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는 없다

변이의 원인은 심리적 질서에 속한다면 그 말의 의미를 매우 확장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여전히 노력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사실인즉 노력 자체를 파고들어가 더 심층적인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 생각으로 이러한 태도가 특히 요구되는 경우는 규칙적으로 유전되는 변이들의 원인에 도달하고자 할 때이다. 우리는 여기서 획득형질의 유전 가능성에 관한 세부 논쟁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역량에 속하지 않는 문제에서 명백한 입장을 취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는 없다. 이 문제만큼 오늘날 철학자들이 애매한 일반성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과학자들의 뒤를 따라 세부 실험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결과를 논의해야 할 의무를 느끼는 것도 없다.(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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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베르그송은 수학을 비롯한 여러 과학분야에 두루 뛰어난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가 쓴 네 권의 주저 가운데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1889년), 『물질과 기억』(1896)에 이어 세 번째로 발표한 책은『창조적 진화』(1907년)였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창조'와 '진화'라는 모순된 두 개념을 '생명의 도약'이라는 개념을 통해 '화해'시킨다. 어쨌든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다윈의『종의 기원』과 파브르의 『곤충기』를 비롯한 여러 수많은 생물학자들의 방대한 저서들은 물론이고 물리학과 심리학에 이르는 당대까지의 여러 자연과학적 지식을 방대한 범위에 걸쳐 깊이 연구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생명 진화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에게 창조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에서의 '무로부터의 창조'라기 보다는 '무기물로부터의 유기체의 발생으로 이어지는 창조'를 의미한다. 그는 끊임없이 지속하는 존재인 생명체의 '연속적 변화 속에 나타나는 질적 비약으로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힘을 '생명의 도약'에서 찾았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생명의 기원과 미래'를 진화론의 바탕 위에서 논의하는 책이다. 어쩌면 이 책은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통해 '과학자가 찾아낸 진화의 매커니즘'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 볼 수도 있겠다. 베르그송의 시도는 '다윈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용어'로는 결코 설명할 길이 없는 '생명의 진화에 대한 철학적 함의'를 살펴보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생명 진화의 존재론적 의미'를 밝히려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깊이 파고 들어간 '생명'에 관한 과학철학적 탐구는 필연적으로 철학적 인식론과 존재론으로까지 확장되며, 결국 이 책은 '인간과 생명, 그리고 우주를 연결하는 방대한 사색의 공간'으로까지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베르그송을 국제적 철학자로 만든 동시에 '데카르트 이후 서양철학의 무대를 프랑스로 되돌려 놓은' 것으로까지 평가받는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온갖 다양한 상을 휩쓸었던 타고난 우등생 베르그송에게 이 책은 노벨문학상까지 안겨주게 된다. 그는 과학과 철학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실력도 남달랐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철학책 속에는 그 어떤 뛰어난 문학작품 못지 않게 빛나는 명문장들을 여러 대목에서 마주치게 된다.

사실 여기까지 살펴본 이 책에 대해 개괄적인 언급은 내게 '특별한 관심'을 끄는 내용들에 접근하기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하다. 나의 관심은 '획득형질의 유전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특별한 관점'과 그것을 둘러싼 흥미로운 논박의 '시대별 전개'에 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친절한 다윈氏'가 지극히 조심스럽고도 겸손한 자세로 쓴『종의 기원』을 굳이 펼쳐보지 않더라도, 이미 '부모의 형질은 자손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전'에 관한 최초의 과학적 증명을 내놓은 '멘델의 유전법칙'도 알고 있으며, 심지어는 200년쯤 전에 최초로 제기되었던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設)'까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라마르크는 그 자신의 엄청난 노력에 힘입은 여러 선구적인 발견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생명의 진화' 이야기 속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바보같은 인물이 되고 말았을까. 그의 '놀라운 발견'에 따르면 여러모로 명백하게 보였던 (자꾸만 길어지고 싶어서 그렇게 길어진 게 분명해 보였던) '기린의 목'에 대해 그가 저질렀던 실수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알려진 바대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완전히 부정되었다. 그러나 라마르크의 주장이 이토록 늦은 시기에 종착역에 다다랐다는 사실은 또한 그만큼 많은 인물들로 하여금 '그 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를 끊임없이 자극해 왔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문제에 대한 '엄밀한 과학적 증명'과는 별도로, 피상적으로는 제법 그럴듯해 보였던 '획득형질의 유전'에 대한 라마르크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나섰던 인물들은 비단 생물학자들만이 아니었다는 점이 특별히 흥미롭다.

최초의 반박은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였던 영국인 에라스무스 다윈, 독일인 괴테, 프랑스인
조프루아 셍틸레르의 3인방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등장한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은 진화론의 종결자 찰스 다윈이었고, 다윈이 죽고 난 뒤로도 여러 인물들이 라마르크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애썼다. 이들 신라마르크주의자들을 제외하면, '획득형질의 유전'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드러낸 철학자는 앙리 베르그송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종의 기원』이 발표된 지 무려 5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 또다시『창조적 진화』를 통해 라마르크를 재등장시켰다. 그 당시까지는 라마르크의 주장이 완전하게 폐기된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진화'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려던 그에게도 결국 라마르크에 관한 언급을 제쳐두고는 자신의 논의를 제대로 진전시키기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생물학의 힘을 빌어 최종적인 '과학적 증명'에 다다른 '용불용설'은 내가 알기로는 이미 너무나 오래 전에 쇼펜하우어가 명쾌하게 그 '천재적 오류'를 지적한 바가 있었다. 그는 1836년에 출간한『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 그 문제에 관해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훌륭한 답안'을 도출해 냈다. 쇼펜하우어의 그 책은 다윈의『종의 기원』보다 무려 23년이나 앞서 나온 것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베르그송이 1907년에 발표한『창조적 진화』를 읽으면서 자꾸만 쇼펜하우어의 '주장'과 너무 닮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비록 베르그송이 그의 책 속에서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거명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결국 베르그송 때문에 예전에 읽었던 쇼펜하우어의 책『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다시 한번 더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놀랍게도 베르그송이 매우 엄밀한 과학적 탐구를 통해 이르렀던 여러 주장들이 고스란히 쇼펜하우어의 책 속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도 훨씬 더 풍성하고도 명쾌한 방식으로.

쇼펜하우어도 '과학적 지식'에 관해서라면 어느 철학자와 비교해 보더라도 별로 뒤질 게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의학도로 대학에 입학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 속의 많은 내용들은 고대의 자연철학은 물론이고 그 당시까지 밝혀낸 여러 과학적 연구성과들을 거의 빠짐없이 기술하는 것이었다. 그 책의 목차는 생리학과 병리학, 비교해부학, 식물생물학, 물리천문학, 언어학 등으로 나아가며 심지어 중국의 철학자였던 주자(朱子)에까지 이른다. 어쨌든 그는 '경험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형이상학의 본래적 핵심에 이르는 서술방식을 통해 자신의 형이상학이 자연과학과 공통의 경계지점을 갖는 유일한 것'임을 증명했다. 자신의 철학체계는 '실재성과 경험을 초월하여 허공에 떠다녔던 이전의 철학체계와 달리 현실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것'이자, 당시까지의 자연과학의 연구성과를 철학과 연결시킨 최초의 책이라 불린다.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칸트의 인간학도 프리스의 인간학도 이루지 못한 사유의 인간학적 전회가 이 책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한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주저인『의지와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간한 이후 '17년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 이 책 역시 안타깝게도 세상의 관심을 별로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미리부터 '자연과학을 통해 형이상학을 증명하려는' 자신의 시도는 '다음 시대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그는 '자연과학 분야의 전문가라 해도 자연과학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면 대중과 다를 바 없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연과학의 한계를 자주 지적하면서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은 고유의 탐구 과정에서 설명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적 고찰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말하면서, '자연과학은 이제부터 그 연구 대상을 형이상학에 넘겨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 속에 움직이며 작용하고 있는 모든 힘의 본질은 물리적인 힘을 넘어서는 의지'라는 것을 과학자들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의 결론에서 '모든 언어로 그렇게 활발하게 계발되는 자연과학 서적 중 그것을 알기 위해 개인이 시간, 기회, 인내를 충분히 갖는 부분은 매우 적다. 그러나 여기에 알려진 것도 이미, 내 철학의 시대가 접근한다는 확신을 나에게 준다. 자연과학이 해가 감에 따라 서서히 어떤 학설을 위한 믿을 만한 증인으로 등장하는 것을 나는 마음 깊이 기쁨을 느끼며 바라본다'고 말했다. 나로서도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라는 책에 부여된 '단순히 사변적 기초 위에서 형성된 이론이 아니라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등 당대의 자연과학적 지식에 충실하면서 과학과 철학의 근본적인 결합을 모색한 데 있다'는 평가가, 그보다 70년 전에 출간된 쇼펜하우어의 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기쁨을 느끼며'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하의 내용은 내가 '획득형질의 유전'에 관한 '라마르크의 오류'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본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그 책을 여러 번 읽다 보니 내가 특별히 공감했던 그의 여러 주장들을 일부러 제외하기가 어려웠고, 또 예전에 미리 필사해 놓은 부분들이 있어서 여기에 다시 옮기는 데에도 별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린의 목'이 왜 길어졌는지 궁금해서 시작한 내 얘기 또한 너무 길어졌다. 내 글은 '자꾸만 쓰다보니 길어진' 라마르크의 '기린의 목'을 닮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베르그송의 말대로 '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 없기 때문에 '길게 늘어난' 글임을 읽는 분들이 조금은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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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득형질의 유전

주지하다시피 라마르크는 생명체에게 기관의 용불용(用不用)에 의해 변화하는 능력과 이렇게 획득된 변이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부여한 바 있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학설에 오늘날에도 일정수의 생물학자들이 합류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신종을 산출하기에 이르는 변이는 배 자체에 내재하는 우연변이가 아닐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유용성에 대해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 결정된 특성들을 전개시키는 고유한 결정론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 조건에 적응하려는 생명체의 노력 자체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러한 노력은 외적 환경의 압력에 의해 기계적으로 야기된, 특정한 기관의 기계적 훈련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의식과 의지를 내포할 수도 있는데, 이 학설의 가장 탁월한 대표자의 한 사람인 미국의 자연학자 코프Cope는 노력을 바로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신라마르크주의는 비록 거기에 필연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화론의 현재적 형태들 전체에서 유일하게 진화과정의 내적이고 심리학적인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서로 독립적인 발달선상에서 동일한 복잡한 기관들의 형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진화론이기도 하다.(130쪽)

사람들이 말하는 획득형질은 종종 습관이거나 습관의 결과이다. 그리고 길들여진 습관의 기초에 자연적 성향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유전된 것이 개체의 soma이 획득한 습관인지 아니면 차라리 길들여진 습관에 앞서 있는 자연적 성향은 아닌지 항상 자문할 수가 있다. 이 성향은 개체가 자신 안에 보유하고 있는 germen에 내재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그것이 개체에, 즉 배에 이미 내재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두더지가 앞을 못 보게 된 것은 그것이 땅 밑에서 사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증명되지 않는다. 아마도 두더지가 지하 생활을 할 운명에 처한 것은 그것의 눈이 쇠약해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시력을 잃는 경향은 두더지 자체의 신체의 의해 획득된 것도 잃은 것도 없이 배에서 배로 전달될 것이다. 검술 사범의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더 빨리 탁월한 검술사가 되었다고 해서 부모의 습관이 아이에게 전달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증가하는 도상에 있는 어떤 자연적 성향들이 아버지를 낳은 배에서 아들을 낳은 배로 넘어가 원초적 약동의 결과로 도중에서 커지고 아버지가 했던 것과는 상관없이 아들에게 아버지의 것보다 더 큰 유연성을 확보해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의 점진적 길들이기에서 나오는 많은 예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되는 것이 길들여진 습관인지 아니면 오히려 어떤 자연적 성향이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이러한 성향이야말로 길들이기 위해 이러저러한 특수한 종이나 그것의 어떤 대표자들을 선택하게끔 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132∼134쪽)

* (역주) 획득형질의 유전이 완전히 부정된 것은 20세기 중반 무렵이다. 여기서 베르그손은 아직 논쟁 중인 당대의 모든 실험과 가설을 검토함으로써 획득형질의 유전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서고 있다.


  

 

일탈의 유전과 형질의 유전

그러므로 우리는 일탈(逸脫
)의 유전과 형질의 유전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새로운 형질을 획득하는 개체는 이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형태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보유한 배들 또는 종종 반쪽의 배들이 발달하면서 재생하였을 혀애로부터 일탈한다. 이 변형[일탈]으로부터 배를 변형시킬 수 있는 물질이 산출되지 않거나 영양의 공급이 전반적으로 변질되어 배의 요소들중 어떤 것들이 결핍되지 않는다면, 그 변형은 개체의 후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와 같은 일이 가장 자주 일어날 것이다. 반대로 변형이 어떤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아마 생식질에서 야기되는 화학적 변화를 매개로 해서일 것이다. 이 화학적 변화는 배가 발달시킬 유기체 안에 예외적으로 본래의 변형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것과 다른 것을 만들어 낼 기회가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많다. 이 후자의 경우 자식 유기체는 부모 유기체만큼이나 정상적 유형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겠지만, 그 일탈은 [부모 유기체와는] 상이하게 일어날 것이다. 자식 유기체에게 유전되는 것은 일탈이지 형질이 아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한 개체가 들인 습관들은 자기 자손에게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반향이 있을 때는 자손들에게 생겨난 변형은 본래의 변형과 아무 유사성도 갖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그럴 듯하게 보이는 가설이다. 어쨌든 반증이 있기까지는 그리고 뛰어난 한 생물학자가 요구하는 결정적 실험이 확립되지 않는 한 우리는 현재까지의 관찰 결과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138∼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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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포함한 모든 종은 다른 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나는 종(種)의 기원에 관한 학설 진보에 대해 그 개요를 쓰고자 한다. 최근까지 박물학자들이 종은 불변하는 것이며 저마다 각각 창조된 것으로 믿어왔다. 이 견해는 여러 학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왔다. 한편 몇몇 박물학자들은 종은 변화하는 것이고, 현존하는 생물의 종류는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부터 진정한 생식에 의해 태어난 자손이라 믿고 있었다. ······

라마르크는 이 문제에 대해 주목을 끄는 결론을 내린 최초의 사람이었다. 탁월한 박물학자로서 1801년 자신의 견해를 처음 발표했다. 그는 1809년 《동물철학》에서, 그 뒤 1815년에는 《무척추동물지》 서론에서 좀 더 폭넓게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들 저서에서 라마르크는 인류를 포함한 모든 종은 다른 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을 주장했다. 그는 최초로 생물계는 물론 무생물계에 있어서도 모든 변화는 법칙의 결과이며, 결코 기적적인 어떤 개입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라마르크가 종은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주로 종과 변종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어떤 유(類)에 속하는 여러 종류는 거의 완전한 단계성을 보여준다는 것, 또 사육하고 재배하는 생물의 상이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변화의 방법에 대해서도, 그는 어떤 것은 생활의 물리적 조건에, 어떤 것은 기존 종류의 교잡에, 그리고 대부분의 것은 쓰임과 쓰이지 않음, 즉 습성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연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훌륭한 적응-이를테면 나뭇가지에 난 연한 나뭇잎을 먹고 사는 기린의 긴 목-을 이 마지막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또한 전진적 발달의 법칙도 믿고 있었으며 모든 종류의 생물은 이와 같이 진보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에도 단순한 생물이 존재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러한 생물은 지금도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2

*2 나는 라마르크가 최초로 이 학설을 발표한 날짜를 이 문제에 관한 이시도르 조프루아 셍틸레르 씨의 탁월한 저서 《일반 박물학사》에서 알아냈다. 그의 저서에는 이 문제에 대한 뷔퐁의 결론도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나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 박사가 1794년에 간행한 《동물생태론》에서 라마르크의 견해 및 그의 의견이 틀린 근거를, 그보다 먼저 대폭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시도르 조프루아에 의하면 괴테(Goehte)도 1794년과 1795년에 써 두었으나, 훨씬 뒤에 이르기까지 간행하지 않았던 저작의 서론을 통해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열심히 주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예건대 소는 무엇 때문에 뿔을 사용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 뿔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박물학자에게 있어서 장래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적확하게 지적했다. 독일에서는 괴테, 영국에서는 다윈 박사, 프랑스에서는 조프루아 생틸레르가 1794∼95년에 종의 기원에 대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대체로 유사한 학설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난 매우 드문 예라고 할 수 있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종의 기원에 대한 학설 진보의 역사적 개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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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의 경우 멸종한 게 아니라 환경 변화에 따라 달라졌는지도 모른다

라마르크는 진보주의를 열렬히 옹호했다. 화석의 생물종이 지금도 살고 있는 생물과 유사하다는 것을 관찰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여기에 착안한 그는 어떤 종의 경우 멸종한 게 아니라 환경 변화에 따라 달라졌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생물은 아마 "우리가 식별하지 못할 만큼 크게 변했을 것"이다. 이것은 다윈 이전에 나온 적응의 개념이다. 라마르크는 지구의 나이가 무척 오래며, 생명 형태도 오랜 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변화했다고 확신했다. 또한 그는 인간이 이 진보의 최종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라마르크의 진화 관념은 두 가지다. 첫째, 그는 자연이 복합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믿었다. 둘째, 그는 생물체의 기관이 사용할수록 강해지고 강화되며, 이 획득형질은 후대에 전해진다고 믿었다. "획득된 변화는 양성에 공통적이며, 자식에게도 상속된다."

이런 요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중반 다윈의 자연선택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생존경쟁의 개념은 이미 1797년에 맬서스가 제기한 바 있다. 역사 속의 모든 종은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으며, 경쟁에서 뒤처지면 멸종했다. "최근에는 맬서스만이 아니라 다윈도 애덤 스미스와 같은 기타 정치경제학자들의 저작을 읽고 지혜를 얻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분화를 통한 분기의 개념은 분업을 통한 경제적 이득과 통한다."(914∼915쪽)



 

다윈은 다가올 폭풍을 기다리며 요크셔의 일클리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1859년에 출판된 『종의 기원』은 "생물학적 진화의 문제에 대해 전혀 새로운, 그 시대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접근 방식"을 소개했다. 다윈의 이론은 생물학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새로운 메커니즘을 설명했으며, 한 종이 다른 종을 낳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에른스트 마이어의 말을 빌리면 "단지 하나의 과학 이론을 대체한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와 자신에 대한 관념 자체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그의 이론은 오랫동안 많은 서양인들이 떠받들고 소중히 여겼던 믿음을 버리라고 요구했다." (917쪽)

다윈은 월리스의 전갈을 받은 이후 『종의 기원』을 출판하겠다는 각오를 굳혔으나 진화론의 관념을 처음 구상한 것은 1830년대 비글 호 항해를 마친 뒤부터였다. ······ 책이 발행된 1859년 11월 24일 첫날에 1250부가 날개 돋힌 듯이 팔려나갔다. 다윈은 다가올 폭풍을 기다리며 요크셔의 일클리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과연 금세 폭풍이 몰아쳤는데, 그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다. 에른스트 마이어는 다윈의 이론에서 여섯 가지 중요한 철학적 함의를 확인했다. ⑴ 정적인 세계를 진화하는 세계로 바꾸었다. ⑵ 창조설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⑶ 우주의 목적론을 논박했다. ⑷ 세계의 목적이 인간의 등장에 있다는 절대적 인간 중심주의를 무너뜨렸다. ······ (917∼9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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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질서와 무늬를 넣은 것은 지성이어야 한다는 사상은 완전히 잘못

우리는 우선 "세계는 인식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래서 또한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만들어진다"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세계의 '핵심'을 입증하려고 애쓴다. 자연에 질서와 무늬를 넣은 것은 지성이어야 한다는 자연신학적 사상은, 단순한 오성에 의해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진다 해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우리에게 동물적 자연에서만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전적으로 세계의 이차적이고 종속적인 원리로서, 즉 가장 늦은 근원의 산물로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성은 결코 세계 현존의 조건이었을 수 없으며 지성계(mundus intellegibilis)가 감성계(mundus sensibilis)에 선행할 수도 없다. 지성계는 감성계로부터만 재료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자연을 산출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지성을 산출했다." 그러나 물론 의지가 모든 것을 실현하고 그 각각에서 자신을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현상이라고 지칭하면서 도처에서 근원적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바로 그로 인해 목적론적인 모든 사실은 그 사실들이 발견되는 존재 자체의 의지로부터 해명된다. (94쪽∼95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자연의 절약 법칙'은 어떤 여분의 기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의 절약 법칙'은 어떤 여분의 기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이 법칙은, 다른 한편으로 어떤 동물에게도 지금까지 자신의 생활방식이 요구하는 기관이 부족하지 않았고, 모든 기관은 가장 다양한 기관들조차 조화를 이루며 전적으로 특별히 규정된 생활방식을, 그 동물의 노획물이 있는 영역을, 추적을, 승리를, 그 노획물을 분쇄하고 소화시키는 것을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두 합쳐져서, 동물이 자신의 생계를 위해 영위하려는 생활방식이 그 동물의 구조를 결정한 것이었으며 그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법칙은, 그 상황이 바로, 생활방식과 그 외적 조건에 대한 인식이 구조에 선행하고 그에 맞게 모든 동물이 형체를 얻기 전에 자신의 도구를 선택하는 식으로 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이는 마치 사냥꾼이 사냥 전에 자신의 모든 도구, 즉 산탄총, 산탄, 화약, 사냥 포대, 사냥칼, 의류를 그가 죽이려는 사냥감에 적합하게 고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엽총을 갖고 있으므로 야생 암퇘지를 쏘는 것이 아니라, 야생 암퇘지를 잡으러 나섰으므로 새총이 아니라 엽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러나, 그 증명을 보충하기 위해 다음의 사실이 부가된다. 즉 많은 동물에게서 그것들이 아직 성장하는 동안에는 의지의 지향이 그 지향에 필요한 신체 부분이 있기도 전에 표현되며, 따라서 그 신체 부분의 사용이 그 현존에 선행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린 숫염소, 숫양, 송아지는 아직 뿔을 갖기도 전에 맨머리로 들이받는다. 어린 수퇘지는 자신의 행위가 의도하는 결과에 상응할 어금니가 아직 나지 않았는데도 자신을 둘러싼 측면을 들이받는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침으로 무장한 곤충들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이 점을 표명했다. "그것들이 투지를 가지므로 무기를 갖는다"(『동물의 부분에 관하여(de partibus animalium)』, 제4권, 6장). 나아가 그는 (12장에서) 대체로 "자연은 그것의 활동을 위해 기관들을 만들지만 기관들로 인해 활동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 결과는, 모든 동물의 구조는 그 의지에 따른다는 것이다. (98쪽∼100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희귀한 오류에 빠진 라마르크

이 진리는 사려 깊은 동물학자와 동물해부학자에게 명백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그의 정신이 더 심오한 철학을 통해 정화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진리로 인해 희귀한 오류에 빠지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일은 잊히지 않는 일류 동물학자인 라마르크에게서 실제로 일어났다. 그는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이라는, 동물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 따른 구분을 발견함으로써 불멸의 공적을 세웠다. 말하자면 『동물 철학』제1권 7장과 『무척추동물의 자연사』제1권 서문에서 그는 모든 류(類), 모든 동물종의 형태, 고유한 무기, 외부로 작용하는 기관은 결코 이 종들의 원천에서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동물들의 위치와 환경의 성질을 불러일으킨 동물들의 의지 지향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반복적 노력과 그것에서 나오는 습관을 통해 시간의 과정에서 서서히, 그리고 계승되는 세대를 통해 비로소 발생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주장하고 상세히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물새와 포유류는 헤엄치면서 발가락을 따로따로 뻗음으로써 서서히 물갈퀴를 획득했고, 붉은 뇌조는 물 위를 걸어서 건넘으로써 긴 다리와 긴 목을 얻었다. 뿔 달린 가축은 쓸모 있는 치아 없이 머리로만 싸웠고 이 투지가 서서히 뿔을 만들었으므로 비로소 서서히 뿔을 얻었다. 달팽이는 처음에는 다른 연체동물과 같이 더듬이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 앞에 놓인 대상을 만져야 하는 필요성에서 그와 같은 것이 서서히 발생했다. 모든 고양이과 동물은 노획물을 갈기갈기 찢어야 하는 필요성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비로소 발톱을 획득했고, 이 발톱을 걸을 때 보호하는 동시에 그로 인해 방해받지 않아야 하는 필요성에서 발톱 집과 민첩성을 획득했다. 기린은 건조한 풀 없는 아프리카에서 높은 나무의 잎을 얻기 위해 앞다리와 목을 길게 뻗어서 20피트 높이의 놀라운 키를 획득했다. (100쪽∼10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매우 정확하고 심오한 이해를 통해 성립한 천재적인 오류

그리고 그렇게 라마르크는 많은 동물종을 동일한 원리에 따라 발생하게 하여 검토한다. 여기서 그는 사실상, 동물종이 그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무수한 세대의 과정에서 자신의 보존에 필수적인 기관을 서서히 산출하기 이전에 그 기관이 없어서 그동안 죽고 멸종했어야 한다는, 눈에 띄는 반론을 주목하지 않았다. 받아들여진 하나의 가설은 그렇게 통찰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의 이 가설은 자연에 대한 매우 정확하고 심오한 이해를 통해 성립한 천재적인 오류다. 이 오류는 그 안에 놓인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라마르크에게 여전히 명예로운 일이다. 그 안에 있는 참된 것은 자연 탐구자인 그에게 귀속된다. 그는 동물의 의지가 근원적인 것이며 그 조직체를 결정한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보았다. 반면에 틀린 것은 프랑스에서 형이상학의 낙후된 상황에 짐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원래 여전히 로크와 그의 나약한 추종자 콩디야크가 대세를 이루었고, 그래서 물체가 사물 자체이고 시간과 공간이 사물 자체의 성질이어서, 그곳에는 아직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안에 나타나는 모든 것의 관념성에 대한 그렇게 매우 중요한 위대한 학설이 들어가지 않았다. 따라서 라마르크는 존재에 대한 해석을 시간 안에서, 즉 계열을 통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02쪽∼103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라마르크가 이 생각을 끝까지 전개시킬 용기를 가졌더라면

독일에서 유래한 칸트의 깊은 영향은 프랑스 인들의 부조리한 극단적 원자론과 영국인들의 감동적인 자연신학적 고찰을 그렇게 했듯이 이런 종류의 오류들을 영원히 추방했다. 위대한 정신의 영향은, 허풍선이와 사기꾼을 추종하기 위해 그 정신을 떠날 수 없었던 국가에서조차 유익하고 영속적이다. 그러나 라마르크는 동물의 의지가 사물 자체로서 시간 밖에 놓이고 그런 의미에서 동물 자체보다 더 근원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결코 이를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결정적인 기관 없이, 또한 결정적인 지향도 없이 지각으로만 무장된 동물을 가장 먼저 설정한다. 이 지각이 그 동물에게 살아야 하는 상황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 인식으로부터 그 동물의 지향, 즉 그 동물의 의지가 발생하고, 이 의지로부터 최종적으로 그 동물의 기관이나 특정한 체현(體現, Korporisation)이, 게다가 세대의 도움으로 그래서 무한한 시간 안에서 발생한다. 라마르크가 이 생각을 끝까지 전개시킬 용기를 가졌더라면, 그는 어떤 형상도 기관도 갖지 않아야 할, 그리고 이제 기후와 지역적 상황 및 그에 대한 인식에 따라 모기에서 코끼리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무수한 동물 형태로 변화했을 어떤 원초동물을 가정했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이 원초동물이 생명에의 의지이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서 이 의지는 형이상학적인 것이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분명히 모든 동물종은 자신의 고유한 의지를 통해, 그러나 시간 속에 있는 물리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시간 밖에 있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그것이 살려고 하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형태와 조직을 결정했다. 의지는 인식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인식은 의지가 단순히 우연적이고 이차적인 것으로서, 심지어 제3의 것으로서 나타나기 전에 동물과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지가 최초의 것이고 본질 자체다. 의지의 현상(인식하는 지성과 그 형식인 공간과 시간에 있는 단순한 표상)은 이 특별한 상황에서 살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모든 기관들로 무장된 동물이다. 이 기관에는 지성 즉 인식 자체도 속한다. 그리고 이 지성은 나머지 것들과 같이 모든 동물의 생활방식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반면에 라마르크는 인식으로부터 비로소 의지가 형성되도록 했다. (103∼104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의지의 모든 특별한 노력은 형태의 특별한 변이 속에서 나타난다

동물의 무수한 형태를 고찰해보라. 그 모든 형태가 철두철미 그 동물이 의욕하는 것에 대한 모사일 뿐임을, 그 동물의 특성을 만드는 의지 지향의 가시적인 표현일 뿐임을 보라. 형태의 다양성은 특성들의 이 다양성에 대한 그림일 뿐이다. 싸움과 약탈에 주의를 기울이는 맹수들은 무서운 이빨과 발톱 그리고 강한 근육을 갖고 있다. 맹수들의 시력은, 특히 독수리나 콘도르 같이 현기증 나는 높이에서 자신의 노획물을 정찰해야 할 때 먼 곳까지 이른다. 싸움에서가 아니라 도피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의지를 갖는 겁 많은 동물들은 무기 대신 가볍고 빠른 다리와 예민한 청각을 갖고 나타난다. 그들 중 가장 겁 많은 토끼에게서 청각은 심지어 귀가 눈에 띄게 늘어날 것을 요구했다. 내부는 외부에 상응한다. 육식동물은 짦은 내장을,  초식동물은 더 긴 동화과정을 위해 긴 내장을 갖는다. 강한 호흡과 빠른 혈액 순환은 적합한 기관을 통해 표현되어, 더 큰 근력과 자극성의 필연적 조건으로서 제공되면, 어디에서도 모순은 가능하지 않다. 의지의 모든 특별한 노력은 형태의 특별한 변이 속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노획물이 있는 곳이 추적자의 형태를 결정했다. 노획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활동 영역, 먼 은신처, 밤이거나 어두운 곳에 들어가 있다면, 추적자는 그곳에 맞는 형태를 갖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생명에의 의지가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그 안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만큼 기이한 일은 없을 것이다.(104쪽∼105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솔잣새, 붉은 뇌조, 개미귀신, 펠레컨, 부엉이, 큰 메기, 전기뱀장어, 전기메기, 맵시벌

전나무 열매의 표피에서 정충(精蟲)을 끄집어내기 위해 솔잣새(Loxia curvirostra)는 비정상적 형태의 먹이 섭취 기관을 갖고 있다. 습지에서 파충류를 찾기 위해 붉은 뇌조는 너무 긴 다리, 너무 긴 목, 너무 긴 부리를 갖는 가장 놀라운 형태로 나타난다. 흰개미를 파내기 위해 네 발의 긴 개미귀신은 짧은 다리와 강한 발톱, 그리고 실 모양의 끈적끈적한 혀를 지닌, 길고 좁고 치아 없는 주둥이를 갖고 나타난다. 펠리컨은 상당히 많은 물고기를 담기 위해 기괴한 주머니를 갖고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부엉이는 밤에 자는 것들을 기습하려고 어둠 속에서 보기 위해 굉장히 큰 동공을 가지며, 날 때 나는 소리가 자는 것들을 깨우지 않도록 매우 부드러운 깃털을 갖고 날아간다. 큰 메기, 전기뱀장어, 전기메기는 노획물에 도달할 수 있기 전에 그것을 마비시키기 위해, 또한 자신들의 추적자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 완벽한 전기기구까지 갖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 있는 것이 숨 쉬는 곳에는 그것을 삼키기 위해 다른 것이 동시에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예측되고 계산되었듯이, 심지어 가장 상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다른 것을 제거하려고 든다. 예를 들어 곤충 중에서 맵시벌은 나중에 자신의 알이 먹잇감을 갖도록 특정한 나비 유충이나 그에 유사한 애벌레의 몸에 침으로 구멍을 뚫고 알을 낳는다. 자유롭게 기어 돌아다니는 애벌레에 의존하는 맵시벌은 1/8인치쯤 되는 매우 짧은 침을 갖고 있다. 반면에 애벌레를 고목 깊숙이 숨겨두는 벌에 의존하는 맵시벌은 고목 안에 닿기 위해 2인치 길이의 침을 갖는다. 전나무 열매에 사는 애벌레에 알을 낳는 맵시벌도 거의 마찬가지로 긴 침을 갖는다. 이로써 그 맵시벌들은 애벌레에까지 파고들어서 찌른 후 그 상처에 알을 둔다. 그 알에서 나온 것이 나중에 이 애벌레를 갉아먹는다(커비와 스펜스, 『곤충학 입문』). (105쪽∼107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고슴도치, 아르마딜로, 천산갑, 거북이, 오징어, 나무늘보, 청개구리, 벼룩

마찬가지로 추적당하는 것에게서도 그 적을 피하려는 의지가 방어적인 장치에서 명백히 표현된다. 고슴도치와 호저(豪猪)는 빽빽한 창을 공중에 내민다. 아르마딜로, 천산갑(穿山甲), 거북이는 이빨도 부리도 발톱도 접근할 수 없도록 머리에서 발까지 털로 뒤덮여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작은 것들 중에는 가재의 모든 종이 그렇다. 다른 것들은 물리적 저항을 통해 방어하지 않고 추적자를 속임으로써 방어한다. 그래서 오징어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주변에 퍼뜨릴 먹구름을 만드는 재료를 지니고 있다. 나무늘보는 자신을 이끼 낀 큰 가지로, 청개구리는 자신을 나뭇잎으로 보이게 하는 것처럼 무수한 곤충들이 자신들을 그 거주지로 보이게 한다. 흑인의 머릿니는 까맣다. 백인의 벼룩도 까맣지만, 그것은 유례없이 강력한 장치인 자신의 폭넓고 불규칙적인 뛰기를 믿는다. 그러나 이 모든 준비들에서 예견되는 것을 우리는 예술적 충동에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어린 거미와 거미귀신은 자신들이 처음으로 덫을 놓은 노획물을 아직 알지 못한다. 그리고 방어하는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피에르 당드레 라트라일에 따르면, 누에나방은 전갈파리를 침으로 죽인다. 누에나방을 먹지도 않고 그것으로부터 공격받지도 않지만 그것이 나중에 자신의 둥지에 알을 낳아서 자신의 알이 크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에나방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예견에서 시간의 관념성이 다시 입증된다. 이것은 대체로 물자체로서의 의지가 언급되는 즉시 언제나 나타난다. 여기서 다루어진 관점에서는 다른 많은 관점에서와 같이 동물의 예술적 충동과 생리학적 기능들이 설명을 위해서 서로 도움이 된다. 이 둘에서 의지는 인식 없이 작용하기 때문이다.(107쪽∼108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유기체는 그야말로 가시적으로 된 의지일 뿐

이 기회에 누군가, 자연이 곤충에게도 최소한 초의 불꽃으로 돌진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오성을 나누어주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변은 이렇다. 물론 그럴 것이다. 다만 인간이 초를 만들고 불을 붙이리라는 것을 자연은 알지 못한다. "자연은 어떤 것도 헛되이 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직 비자연적 환경에 대해 곤충의 오성은 충분하지 않는 것이다.(111쪽)

유기체는 그야말로 가시적으로 된 의지일 뿐이다. 절대적으로 최초의 것인 의지로 언제나 모든 것이 되돌아간다. 의지의 필요와 목적이 모든 현상에서 수단을 위한 척도를 주며, 이 수단들은 서로 일치해야 한다.(112쪽)

인간에게서 다른 동물들을 매우 능가하는 오성은 부가되는 이성(비직관적 표상 능력, 즉 개념 능력인 반성과 사유능력)에 의해 지원된다. 그렇지만 그 지원은 오직, 한편으로는 동물의 욕구를 훨씬 넘어서고 무한히 증가하는 인간의 욕구에 비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 무기와 자연적 엄호의 전적인 결여와 크기가 같은 원숭이의 근력보다 뒤지는, 비교적 약한 인간의 근력에 비례한다. 동시에 그 지원은 도피에서 인간의 무능함에 비례한다. 인간은 달리기에서 모든 네 발의 포유동물보다 뒤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지원은 또한 인간의 느린 번식, 긴 유아기, 긴 수명에 비례한다. 이것들이 개별자의 확실한 보존을 요구한 것이다. 이 모든 큰 요구들은 지적 능력을 통해 충족되어야 했다. 그래서 이 능력이 인간에게 그렇게 뛰어난 것이다. (112∼113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경탄할 만한 합목적성과 조화

따라서 우리는, 이 해부학적 요소가 한편으로는 동물의 원형들이 다른 원형에서 불러일으켜졌으며, 따라서 종족 전체의 기본 유형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해부학적 요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연적 자연성질"로서 이해하는 그것이다. 그리고 그 요소 형태의 변화가능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목적에 맞는 자연성질"이라고 부르며, 이로부터 뿔 달린 가축에게서 위 앞니의 재료가 뿔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 설명은 매우 정확하다. 왜냐하면 낙타와 사향노루처럼 뿔 없는 반추동물만이 뿔 있는 것들에서는 없는 위 앞니를 갖기 때문이다.  여기 골격에서 설명된, 동물의 목적과 외적 생활 관계들에 대한 그 구조의 정확한 적합성뿐 아니라 동물의 내부 작용에 있는 경탄할 만한 합목적성과 조화는 다른 어떤 설명이나 전제를 통해서보다, 동물의 신체는 표상으로서 직관된, 따라서 뇌에 있는 공간, 시간, 인과성의 형식에서 직관된 자신의 의지 자체일 뿐이라는, 그래서 의지의 단순한 가시성, 객체성일 뿐이라는, 내가 이미 다른 곳에서 확인한 진리를 통해서 불분명할지라도 가장 잘 이해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가정 아래에서는 신체에 종속되었거나 신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최종 목적을 위해, 즉 그 동물의 생명을 위해 공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체 안에서는 어떤 불필요한 것, 과도한 것, 결여된 것, 목적에 모순되는 것, 불충분한 것, 그 방식이 불완전한 것도 발견될 수 없고, 필요한 모든 것은 그 필요한 만큼 정확히 그곳에 있어야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여기서는 장인, 작품, 재료가 하나이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유기체는 극도로 완벽한 걸작이다. 여기서는 의지가 먼저 의도를 갖고 목적을 인식하고 그 다음에 수단을 목적에 맞추고 물질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의욕이 직접적으로 목적이고 또한 직접적으로 성취다. 그래서 먼저 억제되어야 할 이질적인 어떤 수단도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의욕, 행위, 성취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유기체는 기적으로서 거기에 서 있으며 인식의 등잔 불빛에서 꾸며진 인간의 작품과 비교될 수 없다.(116∼117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언제나 다시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

자연산물에서 물질은 형식의 단순한 가시성이므로, 우리는 또한 형식이 물질의 단순한 소산으로서 나타나는 것을, 즉 물질의 내부로부터 결정화 속에서, 식물적·동물적 "자연발생"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을 경험적으로 목격한다. 이 자연발생은 기생 동식물에게서도 의심될 수 없다. 이 이유로부터 또한 추측되는 것은, 어떤 곳에서도, 어떤 행성이나 위성에서도 물질이 끝없는 정지 상태에 빠져 있지 않고 물질에 내재하는 힘(즉 의지, 물질은 의지의 단순한 가시성)은 시작된 휴식을 언제나 다시 끝내고, 기계적·물리적·화학적·유기적 힘으로서 그 놀이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 언제나 다시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다. 그 힘은 언제나 오직 계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120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

나의 학설로부터 당연히,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자연, 즉 결코 속일 수 없고 천재처럼 순진한 자연은 자신을 꾸밈없이 표명한다. 모든 존재는 자신과 정확히 같은 다른 어떤 것에 생명의 불을 점화할 뿐이며, 그 다음에 그것의 재료는 밖에서, 형식과 운동은 자신으로부터 조달하여 우리 눈앞에서 자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장과 발전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경험적으로도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작품으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다.(12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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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1-09 0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대단하시어요.
덕에 저도 철학책 좀 읽으려구요.
언제나 핑계는 시간...
오래오래 알라딘을 지켜서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 해주시길...
자세한 건 내일 다시 와서 읽을게요. 밤이 깊어서리...

oren 2013-01-09 13:18   좋아요 0 | URL
동지섣달 차디찬 새벽에 귀한 발걸음 해주시고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드려요~
저도 딱딱한 철학책은 좀 집어치우고, 아늑하고 포근하거나 혹은 따사로운 봄햇살 같은 문학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요. 그런데 철학책에는 히말라야의 빙벽을 오르는 듯 사방이 낯설고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듯해도 그걸 뚫고 기어오르는 희열 같은 걸 느낄 수도 있어서 그 나름의 독특한 매력도 있답니다. ㅎㅎ
* * *
"참된 등산가는 하나의 방랑자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일찌기 인류가 도달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 일찌기 인간의 손가락이 닿지 않은 바위를 붙잡거나, 대지가 혼돈에서 일어난 이래 안개와 눈사태에 그 음산한 그림자를 비쳐온 얼음으로 가득 찬 걸리를 깎아 올라가는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등산가는 새로운 등반을 시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마찬가지로 그 투쟁의 재미와 즐거움에 기쁨을 느낀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온 혈관에 욱신거리는 피를 흐르게 하여 모든 냉소의 자국을 파괴하고 비관적인 철학의 뿌리 그 자체를 강타한다."

"인생의 근심걱정은 금권주의 및 사회의 본질적 속악함과 함께 아득히 저 아래쪽에 남는다. 위쪽에서 우리는 맑은 공기와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신들과 함께 걷고, 인간은 서로를 알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안다."

-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1855~1895)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中에서


페크pek0501 2013-01-10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서재를 다니다 보면 각각 서재 님들이 즐겨 보는 책이 다 다르다는 것에 주목하게 되어요.
제가 요즘 심리서적이나 에세이를 즐겨 보는 것처럼 오렌 님도 같은 계통의 책들을 즐겨 보시는 것 같아요.
저도 한땐 철학 책만 집중해서 읽은 적이 있긴 해요. 철학을 모르면 문학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에요.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 동서문화사 - 가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좋더군요. 우선 이 책부터 읽어야겠단 생각이,
님의 페이퍼를 보면서 하게 됩니다. 덕분이 좋은 글 많이 구경?하고 갑니다. ^^

oren 2013-01-11 13:25   좋아요 0 | URL
정말 다양한 분들이 온갖 종류의 책들을 읽고 또 그 내용들과 감상들을 옮겨 놓는 공간 있다는 것 때문에 책 블로그는 그 수명이 오래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는 이름만 들어본 책인데, 어느 분의 서평글을 보니 "이 책을 읽고 철학도로 빠진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다고들 합니다. 또한 이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뀌어졌다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라고 되어 있네요. 저도 기회가 되면 꼭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책 추천 감사드려요~
 
한 권의 책과 새로운 기원



2012년 12월...

어느덧 한 해가 저문다. 해야 할 일도 많았고 바라던 일들도 많았는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다. 이대로 또 한 해를 넘기자니 아쉬움이 너무 많다. 이쯤에서 문득 어느 책에서 읽었던 키케로의 말이 생각난다.

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그리고 셰익스피어 드라마에 나온다는 대사도 떠올려 본다.

"이 한심한 화상아!"


책장을 살펴보니...


방 한켠 책장에 담긴 책들과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쌓인 책들을 살펴봐도 한숨이 나오기는 매한가지다. 읽은 책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보잘것 없고, 읽어달라고 아우성치는 책들은 자꾸만 늘어난다. 그래도 일말의 위안으로 삼을 만한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시류에 휩쓸려서 이 책 저 책들을 마구잡이로 사들이지 않았다는 것과 제법 두툼하고 난해한 책들도 몇 권쯤은 읽었다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쯤에서 나의 책읽는 습관을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왜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지만) 남들이 잘 읽지 않는 책들을 애쓰며 힙겹게 읽는 것일까. 여러 해 이런 저런 책들을 읽는 동안 나의 성격이 조금 자학적으로 바뀐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렇게까지는 아닐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라면 혹여 몰라도 (고상한 취미일 수도 있는) 책을 읽는 일에서까지 나 스스로를 일부러 힘겹게 하거나 몰아붙일 일은 아니지 않는가. 책읽기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들을 떠올려 보니, 나에겐 어쩌면 '명저들은 꼭 한번쯤 읽어 봐야지'하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아직도 8,000m급 고봉은 몰라도 '히말라야 트레킹 정도는 꼭 한번 다녀와야지' 하는 그런 심정과도 비슷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평소에 알게 모르게 얼마나 자주 '명작' 혹은 '고전'들에 자주 노출되는가. 책들을 읽다가, 라디오를 듣다가, 영화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신문을 읽다가, 인터넷(특히 알라딘)을 통해서.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런 책들'을 꼭 한번은 읽어야만 할 것같은 '무언의 압박'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영화 '버킷리스트'에서 남자 주인공이 '단테의 신곡은 읽어봤는가' 라는 대사 하나에 마음속 어느 한 켠에선 틀림없이 '움찔'하는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서 '책들에 관한 이야기'를 서로 진지하게 나누기란 무척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좀 더 심각하게 말했다. '일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곳'인 거기에 바로 '일상성의 애매함'이 존재한다고. 이러한 애매함이 '호기심에게는 언제나 그것이 찾는 것을 건네주고, 잡담에게는 마치 그 속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듯한 가상'까지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일찌기 '일상에서 주고받는 친구들과의 대화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질려 버렸고, 몽테뉴는 아예 '중세의 고성'에 틀어박혔으며, 소로우는 아예 호숫가 외딴 집으로 거처를 옮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독서에서는, 우정이 갑자기 그 원래의 순수성을 되찾게 마련이다. 책을 상대로 해서는 거짓된 친절 따위가 있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런 친구들과 저녁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러고 싶어서일 것이다. ······ 우리는 몰리에르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재미있을 때에만 웃을 수 있다. 그가 우리를 지루하게 만들 경우라도, 우리는 지루한 표정이 들통날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며, 일단 그를 충분히 즐겼다는 확신이 서면 마치 그가 천재도 유명인사도 아닌 것처럼 냉큼 원래의 자리에 꽂아둘 수도 있다.
 - 마르셀 프루스트(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中에서)

긴긴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평생을 책 속에 파묻혀 지내다 간 인물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가히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수많은 철학자와 학자와 소설가와 시인들과 그밖에 이름모를 수많은 '책만 읽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은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은 채) 거의 책만 읽다가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어떤 책에서 내가 읽은 바로는,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고 자신의 삶을 마감한 이름모를 위인들'이 만약에 한 권씩만 더 책을 썼더라도 우리가 지금 '읽어야할 책들'은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늘어났을 것이라고 한다.

어떤 한 인물이 자신의 평생에 걸쳐서 얼마나 많은 책을 읽을 수 있고 또 얼마나 많은 책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결코 함부로 판단해선 안될 듯싶다. 굳이 거대한 도서관에 가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한 사람이 썼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분량의 책들을 남긴 인물들을 얼마든지 떠올려볼 수 있다. 몇몇의 철학자만 예를 들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쓴 책들이 도서관의 서가마다 하나의 블록을 형성한 채 빼곡히 꽂혀 있는 모습에 거의 질릴 정도가 아니던가.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칸트, 니체, 헤겔, 하이데거 등등이 남긴 저작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번역조차 덜 된' 책들도 많다고 들었다.

 

 

(2009년 5월 미국 여행 중 '예일대 도서관'에 들렀을 때 별다른 눈총도 받지 않고 '몰래' 찍었던 사진)

또한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옛 인물들-가령 퇴계나 다산-이 남긴 저작들은 또 얼마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지. 여기에 몇몇 역사가와 소설가를 더하면 우리는 그들이 쓴 책들의 어마어마한 분량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가 된다. 『역사』를 쓴 헤로도토스, 『영웅전』을 쓴 플루타크와『역사의 연구』를 쓴 토인비도 그렇고, 셰익스피어와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도 그런 인물들이다. 그들은 우리로서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분량의 책들을 남겨놓았다.


참다운 작품만을 읽어야 하는 이유


어쩌면 나는 그런 위인들이 남긴 수많은 걸작들 가운데 단 몇십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내 삶을 마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천재들 가운데 단지 몇 사람의 책만 읽는다 하더라도 그리 섭섭하지는 않을 듯하다. 몇몇 위인들만 만나더라도 그들 스스로 나서서 또다른 여러 수많은 훌륭한 인물들을 소개해 주는 걸 늘 잊지 않으니까. 뛰어난 인물들이 쓴 책들은 거의 대부분 정말 그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많다. 

내가 그동안 읽으려 애썼던 책들 가운데는 특히 저자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쳐 쓴 작품들이 많다. 그런 작품들이 지닌 독창적인 가치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이미 여러 선구자들이 그런 작품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수없이 많이 반복해 왔지만, 나로서는 쇼펜하우어가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매서운 채찍을 들고 호통치듯이) 내뱉은 일갈만큼 더 속시원한 말도 찾기 어려울 듯싶다.

자연과 인생에서 직접 이끌어 낸 참다운 작품만이 자연이나 인생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젊고 언제까지나 근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참된 작품은 특정한 시대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 또 이러한 작품은 진부해지지 않고, 시대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언제나 새롭게 사람의 마음에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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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모방자, 꾸미는 자, 모조자, 맹목적인 모방자들은 예술을 개념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참된 작품을 보면, 마음에 들거나 효과가 뚜렷한 점에만 관심을 두고, 이것을 명확하게 하여 개념으로서, 즉 추상적으로 파악한 다음에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교활한 생각을 품고 모방한다. 그들은 기생 식물처럼 타인의 작품에서 양분을 섭취하고, 해파리처럼 그 양분의 색깔을 갖는다. 비유를 사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끌어 넣은 것을 잘게 깨어 혼합시킬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소화할 수 없는 기계와 같다. 따라서 그 혼합물 속에서는 언제나 다른 성분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거기에서 가려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천재는 유기체처럼 동화하고 변화하고 생산한다. 왜냐하면 천재도 선배나 그 작품에 의해 계발되고 교화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에게 직접 직관적인 것의 인상에 의해 예술적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생활과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교양이 높아도 천재의 독창성엔 지장을 주지 않는다. 모방자나 꾸미는 자는 타인의 걸작을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개념은 결코 작품에 내적 생명을 부여할 수 없다. 시대 일반, 즉 그 시대의 다수를 점하는 어리석은 대중은 기교를 부린 작품에 기꺼이 갈채를 보내며 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은 2,3년이 지나면 재미가 없어져 버린다. 왜냐하면 시대정신, 즉 유행의 개념이 변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작품의 유일한 근거는 이 유행의 개념이다.

자연과 인생에서 직접 이끌어 낸 참다운 작품만이 자연이나 인생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젊고 언제까지나 근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참된 작품은 특정한 시대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은 그 시대에 영합하는 것을 경멸하고 시대로부터는 냉담한 대우를 받으며, 그때그때의 잘못이 그 작품에 의해 간접적이고 소극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나중엔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또 이러한 작품은 진부해지지 않고, 시대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언제나 새롭게 사람의 마음에 호소한다. 이렇게 인정받은 이상, 이제는 무시되거나 오인받을 염려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판단력이 출중한 소수의 사람들의 칭찬으로 영광의 왕관을 쓰고 진가를 인정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 소수의 출중한 사람들은 백 년 동안에 아주 적게 나타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의견은 점차 권위가 확립되는데, 이 권위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이 작품들의 진가를 후세에 호소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잇따라 나타나는 위대한 개인이야말로 이 유일한 전거이다. 왜냐하면 동시대의 대중이 언제나 어리석고 우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후세의 대중도 여전히 어리석고 우둔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위인들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한 말을 읽어 보라. 인간은 언제나 같기 때문에 위인들의 탄식도 지금이나 옛날이나 변함이 없다.
어느 시대에나 또 어떠한 예술에서도 작풍이 정신을 대리하며, 정신을 소유하는 것은 언제나 위대한 개인뿐이다. 그러나 작풍이란 모든 시대에 존재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은 정신의 현상이 벗어 버린 낡은 의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후세의 갈채는 동시대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며, 또 동시대의 갈채는 후세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다.(764쪽)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충족 이유율에 근거하지 않는 표상, 플라톤의 이데아, 예술의 대상>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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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아본 '두툼한' 책들

다시 책장과 책상 위를 둘러보니 어지간히 '두툼한 책들'이 자꾸만 눈에 띈다. 예전에는 저런 책들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해 좀처럼 사지 않았는데 언제 저렇게 읽지도 못한 책들이 자꾸 쌓여만 갈까 싶기도 하다. 아마도 근래 몇 년간 두꺼운 책들을 몇 권쯤 읽으면서 은근히 '책 읽는 근육'이 조금은 붙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직도 이래저래 할 일도 많고 놀기에도 바쁘다 보니 '재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던 옛시조 한가락이 절로 나온다. 한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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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단테 알리기에리 1265∼1321신곡 (3권을 합하면 1,120쪽, 1권 399쪽, 2권 348쪽, 3권 373쪽)




(천국편 33곡의 맨 끝 부분, 책을 읽으면서 뭘 저렇게 많이 끄적거려 놓았는지 모르겠다.)

 

중세 유럽의 번창하던 도시국가였던 피렌체에서 왕성한 정치활동을 했던 단테가 정적으로부터 모함을 받게 되고 결국 피렌체로부터 추방되기에 이르자 100곡의 서사시를 통해 온갖 인물들을 단죄하여 지옥으로 보내고, 또 그가 평생 흠모했던 로마의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등장시켜 지복에 이르는 '천국'으로 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작품.

당시의 정치, 종교, 사회적 환경이 지금과는 너무나 다르다고 하지만, 결국 사람이 사는 세상은 별 다를 게 없다는 것과 상상속의 천국과 지옥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하여 '단테 이후'의 사람들에게 '현실보다 더 생생한 상상의 세계'가 실재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든 책.

단테가 쓴『신곡』은 밀턴의 『실락원』처럼 '문학적'으로는 대단한 가치를 지닌 작품이지만, 정작 인류의 정신생활 측면에서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초래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신을 믿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그럴듯한 환상을 안겨준 데 비해 무신론자들에게는 너무나 허황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단테가 쓴 불후의 걸작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발견했을 때도 '맞는 말씀' 같아 반가웠던 기억도 떠오른다.

단테는 어디서 지옥의 표본과 이미지를 얻게 되었을까? 우리가 사는 이 세계 말고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가 그린 지옥은 참으로 그럴듯하다. 그런데 단테가 천국과 그 즐거움을 그리려 했을 때, 그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그곳과 비슷한 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테는 천국의 즐거움을 그리기보다 자기가 거기서 얻어들은 조상이며 마음속 애인 베아트리체, 그리고 많은 성자들의 교훈을 전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이 세계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쇼펜하우어, 『세상을 보는 지혜』中에서)


☆ 뉴스위크가 여러 추천 리스트를 토대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책 100권' 가운데 10위
    (추천 리스트 : 모던 라이브러리, 뉴욕 공공 도서관, 세인트 존즈 대학,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 등)




베르길리우스  기원전 70년∼19년, 
  아이네이스
 
(번역본은 총 581쪽에 불과하지만 주석에 딸린 '방대한 신들의 계보'를 따라가다보면 1,000쪽에 버금가는 책)
 


로마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 쓴 로마건국에 관한 대서사시. 그는 문자 그대로 시성(詩聖)으로서의 대우를 받았고 사후에는 거의 미신적인 명성을 누리게 되었고, 그의 작품은 거의 2,000년 동안 학교 교재에 가장 널리 실리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영국 시인 테니슨은 베르길리우스를 가리켜 "인간의 입술에서 나온 것 중 가장 장엄한 가락으로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칭송했을만큼 아름다운 작품이며, 베르길리우스를 
모든 시인들 중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시인으로 만들어준 작품. '그는 마치 암곰처럼 시행들을 거칠게 낳아 그것을 혀로 핥아서 예쁘게 모양을 내는 습관'을 가지고 죽을때까지 이 서사시를 조탁했다고 한다. 그는 미완성 시행들을 오십여 군데 남겨두고 열병을 얻어 사망했는데, 자신이 죽게 되면 이 작품을 불태워 없애달라는 약속을 친구로부터 받아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책으로 간행되면서 거의 원형 그대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대작에 내가 섣불리 리뷰를 쓴다는 건 시성(詩聖)에 대한 결례일 뿐만 아니라, 언감생심 이런 작품에 대해서는 리뷰를 쓸 능력조차 거의 없다는 걸 절감하고 포토리뷰로 갈음한 기억이 새롭다.

최초의 로마인의 인생 역정을 다룬 로마 건국 신화



제임스 조이스, 1882∼1941, 율리시스
 (번역본은 총 1,323쪽이지만 매 쪽마다 딸린 '엄청난 주석'까지 포함하면 수천 쪽에 버금가는 책)


(책의 그림자만 봐도 얼마나 두꺼운지 감이 잡힐 듯)



이 책은『오디세이아』가 모태인 소설이고 신곡 이래 가장 완벽하게 조직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읽으면 알 수 있는 책'이 아니란다. 클리프턴 패디먼의 설명에 따르면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곡들이 오래 듣고 연구할수록 그 풍부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듯이, 오로지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비밀스러운 뜻을 드러낸다."고 한다.

침투하기가 불가능한 소설처럼 보이는 이 작품을 언제 정복할 수 있을지...... 이 산의 정상에 오르면 아주 풍요로운 광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고 하던데......


'『율리시스』를 읽으려고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모험'이라고 해서 아주 가끔씩 나도 이 책을 들춰보곤 하는데, 아직까지도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물론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비롯한 좀 더 쉬운 책부터 읽고 나서야 이 책을 온전히 읽어낼 수 있을 것도 같고.

아무튼 '독자들에게 큰 소득을 안겨줄 책'이라고 하니 언젠가는 꼭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해 본다.

☆ 뉴스위크가 여러 추천 리스트를 토대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책 100권' 가운데 3위
    (추천 리스트 : 모던 라이브러리, 뉴욕 공공 도서관, 세인트 존즈 대학,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 등)
☆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동아일보 선정)



호메로스, 기원전 800년경,  일리아스 / 오디세이아
(두 권을 합하면 1,511쪽, 일리아스 839쪽, 오뒷세이아 672쪽)



이 두 작품에 육박한 또 다른 서사시는 있어 본 적이 없다는 걸작이다.

수많은 다른 작품들 속에 무수히 인용된 이 작품은 거의 모든 문학작품과 예술작품의 모태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일리아스는 영웅을 다루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며, 오디세이아는 고난에 맞서는 모험 이야기이다.

호메로스의 작품을 읽은 지 어느덧 30년쯤 지난 것 같다. 이 작품만 보면 까마득한 옛날 시골의 고향집에서 온돌바닥에 배를 깔고 몇 시간이고 책을 읽었던 기억이 늘 새롭다.

몇 년 전에 오래된 독서노트를 뒤적거리다가 이들 책을 읽으며 끄적거렸던 흔적을 만났는데, 거기에는 '로터스'라는 흥미로운 열매에 관한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호메로스의 작품 속 주인공인 오디세우스가 모진 폭풍우를 겪고 나서 어느 낯선 땅에 올랐을 때 거기에 사는 종족들은 '로터스'라는 열매를 먹고 살았는데, 그 열매를 먹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조국과 고향을 떠나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온갖 풍파와 방랑을 겪은 사람이 가장 그리워하는 대상은 무엇일까. 죽어서라도 기필코 되돌아가고픈 그 곳,  고국과 고향보다 더 간절한 대상이 또 있을까. 

어쩌면 수많은 문학작품과 예술작품의 안태고향과도 같은 작품이 바로 호메로스의 서사시일 듯한데, 그런 문학의 고향,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가서 수십 년 전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아울러 '고향의 아늑함'마저 다시금 느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수단의 소설가 타옙 살리는 7년 만에 고향 마을로 돌아온 한 남자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고 한다. “마치 내 안에서 한 덩이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기분, 마치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 있는 꽁꽁 언 물체가 된 기분이었다.” 호메로스의 책을 다시 펼쳐 읽으면 내 마음 속에는 어떤 느낌이 생겨날까 사뭇 궁금해진다.)

워낙 오래된 책이어서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책'에 언제나 거의 맨먼저 포함되는 책.

☆ 뉴스위크가 여러 추천 리스트를 토대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책 100권' 가운데 (오뒷세이아와 함께) 9위
    (추천 리스트 : 모던 라이브러리, 뉴욕 공공 도서관, 세인트 존즈 대학,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 등)




오비디우스  기원전 43년 ~ 기원후 17년 또는 18년.  변신 이야기 (799쪽)

 

오비디우스는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로마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매우 노골적인 연애기법을 다룬 사랑의 기술을 쓴 작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사랑의 기술은 부피도 얇을 뿐더러 독자층도 사뭇 다를 듯한데, 그가 쓴 대표작인『변신이야기』와는 너무 동떨어진 느낌이 들어 같은 저자의 작품임을 의심케 한다.(단지 의심케 할뿐이다.)

 <변신이야기>는 '신들의 변신'을 통해 인간의 욕망에 대한 폭넓은 통찰을 보여준 작품이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함께 서양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준 라틴문학의 걸작이다. 수많은 문학작품과 예술작품에 영감을 주었으며 수천 년 동안 서양인들의 자의식에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또한 불멸의 작가들인 셰익스피어, 밀턴, 단테, 괴테, 제임스 조이스 등 여러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우리가 평소에『그리스·로마 신화』에 너무 많이 노출된 덕분에 이 작품 또한 너무 뻔한 얘기가 아닐까 싶어 오히려 더 외면받는 작품이지 싶은데, 나도 언젠가 꼭 한번 '신들의 계보'를 따라 가면서 이 책을 정독을 하고 싶다. 우리가 유럽에서 태어나거나 자랐더라도 이 책을 열심히 읽지 않을 수 없었을텐데... (유럽의 그 많은 박물관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온갖 미술품과 조각품들을 보고 자랐더라면 이 책을 외면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테니까.)

 
☆ 평생 동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의 저자 137명(『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부록)



마르셀 프루스트, 1871∼192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국일미디어에서 나온 11권은 '계산 결과' 무려 4,498쪽!)


 

 

이 긴 소설을 나는 아직 '구경'조차 다 해보지 못했다. 겨우 올해서야 '두 권'을 손에 쥘 수 있었을 뿐.

이 책을 과연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 앞으로 
5∼10년 사이에는 가능할까.
 
2012년에 내가 몇몇 책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접한 인물은 쇼펜하우어, 칸트, 니체, 베르그송, 프루스트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나는 베르그송의 책을 통해 이 기이한 소설가의 작품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알랭 드 보통의 '친절한 안내'까지 받아 놓은 터라 언젠가 만나긴 만나봐야 할 것 같은 작품으로 '격상'되었다.


보통이 들려주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사용설명서


☆ 뉴스위크가 여러 추천 리스트를 토대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책 100권' 가운데 65위
    (추천 리스트 : 모던 라이브러리, 뉴욕 공공 도서관, 세인트 존즈 대학,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 등)
☆ 평생 동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의 저자 137명(『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부록)




빅토르 위고, 1797 ∼1884, 레미제라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기준으로 총 2,566쪽, 제1권 532쪽, 제2권 468쪽, 제3권 432쪽, 제4권 600쪽, 제5권 524쪽)


(1993년 1월 5일 발행된 학원 세계문학전집(전30권)으로는 1,2권 합해서 1,091쪽)

초등학교 시절에 <장 발장>을 읽어보지 않은 초딩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동을 기억하며 다시금 어른이 되어서 이 방대한 작품을 다시 읽는 어른들은 또 얼마나 될까. (물론 책을 엄청 좋아하시는 분들이 와글와글한 알라디너 분들은 예외로 하고.)

2001년에 가족들과 함께 난생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갔을 때, 가슴을 두근거리며 프랑스의 파리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했던 기억을 꺼내본다. 맨날 TV로만 구경했던 에펠탑도 상상을 너무나 벗어날만큼 웅장했고, 노트르담 성당도 유럽을 처음 가본 촌뜨기의 눈에는 정말 대단한 걸작 예술품으로 보였다. 거기에다가 파리는 하수도 시스템이 오래전부터 엄청나게 잘 갖춰져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다가 아무데서나 담배꽁초를 마음대로 버려도 좋았다. 매일 새벽에 시내도로를 물청소를 한다는 것이다.(이원복 교수님의 책 속에도 그런 내용이 나왔던 것 같지만, 막상 현실로 대하고 보니 그것도 매우 신기했다.) 그때 가이드 아가씨로부터 하수도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아마도 나도 모르게) 틀림없이 '장발장'과 '노틀담의 곱추'와 '성냥팔이 소녀'를 떠올렸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빅토르 위고의 시신이 개선문 아래에 묻혀 있다는데, 우리 일행이 개선문에 갔을 땐 그런 설명을 전혀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아무튼 어릴 때 이 책을 읽었던 기억 가운데 '형사 자베르의 집요한 추적'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한데, 어른이 된지도 한참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이 책을 다시 읽어도 어린 시절에 느꼈던 그 '발각될까 두려운 느낌'이 과연 되살아날까 자못 궁금해진다. 

마침 12/19부터 상영을 시작할 예정인 영화 〈레미제라블〉덕분에 더욱 많은 분들이 이 작품을 다시 기억에 떠올리겠지만 원작을 다 읽는 일은 여전히 힘들고 벅차 보인다. 올해 민음사에서 새로 나온 책(전5권 세트)의 분량만도 무려 2,500쪽이 넘는데 몇몇 알라디너 분들은 벌써 이 책을 거의 다 읽은 듯싶다. 대단한 분들이고 나로선 흉내내기조차 어려울 정도여서 그저 존경스럽다.


☆ 평생 동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의 저자 137명(『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부록)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베드라
, 1457∼1616, 돈키호테  (732쪽)




(아들녀석이 워낙에 공부가 뒷전이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대학 두 곳에 '덜컥' 붙었다.)

나에게도 '로시난테'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 로시난테는 십중팔구 '낡아빠진 자동차'를 빗댄 것이 틀림없다. 이게 비유적인 표현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건 당연히 소설 '돈키호테'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성경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번역되고 연구되는 대여섯 권의 책들 중 하나'라고 한다. 왜 이 소설이 그토록 유명해 졌을까. 그건 작가 세르반테스가 '풍차에 돌진하는 돈키호테 같은 인물' 한 사람을 창조해 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비록 로시난테라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자산' 밖에 갖추지 못한 우리의 주인공 '돈키호테'가 얼마나 용감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줌으로써, 이 세상이 '가진 것' 없이도 얼마든지 신나게 한번 살아볼 수도 있다는 걸 가르쳐 주며, 그래서 이제 막 세상을 향해 길을 나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무한한 용기를 심어주고 모험을 자극하도록 도와주는 매우 흥미진진한 작품이 되었던 것 같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더군다나 이번에 마침 수능이 끝나서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기 어려운) 아들 녀석한테 '책'을 한 권 선물해주고 싶어서 나름대로 심사숙고한 결과 고른 책이 '돈키호테'였는데, 내가 예전에 사두고서 여태 읽지도 않고 깨끗하게 간직해 둔 덕분에 '새책'처럼 선물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흥미진진한 이 세상을 이제 막 출발하려는 아들이 무엇보다도 '씩씩하고 용감하게' 여러 모험을 찾아 나서주길 바라면서 흔쾌히 선물했는데, 아직까지는 한 페이지도 안 읽은 듯싶다. 아빠를 닮아서 그런지 아니 닮아서 그런지 조금은 헷갈린다.




박경리, 조정래, 이문열...  토지, 태백산맥, 아리랑,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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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나의 문화유산 답시기'를 읽고 '남도기행'을 다니면서, 전남 해남과 보길도,  강진의 다산초당과 보성을 거치면서 낙안과 구례까지 두루 둘러보면서도 미처 '벌교읍내'까지는 가보지 못한 게 아직도 진한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보성과 벌교를 여행할 때 이 책에서 펼쳐지던 '광경들'을 떠올리지 않을 도리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꽤 오랫동안 아내 친구한테 '대여중'이이라고 들었는데 언제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고교때 읽은 박종화 번역본 삼국지는 정말 손에 땀을 쥘 정도로 흥미진진한 전쟁소설이었으나, 나이 40이 넘어서 이문열 번역본으로 다시 읽어본 삼국지는 온통 권력투쟁과 권모술수만 가득한 음모소설에 불과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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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1828∼1910, 인생이란 무엇인가 (1,220쪽)



이 두툼한 책은 언제 또 읽어볼 수 있을까. 톨스토이만큼 삶을 진실하게 살았던 인물도 드물지 싶다. 톨스토이는 진실을 말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인생이나 예술이나, 단 한 가지 필수적인 사항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의 주제 또한 '인생의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단 책들은 그 동안 많이 봐왔지만 이 책처럼 '두꺼운' 책도 드문 것 같다. 까마득한 옛날 '인생이 뭔지도 모르면서' 읽었던 비슷한 제목의 책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왠지 이 책은 나이가 좀 더 들어서 '인생을 좀 더 살아보고' 읽어도 좋을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훗날 문득 '인생이란 무엇일까' 몹시도 궁금할 때 이 책을 붙잡아 봐야겠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1817∼1862, 월든 (두 권을 합하면 948쪽, '월든' 485쪽 '주석달린 월든' 463쪽)



소로의 책 월든은 읽으면 읽을수록 대단함이 느껴지는 책이다. 그는 '삶 그 자체'를 온전히 제대로 살아보기 위해서 조용한 호숫가에 외딴 오두막을 손수 짓고 그곳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이 책은 단순하게 보면 '오두막에서 보낸 생활수기'에 불과한 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하버드를 졸업했을 뿐만 아니라, '취업이나 성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진정한 공부'를 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삶'에 대해서 '똑바로 바라보고' '많은 생각들을 떠올린'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살아생전에는 자기 자신을 상대로 무수히 많은 독백을 했고, 사후에는 수백만 명, 어쩌면 수억 명의 사람들을 상대로 호소'하는 인물이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깊이 감동하여 책의 페이지마다 성한 데가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밑줄을 그었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서 결국 밑줄그은 부분들을 모조리 '필사'해 놓았다. 그리고 가끔씩 그가 생각날 때면 내가 베껴쓴 내용만이라도 한번씩 들춰보곤 한다. 그리고 이 책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월든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선물용으로도 여러 권 사놓고 있다. 주석 달린 월든도 가끔씩 들춰보곤 하는데 언젠가는 '주석마저' 모조리 다 읽으며, 그의 '놀라우리만치 깊디 깊은 생각들'을 다시금 음미하고 싶다.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 그레이트북 144권 (미국의 독서그룹 & 시카고대학 교수진 참여)
☆ 평생 동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의 저자 137명(『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부록)



[역사]

 
헤로도토스, 기원전 484년 경∼425년 경, 역사 (박광순역 923쪽, 천병희 역 994쪽)



헤로도토스는 역사가 이전에 여행가였다. 그는 마라톤 전투가 벌어지던 까마득한 옛날에 거의 '전세계'를 여행한 인물이다. 그의 여행 범위는 북으로 우크라이나, 동으로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거쳐 바빌론까지, 남으로는 오늘날의 이집트 아스완, 서로는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키레네 산맥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쓴 이집트에 관한 책(헤로도토스의 이집트 기행)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 책 속에 담긴 '피라미드에 관한 이야기'와 '미이라 제작에 관한 자세한 내용들' 덕분에 이집트 고고학 연구에 '결정적인' 보탬을 주고 있다는 얘기도 어디선가 들었다.

그가 쓴 '역사'의 무대는 크세르크세스(Xerxes : 재위 486~465 BC, 다리우스의 아들)가 활약하던 때였다. 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 : 499∼479 BC) 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서양 구분의 원초적 원인을 제공한 싸움이었다. 영화 《300》에서도 묘사된 것처럼 페르시아 전쟁은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이라 부를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었다. 페르시아의 수백만 병사들이 이동하는 곳마다 '강줄기가 마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장군은 영화《300》의 주인공인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였다. 책과 영화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된 테르모필레 협곡에서의 전투는 아마도 '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몇몇 장면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중에 언제 그리스를 여행할 기회가 생기면 그 '협곡'을 꼭 한번 가보고 싶다. 몇 년전 명동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했던〈레오니다스〉초콜릿 전문점은 아직도 건재한 지 궁금하다.

인류 최초의 동서간 대전쟁을 다룬 역사의 원전

레오니다스의 경우

 



투키디데스, 기원전 470/460년 경∼400년 경,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박광순역 849쪽, 천병희 역 800쪽)

 



헤로도토스가 수다스럽고 산만하다면, 투키디데스는 근엄하고 통합적이다. 그는 문화사가라기보다 정치와 군사의 역사가이다. 그는 의심이 많은 데다 매력적이지 못하며, 그래서 읽기가 까다롭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그의 책은 제대로 읽어내기 어렵다. 하지만 그는 되풀이하여 읽으면 진국이 나오는 작가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권력(힘의) 정치의 내면을 파악한 최초의 역사가이다. 홉스, 마키아벨리, 마르크스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그의 자식들이다.

 (클리프턴 패디먼)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칭송했던 우리나라 또한 숱한 전쟁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특징으로 말미암아 북쪽으로는 오랑캐들로부터, 남쪽으로는 바다 건너로부터의 무수한 침략에 시달려온 아픈 역사를 지녔다. 물론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까지도 낡은 이념의 대립으로 동족끼리 '전쟁불사'를 외치는 분단된 국가에 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중의 반역을 쓴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역사를 예견할 수 없다는 말은 거짓이다. 역사가 예언된 경우는 셀 수 없을 정도다. 만일 미래가 예언에 열려있지 않다면, 그것이 실현되어 과거가 된다 해도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역사가가 뒤돌아선 예언자라는 것은 모든 역사 철학을 요약해주는 관점이다."라고 말했다. 자기 자신의 나라를 지키려고 그토록 애썼던 수많은 국가들의 훌륭한 선조들이 무엇을 위해 그 엄청난 희생을 치렀는지, 우리의 조상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조국'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쟁과 다름없는 현실세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마땅한 자세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토록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역사책도 흔치 않을 것 같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을 마주하며



재레드 다이아몬드, 1937년∼   ,  총,균,쇠, 문명의 붕괴 (총균쇠 787쪽, 문명의 붕괴 687쪽)



새봄 새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늘 자신의 이름과 저서가 '검색'되는 인물 가운데 재레드 다이아몬드를 빼놓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도 어느덧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가 1998년에 퓰리쳐상을 수상한 총 균 쇠는 '인류문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놓쳐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책'으로 늘 꼽힌다. 그래서 '대학 입시 공부'에만 매달렸던 대학 신입생들이 좀 더 '세상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키우기 위해 어떤 책들을 읽어야 할까를 궁리하다 보면, 거의 틀림없이 <대학 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 목록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교수의 이름과 이상한 제목을 단 총 균 쇠라는 책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가 1972년 7월에 열대의 섬 뉴기니의 해변을 거닐고 있었을 때 우연히 만난 얄리라는 정치가로부터 받은 질문은 이렇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문명)들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그 질문을 받은 이후 저자는 인류의 진화, 역사, 언어 등의 여러 측면들에 대해 연구한 결과들을 바탕으로 하여 바로 이 책을 통해 얄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실로 '인류 문명의 불평등에 대한 기원'을 찾아나서는 방대하고도 거대한 스케일의 탐구 여행이 아닐 수 없다.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은 모두 엇비슷하고 가축화할 수 없는 동물은 가축화할 수 없는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읽은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 문장에서 몇 마디만 바꾸면 바로 톨스토이의 위대한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유명한 첫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이 문장에서 톨스토이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결혼 생활이 행복해지려면 수많은 요소들이 성공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서로 성적 매력을 느껴야 하고 돈, 자녀 교육, 종교, 인척 등등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에 필요한 이 중요한 요소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긋난다면 그 나머지 요소들이 모두 성립하더라도 그 결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총,균,쇠> 본문 中에서)

인류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놓쳐서는 안될 명저 가운데 한 권


 

문명의 붕괴라는 또다른 명저를 통해 그는 '환경파괴의 심각성'을 그 누구보다 설득력있게 경고한다. 거대한 댐의 바로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정작 '댐의 붕괴'를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는다. 그에 대한 다이아몬드 교수의 설명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불규칙한 변동으로 인해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변화가 잘 드러나지 않는 현상을 정치학자들은 '잠행성 정상 상태(creeping normalcy)'라고 부른다. 경제 문제, 교육 문제, 교통 체증 문제, 혹은 그 어떤 문제가 매우 천천히 악화되고 있을 경우 한 해의 평균 수준이 그 전 해에 비해 아주 약간 낮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기 힘들며, 따라서 미세하지만 한 사람이 정상(normalcy)이라고 생각하는 기준도 매년 조금씩 변동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사람들이 깨닫는 순간까지 수십 년간 계속 진행되어 어느 순간 몇십 년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상태였으며, 현재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태가 사실은 악화된 상태임을 알게 되고는 갑자기 놀라게 되는 것이다.

'잠행성 정상 상태'와 관련 있는 또 다른 용어는 '풍경 기억 상실(landscape amnesia)'이다. 이는 변화가 매년 매우 느리게 진행됨으로써 50년 전의 풍경이 지금과는 얼마나 달랐는지 깨닫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몬태나 빙하 및 설원의 용해 현상을 그 예로 들 수 있다.(581쪽)


상류 지역에 댐이 건설되어 있어 만약 댐이 무너질 경우 상당히 먼 거리의 하류에 있는 사람들까지 익사할 수 있는 좁은 강 계곡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여론조사원이 댐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댐이 무너질까봐 걱정되지 않느냐고 질문했을 때 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정도가 가장 낮았고, 위로 올라갈수록 두려움이 커져간다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댐에서 단 몇 킬로미터 정도만 떨어져 있는 사람들, 즉 유사시 가장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심리적 부인에 있다. 매일 댐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댐이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뿐이다. (596쪽)


 

버나드 로 몽고메리, 1887년∼1976년, 전쟁의 역사 (1,038쪽)



2008년 봄 가족들과 함께 이집트 일주 여행을 다니면서 느꼈던 '참으로 놀라운 사실들'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특히 '전쟁'에 대해 느꼈던 놀라운 사실들 중 한 가지를 꼽으라면, 그것은 '아무리 많은 전쟁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는 점이다. 고대 도시 테베(현재의 지명은 룩소르)에서 만난 거대한 '카르낙 대신전'(이 신전은 무려 1,500년 동안 지어졌다고 함)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거대한 돌기둥들이 아니라, 정복왕 '람세스 2세'의 석상 앞 벽면에 부조된 '정복당한 무수히 많은 국가의 신하들이 파라오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었다.
 
또하나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신전 앞 벽면이었다.
약 200년 전 쯤 나폴레옹 군대가 이 곳에 진주했을 때 신전 정문 쪽의 너무나 거대한 높이의 신전 벽 높이에 감동을 받아 여기에 '맞장'을 뜨기 위해 자신의 군대병력을 동원시켜 흙벽돌을 마주 쌓아 올렸던 흔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욕심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결국 '전쟁'의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이 책의 저자인 몽고메리 장군은 사상최대의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 사령관이었다. 그는 2차대전 중이던 1942년 알라메인 전투에서 '사막의 여우' 로멜을 몰아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지휘했던 인물이다. 그가 쓴 방대한 '전쟁의 역사' 속의 수많은 컬러도판은 세계 역사의 극적인 단면들을 보여준다.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는 사실상 <페르시아 전쟁사>에 다름 아니다.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 모두 전쟁의 역사를 다룬 훌륭한 책이며, 내가 읽어본 '전쟁'에 관한 가장 놀라운 명저는 클라우제비츠가 쓴 전쟁론이 아닐까 싶다.

불멸에 대한 끝없는 열망과 필연적으로 남겨진 믿기 힘든 결과물들 ②
그들이 몰랐기 때문에......
고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자신이 참전한 전쟁에 대해 쓴 기록
우리의 삶 자체를 '전쟁'에 비유하고, 그런 의도와 용도에 맞게 쓴 책

나폴레옹이 전쟁을 위해 이집트까지 건너갔을 때 전리품으로 챙겨운 '오벨리스크'는 지금껏 콩코드 광장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석조물'에 대한 어리석은 열망을 꾸짖는 소로우의 목소리가 새삼 떠오른다.

여러 민족들은 그들이 다듬어서 남긴 석재의 양으로 자신들에 대한 추억을 영구화하려는 광적인 야망에 사로잡혀 있다. 차라리 그만한 노력을 자신의 품행을 가다듬는 데 바쳤다면 어땠을까? 한 조각의 양식良識은 달까지 솟아오른 기념비보다 더 기릴 만한 것이 아닐까?

제발, 돌들은 제자리에 그냥 놓아두라. 테베의 장관은 천박한 장관일 뿐이다. 인생의 참다운 목적에서 멀어져버린 100개의 대문을 가진 테베의 신전보다는 어느 정직한 사람의 밭을 둘러싸고 있는 자그마한 돌담이 더 의미가 있다. 야만스럽고 이교도적인 종교와 문명은 화려한 신전들을 짓는다. 그러나 기독교, 참다운 기독교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한 민족이 다듬는 돌은 대부분 그들의 무덤으로 간다. 그야말로 그들은 스스로를 생매장하는 것이다.

피라미드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떤 야심한만한 멍청이의 무덤을 만드느라고 자신들의 전 인생을 허비하도록 강요되었다는 사실 말고는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차라리 그 작자를 나일 강물에 처박아 죽인 후, 그 시체를 개들에게 주어 뜯어 먹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하고 당당했으리라.(『월든』 83쪽)




사마천, 기원전 145∼86, 사기 (두 권을 합하면 1,820쪽, 1권 887쪽, 2권 933쪽)
 



이 책은 여러모로 놀라운 책이다. 우선 저자인 사마천이 자신의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을 받들어 이 역사서를 집필했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아버지와 똑같이 태사령이 되어 국가의 장서가 있는 석실금궤에서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고 수집했고, 기원전 104년에 정식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5년 후 흉노족과 싸우던 이릉(李陵)이 적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사마천은 홀로 한무제 앞에 나아가 이릉을 변호하다가 옥에 갇히고 만다. 옥중에서 그에게 제시된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 법에 따라 주살될 것, 돈 50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할 것, 궁형을 감수할 것. 그는 결국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궁형을 감수하고 이 책의 집필을 마친다. 거의 20년에 걸쳐 쓴 2,000년 동안의 역사를 다룬 대작이 완성된 것이다.

『사기 열전』은 결국 사마천 자신의 삶과도 깊은 연관을 가진 듯싶다. 그가 궁형을 당하면서도 찾고 싶었던 대답은 결국 '역사적 인물들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살았을까? 인생은 무엇일까?'였던 것이다

<老子(노자)>에 나오는 말 가운데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疏而不漏)"라는 말이 있다. 하늘의 그물은 너무나 크고 성근 것 같지만 결코 빠뜨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하면 '죄 짓고 못 산다'는 뜻인데, 사마천은 수많은 역사의 인물들을 고찰하면서 이러한 견해를 부정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하늘에 과연 법도란 있는 것인가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사기 열전』을 통해 온갖 인물들을 탐구한다. '시대를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이다.

사마천이 수천 년 전 인물을 통해 다룬 이야기는 결국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그가 <사기>를 통해 다룬 이야기인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은 오늘에 와서도 그런 선택으로부터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이 책은 오늘뿐만 아니라 먼 미래에도 여전히 생명력 넘치는 역사책으로 두고 두고 읽힐 책이다.
 

옛날의 선비들은 이 방대한 역사책을 한자로 쓰여진 '원서'로 무척이나 어렵게 읽었을 것이다. 한글로 쉽고도 훌륭하게 번역된 이 책을 사놓고도 나는 이 책을 가끔씩 듬성듬성 들춰봤을 뿐이다. 내 스스로 이 책을 읽기를 미뤄두고 있는 이유도 없지는 않다. 그 한 가지는 이 책의 초반부에 나오는 '백이와 숙제의 지조'를 다룬 <백이 열전>과 '관중과 포숙의 우정'을 다룬 <관안 열전>등의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다소 진부한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미 교과서를 통해서 자세히 배웠던 내용을 또다시 읽는 데서 오는 식상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원서'가 아닌 번역본으로는 '대단한 문장가였던 사마천의 필치'를 제대로 음미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당송 시대만 하더라도 이 책이 '문장 학습의 기본서'로 통했다고 하고, 루쉰 역시 이 책을 두고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라고 극찬했던 점에 비춰봐도 '원문'으로 읽지 못하는 아쉬움이 없을 수는 없다.
 
어렸을 때 동네 서당에서 싸리 회초리와 함께 직접 붓글씨를 써가며 '한자와 한문'을 배웠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때 까지도 '한자'를 제법 썼던 것 같은데, 이젠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한자와 한문에 능통한 몇몇 친구들이 만든 '고대 한시를 읊조리며 술잔도 나누는 친목 모임'을 만들었으니 가끔씩 만나자는 얘기를 몇 번씩이나 들었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한문' 때문에 그저 아쉬워할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내 처지여서 아쉽기만 하다.



에드워드 기번,  1737∼1794 로마제국쇠망사 (여섯 권을 합하면 3,689쪽, 축약본은 552쪽)



 에드워드 기번이 종교문제 때문에 재학중이던 옥스퍼드 대학에서 추방되자, 그는 유럽의 여러 도시를 순방하는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로마의 여러 유적지를 찾아 소요하던 어느날 해질 무렵에 '불현듯' 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에 관한 것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을 스쳤고, 그는 그 때에 받은 강렬한 인상에 대하여 잊을 수 없는 날짜를 자신의 회상록에 극명하게 써놓았다고 한다. 그 날은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쯤인 1764년 10월 15일이었다.

이 책의 원저서는 1776년∼1788년에 걸쳐 전6권으로 간행된 방대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세계의 역사를 움직였던 수많은 인물들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저명한 독자로서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과 인도 수상 자와하르랄 네루,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등이 손꼽힌다고 한다.

기번의 이 책이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왔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애초부터 자신의 저서에 철학성을 부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철학적 고찰을 듬뿍 담는다 해도 역시 지루하고 따분해지기 쉬운 연대기를 어떻게 하면 매력적인 작품으로 만들까 무척 고심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여러 번에 걸쳐 다시 고쳐 쓴 끝에 사람들을 단숨에 매료시킬만큼 유려하고도 장엄한 문체를 찾아내게 되었고, 이 책은 첫째권이 발매 즉시 희세의 명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대광서림에서 나온 축약본으로만 읽었고, 완역본은 저렇게 사두기만 했다. 이 책은 출간 당시부터 교양을 쌓는 증거로서 또는 교양에 대한 동경심으로부터 '각 가정의 식탁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주부들의) 화장대에까지도 놓여졌다'고 하는데, 나는 '장식용'으로서는 이제껏 충분히 우려먹었기 때문에 이제라도 기번의 훌륭한 문체 속으로 어서 풍덩 빠져들 때가 되었다고 '늘' 생각하곤 한다.


위대한 역사가의 불후의 명저_인간과 인간 정신에 관한 문학적이고도 철학적인 문장들로 가득한...

 


피터 왓슨, 1,943∼     ,  생각의 역사 (두 권을 합하면 2,568쪽, 권 1,328쪽, 권 1,240쪽)



이 책 역시 여느 두툼한 책처럼 '장식용'으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외관을 지녔다. 이 책이 다른 두툼한 역사책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책의 주인공이 '생각'이라는 점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왕과 황제, 왕조, 장군들이 빠진 역사, 군사 원정, 제국 건설, 정복과 평화조약이 누락된 역사”다. '생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온갖 생각들의 '사물화'된 결정체인 책과 음악, 미술과 과학 등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기존의 역사책보다 훨씬 재미있고 매력적이라는 걸 금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생각'의 역사를 살피면서 중요한 분석틀로 삼는 세 가지는 '영혼, 유럽, 실험'이다. 마치 '총, 균, 쇠'의 세 가지 아이템으로 인류 문명의 전개를 살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이야기 서술 방식을 닮은 느낌도 든다. 다소 엉뚱하다 싶은 '유럽' 때문에 학술계의 격렬한 비난을 받고 있다지만, 이 책 속에는 동양에서 찾아낸 많은 생각들도 풍성하게 담겨 있다.

<생각의 역사Ⅰ>에서는 불과 언어와 도끼를 생각해 냈던 원시 인류의 생각으로부터 1,900년에 사망한 '프로이트의 생각'까지를 다루고 있고, <생각의 역사Ⅱ>에서는
20세기 100년 동안의 '지성사'를 다루고 있는데, 저자가 아무래도 고고학자 출신이다보니 <생각의 역사Ⅰ>에서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담긴 듯하고, <생각의 역사Ⅱ>는 지난 100년 동안의 숱한 철학자와 과학자와 예술가와 학자들을 두루 다루고 있어서 일반 독자들 한테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방대하다'는 느낌도 드는 책이다. 

[생각의 역사] 도끼에서 싹튼 '생각'의 과거, 현재, 미래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1788∼1860,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023쪽)

 


 

쇼펜하우어는 (내 생각으로는) 염세주의 철학자로 불리기엔 너무 억울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가 쓴 여러 글들 속에 '삶은 고통의 연속'이고, 결국 눈깜짝할 새 지나가 버리는 시간에 뒤이어 우리의 등 뒤에서 회초리를 들고 감시해 온 교도관이 '사형선고를 받은 지 이미 오래된 죄수'를 호출할 때 이슬처럼 사라지는, 다시금  '원래부터 없었던 존재인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한 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표현한 것만 봐도 그런 오해를 받기에 충분하다. '요컨대 인생이란 휴전 없는 싸움의 연속이며 손에 무기를 든 채 죽게 되어 있다'고 한 그가 끝까지 손에 들고 놓지 않았던 무기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삶을 긍정하는 철학'이었던 것이다.

그가 '삶의 덧없음'을 너무 일찍 간파한 것은 사실 그가 너무 천재였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천재성은 어릴 때부터 괴테를 비롯한 당대의 지성들로부터 널리 인정받은 바 있으며, 나중에는 키에르케고르, 톨스토이, 체호프, 바그너 등 세기의 지성들을 사로잡았다.

톨스토이는 '쇼펜하우어는 인간들 중에 가장 천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서재에는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 걸어 놓았을 정도였다. 바그너는 대작 <니벨룽겐의 반지>를 쇼펜하우어를 위해 작곡했고,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자필 헌사까지 바쳤다.(안타깝게도,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쇼펜하우어는 바그너를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니체는 고문헌학을 연구하다가 쇼펜하우어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완전히 매료되어 결국 [칸트-쇼펜하우어-니체]의 계보를 만들었으며, 비트겐슈타인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철학을 시작했다고 평가된다.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로까지 불리는 쇼펜하우어는 프로이트와 융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프루스트, 체호프, 버나드 쇼, 사뮤엘 베케트, 릴케, T.S. 엘리엇에 이르기까지 깊숙히 스며들면서 결국 세대를 초월한 철학자가 되었다.

토마스 만은 스무 살 이후에 '니체와 쇼펜하우어'에 깊은 영향을 받은 나머지,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이라는 책과  쇼펜하우어 니체 프로이트라는 책을 직접 썼다.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시작된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본질세계'에 대한 탐구가 칸트의 물자체 개념으로 이어지고 난 뒤 쇼펜하우어에게서 의지(Will) 개념으로 수용된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이 다시 니체를 거쳐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과 어떻게 연결되고 상응하는지를 자세히 밝혔다. 플라톤과 칸트로 이어진 서양철학의 거대한 물줄기가 쇼펜하우어에 의해 혼융되고 나서야 니체와 프로이트로 이어지는 새로운 물줄기가 뻗어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와 니체 사이의 시기에 있다. 그는 두 사람 사이의 과도기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괴테보다는 ‘더욱 현대적’이고 더욱 고뇌를 앓고 더욱 까다롭지만, 니체에 비해서는 ‘더욱 고전적’이고 튼튼하며 건강하다. (토마스 만)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천재적 지성을 통해 닿을 수 있었던 철학적 사유들을 여러 권의 책으로 발표했지만, 사실 그의 핵심적 사상들은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거의 전부 녹아들어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가 30세이던 1818년에 완성한 이 책은 71세때 제3판을 출판할 때까지도 '고쳐쓸 필요를 거의 느끼지 못할만큼' 스스로 '완벽한 건축물'에 가깝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만큼 그의 주저 속에는 고대로부터의 온갖 철학자들의 사상들을 온전히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녹여낸 흔적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인식론과 존재론 중심의 전통철학뿐만 아니라 과학철학도 포함하고 있으며, 음악과 미술을 포함하는 미학과 예술철학, 그리스도교와 힌두교와 불교를 아우르는 종교철학까지도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그가 평생동안 독신으로 지내며 애완견과 함께 산책을 즐긴 시간을 뺀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오로지 독서와 사색으로 보낼 수 있었던 건 베를린대학에서의 철학강의가 실패한 탓이 크다. 그는 유물론에 입각한 헤겔의 철학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지녔고 그 때문에 당대 최고의 철학자로 엄청난 인기를 끌던 '헤겔 교수'와 맞장을 뜰 심산으로, 자신의 철학강의를 '헤겔'의 철학강의 시간과 맞췄으나 그의 강의는 수강생이 거의 없어 금새 폐강되고 말았다. 그가 일정한 직업조차 없었던 데다가 학자로서도 세속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보냈으나 평생을 '구걸하지 않는 자신만의 철학'을 추구할 수 있게 된 건 부유한 가정환경 덕분이었다.

볼테르를 애독했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어머니 역시 소설과 여행기를 즐겨 쓰던 여류작가였을만큼 넉넉한 가정환경 덕분에 그는 어릴때부터 훌륭한 조기교육을 많이 받았다. 9세 때는 파리에서 3년, 15세 때는 2년간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과 외국어 교육으로만 보낼 정도였다. 라틴어와 더불어 프랑스어와 영어를 일찍 터득한 그는 나중에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에도 능통하게 되었다.(훗날에서 인도의 고대경전을 공부하기 위해 샨스크리트어까지도 능숙할 정도가 되었다.) 의학도로 대학에 입학한 덕분에 그는 자연과학, 해부학, 광물학, 수학, 역사도 공부했으며, 음악과 심리학과 형이상학을 공부하다가 결국 칸트와 플라톤을 만나면서 철학도로 변신하게 된다.

그는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말고도 몇 권의 책을 더 썼는데, 그의 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책은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등이 있으며 모두가 중요한 책이고 그의 주저와도 긴밀한 연관을 이루고 있는 책이다. 그의 책은 주저를 빼면 읽기에 부담없을 정도의 분량인데, 이미 자신의 대표작 속에 '자신의 온전한 철학체계'를 다 갖춰 놓았던 점을 감안하면 다른 책들은 '보충자료'로서의 성격을 지녔다고 보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렇지만 주저가 '한번' 읽는다고 쉽게 이해되는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이들 책들도 여전히 그의 철학체계를 온전히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책들임은 분명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주위로부터 '위대한 인물'이 되리라는 말을 여러차례 들었으나 정작 평생에 걸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불운한 철학자로 더 많은 세월을 보냈다.(그 덕분에 그의 '인생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유럽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건 뜻밖에도 '에세이' 성격의 <여록과 보유>가 성공했기 때문인데, <쇼펜하우어 인생론>이라고 할 만한 이 책은 읽기가 비교적 쉬웠던 덕분에 그의 이름과 저작들이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는 곧 널리 인정을 받기 시작했으며,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해온 작업이 빛을 발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라틴어로 쓴 주저의 제3판 서문에는 페트라르카의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다. '하루 종일 달려 해질녘 목적지에 닿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스스로 예견했듯이 '자신의 사후'에 훨씬 더 위대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쇼펜하우어의 '사도들'이라고 부를만한 제자들은 그를 '문화정신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우뚝 선 체계를 가진 진정한 사상가'로 극찬하고 '세계사가 후회의 눈물을 떨구며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새길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톨스토이가 쓴 편지 속 내용 또한 그에 못지 않다.

'쇼펜하우어의 위대함,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수많은 정신적 향락들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버렸네. 이런 나의 생각이 언젠가 변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는 쇼펜하우어가 인간들 중에 가장 천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네. 쇼펜하우어를 읽으면서 나는 그의 이름이 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 이유는 아마도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세상에는 바보들만 존재하기 때문일 거야.'

'세상을 보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된 이 책은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외에도 3권의 책을 더 포함하고 있다. 책의 맨 앞부분에 나오는 <세상을 보는 지혜>는 17세기 스페인의 수도사였던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인생철학 가운데 쇼펜하우어가 직접 뽑아내 독일어로 번역해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인생을 생각한다>와 <삶의 예지>는 그가 '6년 동안 날마다 꼬박꼬박 써온' 크고 작은 다양한 에세이와 단편들을 집대성한  책이다. 1851년에 그가 '막내자식'이라고 부르며 <여록과 보유>라는 제목으로 펴낸 이 에세이는 제목 그대로 그의 주저의 '부록'일 뿐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출판물 가운데 처음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쇼펜하우어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는 책이 되었다.

나로서는 올 한해 쇼펜하우어를 만난 것이 무슨 '사건'처럼 느껴지는데, 그에게 깊이 매료되었다는 말 이외에는 다른 적당한 말을 찾기가 어려울 듯싶다. 그래서 그의 주저와 부록에 해당하는 책을 두세 번씩 반복해서 읽었고, 그의 다른 저서들도 전부 구입해서 읽었다. 그 가운데 특히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올해 봄부터 (겁도 없이) 아예 필사를 시작했다가 중간에 지쳐서 요즘엔 잠시 손을 놓고 있을 정도인데, 그래도 어느덧 절반 이상은 필사를 마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 고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정도로 이제 어렴풋이 '끝'이 보이는 느낌도 든다. '인생과 철학'을 생각하다가 어느날 문득 '쇼펜하우어'를 만난 일은 내 독서경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놀라운 순간'이 되었다.


(철학책 가운데 이 책만큼 자주 책가방에 넣어 다니고 또 자주 펼쳐 본 책도 드물지 싶다)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
'가장 심각하고 흔히 저지르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칸트, 데카르트, 스피노자, 의지와 표상, 자유의지
쇼펜하우어와 다윈


☆ 그레이트북 144권 (미국의 독서그룹 & 시카고대학 교수진 참여)
☆ 평생 동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의 저자 137명(『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부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121∼ 180,  명상록 (541쪽)
 

 

 

우리가 로마의 황제를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연상될까. <벤허>나 <글레디에이터>와 같은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분명 피비린내나는 전장터를 누비는 전쟁사령관의 모습이나 혹은 주지육림에 둘러싸여 온갖 폭정과 횡포를 마다하지 않았던 폭군 네로황제를 연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명상록>의 저자인 아우렐리우스도 대로마제국의 황제임은 분명했으나 그는 다른 여느 황제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는 황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견인주의 사상으로 단단히 무장한 스토아학파 철학자에 훨씬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토아학파 철학자들 가운데는 '황제'와의 이런저런 악연을 겪은 인물이 드물지 않다. 로마황제 도미티아누스에게 추방당한 후 그리스의 해안도시 니코폴리스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보냈던 에픽테토스(불확실한 세상을 사는 확실한 지혜)나 네로 황제의 참모로도 활동했으나 나중에 네로의 명에 따라 '역사에 남을만한 자결'을 했던 세네카(인생이 왜 짧은가) 역시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스토아학파 철학자로 이름이 높은 인물들이다.

세상과 인간을 몰랐다는 것

아우렐리우스는 정무에 종사할 때나 전선에 나가 전투를 지휘하는 동안에도 틈틈히 '자기 자신에게'(ta eis heauton)라는 그리스어 제목의 일기를 꾸준히 기록했는데, 그 '황제의 일기'가 '명상록'이다.

그는 직업이 황제였지만 <명상록>의 어디에도 자신의 지위나 신분 등 직업에 관련된 이야기는 발견하기 힘들다. 그가 일기장의 제목대로 끊임없이 사색하고 성찰한 건 '삶의 본질'에 대한 문제였다. 드넓은 우주와 광막한 시간의 흐름 속에 아주 잠시 왔다가 갈 뿐인 '삶'의 무상함과,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 진지한 성찰 등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를 쓴 카이사르와는 너무나 대비되는 점이다.

수많은 인류가 이 지구상에 잠시 머물다 결국은 모두 '원래 없던 존재'로 되돌아갔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최고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판돈'으로 내걸었을지도 모른다. 삶의 목표가 그런 '빛좋은 개살구'가 되는 순간, 삶은 또 그만큼 쓴 맛만을 안겨줄 뿐이라는 것이 <명상록>을 쓴 옛 황제의 가르침이 아닐까. 당장 눈앞의 숨막히는 현실에 코를 박을 것이 아니라, 아우렐리우스가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과 나누었던 '대화'를 엿들어 봄으로써, 오늘날의 우리 또한 '전쟁같은 삶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 * *

책표지에는 [키케로 인생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그 속에는 키케로의 유명한 글인 <노년에 대하여>, <우정에 대하여>와 <변론집>이 실려 있다. 로마 최고의 웅변가, 철학자, 정치가였던 그는 많은 자식들(?)을 거느린 인물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마키아벨리, 홉스, 몽테스키외, 볼테르, 칸트, 헤겔, 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를 거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인물들이 키케로와 '많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이 세련된 혼과 고양된 문화'를 갖는 것이야말로 경제의 '객관적'인 시대 구조나 계급 투쟁에서 역사를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고찰에 매달리는 것 이상으로 오늘날 중요하다. 마르크스 이상으로 키케로를 읽어야 한다. '정신이 없는 전문인' '마음이 비어 있는 향락인'이 활보하는 현대에서, '몇 번이고 키케로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다.(532쪽)

"卽是現今 更無時節"(즉시현금 갱무시절)

☆ 그레이트북 144권 (미국의 독서그룹 & 시카고대학 교수진 참여)
☆ 평생 동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의 저자 137명(『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부록)


 

애덤 스미스, 1723∼ 1790,  도덕감정론 (719쪽)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꼽은 <도덕감정론>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자라기 보다는 도덕철학을 오랫동안 강의했던 철학교수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14살 때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해 주로 도덕철학을 공부했고, 1750년에 데이비드 흄과 만난 이후 서로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그는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 글래스고(Glasgow) 대학에서 12년 동안 도덕철학을 강의했다. 그의 도덕철학 강의는 자연신학(natural theology)과 윤리학, 법학, 그리고 정치경제학으로 이뤄졌는데, 그런 폭넓은 학문 연구를 통해 그는 근대 사회의 구성 원리를 세우고자 노력하였고, 훗날 국부론이라는 방대한 책을 저술하기에 이른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학문 연구와 저술에 몰두한 그는 “지적으로는 모험을 즐기고 사회적으로는 조심스럽게 처신했다”는 평가로 요약되는 삶을 살았는데,  국부론의 저자로 훨씬 더 유명한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묘비명(墓碑銘)을“도덕감정론의 저자 여기에 잠들다”라고 해 달라고 유언을 한 사실만 보더라도 그가 이 저서에 쏟은 애정을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도덕감정론(1759년)은 <국부론>(1776년)보다 훨씬 일찍 쓰여진 책이며 국부론보다 훨씬 더 가치있고 생명력이 긴 책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책 속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들이 가득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국부론은 지나치게 많은 분야를 다룸으로써 '깊이' 측면에서는 도덕감정론에 훨씬 못 미치는 저작으로 느껴진다. 이 점에 관해서는 20세기 경제학자 슘페터의 언급도 참고할 만하다. 그는 '스미스가 쓴 국부론이 매우 중요한 저작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거기에는 새로운 생각이나 원리, 또는 방법이 하나도 없다'고 지적한다. 슘페터는 국부론의 성공 요인에 대해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스미스의 분석은 깊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웠고, 스미스의 주장은 모호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해서 역설적으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릴 수 있었다."

  

이 책은 인간 본성 또는 도덕 감정에 대한 '새로운 체계'를 시도한 책이다.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도덕감정의 핵심은 ‘공감(sympathy)’의 원리인데, 용어 자체는 그의 친구인 데이비드 흄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이 책에는 데이비드 흄으로부터 인용한 여러 흥미있는 대목들이 등장함과 동시에 또다른 재미있는 인물이 더 등장한다. 꿀벌의 우화를 쓴 맨더빌(1670-1733)이 그 주인공이다. 맨더빌이 우화를 통해 주장한 내용을 단적으로 요약하자면 "개개인의 부도덕이 공공선을 만든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감정'을 무척이나 중요시했던 스미스는 맨더빌이라는 인물이 '인간의 이기심이야말로 경제가 발전하는 원동력'이라는 주장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맨더빌은 훗날 또다른 경제학 저서에도 더욱 영광스런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바로 존 메이나드 케인즈가 쓴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통해서 였다. 케인즈는 맨더빌의 이론이 매우 일리가 있는 주목할 만한 이론이라고 보아 '꿀벌의 우화'에 대해 매우 자세한 분석을 곁들였다.

 

애덤 스미스는 공감의 개념을 흄과는 다르게 ‘적정성(propriety)’을 매개로 주장한다. 그는 도덕감정론에서 “덕을 효용에 있다고 보는 체계는 덕이 적정성에 있다고 보는 체계와 서로 일치한다”고 인정했지만, “덕은 한 가지 감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정의 적절한 정도에 있다”고 보아 자신의 이론이 데이비드 흄을 넘어서는 것으로 판단했다.

스미스가 '공감'을 도덕의 원천으로 내세우면서 내세우는 중요한 또다른 '인물'은 공정한 ‘관찰자(spectator)’의 역할이다. 스미스는 이 관찰자를 ‘가상의 공정한 관찰자(supposed impartial spectator)’, 또는 ‘가슴 속의 이상적 인간(ideal man within breast)’라고 부른다. 이 공정한 관찰자의 존재가 바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가정해도 인간의 본성에는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 요소가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바라보는 즐거움 이외에는 자신이 얻는 것이 없다고 해도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타인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은 100년 후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쇼펜하우어가 쓴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도덕 원리'이다. 스미스가 '국가의 경제와 부'에 관해 쓴 국부론에서 자유로운 경쟁, 즉 '시장의 원리'를 주장했다고 해서 자칫 <꿀벌의 우화>를 쓴 맨더빌과 같은 인물로까지 비춰지는 건 '애덤 스미스에 대한 크나큰 착각'에 불과한데, 국부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책인 도덕감정론을 제대로 읽어본 독자라면 그런 불필요한 오해에서는 쉽게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알라딘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오만과 허영'에 관한 이야기

시간이라는 위대하고 보편적인 위안자_1759년에 쓴 어느 철학자의 상상
몰염치, 분개, 오만에 관하여......
무엇이 지금 그렇게 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뻔뻔스럽게' 행동하도록 가르쳐 주었던 철학에 대한 반박


☆ 평생 동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의 저자 137명(『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부록)



마르틴 하이데거, 1889∼ 1976, 존재와 시간 (두 권을 합하면 1,038쪽, 본서 591쪽, 용어해설 447쪽)
 



존재와 시간과 관련하여 독일인들 사이에서 이야기되는 유명한 농담부터 소개해야 할 듯싶다.  "존재와 시간이 왜 여태껏 독일어로 번역되지 않고 있지?"라는 게 그것이다. 독일어로 쓰였지만 독일인들도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철학책을, 그것도 한국어로 '다시' 번역된 책을 '철학 전공자'도 아닌 나같은 일반독자가 이 책을 읽는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긴 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낯설고 난해한 용어와 문장으로 점철된 덕분에 '한 문장'을 보통 서너번씩은 읽어야 했고, 어려운 부분에서는 대여섯번씩 읽고도 '어렴풋이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대목들조차 꽤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음의 글이 '정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책을 더 잘 읽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면, 책은커녕 글 한 줄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자신의 능력 안에 있는 책은 읽어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 능력 박에 있는 책, 당신의 머리를 넘어서는 책을 붙잡아야 한다. 그래야만 정신을 확장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모티머 J. 애들러,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중에서)

이 책의 역자는 1974년에 벨기에의 루뱅 대학교에서 <존재와 시간>에 대한 강의를 들은 이후 무려 25년 만에 한국어 번역본을 출간하면서 '필생의 과업' 하나가 구현된 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힘든 독자들을 위해 <『존재와 시간』 용어해설>이라는 책까지 함께 출간했다.

이 책은 하이데거의 스승 에드문트 후설에게 헌정되었다. 하이데거는 후설로부터 '현상학적 철학'을 배웠으나 이 책을 통해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창적으로 '존재에 대한 물음'에 깊이 천착한 덕분에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는 이 책의 서론에서 [존재에 대한] 물음 자체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여러 변경과 덧칠'은 있었지만 거기서 한발짝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다시 제기해야 할 근본적인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현존재는 존재하면서 존재와 같은 어떤 것을 이해하는 그런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을 확고하게 견지하면서 보여주어야 할 것은, 거기에서부터 현존재가 도대체 존재와 같은 어떤 것을 드러나지 않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그것은 바로 시간이라는 점이다. 시간이 모든 존재이해 및 모든 존재해석의 지평으로서 밝혀져야 하며 진정으로 개념파악되어야 한다. 이것이 통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존재이해의 지평으로서 존재를 이해하는 현존재의 존재인 시간성에서부터 근원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관계에 주목한 철학자였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그렇기에 유일한, 변하지 않는, 모든 시대와 문화권에 보편적으로 다 통용될 수 있는 그런 '존재'나 '존재의 논리'란 없다.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사건에 참여하여 거기에서의 존재의 부름에 나름대로 응답할 뿐'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었다.

(어렵긴 하지만) 이 책 속에서 하이데거가 사유하고 파헤친  '인간의 생활방식'과 '삶의 문법'들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읽어나가다 보면 어렴풋이나마  '존재의 다양한 의미'와 [존재와 시간]과의 관계가 조금씩 드러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이해한 내용이 '하이데거가 생각한 내용'과 도대체 얼마나 다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도대체 가늠할 길이 없다. 하이데거가 쓴 <존재와 시간>을 탐독한 사르트르가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썼다고 하는 <존재와 무>는 실존주의의 이론서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훗날 그 책을 읽은 하이데거는 “이건 내 철학을 오독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그럴 정도이니 내가 '오독'한 내용이야 '오죽'할까.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 침묵함, 호기심, 애매함

죽음을 향한 존재와 현존재의 일상성


☆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동아일보 선정)



앙리 베르그송,  1859∼ 1941,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400쪽, 물질과 기억 466쪽, 창조적 진화 598쪽)



철학책 가운데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앙리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었다.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한테 깊은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폴란드계 유대인이자 작곡가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증조부와 조부는 폴란드가 프로이센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대부호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명석한 두뇌로 주목받았으며 고교시절에는 수학과 기하학 뿐만 아니라 라틴어 작문과 영어 및 불어 작문 등에서 매우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그가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이후 철학교수로 재직하면서 30세 때 박사학위논문으로 쓴 첫 번째 주저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진정한 시간으로서의 지속'을 처음으로 발견했음을 세상에 널리 알렸으나, 그의 '순수 지속'의 개념은 생각보다 그리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지속의 입장에서 '결정론'을 비판하고 '자유의 문제'를 해소한 책
심리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

그는 1896년에 자신의 '지속의 철학'을 훨씬 더 깊게 파고 들어간 두 번째 주저 
물질과 기억을 통해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널리 인정받는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1907년에 그는 제3의 주저인 창조적 진화라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창조'와 '진화'라는 모순적 개념들을 '엘랑 비탈(생명의 도약)'이라는 개념으로 통일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이 '인간과 생명, 그리고 우주를 연결하는 방대한 사색의 공간'에 걸쳐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다윈의 진화론은 물론이거니와 당대까지의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등 방대한 자연과학 지식을 총동원하여 '생명 진화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인간의 삶과 세계의 진행에 있어서 결정론을 부정하고 자유의 존재성을 확보'하려 애쓴다. 이 작품은 저자의 유려하고도 아름다운 문체 때문에 철학책으로는 보기 드물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며, 철학사적으로는 '데카르트 이후 서양철학의 무대를 프랑스로 되돌려 놓은' 것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시간과 공간, 물질계와 지성계 다시 말하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생명과 진화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철학자와 만나보길 적극 권하고 싶다. 그는 그리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며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이기에 언제든지 시간을 내줄 것으로 믿는다. 그의 작품들은 다른 철학자들보다는 훨씬 더 쉽고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쓰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속에는 여기저기서 '놀라운 사유들'이 번쩍번쩍 빛나기 때문에 중도에 지치지 않고 끝까지 쉽게 읽어 나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나는 아직까지 그의 제1 주저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밖에 읽지 못했고, 이제 겨우 창조적 진화를 읽기 시작했지만 그의 나머지 주저들까지 주저없이 미리 구입해 놓았다. 그가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새로운 철학'을 추구했던 걸 떠올리면 '인간의 마음이란 한 번 새로운 생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면  절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올리버 웬델 홈스의 명언이 떠오른다.

☆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동아일보 선정)


 

[경제·경영]

 

벤저민 그레이엄 1894∼ 1976,  증권분석 (832쪽)



가치투자의 창시자인 벤저민 그레이엄의 '1934년 초판'을 번역한 책이며, 도저히 정답이 없을 것 같은 '무질서한 투자의 세계'에도 '올바른 길'이 있음을 밝힌 책이다. 그레이엄이 나중에 '일반투자자를 위해' 좀 더 쉽게 쓴 책 현명한 투자자와 함께 '투자 세계'에서 불후의 명저로 꼽는 책이다.

사실
현명한 투자자라는 책도 읽기가 쉽지 않은데 증권분석은 이보다 좀 더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일반독자가 접근하기는 쉽지 않은 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심지어 전문가들에게조차 이 책은 '이름만 들어본 고전'에 머물 정도가 아닐까 싶다.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번역본'조차 없어서 원서로 읽는 사람들도 있었음을 감안하면 애써 번역한 분들을 위해서라도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수없이 '밑줄긋기'한 주요 내용에 대해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필사해 놓았다.

애써 작성한 리뷰글을 내려야 하다니......
세계 자본시장의 흐름을 바꾼 불후의 명저 


 

벤저민 그레이엄 1894∼ 1976,  증권분석 (944쪽)



가치투자의 창시자인 벤저민 그레이엄의 '1951년 제3판'을 번역한 책이 '초판 번역본'에 뒤이어 곧바로 나왔다. 그레이엄의 제자인 거장 워렌 버핏이 아직까지도 책상 위에 두고 '수시로 펼쳐 읽는 책'이 그레이엄의 『증권분석』'제3판'이다. 초판보다 훨씬 더 '사례들의 시계열 자료'가 풍부해지고, 세월의 흐름에 따른 환경 변화에 맞춰 '주주와 경영진'에 대한 내용들이 대폭 추가되어 '오늘날의 현실에 적용하여도 별 무리가 없는' 놀라운 내용들이 많이 담겼다. 이 책 역시 '밑줄긋기'한 주요 내용에 대해서는 빠짐없이 필사를 해 놓았다.

 

워렌 버핏이 '투자에 관한 책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단언한 책




앤드류 킬패트릭,
 ____∼       , 워렌버핏 평전 (1,392쪽, 1권 544쪽 +2권 848쪽)




저자는 1965년에 대학을 졸업한 뒤 20년 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했고, 지금은 버밍햄에 있는 와코비아 증권에서 주식중개인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1년에 364일은 버핏에 관한 자료수집과 집필에 시간을 할애하고 1일은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로서 주주총회에 참석한다'고 하니 버핏 전문가로서는 이만한 사람도 찾기 어려워 보인다.


'투자'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그의 평전만 읽어봐도 버핏에게 반할 지도 모르겠다. 나도 버핏을 직접 한번 만나보고 싶어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었는데, 이 책만 읽어봐도 마치 버핏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버핏에 관한 책을 거의 빼놓지 않고 읽어왔는데 이 책은 아직까지 읽어보지 못했다. 버핏이 이제 고령으로 접어드는 만큼 이 책은 아마도 그의 사후에 큰 인기를 끌지 않을까 싶다.

워렌 버핏의 '방한'에 때맞춰 읽고 있는 케인즈의『일반이론』



앨리스 슈뢰더,
 1956∼    , 
스노볼 (1,840쪽, 1권 1,028쪽 +2권 812쪽)



이 책 역시 '버핏이 고인이 되면' 다시 한번 주목받을 책이지 싶다. 워렌 버핏이 저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쓰도록 무제한적인 독점 인터뷰와 취재 지원을 약속한 덕분에 '워렌 버핏의 공식 전기'로 평가받는 책이다.

저자는 애널리스트 출신이며 모건 스탠리의 이사로 일한 경력이 있는데, 이 책을 쓰기 위해 직장을 떠나 5년간 전적으로 '워렌 버핏만 분석'했다고 한다. 버핏의 평전 2권과 공식 전기 2권을 합하면 3,000쪽이 넘는 분량이다. 투자의 세계에 버핏만한 인물은 아마도 다시 나타나기 어려울 듯싶다.


 

애덤 스미스, 1723∼ 1790,  국부론 (1,244쪽, 상권 664쪽, 하권 580쪽) 

 


젊은 시절에 주로 도덕철학을 강의했던 '철학 교수' 애덤 스미스가 대학강단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건 그의 나이가 40대 중반일 때였다. 고향 커콜디에서 그는 10년 동안 오로지 저술에만 매달린 끝에 1776년에 국부론이라는 대작을 완성하였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경제의 중심은 주로 농업과 무역 등이었고 <경제학>이라는 용어조차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저작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경제학의 원전'으로 대접받는다는 게 참으로 놀랍다. 더군다나 그가 이 책에서 주창한 '자유시장경제의 원리'가 21세기까지도 전세계 여러 국가의 경제시스템을 움직이는 기본 바탕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책 한 권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더욱 놀라게 된다. 단적으로, 만약 등소평이 <국부론>의 열렬한 애독자가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15억이 넘는 중국 인민들은 과연 어떤 삶을 영위하고 있을지, 또 전세계의 정치경제적 지형도는 얼마나 바뀌어 있을지도 궁금하다.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의 원제는 [국가의 부(富)의 본질과 원천에 대한 탐구]인데, 도덕감정론이라는 철학책을 쓴 그가 국부론까지 저술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의 '인간 본성에 대한 탁월한 고찰'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는 데이비드 흄과 같은 당대의 탁월한 지성과 활발히 교류했고, 인간 공동체 생활의 근간을 이루는 '도덕철학' 뿐만 아니라 국가의 법과 제도를 포함한 온갖 다양한 방면에 대해 두루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연구를 했다. 국부론이 '위대한 고전'이 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세월이 아무리 흐르더라도 결코 쉽게 바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통찰이 그만큼 탁월했다는 데 있지 싶다.

애덤 스미스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한 핵심을 세 가지만 꼽아보라고 한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가 이 책의 초반부에서 '핀 제조방법에 관한 유명한 예'를 들어 설명한 '노동분업의 효율성', '보이지 않는 손'의 비유, 그리고 경제자유주의가 그것이다. 그는 '개인의 이익 추구 성향'이 어떻게 사회 전체의 이익, 더 나아가 국가의 부와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 깊게 고민했다. 그 결과 그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의 추구 성향'이야말로 사회 전체와 국가가 번영할 수 있는 원천임을 밝혔다. 이 점은 그가 도덕감정론에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에 대해 몹시도 비판적이었던 점에 비춰보면 놀라운 변화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의사였던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는 "개인의 악덕은 사회의 이익을 가져온다"는 주장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 맨더빌의 책은 '악명높은 책'으로 당연히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멀쩡한 사람들조차 꿀벌의 우화를 읽고 괜히 '악덕을 너무 쉽게 저지르지 않을까' 몹시도 걱정했을 정도의 취급을 받았던 책이었다.

어쨌든 애덤 스미스는 개개인의 억누를 수 없는 경쟁심과 이익추구 성향이 결국은 사회와 국가를 번창시키는 원동력임을 간파했고 그것을 국부론에서 체계화했다. 그는 자유로운 경쟁을 방해하는 어떠한 제한도 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저해할 뿐이라고 보았고, 시장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저절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마치 '신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세계를 관장한다'는 개념과 유사한 것이었다.(사실 국부론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이 딱 한번 등장한다. 그가 경제활동 전반에 대해 두루 제한없는 '자유방임'을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독점'의 폐해와 자유로운 경쟁질서를 저해하는 '담합' 등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은 19세기의 산업혁명을 맞아 경제력이 국력을 좌우하는 시대의 흐름과 너무나 부합했다. 다만 개인의 부가 늘어나고 공장이 대규모화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축적된 자본의 힘이 더욱더 커져감에 따라 애덤 스미스의 견해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는 한계점을 노출했고, 경제발전이 가속화될수록 '노동자의 소외'와 '자본가의 착취'가 더욱 노골화됨에 따라 국부론의 애독자였던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념이 새롭게 등장하기에 이른다. 애덤 스미스의 이론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조차 1929년의 세계적 대공황을 맞아 구원투수로 나선 천재 경제학자 '케인즈'에 의해 또다시 수정되기에 이른다.  구소련을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국가체제마저 소멸한 오늘날에 와서는 '신자유주의의 지나친 확산'이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최근 몇 차례의 경제위기 이후에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심각한 반성'으로까지 이어지는 국면까지 맞고 있다.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을 통해 강조한 '공감의 원리'는 <국부론>에서 '시장의 원리'로 연결된다. 중요한 것은 두 원리 모두 불변하는 '인간의 본성'에 철저한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오늘날에 와서 세계가 급속도로 통합되고 '자본' 자체가 거래되는 '금융시장'이 지나치게 팽창함에 따라 애덤 스미스의 이론이 자주 비난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의 이론이 근본적으로 틀렸다기보다는 '경제 시스템' 자체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지하기에는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빈익빈 부익부'가 가속화되고 '강자의 횡포'가 널리 확산되면서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한 체제는 '공감'을 중요시했던 애덤 스미스에게도 결코 바람직하게 비춰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애덤 스미스가 강조했던 '도덕감정'이 훗날 다윈의 종의 기원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점을 다시 상기해 보자. 그래서 다윈의 '진화론'을 다시 경제학 원리에 빌려온다면 미래에는 과연 어떤 경제시스템이 나타날 수 있을까. 어떠한 국가나 생물종도 '공존'을 배제하는 '과잉팽창'은 결국 종말을 맞았다. 경제학은 애덤 스미스 이후 고작 200여 년의 짧은 역사밖에 가지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경제학과 경제원리는 너무나 달라진 작금의 경제환경에 '적응'하기가 쉬워 보이지 않는다. '변이'와 '진화의 압력'이 빚어낼 새로운 경제 원리는 또 누구에 의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정치,경제,사회,법률,역사,철학 등을 포괄하는 엄청난 넓이와 깊이를 지닌 경제학 고전의 명저

☆ 세계를 개혁한 16권의 명저(로버트 B.다운즈)
☆ 그레이트북 144권 (미국의 독서그룹 & 시카고대학 교수진 참여)
☆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동아일보 선정)
☆ 평생 동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의 저자 137명(『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부록)



존 메이너드 케인즈
, 1883∼ 1946,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488쪽) 

 



케인즈는 아마도 경제학자 가운데 가장 천재적인 인물임과 동시에 '경제학자와는 거리가 좀 멀다 싶은' 여러가지 면모를 동시에 지녔던 인물이다. 그는 상당한 시간을 들여 천재 과학자였던 '뉴튼'을 깊이 연구하기도 했고, '주식투자자'로서도 장기간 빛나는 활약을 펼친 '당대 최고의 펀드매니저'였으며, 사교계의 여왕이라 불린 러시아 출신의 발레리나와 결혼하는 등 화려한 사생활을 했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경제학자인 아버지와 사회개혁가였던 어머니의 '엄친아'로 태어나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끝에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1919년의 파리평화회의에서 영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뒤《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그는 마샬플랜으로 유명한 알프레드 마샬을 스승으로 모셨지만 자신의 스승이
국부론을 뛰어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쓴 '경제학 원리'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불후의 경제학 명저는 단 하나 -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만 있으면 족하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애덤 스미스나 알프레드 마샬과 같은 야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부론을 뛰어넘는 '불멸의 고전'을 써냈는데 그게 바로 이 책이다.

케인즈는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이론'이 매우 특별한 경우에만 들어맞는 이론임을 증명함과 동시에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한 이론을 찾아냈고, 전혀 새로운 독창적인 그의 이론에 대해 '일반이론'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는 화폐와 이자율 뿐만 아니라 '고용 및 생산수준'을 결정하는 요인에 있어서 '소비와 투자' 즉 유효수요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공공지출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른바 '유효수요이론'이라 불리는 '케인즈 경제학'의 핵심은 기존의 자유방임주의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케인즈의 경제정책은 미국의 뉴딜정책뿐만 아니라 20세기 서양의 선진국가들이 대부분 채택하는 주류이론으로 확산되었으나, 1970년대 세계경기가 침체하면서 프리드먼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이 맞아 떨어지면서 여러 비판에 흔들리게 되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 여러차례 대규모 금융위기를 겪게 되면서 다시금 '정부의 재정지출'을 강조한 그의 이론이 부각되기도 하였다. 최근에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된 '재정위기'는 유럽의 여러 국가로 확산된 끝에 미국의 '재정절벽'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는데, 케인즈의 '일반이론'을 공부한 우수한 두뇌의 경제학자들이 어떤 해결책을 궁리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워렌 버핏의 '방한'에 때맞춰 읽고 있는 케인즈의『일반이론』

☆ 뉴스위크가 여러 추천 리스트를 토대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책 100권' 가운데 92위
    (추천 리스트 : 모던 라이브러리, 뉴욕 공공 도서관, 세인트 존즈 대학,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 등)
☆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동아일보 선정)



막스 베버, 1864∼ 1920,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734쪽) 
 

 

나는 아직까지 이 유명한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막스베버의 또다른 역작 <사회경제사>만 읽어봤을 뿐.

자본주의가 어떻게 해서 성립.발생되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 대작

(알라딘 책소개에서 인용)

사실 막스 베버의 이 책은 번역자의 말대로 단순히 사회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번역할 수 있는 텍스트는 절대 아니다. 통합과학의 정수로서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원래 사회학적 연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사(Kulturgeschichte)였다. 즉 직업윤리에 기초하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과 그 담지자인 서구 시민계층의 발달 과정을 추적한 문화사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신학을 비롯해 경제학, 역사학, 문헌학, 심리학, 사회병리학, 철학, 윤리학, 미학, 문학, 예술, 음악, 개념사 등 실로 방대한 분야가 입체적으로 교차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두 편의 논문 가운데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너무나도 유명해 달리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수많은 당대 학자들과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도 학계에 회자되고 있는 이 글은 마르크스의 그것과 더불어 자본주의 논쟁의 양대 산맥을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동아일보 선정)



데이비드 랜즈, 1924∼    ,  국가의 부와 빈곤 (920쪽) 

 



이 책은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인 데이비드 S. 랜즈가 애덤 스미스에게서 영감을 받아 집필한 책이라고 한다. 최근에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왔던 롬니가 자신의 국가관과 경제관에 큰 영향을 준 '두 권의 책' 가운데 한 권이다. 다른 한 권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이다. 두 권 모두 국가의 흥망성쇠를 탐구한 책인데, 그 주된 원인을 총 균 쇠는 '지리적 조건'에서 국가의 부와 빈곤은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롬니의 견해이다. 이 책 역시 사두기만 하고 읽어보지 못한 책이다.

(알라딘 책소개)


600년 전 스페인 및 포르투갈 제국의 식민지 건설 과정부터 소련 연방 붕괴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과정까지 다양한 세계사의 일면을 조명한다. 그리고 서구 문화의 번영과 전통적인 경제이론이 유럽과 미국이라는 '슈퍼파워'부터 아시아 및 태평양 연안의 '호랑이 경제국'에 이르는 다양한 힘의 구심점들과 현대의 세력균형에 미치는 영향과 그 중요성을 지적한다.

저자는 '역사는 빈곤에 대한 최상의 치료책은 자국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고 말한다. 유럽의 프로테스탄티즘 노동관이나 일본의 '일하기 위해서 산다'는 태도 등 노동을 강조하는 문화가 기술 및 산업 발전을 이끌며 이 복잡한 시대에서 최고의 우위를 점해왔다고 역설하며, 역사 속에서 꾸준히 성장해온 다문화주의에 관해 사실에 근거를 둔 명백한 분석을 제시한다.




[과학]

찰스 다윈, 1809∼1882,  종의 기원 (656쪽) 



수많은 천재들이 쓴 무수한 책들 가운데 이 책보다 더 중요한 책이 또 있을까. 조용히 머리숙여 경배를 드리고 싶은 이 책의 저자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하는 일도 부끄러운 일 같다. 과학철학을 전공했던 찰스 길리스피의 멋진 글솜씨가 이 책의 가치에 훨씬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 즉 생존 투쟁에 있어서 적자생존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Survival of the Fittest in the Struggle for Life』(1859) - 이것은 유명한 제목이다. 이를 읽는 사람은 숨죽이며 읽어 내려간다. 그런데 읽는 사람에게 이처럼 은연중에 꺼림칙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고전"이 이것 말고 또 있을까? 이토록 겸허한 외관을 쓰고 세상에 나타난 기초 과학 이론이 또 있을까? 이 책의 표현은 대단히 평범한 것이어서 책을 펼쳐 읽으면 마치 자연에서의 자조(自助)에 관한 전도사의 설교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설교단이나 회계부서에서 들을 수 있는 이익과 손실에 관한 잠언이 모두 거기에 있다.


"어떤 생물체나 나쁜 것은 배척하고 좋은 것은 모두 보존하고 축적하며 기회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항상 진보를, 묵묵히 그리고 서서히 계속하고 있다." 이것은 경쟁을 통한 진보이다. "그러나 성공은 흔히 수컷의 특수한 무기 또는 매력에 달려 있다. 그리고 조그마한 이점이 승리를 결정한다." 이것은 성공에 관한 말이다. "겉모습이 생물에 유익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연은 겉모습에 신경 쓰지 않는다." 아름다운 마음씨에 관해서이다. "부지런한 벌이 얼마나 시간을 절약하는지, 많은 사례들을 보여줄 수 있다." 근검절약에 관해서이다.

"생존 투쟁에 관하여 고찰할 때 우리는 다음 사실을 확신해도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다소 위안도 된다. 즉 자연의 싸움은 그칠 새 없이 일어나지는 않으며, 공포가 느껴지지도 않으며, 죽음은 보통 신속하게 이루어지며, 원기 있고 건강하고 행복한 것은 모두 살아남아 증식한다."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얻게 되는 보상에 관한 말이다.

 - 찰스 길리스피, 객관성의 칼날 中에서

단순한 발단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경탄스러운 장관들이 생겨났음을 밝힌 책

☆ 세계의 결정적인 책 15권(스텐포드 대학원에서 선정)
☆ 세계를 개혁한 16권의 명저(로버트 B.다운즈)
☆ 그레이트북 144권 (미국의 독서그룹 & 시카고대학 교수진 참여)
☆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동아일보 선정)
☆ 평생 동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의 저자 137명(『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부록)



 

데일 피터슨,  ____ ∼     ,  제인 구달 평전 (1,096쪽)

 



오스카 와일드는 "여성들은 불완전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여성들로부터 기대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은 천재의 작품뿐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 책은 '천재의 작품'은 아니지만 '여성으로부터 기대해 볼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침팬지 연구를 통해 '인간을 다시 정의한 여자'로 평가받는 제인 구달. 과학자를 꿈꾸는 아들이 읽어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던 책인데 아들은 커녕 나조차도 가끔씩 이 두툼한 책을 펼쳐보기만 했을 뿐 온전히 읽어보지는 못했다.

(알라딘 책소개 글)

침팬지 연구의 대모이자 세계적인 환경운동가 제인 구달 최초의 평전 <제인 구달 평전 : 인간을 다시 정의한 여자>. 이 책은 제인 구달과 오랫동안 협력해온 작가인 데일 피터슨이 10년 넘게 제인 구달에 대한 모든 자료를 모으고 영국과 미국,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관련 인사들을 인터뷰해 제인 구달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제인 구달의 가족사와 외할머니 집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일화, 사춘기 시절부터 시작된 여러 남자들과의 로맨스, 약혼과 파혼, 침팬지 연구의 전 과정, 아들 그럽의 육아, 곰베 연구센터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와 납치 사건, 탄자니아 국립공원 책임자 데릭 브라이슨과의 재혼과 사별, 침팬지 보호 활동과 환경·평화 운동 등 출생부터 최근까지의 모든 삶을 담아냈다.

이 평전은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제인 구달의 과학적 업적과 삶을 조명한다. 과학자나 사회운동가로서의 제인 구달만이 아니라 여러 남자와 사랑과 연애를 겪는 한 여인으로서,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와 누군가의 딸로서, 그리고 누구나처럼 인간적인 고민을 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제인 구달을 보여준다. 



 

아이작 뉴튼, 1642∼1727,  프린키피아 (837쪽, 1권 319쪽, 2권 218쪽, 3권 300쪽)

 



뉴튼은 찰스 맥케이가 쓴 대중의 미망과 광기나 애드워드 챈슬러가 쓴 금융투기의 역사 등과 같은 책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만큼 유명한 영국의 남해주식회사(South Sea Company) 투기 붐에서 큰 손해를 본 후 아직까지도 여러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상적인 말을 남겨 놓았다.

균형점 이탈 유형의 교란적 투기에 가담해 고점에 사서 저점에서 팔았던 외부자 사례를 하나 더 찾는다면, 왕립조폐국 장관이자 위대한 과학자였던 이아작 뉴턴(Isaac Newton)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1720년 봄 "나는 천체의 운동을 계산할 수는 있어도,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뉴턴은 그해 4월 20일 보유하고 있던 남해회사 주식을 매각해 수익률 100%에 달하는 7000파운드의 이익을 실현했다. 하지만 그 뒤 그해 봄과 여름에 세상을 휘몰아친 광기에 그도 같이 휩쓸려 더 많은 물량의 주식을 거의 최고점에서 매입해 2만 파운드의 손실을 입었다. 재정 파탄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합리적 행태에 마음이 상한 그는 그렇게 말했고, 남은 생애 내내 남해(South Sea)라는 이름을 듣는 것조차 견디기 어려워 했다. - 찰스 P. 킨들버거,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中에서


과학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인 그의 저서를 '직접 한번' 읽어보고 싶어서 이 책을 구입했는데, '물리'를 배우지 못한 나로서는 정말 '그림의 떡' 같은 책이 되고 말았다. 고등학교 물리과목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데 '과연 그럴까' 싶을 정도로 각종 도형과 수학공식으로 가득한 책이다. 그래도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 가운데 이 책을 읽는 사람도 있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원래 라틴어로 씌어졌으며 1687년에 간행되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수학적'으로 설명해 냄으로써 '근대적 세계관'을 형성한 결정적인 책이 되었다. 이 책 속에는 근대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3법칙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관성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그리고 질량과 가속도의 곱이 힘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다. '사과'가 땅 위에 떨어지는 걸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해낸 뉴튼이 말년에 이르러 남긴 말은 '우리가 사는 우주'가 아직도 여전히 수많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쳐 주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세상에 어떻게 비쳐질지 모른다. 하지만 내 자신에게 나는 진리의 거대한 바다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채 내 앞에 놓여 있는 바닷가에서 놀며, 때때로 보통보다 매끈한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를 찾고 있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 세계를 개혁한 16권의 명저(로버트 B.다운즈)
☆ 그레이트북 144권 (미국의 독서그룹 & 시카고대학 교수진 참여)
☆ 평생 동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의 저자 137명(『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부록)



 

스티븐 핑커, 1954∼    ,  빈 서판 (901쪽)

 



스티븐 핑커의 대표작 3종 세트(언어본능,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빈 서판)가운데 한 권.

'마음의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내게 스티븐 핑커는 '대단한 설득력'으로 내게 다가온 저자였다. 2009년 봄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의 동부지방을 여행갔을 때 하버드대학 교정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언어 장애'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핑커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어렵사리 '리뷰'를 쓴 것도 부족해서 이 두툼한 책의 중요한 내용들은 늦은 밤까지 자판을 두드리며 '필사'를 해 둘 만큼 한때 열광했던 책이다. 그는 이 책으로 '거의' 퓰리처상을 받을 뻔 했다고 하는데, 그가 나중에라도 이 책을 뛰어넘는 '열정이 가득 담긴' 책을 또 써낼 수 있을까 싶다.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 탐구를 시도한 심오한 통찰을 담은 책
언제쯤 번역되어 나올지 궁금한 책


 

스티븐 핑커, 1954∼    ,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962쪽)




스티븐 핑커의 대표작 3종 세트(언어본능,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빈 서판)가운데 두 번째로 출간한 책.

나는 이 책을 빈 서판을 읽은 다음에 읽었었다. 두 권의 책 모두 '진화심리학 및 인지과학'을 전공한 동일 인물이 쓴 책이어서 어느 정도 '중복되는 이야기'가 겹친다는 느낌도 드는 게 사실이다.

다만 이 책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다소 '기계론에 가까운 시각'으로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탐구한 책이어서 마치 인간의 마음을 '로봇에 심어놓은 소프트웨어'에 가까운 것으로 취급한다는 느낌도 든다. 특히 책의 초반부에 '기계의 작동원리'와 '역설계'를 설명하는 부분은 좀 심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 부분을 지나고 나면 '마음이 작동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입력장치'와도 같은 '눈'에 대한 설명이 상당한 분량에 걸쳐 설명되어 있다.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있어서 '눈'이 제구실을 하지 못할 때 '마음'이 얼마나 오작동을 일삼는지 살펴보는 일도 무척 흥미롭다.

책의 중반부와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는 주로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인간의 마음'이 '가족, 종교, 예술' 등등에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살펴보는 데 집중한다. 가족관계에서의 갈등을 다룬 부분들은 마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재미있고도 흥미롭다.

'인간의 본능'을 주제로 다소 묵직한 주제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빈 서판에 비해 이 책은 '마음의 작동방식'을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측면에서 빈 서판의 '각론'에 해당하는 책이 아닐까 싶은 느낌도 든다. 두 권을 모두 읽고 싶은 독자들은 이 책을 먼저 읽은 뒤에 좀 더 어렵고도 심오한 내용들을 다루는  빈 서판으로 넘어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일만큼 흥미로운 작업도 드물 듯한데, 매우 두툼한 이 책 속에는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어서 '소설' 못지 않는 흥미를 안겨주는 책이다. 이 책은 따로 리뷰를 쓰지 못한 대신에 '밑줄친 많은 내용'들을 온전히 필사해 둔 덕분에 한동안은 이 책 내용들을 지겹도록 인용한 기억도 새롭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①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1854∼1941,  황금가지 (1,090쪽)

 



오래 전에는 금엽지(金葉枝)라는 특이한 책 제목을 달고 있었던 책이다. 그 당시 이 책은 마치 무협지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가끔씩 나는 도서관에 들러 별다른 목적 없이 그냥 서가에 꽂힌 책들을 구경삼아 둘러볼 때가 있다. 그럴 때 어쩌다 매우 두툼한 책들이 눈에 띄면 호기심 때문에라도 한번쯤 그런 책들을 펼쳐보게 마련인데, 나에겐 이 책이 그런 식으로 만나게 된 책이었다. 이 책은 제목만 보더라도 뭔가 특이한 내용이 담겨 있을 것 같은데, 그 속을 펼쳐보면 제목에 못지않게 삽화와 내용까지도 '기이한 측면들'을 꽤나 많이 담고 있었다. 이래저래 뭔가 강렬한 인상을 던져주는 책이었지만 그 부피의 방대함과 내용의 심각함 때문에 선뜻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도로 제자리에 꽂아놓게 되는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1,000쪽이 넘는 분량마저도 원본의 축약판에 불과하다. 이 책은 저자가 40여 년에 걸쳐 총13권의 대작을 완성한 후 일반독자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한 권'으로 줄여놓은 책이다. 아마도 원전의 엄청난 분량을 직접 봤더라면 그것 또한 무협지와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전세계에 두루 널리 전승되어 온 온갖 터부와 주술, 제의에 따르는 희생, 신성시하는 성소와 신전 등등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신화와 종교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집요하고도 철저하게 예증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여전히 막강한 힘으로 '인류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 여러 종교들의 '신화적 요소'를 밝혀내고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의 신성함'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준 것으로 생각되는 작품이다.

이 책의 저자인 프레이저경은 '과학적 발견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는 인간성에 대한 하나의 죄악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고까지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세계의 여러 종교들이 온갖 신들을 '신성시'하며 매일같이 온갖 제의를 바치는  게 현실이다. 더구나 과학의 발달 덕분에 인류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정당한 '연구와 시도' 조차 '신성에 대한 도전이자 모독'이라는 이유로 한사코 가로막는 일부의 현실을 감안하면, 프레이저경이 평생을 걸고 저토록 방대한 연구를 수행했던 이유도 일견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보면 얼핏 또다른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평생동안 '신화'를 연구함으로써 '신화'가 결코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끊임없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진짜 이야기'임을 강조하고 '신화'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간직했던 비교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바로 그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신화'를 연구했다는 점만 봐서는 두 사람의 탐구범위가 서로 엇비슷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연구의 초점이 약간 다른 측면도 분명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막연히 두 사람의 주장을 모두 긍정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쪽만을 일방적으로 부정하기도 쉽지 않은 난점이 있는 것 같다.


☆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동아일보 선정)


 

앤서니 라빈스, 1960∼    ,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704쪽)

 



이 책은 앞서 소개한 여러 책들과는 사뭇 다른 성격을 지녔다. 이 책이 여기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던 건 거의 전적으로 책의 두께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위 자기계발서로 분류되는 책 가운데 이만한 두께를 지닌 책도 흔치는 않을 것 같다. 사실 나는 9년 전쯤 이 책을 읽었는데 그 당시 여러모로 힙들고 어렵던 시기에 이 책은 나에게 커다란 감동뿐만 아니라 굉장한 희망까지도 안겨주었다.

사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평소에도 수없이 많은 매체들을 통해 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가 이뤄낸 놀라운 성과물들을 너무나 많이 보고 들어 잘 알고 있다. 그런 사례들은 굳이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내가 사진과 함께 소개한 '몇십 권의 책들'만 보더라도 충분할 정도이다. 수많은 인물들이 놀라운 책들을 써낸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그 연원을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에서 찾든 불후의 명성을 얻고자 하는 명예욕에서 찾든 중요한 것은 어떤 순간 '어떤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저런 '불후의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여느 다른 자기계발서와는 분명히 다른 면모를 지녔다.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지만 아직 제대로 깨어나지 못한, 그래서 저자가 '네 안에 잠든 거인'이라고 표현한 바로 '그 사람'을 뒤흔들어 깨울 수 있도록 '결심'을 촉구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묘한 데가 있어서 아무리 포부와 기대와 욕망이 크더라도 그런 '목표'나 '꿈'에 이르기 위한 '방법'을 찾는 일에는 게으르기 마련이며, 설사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행동'으로 나서도록 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마음'을 움직이기는 좀처럼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움직이기 싫어하고 마냥 잠들어 있는 걸 좋아하는 '거인'을 흔들어 깨울 수만 있다면 그 거인은 틀입없이 '걸리버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거대한 발걸음을 성큼성큼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거듭 얘기하지만 이 책은 그런 '잠자는 거인'을 깨우는 데 필요한 '결심'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데 있어서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동시에 또 특별한 훈련들까지 요구한다. 달리 표현하면 '마음'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이런 책을 읽지 않더라도 저절로 촉발된 '불타는 열망'에 사로잡혀 '거인과 같은 행보'를 시작한 인물들도 많을 것이다. 어느날 '불현듯' 스치는 그런 '열망'이 '우리 안에 잠든 거인'을 갑자기 뒤흔들어 깨워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여러 책들을 통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런 특별한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 책 말고도 훌륭한 자기계발서는 많다. 내겐 벤저민 프랭클린의 
프랭클린 자서전, 새뮤얼 스마일즈의 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 데일 카네기의 카네기 인간관계론, 존 템플턴의 템플턴 플랜 등이 특별히 좋았던 책으로 기억된다.

인간관계를 다룬 최고의 책

200년 이상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지침서가 된 '고전'이 된 책


내가 그런 유명한 책들을 제쳐두고 굳이 이 책에 대해 긴 얘기를 늘어놓는 또한가지 이유는 이 책이 '독서의 중요성'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저자 스스로 칠백 여권의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썼을 뿐만 아니라, 나 또한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독서에 대한 많은 결심들'을 새롭게 이끌어낼 수 있었으며, 이 글에서 소개한 여러 책들을 읽게 된 것도 어쩌면 이 책에 힘입은 바가 컸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책은 어찌보면 '낄 자리'가 아님에도 이 글의 맨 구석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내 안에 잠자던 '불타는 의지'에 불을 붙이고, 제대로 활활 타오르게 도와준 멋진 책
[코멘트]독자와 서로 교감하지 않는 우격다짐의 자기계발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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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책들을 일일이 다시 꺼내어 사진에 담고 쪽수까지 계산기로 더해봤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건 그 책들이 간직하고 있는 무게인 것 같다. 하긴 저 두툼한 책들을 쓴 인물들이 오로지 한 권의 책을 완성하기 위해 평생에 걸쳐 읽었던 무수히 많은 또다른 책들과 그들이 떠올렸던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생각들을 감안하면 책 한 권의 무게가 오히려 지나치게 가벼운 건지도 모르겠다.

읽지도 않고 쌓아둔 책들을 조금 더 나중에 읽겠다고 미뤄본들 그 책들의 무게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더 가벼워질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삶을 지속하는 존재'인 우리는 결코 잠시도 어느 한 순간에 머무르지 않고 시시각각 새롭게 변한다. 그래서 어쩌면 어떤 책과 그 책을 읽는 사람이 만나게 되는 가장 좋은 시간은 꼭 언제쯤이 되어야 한다고 너무 강조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부단히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 애쓰는 등반가처럼, 혹은 수천 km까지도 날아갈 수 있는 새처럼 우리의 '근육'을 끊임없이 단련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아직까지는 나도 저런 책들의 무게에 못이겨 비록 '짧은 거리 밖에는 날지 못하고' 힘에 부칠 때마다 '밭이랑 마다 내려서 쉬는 꼴'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도 좀 더 높이 올라 더욱더 '먼 거리'까지 날아가 보고 싶다.

전자는 높고도 확고한 飛翔(비상)으로 날개를 활짝 펴서 날며
늘 자기의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후자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아 앉듯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뛰어 돌아다니며
자기 날개에 자신이 없어서 짧은 거리 밖에는 날지 못하고
숨과 힘이 지탱못할까봐 밭이랑 마다 내려서 쉰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중에서


비록 해는 저물고 가야할 길은 멀지만,  어느 위인이 평생토록 늘 암송했다던 테니슨의 힘찬 시행들을 이 대목에서 떠올려 본다면 약간의 위로와 함께 새로운 용기라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자 친구여, 새 세계를 찾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
배를 띄우고, 줄 맞춰 앉아, 힘차게 노를 젓자
뱃머리가 물살을 가른다; 나의 목적을 위해
황혼과 서쪽 하늘의 별들의 바다를 너머, 내가 죽을 때까지
노를 저어라.
파도가 우리를 삼킬 수도 있으리라:
행복의 섬을 만날 수도 있으리라,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아킬레스를 만날 수도 있으리라.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많은 사람이 남았지만;
우리에게 비록 땅과 하늘을 움직이던 예전의 강인함은 이제 없지만;
그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지만;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으나, 강인한 의지의,
영웅적인 용사의 침착함으로,
노력하고, 구하며, 찾고, 포기하지 않으리라.
 - 테니슨, 《율리시스》중에서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차이코프스키의 5번 교향곡 휘날레를 들어보는 건 또 어떨까.
비록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는 것처럼 상큼발랄하고 들뜬 기분까지는 아닐지라도,
무겁고 우울한 느낌은 조금씩 사라지고 다시금 힘차게 솟을 새해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기분도 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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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장 2012-12-26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여백에 쓴 글씨체를 보니 오재찬의 글인줄 알겠네. 왕성한 독서욕은 여전하구나. 날씨가 몹시 춥다. 이럴땐 따듯한 나라로 잠시 피해 있는 것도 방법인데...연말 잘 마무리하고 새해 복많이 받아라. 振會

oren 2012-12-26 14:24   좋아요 0 | URL
어인 일로 자네가 여기까지 다 찾아 오셨나. 그나저나 날씨가 정말 춥긴 춥구나.
따뜻한 남쪽나라로 도망가고픈 맘도 간절하다만, 이럴때 차라리 얼음 꽝꽝 얼어붙은 빙판으로 달려가 썰매라도 실컷 타보고 싶은 맘도 생기네. 자네도 늘 건강하길 빌고, 새해엔 좀 더 자주 보자꾸나~

페크pek0501 2012-12-26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왜 이 글이 추천 수가 높은지를 저절로 알게 되는 페이퍼예요.
읽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ㅋㅋ 이 페이퍼를 쓰신 분은 훨씬 많은 시간을 들였겠지요.
많은 분들이 오렌 님의 덕분으로 좋은 글과 좋은 책을 접할 수 있어서 참 좋았을 거예요.
이런 건 추천을 열 개 하고 싶어요. 그러나 하나만 하고 갑니다. 제가 스케일이 작아서...ㅋㅋ
내년에도 이렇게 질 높은 페이퍼를 기대해도 되겠지요? ^^

oren 2012-12-26 22:20   좋아요 0 | URL
심심풀이로 몇 권의 두툼한 책들을 사진에 담아 보다가 그 책들에 관한 짤막한 글까지 끄적거리다 보니 글이 엄청나게 길어지고 말았어요. 지나치게 긴 글을 누가 읽겠냐 싶어 그냥 묵혀 뒀다가 다시 꺼내 쓰다가 했는데, 혹여 다른 분들께 일말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싶어 서둘러 마무리해서 올렸는데 과분한 관심과 추천을 해주시네요.

두꺼운 책들을 어렵게 읽고 난 뒤에는 늘 '어설픈 리뷰'라도 남겨볼 생각이 간절한데, 어떤 책은 필사하느라 지쳐버리기도 하고, 어떤 땐 결국 리뷰를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마는데, 그게 결국은 이런 엉성한 글로 뭉치고 말았어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리뷰라도 성실하게 쓰고 싶은 마음만 가득합니다.

사마천 2012-12-26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독서십니다. 깊이와 성실성 두루두루 감탄하게 만드네요.. 늘 남다른 모습을 보여주시는 오렌님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oren 2012-12-26 22:22   좋아요 0 | URL
너무 과한 말씀이십니다. 리뷰도 제대로 쓸 능력이 안되니 어떤 식으로든 얼렁뚱땅 넘겨보자는 속셈으로 두서없고 장황한 글만 남기게 됩니다.

이진 2012-12-28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놀랍군요. 가끔 타 서재에서 oren님의 댓글을 보고 감탄하기는 했으나 이정도이실줄이야...
배워갑니다, 많이. 마침 철학을 읽어보려 하는데 쇼펜하우어... 책보니 상당히 끌려요.
하지만 전 아직 미숙하므로... 강신주의 철학vs철학 부터 읽어나가야 겠습니다. 그 다음엔 서양 철학사... 러셀... 후후.

oren 2012-12-28 22:30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소이진님.

저도 소이진님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어쨌든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는데 서로 '인사'가 너무 늦었네요. ㅎㅎ 저는 소이진님이 한때 분데스리가에서 맹활약중인 손흥민 선수의 이미지를 달고 있어서 댓글 옆에 달린 그 '모습'만으로도 괜히 속으로 반가워했던 적도 있었답니다. 제가 늘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게 EPL를 비롯한 유럽축구 중계방송이거든요.

소이진님은 아직 고교생인 줄로 아는데 '공부와 오락'은 언제 하고 또 친구들과는 언제 놀고 이렇게 또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는지 그저 놀랍기만 해요. 게다가 벌써부터 철학으로까지 관심을 넓혀가다니요. 저는 '철학'은 고교때 세계사를 통해서 그냥 겉으로만 배웠고,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서 '교양선택'으로 들었던 '철학개론'이 고작 철학에 대한 시작이었는데 말이지요.

가끔씩 고교때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탐독했다는 주위 사람들도 봤었는데, 사실 니체를 읽자면 쇼펜하우어를 읽어야 되고, 쇼펜하우어를 읽자면 칸트를 읽어야 되고, 칸트를 읽자면 플라톤을 읽어야 되니, 사실 그 어느 철학자든 그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물들은 별로 없다고도 보여요. 암튼 '철학개론' 강의에 교재로 많이 쓰이는 러셀의 '서양철학사'만 하더라도 제 생각에는 아주 좋은 입문서로 여겨져요.

소이진님처럼 열심히 책 읽고 글 쓰다보면 나중엔 틀림없이 '알라딘이 배출한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으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전 믿어요. 혹시 너무 급성장해서 '인간계의 팔카오'가 아니라 '신계의 메시'처럼 될 지도 모르지요. 혹 그렇더라도 인간계에 사는 알리디너들을 설마 모른 척 하지는 않겠지요?

이진 2012-12-29 14:33   좋아요 0 | URL
아이참, 오렌님.
긴 댓글 정말정말 반갑게 잘 읽었어요.
신계의 메시....라...
그 정도는 아직 바라볼 뿐입니다. 혹여 너무 급성장하여 신계의 메시처럼 되는 날이 온다면, 그날에는...
철학을 시작하면 끝도 없이 달려야하는 것이군요. 예전부터 철학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고, 잘하면 대학도 철학과로 가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플라톤의 '향연'이라는 책도 읽고 싶고. 어제 강신주의 책을 읽었는데 역시 어렵긴 어렵더군요. 본질, 그래요 제가 가지고 있던 본질을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먼 미래에는 ······ 여러 가지 분야가 개척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은 개개의 정신적인 힘이나 가능성의, 점차적인 변화에 의한 필연적 획득이라는 새로운 기초 위에 세워지게 될 것이다. 인간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광명이 던져질 것이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中에서

희망을 그렇게도 강력한 즐거움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미래가 동시에 여러 형태로, 그것도 모두 동일하게 미소지으며 동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원하던 것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다른 것들을 희생해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들로 가득차 있기에, 미래에 대한 생각은 결국 미래 자체보다도 더 풍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유보다는 희망에서, 현실보다는 꿈에서 더 많은 매력을 발견한다.

 -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中에서

 * * *

식물, 동물, 인간


'생각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우주의 시원과 태양계의 생성과 지구의 탄생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도 물론 있을 것이다. 칸트가 "자연현상에서 최초의 근원은 전적으로 형이상학의 대상임이 명백하다"(『생명력에 대한 참된 평가에 대하여』)라고 말한 점에 비춰봐서도, 아득히 먼 과거에 있었던 '어떤 생각'에 대해 살펴보는 일은 분명 철학자의 몫이 틀림없다. 나로서는 '생각의 역사의 시작'을 우리 인간과 동물과 식물을 구별하는 데서부터 시작해도 충분하다고 본다.

식물은 동물보다 훨씬 적은 욕구를 가지므로 결국 아무런 인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그래서 식물은 자극이 인식의 대용물이고 거기에 반응한다. 동물은 자신의 욕구와 동기에 따라 행동하므로 신경체계와 뇌가 발달해야 했고, 그에 따라 뇌의 기능인 '의식'이 갖춰졌다. 그러나 동물들은 오로지 '현재'만을 살아갈 뿐 과거와 미래를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아마 아직 어떤 동물도 별이 있는 하늘을 주시하지 않았을 것이다.'(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오직 인간만이 온갖 다양한 생각들을 '우주 너머'까지 뻗친다. 인간이 지닌 그런 오성이나 이성 또한 까마득한 과거부터 저절로 주어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것은 '사상 최고의 아이디어'를 찾아낸 찰스 다윈에 의해 '서서히 진화해온 결과'임이 드러났다.

이 기회에 누군가, 자연이 곤충에게도 최소한 초의 불꽃으로 돌진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오성을 나누어주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변은 이렇다. 물론 그럴 것이다. 다만 인간이 초를 만들고 불을 붙이리라는 것을 자연은 알지 못한다. "자연은 어떤 것도 헛되이 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직 비자연적 환경에 대해 곤충의 오성은 충분하지 않는 것이다.(111쪽)

인간에게서 다른 동물들을 매우 능가하는 오성은 부가되는 이성(비직관적 표상 능력, 즉 개념 능력인 반성과 사유능력)에 의해 지원된다. 그렇지만 그 지원은 오직, 한편으로는 동물의 욕구를 훨씬 넘어서고 무한히 증가하는 인간의 욕구에 비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 무기와 자연적 엄호의 전적인 결여와 크기가 같은 원숭이의 근력보다 뒤지는, 비교적 약한 인간의 근력에 비례한다. 동시에 그 지원은 도피에서 인간의 무능함에 비례한다. 인간은 달리기에서 모든 네 발의 포유동물보다 뒤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지원은 또한 인간의 느린 번식, 긴 유아기, 긴 수명에 비례한다. 이것들이 개별자의 확실한 보존을 요구한 것이다. 이 모든 큰 요구들은 지적 능력을 통해 충족되어야 했다. 그래서 이 능력이 인간에게 그렇게 뛰어난 것이다. (112∼113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中에서



생각의 시작

원시 인류의 최초의 생각과 사고를 더듬어볼 수 있는 방법은 고대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유물은 약 270만 년 전 에티오피아의 고나 강변에서 발견된 '돌조각'이라고 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은 주로 채식을 했고, 두뇌의 용적 또한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작은 원시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16∼17세기 탐험의 시대에 아메리카, 아프라카, 태평양 등지의 수렵-채집 부족들이 여전히 석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돌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동물에 비해 '돌'을 사용할 줄 알았던 우리 조상은 마침내 '생각의 진화'를 시작하게 된다.

초기 인류가 '도끼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은 대략 지금으로부터 약 70만 년 전이라고 한다. 인간이 불을 처음 사용한 시기였던 142만년 전으로부터 따지면 무려 70만 년 이상이나 더 지난 셈인데,
그 뒤로 인간은 '사냥을 통한 육식'이 가능해지면서 두뇌를 키울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직립 보행 덕분에 인간은 턱의 구조가 바뀌고 혀의 정교한 놀림이 가능해져 언어에 필요한 여러가지 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돌도끼의 사용은 결국 사냥한 동물의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한 이빨의 크기까지도 점차 줄이게 되어 언어의 발달에 더욱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집단 생활에 따른 의사소통의 발달은 결국 생각을 '공유'하는 데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언어의 발견

2002년에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약 20만 년 전 언어와 관련된 유전자에서 중대한 돌연변이가 일어나 현생인류의 언어능력이 발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언어는 결정적으로 '협동'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작살의 미늘과 추위를 극복하는데 결정적이었던 '바늘'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막스 프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가 2004년에 그 연대를 계산한 결과는 지금으로부터 7만 5천 년 전이라고 한다.

'불과 도끼와 미늘과 바늘'을 갖춘 인류는 빠른 속도로 '영역'을 넓혀 나가는데, 아프리카를 벗어난 현생인류는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 시베리아와 아메리카는 물론 머나먼 바다 너머 오세아니아로까지 진출한다. 이 무렵부터 갑자기 인간 거주지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언어는 더욱 발달할 필요성이 커져갔다. 인류학적 증거와 연구에 의하면 수렵-채집 부족들이 인구 약 1∼2천 명당 하나의 언어를 갖고 있었으며, 인류가 시베리아를 건너 알래스카로 갔을 무렵 세계 인구는 약 1천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에 따른 전세계 언어의 수를 6,800여 가지로 추정한 결과를 내놓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 인류가 마침내 '나, 너'를 넘어 3인칭 '그(그녀)'를 부를 수 있게 된 건 고작(?) 9천 년 전이라고 한다. '그'의 역사는 짦아도 너무 짧다. 혹은 반대로 '그'를 부르는 데 수백만 년이 걸린 셈이다.


(생각의 역사 1 : 불에서 프로이트까지 中에서)


문명의 탄생, 그 이후의 발견들

『생각의 역사』의 저자 피터 왓슨은 생각의 영역을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구별하여 역사를 살핀다. 우선 '저기 바깥'의 역사가 있다. 인간의 외부에 속한 세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관찰의 세계, 여행, 발견, 측량, 실험 등 요컨데 흔히 과학이라고 불리는 물질적 세계가 있다. 또 하나의 다른 흐름은 '내면의 탐험'이다. 영혼, 또다른 자아, 아리스토텔레스와 대조되는 플라톤적 관심이 그것이다.

1만 2천 년 전부터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가 안정되자 역사의 '커다란 방아쇠'가 당겨졌고, 동식물의 사육과 농경의 발명에 뒤이어 비옥한 초승달에서부터 문명이 탄생했다. 그후 '내면의 탐험'으로부터 온갖 종류의 신과 종교가 탄생한다. '저기 바깥'으로부터 
화약과 나침반, 인쇄술 등이 발명되고 나자 '인간의 생각'은 온갖 걷잡을 수 없는 '생각들'을 끊임없이 쏟아내게 된다. 세계 인구의 급증과 더불어 전쟁, 종교, 철학, 예술, 그리고 과학의 발전이 뒤따랐다. '상상력의 폭발'이 찾아낸 온갖 발명품들은 숫자, 법, 대학, 도서관, 학문, 신대륙에 이르고 마침내 르네상스를 맞는다.


내면의 탐구, 자아의 발견과 프로이트의 등장까지

여기서부터 이야기의 무대를 약 500년 전 프랑스의 남부 페리고르 지방으로 옮겨보자. 거기서 우리는 고색창연한 중세의 성에서 평생 동안 '자신의 내면'을 깊이 성찰했던 '몽테뉴'라는 인물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느닷없이 '중세의 한 인물'을 내세우게 된 건 그 어둡고 답답했던 '중세의 인물' 가운데 이분만큼 '생각의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몽테뉴(1533∼1592)가 살던 세상은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지동설을 주장했던 시기와 겹쳤으나 중세 유럽은 여전히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 엄연히 지배하고 있던 세계였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로서 '인간에게 편안한 죽음을 맞도록 해주는 데' 충실하도록 강요받고 있었다. 하지만 몽테뉴가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지식의 목적은 인간에게 현세에서 더 올바르게, 더 생산적으로,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데 있다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주장을 펼쳤다. 결과적으로 그는 인류의 관심을 조금씩 더 허공에 뜨기 시작한 '내세의 구원' 이야기로부터 땅바닥에서 일어나는 '세속 세계'로 끌어내림으로써, 이른바 '인간'을 중시하는 인본주의 시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와 몽테뉴가 우주와 지구, 신과 인간의 관계를 바라보는 전통적인 시각을 근본적으로 뒤바꾼 이후, 데카르트와 칸트가 등장하여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를 더욱더 깊이 사유하게 되고, 마침내 '사상 최고의 아이디어'를 찾아낸 다윈에 이르게 되면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은 급속한 퇴조를 맞게 된다. 다윈 이후, 칸트의 계승자를 자처한 쇼펜하우어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철학자의 길에 접어든 니체의 등장은 결국 영혼의 최신판 이론인 '과학적 심리학'의 분야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신은 죽었다'고 목청을 높혔던 그가 '세속화(탈종교화)'의 대안으로 내세운 것은 '인간에 대한 심층적 심리의 이해'였다.

최초의 위대한 심리학자로 불린 니체는 '지금까지의 심리학은 도덕적 편견과 공포에 갇혀 있었다. 저 깊은 바닥으로 과감하게 내려가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그의 바통을 과감하게 넘겨 받은 인물은 프로이트였다. '숨겨진 동기를 보고 말해지지 않는 것을 듣는' 니체의 능력 때문에 프로이트도 니체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했으나, 프로이트는 감정과 욕망이 겉으로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데 착안해 '무의식'의 개념에 이르렀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다윈'으로 비유했던 프로이트는 후세의 여러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았던 당시의 알맞은 시대적 배경 덕분에 매우 중요하고 시의적절한 평가를 얻었으며, 그의 폭넓은 이론은 '자아의 비합리적 측면에 일관성을 부여했고, 과학의 이름으로 격상'되었다. 물론 프로이트가 맨먼저 무의식을 발견하지는 않았다. "19세기의 심리학자 또는 중세 심리학자 중에서 무의식적 사고 작용이 실재할 뿐 아니라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마크 D. 올트슐이 「인간행동에 관한 개념들의 기원」)고 한다.


프로이트가 사망한 이후 20세기 과학기술이 무서운 속도로 가속페달을 밟는 동안에도, 자신의 생애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방의 침대 속에 틀어박혀 기나긴 소설을 쓰는데 바쳤던 마르셀 프루스트도 '내면의 탐구'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걸작 소설을 통해 인간의 의식 속에 깊이 감추어진 '내면의 자아'를 찾아 나서는 또다른 길을 보여줌으로써, 몽테뉴적 사고의 혁신과 일맥상통하는 프랑스인 특유의 '내적 성찰'의 전통을 또다시 보여주었다.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내면의 의식의 흐름과 지속'을 철학적으로 깊이 파고 들어갔던 인물 또한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었다.

최근 수백 년 동안에 폭발적으로 발달한 과학 덕분에 서구인의 근본 과제가 '자연의 정복'에 맞춰지면서 '인간은 주체이고 자연은 객체인 양' 여기게 된 생각을 뒤바꾼 인물은 하이데거였다. 그가 보기에 우리의 이성과 지성은 "존재의 비밀에 이르게 해주는 안내자로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부적합하다"고까지 말하며, 그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을 통해 '세상에 내던져진 현존재'에게 삶의 핵심적인 사태는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실존'에 있다고 주장했다. (하이데거가 몹시 난해한 그의 책을 통해 주장했던 바를 이렇게 무례하게 표현해도 될 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우리의 '존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주마간산격으로 살펴본 것이긴 하지만 '20세기 지성사'라는 부제를 단『생각의 역사』에는 실로 수없이 많은 세기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물론 저자가 이 책 한 권에 아무리 많은 인물을 등장시켰다고 하더라도 무려 600억명이나 살았던 '인간의 역사'에 비춰보면 사실상 극소수의 인물만을 다룬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은 현대의 유형으로 출현한 이후 600억 명이 살았다. 세계의 모든 묘지(그리고 모든 화석 부지)를 파낸다고 해도 그 잔재의 사소한 부분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그 무덤들이 아무리 광대하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아무리 굳건하다고 해도, 시간의 심연에서 피라미드의 파라오는 살벌한 습지를 짓밟았던 병사와 마찬가지로 불멸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고대 이집트의, 현대의, 그리고 인간 종 존재의 역사는 곧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조각들은 미래의 어떤 역사학자에게 그 자신의 세계를 만들었던 잊힌 경쟁들을 짐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스티브 존스,  진화하는 진화론 中에서)

도끼로부터 시작된 기나긴 '생각의 역사'에서 결론적으로 점점 더 중요성을 더해가는 쪽은 양자역학과 끈이론과 다중우주 등으로 발전해 가는 '저기 바깥'의 물질적 세계가 아니라 정작 우리 모두에게 가장 가까이 있지만 여전히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또다른 자아, 즉 '나' 쪽이 아닐까.

150여 년 전 찰스 다윈이 '먼 미래에는 ····· 심리학이 새로운 기초 위에 세워질 것'이라고 예견했던 점이나, 하이데거가 그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의 결론 부분에서 '정신의 전개의 목표는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말한 점도 '생각의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나는, 개념으로서 현존재[=있음]에 도달한 순수 개념 자체이다

정신의 실현과 더불어 정신이 부정의 부정으로서 규정된 시간 안으로 떨어져들어가는 것이 정신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정신 자체가 어떻게 이해되어 있어야 하는가? 정신의 본질은 개념이다. 헤겔은 개념을 사유된 것의 형식으로서의 종이라는 직관된 일반자로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스스로를 사유하는 사유 자체의 형식으로 이해한다. 즉 자신을 ― 비-자아의 파악으로서 ― 개념파악하는 것이다. -자아의 파악이 일종의 구별을 나타내고 있는 한, 이러한 구별의 파악으로서의 순수 개념에는 구별을 구별함이 놓여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정신의 본질을 형식적-서술적으로 부정의 부정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절대적 부정성"은 데카르트의 '나는 내가 사물을 사유한다는 것을 사유한다(cogito me cogitare rem)' ― 그는 의식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 를 논리적으로 형식화한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념은 자기를 개념파악하고 있는 이 자기의 개념파악되어 있음이다. 자기는 그러한 그것으로서 그가 있을 수 있는 바와 같이 본래적으로, 다시 말해서 자유롭게 있는 것이다, "나는, 개념으로서 현존재[=있음]에 도달한 순수 개념 자체이다."31)  "그러나 나는 첫째로 자기를 자기에게로 연관시키는 순수한 통일성인데, 직접적으로 그것[통일성]이 아니라, 내가 그 모든 규정성과 내용에서 추상되어 자기 자신과의 제한 없는 동일함의 자유 속으로 돌아감으로써 그런 것[통일성]인 것이다." 이렇듯이 자아는 "보편성"이지만 마찬가지로 직접적 ― "개별성"이다.
(562쪽∼563쪽)

31) Hegel, Wissenschaft der Logik(『대논리학』), 제2권(Lasson 편집, 1923), 제2부, S.220 참조.

 

 

정신의 전개의 목표는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도달하는 것"

정신은 그의 "진보"의 매 발걸음에서 "자기 자신을 그의 목적을 진실로 막는 적대적인 장애로서 극복해야 한다."34)  정신의 전개의 목표는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도달하는 것"35)이다. 전개 자체는 "자기 자신과의 끝이 없는 고달픈 투쟁"36)이다.

자신을 자신의 개념으로 데려오는 정신의 전개의 동요가 부정의 부정이기 때문에, 자기를 실현하면서 부정의 직접적인 부정으로서의 "시간 안으로" 떨어져들어오는 것이 정신에게 적합한 것으로 남아 있는다. 왜냐하면 "시간은, 거기에 있는, 텅 빈 직관으로서 의식에 표상된 개념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신은 필연적으로 시간 안에 나타나며, 그가 그의 순수 개념을 파악하지 못하는 동안은, 다시 말해서 시간을 말살해버리지 않는 동안은, 시간 안에 나타난다. 시간은 자기에 의해서 파악되지 않은 외적으로 직관된 순수 자기, 즉 단지 직관되기만 한 개념이다." 37)
(563쪽)

34) Hegel,『역사 속의 이성. 세계사 철학 입문』,G.Lasson 편집, 1917, S.132 참조.
35) 같은 곳.
36) 같은 곳.
37) Hegel,『정신 현상학』, 글로크너 판 전집 제Ⅱ권, S.604 참조.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中에서

 


사족) 내가 그동안 관심을 가졌던 몇몇 인물들이 생각의 역사 2 : 20세기 지성사 (색인까지 포함하면 1,328쪽)라는 매우 두툼한 책에서 '양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과연 얼마일까. 혹은 우리가 평소에 늘 관심을 가졌던 또다른 인물들은 또 몇 쪽이나 차지하고 있을까.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쯤 '접힌 부분 펼치기'를 눌러 보아도 재미있을 듯하다. 물론 두 권의 책을 미리 사두고 틈틈이 관심가는 인물들을 책 말미에 붙은 '찾아보기'로부터 거꾸로 되찾아보는 것도 (이건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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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역사 』의 '찾아보기' 전체 분량은 31쪽, 그 가운데 일부 인물들만 발췌)

게이츠, 빌 927
골딩, 윌리엄 986

괴테 94, 96, 347, 376, 406, 1026, 1108, 1123
구달, 제인 931, 933
그라스, 귄터 1087
뉴턴, 아이작 923, 1133, 1138
니체, 프리드리히 22, 70, 77, 268, 356
다이아몬드, 재러드 1152, 1155
단테 110, 357, 376, 1108, 1122∼1123
데카르트 366, 757, 758, 841, 1105
도스토예프스키, 피요도르 505

도킨스, 리차드 945∼946, 948, 999, 1040, 1059, 1061
드 발자크, 오노레 368
드 생텍쥐페리, 앙투안 520
드 세르반테스, 미구엘 368
디킨스, 찰스 1108, 1121
디킨슨, 에밀리 1108
라캉, 자크 957, 959, 1176
라흐마니노프, 세르게이 555
러셀, 버트란드 1038, 1167
러스킨, 존 70, 817, 515
로크, 존 1105
롤스, 존 950, 998, 1031
루소, 장 자크 1105
루쉰 279, 281
루스벨트, 프랭클린 D. 507, 531
루터, 마르틴 461
릴케, 라이너 마리아 291, 356, 379, 514
마그리트, 르네 322
마르케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1081∼1082, 1087
마르크스, 카를 925, 1018
마티스, 앙리 17, 104, 202∼203, 229, 544, 550
말러, 구스타프 69, 94, 99, 215, 249
말로, 앙드레 105, 520, 522, 550
멜빌, 허먼 1118
모노, 자크 945
모차르트 488
몽테뉴 1108
밀러, 헨리 817
바그너, 리하르트 906
반 고흐, 빈센트 102, 203, 515
벌린, 이사야 990
베르그송, 앙리 22, 48, 106, 117, 127, 322, 453, 457, 631
베르길리우스 1122
베이컨, 프랜시스 18
벤담, 제레미 1037
벤야민, 발터 369, 513, 791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25, 379, 384, 522, 600, 984
브로델, 페르낭 962, 1084, 1125
브론테, 샬롯 432, 817
비트겐슈타인, 루드비히 960, 989
사르트르, 장 폴 959, 966
성 아우구스티누스 1119
소잉카, 월레 1091
손택, 수잔 907, 975, 1013∼1014
솔제니친, 알렉산드르 71, 744, 832∼833
쇤베르크, 아놀드 20, 69, 97, 411, 206, 227, 251, 301, 360, 488, 553, 555
쇼, 조지 버나드 456, 528
쇼펜하우어, 아르투어 71
스미스, 아담 998
스타인베그, 존 133, 463, 540
스트라빈스키, 이고르 110, 207, 227, 313, 416, 554∼555
스펜서, 허버트 74, 279, 457, 699
아렌트, 한나 907, 1169
아인슈타인, 알베르트 1032
아체베, 치누아 1080, 1092
알튀세, 루이 959, 961, 969, 1176
에른스트, 막스 257, 319, 487, 544∼545, 551, 785
오스틴, 제인 431, 697, 816, 1108
오웰, 조지 1103, 1172, 1176
울프, 버지니아 1082, 1122, 1162
윌슨, 에드워드 O. 945∼947, 999
융, 카를 구스타프 34
제임스 윌리엄 914, 1026, 1180, 1182
조이스, 제임스 1082, 1104
졸라, 에밀 48, 77, 295, 329, 385, 508
찰스 다윈 20, 73, 86, 183, 279, 538
찰스 디킨스 295, 316, 697, 896
채플린, 찰리 23, 226, 363, 416
처칠, 윈스턴 345, 529, 570, 597, 603, 661
체호프, 안톤 1091
초서 1108
촘스키, 노암 907, 964, 985, 1076, 1157
츠바이크, 슈테판 54, 79, 358, 478, 549
카프카, 프란츠 20, 168, 285∼286, 373∼374, 375∼377, 540, 647, 649, 775, 831, 1084, 1101, 1108, 1162
칸트, 임마누엘 68, 117, 125
콘래드, 조셉 1094, 1122, 1177
퀴리, 마리 48, 211, 41, 508, 943
크릭, 프랜시스 942, 1072, 1073, 1076
클린턴, 빌 1001, 1116
클림트, 구스타프 65, 98∼99, 218, 249
키에르케고르, 쇠렌 213

톨스토이 368, 502, 1108
파인만, 리처드 1134, 1175
포스터, E. M. 273, 556
푸앵카레, 쥘 앙리 154, 211
푸코, 미셸 961, 1015, 1039
프랭클린, 벤저민 560
프롬, 에리히 354, 429, 475, 480, 551, 585, 669, 675, 774, 778
프루스트, 마르셀 17, 20, 55, 218, 291, 313, 371, 631
플라톤 1027, 1105, 1115, 1122, 1179
피츠제럴드, F. 스콧 310, 338, 540, 703
피카소, 파블로 47, 103, 202, 205, 228, 248, 313, 520, 522, 550, 633
핀커, 스티븐 1059, 1064
하버마스, 위르겐 971, 1029, 1176
하이데거, 마르틴 60, 71, 366, 479, 482, 585, 631, 774
하이에크, 프리드리히 폰 990, 1006, 1018
헌팅턴, 새뮤얼 1177
헤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디리히 354
헤로도토스 35, 1115, 1121
헤밍웨이, 어니스트 338, 444, 520∼521, 540, 633
호메로스 1110, 1122∼1123
화이트헤드, 앨프리드 노스 289, 423, 696
후설, 에드문트 59, 112, 127, 366, 368, 631, 774
후쿠야마, 프랜시스 1154∼1155, 1165
휘트먼, 월트 1108, 1110
흄, 데이비드 1039, 1122

히틀러, 아돌프 77, 94, 250, 257, 272, 350, 377, 387,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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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끼에서 시작된 호모 파베르의 진화
    from Value Investing 2013-01-08 10:44 
    (밑줄긋기) 1859년1859년 5월 에번스와 프레스트위치는 아브빌의 부셰 드 페르테스와 헤어져 귀국했다. 석기의 용도, 중요성, 타당성은 더 이상 부정하거나 오해할 수 없었다. 유럽 전역의 고생물학자, 고고학자, 지질학자들이 그 구도를 지지했다. 하지만 혼란의 여지는 여전히 있었다. 퀴비에의 후계자인 에두아르 라르테는 프레스트위치처럼 인간의 역사가 오래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러나 라이엘은 오랫동안 그 생각에 반대했다(그가 찰스 다윈에게 편지를 보
 
 
페크pek0501 2012-12-04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페이퍼를 올리시다니... 이걸 본 사람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이 스칩니다.
생각의 역사2에 관심이 가는데, 이것을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것 같습니다. ^^
검색해 보겠습니다. 좋은 글 읽고 갑니다.

oren 2012-12-04 16:08   좋아요 0 | URL
제 글을 보고 『생각의 역사Ⅰ』,『생각의 역사Ⅱ』까지 클릭하셔서 자세한 책소개를 살펴보신 분들은 '운이 좋다'고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책값이 아직까지도 반값이거든요. ㅎㅎ

소장하기도 좋고 (부피만 제외한다면) 읽기에 큰 어려움도 없고, (저자가 고고학을 전공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고고학자를 따라 탐험을 나서는 느낌도 들고 해서, 나름대로 꽤나 '흥미진진한 대목'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재미있고 유익한 책 같아요..
 
칸트, 데카르트, 스피노자, 의지와 표상, 자유의지


최근에 부쩍 관심을 가지게 된 문제 하나는 '시간'에 관한 것이다. 시간이란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정 한쪽 방향으로 흐르기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은 마치 레코드판이 돌듯이 끊임없이 제자리에서 순환하기만 할 뿐이고 모든 '존재'들은 어쩌면 인식의 한계 때문에 '시간'이 계속 흐르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셀 수도 없을만큼 오래전부터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사유해 왔던 그 '시간'에 대해 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이 머리를 싸매고 잠시나마 그것에 대해 탐구해 본들 어디 희끄무레한 윤곽이나마 건질 수는 있는 것일까.

아무튼 내가 최근에 읽었던 몇 권의 철학책들은 '시간'에 대한 놀라운 생각의 일면들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어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 책들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등이다. 특히 최근에 읽은 베르그송의 책은 '시간'에 관한 무척이나 놀라운 사유들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저작과 그의 생애를 살펴보니 그가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라는 20세기 전반의 가장 위대한 소설을 쓴 마르셀 프루스트와 매우 가까운 친척이었다는 걸 알고 한번 더 놀랐다(그는 1892년에 프루스트의 사촌누이인 루이즈 뇌부르주와 결혼했다). 하기야 나는 아직까지도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소설을 전혀 접해보지도 못했으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다만 프루스트의 소설이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보니 그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과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는 어렴풋이라도 전해 들은 게 없지는 않다.

 

이것은 서양 언어로 씌어진 일급의 소설들 중 가장 긴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만큼 보람도 크다. 만약 독자가 이 소설에 마음이 끌린다면(마음이 끌리지 않는 독자가 더 많을 것이다), 앞으로 5∼10년 사이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이 책을 읽어 그것을 독자의 내면세계에 흡수하면 좋을 것이다.

『율리시스』의 주인공은 더블린이라는 장소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은 시간이다. 예술에다 "시간의 형태"를 집어넣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답변하는 것이 프루스트의 목표였다.

나는 결론으로 당대의 미국 1급 평론가였던 에드먼드 윌슨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프루스트에게서 우리 시대의 탁월한 정신과 상상력을 만난다. 프루스트는 그 위력이나 영향력에 있어서, 니체, 톨스토이, 바그너, 입센 같은 한 세기 전의 예술가들에게 버금가는 우리 시대의 예술가이다. 그는 상대성의 관점에서 소설의 세계를 재창조했다. 그는 문학 분야에서 현대 물리학의 새 이론(양자 이론)에 버금가는 새로운 글쓰기 이론을 제공했다."


 

이달은 마침 프루스트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90주년이 되는 때이다(프루스트는 1922년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베르그송은 그보다 19년 후인 1941년에 81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두 사람 모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학문 연구와 작품 저술에 몰두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특히 인간 내면의 의식을 쫒아 놀라운 탐구를 이룩한 점이 인상적이다. 사실 프루스트의 그 방대한 소설을 전혀 읽어보지도 않고 이런 글을 쓴다는 게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베르그송의 주저인『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감명깊게 읽었고, 특히나 그 책 속에서 마치 프루스트의 소설을 미리 예견이나 한 듯한 대목까지 발견할 수 있어서 더욱 놀라웠고,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이런 무모한 글을 쓸 용기를 내었는지도 모른다.

프루스트가 자전적 에세이를 소설로 바꾸어 제1부 <스완네 집 쪽으로>를 발표한 건 1913년인데, 베르그송의『시론』이 출간된 건 이보다 무려 24년 전인 1889년이었다. 『시론』의 제2장에서 베르그송은 '자아의 두 측면'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치 프루스트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이제 어떤 과감한 소설가가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교묘하게 짜인 직물을 찢고 그러한 외견적 논리 아래에서 근본적인 부조리를 보여주고, 단순한 상태들의 그와 같은 병치 아래에서, 명명하는 순간 이미 존재하기를 멈추어 버렸던 수만의 다양한 인상들의 한없는 침투를 보여주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우리의 감정을 동질적 시간 속에 펼쳐 놓고, 그 요소들을 말로 표현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그 역시 그의 차례가 되어 우리에게 그 감정의 그림자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단,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그림자를 투사한 대상의 특별하면서도 비논리적인 본성을 의심케 하도록 그것을 배치했다. 표현된 요소들의 본질 자체를 이루는 그런 모순, 그런 상호 침투의 뭔가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를 반성으로 초대했다. 그에 의해 고무되어 우리는 잠시 우리와 우리 의식 사이에 개입시킨 막을 걷어 제쳤다.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 앞에 다시 세운 것[뿐]이다.(170쪽)



베르그송은 이 대목에 조금 앞서 '질적인 시간과 양적인 시간'을 구분할 필요성을 제기하면서는 마치 '소설의 한 장면을 금방이라도 펼쳐내 보일 듯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령 내가 [앞으로] 살 도시를 처음으로 산책할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나에게, 지속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인상과 끊임없이 수정될 인상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나는 매일 같은 집들을 보며, 또 그것들이 동일한 대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들을 끊임없이 동일한 이름으로 부르고,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나에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난 후 처음 몇 해 동안 느낀 인상을 돌이켜 보면, 그 속에서 일어난 독특하며 설명할 수 없고, 특히 표현할 길 없는 변화에 놀란다.122) 내가 계속 지각했고 나의 정신 속에서 끊임없이 그려지던 그 대상들이 결국에는 나로부터 나의 의식적 존재의 무엇인가를 빌린 것처럼 보인다. 나처럼 그것들도 살았고, 나처럼 그것들도 늙었다.(166쪽)

122)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가령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커서 가 볼 경우이다. 그 길이, 그 집이 그렇게 좁고 작았던가 하고 놀라게 된다. 이 경우는 그 차이가 너무나 크므로 쉽사리 말로 표현되지만, 그 느낌의 차이는 사실 단지 좁다든지 작다든지 하는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무한히 복잡한 감정의 복합체이다. 이것이 가령 20대에(키가 다 자란 다음) 살던 곳을 40대 정도에 가보는 경우라면 훨씬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분명히 느낌의 차이는 있다. 어쨌든 이러한 현상은 그 집, 그 동네에 관한 인상이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라 변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 분명하다. 



이쯤에서 다시 '철학자' 베르그송에 대한 '전반적인' 인물 탐구와 그의 다른 저작들에게까지 관심을 더 확대시켜 보자.

"나의 저서들은 이제까지 학설에 대한 나의 불만과 항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베르그송의 이 말은 그가 살던 시대에 팽배했던 '과학만능시대'의 사상적 조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 말이다. 그는 과학의 밑바탕이 되는 '이성과 지성의 오류와 한계'를 예리하게 파고 들어갔으며, 수학과 과학에 대한 천재적 재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그는 파리의 콩도르세 고등학교 재학시 전국 고등학교 경시대회에서도 라틴어, 프랑스어 논문, 수학에서 일등상을 탔을 만큼 문과와 이과에 아울러 특츨하였고, 교교 재학시 그가 수학과 기하학에 관해서 풀었던 해답이 《파스칼과 현대기하학》이라는 수학전문잡지에 실릴 만큼 뛰어났다.  파스칼이 말한 '기하학 정신'과 '섬세정신'을 아울러 갖춘 사람이 그였다.) 그당시 모두가 경시하던 형이상학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였으며, 결국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그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해 왔던 '시간'에 대해 전혀 새로운 차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베르그송이 자기 철학의 실마리를 발견한 것은 젊은 철학교사였던 22세 때, 스펜서를 읽고 과학철학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몇 가지 과학적인 기본개념에 대한 검토를 하게 되면서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놀라운 생각'에 대해 그는 훗날 절친으로 지내게 된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고 한다.

'대단히 놀랍게도 나는, 과학적인 시간이란 지속하지 않고, 만약 실재의 총체가 순간적으로 모두 전개된다 하더라고 우리의 과학적 지식에는 조금도 수정할 것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같은 발견 이후로 그의 주요관심사는 '시간보다 지속'으로 향했고, 엘레아 학파의 제논의 궤변에 관한 논리정연한 반박을 포함한 '순수지속'의 개념을 처음으로 주창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이라는 논문을 집필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가 30세 때 박사학위논문으로 쓴 이 저작은 과학적 엄밀성을 기본 바탕으로 삼아 예리한 직관력과 치밀한 분석 위에 쓰여졌음은 물론이고, 양과 질에 대한 혼동, 운동과 동시성, 과학적 시간과 순수 지속에 관한 독특한 사유를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그의 제1주저로 꼽히는 이 저작의 주제는 '자유'에 관한 것이다(그래서 그가 직접 관여한 이 책의 영어 번역본 제목은『시간과 자유의지(Time and Free Will)』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유의 문제는 결국 시간의 문제이며 시간의 문제는 의식의 문제라고 보아 의식이란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파헤친다. 그리고 의식의 강도(强度)란 무엇인가를 분석함으로써 의식이 결국 양이 아니라 질임을 보여 준다.

그는 의식을 '흐름'에서 고찰하는데, 거기에서 그는 흐르는 시간과 흘러간 시간을 구별하여 흐르는 시간만이 진정한 시간이며 흘러간 시간은 다름아닌 공간임을 보여 준다. 베르그송이 '의식의 흐름과 순수지속'을 다룬 부분은 달리 표현하면 '시간론'으로 불릴 수도 있는데, 하이데거 역시 그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시간'에 관해 깊이 천착해 들어간 부분에서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의 '시간 개념'을 폭넓게 다루고 있으며, 특히 칸트의 시간 개념과 아울러 베르그송의 독특한 시간 개념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아무튼 베르그송이『시론』에서 내린 결론을 다시 강조하자면 결국 '자유란 내적 자아에 철저한 것'을 말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평소 생각하기보다는 이야기하며, 행동하기보다는 행동되고 있다. 자유로이 행동한다는 것은 자아를 되찾는 일이다. 그것은 자아를 순수지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의식이란 결국 기억이다. 그가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이라는 완전히 이질적인 두 존재를 어떻게 하여 결합할 수 있을까, 하는 철학의 근본문제를 다룬 제2의 주저는 그래서《물질과 기억》이다. 그에 따르면 이 문제를 만약 공간의 입장에서 논하여 물질을 연장적인 존재, 정신을 비연장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시간의 입장에 서서 논한다면 해답을 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밖에 제3, 제4의 주저를 포함하는 베르그송의 철학적 사유를 간략히 요악한 다음 글이 유용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베르그송은 자신의 방법을 써서 우선 자아의 내부를 비춰 보았고, 그 결과가 그의 첫 저작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이다. 그 다음에는 육체와 정신과의 관계를 다룬 《물질과 기억》, 그러고는 그 방법을 생명 현상에 확대 적용하여 《창조적 진화》를, 그리고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도덕에 대한 고찰인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제1주저는 심리학에 관한 저술이고, 제2주저는 생리학적인 저술이며, 제3주저는 생물학적인 저술이고, 제4주저는 사회학적인 저술이다. 그 나머지 저서는 대개 어떤 주저(主著)를 보충하거나 강연을 모은 형식이다.(742쪽) 




베르그송은 우리의 심적 상태는 공간적이지도 않고 동질적이지도 않게, 이질적인 의식상태들이 한데 융합되어 이루어졌고, 그들은 서로 분명한 구분을 지을 수 없는 의식상태들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심층자아' 또는 '진정한 자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심층자아'는 일련의 의식상태의 질적 변화로 이루어진다. 그 상태들은 뚜렷한 윤곽도 지을 수 없고 수(數)로 표시할 수도 없이 서로 침투되고 융합된 채로 속하는 바, 그것이 바로 순수지속이다. 그와 같은 순수지속은 공간화된 시간과 구별되어야 한다. 후자가 일정한 양적인 구분에 의하여 표시되는 외면적이며 동질적인 시간인 반면, 전자는 진정한 시간, 실재적인 시간으로서 체험적이고 창조적이며 사상적이다. 그 순수지속은 베르그송 자신이 '우리의 자아를 자기 자의의 상태로 둘 경우, 우리 의식 제상태의 연속이 취하는 형태 또는 질적인 변화의 연속으로서, 그 변화는 서로 용해되며 분명한 윤곽이나 어떤 수(數)와의 연관도 갖지 않는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엘랑비탈(생의 비약)'으로 대표되는 생명철학이라고 규정하여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가 문학에 끼친 영향 또한 그에 못지 않다고 평가받는다.
 

  

내적 자아, 심층자아와 내적 지속에 대한 그의 이론은, 외적 조형미의 부각에 힘쓰던 문학으로 하여금 자기 내부의 무의식 세계로 그 시선을 돌리게 하여 상징주의의 개화와 함께 내면문학의 붐을 촉진시켰고, 그의 직관주의는 방대한 반지성적 경향의 움직임을 태동하게 하였는데, 그 대표가 시인 페리(Charles Peguy)였다. 문학비평에서도 티보데(Thibaudet)를 통하여 그의 형향이 뚜렷이 드러났으나, 가장 중요한 영향은 프루스트(Proust)에 대한 영향이라고 하겠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은 바로 그의 지속을 가리키고 있고, 끊일 줄 모르고 무한히 계속되는 그의 문장은, 끊임없이 생동하는 내면세계의 지속을 포용하는 문장으로서 베르그송적인 문체를 대변하고 있다.(750쪽) 



우리가 베르그송의 철학논문을 읽든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든 혹은 또다른 많은 책들을 끊임없이 찾아 읽든 그것은 결국 '내면의 자아'를 찾아 나서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패디먼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여기 이 순간의 세상에 집착하는 예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내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비록 명확하게는 아닐지라도-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저 오랜 인류의 역사로부터 어떻게 하여 이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위대한 사상들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이쯤에서 내게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오른다. 내가 한동안 관심을 가졌던 그 '시간'을 정말 제대로 찾을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프루스트의 그 방대한 소설을 읽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어쨌든 나도 '앞으로 5∼10년 사이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소설을 꼭 읽어봐야겠다. 내 나이 환갑을 넘기기 전에. 그리고 프루스트가 세상을 떠난지 100주년이 다 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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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속의 입장에서 '결정론'을 비판하고 '자유의 문제'를 해소한 책
    from Value Investing 2012-12-18 09:37 
    자유에 관한 모든 해명의 요구는 생각지도 않게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환원된다. 즉, <시간은 공간에 의해 충분히 표상될 수 있는가?> - 거기에 우리는 대답한다. 흘러간 시간에 관한 것이라면 그렇지만, 흐르고 있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그런데 자유로운 행위는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일어나지, 흘러간 시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는 하나의 사실이며,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들 중에 이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다. 문제의
 
 
blanca 2012-11-15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평생독서계획>에서 저 구절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번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새로 발간되고 있던데 그래도 좀처럼 엄두는 안 나네요.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될지요. 마들렌 냄새 관련 대목이 너무 자주 인용되어서 그 대목만이라도 꼭 읽어보고 싶어요.

oren 2012-11-15 11:06   좋아요 0 | URL
프루스트의 소설이 새로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는 소식은 저도 들었어요. 특히 내년이 되면 이 소설이 특별히 많이 팔릴 지도 모르겠구요. 저도 아마 내년 쯤이면 이 책을 사서 펼쳐보고 있을 꺼 같아요. 아무튼 책 소개글만 봐도 흥분되고 설레게 만드는 소설임은 분명한 것 같아요.
* * *
(알라딘 책 소개글)
2013년,「스완네 집 쪽으로」출간 백 주년을 맞아 민음사에서는 프루스트의 전 권 완역 출간을 준비 중이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프루스트 전공자’인 김희영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가 “프루스트 전공자로서 사명감과 용기를 가”지고 번역에 모든 정열과 노력을 쏟은 작품이다.

알랭 드 보통 : 한 인간 삶의 가장 완벽한 재현
앙드레 모루아 :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
T.S.엘리엇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더불어 20세기 2대 걸작 중 한 편이다. 이들을 읽지 않고 문학을 논할 수 없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 한없이 다시 읽고 또 읽고 싶은 작품.

불꽃나무 2012-11-15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또한 시간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매우 유익한 글이네요. 잘 읽고갑니다.^^

oren 2012-11-15 19:06   좋아요 0 | URL
불꽃나무님 반갑습니다.
제 허접한 글에 대해 유익하다고 말씀해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날씨가 제법 차가워졌지만, 그래도 늘 따뜻하고 좋은 '시간' 가지시길 바랄께요~

페크pek0501 2012-11-16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오래 전에 한 권짜리 단행본으로 읽었는데(300쪽 넘는 책으로 작은 글씨였음),아마 완역본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민음사에선 두 권짜리로 나와 있네요. 저는 그걸 별로 재밌게 읽지 않은 게 기억이 나요.
그런데 어느 책에서 인용된 글을 보고 참 좋은 글이 들어 있었구나, 했던 적도 있어요.
인용을 잘 해 놓은 걸 보면 그 작품을 다시 읽고 싶어지곤 해요. 오렌 님의 글도 그렇군요.
언급하신 것들을 읽고 싶은 생각이 팍팍 듭니다. ^^

oren 2012-11-17 12:48   좋아요 0 | URL
이번에 민음사에서 두 권짜리로 나온 건 1편「스완네 집 쪽으로」인데, 7편「되찾은 시간」까지 완간하기 까지는 몇 년이 더 걸릴 것 같아요. 알랭 드 보통은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이라는 책에서 '어렵고 난해하고 산만하다는 평이 지배적인' 이 책을 우리가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는 까닭은, '프루스트처럼 세상에 대한 섬세하고도 호기심이 충만한 시각과 시야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했답니다. 저도 이번 기회에 민음사에서 나온 두 권의 책과 청미래에서 펴낸 알랭 드 보통의 저 책(2005년에 다른 출판사에서 간행된 책 제목은『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은 구매해 놨는데 언제즘 다 읽을지는......
 
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한 인간의 비전이 3,000년의 역사를 아우를 수 없을 때,
그는 미망의 어둠 속에서 헤메이면서, 그 시대의 한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
.
  - 괴테


 * * *

2주전 주말에 동네 도서관에서 (열람실에 앉아서 내가 가져간) 책을 읽다가 문득 칸트의『순수이성비판』이 생각나서 (도서실로 내려가서) 그 책을 찾아 펼쳐보게 되었다. 그건 순전히 쇼펜하우어 때문이었는데, 그의 책『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칸트 철학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전제'로 하고 쓰여진 책이었던 데다가, 더군다나 쇼펜하우어의 책을 다 읽고 나서까지도 정작 '칸트'의 그 어려운 책은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물론 대학1학년때 철학개론 과목을 수강하면서 레포트를 잘 써 볼 요량으로 그 책을 읽고 이해하려 무진 애를 쓰던 기억은 뚜렷이 남아 있다)

어쨌든 짧은 몇 시간 동안에 '칸트의 철학'을 얼마간 이해해 보겠다는 심보 자체가 헛된 욕심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순수이성비판』의 서문을 30여 년 만에 다시 읽어보는 건 무척이나 '흥분'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칸트의 그 책은 마침 '신착도서 코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는데, 내가 작년 12월에 그 도서관에 '기증한 책들'이 그 코너에 새로 비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칸트'를 만나러 갔다가 '내가 기증한 도서'와 '칸트'를 한꺼번에 마주친 셈이었다.

내가 난생 처음으로 '기증한 도서들'은 그동안 '일정한 작업'을 거친 끝에 드디어 도서관을 찾는 일반인들의 손에도 들려질 수 있게 된 것이었는데, 그 책들이 내가 모르는 '남들의 손에 들려' 읽힌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아마 내가 맛본 감정은 책을 펴내는 작가들의 심정과도 비슷한 종류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어쨌든 몇몇 책들은 이미 '대출'이 되었는지 공간이 살짝 비어 있기까지 했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그 책들을 빌려볼까 몹시도 궁금해진다.

나는 여태까지 살면서 가끔씩 주위 사람들에게 책을 선물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공공도서관에 책을 '기증'해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기증'이라는 행위가 가져오는 이런 부수적인 효과와 묘한 감정상태는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내가 동네 도서관에 기증한 책은 '동서문화사 월드북 전집' 179권과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250권이었는데, 마침 동서문화사의 월드북 전집은 동네 도서관에도 불과 몇 권밖에 갖춰지지 못한 걸 미리 확인해 두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매우 유용하게' 활용될 듯싶은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그 도서관에 비치되는 게 아니라 올해 새로 개관 예정인 인근의 신설도서관에 비치될 예정이라는 '연락'까지 받아놓은 상태여서, 내가 기증한 250권의 문학전집까지 내 눈으로 직접 살펴볼 수 있는 즐거움은 나중으로 미뤄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경우는 어쩌면 '신설도서관'에 더욱 어울릴 지도 모르겠다 싶다. 왜냐하면 새로 개관하는 신설 도서관의 경우 사정상 처음부터 여러 도서가 구색에 알맞게 제대로 갖춰지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그런 신설도서관이라면 그나마 내가 기증한 책들이 아주 조금은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새로 생겨나는 도서관의 개관과 함께 내가 기증한 새 책들도 오랜 세월동안 그곳에서 함께 머물면서, 도서관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상상하니 그것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싶다.






1.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 제1자료실에 비치된 모습(문학, 역사, 종교, 과학 등)




이 책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모습을 대하니 마치 이 책의 저자들이 '여기에' 다시 모여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리고 우리 인류의 빛나는 정신적 유산을 남겨준 그 '인물들'에게 우선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고 싶고, 또 저
걸작들을 '죽기 전까지' 모두 다 들춰 보고 읽어 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 본다.


2. 모비딕,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984년/동물농장, 백년의 고독, 노인과 바다 .....




3. 아라비안나이트, 율리시스, 전쟁과 평화, 역사의 연구, 로마제국쇠망사......




4.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의 산, 월든, 테스, 제인 에어, 이방인, 돈끼호떼, 괴테와의 대화......




5.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 제2자료실에 비치된 모습(철학, 정치학, 경제학)



6. 아리스토텔레스, 세네카, 아우렐리우스, 키케로, 베이컨, 몽테뉴, 홉스, 칸트, 쇼펜하우어......




7.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 스피노자, 파스칼, 루소, 베이유, 오르테가 이 가세트......




그런데 저 많은 걸작들 가운데 정작 내가 지닌 책들은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로는) 달랑 6권 밖에 안된다. 그렇지만 동서문화사가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월드북'에 해당하는 책들도 얼마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8. 내가 지니고 있는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



9.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전들 ①
 




10.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전들 ②




11. 묵직한 몸무게를 지닌 '월드북 시리즈'에 해당하는 책들
    
(저 책들은 아직도 여러 권이 때묻지 않은 상태로 주인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12. '월드북 시리즈'는 그 가치에 걸맞도록 항상 책장의 맨 오른쪽 상단에 꽂아둔다(그곳이 상석이다)




13.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더라도 '가장 멀고도 높은' 맨 안쪽 창가에 배치



가끔씩은 이런 '주옥같은 고전'들을 이렇게 한번 쭉~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리고 동네 도서관의 열람실에 앉아 (내가 가져간) 책을 읽는 동안에도, 가끔씩은 '괜스레' 도서실로 내려 가서 저런 두툼한 고전들을 가끔씩 들춰도 보고 어루만지며 '책이 주는 즐거음'을 느껴 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고전 속에 담긴 이런 저런 구절들을 우연히 스치듯 마주치며 읽으면서 마치 그 책의 저자들과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은 '느낌'까지도 들 때가 있는데 그런 즐거움은 '훌륭한 고전들이 어느 정도 갖춰진 도서관'이 주는 독특한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이 책들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길동무이다. 한번 당신의 내부에 자리 잡으면,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당신의 내부에서, 외부에서,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꾸준히 작용한다. 우리가 친구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서두르는 법이 없듯이, 이 책들도 서둘러 읽어서는 안 된다. 이 리스트는 '단번에 슥 훑어보는" 그런 리스트가 아니다. 엄청나게 풍요로운 의미가 담겨 있기에 평생에 걸쳐서 캐내야 하는 광산 같은 것이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中에서

 

그리고 틈날 때마다 그 '광산'에 들어가서 열심히 곡갱이질을 계속 하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삶의 여러 예속'으로부터 조금은 더 멀리 벗어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우리는 여기 이 순간의 세상에 집착하는 예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내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비록 명확하게는 아닐지라도-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저 오랜 인류의 역사로부터 어떻게 하여 이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위대한 사상들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또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항으로서, 고매한 사상과 느낌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中에서

 

  

그리고......

이런 책들을 나이 오십이 넘도록 '반의반'도 읽지 못한 나 자신을 돌아보면 문득 '짜증'도 나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너그럽게 나 자신을 바라 본다면 가끔씩은 나 자신이 대견스러울 때도 없지 않아 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그리고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Ego mihi placui(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워)."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된다.

 -『평생독서계획』, '역자의 글' 中에서



<2012년 2월 현재까지 내가 읽은 고전 가운데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와 겹치는 책들>
(다른 출판사의 판본을 통해 읽은 책들이 많지만 '월드북 시리즈'의 이미지와 상품으로 표시해 본 것임)

 








































































 

 

 

 







































 
















 



 











14. 나름대로 '우선순위'를 고려해서 노트에 적은 '읽고 싶은 책 목록'
     (비록 진도는 느리지만 한 권 한 권 꾸준히 읽다 보면 언젠가는......하는 희망을 가져 본다)

 


내가 하루가 멀다 않고 줄기차게 쏟아져 나오는 '재미있는 신간들'을 애써 외면하고 유별나게 '고전'을 찾아 읽으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또 읽기 힘든 '고전들'이 대부분인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와 같은 책들을 굳이 지역 도서관에 기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고전이 지니는 불멸의 가치'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끝으로 '한 권의 책'에 대한 소로우의 인상깊은 글을 인용함으로써 잡다하고 두서없는 내 글을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싶다.


한 권의 책과 새로운 기원

 모든 책이 다 독자들만큼 따분한 것은 아니다. 어떤 책에는 어쩌면 우리의 현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들이 들어 있을 가능성도 크다. 만약 우리가 이 말들을 정말로 듣고 이해할 수만 있다면 아침이나 봄보다 우리의 삶에 더 큰 활력을 줄 것이며, 우리에게 사물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줄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기 인생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우리의 기적들을 설명해주고 새로운 기적들을 계시해줄 책이 어쩌면 우리를 위하여 존재할 가능성은 크다. 지금 내가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어느 책에 표현되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들이 일찍이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도 제기되었다. 한 문제도 빠짐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들 현인들은 저마다 이 질문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또 자기 고유의 언어와 생활 방식으로.(P155)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中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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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진에 담아본 두꺼운 책들
    from Value Investing 2012-12-26 00:56 
    2012년 12월...어느덧 한 해가 저문다. 해야 할 일도 많았고 바라던 일들도 많았는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다. 이대로 또 한 해를 넘기자니 아쉬움이 너무 많다. 이쯤에서 문득 어느 책에서 읽었던 키케로의 말이 생각난다.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그리고 셰익스피어 드라마에 나온다는 대사도 떠올려 본다."이 한심한 화상아!"책장을 살펴보니...방 한켠 책장에 담긴 책들과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2. 오늘 도서관에서 만난 책, 그리고 스쳐 지나갔던 도서관 밖 풍경들
    from Value Investing 2014-12-01 20:45 
    어제 오후 : 스마트폰에 담긴 사진을 북플에 옮겨 담아 보았다.오늘 저녁 : 북플로 올린 글을 '알라딘 서재'에서 조금 수정하고 사진 한 장을 덧보탰다.사진이 담긴 시간 : 2014/11/30 오후 4:14 ~ 2011/10/30 오후 8:291. 내가 자주 가는 고양시립 원당도서관 풍경. 내가 사는 곳에서 6lm쯤 떨어져 있고, 무척 오래된 낡은 도서관이지만 무엇보다 조용해서 좋다. - 2014/11/30 오후 4:14 2. 너무 지니친 감이
  3. 읽은 책과 읽지 못한 책들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7-02-11 01:29 
    내가 한창 '청춘'을 보낼 때의 일이 문득 떠오른다. 그때 나는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뭔가 모를 불안을 느끼곤 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갑작스레 병역을 마치기 위해 군에 입대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지금 한창 공부를 하고 있을 텐데, 나만 혼자 전방부대에서 낙오자처럼 뒤로 처져 허송세월을 보내는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걱정을 했더랬다. 그래서 그때 갑자기 책을 붙잡고 읽기 시작했다. 반쯤은 '공부삼아서' 그랬다고 쳐도 좋았다.PX에서 구
 
 
양철나무꾼 2012-02-0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서재 자랑 때도 한번 봤었는데...그때보다 책이 더 늘어난 것 같아요.
가지런히 잘 정리된 것이...도서관 같지 뭐예요~^^
서재만 보고 있어도 뿌듯하고 배 부른걸요.

전 읽은 책은 책꽂이에 자리를 만들어 꽂아주는데,
안 읽은 책은 책등이 보이게 박스에 덩치로 쌓아두거나,
책꽂이에도 눕혀꽂는 버릇이 있어서 아주 지저분한데 말입니다여~

다행히...읽은 책도 '쫌' 보이는군요~^^

oren 2012-02-08 20:57   좋아요 0 | URL
'책장'만 보면요..배가 부르지 않고 안 읽은 책들이 자꾸 눈에 밟혀요.
그래서 '머리'쪽으로 불쾌한 자극, 말하자면 '짜증'이 조금씩 느껴질 때가 많아요... 쩝

양철나무꾼님께서 읽으신 책들은 얼마나 많을지... 전 '쫌' 가늠이 잘 안됩니다. ㅎㅎ

마녀고양이 2012-02-09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장 사진만 보고 일단 너무 행복하구요,
그다음에 기증하셨다는 말씀과 그 책을 보면서 다시 행복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첫줄과 두째줄 사이에, 저 책들을 제가 갖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음을 솔직하게 시인합니다.

소장하신 책의 일부와 저랑 겹치는 것을 보며, 제가 조금은 따라간 듯 하여 뿌듯해지고 있기두 하구요. ^^


oren 2012-02-09 12:54   좋아요 0 | URL
제가 저 '책장이 있는 방'에서 지낸지가 12년째인데, 처음 이사올 때만 하더라도 '자그만 책장' 하나밖에 없었답니다. 2004년쯤엔가 저 책장을 들여다 놨는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책장이 텅텅 비어 있다시피 했었답니다.(가만 생각해 보니, 저 책들의 대부분을 알라딘을 통해 샀고, 기증도서 429권도 '역시 알라딘'을 통해 샀으니, 여기 알라딘 서재에서 월세 한푼 내지 않고 장기간 지내더라도 쫒겨날 걱정은 안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읽은 책은 그리 많지 않지만, 외관으로는 이제사 제 방 한쪽 벽면을 채울 정도가 되었네요.

마고님께서도 책을 정말 많이 읽으시고, 또 책에 대한 욕심도 대단하신 걸로 들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가진 책의 일부가 마고님이랑 겹친다고 하면, 그건 제가 마고님을 '따라간' 걸로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페크pek0501 2012-02-1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은 정말 잘 생겼어요. 책보다 더 잘 생긴 사람을 보지 못한 것 같아요.
책이 있는 풍경, 멋져요!!!!! 책장에 있는 책들은 보기만 해도 마음 풍성해지게 해요.
오렌님은 먼 훗날, 그러니까 퇴직하고 집에 계셔도 쓸쓸하거나 심심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저 책들을 읽으면서 그 독후감을 이 서재에 올리시면 될 테니까요. 이것으로 노후대책 끝, 아닌가요?
(돈은 많이 벌어 놓으셨을 것 같아서요. 킥킥...)

어쨌든 미남미녀들의 책 모습을 실컷 구경하고 가요. (다음에 몰래 또 와서 봐야지 ㅋ)

oren 2012-02-13 22:43   좋아요 0 | URL
책이란 정말 마법과도 같아요.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올릴 수 있는 저 아담한 외형 속에 어마어마한 것들을 담고 있으니까요. 지구가 생긴 이래 이 세상을 살다 간 모든 인류의 수를 다 헤아리면 아마도 수백억 명쯤은 될텐데, 그 가운데 인간정신이 도달할 수 있었던 가장 높은 경지를 보여준 '불과 수백명'의 위대한 인물들의 생각들을 저렇게 '좁은 공간'에 간단히 다 모아놓을 수 있는 것도 결국 책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shimy 2013-08-12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인장님처럼 멋진 장서들을 구비해 놓는 것이 꿈이지만, 그토록 귀중한 책들을 아낌없이 기증하신 마음씀씀이가 무척이나 존경스럽습니다. 저도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곳에 와보니 새삼 부족함을 많이 느낍니다. 책을 이토록 사랑하시고 즐길 수 있는 여유와 근면함이 있으시다니 참으로 부럽네요. 종종 와서 새소식도 듣고 배워가기도 하겠습니다. ㅎㅎ

oren 2013-08-12 09:51   좋아요 0 | URL
rahmses님 반갑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들은 얼핏 사진으로만 보면 많아 보일지도 모르나, 정작 한 수레에 담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보잘 것 없습니다. 제 경우에는, 어릴 땐(가령 초등학교 시절, 혹은 고교시절이나 대학 다닐 때까지도) 그럭저럭 책을 좀 읽었으나, 대학 졸업후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 15년쯤 완전히 책과 담을 쌓고 지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뒤늦게라도 다시 책을 붙잡고 읽으며 변변찮은 글이나마 여기에 끄적거리고 있으니 좋은 소일거리를 얻은 셈이라 여기고 있답니다.

rahmses님께서도 좋은 책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시간들과 늘 함께 하기를 바랄께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