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누구나 한 때는 자기가 크리스마스트리인 줄 알 때가 있다.

 하지만 곧 자신은 그 트리를 밝히던 수많은 전구 중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요즘 방영중인 드라마 '직장의 신'에서 계약직의 애환을 보여주고 있는 정주리는 이 말을 곧잘 버릇처럼 되뇐다. 정주리가 계약직으로 있으면서 매일 느끼고 있듯이 이는 삶이 가진 가혹한 진실 중의 하나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든 스포트라이트 바깥으로 사라질 수 있다.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한 그렇고 그런 수많은 부품 중의 하나가 아니라 나만이 가진 고유의 존재 가치로써 빛나고 싶은 열망은 사실 인간이라는 실존을 가진 이상 근본적으로 가지게 되는 욕망이기 때문에 이 같은 진실의 확인은 섣불리 잡을 수 없는 악수와도 같다. 그래서 더러는 이를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 여기고 순응하기도 하지만 더러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단호히 거부한 채, 저항하기도 한다.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의 데뷔작, 소설 '침대'에 나오는, 스무 다섯 살에 갑자기 자신의 침대에서 절대 나오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무려 20년 동안 침대를 떠나지 않은 남자, 맬컴은 바로 그 후자였다. 그가 7484일 동안 침대를 벗어나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의 저항의 일환이었다. 한 마디로 그의 침대는 그 자신에게는 가열찬 투쟁의 장소였다.

 

 

  그가 20년 동안 저항했던 건 어릴 때부터 그는 이런 아이였기 때문이다. 소설의 화자인 맬컴의 동생은 이렇게 증언한다.

 

  스스로 아웃사이더라고 말하는 형은 자기만의 규칙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 규칙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형 자신밖에 없었다. (...) 나는 그저 형이 일으키는 파도에 실려 흘러갈 뿐이었다. 문을 확 닫았을 때 생기는 아주 작은 틈 사이로 날아 들어온 솜털처럼.

 그 시절은 형의 전성기였다.  형도 그 시절이 끝나기를 원치 않는 듯 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죽음 자체는 아닐지라도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p. 42)

 

 

  맬컴은 이런 존재였다. 늘 자기만의 빛깔로 빛나고 싶은 존재. 수 많은 그렇고 그런 전구가 되기 보단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고 싶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 역시 인용한 말에도 나오지만 나이가 들면서 정주리와 똑같은 깨달음을 얻어간다. 결국 자신도 그렇고 그런 전구 중의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어느 날 맬컴은 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 순간, 네가 남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할래? 네가 훗날 아무 것도 남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기분이 어떻겠느냐고. 너를 기억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너를 기억할만한 무언가를 가진 사람도 없다면? 네가 그저 과거에 있던 누군가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 흔해 빠진 인간일 뿐이라면? (P. 182)

 

 

"안 보여?"

"응,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나는 보여. 저게 바로 핵심이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면, 굳이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p. 183)

 

 

 

 그리고 그는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나를 죽인 채, 남들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난 아무 것도 하지 않겠어!'를 행동으로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그의 존재 자체가 저항이었다. 개인의 개성을 서서히 마모시켜 정형화된 틀로 찍어낸듯한 그렇고 그런 일반인들을 양산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항전이었다. 600KG이 넘는 거구의 그 몸 자체가 철저한 비타협으로 사회로 부터 그가 지켜낸 존재성의 크기인 것이다. 때문에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은 채 그저 침대에 누워있을 뿐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을 끌게 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덴 늘 정해진 방향이 있고 그 방향 그대로 사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맬컴이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맬컴은 얼마든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의 증명이었고 내 고유의 존재 가치를 헛되이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그의 침대는 마을을 넘어, 나라를 넘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수 많은 팬레터가 세계 각지로 부터 날아든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했던 존재 자체로서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섬'이 된 것이다.

 

 그렇게 600KG의 그가 머무르는 침대는 항성이 된다. 수 많은 혹성들이 주위를 도는. 혹성은 당연히 항성이 가진 인력에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맬컴의 아버지는 그동안 내내 미뤄두었던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에 덤비게 되고 엄마의 관심을 독차지하여 자신을 내내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만든 것도 모자라서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의 사랑마저 독점하여 늘 질투와 외로움의 고통을 죽부인마냥 안고 살게 만들어 형인 맬컴을 싫어하고 어서 빨리 죽어서 해방되기만을 바랐던 동생마저도 변화되어간다. 그 인력은 어떠한 인력인가? 세상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 보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 자기 고유의 존재 가치를 잃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정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는 것. 그러니까 스스로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정한 해방의 통로를 찾토록 하는 인력인 것이다.

 

 맬컴은 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토록 소중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희생해가면서까지 규격화된 존재로 되게 만드는지. 바로 거기엔 기생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가진 보다 더 큰 것에 달라붙어 자기 존재의 안정과 지속을 구하려는 욕망이 정작 자신들에게 더한 상처가 되고 있음을 그는 본 것이다. 그렇게 오로지 바깥의 것으로 자신을 충족시키려는 마음 자체가 결국 자신의 것을 모조리 내줘서 자아를 텅 빈 항아리처럼 만드는 것임을 안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과 절연한다. 일도, 사랑도, 상식도, 삶의 의미도. 그는 그저 존재하고 순간순간을 살아간다. 육체적 살의 확장은 그 내면성의 확장이다. 그 비대한 몸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듯이 그 안에 충만한 내면성은 사람들이 정말 바라보아야 할 곳으로 시선을 바꾸게 만든다. 진정한 구원과 해방이 있는 곳.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의 '침대'는 그런 소설이다. 비대한 육체에 짓눌린 가족의 고통을 그리는 소설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구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를 말하는 구도의 소설이다. 이렇게 표현한다고 해서 이 소설이 어렵다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하지는 말기를.

 주제를 우려내는 설정이 독특한 만큼 이야기가 매력적이라 술술 읽힌다. 무엇보다 문장이 좋다. 표현도 참신하고. 작가 자신이 뭔가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흥미로움의 순도가 아주 높은 소설이다. 그러므로 정주리가 늘 되뇌는 말들을 스스로도 해 본 분들에게 얼마든지 권해드리고 싶다. 결국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든 이름없는 전구가 되든 그렇게 남의 이목을 끌고 못 끌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빛나고 있는가이다. 크든 작든 어떻든 그 내면에 지니고 있는 빛 말이다. 전구의 크기가 아니라 빛의 크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정말 신경써야 할 것이 아닐까.

 

 "형이 우리 가족을 망가뜨렸어."

 "아니야. 내가 구원한거야." (P.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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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4-13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년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뿐이다는 말이기도 하군요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구해주기를 바라죠
그래도 다른 사람의 도움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자신이 바뀌고 나서 도움을 바라야 하겠군요(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인지도)

맬컴을 보고 사람들이 달라지기도 하는군요
자신만의 빛을 위해...


희선

ICE-9 2013-04-15 02:21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은 구원을 향한 내면성과 외면성의 대립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방법이기도 하죠. 종교들마저 거기에 있어선 나뉘어지죠. 선종 같은 것은 내면으로의 깊숙한 침잠으로 해탈을 추구하지만 다른 종교들은 오로지 외부의 힘에 의지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죠. 화이트하우스는 진정한 답은 우리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소설을 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자는, 그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의 상징으로써 내면성이 충만한 공간의 상징이 될 수 있는 침대를 소설 무대의 중요한 공간으로 가져온 게 아닐까 싶어요. 리뷰에서는 안 밝혔지만 사실 이창동의 영화 '밀양'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주인공 전도연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여정은 구원에 있어서의 외면성에서 내면성으로의 이행이죠. 그렇게 밀양을 보고 이 소설을 읽으면 더욱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희선님께 조심스럽게 추천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