러가 또다시 뜻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이 전혀 억지스럽게 여겨지지 않는 것도 그런 우리의 경험이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렇지만 '나만은 예외겠지'하는 생각은 여기서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한다. 그 예외일 거란 생각 때문에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은 더욱 크게 보이고 거기다 '불운'이란 생각까지 겹치면 더 큰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때문에 그들은 타자들에 대해 적대적이 된다. 좀비물이나 슈퍼히어로물에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투사시키는 것처럼.

 

   그리하여 결국 미국이 저질렀던 잘못처럼 동일하게 늘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된다. 오바마의 금융 개혁은 언제나 자신들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기득권자들에 의해 실패하고 우리나라의 아파트 소유자들은 아파트 가격에 대한 자신들의 소망이 우리나라 경제 상황상 관철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한 그 헛된 믿음을 정부가 따를 경우 그로 인해 또 어떤 어려움들이 타인들에게 전가될 것인지 알면서도 자신만은 예외라는, 아니 예외이고 싶다는 생각때문에 그릇된 선택을 한다.

 

  예외는 그렇게 단절을 가져오고 결국엔 늘 더 큰 희생을 대가로 치루게 한다. 아마도 그래서 칸트는 바로 그 예외가 되려는 생각이야 말로 정말 '악마적'인 것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칸트는 단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악마란 다름아니라 스스로 예외가 되려는 존재들이라고.  

 

  소설 '선셋 파크'는 '나만 예외'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한다. 결국 야구 선수 잭 로크도 죽는다. 늘 행운으로 모든 불행을 비켜나갔던 그는 그의 삶을 관심있게 지켜보는 마일스와 모리스 부자에게 '예외'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도 죽는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동시에 마일스와 모리스 부자는 진정한 화해를 하게 된다.(잭 로크는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이다. 그것은 예외의 한계, 그것이 치유와 구원을 줄 수 없음을 말하는 존재이다.) 즉 우리는 이를 통해 '선셋 파크'가 하려고 하는 말, 그러니까 예외를 버렸을 경우 타인 역시 같은 어려움과 힘겨움 속에 살고 있음을 보게 되고 그렇게 상호 이해의 연대 속에서 우리가 바라는 치유 혹은 구원도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더욱 확인하게 된다.

 

  물론 우리의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마일스 헬러의 상황이 바뀌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보게 된다. 이제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변해버렸다는 것을. 바로 그 시선의 변화가 폴 오스터가 주려 하는 치유와 구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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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 - 외부와 내부에서 바라보기...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5-30 13:33 
    PART 1 - 외부에서... 1967년... 그 해, 미국은 인구가 2억명을 넘었고 비틀즈가 미국을 휩쓸었으며... 새로운 세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아서 펜 감독의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와 마이클 니콜스 감독의 영화 '졸업'이 개봉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 있어 1967년은 바람의 방향이 새롭게 바뀌는 시점이었다. 폴 오스터의 신작 소설 '보이지 않는'은 바로 이 196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헤르메스 2013-05-3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름 연결되는 이야기라 '보이지 않는' 리뷰도 링크해 둡니다...

아이리시스 2013-05-3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헤르메스님 리뷰 보니까 제가 유독 이 작품이 재미없던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저는 미국적 시각은 하나도 없었고 그냥 '나의 시각'으로 읽었던 듯한데, 내용이 그저그러니까 계속 그러그렇게 읽혔던 것 같네요.

'보이지 않는'은 책을 안 읽어서, 담에 언젠가 읽고나서 리뷰를 다시 읽을 날이 오겠죠^^

희선 2013-05-31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한테는 그런 일 일어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죠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으니 일어나지 않을거야 하기도 했는데...
정말 누구한테나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아픔이 있고 힘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언젠가는 죽습니다, 이것 또한 잘 잊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