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스완이 그토록 좋아하던 소악절이 포함된 뱅퇴유 소나타 일부를 그녀가 내게 연주해 준 것도 바로 이런 날들 가운데 하루였다. 그러나 약간 복잡한 음악을 처음 들을 때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나중에 이 소나타 연주를 두세 번 들었을 때, 나는 그 곡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처음 듣는다."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 첫 번째 듣기에서 아무것도 구별하지 못한다면, 두 번째, 세 번째도 처음과 같을 것이므로, 열 번 들었다 해더 더 잘 이해하리라는 법은 없다. 아마도 첫 번째 듣기에서 결핍된 것은 이해가 아니라 기억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이란 상대적으로 우리가 듣는 동안 마주치는 인상들의 복잡성에 비하면 아주 미미해서, 잠을 자며 수많은 걸 생각하고는 즉시 잊어버리는 인간의 기억만큼이나, 또는 이제 막 들은 것을 조금 후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반쯤은 어린애로 돌아간 사람의 기억만큼이나 짧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인상에 대한 추억을, 기억은 즉시 제공해 주지 못한다. 하지만 추억은 점차적으로 우리 기억 속에서 두세 번 들었던 작품에 의해 형성된다. 마치 중학생이 자러 가기 전에는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학과를 여러 번 읽어서 다음 날 아침에 암송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나는 그날까지 소나타의 어떤 부분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스완과 스완 부인이 뚜렷이 알아본 악절은 내 명료한 지각과 거리가 멀었다. 마치 기억해 내려고 애쓰지만 대신 빈 허공만을 발견하게 되는 이름처럼, 그러나 이 허공으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 그렇게도 헛되이 찾던 이름의 음절은 단번에 스스로 떠오른다. 그리고 진정으로 드문 작품이란 우리가 즉시 기억하지 못하며, 뿐만 아니라 그런 작품들 가운데서도 내가 뱅퇴유 소나타를 들었을 때처럼,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부분을 먼저 인지한다. 스완 부인이 가장 유명한 악절을 연주했으므로(그래서 오랫동안 소나타를 들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나는 이 작품에 나를 위해 남아 있는 건 거의 없다고 잘못 생각했다.(이 점에 있어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 앞에 섰을 때 이미 사진을 통해 돔 지붕을 잘 안다고 생각하며 별다른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나 또한 어리석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소나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을 때에도, 이를테면 거리감이나 안개 탓에 어렴풋한 부분밖에 들어오지 않는 역사 기념물처럼 내게는 소나타 전체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 시간 속에서 구현되는 다른 작품도 다 마찬가지지만, 이런 작품의 인식과 관계된 우수가 연유한다.(183∼185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제3권의 182쪽에서 시작된 문단은 189쪽까지 한 호흡으로 길게 이어지는 '하나의 문단'이다. 굳이 이 부분을 '읽는 흐름'을 살리기 위해 통째로 한꺼번에 인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 멋대로' 중간 중간에 끊어서 인용할려니 그게 도리어 고역이다. 아무튼 이 문단에 담긴 프루스트의 생각들은 음악, 미술, 철학, 작품, 천재 등등에 관한 매우 중요한 통찰들을 담고 있어서 몹시 흥미롭다. 이 문단에서 프루스트가 펼쳐 놓은 생각들은 특별히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비록 프루스트가 직접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소나타 안에 가장 깊숙이 감추어졌던 부분이 내게 드러나면서 내가 처음 알아보고 좋아했던 것이 습관에 의해 내 감성 영역 밖으로 끌려가면서 나로부터 빠져나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나타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지만, 난 한 번도 소나타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 소나타에는 우리 삶과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삶보다 덜 환멸스러운 이 위대한 걸작은 처음부터 작품이 가진 최상의 것을 주지는 않는다. 뱅퇴유 소나타에서 가장 먼저 발견하는 아름다움도 가장 빨리 싫증 나는 아름다움으로, 아마도 그런 아름다움이 우리가 이미 아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동일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이 멀어지면 그 구조가 너무도 새로워 우리 정신에 혼란을 야기하며, 그래서 우리가 식별하지도 못하고 손도 대 보지 못한 채 그대로 간직해 왔던 악절을 좋아하는 일만 남는다.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채 매일 그 앞을 스쳐 가던 악절, 그 유일한 아름다움의 힘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던 악절이 이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악절을 떠나는 것도 우리가 맨 마지막일 것이다. 그 악절을 좋아하는데 그토록 많은 시간이 걸렸으므로 다른 악절보다는 바로 그 악절을 더 오래 좋아할 것이기에. 그리고 다른 작품들보다 더 심오한 작품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란 ㅡ 이 '소나타'에 대해 내게 필요했던 시간처럼 ㅡ 일반 대중이 진정으로 새로운 걸작을 좋아할 수 있을 때까지 흘러가는 수십 년 혹은 수 세기의 축소판이자 일종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중의 몰이해를 피하려는 천재는, 어쩌면 동시대인들에게는 작품 이해에 필요한 거리가 부족하므로 후대를 위해 쓰인 작품은 후대에 의해서만 읽혀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마치 너무 가까운 시대의 그림이라 우리가 잘못 판단하는 몇몇 그림들처럼. 그러나 현실에서 잘못된 평가를 피하려는 모든 비겁한 노력은 헛된 짓이며 이런 평가는 피할 수 없다. 천재의 작품이 즉각적인 찬미를 자아내기 어려운 이유는 작품을 쓴 자가 예외적인 인물로서 그와 비슷한 인물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185∼187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프루스트는 음악가들 가운데 특별히 바그너와 슈만, 그리고 베토벤을 좋아했다고 한다. 바그너는 한때 니체와 절친이었고, 니체와 바그너 모두 쇼펜하우어를 열렬히 추종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프루스트는 뱅퇴유의 소나타를 여러 곳에서 자세하고도 길게 묘사하는데, 마치 쇼펜하우어로부터 방금 '음악 수업'을 받고 돌아온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느낌이 든다. 천재의 작품이 후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원리 또한 쇼펜하우어의 설명을 빼닮았다. 191쪽의 주석에 딸린 설명처럼, 프루스트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자연과 인생에서 직접 이끌어 낸 참다운 작품만이 자연이나 인생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젊고 언제까지나 근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참된 작품은 특정한 시대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은 그 시대에 영합하는 것을 경멸하고 시대로부터는 냉담한 대우를 받으며, 그때그때의 잘못이 그 작품에 의해 간접적이고 소극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나중엔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또 이러한 작품은 진부해지지 않고, 시대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언제나 새롭게 사람의 마음에 호소한다. 이렇게 인정받은 이상, 이제는 무시되거나 오인받을 염려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판단력이 출중한 소수의 사람들의 칭찬으로 영광의 왕관을 쓰고 진가를 인정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 소수의 출중한 사람들은 백 년 동안에 아주 적게 나타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의견은 점차 권위가 확립되는데, 이 권위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이 작품들의 진가를 후세에 호소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잇따라 나타나는 위대한 개인이야말로 이 유일한 전거이다. 왜냐하면 동시대의 대중이 언제나 어리석고 우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후세의 대중도 여전히 어리석고 우둔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위인들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한 말을 읽어 보라. 인간은 언제나 같기 때문에 위인들의 탄식도 지금이나 옛날이나 변함이 없다. 어느 시대에나 또 어떠한 예술에서도 작풍이 정신을 대리하며, 정신을 소유하는 것은 언제나 위대한 개인뿐이다. 그러나 작풍이란 모든 시대에 존재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은 정신의 현상이 벗어 버린 낡은 의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후세의 갈채는 동시대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며, 또 동시대의 갈채는 후세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다.(764쪽)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플라톤의 이데아, 예술의 대상' 中에

 

 

니체는 '정선된 귀'를 갖지 못한 동시대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후대 사람들을 위해 쓴다고 말했다.

 

하나의 정신이 이해되는 데는 몇 세기가 필요한 것일까?

 

가장 위대한 사건과 사상은 ㅡ 그러나 가장 위대한 사상이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ㅡ 가장 늦게 이해된다. 동시대의 세대는 그러한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다. ㅡ 그들은 그것을 스쳐 지나가며 살아간다. 거기에서는 별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어떤 일이 일어난다. 가장 멀리 떨어진 별빛이 인간에게 가장 늦게 이른다. 그 별빛에 이르기 전에는, 그곳에 별이 있다는 것을 인간은 부정한다. "하나의 정신이 이해되는 데는 몇 세기가 필요한 것일까?" ㅡ 이것 역시 정신과 별에게 필요한 순위와 예법을 만들어내기 위한 척도인 것이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중에서

 

 

 

 

천재를 이해할 수 있는 드문 지성을 생산하고 또 배양하고 증식하는 것은 바로 작품 자체다. 베토벤의 사중주곡(12번, 13번, 4번, 15번 사중주곡) 자체가 오십 년이나 걸려 그 작품을 이해하는 청중을 낳고 길렀으며, 그리하여 모든 걸작이 다 그렇듯이, 예술가의 가치가 아니라면 적어도 지식인 사회에서(걸작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폭넓게 구성된, 즉 그 작품을 좋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발전해 나간다. 우리가 후대라고 부르는 것은 작품의 후대를 말한다. 작품 자체가 이런 후대를 창조해 나가야 한다.(이야기를 간단히 하기 위해 동시대에 배출된 몇몇 천재들이 함께 더 나은 미래의 대중을 준비하고 그러한 대중으로부터 다른 천재들이 혜택을 받는 경우는 고려하지 않기로 하자.) 그러므로 작품이 보존되었다 후대에 가서야 알려지는 경우, 그 후대는 작품의 후대가 아니라, 단지 오십 년 뒤에 사는 동시대인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ㅡ 바로 뱅퇴유가 그랬던 것처럼 ㅡ 자신의 작품이 제 갈 길을 가기 원한다면, 작품을 아주 깊은 곳으로, 아주 먼 미래의 한복판을 향해 내던져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미래의 시간, 걸작의 진정한 전망이라 할 수 있는 미래의 시간을 참조하지 않는 것이 서투른 비평가들이 범하는 실수라면, 미래의 시간을 지나치게 참조하는 것 역시 훌륭한 비평가들이 범하는 위험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187∼188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베토벤의 사중주곡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마르셀 프루스트와 엇비슷한 시대를 살았고, 현대소설의 쌍벽을 이루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생각난다. 소설도 현악 4중주처럼 난해할 수 있다는 게 묘하게 닮았다. 

 

"그 모태가 되는 『오뒷세이아』와는 다르게, 이 책은 읽으면 알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곡들이 오래 듣고 연구할수록 그 풍부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듯이, 오로지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비밀스러운 뜻을 드러낸다."(클리프턴 패디먼)

 

 

 

아마도 지평선 위로 모든 물체를 균등하게 만드는 착시 현상과도 유사한 현상에 따라 그림이나 음악에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혁명은 그대로 어떤 일정한 규칙을 존중하며, 그러나 현재 우리 앞에 있는 인상파나 불협화음의 추구, 중국 음계의 배타적 사용, 입체파, 미래파는 전 시대 것과 완연히 다르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전 시대 것을 우리 정신이 오랜 시간의 동화작용을 통해 동질적인 실체로 ㅡ 물론 다양하기는 하지만 19세기의 위고가 17세기의 몰리에르와 나란히 하는 ㅡ 전환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앞으로 올 시간과 그 시간이 가져다줄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어린 시절에 치는 별자리 점이 보여 주는 성인이 된 우리 모습처럼, 어떤 충격적인 괴리감이 나타날지 한번 상상해 보라. 단지 별자리 점은 모두 사실이 아니며 또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에 시간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일은 우리 판단에 뭔가 우연성을 부여하여 그 결과 모든 예언처럼 진정한 흥미를 반감하겠지만, 그러나 예언이 실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예언자의 초라한 지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삶에 가능성을 불러들이거나 배제하는 일은 반드시 천재의 능력에만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재이면서도 철도나 비행기의 미래를 믿거나 믿지 않을 수 있으며, 위대한 심리학자이면서도 자기 정부나 친구의 위선을 ㅡ 가장 평범한 사람도 그들의 배신을 예측할 수 있는데 ㅡ 깨닫지 못할 수 있다.(188∼189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여기까지가 길게 이어지던 문장들이 하나의 문단으로 끝맺는 종착점이다. 이토록 긴 장광설을 늘어놓은 다음에 프루스트는 또다시 태연스레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속으로 옮겨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소나타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스완 주인이 연주하는 걸 들으며 황홀해했다. 그 연주는 그녀의 실내복처럼, 그 집 계단의 향기처럼, 그녀가 입은 망토처럼, 그녀의 국화처럼, 이성으로 재능을 분석할 수 있는 세계보다 무한히 높은 세계에서 개별적이고 신비로운 전체를 이루는 듯했다.* "이 뱅퇴유 '소나타', 아름답지 않은가?" 하고 스완이 내게 말했다. "나무들 밑에 어둠이 깃들고 바이올린의 아르페지오가 싱그러움을 떨어뜨릴 때면 얼마나 아름답게 들리는지 인정하게나. 거기에는 달빛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정태적인 면이 있네. 내 아내가 받는 광선치료가 근육에 효과를 보이는 것도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닐세. 달빛이 나뭇잎의 움직임을 가로막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네. 소악절에 그토록 잘 묘사된 것도 바로 그 점이라네. 마비 상태에 빠진 불로뉴 숲. 바닷가라면 더 인상적이지. 왜냐하면 나머지 다른 것은 전혀 움직이지 않아 미세한 바다 물결의 파동이 더 잘 들리니까. 파리에서는 이와 반대라네. 기껏해야 역사 기념물 위에 비치는 기이한 미광, 빛깔도 위험도 없는 불길로 밝혀진 듯한 하늘, 우리 모두가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거대한 삼면기사 같은 것뿐이라네. 그러나 뱅퇴유 소악절, 더욱이 소나타 전곡을 통해 묘사된 것은 그런 게 아닐세. ……"(189∼190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주석)

 

* 음악에 대한 쇼펜하우어적 성찰의 영향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의 무한한 언어로 의지를 표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생각)

 

음악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성찰은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자세하게 다뤄지고 있다. 그 가운데 프루스트의 생각과 비슷한 대목이라 여겨지는 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음악은 의지의 적절한 객관성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모사

음악이 모든 사물의 참된 본질에 대해 갖는 이러한 긴밀한 관계에서 다음의 것도 설명할 수 있다. 즉 어떤 장면, 행위, 사건, 환경에서 적절한 음악이 울리면, 그로 인해 우리는 이것들의 가장 심오한 의미가 명백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그 음악을 가장 옳고 명백한 해설로 생각한다. 또 교향악의 인상에 젖어 있는 사람은 자기 앞의 인생과 세계의 모든 가능한 사상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 음악과 자기 눈앞에 떠오른 사상 사이의 유사성은 무엇 하나 열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음악은 현상,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의지의 적절한 객관성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모사이며, 세계의 모든 형이하학적인 것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것을 나타내고, 현상에 대해 물자체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과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는 의지를 구체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음악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음악이 어떻게 실제 생활과 세계의 모든 양상과 장면을 의미 있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이것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음악의 선율이 주어진 현상의 내적인 정신과 유사하면 할수록 그러한 작용은 증가된다. 시를 노래로, 또는 직관적인 모사를 무언극으로, 또는 이 양자를 가극으로 음악에 맞추어 만들 수 있는 것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795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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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어느 날 우편물 오는 시간에 엄마는 내 침대에다 편지 한 통을 두고 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편지를 열었다. 내게 행복을 안겨 줄 유일한 서명, 샹젤리제 외에는 어떤 교류도 없었던 그 질베르트의 서명이 씌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구 쓴 기사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 '페르 위암 렉탐(Per viam rectam)'이라는 경구로 둘러 싸인 은색 봉인이 찍힌 종이 하단에 커다란 필체로 쓰인 편지 아래서, 거의 모든 t자의 가로획이 단어 사이가 아니라 바로 윗줄에 있는 단어 밑에 놓여 있어 모든 문장에 밑줄이 쳐진 것처럼 보이는 편지 아래서, 내가 본 것은 바로 질베르트의 서명이었다. 하지만 내게 온 편지 중 질베르트의 서명이 든 편지가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아, 편지를 봐도 전혀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동안 이 서명은 날 에워싼 모든 것에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 사실 같지 않은 서명은 현기증이 날 것 같은 속도로 내 침대, 내 난로, 내 벽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나는 말에서 떨어진 사람처럼 모든 게 흔들거리는 듯 느껴졌고 내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 내가 아는 것과는 모순되지만 진정한 삶이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닌지, 마치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조각가들이 다른 세계의 문턱에서 깨어난 망자들에게 주었던 그런 망설임과 더불어 날 채워 준 게 아닌지 묻고 있었다. "사랑하는 친구에게."라고 편지는 말했다. "네가 많이 아파 더 이상 샹젤리제에 오지 못한다는 걸 알아. 나 역시 그곳에 환자들이 너무 많아 이제는 거의 가지 않아. 하지만 내 친구들이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 간식 먹으러 우리 집에 온단다. 네 몸이 회복되는 대로 방문해 주면 아주 기쁠 거라고 엄마가 전해 달라고 했어. 그럼 우리가 샹젤리제에서 나누던 즐거운 이야기들을 집에서도 다시 나눌 수 있을 거야. 안녕, 내 사랑하는 친구, 네 부모님이 우리 집에 간식 먹으러 자주 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내 우정을 전하면서, 질베르트."(133∼134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첫사랑의 연인으로부터 받은 첫 번째 편지만큼 우리의 정신을 잃게 만드는 대상도 드물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소설 속 화자'를 순식간에 '독자인 나 자신'으로 뒤바꾸고, '소설 속 첫사랑인 질베르트의 필체' 대신에 까마득한 옛날 나에게 부쳐진 편지 봉투의 겉면을 온통 신비롭고도 희귀한 보석처럼 장식하던 '첫 사랑 그녀의 이름과 필체'를 떠올리지 않을 독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동안 내 신경계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내게 큰 행복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 영혼, 즉 나 자신, 요컨대 주 당사자인 나는 아직 이 소식을 깨닫지 못했다. 행복, 질베르트를 통한 행복이야말로 내가 줄곧 생각해 왔던, 내 마음을 완전히 차지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회화에 대해 '코사 멘탈레(cosa mentale)'라고 했던 것 아닌가. 우리 생각은 글자로 덮인 종이 한 장을 단번에 소화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나는 이내 편지를 생각했고 편지는 내 몽상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코사 멘탈레'가 되었으며, 그래서 오 분마다 다시 읽고 어느새 키스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편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내 행복을 깨달았다.(134∼135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내가 첫사랑을 만난지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의 어느 봄날이 생각난다. 지방 중소도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했던 터라,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교의 학과 우편함에는 늘상 다른 대학교에 다니던 고교 동창들이 보내준 '대학 학보'가 자리잡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비교적 잘 아는 과친구가 불쑥 내 앞에 내민 건 그저 따분하기만 했던 '다른 학교의 학보'가 아니라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첫사랑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이제 막 파릇파릇한 새싹을 내민 잔디밭을 내려다 보며 봄이 오는 캠퍼스의 계단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민끽하던 나는, 그때 느닷없이 내 턱앞까지 디밀어진 편지 탓인지 그날따라 잔디밭 위로 유난히 어지럽게 피어오르던 아지랭이 마냥 정신이 어지러웠다. 물론 그 편지는 오래도록 거듭 읽혀졌으며, 이듬해 여름에 내가 몸을 실었던 '입영열차' 안에서도 내 품을 떠나지 않았고, 입대한 그해 가을에 유난히도 자주 내 귓가를 스치던 <잊혀진 계절>이나 <바람, 바람, 바람>과도 늘 함께 했다. 아, 그런데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눈물까지 흩뿌렸던 그 편지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우리 삶에는 사랑하는 이들이 늘 소망하는 이런 기적이 곳곳에 뿌려져 있다. 이 기적은 어쩌면 며칠 전부터 살아야 할 이유를 완전히 상실한 나를 보고 어머니가 질베르트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부탁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마치 내가 수영을 처음 시작했을 때 숨이 막혀 무척이나 하기 싫었던 잠수에 재미를 붙이게 하려고 어머니가 몰레 수영 교사에게 멋진 조가비 상자와 산호 가지들을 가져다주어 내가 그것들을 물 바닥에서 스스로 발견했다고 믿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우리의 여러 대조적인 삶과 상황에서 사랑과 관계되는 사건에 대한 최선의 태도는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건들은 피할 수 없는 뜻밖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합리적인 법칙이 아니라 오히려 마법의 법칙에 지배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부자인 데다가 매력적이기까지 한 남자가 함께 살던 어느 가난하고 매력 없는 여인에게서 이별을 통보받고 절망한 채 자신의 모든 재력과 지상의 온갖 영향력을 행사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애인의 완강한 고집 앞에서 논리적인 설명을 찾기보다 차라리 '운명'이 자신을 짓누르며 마음의 병으로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최선이다. 연인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장애물, 고통 때문에 지나치게 예민해진 상상력이 헛되이 간파하려고 애쓰는 이러한 장애물은, 때때로 자신의 품에 다시 불러들일 수 없는 여인의 어떤 성격적인 특징에, 그녀의 어리석음에, 얼굴조차 모르는 이들이 그녀에게 미친 영향과 넌지시 불어넣은 정의감에, 그녀가 일시적으로 삶에 대해 요구하는 쾌락인 연인도 연인의 재력도 충족해 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쾌락에 있다. 어쨌든 연인은 여인의 술책이 그에게 숨기고, 또 왜곡된 판단력 때문에 정확히 식별할 수 없는 이런 장애물의 속성을 알아내기에는 나쁜 위치에 있다. 이런 장애물은 의사가 끝내 그 원인을 모른 채 작게 만드는 종양들과도 비슷하다. 종양처럼 이 장애물은 신비롭지만 일시적이다. 다만 이 장애물은 일반적으로 사랑보다 오래 지속된다. 또 사랑이란 비타산적인 열정이 아니므로, 더 이상 연인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자신이 사랑했던 그 가난하고 경박한 여인이 어째서 자기로부터 부양받기를 여러 해 동안 완강하게 거절해 왔는지 그 이유조차 알려고 하지 않는다.(135∼136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프루스트가 이야기하는 방식은 매번 이런 식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이에 아주 조그마한 틈이라도 엿보이면 어김없이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으로 아낌없이 채워넣는다. 소설 속 이야기가 '개별화'라면, 거기에 덧붙여지는 프루스트의 설명은 '일반화'인 셈이다. 개별화에서 일반화로, 일반화에서 다시 개별화로, 끊임없는 변전이 일어나는 게 프루스트 소설 읽기의 매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펼치다가 느닷없이 '자신의 철학'을 아주 길게 늘어놓은 작가 가운데 『전쟁과 평화』의 톨스토이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철학은 '삶과 죽음'이나 '우연과 필연' 혹은 '전쟁과 평화'처럼 너무나 묵직한 주제를 '소설 속 이야기' 사이사이에 펼쳐 놓음으로써 독자들을 지치게 하지만, 프루스트의 방식은 훨씬 더 경쾌하고 날렵하다는 점에서 독자들을 즐겁게 만드는 듯하다.

 

 

 

그런데 자주 파국의 원인을 우리 눈앞에 숨기는 것과 같은 신비로움이 사랑의 경우에는 종종 느닷없는 행복한 해결책으로 감싸이기도 한다.(질베르트의 편지가 내게 가져다준 것처럼.) 행복한 해결책이라고? 아니, 어쩌면 그렇게 보일 뿐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에 부여하는 만족감이란 그게 어떤 종류든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잠시 비켜 가게 할 뿐, 실제로는 결코 행복을 주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잠시 유예기간이 주어지면 우리는 얼마 동안 치유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136쩍)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질베르트가 보유한 편지지 시리즈가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드디어 몇 주가 지나자 나는 그녀가 처음으로 보내왔던 편지지와 같은, 그은 은메달 투구를 쓴 기사 위에 '페르 위암 렉탐'이라는 경구가 새겨진 편지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각각의 편지지가 이런저런 날에 알맞게 어떤 의식에 따라 선택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질베르트가 편지를 받는 사람에게, 또는 적어도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가능한 시간 차를 많이 벌려 같은 편지지를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으려고 이미 사용했던 편지지를 애써 기억해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41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그토록 색깔과 재질과 느낌이 서로 조금씩 달랐던 그 수많은 편지지들은 다들 어디로 사라졌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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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그 꿈을 다시 나타나게 하려면, 단지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발베크,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 이름 안에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장소들이 불러일으킨 욕망이 축적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봄에도 발베크라는 이름을 책 속에서 발견하기만 하면, 폭풍우와 노르망디의 고딕 양식에 대한 욕망을 내 마음속에 눈뜨게 하는 데 충분했고, 폭풍우가 부는 날에는 피렌체 또는 베네치아라는 이름은 내게 태양과 백합, 총독 궁전 ,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대한 욕망을 일깨웠다.(340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3부_고장의 이름ㅡ이름

 

 

(나의 생각)

 

발베크라는 이름은 아무런 느낌이 없다. 그 도시엔 여태껏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다르다. 고작 반나절 아니면 하루쯤 머무른 기억밖에 없지만 그 두 도시는 단 한 번의 방문만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도시가 된다.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영화나 TV 등을 통해 영상으로도 자주 만날 수 있지만, 잠깐식 스쳐가는 아름다운 영상이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차분히 책을 읽는 동안에 머릿속에서 느껴지는 이 두 도시에 대한 특별한 감동을 뛰어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그만큼 이 두 도시는 문학적인 도시로도 손색이 없다.

 

 

그 두 도시가 아무리 뛰어난 역사가들, 가령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와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를 장식하고,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다채롭게 빛낸 '르네상스'의 핵심 무대였다고 하더라도, 단테의 『신곡』이나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과 『오셀로』, 혹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 문학 특유의 그윽한 향기를 더하지 못했더라면 이들 도시는 지금보다 훨씬 더 평범한 도시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이름들이 그 도시들에 대한 내 이미지를 영원히 흡수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이미지를 변형함으로써만, 그 이미지의 출현을 내 마음속에서 이름 고유의 법칙에 종속시킴으로써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름들은 이미지를 더 아름답게 만들긴 했지만, 노르망디나 토스카나 지방 같은 도시들을 실제와는 아주 다르게 만들어, 내 상상력이 주는 기쁨은 커졌으나 미래 여행에서 받을 내 실망 역시 더 크게 했다. 이름들은 내가 몇몇 지상의 장소에 대해 품고 있던 관념들을 자극하면서 그 장소들을 보다 특별한 것, 따라서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도시들, 풍경들, 유적들을 동일한 질료에서 여기저기 오려 낸, 다소 마음에 드는 정경이라 상상하지 않고 그 각각을 내 영혼이 열망하고 내 영혼이 알면 유익한, 다른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알 수 없는 것이라 상상했다. 그 장소들은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이름, 인명과도 같은 이름으로 지칭됨으로써 얼마나 많은 개별성을 획득했던가!(340∼341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3부_고장의 이름ㅡ이름​ 

 

(나의 생각)

 

몽테뉴가 유별나게 강조하고 집착했던 대상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게 '장소'와 '이름'이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속에서 그 특이한 프랑스적 경향(?)이 고스란히 반복되는 모습이 무척 흥미롭다.

 

 

『파르마의 수도원』을 읽고 나서 내가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 중 하나가 된 파르마라는 이름은 내게 조밀하고 매끄러우며 보랏빛을 띤 부드러운 이미지로 나타났고, 그리하여 내가 머무를지도 모르는 파르마의 한 저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내게는 조밀하고 매끄럽고 따뜻한 보랏빛 저택에서 지내리라고 생각하는 기쁨이 생겨났다. 그 저택은 이탈리아 어떤 도시의 저택과도 관계가 없었지만, 단지 내가 파르마-파름이라는 이름의 공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무거운 음절과, 스탕달의 부드러움과 보랏빛 반사광을 흡수한 모든 것의 도움을 받아 그 저택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마치 경이로운 향기를 풍기는 화관과도 흡사한 도시로 피렌체를 떠올렸는데, 피렌체가 백합의 도시라 불리고, 그곳 대성당 이름이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발베크의 경우, 노르망디의 옛 도자기가 그것이 발굴된 흙의 색깔을 간직하듯이, 이제는 폐지된 어떤 관습이나 봉건 제도, 고장의 옛 모습, 불규칙하게 변화하는 음절로 구성되어 옛날 식으로 발음되는 이름 중 하나가 되었다. 내가 발베크에 도착해서 성당 앞 맹위를 떨치는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안내받았을 때, 나는 그곳에서 카페오레를 내 앞에 가져다줄 호텔 주인으로부터 그런 말투를 다시 들으리라는 것을, 그 주인이 우화 시에 나오는 인물처럼 입씨름하기 좋아하고, 점잔 빼고, 풍모가 중세적이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341∼342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3부_고장의 이름ㅡ이름

 

(나의 생각)

 

니체가 탁월한 작가로 손꼽아 마지 않았던 스탕달의 작품을 프루스트도 무척이나 좋아했나 보다. 스탕달의 작품은 『적과 흑』 이후로는 영영 재회한 적이 없었는데, 『파르마의 수도원』을 염두해 놓아야겠다...

 

 

내 건강이 나아져서, 비록 발베크에서 머물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한번은 노르망디나 브르타뉴 건축물과 경관을 보기 위해 그처럼 상상 속에서 여러 번 탄 적 있는 1시 22분 기차를 타는 것을 부모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나는 우선 가장 아름다운 도시에서 내려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 번 그 도시들을 비교해 보았지만,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그 개별적인 존재들 사이에서 어떻게 더 아름다운 도시를 고를 수 있단 말인가. 불그스름하고 우아한 레이스 안에서 그렇게도 높이 솟아 있고 꼭대기가 마지막 음절의 오래된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이외(Bayeux). e 모음 위 방점이 오래된 유리창을 검정 나무 같은 마름모꼴로 나누는 비트레(Vitré). 달걀 껍질의 노란색에서 진주 빛 회색에 이르는 희끄무레하고 부드러운 랑발(Lamballe), 기름지고 노르스름한 마지막 이중모음이 버터로 만든 탑을 장식하는 노르망디의 대성당 쿠탕스(Coutances), 마을의 고요 속에 역마차의 소음과 함께 파리가 뒤따르는 라니용(Lannion), 하얀 깃털과 노란 부리가 강물이 흐르는 시적인 장소의 길 위에 흩어져 있는 그 우습고도 소박한 케스탕베르(Questambert)와 퐁토르송(Pontorson), 해초 한가운데로 강물을 끌어들이려는 듯 밧줄에 겨우 매인 듯한 베노데트(Benodet), 바람에 날리는 가벼운 천 모자의 옅은 분홍색 날개가 운하의 초록빛깔 물속에서 떨리며 반사되는 퐁타벵(Pont-Aven), 중세 이래로 시냇물에 보다 단단히 매어 있고 그 사이를 졸졸 노래하며 검게 그은 옷의 무딘 점으로 변한 햇살이 유리창 거미줄 너머로 그림을 그리듯 아주 섬세한 잿빛 진주 방울로 아롱지는 캥페롤레(Quimperlé).(342∼344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3부_고장의 이름ㅡ이름 

 

(역자 주)

 

문체론적으로 유명한 이 문단은 프랑스 시인 랭보의 『모음(Voyelles)』 이라는 시 못지않게 주목을 받아 왔다. 문화적, 음성학적, 문자적인 함의로 가득한 이 문단에서 우선 장식 융단으로 유명한 바이외(Bayeux)의 yeu는 고풍스러운 금색을, 마름모꼴 유리창이 연상되는 비트레(Vitré)의 é는 검은색을 떠올리게 한다. 랑발(Lamballe)에는 하얀색(blanc)이란 음소가 들어 있으며, 쿠탕스(Coutances)의 an은 버터의 노란색을 환기한다. 라니용(Lannion)은 마부의 끈(laniére)과 라퐁텐의 우화에 연유하며, 케스탕베르(Questambert)는 이 고장의 카망베르 치즈에서, 이밖에도 퐁토르송(Pontorson)의 하얀 깃털과 노란 부리는 이 도시 문양이 백조인 데서, 베노데트는 수초로 불리는 이 고장 수생식물에서 비롯되었다. 퐁타뱅의 모자 날개는 고갱의 그림 『브르타뉴의 네 여인들』에 나오는 하얀 천 모자와 연결되며, 플로베르를 매혹했던 '들판과 모래톱'의 투명한 시냇물 이미지는 캥페를레(Quimperlé)의 진주 빛(perlé) 방울로 표현된다.

 

(나의 생각)

 

프루스트의 문장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 같다.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비하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문장들은 얼마나 괴벽스럽지 않으면서도 매혹적인가. 『댈러웨이 부인』의 버지니아 울프가 이런 문장들을 읽고 어찌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두고 <실패작, 천재성은 있지만 질이 낮다. 산만하고 찝찔하고 젠체하며 상스럽다>고 개탄하지 않을 수 있었겠으며, 마르셀 프루스트를 두고 <진정으로 내게 가장 큰 체험은 프루스트다. 이 책이 있는데 과연 무엇을 앞으로 쓸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한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 *

 

책을 무려 여덟 권이나 사 놓고 여태껏 한 페이지도 펼쳐보지 않았던 책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 그런데 1권을 슬슬 읽어 나가다가 특별한 문장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프루스트의 소설을 생각보다 훨씬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겠다는 느낌이 불쑥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 문장이란 이 기나긴 소설의 첫 문장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은 다음 대목에서였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기쁨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귀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삶의 변전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짦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86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1부_콩브레

 

이런 독특한 느낌들이야말로 프루스트를 읽는 독자들만이 맛보는 경이로운 체험이 아닐까 싶다. 프루스트의 소설엔 문학이 우리의 의식을 얼마만큼 폭넓고도 깊숙하게 자극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시험한다. 그런 수단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화자의 지나간 기억만이 우리의 의식을 자극하는 건 아니다. 도처에 널려 있는 그림과 음악, 연극과 오페라도 중요한 매개체다. 그밖에도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화창한 날씨, 비, 바람, 브리오슈빵, 마로니에 그늘, 라일락 향기, 시냇물, 저녁놀, 구름, 빗방울 등등등. 그렇게 다소 어리둥절하게 '우리의 의식을 자극하는 수많은 덩어리들' 속을 헤매다 보면 어느새 장편 소설의 제1권이 뚝딱 끝난다.

 

<제1편, 스완네 집 쪽으로>의 <1부 콩브레>의 배경이 전원풍의 시골이었다면, <2부 스완의 사랑>의 주된 배경은 프랑스 사교계 인물들이 밤마다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는 파리의 화려한 살롱이다. 프루스트의 소설에서도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최고급의 귀족들이 여럿 등장하지만,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대저택의 현관을 가득 메울 만큼 화려한 마차들이 잇따라 등장하는 식은 아니다. 극히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소수의 핵심 멤버들이 거의 매일 저녁에 삼삼오오 만나 고급 만찬과 음악 연주와 이야기를 즐기는 식이다. 거기서 우리의 주인공 스완은 '과거가 의심되지만' 보티첼리의 그림 속 미녀를 연상시키는 오데트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2부 스완의 사랑>에서는 <1부 콩브레>에서 이야기를 이끌던 화자는 아주 가끔씩 어쩌다가 등장하고, 대부분의 이야기는 전지적 작가가 이끄는 '스완의 사랑'에만 집중된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오데트를 만났으며, 그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고, 어떻게 '금전적으로' 얽히게 되었고, 어떻게 질투 때문에 괴로워하는지가 숨막히게(?) 펼쳐진다. 스완의 사랑은 어느날 저녁 살롱에서 연주되는 뱅퇴유의 피아노 소나타에서 갑자기 솟아오른다.

 

처음에 그는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의 물질적인 질감밖에 음미하지 못했다. 그러다 가느다랗고 끈질기고 조밀하며 곡을 끌어가는 바이올린의 가냘픈 선율 아래서, 갑자기 피아노의 거대한 물결이 출렁거리며 마치 달빛에 홀려 반음을 내린 연보랏빛 물결처럼, 다양한 형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잔잔하게 부딪치며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윤곽을 분명히 구별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못한 채 갑자기 매혹된 그는, 마치 저녁나절 습기찬 공기 속을 감도는 장미 냄새가 우리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하듯이, 지나는 길에 그의 영혼을 크게 열어 준 악절 또는 화음을 ㅡ 그는 어느 것인지 알지 못했다. ㅡ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처럼 스완이 어떤 혼란스러운 인상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음악을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인상은 오로지 유일하게 음악적이고 내적인, 다른 어떤 인상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었다. 이런 인상이란 잠시 후면 사라져 버릴, 말하자면 '시네 마테리아'인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듣는 음은 그 높이와 부피에 따라 우리 눈앞에 있는 다양한 차원의 표면을 감싸고 아라베스크 무늬를 그리며 우리에게 넓이, 미묘함, 안정감, 변화에 대한 감각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 음은 뒤이어 또는 동시에 나타나는 음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이들 감각이 우리 마음속에 충분히 형성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다. 절들의 복사본을 만들어 그것들을 다음에 오는 악절들과 대조하고 구별하게 하도록 해 주지 않는다면, 그 '액체성'과 '뒤섞임'으로 계속 모티프들을 감쌀 것이고 그리하여 모티프들은 거의 식별할 수 없는 상태로 이따금 솟아오르다 이내 가라앉고 사라지면서 그것이 주는 특별한 기쁨에 의해서만 지각될 뿐 묘사할 수도 기억할 수도 명명할 수도 없는, 즉 '말로 펴현할 수 업는 것'이 된다. 이처럼 스완이 느꼈던 감미로운 감각이 사라지자 마자 그의 기억은 곧 그 감각에 대해 간략하고도 일시적인 복사본을 마련해 주었지만, 악절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지나치게 그 복사본에 눈을 던지고 있었으므로, 똑같은 인상이 갑자기 되돌아왔을 때에 이미 그 인상은 포착할 수 없어지고 말았다. 스완은 그 인상의 넓이와 대칭적인 배열, 문자, 표현적인 가치를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그러자 그는 자기 앞에 이미 순수 음악이 아닌 데생이나 건축, 사상과도 흡사한 그런 것을 보았다. 이제야 그는 음향의 파도 위로 잠시 솟아오른 악절을 뚜렷이 식별할 수 있었다. 악절은 금방 그에게 특별한 쾌락을, 그것을 듣기 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쾌락을 주었는데, 악절 외 다른 어떤 것도 그런 쾌락을 맛보게 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악절에 대해 미지의 사랑과도 같은 그 무엇을 느꼈다.((44∼47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2부_스완의 사랑​  

 

스완의 사랑은 가파른 호흡으로 숨가쁘게 진행되다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결여와 공백 때문에 갑작스레 방황하다가, 느닷없는 의심과 질투와 이별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또다시 마주친 뱅퇴유의 소나타에서 '사랑이 끝났음'을 절감하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거기서 이어지는 대목이 앞서 일부 문장들을 인용했던 <3부 고장의 이름 ㅡ 이름>이다.

 

여기까지 읽고 보니, 문득 뒤늦게 붙잡고 읽기 시작한 프루스트의 엄청나게 긴 소설에 뜻밖에도 빨리 적응된 느낌이 든다. 전체 <7편 13권>으로 구성된 책 가운데 현재로서는 (민음사판 기준으로) <4편 8권>까지 번역되어 나와 있어서, 틈틈이 읽다 보면 8권까지는 충분히 재미있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거기까지 읽고 나서도 여전히 후속 번역판이 출간되지 않는다면 그땐 과연 어떤 느낌이 찾아들까. 오래도록 이어지다가 갑자기 뚝 멈춰버린 음악 같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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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0-13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뜬금없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지리산을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지리산을 오르는 길이 하나가 아니듯, 그리고 각자 길이 서로 다른 매력을 준다는 면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디에 초점을 두고 보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다르게 보이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 호흡으로 읽어야 할텐데 좀처럼 진득하게 한 작품만 파는 편이 아니라, 볼 때마다 새로워집니다. oren님께서는 그런 면에서 같은 시선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바라보실 수 있기에 oren님의 리뷰가 기대됩니다.^^:)

oren 2019-10-13 14:30   좋아요 2 | UR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오솔길을 선택하고, 그 길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물들과 상념들에 따라 콧노래를 부르거나, 또는 힘에 겨워 잠시 땀을 닦으며 바위 위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쉬어 가는 모습을 연상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독자들마다 무수히 다른 산행 경험과 다리의 감각과 삶의 다양한 기억들을 서로 다르게 지녔을 테니까요.

저는 뜻밖에도 산행을 하는 느낌과는 전혀 다르게, 마치 하나의 미술 작품이나 음악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요모조모 뜯어보면서 이렇게도 해석하거나 저렇게도 달리 해석하는 예술가적 취향에서 프루스트를 읽는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어차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이 ‘서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작가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전달하고자 애쓰는 ‘작가의 의식‘에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이 작품을 읽게 되면서 느끼게 된 안도감은, 10년 전이나 20년 전과는 달리, 생소한 작가나 작품들이나 이야기들이 과거보다 적잖이 줄어들어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 * *
프루스트 작품의 깊이를 이해하고 알아가면서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소설을 읽을 것인가? 사랑을 담아서 보여 주면 사랑스럽게, 시간과 장소에서 한계를 나타내는 이미지가 되면서도, 프루스트적인 삶의 축복을 준다면 질투에 사로잡혀 읽게 된다.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 읽기』 중에서

2019-10-13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3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3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3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3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4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리에 어그러지고 흉악함이 합법적으로 되고, 관청의 허가를 얻어서 도덕의 망토를 입는 꼴보다 더 괴악한 사태를 상상해 볼 수는 없는 일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부정(不正)의 극단적인 종류는 부정의가 정의로 간주되는 일이다.

 - 몽테뉴

 

 * * *

 

하나의 사안을 두고 정반대의 해석이나 판단을 내리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의 움직임을 보고도 오랫동안 정반대의 해석을 내렸다.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확신했지만 교황청이 엄금하는 지동설을 대놓고 함부로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먼저 『시금저울』이라는 책을 써서 교황에게 헌정했다. 기존의 천문학자들과 철학자들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담아서 '잘못된 우주관'을 깨트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황은 갈릴레오의 탁월한 글솜씨에 감탄했고, 자신감을 얻은 갈릴레오는 직접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여 '지동설 이론에 대한 금지'를 풀어 달라고 간청했다. 교황은 그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천동설과 지동설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책을 써도 좋다고 윤허했다. 그러나 지구가 자전이나 공전을 한다는 게 사실인 것처럼 보여서는 절대 안 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책이 『대화』였다. 책이 출판되자 독자들의 반응은 격렬하게 찬반으로 갈렸다. 숱한 적대자들이 그 책이 담고 있는 주장에 경악했고, 신앙심이 깊은 천문학자는 『대화』를 비판하는 책을 따로 저술할 정도였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마저 그 책을 읽고 격노했다.

 

교황이 특히 격노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황이 평소에 누누이 강조했던 말이 그 책 속의 등장 인물의 입을 통해 버젓이 발설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교황은 『대화』속에서 '천동설'을 믿는 어리석은 인물을 대표하고 있었던 셈이다. 문제가 된 표현은 이랬다.

 

"누구든 자신의 이상한 상상을 갖고 신의 전지전능하심을 제한하려 하는 것은 참람한 짓이다."

 

교황은 갈릴레오를 로마로 압송해 종교 재판에 회부하도록 명령했고, 종교 재판소는 갈릴레오에게 유죄 선고를 내렸으며, 갈릴레오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기나긴 참회 성사를 읽어 내려갔다. 1633년의 일이었다.

 

갈릴레오가 쓴 『대화』에는 꽤나 복잡한 수학 공식도 여럿 담겨 있지만 요즘 사람들이 읽어도 여전히 흥미로운 대화들도 많다. 그런 대화들 가운데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들은 사람들이 편견을 갖는 이유와 그런 편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까닭을 밝히는 대목들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화들이 그렇다.

 

살비아티

 

내가 오랜 시간 관찰해 본 결과, 어떤 사람들은 앞뒤가 뒤바뀌게 추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먼저 마음속으로 어떤 결론을 내려.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경우도 있고, 또는 그들이 전적으로 믿는 사람의 결론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어. 그 결론을 뼛속 깊이 새겨 놓아서, 도저히 제거할 수 없어.

 

그들이 내린 결론을 지지하는 논리는, 어떤 것이든 무조건 손뼉 치고 환영을 하지. 그들이 스스로 발견했든 남이 제기했든, 아무리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논리라도 말일세. 반면에 그들의 결론에 어긋나는 것이면, 아무리 정교하고 확실한 것일지라도, 경멸을 하고 화를 벌컥 내. 덤벼들지 않으면 다행이지. 어떤 사람들은 화가 나서 제정신을 잃어버리고, 상대방을 억눌러 침묵을 강요하려고 음모를 꾸미기를 서슴지 않아. 나는 이미 여러 번 당했네.

 

사그레도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런 사람들은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거나, 추론을 통해 결론을 확립하는 게 아니고, 이미 확고하게 내려놓은 결론에다 전제와 추론을 꿰어 맞추고 있어. 그러니 전제와 추론이 뒤틀리게 될 수밖에 없어. 그런 사람을 가까이해 봐야 득이 될 게 없네. 그들과 가까이 지내면, 불쾌하게 될 뿐만 아니라 위태롭게 될 수도 있어.(430∼431쪽)

 

 - 갈릴레오 갈릴레이, 『대화』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진 판단을 하게 마련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이다. 기울어진 어느 한 쪽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건 나중에야 판명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까닭이 꼭 진영 논리 때문만은 아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라는 책에서 아주 중요한 통찰을 하나 얻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구별의 욕망'을 지니고 있다고 간파한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어쨌든 도저히 나눌 수 없는 단계까지도 기어이 나누고 쪼개고 분할해 보려는 강렬한 본성을 지녔다는 말이다. 이 욕망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다른 책에서도 거듭 지적되었다. '지속'의 개념을 주창한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 단위인 1초와 2초 사이의 무한한 간극을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일 초의 공간

 

일 초의 공간 속에서 적색 빛ㅡ가장 긴 파장을 가지며 따라서 파동vibration의 빈도가 가장 적은 빛ㅡ은 400조(兆)의 잇따르는 파동들을 완성한다. 이 수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고자 하는가? 우리 의식이 그것을 세기 위해서는 또는 적어도 그것들의 순차성succession을 명시적으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그 파동들을 서로간에 충분히 벌려 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잇따름이 며칠, 몇 달 또는 몇 년을 점유하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그런데 엑스너Exner에 따르면, 우리가 의식하는 텅 빈 시간의 가장 짧은 간격은 천분의 이(2/1,000) 초와 동등하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가 그렇게 짧은 여러 간격들을 연이어 지각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무한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인정해 보자. 한마디로 아주 순간적인 400조의 파동들의 행렬을 목격하는 어떤 의식을 상상해 보자. 이 파동들은 단지 그것들을 구별하기 위해 필요한 2/1,000초에 의해서만 서로 분리된다. 단순 계산으로도 이 작용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2만 5000년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초 동안 우리에게 체험된 이 적색 빛의 감각이 우리 지속 속에서 가능한 가장 경제적인 시간으로 펼쳐진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우리 역사의 250세기 이상을 점유할 현상들의 잇따름에 상응한다. 그것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인가? 여기서 우리의 고유한 지속과 시간 일반을 구별해야만 한다. 우리 의식이 지각하는 지속, 우리의 지속 속에 주어진 한 간격은 제한된 수의 의식적 현상들만을 포함할 수 있다. 이 [지속의] 내용이 증가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무한히 가분적인 시간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지속인가? (343∼349쪽)

 

 -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제4장 이미지들의 한정과 고정에 관하여>

 

 

앙리 베르그송은 말한다. 채워지지 않을 구별의 욕망에 뒤틀려 의식은 실재를 상징으로 대체시키거나 또는 상징을 통해서만 실재를 본다고. 또한 한쪽 편을 들 때 가지는 무반성적 열정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통찰했다.

 

 

한쪽 편을 들 때 가지는 무반성적 열정

우리가 어떤 문제들에 대해 한쪽 편을 들 때 가지는 무반성적 열정은, 우리의 지성도 자신의 본능을 가진다는 것을 족히 증명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관념들에 공통되는 충동, 즉 그들의 상호 침투에 의해서라 아니라면, 어떻게 그러한 본능을 표상할 것인가? 우리가 가장 애착을 갖는 의견은 표현하기가 가장 어려운 의견이며, 우리가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이유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그 의견을 취하도록 결정케 한 이유일 경우는 드물다.127)

127) 우리가 어떤 의견을 취하게 된 진정한 이유는, 애착을 가진 것일수록 더욱더 우리 자아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그만큼 더 객관화하기 어렵고, 따라서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내부로 들어가면 갈수록 사물들은 엉켜서 불가분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로 표현하는 이유들은 대부분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간혹 <정곡을 찌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이유와 일치할 경우가 드물다.(171쪽)

 

 -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서서히 종점으로 다가가는 듯하지만 언제쯤 마무리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해 보이는 <조국 사태>는 시나브로 클라이막스를 저만치 앞두고 이런 저런 사소한 변주들을 울리는 단계로 접어든 듯한 느낌마저 받는다. 이런 국면에서도 거듭 깨달은 게 있다면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아주 쉽게 극명하게 엇갈릴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들에 대한 극단적으로 상반된 사람들의 반응들이 그런 증거들이다.

 

그런데, 이번의 <조국 사태>가 3년 전의 <최순실 사태>와 뚜렷이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사태의 핵심 당사자들이 갖고 있는 모종의 특별한 지위가 아닐까 싶다. <최순실 사태> 때에는 핵심 당사자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는데, <조국 사태>의 핵심 당사자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그들을 보호해 주는 강력한 우군들이 아주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집권 여당이 진실 규명을 위해 범죄 피의자들을 열심히 불러 수사하는 검찰을 향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집권 여당이 사태의 핵심 당사자를 대신해서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을 도리어 고발하고, 정권에 우호적인 진보단체의 간부가 '문제가 심각하다'고 내부 고발을 해도 도리어 같은 진영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는 모습들이 대표적이다. 물론 한 마디쯤 거들어도 수긍할 만한 인사들이 여태껏 꾹꾹 눌러참으며 호위무사 대열에 결단코 가담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대놓고 정권의 나팔수를 자임하며 온갖 억지와 궤변을 동원하여 불의를 정의로 둔갑시키려 애쓰는 아첨꾼들의 노력만큼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된다. 그들에게도 언젠가는 반대 진영을 향해 '묘한 진실'이 담긴 말을 자기도 모르게 크게 외치는 순간이 올 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호위무사를 자처하던 어느 의원이 반대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마침내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외친 다음 말처럼.

 

"내가 조국이야?"

 

누구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의견을 가질 수는 있다. 나에게 동조하는 숫자가 적다고 해서 그게 꼭 틀린 의견도 아니고, 반대로 그 숫자가 많다고 해서 그게 꼭 옳은 의견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의견이 부디 '부정의를 정의로 간주하는 최악의 행위'를 편드는 쪽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누구에게나 똑같다고 믿는다. <조국 사태>는 아무리 생각해 보더라도 '옳고 그름의 문제'이지 진영 싸움은 아니지 싶다. 싸움에 너무 매몰되어 부디 '부정의가 정의로 간주되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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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엘시 2019-10-11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국문제는 진실과 거짓의 문제지 정의와는 상관없는데 똥같은 얘기를 안똥같이 쓰려고 똥칠하고 있네

겨울호랑이 2019-10-11 09:47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조국 법무부 장관과 관련하여 지난 2달 가까운 시간 동안 일어난 여러 사건에 대해 개인적으로 oren님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사람은 저마다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며, 사건의 중요도와 선후 관계에 대해 다른 인식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각자 의견이 다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oren님 말씀처럼 다수가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의가 아니라는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이는 1930년대 당시 나치 독일이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그들이 정의의 편이 될 수 없다는 사실로 뒷받침되리라 생각됩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정의와 정의롭지 않음을 판단하기에는 불확실한 것이 현실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처럼 불확실한 현실에서 각자가 보다 객관적으로 사안을 보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여러 색깔들이 모여 이 시대의 정신을 만들어가는 것이겠지요... 어느 쪽이든 각자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이가 브레이크처럼 느껴지지만, 안전 운전을 위해서는 엑셀레이터 뿐 아니라 브레이크도 필요한 것임을 생각해 봅니다. 적어도 이 사안과 관련해서는 oren님과 저는 의견을 끝까지 달리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oren님과 마찬가지로 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자신은 틀려도 우리 사회는 꾸준히 더 나은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침 oren님 페이퍼를 읽고 두서없는 적은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19-10-11 12:00   좋아요 4 | URL
우리들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혼란스러운 상황들은 결국 ‘위대한 판관‘인 시간이 다 해결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렇지만 사태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기 전까지는 서로의 견해가 극명하게 엇갈릴 수도 있고, 그래서 결국에는 ‘엄정한 사법 절차‘에 따라 진실을 규명할 필요까지 생긴다고 봅니다.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은 사안을 두고, 그 누구든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며 서로 왈가왈부할 수도 있고, 상대편의 의견을 얼마든지 논박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온갖 억측과 억지와 궤변과 여론몰이식 선동과 세력 대결 식으로 흐르는 건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도 봅니다. 저와는 일정 부분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늘 관대한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 *

내 잘못을 보고 알려 주는 자에게

나는 확실하지 않은 일을 누구건 비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가는 아무도 비평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종류의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내 말은 우리의 판단력이 당장 문제에 오른 자를 공격해 본다고 해서, 그것이 내적 비판으로 우리 자신의 잘못의 책임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자기 속의 악덕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자가, 다른 사람의 악덕에는 그 근본이 덜 모질고 덜 악질이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없애 주려고 애쓰는 일은 자비로운 봉사이다.

그런데 내 잘못을 보고 알려 주는 자에게, 그도 역시 그 결함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격에 맞는 대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하여튼 알려 준 일은 진실하고 유익하다. 우리 코가 멀쩡하다면 우리 똥은 그것이 우리 것인 만큼 더 구려야 할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와 자기 아들과 다른 한 사람이 어떤 폭력이나 부정 행위로 죄를 지었을 경우, 자기가 맨 먼저 재판소에 가서 형 집행인의 손으로 자기 죄를 씻어 달라고 간청할 것이고, 둘째는 자기 아들을 내보내고, 마지막에 다른 사람을 내보내야 할 일이라고 하였다. 이 교훈은 그 어조가 매우 고매한 것으로서, 적어도 자기 양심이 하는 처벌에는 자기가 먼저 나서야 할 일이다.

- 몽테뉴
 

 

세상사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는 법이라네.

죄를 지은 도둑이 도리어 큰 소리를 치더라도

거기에 맞장구를 치는 사람들이 잔뜩 널려 있으니 말일세.

 

조국 사태의 본질이 어디에 있다고 보느뇨.

애시당초에 겉 다르고 속 다르고 흠결이 많은 인물을,

나랏님께서 너무 어여삐 여겨 높은 자리에 앉힌 게 아니었나.

 

어떤 사람인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겠냐만,

이번에 높으신 자리에 올라 앉은 그 분은,

그 정도가 단군 이래 최고봉이라 불릴 정도로 아주 특별하시다네.

 

남들은 그런 흠결 가운데 한두 가지만 있었어도,

임명은 고사하고 청문회에 앉는 일조차 없었으련만,

이번에 장관 되신 그 분은 가지간담회까지 거치는 특별 대우를 받는다네.

 

혹자는 말하더군,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 게 무어 하나 있냐고.

여태까지 나온 의혹만으로는 아직도 성에 안 차,

얼마나 더 새로운 의혹을 보태야만 기어이 만족한단 말인가.

 

내가 주워들은 의혹만 나열해도 열 가지는 족히 넘는다네.

고1짜리 여고생이 의학 논문의 제1저자로 등재된 게 첫째라네.

그 논문은 진작에 직권 취소되어 반박의 여지조차 사라졌다네.

 

두 번째는 발급한 적도 없다는 대학총장 표창장 위조 의혹이라네.

이 사실이 발각되자 의혹의 당사자 부부는 어쩔 줄을 몰랐다네.

위임해 준 걸로 하면 안 되냐고 아침부터 전화통만 부여 잡았지.

 

어르고 달래고 간청하고 읍소해도 아무 소용이 없자,

기어이 전직 장관과 여당 의원까지 나서서 거들었다네.

나중엔 표창장 실물을 제출하라 요청해도 못 찾겠다고 버텼다네.

 

세 번째는 딸 아이 허위 스펙을 꾸며낸 의혹이라네.

KIST에서도, 공주대에서도, 서울대에서도,

정상적으로 발급한 적은 없다는 데 받은 건 다 있다네.

 

네 번째는 장관 부인의 사모펀드 투자 의혹이라네.

블라인드 펀드여서 어디에 투자되는 지도 몰랐다는데,

코링크다, 블루펀드다, 돈 들어간 데 훤히 꿰고 있었다네.

 

WFM이라는 주식을 둘러싸곤 주가조작 의혹마저 있다네.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장외매입도 두 차례나 있었고,

5촌 조카가 횡령한 회삿돈을 받아 챙긴 의혹까지 있다네.

 

웅동 학원과 관련해서도 여러 의혹이 있다네.

위장 소송 의혹에다, 허위 공사 의혹이 덧보태지고,

위장 이혼 의혹에다, 채용 비리 의혹까지 겹쳐 있다네.

 

이만큼만 하더라도 의혹이 이미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아들의 서울대 인턴 증명서도 허위 발급이 의심된다네.

논문 써준 장교수와 대학 동기의 아들 인턴 경력도 챙겨줬다네.

 

검찰이 압수수색에 나서자 부인은 증거인멸 까지 시도했다네.

집에 있는 하드 디스크는 증권사 직원에게 뺴돌렸고,

동양대 컴퓨터는 통째로 빼돌려 직원 트렁크에 숨겼다네.

 

이러고도 장관 부부는 휴대전화 압색조차 없다네.

검찰이 자택으로 압수수색 나오자 '인륜의 문제'라고 하면서,

장관입네, 전화 바꿔 수사검사에게 신속처리 요청했다네.

 

이러고도 법무 장관은 '검찰 개혁'이 시급하다고 오늘도 외친다네.

그런 사람 임명한 나랏님도 '사법 절차'를 지켜보지 못하고,

범죄 수사에 여념 없는 총장한테 검찰 개혁만 거듭 재촉한다네.

 

이러니, 평검사까지 나서서 '비위 맞추지 그러셨어요.'라고,

나랏님의 은혜를 모른다고 '우리 윤총장님'을 나무라고,

힘 센 쪽에 붙지 못한 굳센 지조를 나무라는 세상이라네.

 

공직자의 제일덕목이 무엇이냐 묻는 사람 있다면,

첫 번째가 도덕성이요, 두 번째가 언행일치라 말하겠네.

이런 덕목이야말로 능력이나 자질보다 훨씬 중한 법이니.

 

그런데도 나랏님은 '의혹만으로는' 자기 사람 버릴 수 없다며

내로남불의 대명사로 등극한 인물을 장관으로 기어코 임명 했다네.

그러니 언행일치와 도덕성은 개돼지에게나 주라는 꼴.

 

세상이 어지러울 땐 거꾸로 도는 게 정상으로 보일 때도 있다네.

백성들이 화가 나도, 나랏님이 더 화가 많이 나셨는지 여부가 우선이고,

숱한 비리 파헤쳐온 '우리 윤총장님'이 벌써부터 적폐로 내몰린다네.

 

증거를 반출하는 행위는 검찰의 증거조작을 방지하는 행위가 되고,

자택을 압색당한 법무장관의 전화 통화는 인륜의 문제로 미화되고,

범죄 혐의가 있는 조국이 문제가 아니라, 수사하는 윤총장이 더 문제라고 떠든다네.

 

두고 보세, 두고 보세, 이런 일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오래 전에 사마천도 얘기했다네, 물극필반(極必反)이라고,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할 때가 오는 법이거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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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10-01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폭입니까, 열폭입니까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최성해 최종 학력이 고졸이라는데, 단국대 졸업 거짓말, 교육학 석사 거짓말, 교육학 박사 거짓말.... 최성해에 대해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사기열전에서 인용한 문장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oren 2019-10-01 16:03   좋아요 0 | URL
너무나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더더구나 어린 청년 학생들을 속여 왔고,
또한 교육자로서는 용인받기 어려운 ‘학력‘을 속여왔다니 더욱 충격적입니다만,
뒤늦게나마 거짓이 세상에 밝혀졌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전후사정이야 어찌됐든 보다 깨끗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보탬이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