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는 없다

변이의 원인은 심리적 질서에 속한다면 그 말의 의미를 매우 확장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여전히 노력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사실인즉 노력 자체를 파고들어가 더 심층적인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 생각으로 이러한 태도가 특히 요구되는 경우는 규칙적으로 유전되는 변이들의 원인에 도달하고자 할 때이다. 우리는 여기서 획득형질의 유전 가능성에 관한 세부 논쟁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역량에 속하지 않는 문제에서 명백한 입장을 취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는 없다. 이 문제만큼 오늘날 철학자들이 애매한 일반성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과학자들의 뒤를 따라 세부 실험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결과를 논의해야 할 의무를 느끼는 것도 없다.(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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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베르그송은 수학을 비롯한 여러 과학분야에 두루 뛰어난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가 쓴 네 권의 주저 가운데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1889년), 『물질과 기억』(1896)에 이어 세 번째로 발표한 책은『창조적 진화』(1907년)였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창조'와 '진화'라는 모순된 두 개념을 '생명의 도약'이라는 개념을 통해 '화해'시킨다. 어쨌든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다윈의『종의 기원』과 파브르의 『곤충기』를 비롯한 여러 수많은 생물학자들의 방대한 저서들은 물론이고 물리학과 심리학에 이르는 당대까지의 여러 자연과학적 지식을 방대한 범위에 걸쳐 깊이 연구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생명 진화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에게 창조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에서의 '무로부터의 창조'라기 보다는 '무기물로부터의 유기체의 발생으로 이어지는 창조'를 의미한다. 그는 끊임없이 지속하는 존재인 생명체의 '연속적 변화 속에 나타나는 질적 비약으로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힘을 '생명의 도약'에서 찾았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생명의 기원과 미래'를 진화론의 바탕 위에서 논의하는 책이다. 어쩌면 이 책은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통해 '과학자가 찾아낸 진화의 매커니즘'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 볼 수도 있겠다. 베르그송의 시도는 '다윈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용어'로는 결코 설명할 길이 없는 '생명의 진화에 대한 철학적 함의'를 살펴보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생명 진화의 존재론적 의미'를 밝히려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깊이 파고 들어간 '생명'에 관한 과학철학적 탐구는 필연적으로 철학적 인식론과 존재론으로까지 확장되며, 결국 이 책은 '인간과 생명, 그리고 우주를 연결하는 방대한 사색의 공간'으로까지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베르그송을 국제적 철학자로 만든 동시에 '데카르트 이후 서양철학의 무대를 프랑스로 되돌려 놓은' 것으로까지 평가받는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온갖 다양한 상을 휩쓸었던 타고난 우등생 베르그송에게 이 책은 노벨문학상까지 안겨주게 된다. 그는 과학과 철학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실력도 남달랐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철학책 속에는 그 어떤 뛰어난 문학작품 못지 않게 빛나는 명문장들을 여러 대목에서 마주치게 된다.

사실 여기까지 살펴본 이 책에 대해 개괄적인 언급은 내게 '특별한 관심'을 끄는 내용들에 접근하기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하다. 나의 관심은 '획득형질의 유전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특별한 관점'과 그것을 둘러싼 흥미로운 논박의 '시대별 전개'에 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친절한 다윈氏'가 지극히 조심스럽고도 겸손한 자세로 쓴『종의 기원』을 굳이 펼쳐보지 않더라도, 이미 '부모의 형질은 자손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전'에 관한 최초의 과학적 증명을 내놓은 '멘델의 유전법칙'도 알고 있으며, 심지어는 200년쯤 전에 최초로 제기되었던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設)'까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라마르크는 그 자신의 엄청난 노력에 힘입은 여러 선구적인 발견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생명의 진화' 이야기 속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바보같은 인물이 되고 말았을까. 그의 '놀라운 발견'에 따르면 여러모로 명백하게 보였던 (자꾸만 길어지고 싶어서 그렇게 길어진 게 분명해 보였던) '기린의 목'에 대해 그가 저질렀던 실수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알려진 바대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완전히 부정되었다. 그러나 라마르크의 주장이 이토록 늦은 시기에 종착역에 다다랐다는 사실은 또한 그만큼 많은 인물들로 하여금 '그 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를 끊임없이 자극해 왔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문제에 대한 '엄밀한 과학적 증명'과는 별도로, 피상적으로는 제법 그럴듯해 보였던 '획득형질의 유전'에 대한 라마르크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나섰던 인물들은 비단 생물학자들만이 아니었다는 점이 특별히 흥미롭다.

최초의 반박은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였던 영국인 에라스무스 다윈, 독일인 괴테, 프랑스인
조프루아 셍틸레르의 3인방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등장한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은 진화론의 종결자 찰스 다윈이었고, 다윈이 죽고 난 뒤로도 여러 인물들이 라마르크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애썼다. 이들 신라마르크주의자들을 제외하면, '획득형질의 유전'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드러낸 철학자는 앙리 베르그송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종의 기원』이 발표된 지 무려 5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 또다시『창조적 진화』를 통해 라마르크를 재등장시켰다. 그 당시까지는 라마르크의 주장이 완전하게 폐기된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진화'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려던 그에게도 결국 라마르크에 관한 언급을 제쳐두고는 자신의 논의를 제대로 진전시키기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생물학의 힘을 빌어 최종적인 '과학적 증명'에 다다른 '용불용설'은 내가 알기로는 이미 너무나 오래 전에 쇼펜하우어가 명쾌하게 그 '천재적 오류'를 지적한 바가 있었다. 그는 1836년에 출간한『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 그 문제에 관해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훌륭한 답안'을 도출해 냈다. 쇼펜하우어의 그 책은 다윈의『종의 기원』보다 무려 23년이나 앞서 나온 것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베르그송이 1907년에 발표한『창조적 진화』를 읽으면서 자꾸만 쇼펜하우어의 '주장'과 너무 닮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비록 베르그송이 그의 책 속에서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거명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결국 베르그송 때문에 예전에 읽었던 쇼펜하우어의 책『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다시 한번 더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놀랍게도 베르그송이 매우 엄밀한 과학적 탐구를 통해 이르렀던 여러 주장들이 고스란히 쇼펜하우어의 책 속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도 훨씬 더 풍성하고도 명쾌한 방식으로.

쇼펜하우어도 '과학적 지식'에 관해서라면 어느 철학자와 비교해 보더라도 별로 뒤질 게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의학도로 대학에 입학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 속의 많은 내용들은 고대의 자연철학은 물론이고 그 당시까지 밝혀낸 여러 과학적 연구성과들을 거의 빠짐없이 기술하는 것이었다. 그 책의 목차는 생리학과 병리학, 비교해부학, 식물생물학, 물리천문학, 언어학 등으로 나아가며 심지어 중국의 철학자였던 주자(朱子)에까지 이른다. 어쨌든 그는 '경험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형이상학의 본래적 핵심에 이르는 서술방식을 통해 자신의 형이상학이 자연과학과 공통의 경계지점을 갖는 유일한 것'임을 증명했다. 자신의 철학체계는 '실재성과 경험을 초월하여 허공에 떠다녔던 이전의 철학체계와 달리 현실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것'이자, 당시까지의 자연과학의 연구성과를 철학과 연결시킨 최초의 책이라 불린다.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칸트의 인간학도 프리스의 인간학도 이루지 못한 사유의 인간학적 전회가 이 책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한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주저인『의지와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간한 이후 '17년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 이 책 역시 안타깝게도 세상의 관심을 별로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미리부터 '자연과학을 통해 형이상학을 증명하려는' 자신의 시도는 '다음 시대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그는 '자연과학 분야의 전문가라 해도 자연과학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면 대중과 다를 바 없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연과학의 한계를 자주 지적하면서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은 고유의 탐구 과정에서 설명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적 고찰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말하면서, '자연과학은 이제부터 그 연구 대상을 형이상학에 넘겨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 속에 움직이며 작용하고 있는 모든 힘의 본질은 물리적인 힘을 넘어서는 의지'라는 것을 과학자들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의 결론에서 '모든 언어로 그렇게 활발하게 계발되는 자연과학 서적 중 그것을 알기 위해 개인이 시간, 기회, 인내를 충분히 갖는 부분은 매우 적다. 그러나 여기에 알려진 것도 이미, 내 철학의 시대가 접근한다는 확신을 나에게 준다. 자연과학이 해가 감에 따라 서서히 어떤 학설을 위한 믿을 만한 증인으로 등장하는 것을 나는 마음 깊이 기쁨을 느끼며 바라본다'고 말했다. 나로서도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라는 책에 부여된 '단순히 사변적 기초 위에서 형성된 이론이 아니라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등 당대의 자연과학적 지식에 충실하면서 과학과 철학의 근본적인 결합을 모색한 데 있다'는 평가가, 그보다 70년 전에 출간된 쇼펜하우어의 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기쁨을 느끼며'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하의 내용은 내가 '획득형질의 유전'에 관한 '라마르크의 오류'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본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그 책을 여러 번 읽다 보니 내가 특별히 공감했던 그의 여러 주장들을 일부러 제외하기가 어려웠고, 또 예전에 미리 필사해 놓은 부분들이 있어서 여기에 다시 옮기는 데에도 별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린의 목'이 왜 길어졌는지 궁금해서 시작한 내 얘기 또한 너무 길어졌다. 내 글은 '자꾸만 쓰다보니 길어진' 라마르크의 '기린의 목'을 닮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베르그송의 말대로 '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 없기 때문에 '길게 늘어난' 글임을 읽는 분들이 조금은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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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득형질의 유전

주지하다시피 라마르크는 생명체에게 기관의 용불용(用不用)에 의해 변화하는 능력과 이렇게 획득된 변이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부여한 바 있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학설에 오늘날에도 일정수의 생물학자들이 합류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신종을 산출하기에 이르는 변이는 배 자체에 내재하는 우연변이가 아닐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유용성에 대해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 결정된 특성들을 전개시키는 고유한 결정론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 조건에 적응하려는 생명체의 노력 자체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러한 노력은 외적 환경의 압력에 의해 기계적으로 야기된, 특정한 기관의 기계적 훈련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의식과 의지를 내포할 수도 있는데, 이 학설의 가장 탁월한 대표자의 한 사람인 미국의 자연학자 코프Cope는 노력을 바로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신라마르크주의는 비록 거기에 필연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화론의 현재적 형태들 전체에서 유일하게 진화과정의 내적이고 심리학적인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서로 독립적인 발달선상에서 동일한 복잡한 기관들의 형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진화론이기도 하다.(130쪽)

사람들이 말하는 획득형질은 종종 습관이거나 습관의 결과이다. 그리고 길들여진 습관의 기초에 자연적 성향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유전된 것이 개체의 soma이 획득한 습관인지 아니면 차라리 길들여진 습관에 앞서 있는 자연적 성향은 아닌지 항상 자문할 수가 있다. 이 성향은 개체가 자신 안에 보유하고 있는 germen에 내재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그것이 개체에, 즉 배에 이미 내재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두더지가 앞을 못 보게 된 것은 그것이 땅 밑에서 사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증명되지 않는다. 아마도 두더지가 지하 생활을 할 운명에 처한 것은 그것의 눈이 쇠약해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시력을 잃는 경향은 두더지 자체의 신체의 의해 획득된 것도 잃은 것도 없이 배에서 배로 전달될 것이다. 검술 사범의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더 빨리 탁월한 검술사가 되었다고 해서 부모의 습관이 아이에게 전달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증가하는 도상에 있는 어떤 자연적 성향들이 아버지를 낳은 배에서 아들을 낳은 배로 넘어가 원초적 약동의 결과로 도중에서 커지고 아버지가 했던 것과는 상관없이 아들에게 아버지의 것보다 더 큰 유연성을 확보해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의 점진적 길들이기에서 나오는 많은 예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되는 것이 길들여진 습관인지 아니면 오히려 어떤 자연적 성향이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이러한 성향이야말로 길들이기 위해 이러저러한 특수한 종이나 그것의 어떤 대표자들을 선택하게끔 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132∼134쪽)

* (역주) 획득형질의 유전이 완전히 부정된 것은 20세기 중반 무렵이다. 여기서 베르그손은 아직 논쟁 중인 당대의 모든 실험과 가설을 검토함으로써 획득형질의 유전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서고 있다.


  

 

일탈의 유전과 형질의 유전

그러므로 우리는 일탈(逸脫
)의 유전과 형질의 유전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새로운 형질을 획득하는 개체는 이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형태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보유한 배들 또는 종종 반쪽의 배들이 발달하면서 재생하였을 혀애로부터 일탈한다. 이 변형[일탈]으로부터 배를 변형시킬 수 있는 물질이 산출되지 않거나 영양의 공급이 전반적으로 변질되어 배의 요소들중 어떤 것들이 결핍되지 않는다면, 그 변형은 개체의 후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와 같은 일이 가장 자주 일어날 것이다. 반대로 변형이 어떤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아마 생식질에서 야기되는 화학적 변화를 매개로 해서일 것이다. 이 화학적 변화는 배가 발달시킬 유기체 안에 예외적으로 본래의 변형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것과 다른 것을 만들어 낼 기회가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많다. 이 후자의 경우 자식 유기체는 부모 유기체만큼이나 정상적 유형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겠지만, 그 일탈은 [부모 유기체와는] 상이하게 일어날 것이다. 자식 유기체에게 유전되는 것은 일탈이지 형질이 아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한 개체가 들인 습관들은 자기 자손에게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반향이 있을 때는 자손들에게 생겨난 변형은 본래의 변형과 아무 유사성도 갖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그럴 듯하게 보이는 가설이다. 어쨌든 반증이 있기까지는 그리고 뛰어난 한 생물학자가 요구하는 결정적 실험이 확립되지 않는 한 우리는 현재까지의 관찰 결과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138∼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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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포함한 모든 종은 다른 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나는 종(種)의 기원에 관한 학설 진보에 대해 그 개요를 쓰고자 한다. 최근까지 박물학자들이 종은 불변하는 것이며 저마다 각각 창조된 것으로 믿어왔다. 이 견해는 여러 학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왔다. 한편 몇몇 박물학자들은 종은 변화하는 것이고, 현존하는 생물의 종류는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부터 진정한 생식에 의해 태어난 자손이라 믿고 있었다. ······

라마르크는 이 문제에 대해 주목을 끄는 결론을 내린 최초의 사람이었다. 탁월한 박물학자로서 1801년 자신의 견해를 처음 발표했다. 그는 1809년 《동물철학》에서, 그 뒤 1815년에는 《무척추동물지》 서론에서 좀 더 폭넓게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들 저서에서 라마르크는 인류를 포함한 모든 종은 다른 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을 주장했다. 그는 최초로 생물계는 물론 무생물계에 있어서도 모든 변화는 법칙의 결과이며, 결코 기적적인 어떤 개입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라마르크가 종은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주로 종과 변종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어떤 유(類)에 속하는 여러 종류는 거의 완전한 단계성을 보여준다는 것, 또 사육하고 재배하는 생물의 상이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변화의 방법에 대해서도, 그는 어떤 것은 생활의 물리적 조건에, 어떤 것은 기존 종류의 교잡에, 그리고 대부분의 것은 쓰임과 쓰이지 않음, 즉 습성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연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훌륭한 적응-이를테면 나뭇가지에 난 연한 나뭇잎을 먹고 사는 기린의 긴 목-을 이 마지막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또한 전진적 발달의 법칙도 믿고 있었으며 모든 종류의 생물은 이와 같이 진보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에도 단순한 생물이 존재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러한 생물은 지금도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2

*2 나는 라마르크가 최초로 이 학설을 발표한 날짜를 이 문제에 관한 이시도르 조프루아 셍틸레르 씨의 탁월한 저서 《일반 박물학사》에서 알아냈다. 그의 저서에는 이 문제에 대한 뷔퐁의 결론도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나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 박사가 1794년에 간행한 《동물생태론》에서 라마르크의 견해 및 그의 의견이 틀린 근거를, 그보다 먼저 대폭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시도르 조프루아에 의하면 괴테(Goehte)도 1794년과 1795년에 써 두었으나, 훨씬 뒤에 이르기까지 간행하지 않았던 저작의 서론을 통해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열심히 주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예건대 소는 무엇 때문에 뿔을 사용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 뿔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박물학자에게 있어서 장래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적확하게 지적했다. 독일에서는 괴테, 영국에서는 다윈 박사, 프랑스에서는 조프루아 생틸레르가 1794∼95년에 종의 기원에 대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대체로 유사한 학설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난 매우 드문 예라고 할 수 있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종의 기원에 대한 학설 진보의 역사적 개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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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의 경우 멸종한 게 아니라 환경 변화에 따라 달라졌는지도 모른다

라마르크는 진보주의를 열렬히 옹호했다. 화석의 생물종이 지금도 살고 있는 생물과 유사하다는 것을 관찰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여기에 착안한 그는 어떤 종의 경우 멸종한 게 아니라 환경 변화에 따라 달라졌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생물은 아마 "우리가 식별하지 못할 만큼 크게 변했을 것"이다. 이것은 다윈 이전에 나온 적응의 개념이다. 라마르크는 지구의 나이가 무척 오래며, 생명 형태도 오랜 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변화했다고 확신했다. 또한 그는 인간이 이 진보의 최종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라마르크의 진화 관념은 두 가지다. 첫째, 그는 자연이 복합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믿었다. 둘째, 그는 생물체의 기관이 사용할수록 강해지고 강화되며, 이 획득형질은 후대에 전해진다고 믿었다. "획득된 변화는 양성에 공통적이며, 자식에게도 상속된다."

이런 요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중반 다윈의 자연선택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생존경쟁의 개념은 이미 1797년에 맬서스가 제기한 바 있다. 역사 속의 모든 종은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으며, 경쟁에서 뒤처지면 멸종했다. "최근에는 맬서스만이 아니라 다윈도 애덤 스미스와 같은 기타 정치경제학자들의 저작을 읽고 지혜를 얻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분화를 통한 분기의 개념은 분업을 통한 경제적 이득과 통한다."(914∼915쪽)



 

다윈은 다가올 폭풍을 기다리며 요크셔의 일클리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1859년에 출판된 『종의 기원』은 "생물학적 진화의 문제에 대해 전혀 새로운, 그 시대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접근 방식"을 소개했다. 다윈의 이론은 생물학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새로운 메커니즘을 설명했으며, 한 종이 다른 종을 낳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에른스트 마이어의 말을 빌리면 "단지 하나의 과학 이론을 대체한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와 자신에 대한 관념 자체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그의 이론은 오랫동안 많은 서양인들이 떠받들고 소중히 여겼던 믿음을 버리라고 요구했다." (917쪽)

다윈은 월리스의 전갈을 받은 이후 『종의 기원』을 출판하겠다는 각오를 굳혔으나 진화론의 관념을 처음 구상한 것은 1830년대 비글 호 항해를 마친 뒤부터였다. ······ 책이 발행된 1859년 11월 24일 첫날에 1250부가 날개 돋힌 듯이 팔려나갔다. 다윈은 다가올 폭풍을 기다리며 요크셔의 일클리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과연 금세 폭풍이 몰아쳤는데, 그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다. 에른스트 마이어는 다윈의 이론에서 여섯 가지 중요한 철학적 함의를 확인했다. ⑴ 정적인 세계를 진화하는 세계로 바꾸었다. ⑵ 창조설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⑶ 우주의 목적론을 논박했다. ⑷ 세계의 목적이 인간의 등장에 있다는 절대적 인간 중심주의를 무너뜨렸다. ······ (917∼9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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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질서와 무늬를 넣은 것은 지성이어야 한다는 사상은 완전히 잘못

우리는 우선 "세계는 인식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래서 또한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만들어진다"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세계의 '핵심'을 입증하려고 애쓴다. 자연에 질서와 무늬를 넣은 것은 지성이어야 한다는 자연신학적 사상은, 단순한 오성에 의해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진다 해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우리에게 동물적 자연에서만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전적으로 세계의 이차적이고 종속적인 원리로서, 즉 가장 늦은 근원의 산물로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성은 결코 세계 현존의 조건이었을 수 없으며 지성계(mundus intellegibilis)가 감성계(mundus sensibilis)에 선행할 수도 없다. 지성계는 감성계로부터만 재료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자연을 산출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지성을 산출했다." 그러나 물론 의지가 모든 것을 실현하고 그 각각에서 자신을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현상이라고 지칭하면서 도처에서 근원적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바로 그로 인해 목적론적인 모든 사실은 그 사실들이 발견되는 존재 자체의 의지로부터 해명된다. (94쪽∼95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자연의 절약 법칙'은 어떤 여분의 기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의 절약 법칙'은 어떤 여분의 기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이 법칙은, 다른 한편으로 어떤 동물에게도 지금까지 자신의 생활방식이 요구하는 기관이 부족하지 않았고, 모든 기관은 가장 다양한 기관들조차 조화를 이루며 전적으로 특별히 규정된 생활방식을, 그 동물의 노획물이 있는 영역을, 추적을, 승리를, 그 노획물을 분쇄하고 소화시키는 것을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두 합쳐져서, 동물이 자신의 생계를 위해 영위하려는 생활방식이 그 동물의 구조를 결정한 것이었으며 그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법칙은, 그 상황이 바로, 생활방식과 그 외적 조건에 대한 인식이 구조에 선행하고 그에 맞게 모든 동물이 형체를 얻기 전에 자신의 도구를 선택하는 식으로 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이는 마치 사냥꾼이 사냥 전에 자신의 모든 도구, 즉 산탄총, 산탄, 화약, 사냥 포대, 사냥칼, 의류를 그가 죽이려는 사냥감에 적합하게 고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엽총을 갖고 있으므로 야생 암퇘지를 쏘는 것이 아니라, 야생 암퇘지를 잡으러 나섰으므로 새총이 아니라 엽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러나, 그 증명을 보충하기 위해 다음의 사실이 부가된다. 즉 많은 동물에게서 그것들이 아직 성장하는 동안에는 의지의 지향이 그 지향에 필요한 신체 부분이 있기도 전에 표현되며, 따라서 그 신체 부분의 사용이 그 현존에 선행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린 숫염소, 숫양, 송아지는 아직 뿔을 갖기도 전에 맨머리로 들이받는다. 어린 수퇘지는 자신의 행위가 의도하는 결과에 상응할 어금니가 아직 나지 않았는데도 자신을 둘러싼 측면을 들이받는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침으로 무장한 곤충들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이 점을 표명했다. "그것들이 투지를 가지므로 무기를 갖는다"(『동물의 부분에 관하여(de partibus animalium)』, 제4권, 6장). 나아가 그는 (12장에서) 대체로 "자연은 그것의 활동을 위해 기관들을 만들지만 기관들로 인해 활동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 결과는, 모든 동물의 구조는 그 의지에 따른다는 것이다. (98쪽∼100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희귀한 오류에 빠진 라마르크

이 진리는 사려 깊은 동물학자와 동물해부학자에게 명백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그의 정신이 더 심오한 철학을 통해 정화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진리로 인해 희귀한 오류에 빠지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일은 잊히지 않는 일류 동물학자인 라마르크에게서 실제로 일어났다. 그는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이라는, 동물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 따른 구분을 발견함으로써 불멸의 공적을 세웠다. 말하자면 『동물 철학』제1권 7장과 『무척추동물의 자연사』제1권 서문에서 그는 모든 류(類), 모든 동물종의 형태, 고유한 무기, 외부로 작용하는 기관은 결코 이 종들의 원천에서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동물들의 위치와 환경의 성질을 불러일으킨 동물들의 의지 지향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반복적 노력과 그것에서 나오는 습관을 통해 시간의 과정에서 서서히, 그리고 계승되는 세대를 통해 비로소 발생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주장하고 상세히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물새와 포유류는 헤엄치면서 발가락을 따로따로 뻗음으로써 서서히 물갈퀴를 획득했고, 붉은 뇌조는 물 위를 걸어서 건넘으로써 긴 다리와 긴 목을 얻었다. 뿔 달린 가축은 쓸모 있는 치아 없이 머리로만 싸웠고 이 투지가 서서히 뿔을 만들었으므로 비로소 서서히 뿔을 얻었다. 달팽이는 처음에는 다른 연체동물과 같이 더듬이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 앞에 놓인 대상을 만져야 하는 필요성에서 그와 같은 것이 서서히 발생했다. 모든 고양이과 동물은 노획물을 갈기갈기 찢어야 하는 필요성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비로소 발톱을 획득했고, 이 발톱을 걸을 때 보호하는 동시에 그로 인해 방해받지 않아야 하는 필요성에서 발톱 집과 민첩성을 획득했다. 기린은 건조한 풀 없는 아프리카에서 높은 나무의 잎을 얻기 위해 앞다리와 목을 길게 뻗어서 20피트 높이의 놀라운 키를 획득했다. (100쪽∼10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매우 정확하고 심오한 이해를 통해 성립한 천재적인 오류

그리고 그렇게 라마르크는 많은 동물종을 동일한 원리에 따라 발생하게 하여 검토한다. 여기서 그는 사실상, 동물종이 그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무수한 세대의 과정에서 자신의 보존에 필수적인 기관을 서서히 산출하기 이전에 그 기관이 없어서 그동안 죽고 멸종했어야 한다는, 눈에 띄는 반론을 주목하지 않았다. 받아들여진 하나의 가설은 그렇게 통찰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의 이 가설은 자연에 대한 매우 정확하고 심오한 이해를 통해 성립한 천재적인 오류다. 이 오류는 그 안에 놓인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라마르크에게 여전히 명예로운 일이다. 그 안에 있는 참된 것은 자연 탐구자인 그에게 귀속된다. 그는 동물의 의지가 근원적인 것이며 그 조직체를 결정한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보았다. 반면에 틀린 것은 프랑스에서 형이상학의 낙후된 상황에 짐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원래 여전히 로크와 그의 나약한 추종자 콩디야크가 대세를 이루었고, 그래서 물체가 사물 자체이고 시간과 공간이 사물 자체의 성질이어서, 그곳에는 아직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안에 나타나는 모든 것의 관념성에 대한 그렇게 매우 중요한 위대한 학설이 들어가지 않았다. 따라서 라마르크는 존재에 대한 해석을 시간 안에서, 즉 계열을 통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02쪽∼103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라마르크가 이 생각을 끝까지 전개시킬 용기를 가졌더라면

독일에서 유래한 칸트의 깊은 영향은 프랑스 인들의 부조리한 극단적 원자론과 영국인들의 감동적인 자연신학적 고찰을 그렇게 했듯이 이런 종류의 오류들을 영원히 추방했다. 위대한 정신의 영향은, 허풍선이와 사기꾼을 추종하기 위해 그 정신을 떠날 수 없었던 국가에서조차 유익하고 영속적이다. 그러나 라마르크는 동물의 의지가 사물 자체로서 시간 밖에 놓이고 그런 의미에서 동물 자체보다 더 근원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결코 이를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결정적인 기관 없이, 또한 결정적인 지향도 없이 지각으로만 무장된 동물을 가장 먼저 설정한다. 이 지각이 그 동물에게 살아야 하는 상황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 인식으로부터 그 동물의 지향, 즉 그 동물의 의지가 발생하고, 이 의지로부터 최종적으로 그 동물의 기관이나 특정한 체현(體現, Korporisation)이, 게다가 세대의 도움으로 그래서 무한한 시간 안에서 발생한다. 라마르크가 이 생각을 끝까지 전개시킬 용기를 가졌더라면, 그는 어떤 형상도 기관도 갖지 않아야 할, 그리고 이제 기후와 지역적 상황 및 그에 대한 인식에 따라 모기에서 코끼리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무수한 동물 형태로 변화했을 어떤 원초동물을 가정했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이 원초동물이 생명에의 의지이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서 이 의지는 형이상학적인 것이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분명히 모든 동물종은 자신의 고유한 의지를 통해, 그러나 시간 속에 있는 물리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시간 밖에 있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그것이 살려고 하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형태와 조직을 결정했다. 의지는 인식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인식은 의지가 단순히 우연적이고 이차적인 것으로서, 심지어 제3의 것으로서 나타나기 전에 동물과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지가 최초의 것이고 본질 자체다. 의지의 현상(인식하는 지성과 그 형식인 공간과 시간에 있는 단순한 표상)은 이 특별한 상황에서 살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모든 기관들로 무장된 동물이다. 이 기관에는 지성 즉 인식 자체도 속한다. 그리고 이 지성은 나머지 것들과 같이 모든 동물의 생활방식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반면에 라마르크는 인식으로부터 비로소 의지가 형성되도록 했다. (103∼104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의지의 모든 특별한 노력은 형태의 특별한 변이 속에서 나타난다

동물의 무수한 형태를 고찰해보라. 그 모든 형태가 철두철미 그 동물이 의욕하는 것에 대한 모사일 뿐임을, 그 동물의 특성을 만드는 의지 지향의 가시적인 표현일 뿐임을 보라. 형태의 다양성은 특성들의 이 다양성에 대한 그림일 뿐이다. 싸움과 약탈에 주의를 기울이는 맹수들은 무서운 이빨과 발톱 그리고 강한 근육을 갖고 있다. 맹수들의 시력은, 특히 독수리나 콘도르 같이 현기증 나는 높이에서 자신의 노획물을 정찰해야 할 때 먼 곳까지 이른다. 싸움에서가 아니라 도피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의지를 갖는 겁 많은 동물들은 무기 대신 가볍고 빠른 다리와 예민한 청각을 갖고 나타난다. 그들 중 가장 겁 많은 토끼에게서 청각은 심지어 귀가 눈에 띄게 늘어날 것을 요구했다. 내부는 외부에 상응한다. 육식동물은 짦은 내장을,  초식동물은 더 긴 동화과정을 위해 긴 내장을 갖는다. 강한 호흡과 빠른 혈액 순환은 적합한 기관을 통해 표현되어, 더 큰 근력과 자극성의 필연적 조건으로서 제공되면, 어디에서도 모순은 가능하지 않다. 의지의 모든 특별한 노력은 형태의 특별한 변이 속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노획물이 있는 곳이 추적자의 형태를 결정했다. 노획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활동 영역, 먼 은신처, 밤이거나 어두운 곳에 들어가 있다면, 추적자는 그곳에 맞는 형태를 갖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생명에의 의지가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그 안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만큼 기이한 일은 없을 것이다.(104쪽∼105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솔잣새, 붉은 뇌조, 개미귀신, 펠레컨, 부엉이, 큰 메기, 전기뱀장어, 전기메기, 맵시벌

전나무 열매의 표피에서 정충(精蟲)을 끄집어내기 위해 솔잣새(Loxia curvirostra)는 비정상적 형태의 먹이 섭취 기관을 갖고 있다. 습지에서 파충류를 찾기 위해 붉은 뇌조는 너무 긴 다리, 너무 긴 목, 너무 긴 부리를 갖는 가장 놀라운 형태로 나타난다. 흰개미를 파내기 위해 네 발의 긴 개미귀신은 짧은 다리와 강한 발톱, 그리고 실 모양의 끈적끈적한 혀를 지닌, 길고 좁고 치아 없는 주둥이를 갖고 나타난다. 펠리컨은 상당히 많은 물고기를 담기 위해 기괴한 주머니를 갖고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부엉이는 밤에 자는 것들을 기습하려고 어둠 속에서 보기 위해 굉장히 큰 동공을 가지며, 날 때 나는 소리가 자는 것들을 깨우지 않도록 매우 부드러운 깃털을 갖고 날아간다. 큰 메기, 전기뱀장어, 전기메기는 노획물에 도달할 수 있기 전에 그것을 마비시키기 위해, 또한 자신들의 추적자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 완벽한 전기기구까지 갖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 있는 것이 숨 쉬는 곳에는 그것을 삼키기 위해 다른 것이 동시에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예측되고 계산되었듯이, 심지어 가장 상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다른 것을 제거하려고 든다. 예를 들어 곤충 중에서 맵시벌은 나중에 자신의 알이 먹잇감을 갖도록 특정한 나비 유충이나 그에 유사한 애벌레의 몸에 침으로 구멍을 뚫고 알을 낳는다. 자유롭게 기어 돌아다니는 애벌레에 의존하는 맵시벌은 1/8인치쯤 되는 매우 짧은 침을 갖고 있다. 반면에 애벌레를 고목 깊숙이 숨겨두는 벌에 의존하는 맵시벌은 고목 안에 닿기 위해 2인치 길이의 침을 갖는다. 전나무 열매에 사는 애벌레에 알을 낳는 맵시벌도 거의 마찬가지로 긴 침을 갖는다. 이로써 그 맵시벌들은 애벌레에까지 파고들어서 찌른 후 그 상처에 알을 둔다. 그 알에서 나온 것이 나중에 이 애벌레를 갉아먹는다(커비와 스펜스, 『곤충학 입문』). (105쪽∼107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고슴도치, 아르마딜로, 천산갑, 거북이, 오징어, 나무늘보, 청개구리, 벼룩

마찬가지로 추적당하는 것에게서도 그 적을 피하려는 의지가 방어적인 장치에서 명백히 표현된다. 고슴도치와 호저(豪猪)는 빽빽한 창을 공중에 내민다. 아르마딜로, 천산갑(穿山甲), 거북이는 이빨도 부리도 발톱도 접근할 수 없도록 머리에서 발까지 털로 뒤덮여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작은 것들 중에는 가재의 모든 종이 그렇다. 다른 것들은 물리적 저항을 통해 방어하지 않고 추적자를 속임으로써 방어한다. 그래서 오징어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주변에 퍼뜨릴 먹구름을 만드는 재료를 지니고 있다. 나무늘보는 자신을 이끼 낀 큰 가지로, 청개구리는 자신을 나뭇잎으로 보이게 하는 것처럼 무수한 곤충들이 자신들을 그 거주지로 보이게 한다. 흑인의 머릿니는 까맣다. 백인의 벼룩도 까맣지만, 그것은 유례없이 강력한 장치인 자신의 폭넓고 불규칙적인 뛰기를 믿는다. 그러나 이 모든 준비들에서 예견되는 것을 우리는 예술적 충동에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어린 거미와 거미귀신은 자신들이 처음으로 덫을 놓은 노획물을 아직 알지 못한다. 그리고 방어하는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피에르 당드레 라트라일에 따르면, 누에나방은 전갈파리를 침으로 죽인다. 누에나방을 먹지도 않고 그것으로부터 공격받지도 않지만 그것이 나중에 자신의 둥지에 알을 낳아서 자신의 알이 크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에나방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예견에서 시간의 관념성이 다시 입증된다. 이것은 대체로 물자체로서의 의지가 언급되는 즉시 언제나 나타난다. 여기서 다루어진 관점에서는 다른 많은 관점에서와 같이 동물의 예술적 충동과 생리학적 기능들이 설명을 위해서 서로 도움이 된다. 이 둘에서 의지는 인식 없이 작용하기 때문이다.(107쪽∼108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유기체는 그야말로 가시적으로 된 의지일 뿐

이 기회에 누군가, 자연이 곤충에게도 최소한 초의 불꽃으로 돌진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오성을 나누어주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변은 이렇다. 물론 그럴 것이다. 다만 인간이 초를 만들고 불을 붙이리라는 것을 자연은 알지 못한다. "자연은 어떤 것도 헛되이 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직 비자연적 환경에 대해 곤충의 오성은 충분하지 않는 것이다.(111쪽)

유기체는 그야말로 가시적으로 된 의지일 뿐이다. 절대적으로 최초의 것인 의지로 언제나 모든 것이 되돌아간다. 의지의 필요와 목적이 모든 현상에서 수단을 위한 척도를 주며, 이 수단들은 서로 일치해야 한다.(112쪽)

인간에게서 다른 동물들을 매우 능가하는 오성은 부가되는 이성(비직관적 표상 능력, 즉 개념 능력인 반성과 사유능력)에 의해 지원된다. 그렇지만 그 지원은 오직, 한편으로는 동물의 욕구를 훨씬 넘어서고 무한히 증가하는 인간의 욕구에 비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 무기와 자연적 엄호의 전적인 결여와 크기가 같은 원숭이의 근력보다 뒤지는, 비교적 약한 인간의 근력에 비례한다. 동시에 그 지원은 도피에서 인간의 무능함에 비례한다. 인간은 달리기에서 모든 네 발의 포유동물보다 뒤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지원은 또한 인간의 느린 번식, 긴 유아기, 긴 수명에 비례한다. 이것들이 개별자의 확실한 보존을 요구한 것이다. 이 모든 큰 요구들은 지적 능력을 통해 충족되어야 했다. 그래서 이 능력이 인간에게 그렇게 뛰어난 것이다. (112∼113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경탄할 만한 합목적성과 조화

따라서 우리는, 이 해부학적 요소가 한편으로는 동물의 원형들이 다른 원형에서 불러일으켜졌으며, 따라서 종족 전체의 기본 유형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해부학적 요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연적 자연성질"로서 이해하는 그것이다. 그리고 그 요소 형태의 변화가능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목적에 맞는 자연성질"이라고 부르며, 이로부터 뿔 달린 가축에게서 위 앞니의 재료가 뿔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 설명은 매우 정확하다. 왜냐하면 낙타와 사향노루처럼 뿔 없는 반추동물만이 뿔 있는 것들에서는 없는 위 앞니를 갖기 때문이다.  여기 골격에서 설명된, 동물의 목적과 외적 생활 관계들에 대한 그 구조의 정확한 적합성뿐 아니라 동물의 내부 작용에 있는 경탄할 만한 합목적성과 조화는 다른 어떤 설명이나 전제를 통해서보다, 동물의 신체는 표상으로서 직관된, 따라서 뇌에 있는 공간, 시간, 인과성의 형식에서 직관된 자신의 의지 자체일 뿐이라는, 그래서 의지의 단순한 가시성, 객체성일 뿐이라는, 내가 이미 다른 곳에서 확인한 진리를 통해서 불분명할지라도 가장 잘 이해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가정 아래에서는 신체에 종속되었거나 신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최종 목적을 위해, 즉 그 동물의 생명을 위해 공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체 안에서는 어떤 불필요한 것, 과도한 것, 결여된 것, 목적에 모순되는 것, 불충분한 것, 그 방식이 불완전한 것도 발견될 수 없고, 필요한 모든 것은 그 필요한 만큼 정확히 그곳에 있어야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여기서는 장인, 작품, 재료가 하나이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유기체는 극도로 완벽한 걸작이다. 여기서는 의지가 먼저 의도를 갖고 목적을 인식하고 그 다음에 수단을 목적에 맞추고 물질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의욕이 직접적으로 목적이고 또한 직접적으로 성취다. 그래서 먼저 억제되어야 할 이질적인 어떤 수단도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의욕, 행위, 성취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유기체는 기적으로서 거기에 서 있으며 인식의 등잔 불빛에서 꾸며진 인간의 작품과 비교될 수 없다.(116∼117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언제나 다시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

자연산물에서 물질은 형식의 단순한 가시성이므로, 우리는 또한 형식이 물질의 단순한 소산으로서 나타나는 것을, 즉 물질의 내부로부터 결정화 속에서, 식물적·동물적 "자연발생"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을 경험적으로 목격한다. 이 자연발생은 기생 동식물에게서도 의심될 수 없다. 이 이유로부터 또한 추측되는 것은, 어떤 곳에서도, 어떤 행성이나 위성에서도 물질이 끝없는 정지 상태에 빠져 있지 않고 물질에 내재하는 힘(즉 의지, 물질은 의지의 단순한 가시성)은 시작된 휴식을 언제나 다시 끝내고, 기계적·물리적·화학적·유기적 힘으로서 그 놀이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 언제나 다시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다. 그 힘은 언제나 오직 계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120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

나의 학설로부터 당연히,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자연, 즉 결코 속일 수 없고 천재처럼 순진한 자연은 자신을 꾸밈없이 표명한다. 모든 존재는 자신과 정확히 같은 다른 어떤 것에 생명의 불을 점화할 뿐이며, 그 다음에 그것의 재료는 밖에서, 형식과 운동은 자신으로부터 조달하여 우리 눈앞에서 자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장과 발전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경험적으로도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작품으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다.(12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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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1-09 0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대단하시어요.
덕에 저도 철학책 좀 읽으려구요.
언제나 핑계는 시간...
오래오래 알라딘을 지켜서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 해주시길...
자세한 건 내일 다시 와서 읽을게요. 밤이 깊어서리...

oren 2013-01-09 13:18   좋아요 0 | URL
동지섣달 차디찬 새벽에 귀한 발걸음 해주시고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드려요~
저도 딱딱한 철학책은 좀 집어치우고, 아늑하고 포근하거나 혹은 따사로운 봄햇살 같은 문학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요. 그런데 철학책에는 히말라야의 빙벽을 오르는 듯 사방이 낯설고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듯해도 그걸 뚫고 기어오르는 희열 같은 걸 느낄 수도 있어서 그 나름의 독특한 매력도 있답니다. ㅎㅎ
* * *
"참된 등산가는 하나의 방랑자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일찌기 인류가 도달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 일찌기 인간의 손가락이 닿지 않은 바위를 붙잡거나, 대지가 혼돈에서 일어난 이래 안개와 눈사태에 그 음산한 그림자를 비쳐온 얼음으로 가득 찬 걸리를 깎아 올라가는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등산가는 새로운 등반을 시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마찬가지로 그 투쟁의 재미와 즐거움에 기쁨을 느낀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온 혈관에 욱신거리는 피를 흐르게 하여 모든 냉소의 자국을 파괴하고 비관적인 철학의 뿌리 그 자체를 강타한다."

"인생의 근심걱정은 금권주의 및 사회의 본질적 속악함과 함께 아득히 저 아래쪽에 남는다. 위쪽에서 우리는 맑은 공기와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신들과 함께 걷고, 인간은 서로를 알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안다."

-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1855~1895)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中에서


페크pek0501 2013-01-10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서재를 다니다 보면 각각 서재 님들이 즐겨 보는 책이 다 다르다는 것에 주목하게 되어요.
제가 요즘 심리서적이나 에세이를 즐겨 보는 것처럼 오렌 님도 같은 계통의 책들을 즐겨 보시는 것 같아요.
저도 한땐 철학 책만 집중해서 읽은 적이 있긴 해요. 철학을 모르면 문학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에요.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 동서문화사 - 가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좋더군요. 우선 이 책부터 읽어야겠단 생각이,
님의 페이퍼를 보면서 하게 됩니다. 덕분이 좋은 글 많이 구경?하고 갑니다. ^^

oren 2013-01-11 13:25   좋아요 0 | URL
정말 다양한 분들이 온갖 종류의 책들을 읽고 또 그 내용들과 감상들을 옮겨 놓는 공간 있다는 것 때문에 책 블로그는 그 수명이 오래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는 이름만 들어본 책인데, 어느 분의 서평글을 보니 "이 책을 읽고 철학도로 빠진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다고들 합니다. 또한 이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뀌어졌다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라고 되어 있네요. 저도 기회가 되면 꼭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책 추천 감사드려요~