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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 무엇이 과학인가
팀 르윈스 지음, 김경숙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7월
평점 :
여성의 오르가즘은 어떤 기능을 할까? 저자의 유머를 제대로 즐기려면 책의 5장이 백미다. 엘리자베스 로이드의 사례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오르가즘은 남성의 젖꼭지와 마찬가지로 진화의 부작용이다. 로이드의 관점에 대해 여성 오르가즘을 무시한다는 비난이 일었다고 한다. 저자인 팀 르윈스는 로이드를 지지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공평한 비평이 아니다. 피아노를 치고 복잡한 수학 등식을 풀고 산문을 쓸 수 있는 능력 역시 생존이나 생식 활동과 거의 관계가 없지만, 누구도 그런 능력을 거짓 능력 혹은 하찮은 능력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여긴다면, 우리 조상의 생존과 생식 활동에 축구 기술이 아니라 빨리 달리기가 더 도움 됐다고 생각하고 우사인 볼트가 리오넬 메시보다 더 중요한 운동 선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로이드가 오르가즘을 “부산물”이라는 표현대신 “환상적인 보너스”라 말했던 걸로 보아 작가의 지지는 타당해보인다.
(‘볼트가 낳나, 메시가 낳나?’ 메시가 한 경기에 11명을 제치고 10골을 넣든, 볼트가 100미터를 8초에 뛰든 답은 ‘둘 다 못 낳는다’이다. )
오르가슴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왜 이리 웃긴지. 1980년도에 고든 갤럽과 수전 수아레스는 “보통 사람의 경우 오르가슴을 경험한 뒤 5분 정도 휴식을 취해야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는데 오르가슴을 하면서 정신을 잃는 사람들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로이드는 “보통 사람”이 절대 여성일 수 없다면서, 오르가슴 후에 5분을 쉬어야 하는 사람은 “보통 남자”라고 반박했다.
로이드는 “업석 이론”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업석이론”이란 일명 “빨이들이기 이론”으로 여성이 오르가슴을 통해 정자를 질에서 생식관으로 빨아들여 임신 가능성을 높인다는 주장을 뜻한다. 로이드는 “정자가 빨려들어가는 효과는 전무”하다며 업석이론에 대해 반박했다. 성물리학자 로이 레빈은 업석 이론을 “좀비 가정”이라고 불렀다. 업석 이론이 증거 면에서 보았을 때 충분히 사라질만하고 실제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데도 무덤에 가만히 누워있지 않고 돌아다니기 때문이라고.
별다른 증거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학자들은 오르가슴 기능론을 포기하지 않는 걸까? 여성의 오르가슴을 긍정해서? 아니다. 로이드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의 성을 남성의 성과 똑같이 취급하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다. 오르가슴 기능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남성 오르가슴이 생식기능이 있으므로 여성 오르가슴도 생식기능이 있을 것이라 가정한다. 남성에겐 페니스(자지)가 있고, 여성에겐 보지가 있음에도 여성에겐 ‘페니스가 없다’라고 가정한 프로이트처럼.
이 책은 오르가슴을 연구하는 책은 아닌데, 말하다보니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저자가 오르가슴을 들어 말하고자 한 바는 과학자의 가치관이 들어간 ‘안 좋은 과학’의 예를 들기 위해서였다. 좋은 과학의 예로 다윈을 들고 있는데,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이라, 그렇다면 그 기준이 뭘까? 아니, 그 전에 과학이란게 뭘까?
이 책의 원제는 ‘THE Meaning of Science’다. 저자는 과학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지? 과학이 우리에게 과연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다. 정신분석학은 과학인가? 경제학은? 정상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이 있는 걸까?
포퍼는 정상과학과 사이비과학을 구분하기 위한 “경계구분의 기준”으로 반증주의를 제시했다. 포퍼의 반증주의에 따르면, 귀납적 추리에 의존치 않고 과학을 할 때, 특정 일반화가 참되다는 결론은 내릴 수 없는 반면, 거짓이라는 결론은 내릴 수 있다. 쉽게 말해 진정한 과학이라면 반증 가능해야 한다는 게 포퍼의 주장이다.
포퍼는 관찰을 통한 귀납적 추론을 거부했다.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과연 그럴까? 어느날 검은 백조가 나타나면?
포퍼에 따르면 과학은 연역적 추리를 통해서만 진보할 수 있다. (동어반복에 불과한 연역적 추리로 어떻게 과학이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인지 나로선 잘 모르겠다.) 반증가능성으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할 수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답은 ‘아니오’다.
저자는 해리 크로트의 정의에 따라 “탐구하는 마음 자세”라는 다소 ‘느슨한’ 관점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느슨한 관점’이란 표현은 잘못된 말일지도 모르겠다. 과학자들이 가장 큰 업적을 이뤘을 때는 자신의 이론을 반박하는 숱한 이론을 물리치고, 한쪽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고집스레 내달릴 때였으므로.
아, 이렇게 길게 쓰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쿤 얘기는 아직 꺼내지도 못했다니. 쿤의 ‘패러다임’과 자유의지에 관한 논의는 건너뛰고 마지막으로 ‘본성’에 대해서만 언급하자.
스티븐 핑커는 <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 나는가>에서, 인간 본성을 제대로 기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데이비드 헐과 마이클 기셀린을 따라, 과연 인간 본성이 있는지 의문을 제시한다. 어떠신지? 인간 본성이란 게 있나?
“진화가 인간 본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미신이라고 말해준다.”
- 마이클 기셀린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있을까? 조지프 하인리히는 심리 연구 피실험자들이 WEIRD하다고 말했다. Western, Educated, Industrialised, Rich, Democratic
저자는 뮐러- 라이어 착시 현상을 예로 들어 ‘본성이 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1960년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칼리하리 사막 샌 부족은 뮐러-라이히 착시를 전혀 착시로 보지 않는다.
보편적인 본성이 있다고? 저자에 따르면 오히려 한 종에 독특한 유형들이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다. (다형성) 본성이 아니라, 학습 능력, 모방 능력 등 문화화 과정이 진화의 일부가 된 것은 아닌가? 혹시 ‘인간 본성’을 상정하는 과학은 특정 인종이나 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사이비 과학자들 , 신자유주의 경제학, 진화 심리학을 비판하는 이유기도 하다.)
과학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을 때, 과학은 거기에 답할 수 없다. 이 주장에 반색해 신을 끌어들일 순 있겠지만, 저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벤저민 리벳의 실험이후, 인간의 자유 의지는 의문에 부쳐졌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0.5초 전에 뉴런의 활동이 시작된 거라면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닐까? 2008년의 실험에 따르면 의식적인 결정보다 뉴런의 활동은 10초나 빨랐다. 저자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는 환상이 아니다. (그 이유는 책을 직접 읽어보시길)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나의 자유 의지 때문이겠지?
응?
밑줄 그은 문장
40. 만약 포퍼가 제안하는 것처럼 귀납적 추리에 의존하지 않고 과학을 한다면 과학적 일반화가 참되다는 결론은 절대 합리적으로 내릴 수 없는 반면, 특정 일반화가 거짓이라는 결론은 내릴 수 있게 된다. 포퍼의 이런 견해를 바로 “반증주의falsification”라 한다.
41. 진정한 과학은 반증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포퍼의 생각이다. 반론을 제기했을 때 틀릴 가능성을 지닌 학문만이 진정한 과학이다.
43. 계속해서 파인만은 과학적 방법에 대한 반증주의적 접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짧게 요약한다.
짐작이 실험과 일치하지 않으면 틀린 것이 되죠. 바로 이 몇 마디 안 되는 말이 과학의 핵심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짐작이 아무리 경이로워도, 여러분이 아무리 똑똑해도, 또 그 짐작을 한 사람이 아무리 특별하고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 결론이 나옵니다. 실험과 일치하지 않으면 틀린 겁니다. 과학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52. 과학은 확고한 기반이 있지 않다. 거대한 과학 이론 체계는 말하자면 늪에 지어 올린 건물과 같다. 말뚝 위에 올린 건물이 과학이다. 지상에 있던 말뚝을 늪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고 해서 말뚝이 자연적인 “기반”에 닿도록 깊이 끌어내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말뚝을 더 깊이 심지 않아도 되는 것이 튼튼한 기반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러지 않는 이유는 그 말뚝이 적어도 한동안은 그 구조를 지탱할 만큼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109. 나는 쿤 자신의 말을 따라 패러다임을 “본보기exemplar”, 즉 중요한 과학적 업적을 보여준다고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예시로 여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그것은 과학계의 대부분이 존경하고 과학계의 대부분이 존경하고 모범으로 삼는 어떤 업적을 가리킨다.
117. 쿤은 정상 과학이 본보기 과학 활동을 따른다고 본다. 과학계가 특정 연구 – 예를 들어, 뉴턴의 <프린키피아>나 다윈의 <종의 기원>, 그리고 멘델의 유전법칙 연구 같은 것-를 본보기로 지지하게 되면 그것은 양질의 연구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지정되기도 한다. ...쿤이 혁명 때마다 등장하는 이론들이 서로 공약 불가능하다고 할 때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이들 이론이 공약 가능하게 하려면 이들의 강점을 평가할 수 있는 공통된 기준이 있어야 하는 데 그런 기준은 없다. 왜냐하면, 이 기준의 토대가 본보기인데 이 본보기 자체가 항상성이 없기 때문이다.
120. 쿤은 특히 후기 저서에서 공약 불가능성의 개념을 번역의 한계 관점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doux”를 “완벽한” 영어로 번역하는 데 한계가 있다. ....“doux”와 같은 말이 영어로 완벽하게 번역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프랑스어 “doux”가 가진 포괄적인 의미를 영어가 한 단어로 살려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124. 쿤은 이런 개인적인 게슈탈트 전환 체험을 한참 후에 <구조>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했는데, “혁명 후에 과학자들은 다른 세계에서 과학 활동을 한다”는 말이 이때 나온 것이다.
130. 쿤은 일종의 칸트주의를 받아들인다. 쿤에 의하면, 우리의 경험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세계는 없고, 이미 상기된 바와 같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 자체가 우리가 지닌 과학 이론에 영향을 받는다.
134. 쿤에게 있어 정상과학과 혁명 과학은 아주 다른 과학이다. 정상 과학은 그가 말하는 “퍼즐 맞추기”와 비슷한데, 그 이유는 과학자가 해당 본보기를 창의적으로 적용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문제와 씨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혁명이 일어나면 이전 본보기가 왕좌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본보기가 왕좌에 등극한다. 쿤에 의하면 혁명이 일어나면, 아니 혁명이 반드시 일어나야만 세상이 바뀐다.
149.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장에서 과학적 실재론이 맞는다는 결론을 낼 것이다. 그런데 이 결론에 이르는 길이 직로가 아닌 관계로 약간의 이정표가 필요하다. 과학적 실재론을 정당화하려면 세 가지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과학적 실재론의 가장 강력한 반론 중의 하나인 “미결정성underdetermination” 이론이 제기하는 도전을 막아낼 수 있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이 이론은 우주의 저변 구조에 대한 여러 이론 중 어떤 것이 낫다고 판단을 하 수 있을 만큼 설득력 있는 과학적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과학적 실재론을 지지하는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이 이론을 지지하는 거의 유일한 논쟁으로 알려진 것은 소위 말하는 “기적은 없다”논증이다. 만약 과학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물질의 구성 요소에 대해 실제와 크게 어긋나게 설명했다면, 과학 이론에 따라 행동했을 때 항상 예상과 틀린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게 이 논증의 주된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비관적 귀납pessimistic induction”으로 알려진 논증을 정면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논증은 오늘날 틀리다고 여겨지는 이론들이 과거에는 놀랄만큼 실용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는 역사적 기록에 의존한다. ....진리가 아닌 오류가 지속해서 성공을 거둔다면 “기적은 없다” 논증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해 과학적 실재론자들은 “미결정성”에 대한 고려가 별 시사하는 바가 없으며 “기적은 없다” 논증이 맞는 대신에 “비관적 귀납” 논증이 틀리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